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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코쿠(四) 전역을 정복한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이지만 시작은 토사(土佐) 오코우(岡豊) 3000관의 호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군소호족이 한때는 츄우고쿠(中)의 모우리(毛利),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島津)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일본 삼대세력 중 하나로 커졌는데 그 원동력이 된 것은 토사(土佐)의 독특한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 불리는 민병조직에 있었다.

 [이치료우구소쿠]는 평소엔 농업에 종사하는 지역 무사(士)의 무리들이다. 그들은 밭이나 논으로 나갈 때 창 끄트머리에 짚신이나 갑옷, 식량을 매달고 나가 그것을 한 켠에 놓았다가 전투 참가의 군령을 받으면 낫이나 괭이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서 창을 메고 모여들었다. 즉 갑옷(具足) 한 벌(一領), 말 한 마리로 집합했기에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6000~9000평의 토지를 소유한 묘우슈(名主 – 부유한 농민) 계급으로 몇 명 정도 부하를 데리고 있었다. 이것이 우수한 쵸우소카베 군단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쵸우소카베 씨의 선조는 시나노(信濃)의 하타 씨(秦氏)로 백제에서 온 도래인(渡[각주:1])이었다. 처음엔 '소카베(宗我部)'라고 하였지만 토사에 또 다른 소카베 씨가 있었기에 앞에 '쵸우(長)'를 붙였다고 한다.[각주:2]
처음엔 시코쿠 탄다이(
探題)인 '호소카와 씨(細川氏)'의 중신이었다. 그 호소카와 씨가 미요시(三好) 일족에게 멸망 당하자 차츰 자력으로 세력을 키웠지만, 1508년 당주 카네츠구(兼序)가 모토야마 씨(本山氏)등에게 공격받아 살해당하자 아직 꼬꼬마였던 센유우마루(千雄丸[각주:3])는 토사(土佐)의 코쿠시([각주:4]) 이치죠우 후사이에( 房家)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센유우마루'가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이다. 쿠니치카는 후사이에의 보호 속에 오코우 성(岡豊城)으로 돌아오자 옛 영지(領地)를 회복하여 토사 제패를 목표로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야기를 바꾸어 보자. 어렸을 적 쵸우소카베 모토치카의 외모를 전해주는 사료에 따르면, [키가 크고 흰 피부에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가신들은 '어린 아씨(若子)'라 부르며 뒤따마를 깠다]고 한다. 후년 시코쿠의 패왕이라는 이미지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내성적인 청년이 데뷔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모토치카의 데뷔전은 1560년 5월 22살 때였다.
 쿠니치카 부친(즉 모토치카의 할아버지)의 원수인 모토야마 시게토키(
本山 茂辰)와의 전투에서 모토야마의 거성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점령한 후 도망친 시게토키를 우라토 성(), 아사쿠라 성(朝倉城)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가 한창 행해지던 도중 부친 쿠니치카가 급사하는 바람[각주:5]에 가독을 이은 22살 모토치카의 양 어깨에 쵸우소카베 가문의 운명을 달리게 된 것이다. 평소 가신에게 경시 받던 선이 가는 젊은이가 이 순간부터 당당한 무장으로 변신을 이루게 된다.

 쿠니치카의 죽음이 알려지자 역시 모토야마 세력은 역습으로 나섰다. 2천여의 대군이었다. 쵸우소카베는 500여[각주:6]. 중과부적으로 무너지려는 찰나에 모토치카가 용감히 나서,
 "물러서지 마라!"
 라며 창을 직접 휘둘러 곧바로 적 두 명을 죽였다. 그 모습에 쵸우소카베의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해서 기세에 탄 쵸우소카베는 단번에 모토야마의 군사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전투에서의 모습으로 모토치카의 평가가 180도 변한다.
 [지모용(
智謀勇) 겸비]
 라며 가신들의 신뢰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 후 상승기류를 탄 모토치카는 각지를 전전하여 1570년 즈음에는 이치죠우 가문(
)의 하타(幡多), 타카오카(高岡) 2 군()을 제외한 토사 전역을 손에 넣었다.

 이치죠우 가문은 선조에 칸파쿠() 노리후사([각주:7])가 있을 정도인 토사 제일의 명문가였다. 더군다나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는 이치죠우 가문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쵸우소카베 가문에게 있어 큰 은인인 가문이었다. 모토치카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였지만 그러던 중 평소 소행에 문제가 많던 당주 카네사다(兼定)가 가중에서 가장 인망 높던 가로(家老)[각주:8]를 직접 베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토치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이치죠우 가문의 가신들을 소집하여 카네사다를 은거시키고 적자에게 당주자리를 물려주도록 꾀하였다. 라기보다 그 자리에 드센 가신들을 대기시켜두었기에 오히려 쿠데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토치카는 이렇게 카네사다를 이요(伊予)로 추방하고 카네사다의 적자 킷포우시(吉房子)[각주:9]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이치죠우 가문의 당주로 앉혔다. 이로써 토사 전역은 모토치카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각주:10]

 다음 목표는 시코쿠() 전역의 정복이었다. 이 즈음 모토치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교류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가신 사이토우 토시미츠( 利三)의 딸이 모토치카의 부인이었던 것이다.[각주:11]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 우호관계도 무너진다. 모토치카가 아와(
阿波)를 시작으로 차츰 지배영역을 넓혀가자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에게 있어 방해물이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라는 이대 거물이 죽어 후방이 안정되자 곧이어 노부나가는 시코쿠 정벌을 진행시키려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원정군이 배를 타고 떠나려 하는 때[각주:12]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각주:13]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모토치카는 지금이야말로 시코쿠 제패의 호기라 보고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아와를 침공한 사누키()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각주:14])를 공격하여 쇼우즈이 성(勝瑞城)을 함락하고 이와쿠라 성(岩倉城)을 손에 넣어 아와를 통일한 후 사누키의 소고우 성(十河城)까지 하락하였다. 도망칠 곳을 잃은 소고우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로 도망쳐 원조를 청했다.

 당시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쳐 주군 노부나가의 원한을 갚았고 시즈가타케 전쟁(い)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쳐 천하인(天下人)으로 향하는 길을 파죽지세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과 싸우고 있던 중이라 소고우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 틈에 모토츠카는 시코쿠 전역을 자신의 세력하에 둔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군이 출진한 것은 1585년 6월이었다. 이에야스, 노부카츠와 평화협정을 맺고 키이(紀伊)를 평정한 지금 그 여력을 몰아 시코쿠로 달려든 것이다. 총 12만 3천이라는 대군이었다.
 아무리 모토치카라도 이런 대군에는 개길 수 없어 인질로 셋째 아들인 치카타다(
親忠)를 바치고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 아와(阿波), 사누키(), 이요(伊予)의 반환을 명령 받았지만 토사(土佐)만은 안도받았다. 히데요시는 반항했던 모토치카에게 관대했다. 모토치카가 본령 안도의 인사를 올리러 상경하자 큰 환대와 함께 비젠나가미츠(備前長光)의 이름난 칼, 황금 100매, 말 한 마리, 화려한 장식의 안장과 일본식 등자()를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 다음 해.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종군하여 붕고(豊後) 방면의 적을 – 예전에는 적이었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와 함께 공격하였다. 시코쿠의 군세는 이요의 이마바리(今治)를 출발하여 붕고에 상륙하자마자 시마즈(島津)의 성들을 계속해서 낙성시켜 나가다가 헤츠키가와 강(戸次川)에서 시마즈 군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파견지휘관(
軍目付)인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는 막무가내였다. 곧바로 결전을 벌이자고 나댔다. 그러나 모토치카와 나가야스는 신중했다. 시마즈가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치카는 주력군을 기다린 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지만 센고쿠 히사히데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2월 12일 결전을 벌인다. 시마즈 군은 일부러 지는 척하고 퇴각하였다. 센고쿠 히사히데는 여기에 낚였다. 참담한 패배였다. 소고우 나가야스는 전사하였으며, 모토치카의 적자 노부치카(信親)도 죽었다.

 노부치카는 당시 22살로 한번에 여덟 명을 상대하여 더구나 그들을 이길 정도로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모토치카는 이 노부치카의 죽음에 너무 낙담한 나머지 자신도 적진에 돌격하여 죽으려 하였지만 말리는 가신들과 애마 '나이키구로()'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쵸우소카베 가문은 7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 전사자의 위패는 지금도 코우치 시(
高知市)의 하다 신사(秦神社)에 모셔져 있다.

 이 패전이 모토치카의 말년을 꼬이게 만들어 둘째 치카카즈(親和), 셋째 치카타다(親忠)를 제쳐두고 넷째 모리치카(盛親)를 세자로 정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가신과 친족들까지 죽이고 병으로 누워있는 둘째 치카카즈의 병간호도 하지 못하게 한 채 유폐시켜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후에 모리치카는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에 섰기에 영지(領地)를 몰수당하였고 낭인이 된 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이 끝난 후에 잡혀 죽었다. 명문 쵸우소카베 가문의 멸망이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
1538년생. 1560년에 가독을 이어 토사(
土佐)의 여러 호족들을 거느리고 1583년에 시코쿠() 전역을 평정하지만 히데요시(秀吉)의 시코쿠 정벌군에 항복하여 토사만 허락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였고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 1599년 5월 19일 죽었다. 60세.

  1. (일본으로 바다) 건너(渡) 온(来) 사람(人)이란 뜻. 보통 중국계나 한국계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나가오카 군('長'岡郡)에 있었기에 쵸우(長)를 붙였으며, 또 다른 소카베 씨는 카미 군('香'美郡)에 있었기에 코우소카베 씨('香'宗我部氏)가 되었다. 후에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치카야스(親泰)를 양자로 들여보내 가문을 탈취. 치카야스는 형인 모토치카의 시코쿠 제패를 도왔다. [본문으로]
  3. '치오우마루'라고도 읽는 듯 하다. [본문으로]
  4. 조정의 관직. 그 지역(国)의 행정과 사법 등 모든 것을 관장. 보통 '***노카미'라 불리는 직책. [본문으로]
  5. 실은 전투가 끝난 후에 사망. 전투는 1560년 5월 28일. 쿠니치카의 사망은 6월 15일. [본문으로]
  6. 1000이라고도 2500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닌의 난(應仁の亂) 때 토사로 피신하였다. [본문으로]
  8. 도이 소우산(土居 宗珊)을 말한다. 사족으로 신장의 야망-혁신 PK의 튜더리얼에서 나오는 그분이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만치요(万千代)'라고 한다.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 [본문으로]
  10. 사족으로 [신장공기]나 [타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 따르면 수도권 근방(上方)에서 보는 모토치카의 인식은 이치죠우 정권(大津御所 - 킷포우시 즉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가 있던 곳 '오오츠'를 따서)의 보좌역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실제로 모토치카가 노부나가와 연락을 할 때는 자신이 부하가 아닌 이치죠우 가문의 부하 '카쿠미 이나바노카미(加久見 因幡守)'를 통해서 였을 정도였다. [본문으로]
  11. 토시미츠의 형이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친위군사조직인 호우코우슈우(奉公衆) 멤버인 이시가이 미츠마사(石谷 光政)씨의 사위로 들어갔고(이시가이 요리토키(石谷 頼辰)), 그 이시가이 미츠마사에게 또 딸이 하나 있어 그녀가 모토치카의 부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토시미츠와 피가 이어져 있지는 않다. [본문으로]
  12. 예정은 6월 3일. [본문으로]
  13. 6월 2일. [본문으로]
  14. 이 즈음은 미요시 나가야스로 불렸다. [본문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82 6 13일 패사(敗死) 55?

1528? ~ 1582.

미노(美濃)의 명족(名族) 토키(土岐)()의 후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동반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긴다. 후에 노부나가와 사이가틀어져, 혼노우(本能)()의 변()을 일으키지만, 직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 중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어긋난 시나리오


 1582 6 13일 밤.

 아케치 미츠히데는 쇼우류우지(勝龍寺)() 안에 있었다.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전이라며 싸움을 걸어온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맞서 싸워 이김으로 쿄우토(京都) 지배의 토대를 다져놓을 수 있었던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지금 막 도망쳐 온 것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토우 쿠라노스케(内蔵(=토시미츠(利三))의 말을 들어, 오늘의 전투를 피하여 사카모토(坂本)에서 농성(籠城)을 하였다면……]

 [평소 모아두었던 군세를 (나누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면……] (太閤記)

 라는 등의 제 3자의 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적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성을 나가 본거지인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에서 진용을 재구축해야 하겠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급격히 불리해진 국면(局面)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우(本能)()에서 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궁정에 들어가 전승(戰勝)을 보고했던 것이 불과 10일전의 일은 아니었는가? [아케치의 삼일천하[각주:1]]라고 후대에 걸쳐 비웃음을 받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도 예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큰 것에 당혹하여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일까?

 직접적인 패인(敗因)은 히데요시가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츄우고쿠 대반전(大返し)]을 감행한 것과 더불어 동원한 병력이 총 4[太閤記]이라는 이 또한 예상외의 대군(大軍)으로 이 대군에는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라이벌 히데요시가 그렇게 대군을 모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인척[각주:2]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타다오키(忠興) 부자의 협력 거부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죽인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문제인 것은 누구보다도 미츠히데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호소카와 부자에 재고(再考)를 촉구한 9일자 편지의 말미에도 이번 쿠데타의 의도는 타다오키, 오키모토(興元[각주:3]) 등을 위한 것으로, 따라서 쿄우토(京都) 주변을 평정한 후에는 곧바로 타다오키 등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소카와 부자는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당초 미츠히데에게 가세(加勢)했었던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9일에는 태도를 바꾸고 곧이어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모반(謀反)]


 확실히 미츠히데의 반역의 배후에는 바쿠후(幕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와 기맥상통(氣脈相通)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세 사다오키(伊勢 貞興), 스와 히다노카미(諏訪 飛), 미마키 카게시게(御牧 景重) 등 쇼우군()의 부하들이 아케치 측에서 전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체제의 재건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나름대로 대의명분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미츠히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오다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거절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9일자 편지에서 혼노우(本能)()에서의 일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不慮)”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세울 정도의 대의명분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반격의 준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 성()으로 귀환을 하려 하였고 미조오 시게토모(溝尾 茂朝) 등 근신(近臣) 수 명과 함께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쇼우류우지(勝龍寺)()을 탈출했다. 그러나 후시미(伏見) 방면에서 야마시나(山科)에 이르렀을 때 잇키(一揆)에 습격 당하여 샛길로 피했지만 여기서 살해당하고 백성이 목을 주웠다[아사노 가문 문서(野家文書)].
 
일설에는 야마시나의 오구루수(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풀 숲에 숨어있던
노부시(野武士)의 창에 찔려 약 330m쯤 간 곳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 있던 신하가 목을 베어, 그 목이나 몸통을 덤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豊鑑].


 이 말로에 대해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학려(學侶)인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등은, “노부나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출세를 하였으면서도, 그 큰 은혜를 잊고 괘씸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단정지었다.

  1. 노부나가를 죽인 후 쿄우토(京都)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다오키의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 [본문으로]
  3. 후지타카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