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5월.
토쿠가와 막부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는,
이슬비가 흩날리는 날씨에 센다이 번[仙台藩] 에도 저택[각주:1]으로 발길을 옮겼다.
목적은 병문안이었다.

침실로 안내받은 이에미츠를
잠옷을 걸친 노인이 맞이하였다.
창백한 피부가 이제 노인의 생명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노인은 간신히 등을 등걸이에 기대며, 괴로운 듯이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미츠에게 있어서, 
노인의 오른쪽 눈을 감싸고 있는 안대가 이렇게까지 안스러운 적은 없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와 주셨지만 이러한 몰골이라 창피하옵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완전히 갈라져 그르렁 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편안히.. 편안히.."
이에미츠의 짧은 말에는 깊은 염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목이... 망가졌습니다. 식사조차 목을 넘가가지 않고 목소리도 이런 꼴..."
자조적인 미소를 띠우며 목을 쓰다듬는 노인의 말에 걱정스러운 듯 이에미츠는 노인의 말을 막고 말했다.
"신군 이에야스공은 나의 부친 히데타다의 후사를 부장군에게 맡겼소. 그리고 나의 아버지도 또한 나의 후사를 당신에게 맡겼을 터."
이에미츠는 포동포동한 볼에 보조개를 띄우며 말했다.
"그러니 부장군. 당신의 역활은 나의 은거까지 끝나지 않았을 것이오"
하며, 부드럽게 노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부장군[副将軍]'
이에미츠의 부친이 쇼우군[将軍]일 때부터 노인은 그렇게 불려 왔다.
"자... 눕는 것이 좋겠군"
노인의 귀로 들어오는 이에미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눈이 감기고 곧 기분좋게 잠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1590년 봄.
세 번에 걸친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고 있던 호우죠우[北条]를 멸하기 위해,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20만의 대군과 함께 칸토오(関東)로 왔다.
전년 아시나(蘆名)를 물리쳐 명실공히 오우슈우의 패자가 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히데요시의 이 오다와라 공략전에 지각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늦게 온 마사무네가 청원하는 알현의 청을 무시하고 하코네에 있는 창고에 근신을 명했다.
'원숭이녀석, 나와 만날 생각은 없는 것인가? 그렇다는 것은.... 아버지 때보다 더욱 넓혀진 나의 영토를 전부 쳐먹을 흑심인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마사무네는 겨우 비공식 알현을 허용받았다.
눈아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의자에 앉은 히데요시가 손에 쥔 지팡이로 지면을 가리켰다.
엄숙히 예를 표한 마사무네는 지팡이가 가리킨 곳으로 가 앉았다.
앉아 있는 마사무네의 복장에 열석해 있던 장수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늘어뜨렸고, 하얀 마(麻)로 된 겉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죽고 나서 관에 들어갈 때 입는 복장이었다.
'이녀석....'
마사무네는 사자(死者)의 복장으로 히데요시에의 복종을 나타내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강렬히 어필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 호담함에 히데요시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웃어 버렸다면 이 순간, 이 곳에서는 히데요시의 패배인 것이다.
'이겼다.....!'
확신하던 마사무네의 목에 히데요시의 지팡이가 와 닿았다.
"조금 더 늦었더라면 이곳이 위험했단다"
그 시선에는 친근한 원숭이의 얼굴은 사라지고 오히려 쥐와 같은 날카로운 집착심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틀 후...
마사무네는 카타쿠라 코쥬우로우[片倉 小十郎]와 함께 정식으로 알현식을 갖게 되었다.
거실과 같은 곳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 천하의 명장들이 얼굴이 나란히 하고 있었다.

"먼저 번에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너의 오른쪽 눈은 누구에게 주었느냐?"
히데요시는 당당한 마사무네가 왠지 맘에 들지 않았다.
"옛! 추하게 튀어 나왔었기에 뒤에 앉아있는 이 코쥬우로우에게 단도로 찔러 터트리게 했사옵니다."
"찔러 터트리게 했다!?"
제후들은 깜짝 놀랐고 곳곳에서 경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 이라곤 간신히 코웃음 치는 것 뿐이었다.

"내 듣기에 네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너의 모친은 독을 탄 식사로 널 죽이려 했다고 하더구나. 너는 동생을 베어 죽였다고도 들었다. 이렇게 슬픈 일이 있을 수가.."
이번에는 굉장히 슬픈듯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사무네에게 창피를 주고 싶었다.

"그것은 칸파쿠 전하가 잘못 들으신 것. 어머니는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시험해 본 것입니다. 독이 탄 식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는 다테 가문을 짊어 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동생은 어리석게도 그릇에 손을 대었기에 베어 죽였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이렇게 어머니께 단련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전하의 앞에서도 겁을 내지 않음이옵니다."
막힘이 없는 차분한 말투였다. 아연해 있던 히데요시는 더 이상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 대결에서 마사무네는 당당히 한판승을 따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비가 그치고 태양이 저물기 시작했다.
"부장군, 웃고 있군"
말을 건 이에미츠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부드러웠다.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2]와 만났던 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 과는 다르게 마사무네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타이코우 전하라...... 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도 이제는 없군."
"그러하옵니다. 토요토미 가문 다음은 저의 차례라고 생각했건만 뚜껑이 열어보니 이에야스공. 그렇다면 그 다음이야 말로~ 하고 노렸지만 천하는 쇼우군 부친[각주:3]의 손에. 그리고 지금은 쇼우군 전하. 결국 내 차례를 오지 않는가... 하고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지요.....!! "
"포기.....하고 있었지만....이라고!?"
순간,
이에미츠는 자신의 뒤쪽으로 싸늘한 무언가를 느끼고 마사무네의 침상에서 튀어 물러났다. 어느새 노인이 이에미츠 앞에 위풍당당히 서 있었다.
야규우[柳生][각주:4]에게 교육받은 이에미츠였기에, 단번에 노인의 전신에서 굉장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사무네의 외눈은 생기를 되찾았고 그 모습은 천하를 삼키려 하는 용처럼 당당했다.
.
.
한 순간의 침묵이 오고 간 뒤..
"히데타다님으로부터 부장군이라는 분에 넘치는 직함을 받았습니다만 이제는 그 역할도 더 이상 맡을 수가 없군요"
카카~하고 웃으며, 칼걸이에서 꺼리낌없이 단도를 집어, 이에미츠의 발 앞에 정중히 놓았다.
그리곤 절을 했다.
"이 노인에게 간단히 당할 정도라면 천하는 또 다시 시끄러워진다고 생각했지만 이런이런~ 전하는 역시 야규우의 검호(剣豪)이옵니다. 이제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의 안태는 영원한 것! 이 노친네도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가 있겠군요."

어디까지가 마사무네의 진심이었을까?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이에미츠는 헤아려 보았지만 마사무네의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에 빨려 들어 화 내는 것 조차 잊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부장군도 오래 살아 주시구려"
황급히 침실에서 떠난 것은 역시 공포심에서 일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노인은 큰 소리로 가신들에게 명했다.
"이제는 되었다. 물러가도 좋다 "
마루 사이와 벽 뒤 등 어둠에 숨어 있던 완전 무장한 자객들이 아쉽다는 듯이 자리를 떠 사라졌다.
"목숨을 뺐을 수 있었지만 뺐지 않았다. 늙어서가 아니다! 그 때 천하는 내 손안에 굴러 들어 왔었다. ...그것으로...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중얼거리있는 노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아쉽다는 빛이 있었다.

3일 후.
노인은 만족한 웃음을 띤 채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났다.

생몰년; 1567~1636
관위;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 지쥬우[侍従],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우코노에쇼우쇼우[右近衛少将],
        므츠노카미[陸奥守], 산기[参議], 곤츄우나곤[権中納言]

  1. 각 번은 참근교대 때의 번주[藩主]나 무사들, 혹은 번주 가족들의 숙소로 에도[江戸]에 저택을 두었다. [본문으로]
  2.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지칭. [본문으로]
  3. 2대 쇼우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본문으로]
  4. 아마도 에도 야규우[江戸柳生]의 창시자 야규우 무네노리[柳生宗矩]를 말하는 듯. [본문으로]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614년 1월 19일 병사(病死) 69세.

1546년 ~ 1614년.
데와[出羽] 야마가타[山形]성주. 쇼우나이[庄內] 지방에 진출해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들과 싸웠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호우죠우 씨[北条氏]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공격하자 참진(參陣)한 덕분에 본령(本領)을 안도받았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해서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싸웠다.




효장(驍将)의 전환기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가독(家督)을 놓고 싸운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죽였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일족이라고 해도 용서를 하지 않았다. 후환을 남기는 것 보다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항복한 무장에게는 잘 대해주었기 때문인지 근린의 무장들은 요시아키를 효장이라며 두려워 했다.

 이런 요시아키에게 전환기가 찾아 온 것은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였다. 참진을 명령 받은 여러 무장들은 앞다투어 참진하여 소령 안도장을 받아 내었으나 요시아키는 부친인 요시모리[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어 6월달이 되어서야 겨우 착진할 수 있었다. 그 전에 히데요시가 발령한 사투금지령을 위반하고 쇼우나이[庄內]에서 영토 쟁탈전을 계속해서 벌여 온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눈밖에 나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요시아키는 예전부터 연락을 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부탁해 그의 중재 덕분에 겨우 소령(所領)을 안도 받을 수 있었지만, 요시아키처럼 늦은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소령에서 아이즈[会津]를 빼앗겼고 참진하지 않았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과 무장들은 소령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 일은 요시아키를 놀라게 했다. 때는 요시아키 45세. 1571년 가독을 이은지 20년만에 처음으로 모가미 가문(最上家] 위급존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환심(歡心)가로 변신

 천하인의 강대한 무력과 중앙 집권 정치의 진정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요시아키는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남의 영토를 빼앗는 것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라는 것을 통감하였으며 주변의 영주들과 싸우는 데 정신이 팔린 결과 중앙 정권과 끈을 이어 놓는 것에 게을리 한 것을 후회했다[각주:1]. 요시아키는 센고쿠[戦囯]의 시대가 끝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요시아키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요시아키는 천하인에게 열심히 봉사할 것을 마음먹고 무슨 짓을 해서든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실시한 것이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2])이다.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실정에 맞지 않는 오우우[奥羽]를 주요 목표로 한 것이었다. 사회의 발달이 늦어져 다른 지역보다 향촌제(鄕村制)가 미발달한 오우우에서 이것을 강행할 경우 각지에서 호족의 내란과 농민들의 발발이 예상되었기에 히데요시도 상당한 각오로 임한 것이었다. 검지가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복속해 있던 무장과 호족들의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었기에 커다란 위험이 예상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솔선해서 처자를 동반하여 히데요시가 머물고 있던 아이즈의 코우토쿠지[興德寺]에 가서 알현했다. 이 때의 일이 [다테 가문 문서(伊達家文書)]에 남겨져 있다. 참고로 요시아키는 다테 가문[伊達家]와 싸우기도 했지만 당주인 마사무네[政宗]는 요시아키의 여동생 요시히메[義姬]와 선대 테루무네[輝宗] 사이의 적자이니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외삼촌이 된다.

 [다테 가문 문서]에는 요시아키의 충성스런 모습에 어처구니 없어하며 혀를 차는 다테 가문과 굉장히 기뻐하는 히데요시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아사노 가문 문서(浅野家文書)]에도 다테와 모가미 가문은 자신들 영내의 호족들의 처자들을 스스로 쿄우토(京都)로 보내 살게 했다고 한다. 남들보다 먼저 처자를 인질로 바친 요시아키와 마사무네는 오우우의 여러 무장들의 모범으로 평가 받았고 다른 무장들도 이것에 따르라는 요청받게 된다. 한 때 히데요시에게 냉우받았던 요시아키는 면목을 세우게 된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말년

 환심을 사는 방법으로 영국(領国)의 안태를 지켜 토쿠가와 정권에서는 5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요시아키이지만 비극은 이 수법으로 인해 생긴다.

 요시아키는 사랑스런 딸인 코마히메[駒姬]를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에게 측실로 받쳤고, 차남 이에치카[家親]를 이에야스의 부하로 사용해 주길 바란다고 보내어 이에야스를 기쁘게 했으며, 셋째 아들 요시치카[義親]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秀頼]를 섬기게 했다. 그야말로 물 샐 틈 없는 포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코마히메는 [살생관백(殺生関白)]이라는 악평을 남기고 자결한 히데츠구에 휘말려 다른 처첩들과 함께 니죠우 강변[二条 河原]에서 사형 당했다.

 요시아키는 자신도 부친에게 미움 받았으면서도 자신 역시 같은 일을 벌이게 된다. 30세가 되어도 가독을 잇지 못한 장남 요시야스[義康]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고 이에야스가 언질을 주자 분노한 나머지 모살해버린다. 요시야스가 죽은 후 유품에서 부자간의 사이가 화목하도록 절실히 기도한 기원문이 발견되었다. 후회막심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는 이에야스 쪽에 붙어 우에스기 씨[上杉氏]와 싸운 후 부터 요시아키는 병에 자주 걸리게 되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순푸[駿府]의 이에야스를 방문해 모가미가의 안태를 부탁한 후 야마가타로 돌아와 죽었다. 1614년 1월 19일 향년은 69세. 노환에 따른 병이라고 한다.

  1. 1580년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살아 있을 시에 노부나가에게 매와 말을 한 마리 씩 보내 줄을 놓고 있었다. [본문으로]
  2.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아시나 모리우지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16. 09:33 Posted by 발해지랑

아시나 모리우지(盧名 盛氏)

1580 6 17 병사(病死) 60.

(그림은 KOEI의 천하창세)


1521 ~ 1580년.

므츠(陸奧)() 아이즈(会津) 쿠로카와(黒川)성주. 아시나(盧名) 16대 당주(当主).

다테(伊達), 유우키(結城)씨와 혼인관계를 맺고 주변의 호족과 무장을 복속시켜 아시나씨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 번 은퇴하였지만 후계자인 적자 모리오키(盛興)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복귀. 18대의 모리타카(盛隆)를 후견했다.


카마쿠라(鎌倉)시대 부터의 명가



 아시나(盧名)씨는 카마쿠라 막부에게 아이즈(会津) 슈고(守護)에 임명 받은 칸토우(関東) 미우라 씨(三浦氏)의 후손이다. 그 사이에 남북조 동란 이후 하극상(下剋上)의 시대를 거쳐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온 일찍부터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이기도 하다. 특히 칸토우(関東), 토우호쿠(東北)는 카마쿠라 막부 붕괴의 영향을 받아 센고쿠(戦囯)의 모습을 띠는 것이 빨랐다. 그러한 곳에서 200여 년을 살아 남은 것이다.


 선조 이래 쿠로카와(黒川)를 거점으로 하여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는데 모리타카(盛高), 모리시게(盛滋)의 부자간의 싸움이 일어나 한 때 내란상태에 빠졌으나 모리시게의 동새 모리키요(盛舜) 1521년 가독을 이은 후부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짧은 시간의 평화가 모리키요의 아들 모리우지(盛氏)의 커다란 비약을 가능하게 했을 지도 모르겠다.


모리우지 역사의 무대에 등장


 모리우지 자신이 영토 확장의 욕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알 수가 없지만 아이즈(会津)슈고(守護)라는 직책에 앉아 있는 이상 주변 영토 다툼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슈고로써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권익이라는 것이 있다. 1543(천문 11) 원래는 가신의 위치에 있던 야마노우치 키요미치(山內 舜通)에치고(越後)의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와 손잡고 아시나의 군세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 당시 충분히 힘을 기르고 있던 모리우지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이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에치고가 배후에 있다는 것이 아이즈의 아시나씨에 있어서는 바다로 통하는 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모리우지는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의 행동을 취해 역대 아시나씨의 지배 영역을 훨씬 넘어서 영토를 넓히고, 외척인 시라카와(白川) 유우키(結城), 스카가와(須賀川)의 니카이도우(二階堂), 니혼마츠(二本松)의 하타케야마(畠山), 타무라군(田村郡)의 타무라(田村)씨까지도 신종 시켰다고 한다. 이 시기의 지배영역은 아시나씨의 긴 역사 속에서도 최대의 규모에 달했다고 한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죽은 후, 에치고의 [오타테(御館)의 난[각주:1]]의 틈을 타서, 오가와(小川)의 오다기리(小田切)씨 영토 주변을 탈취, 영토를 확대하였다. 이렇게 지배영역의 확대에 성공한 모리우지는 북쪽으로는 다테(伊達)씨와, 남쪽으로는 사타케(佐竹)씨와의 접촉이 늘어만 갔다. 특히 사타케씨와의 관계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간다.


생각처럼 되어가지 않는 말년.


 1568년 즈음 모리우지는 [止止斎=시시사이]라는 호를 칭한다. 쿠로카와성을 세자인 모리오키(盛興)에게 물려주고 새로이 은거할 성으로 만든 오오누마 군(大沼)에 있는 이와사키(岩﨑)성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리오키는 병에 자주 걸리는 몸인 듯, 그 후에도 모리우지는 이와사키성에 있으면서 모리오키의 정무(政務)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1574년. 결국 모리오키는 부친보다 먼저 병에 쓰러진다. 향년 26세라 추정된다.


 모리우지는 서둘러 모리오키의 부인(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의 딸)을 양녀로 삼아, 니카이도우(二階堂)씨의 모리타카(盛隆)를 사위로써 받아 들이기로 한다. 모리타카는 니카이도우씨의 인질로써 모리우지가 어렸을 때부터 교육시켜 온 인물로써 우선 안심할 수 있기는 했지만 모리우지는 이와사키 성을 나와 쿠로카와 성으로 돌아와 어린 모리타카의 정무(政務)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과 동시에 정무의 방침도 그 때까지와는 약간 바뀌었다. 그 때까지는 니카이도우씨와 시라카와(白川)의 유우키(結城)씨와 협력해서 북상하는 사타케씨와 대결하는 자세를 견지해 왔지만 1577년 즈음부터는 양 씨를 설득해서 사타케씨와의 협조노선을 펴게 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사후에 최대의 적이 없어진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関東) 통일을 목표로 활발한 군사 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

 또 하나는 같은 해 겐푸쿠(元服[각주:2])를 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차츰 오슈우(奧州) 남반부 제패의 야망을 나타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테-타무라(田村) 연합군의 위협에 대해서는 아시나, 사타케를 중심으로 한 니카이도우, 유우키, 이시카와(石川), 이와키(岩城)의 결속을 급속히 모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배치를 끝낸 1580년 6월 17일. 아시나 모리우지는 쿠로카와 성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향년은 60세라 전해진다.


 물론 모리우지의 뒤를 이은 모리타카는 모리우지의 정책을 계승했다고 한다. 모리우지의 치세기(治世期)에 아시나씨의 지배영역이 최대가 되었고 지배체제도 또한 굳건해 진 것은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止止斎]라는 인감을 사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우에스기 켄신 후계자 싸움. 두 양자인 친족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호우죠우(北条)씨에서 온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 景虎) 사이의 내란. [본문으로]
  2. 무장이 성인식을 치루는 것. [본문으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636 5 24 병사(病死) 70.

1567~1636

센다이(仙台) 번조(藩祖). 하타케야마 씨[畠山氏]를 물리치고 '스리아게하라(摺上原) 들판의 전투'에서 사타케[佐竹], 유우키[結城] 연합군을 격퇴. 아시나[芦名]를 멸망시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小田原] 공격에 참가하지만 늦게 참진하는 바람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게 된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에 가세하여 우에스기(上杉)와 싸웠다.









화려한 다테 씨(伊達氏)의 전통


 현대에서도 [다테수가타=だて姿-멋진 모습]라던가 [다테메가네=だて眼鏡-멋내기 위해 쓰는 테만 있는 안경]라는 단어는 멋을 낸다거나 화려함을 뜻하는 의미로 통용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은 이외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滿]의 시대. 다테 모치무네[伊達 持宗]라는 오우슈우[奧州]의 호족이 일부러 쿄우토[京都]까지 상경해서는 화려하고 진기한 토산품들로 인사하고 다녔다. 이후 다테씨는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상경해서 화려하게 물품을 뿌리고 갔다.

 모치무네의 아들 나리무네[成宗]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일부를 소개해 보자면, 쇼우군[将軍] 요시히사[義向]와 전대 쇼우군[前将軍] 요시마사[義政]에게는 명마 20두 씩과 사금 백 냥 씩을 각각 받친 것 외에 쇼우군의 생모 히노 토미코[日野 富子]를 시작으로 주요한 사람들에게 총 말 95,도[刀] 28자루, 사금 380냥과 그 외의 명산품 등을 합쳐 막대한 양의 물품을 헌상했다. 그 이후로도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 되었기에 쿄우토에서 다테라고 하면 화려함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다테씨는 그 후에도 쇼우군의 이름 중에 한자를 받아 적자에게 히사무네[尚宗], 타네무네[稙宗], 하루무네[晴宗], 테루무네[輝宗]등으로 이름을 지어왔다. 단지 테루무네의 즈음에는 쇼우군의 권위가 떨어져서인지 마사무네에게는 다테씨 중흥의 선조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사무네의 젊었을 때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방불케하는 면이 있다. 모친에게 사랑받는 동생을 살해해서 영내를 통일하고 주변을 침략하여 세력을 넓혔다. 마침내 숙적 아이즈[会津]의 아시나[盧名]를 물리쳤으나 이미 중앙에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공격을 계획하며 천하인(天下人)가 되려 하고 있었다. 마사무네가 천하를 잡기에는 30년이나 늦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마사무네는 전신 백색으로 된 죽어서 입는 옷을 입고서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이런 의표를 찌르는 마사무네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의를 읽고 늦게 참가한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 뒤에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각주:1] 마사무네는 또 한번 백색으로 된 옷을 입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때는 화려한 사형대를 세워 들고서는 쿄우토로 갔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쥔 것은 늙어서였다. 토요토미씨에게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다테 마사무네는 토우호쿠[東北] 지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이것이 이에야스와 마사무네의 연계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서일본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마사무네가 동일본 전체에서 동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결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평정이 우선 이루어지자 이에야스는 안정을 위해서 무장들의 영토를 바꾸는 일에 착수한다. 당초 만석을 약속받았던 다테씨였지만 이에야스의 눈을 피해 뒤에서 행한 조그만 음모[각주:2]가 폭로되어 오우슈우[奧州] 60만여석을 받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백만석의 꿈을 포기한 마사무네가 아니었다. [千代=센다이]라고 하는 숲과 습지대에 둘어쌓인 토지를 [仙台=센다이]로 이름을 바꿔서 성과 성 밑 마을의 건설을 착수했다. 동시에 1605 황무지의 토지조사[検地]를 명했다. 이 후 때때로 검지를 행해 병농지를 늘려 갔다. 거기에 키타가미[北上], 하자마[], 에아이[江合] 3대 하천에 개수를 행하고 이시노마키[石卷]에 항구를 열어 산물이 모여들게 했다. 이런 토목사업에 의해 새로운 농지 개발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센다이 번[仙台藩]에서는 매미제도[買米制度]라고 하는 세금[年貢] 이외에 남은 쌀을 번[]이 사주는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어 농민들의 의욕을 높였다. 이렇게 증산된 쌀은 배편으로 이시노마키 항에 모여져 에도[江戶]로 가져가 팔아 치움으로써 번의 재정을 윤택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오모테다카(表高[각주:3])는 낮았지만 실질 백만석을 달성했던 것이다.


최후의 봉공[奉公[각주:4]]과 죽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가 죽을 때 센다이에서 순푸[駿府]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바쿠후의 관료 중 일부는 '다테씨의 모반인가?'라며 긴장하는 일막도 있었다고 한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죽을 때도 에도로 달려갔다. 이에야스도 히데타다도 막부의 후사를 마사무네에게 맡겼다.


 1636 2월. 70세를 맞이한 마사무네는 자신이 주최한 마지막 사냥에 모인 사람들에게 후사를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섞어 가며 접대를 했다고 한다. 4월에 에도로 출사하여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를 알현하였는데 안색이 너무도 나쁘다고 하여 이에미츠는 의사를 파견시키는 한 편, 5 21일에는 이에미츠 자신이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3일 후인 24일. 에도 사쿠라다 번저[桜田藩邸]에서 숨을 거두었다.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세상의 어둠을 밝혀 간다.

りなきだてて
らしてぞ[각주:5]
 마사무네가 죽을 때 남긴 시이다.

  1.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 때 뒤에서 반란군을 책동했다는 의혹. [본문으로]
  2. 와가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지원하여 이에야스 측에 선 난부[南部]씨의 영토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 [본문으로]
  3. 막부에 신고 된 공식 석고(石高) [본문으로]
  4. 막부가 다이묘우에게 부과한 일. [본문으로]
  5. 정확하지 않다. 단어의 뜻에 불구하니 유념하시길. [본문으로]

다테 하루무네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11. 08:46 Posted by 발해지랑

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

1577 12 5 병사(病死) 59.


1519~1577.

다테(伊達)씨 제 15대 당주(当主). 동생 사네모토(実元)에치고(越後) 우에스기(上杉)()에 양자로 들어가는 문제로 부친인 타네무네(稙宗)를 유폐하여 [텐분(天文)의 난]을 일으킨다. 가중에서는 권력의 강화에 힘썼고, 외교에서는 11명의 자식들로 동북 여러 가문들과 연을 맺어 다테 씨의 지위를 높였다.






부친은 토우호쿠(東北) 호족들의 영웅.

 

 1522년.

 그 전년에 쇼우군(将軍)이 된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는 대대로 쿄우()에 올라와 인사를 해 온 다테 타네무네에게 므츠(陸奧)국 슈고쇼쿠(守護職)의 임명서를 주었다. 타네무네는 일약 바쿠후(幕府)의 관직을 얻어 일개의 호족에서 다이묘우(大名)로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아들에게 장군의 이름 한자를 얻어 하루무네(晴宗)로 이름 짓는 것도 허락 받았다.


 원래 토우호쿠(東北)지방은 토지의 생산성이 낮아 말을 키워 헌상하는 것 외에는 산물을 받칠 수가 없었다. 헤이안(平安) 즈음부터 금()을 산출할 수 있게 된 후 후지와라(藤原) 4대의 화려한 시대가 지난 후부터 차츰 촌락이 발달해 조정의 관직도 임명 받게 되고 바쿠후(幕府)에서도 오우슈우탄다이(奧州 探題)가 설치 되었다. 탄다이의 핏줄을 잇는 오오사키(大崎), 모가미(最上)의 양 가문이 다른 슈고쇼쿠(守護職)의 후예와 함께 차츰 센코쿠 다이묘우(戦囯 大名)가 되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다이묘우(大名)다른 지방에서 임명, 파견된 자들의 후손들이었기에 오우슈우(奧州) 지방의 토박이인 다테씨가 슈고쇼쿠를 받은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던 것이다.


 타네무네는 다테군() 외에 10개의 군()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진카이슈우(塵芥集)]라는 법령집을 만들었다. 이것은 전시대인 카마쿠라(鎌倉)막부의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과 똑같다고 하기에 문화적인 후진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내용은 당시 토우호쿠지방 독특한 농촌사정도 반영되어 171개조에 걸쳐 세분화되어 있다. 이렇게 군사, 정치, 경제, 재판권에 걸쳐 영지 지배의 기반을 세워 올렸다.


하루무네와 텐분의 난.


 타네무네의 명예욕은 더욱 커져 모친 쪽의 가문인 에치고(越後)의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実)에게 친아들이 없자 자신의 차남 토키무네마루(時宗丸)를 양자로 보내는 공작을 하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즈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의 부친)에게 불순한 움직임이 있어 분쟁이 진정될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1542(천문 11) 6월.

 정예병을 이끌고 에치고에 가려고 했던 타네무네를 장남 하루무네가 반대하여 갑자기 부친을 유폐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단순한 부자간의 싸움이 아니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내란이 점차 근린으로 확대되어 타무라(田村), 니혼마츠(二本松), 소우마(相馬), 모가미(最上),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 쿠로카와(黒川), 이와키(岩城) 등의 다이묘우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까지 끌어 들여서는 7년에 걸쳐 싸우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어째서 이러한 사태가 되었느냐를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인척관계에 의한 동맹은 일대(一代)로 끝나는 것으로 다음 세대가 되면 그대로 동맹이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다테씨만의 문제가 아닌 다른 곳도 비슷한 사정이었기에 결국은 세대간의 항쟁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복잡해 지면 대개혁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무네(다테씨 15대 당주)는 우선 본거지를 대대에 걸쳐 지켜왔던 다테군()에서 데와(出羽) 오이타마(置賜)군의 중심지 요네자와(米沢)성으로 옮겨 다테씨가 명실공히 일신되었다는 것을 내외에 알렸다. 거기에 1553(천문 22) 1월 내란의 논공행상이라는 명목으로 영지 재편을 단행하였다. 반항했던 신하의 영지는 몰수하는 식으로 가신들의 영지를 대담하게 맞바꾸었다. 이것은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행한 전국적인 영지 바꾸기의 소규모이지만 선행판(先行版)이라 할 수 있는 효과를 올려 일족(一族), 일가(一家), 토자마(外様)라는 가신단의 서열을 확립했다.


말년은 오우우(奥羽)지배의 포석


 영내의 정비에 성공한 하루무네는 말년까지도 오우우 일대에 다테가문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 갔다.

 하루무네 자신의 정실은 아시나(盧名)씨의 출신이며, 아시나씨에게는 여동생이 시집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즈(会津)의 유력 다이묘우와는 2중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 위에 자매의 연으로 소우마(相馬), 니카이도우(二階堂), 타무라(田村), 카케다(掛田)씨와는 인척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갖추어지자 하루무네는 세자인 테루무네(輝宗)를 모가미 씨의 딸과 결혼[각주:1]시켰고, 이와키성에는 차남 치카타카(親隆), 루수(留守)씨에게는 삼남 마사카게(政景), 이시카와씨에게는 아키미츠(昭光), 코쿠부(囯分)씨에게는 모리시게(盛重) 등등 정치력을 배경으로 한 강제적으로 양자를 들여보냈고, 딸들을 사다케(佐竹)씨와 니카이도우(二階堂)씨에게 시집보냈다.


 타네무네, 하루무네 2대에 걸쳐 다테씨는 오우슈우(奧州)의 패권을 쥐기 위한 싹을 틔우려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1565년 가독을 상속받은 아들 테루무네(輝宗) 조부나 부친의 미지근한 센고쿠(戦囯) 다이묘우(大名)제를 거부해서 부친 하루무네와 대립한다. 테루무네는 인척관계에 의존하는 동맹을 맺지 않고 아들인 본텐마루(梵天丸 후에 마사무네(政宗))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 세력을 확대해 가는 것을 하루무네는 은거한 시나오(信夫)군 스기노메(杉目)성에서 계속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1577년 12월 5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테루무네는 불행하게도 뜻을 펼치는 도중에 죽게 되나 그 뒤를 마사무네가 이어받아 무력에 위한 오우슈우 제패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1. 이들과의 사이에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태어났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