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1. 28. 17:50 Posted by 발해지랑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

1611 1 21일 병사(病死) 79.

1533 ~ 1611.

시마즈 씨[島津氏] 16대 당주(). 오오토모 씨[大友氏], 류우조우지 씨[造寺氏]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대하지만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고, 가독(家督)을 동생인 요시히로[義弘]에게 물려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카이에키[改易][각주:1]의 위기에 빠지자,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교섭하여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가 내린 은거 명령

 

 1595 6.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영지안도장(領地安堵)을 발급하였다.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점하고 있던 영지에 행해지던 태합 검지[각주:2]가 종료되어 산출된 57 8천 여석의 영유(領有)를 승인한 것인데, 그 영지안도장에 쓰여진 이름은 시마즈 가문당주 요시히사가 아닌 동생 요시히로[義弘]로 되어있었다. 이것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요시히사에게서 시마즈 가문의 가독을 몰수하고, 친 토요토미 적인 요시히로를 시마즈 가문 당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동시에 요시히사는 시마즈 가문이 대대로 거성(居城)을 삼고 있던 사츠마[薩摩]카고시마[鹿児島]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아, 오오스미[大] 토미쿠마[富隈]에 있는 토미쿠마 성[富隈城]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가 끝난 후인 1604년에는 오오스미[] 코쿠부[国分]에 마이즈루 성[舞鶴城]을 신축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단지 요시히로의 가독 계승은 토요토미 정권이 요시히사나 시마즈 가신단의 의향을 무시하고 멋대로 결정한 것이었기에 실권은 여전히 요시히사가 계속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실권을 누구에게 물려주는가에 대해서 강제로 은거를 당했던 요시히사를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든 것이다.

 

세 딸과 두 명의 후계자 후보.

 

 요시히사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모두 여자였다.

 

 첫째 딸인 오히라[御平] 1551년생으로, 삿슈우 가문[薩州家][각주:3]의 시마즈 요시토라[島津 義虎]에게 시집갔다.

 요시토라의 부친 사네히사[久]와 요시히사의 부친 타카히사[貴久][각주:4] 예전에 종가(宗家)의 가독을 쟁취하려고 계속 다투어 왔던 사이였기에 요시토라도 겉으로는 요시히사에게 복종하고는 있었지만 그 본심은 알 수 없었다.

 1585년. 요시토라가 병으로 죽어 오히라가 낳은 타다토키[忠辰]가 그 뒤를 이었지만, 그 타다토키도 진심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었기에 틈만 나면 본가를 탈취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1592년. 조선 출병 시[각주:5]에 요시히사의 휘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멋대로 행동하다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다음 해인 1593년 카이에키 당하여 처지를 한탄하다 병으로 죽었다.

 또한 오히라는 타다토키 외에 타다키요[清], 타다히데[栄] 등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삿슈우 가문 카이에키 후 히고[肥後] 반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코니시 가문[小西家]로 보내져 유폐되어 있었기에 요시히사의 후계자로 삼기 힘들었다.

 

 둘째 딸(이름 불명)[각주:6] 1563년생으로, 타루미즈 가문[垂水家] 시마즈 테루히사(島津 彰久)의 부인이 되었다.

 타루미즈 가문은 타카히사의 동생 타다마사[忠昌]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테루히사는 3대째 가주(家主)였다. 테루히사는 1594 7월 조선에서 병으로 죽었지만, 1585년 그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이 타다나오[忠仍]를 낳았었다.

 

 또한 셋째 딸 카메쥬[亀寿] 1572년생으로, 처음엔 요시히로의 세자(世子)인 히사야스[久保]에게 시집갔지만, 1593년 조선에서 히사야스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동생인 타다츠네[忠恒]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둘째가 낳은 외손자 타다나오와 셋째 카메쥬의 남편이며 사위 겸 조카인 타다츠네. - 이 둘이 요시히사의 후계자 후보가 된 것이다.

 

제비뽑기로 정해진 후계자

 

 요시히사가 은거했던 1595년. - 타다나오는 11, 타다츠네는 20살이었다.

 요시히사는 자신의 피가 흐르는 외손자 타다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었던 듯하지만 너무 어렸다.

 

 타다나오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죠우 시마즈 가문[新城 島津家]의 족보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요시히사는 사위인 타다츠네로 할지 외손자인 타다나오로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결심하지 못하였고, 쇼우하치만 궁[正八幡宮] 현 카고시마 신궁(鹿 神宮)에서 후계자를 정할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 결과. 타다츠네를 후계자로 하는 제비가 뽑아져 요시하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한다.[각주:7][각주:8][각주:9]

 이 제비뽑기의 이야기는 '신죠우 시마즈 가문 족보[新城島津家家譜]' 이외의 사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필시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시히사는 타다츠네와 카메쥬 사이에서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타다츠네는 이 외손자가 가독을 이어받을 때까지의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요시히사의 기대와는 반대로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생기질 않았다. 카메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자, 요시히사의 머리 속에서는 타다나오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이리해서 가독 계승문제가 다시 문제가 되어 요시히사와 요시히로-타다츠네 부자(父子)간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가신들도 타다츠네 파()와 타다나오 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그러던 중 요시히사는 병이 나 1611 1 21.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

 요시히사의 사망으로 인해 가독 계승문제는 잠잠해져, 타다나오를 지지했던 가신 일부가 숙청되는 것을 끝으로 가문 분열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마즈 가의 가독은 타다츠네에서 타다츠네의 측실(側室)이 낳은 미츠히사[光久]에게로 이어졌다. 이 측실의 부친은 코니시 가문으로 유배를 갔던 삿슈우 가문의 시마즈 타다키요 - 즉 요시히사의 첫째 딸인 오히라의 아들이었다.

 종가(宗家) 적류(嫡流)에 자신의 피를 남기고 싶어했던 요시히사의 꿈은 외손의 혈통이 이어가는 것으로 현실이 되었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2. 타이코우 켄치(太閤 検地)라 읽음. 태합[太閤] 히데요시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삿슈우는 사츠마[薩摩]의 별칭. 시마즈 가문의 분가(分家), 당주가 대대로 사츠마노카미[薩摩守]를 자칭했었던 것이 이름의 유래. [본문으로]
  4. 사츠마의 이사쿠[伊作] 지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시마즈의 분가 이사쿠 가[伊作家] 출신. [본문으로]
  5.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6. 타마히메[玉姫]라는 설이 있음. [본문으로]
  7. 일본은 예전부터 중요한 일을 정하는 제비뽑기를 신의 뜻이라 여겼기에로 정했기에 아주 어처구니 없는 일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8.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의 6대 쇼우군[将軍]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 義教]는 3대 쇼우군 요시미츠[義満]의 셋째 아들로, 별칭이 [제비뽑기 쇼우군]라 한다. 형인 4대 쇼우군 요시모치[義持]의 아들인 5대 쇼우군 요시카즈[義量]가 아버지 보다 먼저인 19살의 나이에 죽고, 3년 뒤에 요시모치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 때문에 당시의 칸레이[管領 – 무로마치 바쿠후의 수상 격] 하타케야마 미츠이에[畠山 満家]는 3대 요시미츠의 아들들 사이에 누구를 쇼우군[将軍]으로 할지 이와시미즈하치만 궁[石清水八幡宮]에서 제비뽑기를 한 결과, 당시 중이었던 기엔[義円]을 환속시켜 쇼우군[将軍]으로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9.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각종 선거에서 동수의 표를 얻었을 경우에는 제비뽑기로 당선자를 정한다. 2007년 11월 27일만 하더라도 오키나와[沖縄]의 나고 시[名護市]의 시장은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본문으로]

나오마사[井伊 直政)]

1602 2 1 전상사(戰傷死[각주:1]) 42

1560 ~ 1602.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쫓겨나 방랑의 몸이 되나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며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각주:2]]를 이끌고 용명을 떨쳤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도주하는 시마즈[島津] 군세를 추격하지만 이 때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이이의 적비대


 에도 시대[江戸時代],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将軍]후다이[譜代] 다이묘우[大名] 필두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이이 가문[井伊]의 '오우미[近江] 히코네[彦根] 30만석'이었는데, 이이 문이 당시엔 신참의 가문이었다는 것은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지위는 전적으로 초대 나오마사[直政]가 발군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이 가문은 토오토우미[遠江] 이이노야[井伊谷]의 호족으로 대대로 이마가와 씨[今川)]를 섬겼다. 그러나 1562년에 부친 나오치카(直親)가 이마가와 씨에게 살해 당하자, 2살인 나오마사는 이이노야에서 도망쳐 각지를 전전한다.


 1575년.

 15살에 이에야스[家康]을 섬기며 이이노야의 옛 영지를 되찾게 된다. 이후 나오마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타모토(旗本[각주:3])의 측근으로 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혼노우 사[本能]의 변 직후 이에야스 최대 위기인 이가도피행[伊賀越え[각주:4]] 때도 함께 했으며, 그 후 코우슈우[甲州] 공략에도 참가[각주:5], 그 공적으로 타케다 가문[武田]에서도 용맹함을 자랑하던 츠치야 중[土屋], 야마가타 중[山県], 오바타 당[小幡] 등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타케다 가의 적비대[赤備]를 모방하여, 갑옷부터 깃발[], 등에 꽂는 작은 깃발[指物], 갑옷 위에 입는 덧옷[陣羽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 나오마사는 이 적비대를 이끌고 선봉을 다투었고,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붉은 귀신[赤鬼]'라는 이명으로 두려움을 얻게되었다. 이후 이에야스가 가는 곳엔 항상 선봉을 맡아 돌진하는 나오마사와 적비대가 있었다.


 그 결과 이에야스를 섬긴 지 10년 만에 미카와 후다이[譜代]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의 삼걸(三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로 이봉 되었을 때에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 후에 타카사키(高崎)로 옮김) 12만석을 받았다.

 12살 연상인 타다카츠, 야스마사를 뛰어넘어 불과 15년 만에 토쿠가와 가신단 중 최고의 영지를 영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야스가 가문이나 문벌에 구애 받지 않고 능력만을 평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이이 가문의 후다이[譜代] 필두라는 지위는 에도 시대를 통해서도 변함이 없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무단 돌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나오마사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동군(東軍) 선봉의 군감(軍監[각주:6])으로 참가했다. 이 때 40세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토요토미[豊臣]계 유력 무장을 중심으로 한 동군에서, 히데타다[秀忠]가 거느린 토쿠가와 본대(本隊)가 도착하지 않은 당시, 토쿠가와 가문의 주력은 사실상 나오마사와 그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넷째 아들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휘하 약 6천의 병력이었다.


 향후의 천하를 판가름하는 결전이라 생각한 나오마사는 토요토미계 다이묘우[大名]에게 선봉의 공을 빼앗꼈다간,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더라도 후환이 남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야스와 타다카츠에게 설명하고 일부러 무단 돌진을 감행하기로 한다.


 15일 이른 아침. 휘하의 적비대[赤備え]에서 추리고 추린 30()를 이끌고, 이번 전투가 데뷔전인 타다요시와 함께 한 나오마사는 선봉인 후쿠시마의 선두 부대장인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의 제지를 물리치고[각주:7] 빠져나가 맨 앞까지 진출하여 서군(西軍)에게 철포를 쏘았다. 이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나오마사와 타다요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특히 전대미문의 적중돌파(敵中突破)를 시도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추격하여, 그의 조카인 토요히사(豊久)를 죽이기 까지 했다. 이 때 시마즈 대()의 결사적인 반격에 타다요시가 부상을 당했고, 나오마사도 투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 거기에 오른 팔과 타고 있던 말에 총격을 받아 낙마하여 한때는 실신했다고 한다. 본진으로 돌아온 둘을 맞이한 이에야스는 직접 나오마사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오늘 싸움에 있어서 제일 큰 공을 세웠다며 극찬하였다.


 전후 처리로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본거지였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공략, 서군의 총대장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항복의 알선, 토사[土佐]의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에 대한 대응 등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교, 통치 등의 면에서도 큰 공적을 올렸다.


너무도 이른 죽음


 세키가하라 전쟁 후의 논공행상으로, 1601 2 이에야스는 나오마사에게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이었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 새로이 6만석을 더해 합계 18만석을 하사했다. 그리고 서국 다이묘우[大名] 감시와 쿄우토[京都]의 조정 수호라는 특별임무를 부여했다. 10월에 나오마사는 타카사키[高崎]에서 새로 보수한 사와야마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오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치를 존중하여 민정의 안정을 꾀하는 한 편, 신영주 이이 의 거성 만들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의 겨울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얻은 오른 손 엄지의 총상이 차츰 악화되어 다음 해인 1602년 2월 1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화장(火葬)을 한 후 유골은 히코네[彦根]의 세이료우 사[淸凉]에 묻혔다.


 비노니. 아들의 아들의 아들까지 마지막까지 지켜다오 대지의 신들이여
 
るぞよ 子のすへの 末までも まもれあふみの 国津神
 라는 시를 남겼는데,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맹장도 13살의 어린 장남 나오카츠[直勝][각주:8] 등의 장래와 이이 가문의 존속을 대지의 신들에게 빌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토쿠가와 바쿠후[幕府]를 세우는 도중에 쓰러진 나오마사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나오마사 부인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이에야스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가신단(家臣團)도 또한 확실히 그의 뜻에 응하였다.

  1.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로 인한 죽음 [본문으로]
  2. 무구 일체를 전부 붉은 색으로 통일한 부대. [본문으로]
  3. 직속 부하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5.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1582년 당시 카이[甲斐] 등 옛 타케다 가문의 영지를 막 손에 넣었던 터라, 오다 가문[織田家]의 영주들은 거의 적의 땅이나 다름 없던 옛 타케다의 영지에서 도망쳐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간 터라 빈집이나 다름 없었다. [본문으로]
  6. 부대가 싸우는 모습이나 배반하는 지를 감시하는 역할. [본문으로]
  7. 이 때 나오마사는 처음 전장에 나서는 타다요시에게 전장의 분위기를 익히게 하기 위해서 구경하고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마사의 장남이나 병약했기에 후에 가독과 히코네 번을 배 다른 동생 나오타카[直孝]에게 양보하고 안나카 번[安中藩] 3만석에 봉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약했다지만 나오카츠는 72살까지 산 반면 나오타카는 69살에 죽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