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8년 3월.
 천하에 용명이 자자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켄신은 평생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기에 친자식이 없어 자연스레 후계 다툼은 켄신의 양자 중 둘로 압축되었다.
 한 사람은 동족[각주:1]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와 켄신의 누나 센토우인[仙桃院]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게카츠[景勝], 또 한 사람은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의 성주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아들 카게토라[景虎]였다.

 카게카츠는 부친 마사카게가 켄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뒤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 定満]에게 살해[각주:2]당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친과 함께 켄신 아래서 자랐는데, 켄신과는 친척인 것도 있어 켄신에게 귀여움 받으면서 자랐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위해서 손수 습자첩(習字帖)을 만들어 주었으며, 켄신이 에치고를 통일했을 때 받은 ‘단죠우쇼우히츠[弾正少弼][각주:3]’의 관직명을 카게카츠에게 물려주었다. 그런 점 때문에 켄신은 카게카츠를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라 여겨졌다[각주:4].

 하지만 켄신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유언도 남겨지질 않아 카게토라에게도 충분히 후계자의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켄신의 장례식도 치러지지 않은 채 카게카츠와 카케토라 사이에 상속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 에치고를 둘로 나누는 쟁란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이라고 한다.
 다음 해인 1578년 3월 카게카츠는 오타테의 난의 승자가 되었다. 이때 카게카츠의 나이 25세였다.

 카게카츠는 과감한 무장이었다.
 오타테의 난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1582년 3월.
카이[甲斐]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멸문시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명령하여 우에스기 공략을 시작[각주:5]한 것이다. 카게카츠는 각오를 정했다. 칸토우[関東]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에게 그런 결의를 담아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활과 화살을 들고 에치고 하나만으로 일본 전토 60여주와 싸우려고 합니다. 일전을 치러 멸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명예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운 좋게 살아 남는다면 일본에 비할 바 없는 영웅으로 이름을 남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면목을 세우는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사옵니다.[각주:6]

 또한 시대는 나중이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의 도화선이 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생트집[각주:7][각주:8]이 있었을 때, 카게카츠는 휘하의 장수들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모반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냥 나이후[内府=
이에야스]에게 굴복하는 것도 내 뜻과 다르다. 이제는 결심했다. 싸우게 되면 우리 가문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지금 떠나도록”
 카게카츠가 실제로 저렇게 말했는지는 둘째치고 시국에 정면으로 맞서려 한 카게카츠다운 일화이다.

 카게카츠의 직속부하들은 카게카츠를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정말 추상같은 위엄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카게카츠는 직속부하들에게 단 한번도 따스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미소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카게카츠는 한 마리의 원숭이를 길렀다. 어느 날 이 원숭이가 카게카츠의 두건을 쓰고 카게카츠의 자리에 앉아 깍지를 끼고서는, 잘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명령을 내리는 흉내를 내었다. 아마 카게카츠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카게카츠는 웃었는데, 이 웃음은 카게카츠가 근신들에게 보인 생애 유일한 웃음이었다고 한다.

 또한 어느 때인가 후지가와[富士川] 강을 건널 때, 한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가라앉으려 하였다. 카게카츠는 노기 서린 얼굴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배에 있던 부하들은 일제히 강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어 카게카츠가 쿄우토[京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 이하 수백 명의 행렬은 너무도 조용하여 기침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고 오로지 사람과 말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는 막부군에 속하여 오오사카 시기노[鴨野]에 포진하였다. 그곳을 니와 나가시게[丹羽 長重][각주:9]가 방문하였는데, 그때 카게카츠는 몸에 갑주도 걸치지 않고 청죽(靑竹)으로 지팡이 삼아 걸상에 앉아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좌우에는 장병 300여명 모두가 창을 세우고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카게카츠와 함께 오오사카 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깃발은 켄신 때부터 이어져오는 감색 바탕에 히노마루[日の丸]의 부대표식[馬標]과 [毘]의 깃발을 치켜세운 진중은 너무나도 숙연하였다.
 나가시게는 군기가 너무도 빠릿빠릿한 그 모습에 뻑이 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시대를 앞으로 되돌려 1582년 4월부터 시작된 오다 군[織田軍]의 우에스기 공략은 6월 3일 엣츄우[越中]에 있는 우에스기의 속성(屬城) 우오즈 성[魚津城]이 함락되어 카게카츠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바로 이 전날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는 바람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건을 알게 된 오다 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카게카츠는
히데요시[秀吉]를 차세대 패자(覇者)로 보고 접근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오대로(五大老)[각주:10]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아이즈[会津] 120만석[각주:11]으로 당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에 이은 제3위이란 거대한 영지를 하사 받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카케카츠의 인생은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계속 보내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바뀌게 된다.

 천하를 향한 이에야스의 야망이 명확해지자,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지를 다스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1599년 고굉지신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함께 아이즈로 귀국하여, 이후 이에야스의 상경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내(領內)에 있는 성곽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이미 이에야스와의 전쟁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미리 손잡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카게카츠는 이에야스가 물러간 다음에도 병사들을 이에야스의 본거지 에도[江戸]가 있는 남쪽으로 보내지 않고, 배후에 있는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영지 야마가타[山形]를 공격하기 위해 나오에 카네츠구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카네츠구는 야마가타 성[山形城] 근방까지 진격했지만, 그때 이미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서군(西軍)이 패한 뒤였다. 카게카츠는 결국 항복의 길을 택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555년생. 처음엔 키헤이지[喜平次]. 가독(家督)을 이은 얼마 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항복하여 이후 충성을 다했다. 1586년 에치고[越後]를 중심으로 55만석을 영유했으며, 후에 토요토미[豊臣]의 성(姓)과 하시바[羽柴]의 씨(氏)를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임진왜란에도 참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의 패전으로 아이즈 [会津]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되어 이봉되었다. 1623년 죽었다. 69세.

  1. 켄신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가독을 물려받기 전의 성이 나가오[長尾] [본문으로]
  2. 보통 둘이 배타고 연못에서 놀았는데 술에 취해 둘이서 수영하다 익사하였다고 하며, 켄신에게 반항적인 마사카게를 여명 얼마 안 남은 사다미츠(76세)가 살해함으로써 주군 켄신을 편하게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군기물 北越軍談 이야기라고 한다. [본문으로]
  3. 관리를 감찰하는 기관 '단죠우다이[弾正台]'의 차관. 억지로 우리나라의 기관과 비교한다면 감사원 공직감찰본부장 쯤? [본문으로]
  4. 근래에 들어선 에치고의 영주에는 카게카츠,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는 카게토라에게 물려주려 한다는 시각이 대세인 듯. [본문으로]
  5. 엣츄우[越中] 방면에선 시바타 카츠이에, 시나노[信濃] 측에선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코우즈케[上野]에선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각각 카게카츠의 에치고[越後]를 노렸다. [본문으로]
  6. 사실 이때는 정세가 이렇게 사면초가가 되고 나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고,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노부나가와 화해하려고 노력했었다. [본문으로]
  7. 一. 영지 경영하지 말고 빨리 상경해라, 一. 어쩌면 조선을 다시 공격할 수도 있으니 그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 一. 에치고[越後]의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가 말하길 카게카츠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 一. 어째서 무기 사들이고, 길이나 다리를 고치며, 성을 새로 쌓고 있나? 등 [본문으로]
  8. 그러나 사실 우에스기 가문이 정비한 길이나 새로 만든 성 등은 모가미 영토로 침입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카게카츠에게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났을 때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영토로 침입하여 탈취하려 했던 것 같다. 또한 성을 새로 짓는 행위는 히데요시가 엄히 금했던 것이었던 만큼, 이에야스가 괜한 생트집을 잡는다고는 할 수 없다. [본문으로]
  9.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의 아들. 이 당시 히타치[常陸] 훗토 번[古渡] 1만석의 번주. [본문으로]
  10.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1. 아이즈[会津] 92만석, 사도[佐渡] 14만석, 쇼우나이[庄内] 14만석. [본문으로]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623 3 20 병사(病死) 69

1555 ~ 1623.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의 차남. 외숙부인 켄신(謙信)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의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해 토우호쿠[東北]에서 다테 가문[伊達家], 모가미 가문[最上家]과 싸우지만 서군의 패배로 항복. 아이즈(会津)에서 전봉(転封)되어 요네자와 번[米沢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후계자 다툼에서 승리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은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기 때문에 친자식이 없었지만 양자는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누나가 시집간 동족의 우에다[上田] 사카토 성[坂戶城]의 성주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의 둘째 아들 카게카츠[景勝] 1559 카게카츠의 나이 5살 때 양자로 삼았다.

 또 한 명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7남 우지히데[氏秀] 처음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양자로 보내졌으나 호우죠우와 타케다의 동맹이 끊어지면서 본가로 돌아온 것을 다시 우에스기와 동맹을 맺을 때 다시 인질로 온 것을 불쌍히 여긴 켄신이 자신의 전 이름[카게토라(景虎)]를 주어 양자로 삼아 카게카츠의 여동생과 결혼시켰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두번째 성곽[二の丸]에 살게 하며 '御中城様[고츄우죠우사마]'라 부르게 하고 군사를 이끌게 했기 에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정하지 않고 급하게 죽었기 때문에 두 사람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다.


 무력대결이 되면 형으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 매제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를 빽으로 두고 있는 카게토라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겨졌으나, 카게카츠는 재빨리 카츠요리와 불가침조약을 맺고 오다와라[小田原]의 원군이 미쿠니토우게 언덕[三国峠]을 넘어 도착하기 전에 단기 결전에 임해 카게토라를 사메가오 성[鮫ヶ尾城]으로 몰아 자살시키고 승리했다.


토요토미[豊臣]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고, 남보다 한 발 앞서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원수를 갚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천하 평정을 목표로 에치젠[越前]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공격을 시도하기에 앞서 카게카츠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때 저울질 하지 않고 곧바로 응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은 카게카츠는[각주:1] 1598년 1월 10 에치고[越後] 91만석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移封)되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揮元],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와 함께 오대로(五大老)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그 해 3 15다이고 사[醍醐寺]에서 꽃구경(花見)를 개최한 뒤에 병으로 쓰러져 8 18일에 후시미 성[伏見]에서 죽었다.


 다음 해(1599) 3 3일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까지 병으로 죽자 이에야스[家康]의 전횡이 심해져 갔다.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토를 정비한다는 이유로 아이즈[会津]로 귀국해서는 토요토미 가문의 장래를 걱정하며 새로이 성을 쌓고 군비를 증강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아이즈[会津]공격에 대응하다.


 카게카츠는 에치고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의 고소로 인한 이에야스의 힐문과 상경(上京) 요구를 뻣뻣한 태도로 거절했기 때문에 화가 난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공격을 결의하여 6 18일 후시미 성에서 출진한다. 하지만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까지 진군한 7 24일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거병하여 미노[美濃] 오오카키[大垣]로 출진했다는 급보가 도착했으므로, 이에야스는 둘째 아들인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를 우에스기의 대비책으로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에 남겨 놓고 재빨리 에도[江戶]로 돌아갔다.[각주:2] 남겨진 유우키 히데야스는 키누가와 강[鬼怒川]을 사이에 두고 우에스기 군()과 대치하며 도발해 왔으나 카게카츠는
 "
나이후도노[內府殿[각주:3]]가 공격해 왔기에 응한 거다. 되돌아 갔다면 이 쪽도 군을 물린다. 우에스기는 빈집털이는 하지 않는다"
 고 말하며 돌아 갔다고는 하지만
실은 배후에 있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진공(進攻)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가명(家名)을 남기다.


 이런 시원시원한 카게카츠의 태도가 맘에 든 히데야스[秀康]는 전후 처리의 자리에서 중신들과 함께 카게카츠를 변호하여,
 
"
카게카츠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모반은 확실치 않으며, 미츠나리와 미리 짜고 우리에게 공격한 것도 아닙니다. 우에스기[上杉]는 후지와라[藤原]의 분가로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이래의 명문. 카게카츠는 타이코우[太閤][각주:4]를 섬긴 이래로 사리에 맞는 행동을 해 온 정직하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입니다. 징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가명(家名)만은 존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 조명()에 힘써 이에야스[家康] 설득시켰다. 이에야스는 할 수 없이 아이즈[会津] 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滅封)시키는 것으로 카게카츠를 용서했다.


 1603 2월 막부에게 에도[江戸]의 소토사쿠라다[外桜田]에 저택을 하사 받은 카게카츠는 이곳을 요네자와 번저[米沢藩邸[각주:5]]로 삼았다. 카게카츠 나이 49세에 막번 체제(幕藩 體制)하에서 초대 번주(藩主)가 되었다. 그 후 오오사카 공성전 겨울의 진[大坂の陣 - 冬の陣]과 여름의 진[夏の陣]에도 참전하였고, 평화로운 시대가 된 에도 시대[江戸時代]에서 20년을 살다 이에야스의 죽은 지 7년 후인 1623년 3월 20 요네자와성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9세였다.

  1. 사실 응하기만 했을 뿐 히데요시를 도우지는 못했다. 카게카츠는 사방의 적들과 시바타 씨[新発田氏]의 반란으로 인해 외침을 할 능력이 없었다. 때문에 종전 후 히데요시는 카게카츠에게 왜 참전하지 않았냐며 따지는 편지를 보냈다. [본문으로]
  2. 사실 처음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대비책으로 남겨졌으나,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로 이동명령을 받자 그제서야 남겨진 것이 유우키 히데야스. [본문으로]
  3. 이에야스의 관도명, 즉 이에야스를 지칭. [본문으로]
  4. 타이코우(태합)은 관백[関白]에서 물러난 사람을 지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5. 번저는 각 번(藩)이 에도(江戶)에 세워 둔 연락소 겸 참근교대 시의 숙박소. 지금의 대사관이나 영사관이라 보면 될 듯.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