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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노부카츠'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8.02.10 오다 노부나가 6
  2. 2007.06.22 츠츠이 쥰케이 - 격심한 통증과 싸우며 전쟁터에서 보낸 말년 11
  3. 2006.08.18 키타바타케 토모노리 2
  4. 2006.05.12 오다 나가마스
  5. 2006.05.09 오다 노부카츠 4

오다 노부나가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8. 2. 10. 08:14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82 6 2자인(自刃) 49.

1534 ~ 1582.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주(城主).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우()()를 멸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입경(入京).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지만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해 자해(自害)







최후의 상경(上京)


 1582 5 29.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安土)()을 출발하여 오래간만에 상경하였다. 이보다 앞선 1 28일에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중지된 적도 있기에 작년 3월 이래 실로 1 2개월 만의 상경이 되었다.

 2년 전. 이시야마(石山) 혼간지(本願寺)를 굴복시킴으로써 더 이상 키나이()에서 노부나가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게 되었다. 안도감(安堵感)때문인지 왕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을 이 즈음의 노부나가에게서는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유흥(遊興)적인 면을 [신장공기(信長公記)]의 기사에 빈번히 볼 수 있다.


 1581 2월에 상경한 노부나가는 선교사에게서 데려온 흑인[각주:1]을 선물 받았고 그 직후에는 궁궐의 동쪽 마장(馬場)에서 텐노우(天皇)나 쿠게(公家)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오다 군단의 열병식(閱兵式)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조로에(馬揃)를 행하였다.


 같은 해 9.

 차남(次男) 노부카츠(信雄)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가(伊賀) 정벌을 명하였고, 또한 1582 3월에는 첫째인 노부타다(信忠)를 총대장에 임명하여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정벌을 명하였지만, 노부나가 자신은 직접적으로 작전에 관여하는 일 없이 평정 후에 현지 검분(檢分) 만을 했을 뿐으로, 그 모습은 전적(戰跡地)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이(甲斐) 원정에서 귀국했던 노부나가에게 조정(朝廷)에서 칙사가 파견되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각주:2])추임(推任)한다는 뜻이 전해졌지만 노부나가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우(本能)()의 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5 29.

 오후 12시 즈음부터 내린 비 속에서 아와타(粟田口[각주:3]) 쪽을 통해서 시죠우() 니시노토우인(西洞院)에 있는 혼노우(本能)()에 도착했다. 아와타구치에는 미리 노부나가 일행을 마중하려는 쿠게(公家)의 무리들이 다수 모여있었지만 마중할 필요는 없다는 고지를 모리 란호우시(森 乱法師=란마루(蘭丸)) 나리토시(成利)가 와서 전했기에 쿠게(公家)들도 집들로 돌아간 후 였고 또한 함께 한 수하들도 [코쇼우(小姓) 2~30] 정도였기 때문에 상경 모습은 조용했다. 상경한 시각은 오후 2시 즈음이라고도 오후 4시 즈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건 이것이 마지막 상경이 될 것이라고 노부나가 자신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경의 주요한 목적은 츄우고쿠(), 시코쿠() 정벌이라는 양 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이즈미(和泉)의 사카이()에서 철갑선(鐵甲船)을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6 4일에는 쿄우토(京都)를 출발할 예정으로 있었기에 5일간 쿄우토에 있을 예정이었다. 혼노우(本能)()의 변은 그 재경(在京) 3일째에 일어난 것이다.


상경 축하의 나날


 그렇다면 그 3일간의 모습을 살펴보자.

 5 29일 상경했던 노부나가는 아와타구치에서 첫째 아들 노부타다(信忠)의 마중을 받아 함께 혼노우(本能)()로 왔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인 21.

 노부타다는 토오토우미(遠江)의 하마마츠(浜松)에서 아즈치(安土)로 올라 와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함께 쿄우토(京都)에 와 있었다. 하지만 27일이 되어서 노부나가가 갑자기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자, 구경하러 오오사카(大坂), 사카이()로 내려가는 이에야스 일행과 헤어져 쿄우토 니죠우()에 있는 노부타다 전용 숙소인 묘우가쿠()()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재경 이틀째인 6 1.

 혼노우(本能)()에는 텐노우(天皇)와 사네히토 신노우(誠仁 親王)가 파견한 곤다이나곤(大納言) 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 ), 곤츄우나곤(中納言) 카쥬우지 하레토요(修寺 晴豊)가 상경을 축하하는 칙사로서 방문했다. 또한 총 40명에 이르는 쿠게(公家)들을 시작으로 승려나 상인 등 다수의 사람들이 노부나가 상경을 축하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쿠게들과의 대면은 수 시간에 이르렀고 노부나가는 환담 중에 칸토()를 평정했을 때의 이야기와 삼일 후인 4일에 서쪽으로 출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공략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다회()가 행해져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수 많은 명물(名物) 다기(茶器)피로(披露)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밤이 되자 노부타다가 방문하여, 쇼시다이(所司代[각주:4])인 무라이 사다카츠(村井 貞勝)나 코쇼우(小姓)들과 환담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밤이 깊어져 노부타다가 묘우가쿠사()로 돌아가자 노부나가도 마지막 침상에 들었다.


 노부나가가 취침한 바로 그 즈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 3000의 군세를 이끌고 탄바(丹波) 카메야마(亀山)성(城)을 출발하여 한밤중에 쿄우토(京都)를 향해서 군세를 진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 2일 밤이 새기 전에 카츠라가(桂川) 천을 건너 쿄우토(京都)에 들어오기 직전, 미츠히데는 그제서야 혼노우(本能)()를 습격한다는 것을 전군에 전하였고 여명(黎明)에 이르러 혼노우사()를 포위하였다.


 6 2일 여명.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에게 습격 받았을 때, 노부나가는 아랫 것들의 싸움으로 인한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함성과 철포(鉄砲)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모반(謀反)임을 깨달아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싸웠지만 물량에는 당해내지 못하여 팔꿈치를 창에 찔리자 물러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깊숙이 들어가 침실 입구를 닫고 결국 배를 갈라 죽었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할복했다고 하는 사람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중략)…… 머리카락 한 올 남기는 일 없이 재로 변했다]

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 처음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계속 씻겨도 광택만 더할 뿐 검은 색이 없어지지 않자 그제서야 믿고서는 맘에 들어하며 '야스케(彌介)'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때 싸우다 잡혔지만 미츠히데는 '사람도 아닌 미물이 뭐 알겠냐'는 식의 말을 하며 풀어 주었고 이후 소식은 불명. [본문으로]
  2. 바쿠후(幕府)를 열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쿄우토(京都)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입구 중 하나. 요즘으로 치면 톨게이트와 같다고 할까.. [본문으로]
  4. 이 때는 쿄우토(京都)의 행정, 치안, 여러 집단(조정, 상인, 절 등)과의 교섭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8 8 11일 병사 35

1549~1584.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성주. 부친인 쥰쇼우[順昭]가 죽자 2살에 가독을 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대립하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도와 마츠나가를 멸망시켜 야마토를 영유(領有). 야마자키 전투[山崎 合戦]에서는 미츠히데를 버리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 섰다.







승의(僧衣)의 무장


 츠츠이 쥰케이의 부친인 쥰쇼우는 나라[奈良]의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이었다. 쥰쇼우는 소에시모 군[添下郡]의 츠츠이 성[筒井城]을 본거지로 삼고, 야마토 지역에서 최강인 무사단을 이끌고 야마토 전역을 거의 평정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551년, 아직 쥰케이가 2살일 때 쥰쇼우가 병으로 죽었다.


 주변 가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여 18세에 코우후쿠 사[興福寺] 세이신 원[成身院]에서 득도(得度)하여 '요우슌보우 쥰케이[陽舜坊 順慶]'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승의의 무장이 된 쥰케이는 쇼우죠우히[猩[각주:1]]로 물들인 두건을 쓰고 금색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출진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시기산 성[信貴山城]에 웅거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여러 번 압박 받던 중 아케치 미츠히데의 주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히사히데보다 쥰케이를 신뢰하여 야마토를 맡긴 것이다.[각주:2] 이에 불만을 품은 히사히데는 돌연 시기산 성에서 모반을 일으켜 자멸하였다.


 1580년.

 쥰케이는 성을 야마토[大和]의 코오리야마[郡山]에 축성한다. 미츠히데가 성의 건물 배치를 맡았다고 하니 둘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각주:3].


갑자기 찾아온 복통(腹痛)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츠히데가 싸운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출진 요청에도 불구하고 '호라가토우게 고개[洞峠]'에서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실제로는 출병하지 않고 코오리야마 성()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곧바로 히데요시의 진()으로 달려가 천하의 명기(名器)인 이토 차완[井戸茶碗]을 헌상하고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내어 야마토 일국(一国)의 영유를 허락받았다.


 1548 1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히데요시에게 신년인사를 한 후 후나바[船場]의 자택에서 체재하고 있던 2월 중순. 쥰케이는 갑자기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수반하는 복통을 일으켰다. 소강상태를 지나 3 2일에 코오리야마 성()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출진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이 전쟁은 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이라 불리게 되는 전쟁이 된다.


 히데요시에게 충심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로 본 쥰케이는 병든 몸을 이끌고 3월에 오우미[近江]로 출진하였고, 거기서 이세[伊勢] 마츠가시마[松島]에서 싸운 후 쉴 틈도 없이 6월에 미노[美濃]의 타케노하나[竹鼻]로 이동하였다. 양군이 대치한 상태가 된 7월이 되자, 복통은 더욱 심해져 제대로 먹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에 더해 한 여름의 더위까지 겹쳐 몸은 갈수록 말라 갔다.


명의(名醫)의 치료도 보람없이


 코우후쿠 사()의 중도(衆徒)로서는 제일 높은 자리인 호우인 소우토[法印 僧都]가 되어 있던 쥰케이의 병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코우후쿠 사(),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는 여러 가지 기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효과는 없어 결국엔 쿄우토[京都]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쿄우토에는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의 병을 고친 명의(名醫)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우산의 치료에도 진전이 없어 격통이 멈추지는 않았다. 쥰케이의 병은 요즘으로 말하면 악성 위궤양 혹은 위암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코오리야마 성()으로 돌아왔다.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쥰케이의 묘.

 흔들리는 가마에 타고 오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오는 도중 우치[宇治]나 나라[奈良]에서 정양(靜養)해 가면서 귀성한 것은 8 7일이었다. 그 동안에도 쥰케이는 계속 고통을 느꼈다. 또 다시 코우후쿠 사()나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 기도가 행해졌지만 역시 효험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쥰케이도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10일에는 머리맡에 일족들과 중신들을 불러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모친 오오이카타 토노[大方殿] 등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5.


 쥰케이는 츠츠이 가문의 앞날을 걱정하였지만 뒤를 이은 사다츠구[定次][각주:4], 죠우케이[定慶][각주:5] 둘 다 뛰어나지는 못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카이에키[改易][각주:6], 단절(斷絶)[각주:7] 당하게 된다.

 사다츠구는 이가[伊賀] 우에노[上野]로 영지가 옮겨져 20만석을 영유하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쪽에 속했으나 후에 카이에키가 되어 이요[伊予]로 유배당한다.

 또한 그 다음 대인 죠우케이[定慶]에게는 코오리야마 성() 1만석이 주어졌지만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에서 오오사카 측에 너무도 간단히 성을 빼앗긴 일로 무가(武家)로써 어울리지 않다하여 가문이 끊겼다.

 

 
  1. 파란 빛을 띤 진홍색을 말함. [본문으로]
  2. 이전까지만 해도 히사히데가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휘하였기에, 히사히데의 적인 쥰케이는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은 노부나가의 군세에 공격받아 위기에 빠지나, 1571년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뜬금없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노부나가를 거역하더니 쇼우군 요시아키 휘하 장수들의 영지를 공격. 이에 요시아키는 히사히데의 적이었던 쥰케이를 옹호하게 된다(자연스레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있던 노부나가도 쥰케이를 옹호). 이후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사이가 벌어지자 히사히데는 요시아키 측에 붙고, 쥰케이는 히사히데에게 대항하기 위해 노부나가에게 붙는다. 덧붙여 요시아키를 쫓아낸 후 히사히데와 쥰케이의 상위에 자신의 측근 반 나오마사[塙 直政]를 두었으나 전사. 이후에 비로서 야마토를 지배하게 된다. 본문의 글처럼 미츠히데의 힘이라기 보다는 이전부터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긴 쥰케이 노력의 결과라 봐야 할 듯. [본문으로]
  3. 성 안의 건물 배치는 극비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맡기질 않았다. [본문으로]
  4. 쥰케이에게는 사촌이며, 외조카(모친이 쥰케이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확실하진 않으나 쥰케이와는 이종사촌지간인 듯. [본문으로]
  6. 무사의 신분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강등 됨. [본문으로]
  7. 가문이 끊김. [본문으로]

기타바타케 도모노리(北畠 具敎)

1576 11 25 암살 49

1528~1576.

이세(伊勢) 고쿠시(国司[각주:1]) 키타바타케 씨() 8대 당주. 남부 이세 5()이가(伊賀), 야마토(大和)의 일부를 지배. 검호(劍豪)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에게서 [히토츠노 타치(一の太刀)]를 전수 받았으며 와카(和歌)에도 뛰어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를 양자로 받아들여 은거하지만 옛 신하에게 암살당했다.

<그림은 http://homepage1.nifty.com/kitabatake/kitabatake21.html에서 불펌...>






노부나가에게 항복하다.


 무라카미(村上) 겐지(源氏)의 명류이며, [神皇正統記[각주:2]]를 쓴 것으로 유명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親房)와 그의 셋째 아들인 초대 이세 고쿠시 키타바타케 아키요시(北畠 顕能)가 남북조시대에 이세, 이가, 야마토 3국의 요충지인 타게고쇼(多芸御所)와 키리야마(霧山)에 성을 세운 다음부터 키타바타케 가(家)는 8대 토모노리까지 남부 이세 5()을 다스렸다.


 토모노리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와도 친밀했으며 , 검법, 와카에도 뛰어난 문무양도의 달인으로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나 야마토의 야규우 세키슈우사이(柳生 石舟斎)등 문인(文人), 검호가 토모노리의 저택에 자주 방문하여 함께 풍류를 즐겼다. 특히 잠시 동안 머물던 츠카하라 보쿠덴에게서는 신토우(新当)류의 비전인 [히토츠노타치(一の太刀)]를 전수받아, 동문인 무로마치 바쿠후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지칭하는 [검호 장군(劍豪将軍)]을 빗대 [검호 국사(劍豪 国司)]라 칭송되었다. 후에 이 두 명 다 암살대와 칼을 맞댄 끝에 참사를 당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풍류를 좋아하여 와카나 렌가(連歌) 모임을 개최했으며, 검의 타류시합(他流試合)도 하였다. 영내(領內) 20여개의 성이나 요새를 쌓아 정병(精兵)을 키우고 있었지만 천하를 향한 야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1568 41살 때.

 천하 평정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갑자기 이세로 침공하여 유서있는 칸베(神戶)(), 코츠쿠리(木造)()를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고 키타바타케 가()를 공략할 준비를 시작했다.

 토모노리는 격노하여 산 속에 있는 타게고쇼(多芸御所)를 나와 이세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오가와치(大河內)성에 본진을 두고 철저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노부나가군 3만에 대하여 키타바타케군은 5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오다의 병사들에 비하여 2백여 년간의 평화로 인해 전의도 낮았다. 그럼에도 50여 일간 버텼지만 그러는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으며 화살과 식량도 떨어졌고 노부나가의 조략으로 배신자가 나와 물길도 끊어졌다. 노부나가 군에도 피해가 생겼기에 노부나가는 타키가와 가즈마스(川 一益)와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의 진언에 따라 싸움을 멈추기로 하였다.


 노부나가쪽의 내건 조건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인 챠센마루(茶筅丸 = 후의 오다 노부카츠) 토모노리의 딸인 유키히메(雪姬)의 남편으로 삼는 것과 동시에 양자가 되어 키타바타케가()를 상속하게 한다. 그 외의 처벌은 없다는 관대한 제안이었다.

 이걸로 개성(開城). 얼마 지나지 않아 양 가문의 혼례가 치러졌고 키타바타케가()의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된 노부카츠는 마츠가시마(松ヶ島)성에 입성했다.

 [이젠 전쟁으로 이세의 사무라이나 백성들을 고생시키지 않아도 된다. 키타바타케의 가명만 남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라는 토모노리는 오다 가문을 증오하는 키타바타케의 가신들을 다독거리며 자신도 오가와치성에서 남서로 약 20킬로 떨어진 미세()의 저택에 은거했다. 그 곳은 해자로 둘러 쌓인 1만여 평의 작은 성이었지만 몇 몇의 종자들과 함께 자연을 노래하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토모노리 암살 지령


 그렇지만 노부나가는 노부카츠에게 토모노리의 암살을 명하였고 노부카츠는 이미 자신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있던 키타바타케 일족인 타키가와 사부로베에 카츠토시(川 三郞兵衛 雄利 토모노리의 동생인 코츠쿠리 토모마사(木造 具政)의 서자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의 양자)에게 실행을 명했다.


 이리하여 1576년 11월 25 이른 아침.

 타키가와와 옛 신하였던 카루 사쿄우(加留 左京), 나가노 사쿄우노신(長野 左京進)등 몇 명이 미세의 저택을 방문하여 면회를 청했다.

 측근인 사사키 시로사에몬( 四郞左衛門)이 타키가와 등이 왔다는 소식을 토모노리에게 전하자 토모노리는 굉장히 반가워하며 그 들을 자신의 방으로 직접 오게 한 후 세 살인 토쿠마츠기미(德松君)를 무릎에 앉힌 채로,

 [잘 오셨네. 편히 쉬다 가게나. 내 딸이나 사위께선 건강하시겠지?]

 라고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했다.


 이때 토모노리가 윗몸을 내밀어 차 그릇을 권하는 순간. 카루가 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테야리(手槍[각주:3])를 꺼내어 토모노리의 가슴팍을 향해서 찔렀다. 깜짝 놀란 토모노리는 검호 국사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뒤 편에 있던 칼걸이에서 칼을 뽑아 맞섰지만, 타키가와 등의 암살대는 계획대로 토모노리를 제압하여 세 살짜리 토쿠마츠기미까지 죽였다.

 한 사람이 목을 들고서 도망쳤지만 토모노리의 무사들이 뒤쫓아 난투를 벌였고, 양쪽에서 사상자가 나왔지만 카루와 나가노는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당시 토모노리에게는 1572년 상경을 목표로 하는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군과 연락을 취하며 노부나가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져 의심 많은 노부나가가 암살을 시도한 것 같다. 방심하고 있던 토모노리만 불쌍할 따름이다.


 토모노리 암살을 알게 된 충성심 깊은 키타바타케 무사 약 400명은 각지에서 키리야마(霧山)성으로 모여들어 노부나가의 대군과 싸우다 12 5일 패했다. 이리하여 키타바타케씨가 이세에 들어온 이래 8 2 4십 여년 이어진 영광스런 역사도 막을 내렸다.

  1. 무로마치 바쿠후(幕府)와는 별도로 예전부터 쿄우(京)의 조정에서 임명. [본문으로]
  2.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가 속한 남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쓴 역사서. [본문으로]
  3. 손잡이가 짧은 단창. [본문으로]

오다 나가마스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5. 12. 18:03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나가마스(織田 長益)

1621 12 13 병사 75

1547 ~ 162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생. 출가하여 우라쿠사이(有樂).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이어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으며,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전투의 화평 교섭 등에서 활약. 후에 다인(茶人)으로 살아가며, 토우쿄우(東京) 유우라쿠쵸우(有樂町)에 그 이름을 남겼다.









다인(茶人) [우라쿠(有樂)]의 탄생


 토우쿄우(東京)유우라쿠쵸우(有樂町)라는 번화가가 있다.

 이 지명은 오다(織田) 우라쿠(有樂)가 에도(江戶) 초기에 이 곳에 저택을 지어 살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오다 우라쿠'라는 인물은 노부나가의 동생인 나가마스(長益)를 지칭하는 것이다. 노부나가의 동생들 중에 에도 시대까지 살아 남은 것은 노부카네(信包)와 나가마스, 두 사람이었지만 바쿠마츠(幕末)[각주:1]까지 다이묘우로 존속한 것은 나가마스의 가계(家系)뿐이다.


 나가마스는 1547년생으로 노부나가와는 13살 차이가 난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의 행적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전장에 나간 기록도 1582 카이(甲斐) 타케다(武田)씨를 정벌 할 때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의 부하로 키소(木曽) 방면에서 침공한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혼노우(本能)()의 변 후, 나가마스는 오와리(尾張)나 북() 이세(伊勢)를 영유(領有)하는 조카인 노부카츠(信雄)를 섬기며, 1 3천관을 식록(祿)으로 받는 유력한 가신이 되어 검지봉행(奉行[각주:2]) 등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寛政重修諸家譜[각주:3]]에 의거하여 [혼노우(本能)()의 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셋츠() 시마시타(島下)() 마이타(昧舌)에서 2천석을 치교우(知行)로 받았다]라는 설(國史大辭典 등)은 잘못된 것이다.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는 것은 1590 9월로 그 직전에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오와리를 빼앗기는 등 카이에키(改易[각주:4])당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고 [우라쿠(有樂)]라는 호를 칭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우라쿠 44살 때였다. 필시 셋츠 치교우를 지급 받은 것도 이 즈음이라고 추측된다.


 우라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뛰어난 제자 일곱명(利休七哲[각주:5])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데, 차를 즐기게 된 것은 리큐우가 노부나가의 사도우(茶頭[각주:6])를 맡을 즈음인 것 같다. 하지만 다도(茶道)의 세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우라쿠라는 호를 칭하는 시기부터라고 한다.


 1591 2월 리큐우가 죽자 [차의 장인(宗匠)]라 불리며 히데요시가 다도회를 열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일이 많아졌고, 다음 해인 1592년에 조선 출병이 시작되자 히데요시를 따라서 큐우슈우(九州)로 내려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에서 자주 다회를 열었다.


 또한 전년 9월에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御伽衆)'에 들어갔다. 오토기(御伽)라는 것은 주군이 심심할 때 말상대를 해주는 것을 말하며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오토기슈우'라 칭했다. 필시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에 더해짐으로써 다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 것이라 추측된다. [리큐우 류()]를 기반으로 하면서 독자적인 다풍(茶風)을 가미한 [우라쿠 류()]의 다도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는 우에스기(上杉)를 정벌하기 위하여 칸토우()로 내려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이어서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도 무공을 세웠다. 싸움이 끝난 뒤 은상으로 셋츠에 가지고 있던 2천관에 더하여 야마토(大和) 3만석이 주어졌다. 다인(茶人) 다이묘우 오다 우라쿠의 탄생이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노부나가의 적류(嫡流)인 기후(岐阜) 성주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노부나가의 맏손자)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성주 오다 히데카츠(織田 秀雄 노부카츠의 장남)가 서군에 속하여 카이에키 당하였기에 에도(江戶) 바쿠후(幕府) 초창기에 오다 일족 중에서 다이묘우로써 남아 있던 것은 우라쿠의 가계(家系)뿐이었다.


()로 보내는 나날


 토쿠가와 쇼우군()의 지배를 받는 다이묘우가 된 우라쿠는 에도나 순푸(駿府)에 자주 출사(出仕)하였고, 그러는 한편 오오사카(大坂) 성에도 빈번히 출입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의 생모 요도도노(淀殿)의 외숙부라는 인척 관계로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1611 3월.

 히데요리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니죠우(二条)성에서 회견했을 때 우라쿠가 히데요리를 따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흥미 깊다.그 후 토쿠가와-토요토미 양 가문의 사이가 악화되자 우라쿠의 정치적 입장도 미묘하게 되어 일설에 의하면 우라쿠는 이에야스의 첩자가 되어 토요토미 측의 비밀을 보고 했다고도 하며, 오오사카 겨울의 전투가 시작되자 오오사카 성 안에서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이에야스를 복종하도록 계속해서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의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오오사카 성을 빠져나와 쿄우토에 가서 살며 아들 나가마사(長政)와 히사나가(尚長)에게 각각 1만석씩 나누고 자신은 남은 1만석을 가지고 살았다.


 우라쿠는 항상 쿄우토에 칩거하며 다도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내었고 1621년 12월 13 중풍으로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에서 죽었다. 고죠우(五条) 강변(河原)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히가시야마의 겐인(建仁)() 세이덴(正伝)()에 묻혔다. 향년 75.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말기를 말함.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하는 행정관 [본문으로]
  3. 칸세이(寛政=1789‐1801)년간에 에도 바쿠후(幕府)가 토쿠가와 일족을 제외한 다이묘우, 하타모토 등에게 족보를 제출하게 하여 각 가문의 유례를 기록한 것. 자유 제출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조상을 띄우기 위해 날조나 왜곡이 많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영지를 삭감 혹은 전부 몰수 당하고 심하면 평민으로 강등 [본문으로]
  5.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오다 우라쿠사이의 경우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6. 다이묘우를 섬기며 다도에 관한 것을 관장함 [본문으로]

오다 노부카츠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5. 9. 18:35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노부카쓰(織田 信雄)

1630 4 30 병사 73

1558 ~ 1630.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둘째 아들.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 具敎)의 양자가 되어 이세(伊勢) 코쿠시()가 되었다. 혼노우(本能)()의 변 후에는 오다가()의 차기 당주인 산포우시(三法師)의 후견인이 되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대항하여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전투을 일으키지만 화해하여 복속. 토요토미씨 멸망 후에는 토쿠가와(德川)씨를 섬겼다.









아즈치(安土)성 방화범의 소문


 1582 6 2일.

 혼노우(本能)()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와 다섯 째인 카츠나가(勝長)가 함께 전사하였으며 이어서 다음 해에는 셋째인 노부타카(信孝)가 오다 가문의 집안싸움 끝에 자살하게 되었다. 따라서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때 성인식을 치루고 전장에 나가 한 사람의 무장으로 성장한 노부나가의 아들들 중에서 노부나가 사후 그 혈통을 지킨 것은 차남인 노부카츠뿐이었다. 또한 노부나가의 자식들 대부분이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 성인식을 치렀기에 노부나가를 따라 종군하여 아버지의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서 직접 본 것은 노부카츠뿐이었던 것이다.


 노부카츠는 혼노우 사()의 소식을 거성인 이세(伊勢) 마츠가시마()에서 들었다. 곧바로 구원군을 이끌고 오우미(近江)츠치야마(土山)까지 진출시켰지만 거의 하는 일 없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노부카츠가 오우미에 진출해 있을 즈음인 6 13 비와(琵琶) 호숫가에 장엄히 서 있던 천하의 명성 아즈치 성이 갑자기 불길에 휩싸였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카츠가 아무도 없는 성에 불을 질렀다고 하며, 일본측 사료에서는 점령하고 있던 아케치 히데미츠(明智 秀)가 성을 떠나면서 불을 질렀다고 기록한다. 그 밖에도 지역민 방화설도 있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의문에 싸여 있다.

 진상이 확실치 않으면서도 선교사의 보고서에 쓰여있듯이 노부카츠가 방화범으로 몰리는 것은 소문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아들로써 불명예스러운 소문임에는 틀림이 없고 후에 노부카츠의 무장으로써의 평가에도 영향을 끼쳤다고도 생각된다.


몰락 다이묘우(大名)로 가는 길


 키요스(淸須) 회의[각주:1]로 인하여 노부카츠는 형 노부타다의 영지였던 오와리(尾張)을 계승하여 원래 있던 영지인 이세, 이가(伊賀)를 합친 3국을 지배하는 다이묘우가 되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인식 받으며 급성장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권력 항쟁(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국지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지만 대국적으로는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군세와 뛰어난 외교술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어 어쩔 수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와 화해한다.


 이후 칸파쿠()에 취임하여 일본 통일을 목표로 하는 히데요시와 협조 체제에 들어간다. 조정의 관직 체계에서는 항상 히데요시보다 한단계 아래인 다이나곤(大納言), 나이다이진(內大臣)으로 승진하지만 실상은 오와리, 이세를 영유하는 토요토미 정권의 일개 다이묘우라는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입장에서는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로서 노부카츠를 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씨 정벌 후의 영지 재배치에서 칸토우()로 이동한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영지로의 전봉()을 거부한 노부카츠를 카이에키(改易[각주:2])한 후 히타치(常陸)의 사타케(佐竹)씨에게 유배를 보냈다.

 히데요시의 노림수는 토요토미 정권을 강고히 하기 위해서도 오다, 토요토미 양 가문의 발상지인 오와리의 영국화(領國化)와 노부나가, 노부타다의 직신(直臣)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노부카츠 가신단 해체를 단번에 해치우려 했던 것이다.

 노부카츠로써도 옛 주군의 아들인 자신을 카이에키에 처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다씨()와 연이 깊은 오와리를 몰수 당하는 것은 노부카츠에게도 자기 존재를 부정 당하는 것이라 인식했음이 틀림이 없으며 히데요시의 영지 변경 명령 거절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칸파쿠의 명령 거부는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이묘우에서 평민으로 몰락한 노부카츠는 관위도 박탈당해, 머리를 밀고 출가하여 [죠우신()]이라 호를 칭하였다. 이 때 33.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용서받아 히데요시의 오토키슈우(伽衆[각주:3])에 들어갔으며, 1595년에는 장남인 히데카츠(秀雄)에게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 4 5천석이 주어져 사실상 노부카츠의 가계(家系)는 다시 일으켜졌다.
 
그러나 5년 뒤의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싸움에서 노부카츠-히데카츠 부자는 서군에 속했기에 싸움이 끝난 후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빼앗겼다. 일설에 의하면 싸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노부카츠는 옛 영지 회복을 노리며 오와리에서 동군에 속한 옛 신하들의 분열을 노렸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오다 가 부활


 시간이 흘러 때는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진()을 목전에 둔 1614 9월.

 노부카츠는 오오사카 성에서 퇴거하여 쿄우토(京都)의 류우안(龍安)()로 들어갔다. 개전을 앞두고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밀히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에게는 그 대가로 땅을 약속 받았던 듯 실제로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이후, 1615 7월에 야마토(大和)코우즈케(上野)의 양국() 내에서 5만석이 주어졌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드디어 다이묘우가 다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630년 4월 30일.

 쿄우토에서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노부카츠의 생예는 노부나가의 혈맥을 유지하는 것에 집념을 불태운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노부나가 사후 노부나가의 중신들에 의한 오다 가문 후계자 선정 및 영토 나누기. [본문으로]
  2.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3. 히데요시는 이런 오토키슈우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기 지식을 넓혀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