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행해진 전투[合戦]에 대해서는 굉장히 복합적인 연구가 다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런 다채로운 세계가 우리들을 매료하고 있다. 이번에는 작중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전시약탈[乱取り=乱妨라고도 한다]이라는 단어를 축으로 당시의 전투 풍경에 대해 추구하고자 한다.

 [갑양군감[甲陽軍鑑]]에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한 말로 유명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투에서 이기려는 목적은 남의 영지를 점령하여 자국의 영지를 확대하는 것에 있다. 영지를 확대해야만  자국의 사람들은 은상을 얻어 기뻐한다. 때문에 소령(所領)을 얻고 거기에 또 가증을 받아 입신출세하는 것이 사무라이[侍]의 본망인 것이다.
  즉 “창 한 자루로 무공을 세워 언젠가는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다”는 사상이며 지금까지의 센고쿠 시대 전투 이미지는 이 말에 다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당시의 전투를 묘사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각서[日本覚書]]의 기사를 살펴보자. 일시를 보면 ‘1585년 6월 14일’이라고 한다. 전 661항목 중 3개 항목을 소개한다.

一. 우리들(유럽인)에게는 하사관, 소대장, 십인조장(十人組長), 백인대장(百人隊長) 등 (계급이) 있다. 일본인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一. 우리들의 국왕이나 대장은 병사에게 보수를 준다. 일본에서는 병사들 각각이 종군하면서 먹거나 마시거나 입는 것들을 전부 자비로 해야만 한다. 
一. 우리들은 토지나 도시, 촌락 및 그곳의 부(富)를 빼앗기 위해 다툼이 일어난다. 일본의 전투는 언제나 대부분이 밀, 보리, 쌀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일본 군대는 지휘계통을 가진 계급제도가 없고, 병사들은 종군 중에 식사나 의복도 전부 자비로 준비하며, 토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쌀이나 보리 등의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한다.
 프로이스는 일본 무사의 군대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핀 [갑양군감]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과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다시 [갑양군감]을 보면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텐분11년[각주:1]에 행해진 [다이몬 고개 전투[大門峠合戦]]의 한 구절이다.
10월 7일에 코우후[甲府]를 출진했다. <중략> 25일에는 우미지리[海尻=현 미나미사쿠 군[南佐久郡]]로 출진하시는 것이 결정되자 주민의 가옥을 부시고[小屋落し][각주:2], 약탈[乱取り], 전답에 남아 있던 농작물 약탈[刈田働き]를 행하는 잡병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중략> 약탈이 3일간 밤낮에 걸쳐서 행해졌다. 내일부터는 조금 멀리 약탈하러 나가고자 하여 아침에 출발 저녁에 본진에 돌아왔다.
 여기서 나오는 약탈[乱取り]이라는 것은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납치, 물건의 약탈 등을 말하는 단어다. 전쟁하러 간 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 사용할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등 모든 것을 빼앗았다는 묘사다. 
 결국 4일 후 신겐은 스와 대명신[諏訪大明神]에게서 신탁을 받았다는 형식으로 약탈을 정지시킨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은 프로이스가 기록한 것을 방불케 하여 군단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잡병의 약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이 당시 전쟁터 약탈[乱取り]의 실태가 아닐까? 앞서 본 ‘입신출세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약탈[乱取り]을 위한 전투'인 것이다. 유추해 보자면 신겐이 주창한 ‘사무라이의 본망’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부대를 이끄는 무장(武將)의 마음가짐이지 적장의 목을 베어 은상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잡병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 4권 19화에 등장하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1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도 ‘약탈[乱取り] 당하였다. 1550년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카오 성[中尾城]에서 농성하던 요시테루는 미요시 군의 공세에 결국 철퇴. 성을 넘겨 주고 도망쳤다.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를 살펴보자. 

오늘 밤(11월 21일), 히가시야마[각주:3] 무가[東山武家=요시테루[義輝]]의 성이 함락되었다.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중략> 그저께 불타고 남은 건물에 다시 불을 질러 약탈했다고 한다. 히가시야마 무가의 성 오늘 미요시 군세 약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미요시 군은 공성전에서 승리한 후 철저하게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쇼우군의 권위도 잡병들의 약탈[乱取り]를 막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잡병들의 약탈[乱取り]을 묵인했다. 약탈이 전투에 참가시키는 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가 보다 합리화된 텐쇼우 연간[天正年間] 즈음이 되자 ‘약탈[乱取り]’은 주로 인간을 납치하는데 의미가 좁혀진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전투의 상태를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은 전투의 작법을 볼 수 있다. 
 ①. 출진한 군단은 야전이나 공성 등의 전투를 행한다. 
 . 승패가 결정된 뒤 또는 전투가 행해지던 중에도 잡병들은 약탈[乱取り]을 한다. 쌀이나 일용품 등(또는 인간)을 약탈한다. 사무라이 타이쇼우[侍大将]나 다이묘우는 그런 약탈[乱取り]을 묵인한다. 
 . 전투에 승리하여 약탈[乱取り]이 행해지는 기간(3~4일간) 후에 푯말을 세워 [약탈 금지] 등의 명령을 내린다. 
 . 다이묘우는 점령한 영지(領地)의 지배권, 잡병은 빼앗은 쌀이나 일용품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기근에서 탈출하기 위한 전투 – 라는 측면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노부나가[信長]가 특별히 귀여워하던 하얀 매(鷹)에게 ‘란토리[乱取り] – 즉 약탈 –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란토리가 나오는 매사냥을 보기 위해서 군중이 모일 정도로 인기를 떨쳤다고 한다. 우뢰와 같은 갈채를 받으면서 사냥감을 잡는 ‘란토리’. 센고쿠 시대의 세상을 잘 표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1542년. [본문으로]
  2. 진영에 세우는 가건물을 세울 때, 나무를 베어 가공을 하면 시간이 걸리기에 주변 가옥을 부셔서 세웠고 이것을 小屋落し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아시카가 쇼우군의 정무소가 있던 지역 이름. [본문으로]

 야마모토 칸스케는 이노우에 야스시[井上 靖]의 명작 '풍림화산(風林火山)[각주:1]'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실존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이 인물을 가공의 무장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가(史家)도 적지 않았다.

 그가 일반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갑양군감(甲陽軍鑑)'이 처음이었으며, 이 갑양군감 외에 사료성이 높은 고문서류에는 칸스케의 이름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갑양군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카츠요리[頼] 2대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나 코우슈우[甲州]군의 군법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에도 시대 초기의 병법학자 오바타 카게노리[小幡 景憲]가 썼다고 한다. 굉장히 창작성이 짙은 책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근년[각주:2]이 되어 갑자기 칸스케의 실존성이 강해졌다. 그것을 증명한다고 보여지는 고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홋카이도우[北海道] 쿠시로 시[釧路市]의 이치카와 가문[市川家]에서 타케다 신겐의 서장(書狀)이 발견된 것이다. 이치카와 가문의 선조는 나가노 현[長野県] 시모타카이 군[下高井郡]에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부터 토착했던 호족으로, 키소 요시나카[ 義仲][각주:3]부터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이르기까지 고문서 150여 점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타케다 신겐의 서장은 신겐이 시나노[信濃] 노자와[沢]의 이치카와 후지와카[市川 藤若]라는 호족에게 보낸 것으로, 이 문서의 말미에 '야마모토 칸스케(菅助)의 입으로 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칸스케[菅助]가 정확하게 칸스케[勘介]라면[각주:4], 칸스케는 이 때 근습(近習)의 한 사람으로써 신겐의 명령으로 중요한 사자(使者)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덕분에 '갑양군감(甲陽軍鑑)'의 사료적 가치도 최근 역사 사료로써 재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갑양군감'에 따르면 - 칸스케의 출신은 미카와[三河]우시쿠보[牛窪], 축성술과 군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았으며 또한 무예도 뛰어났다고 한다.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섬기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칸스케는 추남에 외눈으로 거기다 손가락도 열 개가 안 되며 절름발이였기에,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는 그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대로 타케다 신겐의 흥미를 끌었다. 신겐은 피부도 검고 그렇게 추남이면서도 명성이 높은 것은 정말로 능력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라면서 타케다 가문에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신겐다운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신겐의 부하 장수인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形]가 천거하였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칸스케는 200관의 봉록이 주어졌다. 신겐 23세로 칸스케는 이미 중년을 넘긴 나이였다고 한다.

 

 그 생애의 정점에 달한 전투는 1561년 가을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い]였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타케다의 본진으로 돌격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는 것으로 유명한 격전이었다.

 이 전투는 13천의 병사를 이끌고 시나노[信濃]로 쳐들어 온 켄신이 타케다의 전선기지 카이즈 성[海津城]과 지근거리인 사이죠산 산[妻女山]에 진을 치면서 시작되었다.

 곧바로 타케다 군도 카이에서 원군을 이끌고 카이즈 성에 입성하였다.

 쌍방은 대치한 채 시간이 흘러, 9 9일에 이르자 신겐은 회의를 열어 타개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숙련된 장수인 오부 효우부 토라마사[飯富 兵部 虎昌]가 정면승부를 하여 자웅을 겨루자고 주장하자, 바바 민부 노부후사[馬場 民部 信房]도 쌍수를 들어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상대는 지금이야 말로 자웅을 겨루자고 침공해 온 군신(軍神) 우에스기 켄신이었다. 그래서 야마모토 칸스케의 계략의 채택되었던 것이다.

 칸스케의 작전은,

 타케다 군 2만의 군세를 둘로 나누어, 12천의 별동대로 내일 새벽 6시를 기하여 사이죠산를 기습한다. 그러면 우에스기 군은 놀라 치쿠마가와 강[千曲川] 건너편 평원인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퇴각할 것이다. 거기에 미리 카와나카지마에 숨겨놓은 8천의 본대가 급습하여 앞뒤에서 협격하면 적은 혼란에 빠져 우리 군은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는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딱따구리 전법[啄木鳥]'이라고 한다. 딱따구리는 나무의 벌레를 잡기 위해서 구멍 반대쪽을 쪼아 벌레를 놀라게 하여 구멍으로 나왔을 때 잡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칸스케의 지략도 군신 켄신의 혜안에는 미치지 못했다.

 

 9일 저녁.

 눈 아래 보이는 카이즈 성에서 피어 오르는 무수한 밥짓는 연기를 보고 카이[甲斐] 군의 작전을 간파한 것이다.

 켄신은 전군을 이끌고 밤중에 은밀히 사이죠산을 내려와 다음날 10일 새벽, 카와나카지마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카이 군 본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우에스기 군세는 질풍과 같이 타케다 본영을 맹공격하여 한때는 신겐도 위기에 처했지만, 오후가 되어 나타난 산에 올라갔던 타케다의 별동대 출현으로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 때, 이미 칸스케는 작전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여 적진으로 돌격하여 전사한 상태였다.

 그 목은 수하의 병사가 난전 속에서 다시 탈취하였지만 몸통은 치쿠마가와 강을 떠내려가 하류의 강변에 쌓여있었다. 그 적과 아군의 구별이 가지 않는 수 많은 시체더미에서 부하들은 결국 찾아내어 묻었다고 한다.

 현재 카와나카지마 테라오[寺尾]라는 곳에 도우아이하시[胴合橋]라는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이곳이 그 장소라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에 쓰여진 어떤 책에는 - 명군사인 그도 미관말직의 일개 검객으로 등장하며, 타케다 가문의 부장()인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부하였다고 한다.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단순한 척후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어쩌다 마사카게에게 보고하고 있는 모습이 신겐의 눈에 띄어, “저 자는 뭐 하는 녀석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뿐이라고 한다.

 

 어쨌든 아직 평가가 분명하지 않은 수수께끼의 무장이다.

 

[야마모토 칸스케(山本 勘介)]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이름을 하루유키[晴幸]라고 하며, 출가 후 뉴우도우 도우키[入道 道鬼]’. 신겐은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등에게 명하여 칸스케에게 군법을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1561년 카와나카지마에서 전사했을 때는 69세였다고 한다.

  1. 2007년도 NHK 대하드라마의 원작. [본문으로]
  2. 이 '전국무장 100화[戦国武将100話]'는 1978년도에 출판.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노토 요리토모[源 義朝]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시나노[信濃] 키소[木曽]에 있다가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이후 요리토모의 토벌군에 패해 전사. [본문으로]
  4.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동일. [본문으로]

타케다 신겐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8. 1. 12. 00:50 Posted by 발해지랑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1573 4 12일 병사(病死) 53.

1521 ~ 1573.

카이[甲斐] 슈고[守護][각주:1]. 이름은 하루노부[晴信]. 아비인 노부토라[信虎]를 쫓아내고 가독(家督)을 차지. 시나노[信濃]를 침공하였고,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다섯 번에 걸쳐 카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싸웠다.[각주:2] 스루가[駿河]를 차지한 후 상락(上洛)[각주:3]을 개시[각주:4],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쳐부수지만 노다 성[野田城] 포위 중에 병으로 죽었다.








신겐의 사인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를 만들어, '천하 전국에 있어서는……[天下戦国……]'을 언급하며, 왕도(王道)국가 실현을 목표로 했던 타케다 신겐은 1573 4 12 53세의 나이로 시나노[信濃] 이나 군[伊那郡] 코만바[駒場]에서 불귀의 이 되어 버렸다.


 그 사인에 대해서는 철포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는 설과 병사설(病死說)이 난무하며 유포되었다.
 
철포설은 '미카타하라 전투기[三方原合
]', '무덕편년집성[編年集成]'[각주:5] 등 그 외에도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탄환에 맞은 자리라는 곳도 미간, 귀 근처, 넓적다리 등이 있어 여러가지 억측, 풍문 등이 섞여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에 대해 병사설도, '갑양군감[甲陽軍鑑]', '칸토우 칸레이 기[東管領記]'를 시작으로 많이 있는데, 사실적으로 보자면 후자 쪽이 물론 옳으며, 그 병 상태는 1570년 즈음부터 서서히 자각 증상을 느낄 정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른 조바심이 서상작전(西上作戰)강행(强行)으로 이어진 것이다.


 병사설의 근본 사료로써는, 미슈쿠 켄모츠[御宿 監物][각주:6]의 보고서나 '현공 불교에 대한 말씀[玄公事法語]' 등이 있다. [코우요우군칸]을 보면 품 제39에,

계유(癸酉) 2월 중순에 전장(戰場)에서 네 곳에 뜸을 뜨시고 몸에 좋은 약을 여러가지 취하셔서 몸이 나아지셨다
라고 쓰여 있지만 곧이어 악화되어 임종의 때를 맞이해 버린 것이다.


 갑양군감에는

4 11일 미시(未の刻)[각주:7]부터 신겐공 상태가 나빠지셔서 맥박이 굉장히 빨라졌으며, 또한 12일 밤 해시(亥の刻)[각주:8] 토하면서 이빨 5~6개가 빠졌다. 그때부터 차츰 약해지며, 이미 죽은 목숨이니 맥이 뛰고 있을 때 말해두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며, 후다이[譜代]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과 일문(一門)들을 불러들여, 6년 전 스루가[駿河]로 출진하기 전에 이타자카 호우인[板坂法印][각주:9]이 말하길 [카쿠()]이라는 병의 징후가 있다고 했을 때 조심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굉장히 진상에 가까운 기록일 것이다.


 미슈쿠 겐모츠의 보고서를 보아도,

폐와 간(肺肝)을 아프게 하던 것이 배로 전이되어 편안치 못하시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쿠마가이 가문 전기[熊谷家]'를 보면,
11일 밤. 총대장 신겐 공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공성(攻城)의 포위를 풀고 진을 물리셨다. 날이 밝은 12일 네바[根羽]에서 숨을 멈추시다(중략), 타구치[田口]의 후쿠덴 사[福田寺]에 머무시던 밤에 이빨 6개가 빠졌으며, 이 병은 곽(癨)[각주:10]이라는 풍문을 들었다
고 한다.


 이런 여러 설을 종합하여, 메이지[明治] 시대에 야마나시 현[山梨県][각주:11] 현립병원장을 역임했던 의학사(醫學士) 무라마츠 가쿠스케[村松 佑]가 병명인 '(카쿠()'이라는 것은 위암(胃癌)의 옛날식 호칭으로, 또한 '폐와 간(肺肝)'이라는 것도 오장(五臟)이라는 뜻이기에 신겐의 죽음은 필시 위암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후 이 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학회에서 인정 받고 있다.


'3년간 상()을 숨기라'는 유언


 이러한 신겐의 죽음이 국내외에 끼친 영향은 거대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신겐을 마음속으로 따르던 중신(重臣)들이었으며, 동시에 신겐도 또한 통한의 미망(迷妄)에 잡혔을 것이라 생각된다.


 몇 개인가의 유언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3년간 상을 숨기라'는 것이 있다. 만약 신겐의 죽음이 적국(敵國)에 알려진다면, 그야말로 총반격을 맞이하여 타케다의 영토는 곧바로 위기와 혼란에 빠질 것이기에 적어도 3년간은 죽음을 숨기라는 것으로, 그렇기에 장례식도 치르질 않았고 형식적으로는 비밀이 지켜진 것이었다.


그러나 후계(後繼)의 비밀은 3개월 만에 깨어져, 후계자인 카츠요리[頼]도 부친의 죽음을 끝까지 숨기지만은 안았다. 오히려 갑양군감 품 제39에 기록되어 있는 유언 부분은 격조(格調) 높고 감동이 담긴 문장이 쓰여 있어, 가슴을 울리는 것이 있다.

……신겐공 고통을 참으시며 말씀하시길,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감히 우리 땅에 침입하는 놈이 없을 테니 3년간 방비를 철저히 하라며 눈을 감으셨지만, 한편으론 야마가타 사부로베에[山県 三兵衛][각주:12]를 불러, 내일은 자네의 깃발을 세타[田][각주:13]에 세우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이 흔들리셨다. 그러나 조금 뒤 눈을 뜨시며 말씀하시길,

대부분은 땅에 맡겼으니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도 없이 내 인생은 풍류였다
(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하단 역자 주)’
고 말씀하셨다. 53세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내일의 이슬로 사라지셨다


 이렇게 신겐의 '3년간 상을 숨겨라'는 것은 굳게 지켜져, 많은 모순을 품으면서도 뒤를 이은 카츠요리는 1575 4 12 부친의 죽음으로부터 3년 뒤에 중신인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코우야 산[高野山]에 파견하여 법요(法要)를 치르게 함과 동시에, 다음 해인 1576 4 16일에 신겐의 장례식이 보제사(菩提寺)인 에린 사[恵林寺]에서 카이센[快川] 도사() 맡아 성대히 치러졌다.


Ps; 이 글을 쓰신 분은 우에노 하루오[上野 晴郎]. 타케다 가문 연구에 대해선 꽤나 유명하신 분 같으신데, 대부분 고어로 쓰신 글이라 그야말로 oTL. 누누이 말씀 드렸다시피 전 고어를 잘 모릅니다(--;) 전부 의역이니 실제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돌 날라오기 전에 피해야지~)

Ps2; 이 글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실 분 대환영입니다.


하단역자 주


신겐의 죽을 때 남긴 시(世辞)는 일본에서도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가령 http://www5a.biglobe.ne.jp/~shici/jpn49.htm에서 본 바에 따르면,

원어는 [大底還他肌骨好 不塗紅粉自風流]인 듯하여, 윗글의 [()] 부분이 여기선 [()]로 되어 있습니다. 저 유언은 보통 한문의 문법과는 또 다르고, 중세 일본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겨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요시다 유타카[吉田 豊]()가 현대문으로 편역한 [갑양군감(甲陽軍鑑)-間書店]에 따르면,
'
내 불후의 생명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의 육체에 전하마. 그것은 조금도 꾸밈없는 나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라고 합니다.
참고로 책의 부분의 이미지(그 블로그에 있는 사진입니다.)


  1.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2. 4차를 제외하고는 서로 대치한 끝에 물러났다. [본문으로]
  3.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4. 상경설과 미카와-토우토우미 제압설이 있다. [본문으로]
  5. 18세기에 저술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일대기. [본문으로]
  6. 신겐의 주치의. [본문으로]
  7. 13~15시 사이. [본문으로]
  8. 21~23시 사이 [본문으로]
  9. 당시 신겐의 주치의. [본문으로]
  10. 일본 발음으로 '카쿠’로 ‘격(膈)’과 같은 발음. [본문으로]
  11. 과거 카이(甲斐)가 현재 야마나시 현에 속해있다. [본문으로]
  12.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를 지칭. [본문으로]
  13. 동쪽에서 쿄우토[京都]에 들어갈 시에 예전엔 반드시 거쳤다는 곳으로, 깃발을 세우라는 말은 쿄우토까지 군세를 이끌고 상경(上京)하라는 뜻. [본문으로]

타케다 노부토라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2. 29. 17:30 Posted by 발해지랑
다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1574 3 5일 병사(病死) 81.


1494 ~ 1574.

타케다 가문[武田家] 18대 당주. 친족(親族), 지방 호족[人]들과 싸워 카이[甲斐]를 통일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백성과 중신(重臣)들의 원한을 사, 장남 하루노부[晴信]에게 스루가[駿河] 이마가와 가문[今川家]로 추방당하였다. 후에 쿄우토[京都]로 가서, 당시의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가 되었다.

 




 



루가[駿河]로 추방과 은거

 

 난세를 산 전형적인 무장 중 하나인 타케다 노부토라는 1541 6, 아들 하루노부(신겐[信玄])에게 돌연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스루가[駿河]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손님 대접을 받았으며, 타케다 가문[武田家]에서는 생활비를 받아 측실(側室)까지 두고 아이까지 얻었다. 이는 노부토라와 요시모토의 관계가 이외로 깊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전사한 뒤 요시모토의 아들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와 사이가 멀어져 결국 1563 69살 때 스루가를 떠나 쿄우[]에 올라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가 되었다.

 

 쇼우군의 쇼우반슈우라는 것은 매일 이야기를 나누면서 출신 혹은 관계했던 지역의 정보 등을 쇼우군에게 전해주는 역할이다. 필시 노부토라는 카이[甲斐], 시나노[信濃], 스루가[駿河] 등의 정보를 얻어서는 끊임없이 쇼우군에게 보고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1573년 타케다 신겐이 죽었다는 소식이 노부토라에게 전해졌다.

 노부토라는 이 해에 이미 81살이라는 고령이 되어있었지만, 필시 그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의 충격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결과, 노부토라는 이 해의 9월에 시나노[信濃] 타카토오[高遠]까지 서둘러 왔는데, 신겐에게 추방을 당해서부터 벌써 3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한때 자신이 다스리던 카이[甲斐]정세(情勢)가 굉장히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오 성()에서 재회

 

 '갑양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타카토오까지 왔을 때 머물던 숙소는 사위인 네즈 신페이[祢津(禰津) 神平]의 집이었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그 감추어진 면을 읽을 수 있다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노부토라의 셋째 아들은 타케다 노부카도[武田 信廉 = 쇼우요우켄[逍遙軒]]이다. 이해인 1573 그때까지 타카토오 성주(城主)였던 타케다 카츠요리[勝頼] 죽은 신겐의 후계자가 되어 카이[甲斐]로 거처를 옮겼기에 그런 카츠요리를 대신하여 노부카도가 타카토오 성주가 되어 막 부임했을 때였기에, 노부토라는 우선 타카토오 성주인 노부카도와 만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부카도와 노부토라의 관계는 형인 신겐과 노부토라 만큼 나쁘지 않았기에, 당연 둘은 타카토오 성에서 재회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증거로 노부카도가 부친의 말년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다이센 사[大泉寺]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노부카도가 부친과 만나지 않았다면 늙은 노부토라의 초상화는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필시 부친과 만난 후 그 모습을 성에서 그렸고 그 반년 후인 1574 3 5일에 노부토라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기에, 5월에 초상화에 써 넣는 글을 쵸우젠 사[寺]의 슌코쿠 화상[尚]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남긴 것이다.

 

카이[甲斐]를 다시 얻고자 했던 꿈?

 

 노부토라의 묘소(墓所)는 코우후 시[甲府市]의 다이센 사[大泉寺]에 있다.

 장례식은 1574 3 7. 손자인 타케다 카츠요리의 주도로 시나노[信濃] 류우운 사[寺]의 스님인 홋코우 젠슈쿠[北高全祝]를 불러와 경을 외우게 하여 치러졌다.

 

 타카토오까지 돌아온 노부토라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행해지고 있다.

 다시 한번 카이[甲斐]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였다. 아니다 - 단순히 고향이 그리웠고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돌아온 지 반년 만에 죽은 것을 보면 후자 쪽의 해석이 적당한 것 같다.

 

 여담으로 시나노[信濃]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옛 전장 터에는 사나다 노부유키[田 信之]가 세운, 노부토라의 둘째 아들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繁]의 명복을 비는 텐큐우 사[寺][각주:1]가 있으며, 그 반대편으로 카와나카지마 서쪽으로 이어진 산속에는 '텐큐우의 진짜 무덤[本塚]'이라는 것이 어느 개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없지만 노부시게를 모신 텐소우 사[天宗寺]가 있어 노부시게를 따르던 인물들이 모여 넋을 기렸다고 한다.

 

 이렇게 카와나카지마에는 노부시게를 기리는 곳이 많다. 노부토라는 타카토오까지 돌아왔을 때, 옛날 귀여워했던 노부시게의 이야기를 듣고 몸소 몸 무덤을 찾아가 노부시게의 넋을 기리고, 옛날을 그리워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물론 글로 적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전해 내려올 뿐으로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쿄우토[京都]에서 먼 길을 달려왔던 말년의 노부토라라면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 타카다 노부시게의 관직은 사마노스케[左馬助]였는데 사마노스케의 당명(唐名)을 덴큐우[典厩]라 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