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1615 1 6일 병사(病死) 63

1552~1615.

셋츠(摂津) 타카츠키(高槻)성주(城主).

세례명 유스토(Justo).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싸움 등에서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기독교 금교령(禁敎令)으로 인하여 영지를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 당하여 마닐라에서 병사하였다.








평화로운 생활을 깨트린 추방령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서,
 [
()을 따르겠느냐? 다이묘우(大名)로 남겠느냐?]라는 힐문에 주저없이 다이묘우(大名)의 지위를 버린 기독교 무장 다카야마 우콘은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우콘은 카나자와(
)의 해자(垓子)이시가키(石垣) 등의 개수(改修)를 지휘하였고 타카오카 성(高岡)의 건물 위치나 배치(縄張)도 정했다.

 마에다 가문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든 세키가하라(ヶ原) 전쟁 호쿠리쿠(北陸) 방면의 전투에서도 크게 활약하여 이에야스가, "우콘의 부하 천 명은 다른 무장의 1만 명에 필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콘의 정확한 영지는 불명이지만 2만석 전후라 여겨지며 마에다 가문의 역대 당주()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우콘은 카가, 노토(能登)를 비옥(肥沃)한 신앙의 땅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여 예수회에 의뢰해서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를 초대하여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2대 번주(藩主) 토시나가(利長)는 그러한 우콘의 좋은 이해자였다.


 우콘은 또한 센노 리큐우(千 利休)를 스승으로 삼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다인(茶人)이기도 하였다. 리큐우가 히데요시에게 죽음을 선고 받아 쿄우()에서 사카이()로 향하는 배를 타고 떠날 때도, 히데요시를 두려워한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와 함께 둘이서만 배웅했다. 우콘은 와비챠(わび[각주:2])의 극한에 이른 다인으로 '난보우(南坊)'라는 다인호(茶人號[각주:3])를 자칭했다. 신앙과 다도(茶道)…. 카나자와에서의 말년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토쿠가와 정권은 오오사카 성(大坂)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가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와의 결전을 앞두고 낭인을 소집하고 있으며 또한 이들 중에 많은 기독교 무사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1612 12 바쿠후(幕府)는 선교사의 국외 추방(バテレン追放令)과 기독교인 명부의 작성을 명령하였다.


 62세인 우콘에게 힘겨운 새해가 찾아왔다.

 바쿠후에서 우콘그의 동료인 나이토우 죠안(内藤 如安[각주:4]) 그리고 그 가족들을 즉각 추방하라는 명령이 마에다 가에 전해졌다.

 친구들은 우콘에게,

[60세를 넘긴 당신은 괜찮지만 손자들이 불쌍하다. 개종(改宗)한 척을 하면 어떻겠나?]하고 설득했지만 우콘은 이를 거절했다.

 우콘은 3대 번주인 토시츠네(利常)에게 앞으로 섬길 수 없음을 사과하고 그 해의 연공에 해당하는 황금 60매를 헌상. 은거하고 있던 토시나가에게도 황금 30매 상당의 다기(茶器)를 보냈지만 이별을 슬퍼하며 받지 않고 오히려 여행에 쓰라며 돈을 더해서 돌려주었다.


 이리하여 1월이라는 가장 춥고 눈도 많은 계절에 우콘은 부인인 쥬리아, 가노(家老)의 집에 시집갔었지만 우콘을 따르기 위해 이혼하고 온 딸, 죽은 장남의 아들인 손자 다섯을 포함한 8명과 죠안의 가족 10명들과 함께 카나자와를 출발하였다. 평소도 넘기 힘든 호쿠리쿠의 산길을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쌓여있는 눈을 손으로 헤쳐가며 걸어서 넘었다.


고난의 마닐라 항해



 나가사키(長崎)의 행정관(奉行)은 우콘 일행에게 국외 추방을 선언하였고 우콘은 존경하는 호레몬 신부가 마닐라로 향한 것을 알고 마닐라 행의 배에 몸을 실었으며 친구인 죠안도 이에 따랐다. 그 배는 너덜너덜한 정크선[각주:5]으로, 1614 11 8 나가사키 항구 밖의 키바치(木鉢)의 항구를 출항했다.


 배에는 350명이나 되는 인원이 꽉 들어차 계단뿐만 아니라 갑판에도 사람이 넘쳤다. 순풍을 만나면 10일이면 도착하지만 계절은 최악으로 1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바다 위에 있었다. 위생상태도 나빴고 더구나 마닐라로 들어가기 직전에 폭풍우를 만나 돛대가 부러져 어선에 발견되기 전까지 4일간 바탄 반도의 앞바다를 표류하였으며 이 때문에 배 안에서 4명이 죽었다.


도착 직후에 객사


 그러나 선교사의 보고로 우콘 등이 얼마나 독실한 신자였는지를 알고 있던 스페인 현지 총독 후앙 데 실바는 표류하는 배를 구원하여 성벽도시 인트라므로스의 해안으로 견인하였다.


 일행은 요새에서 발사되는 축포로 환영 받으며 마닐라에 첫발을 내딛자 교회의 종들이 일제히 울렸고 의장병과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총독은 국빈 대우로 우콘을 맞이하여 신앙의 스승으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머물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때 이미 우콘의 몸은 배에서의 열악한 환경, 거기에 마음의 피로가 겹쳐 병마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마닐라에 상륙한지 44일 후인 1615 1 6(서력 2 3), 가족과 죠안이 보는 앞에서 63세로 죽었다.

총독관저의 거실로 옮겨진 관 속의 우콘은 무인을 상징하는 갑옷과 다인을 의미하는 쥬우토쿠(十徳) 두건을 쓴 모습으로 마치 살아있는 듯이 보였다 한다.


 우콘의 관은 총독을 시작으로 재판관, 수도사, 시회 의원, 유력자 등이 바꿔가며 메었고 700미터 떨어진 산 타아나 교회로 이어져 그 교회의 주제단에 가까운 곳에 관구(管區)의 어른들이 영면을 취하고 있는 관들 사이에 놓였다.

 이 교회는 지진이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며, 유골은 이곳 저곳을 떠 돈 끝에 현재는 케손 시티 교외의 노바레체스 수도원의 합동묘에 죠안과 함께 잠들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1.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을 이름. [본문으로]
  2. 말하자면 화려함 보다는 간소함을 찾는 다도(茶道)형식. [본문으로]
  3. 다도의 세계에서 쓰는 호를 말함. [본문으로]
  4. 우리나라에는 '소서비(小西飛)'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5. 중국식의 배를 말함. [본문으로]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99년 윤 3 3 병사 62

1538 ~ 1599.

오와리[尾張] 아라코[荒子] 성주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昌]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전공을 세웠고,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따르며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영지를 받아 '카가 백만석[加賀百万石]'의 기초를 쌓았다.









히데요시의 말벗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출생 후 1년 뒤인 1538년에 태어난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보다 1년 더살아 1599년에 62세로 죽었다. 히데요시와 산 시간이 거의 겹치는 토시이에의 인생은 좋건 나쁘건 히데요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말년 히데요시 정권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1591년부터 토시이에의 존재는 무게감을 더해 갔다.


 1591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가 병사했으며, 센노 리큐[千 利休]가 할복하였다. 정권의 중추에 있던 두 사람을 잃고 계속해서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일찍 죽어버리는 불행을 맛 본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오토키슈우[伽衆]에 임명하여 공과 사에 걸쳐 상담 상대로 하였다. 이 때 토시이에 54.


 다음 해인 1592년.

 히데요시의 조선 출진에 토시이에는 병 8천을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 길어지고 있던 진중 생활에 살기(殺氣) 어린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사이를 중재하고 가난한 시골 다이묘우의 뒤를 보아주는 등 남을 잘 살펴주는 인품을 발휘했다. 이때 함께 했던 측실인 치요가 임신하여 후에 3대 번주가 되는 4남 토시츠네[利常]를 낳았다.


깊어지는 히데요시와의 친밀도


 토시츠네가 카가 카나자와[金沢]에서 탄생한 1593년.

 히데요시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아이 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났다. 이 히데요리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을 물려주고 있던 조카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와 그의 일족, 파벌을 멸하였다. 그 직후 모든 다이묘우는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온 천하에 인식되었다.


 히데츠구와도 친했던 토시이에였지만 히데요시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후견인[=傳役]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모든 다이묘우[大名] 중에서 유일하게 항상 수도권[上方]에 머물면서 후견을 맡는 큰 역할이었다. 육친조차 믿지 않던 독재자도 토시이에의 '의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양녀가 된 토시이에의 딸들과의 2, 3중으로 엮어진 연도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은 그러한 친밀함을 우려하여 이에야스나 토시이에 둘 다 야심이 많기에 언젠가 둘이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예언은 반은 적중했지만 반은 빗나갔다.


 1598 8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에야스, 토시이에 등 대로와봉행(五奉行)들에게 계속해서 후사를 부탁한 히데요시가 죽자 곧바로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토시이에였다. 이때 토시이에도 또한 병들어 있었다. 조선과의 평화 교섭으로 일본에 와 있던 명()심유경(沈惟敬)에게 지속성의 독을 히데요시와 함께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퍼지는 등 병증의 악화가 매우 빨랐다.

 이 때문에 토시이에는 이미 가독(家督)을 토시나가[利長]에게 물려준 은거료 15천석의 신분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유언을 무시하며 여러 다이묘우와 혼인을 맺으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다이묘우들도 양 쪽으로 나뉘는 큰 소동으로 발전했지만,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연을 맺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들의 노력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의리 있는 사나이의 평범한 죽음


 1599년 정월.

 토시이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를 만나 화해를 의한 회담을 가졌다.


 3 8일에는 이에야스의 답례 방문이 이어졌다.

 토시이에는 괴로운 숨소리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토시나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이에야스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은 이때 이에야스를 죽이고자 했지만 가신들이 반대했다고도 토시나가가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토시이에에게는 이미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3 15일. 죽음이 가까워 짐을 안 토시이에는 자잘하고 상세하게 유산 분배를 하였다.


 3 21일.

 머리맡으로 정실인 마츠를 불러 토시나가에게 보내는 '유훈 11개조[遺戒十一箇条]'를 필기시켰다. 앞으로 3년간 토시나가는 본거지 카가[加賀]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병사 1 6천을 카가[加賀]와 오오사카[大坂]에 둘로 나누어 주둔시키고 모반의 징조가 있으면 합류해서 싸우라며 마지막까지도 히데요리를 걱정하였다.


 10일 후.

 점점 더 중태에 빠졌다. 마츠가,
 
"당신은 예전에 싸움터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에 갔을 때를 대비해 이것을 입어주세요"
 라며 준비한 경문이 쓰여진 수의를 입으라고 하자 토시이에는,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힌 적은 없다. 때문에 난 죄가 없다. 죄가 없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만약 지옥의 염라대왕이나 도깨비들이 날 얕보고 괴롭힌다면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 우리 가문의 용사들을 이끌고 그 곳을 정벌하겠다"
 
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윤 3 3일.

 마츠와 토시나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센고쿠 무장[戦国武将]치고는 드문 평범한 죽음이었다.

  1.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타카[忠隆]와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世]는 부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