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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2.02 아시카가 요시아키 2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79 8 28일 병사 61

1573 ~ 1597.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15대 쇼우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옹립되어 쇼우군이되었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져 병사를 일으키지만 패하여 무로마치 바쿠후는 기능이 정지. 모우리(毛利)()를 의지하여 쿄우토(京都) 복귀를 노리지만 실패하였다. 후에 출가하여 쇼우산(昌山)이란 이름을 칭했다.









칸파쿠()와 쇼우군()이라는 위치


 [토요토미 칸파쿠(豊臣 )]의 위광을 쿄우토(京都) 구석구석까지 알린 - 쥬라쿠테이(聚落第)로 천황을 초대하여 연 잔치의 열기가 여전히 식지 않은 1588 9 10일.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오오사카(大坂) 저택에 있었다. 하지만 오전 10시가 되기도 전에 실외의 마당까지 내려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서국(西)에서 으뜸가는 거대 다이묘우(大大名) 7월 하순에 첫 상경(上京)하여 한달 정도 쿄우()에서의 생활을 즐기다 돌아가는 길에 히데이에에게 초대 받아 같은 저택에 머물고 있던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도 곧바로 문 밖의 다리 위에까지 나가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아닌 오전 10시 즈음에 히데이에의 저택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칸파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요시아키라고 하면 종삼위(從三位)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으로 무문(武門)의 최고 권위(權威)였다. 이 해의 정월 13일에 모우리(毛利)()의 영국(領國)에서 쿄우()로 돌아와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쇼우산(昌山)]이라는 도호(道號) [도우케이(道慶)]이라는 법명을 쓰는 것과 동시에 산구우(三宮)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쥰산구우(准三宮))=쥬고우(准后)[각주:1].

 그런 요시아키가 히데요시가 방문하는 자리에 예를 갖추고 맞이한 것이다.


 어떠한 심경이었을까?

 요시아키와 히데요시는 1568년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이 되기 위한 상경전(上京戰) 때 부터의 관계였지만, 그것은 쇼우군과 오다 가문(織田)의 일개 부하 장수로서의 히데요시 - 즉 주군(主君)과 배신(陪臣[각주:2])이라는 주종(主從)의 관계에서, 칸파쿠와 쇼우군이라는 동급으로 변하기는 했어도 주종의 관계가 뒤바뀐 것은 아니었던 만큼 주위의 시선은 아무래도 특이하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즈음 요시아키(쇼우산)는 오오사카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한편 예전 머물던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에 따로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히데요시의 방문 같은 행사에 행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 다이고(醍醐)() 산보우(三宝)()의 몬제키(門跡[각주:3])인 기엔(義演)에 따르면, 정월에 요시아키가 출가할 때 히데요시에게서 1만석을 하사 받아 오오사카에 저택을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 무문(武門)의 상징적인 존재로써 토요토미 칸파쿠 정권의 권위를 세우는데 공헌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칸파쿠 히데요시의 방문에 따라 예를 올리는 모습도 그런 역할의 일환으로 자존심 덩어리와 같은 요시아키가 기분 나빠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히데요시와 그의 정권에 권위를 세워주는데 적극적으로 공헌하고 있다는 자부심 쪽이 강했음이 틀림 없다.


너무도서글픈 죽음


 확실히 오오사카에 저택을 가지면서부터 요시아키는 당시 토요토미 정권 최대의 군사, 외교적 안건이었던 대륙 침공 계획 등에 남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1591 8월.

 쇼우코쿠()()의 로쿠온(鹿苑)()의 전 원주(院主)인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가 히데요시에게서 [카라이리(唐入[각주:4])]에 따른 수행을 명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 이 다음 달인 9 18 마키노시마(槇島)의 저택을 방문해 온 로쿠온(鹿苑)()의 현() 원주(院主) 유우세츠 즈이호(有節 瑞保)에게 전해들은 요시아키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鹿苑日錄].

 이 이야기를 들은 요시아키가 갑자기 [속세의 명예심을 드러내 종군(從軍)할 결심](오쿠노 타카히로(野 高廣)가 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을 하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이미 예정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다음해인 1592년 정월 5일에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진 명령을 내린 히데요시가 3 26일을 기해서 쿄우토(京都)를 출발함에 따라 히데요시 본진의 제 2진으로 요시아키도 종군하게 된 것이다.


 이 달(3) 20일에 입경(入京)한 요시아키는 다음 날 로쿠온(鹿苑)()의 남문(南門) 밖에 깃발을 휘날리며 로쿠온원()에 들어가 이곳을 주둔지로 삼는 한편 출진을 준비하였다.

 26일 출진식에서 요시아키는 금칠을 한 보로(母衣[각주:5])를 등에 멘 차림을 하였고, 금문(禁門)을 통과할 때에는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더욱 눈에 뛰었을 것이다.

 총대장인 히데요시는 제 5진이었다. 환송에 나선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天皇)의 좌석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예()를 올렸다. 셋케([각주:6]), 신노우케(親王家[각주:7]), 몬제키(門跡)들 전부 서서 구경하여 평민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히데요시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에 도착한 것은 4 25일로 요시아키는 35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성의 외곽에 포진하였다.

 오오사카로 되돌아 온 것은 히데요시가 오오사카로 되돌아 옴에 따른 1593 8월 하순을 지나서라고 보여지는데, 이 원정의 장식물로써의 역할이 끝났는지 그 후의 모습은 확실치 않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597 8 28일.

 요시아키는 종기를 원인으로 하는 병때문에 20일 가까운 투병 끝에 죽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지금까지 쇼우군이라는 자존심으로 일관해 온 생전과는 달리, 히데요시에게 장례를 주관하도록 명령받은 죠우타이(承兌)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8]) 토쿠젠인(德善院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에게 관과 화장(火葬)하는 곳을 만들기 위해서 목수 두 명을 신청하여, 한 명밖에 허가 받지 못할 정도로 서글펐다.

  1. 쥬고우(准后)라는 것은 태황태후(太皇太后),태황후(皇太后),황후(皇后)의 지위에 준하는 위치나 봉록을 받는 것을 이른다. 요시아키의 선조 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満)가 무가(武家)로는 처음 받은 이후 무로마치 쇼우군가(家)는 이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부하의 부하를 이른다. [본문으로]
  3. 황족이나 귀족의 자제가 뒤를 잇는 절 또는 사람을 말함. [본문으로]
  4. 나중에 임진왜란이 된다. [본문으로]
  5. 등에 메는 풍선과 같이 생긴 화살막이. [본문으로]
  6. 칸파쿠를 낼 수 있는 다섯 가문. [본문으로]
  7. 텐노우(天皇)와 핏줄이 이어진 가문. [본문으로]
  8. 쿄우토(京都)의 치안과 행정을 맡은 직책.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