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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08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2- (2)

二.


 어쨌든 이야기를 되돌리자.

 삿사 나리마사가 히데요시에게 죽음을 언도 받은 것은 1588년 윤5월로, 이 때문에 히고[肥後]는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이 나리마사의 후임으로 누가 임명 받을까 하는 것이 성중(城中)의 화제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일개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신분에서 갑자기 천하를 손에 넣었다. 때문에 에도 막부를 세우게 되는 토쿠가와 가문[家]과는 달리 그를 따랐던 부하들 중에 쿠니모치 다이묘우[ 大名][각주:1]가 될 정도의 기량이나 경력, 가문의 격()을 가진 자가 적었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 싹수가 보이는 젊은 직속 가신 중에서 발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가 좋을까?

 

 히데요시는 침묵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런 중대한 사안일수록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듯이 나불대면서 하였다. 그것을 듣고 네네 아니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라고 해야만 할까 – 가 곧바로,

 

 “토라노스케[虎之助]야 말로 적임자겠죠”

 

라고 말하였다. 토라노스케라는 것은 키요마사[正]의 통칭이었다.

 키요마사라는 젊은이는 히데요시의 모친 나카(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친척으로, 키요마사가 5~6살 때 히데요시는 키요마사의 모친에게 양육을 부탁 받았다. 히데요시는 흔쾌히 수락하여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부엌 밥을 먹이며 키웠다. 네네가 타진 옷을 기워준 적도 있었으며, 여름이나 겨울에 입을 것도 네네가 걱정하였고, 심한 장난을 야단도 치며 때린 것도 네네였다. 키우느라 들였던 노력이 그대로 네네의 애정으로 바뀌어 있어, 그녀에게 키요마사 만큼이나 귀여운 무장은 없었다. 곧이어 꼬꼬마 코쇼우[小姓]가 되었고 이어서 불과 15살의 나이에 170석을 받는 몸이 되었으며,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세운 공으로 인해 3000석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키가 6척을 넘어[각주:2] 전쟁터에서는 위풍당당하였으며 또한 장재(將材), 무략(武略)도 있는 듯 했다. 거기에 네네의 눈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귀염성 있는 성격이었다. 지금 이 젊은이에게 토요토미 가문이 은혜를 베풀면 언젠가 그 은혜를 반드시 갚으리라.

 

 아직 어려~”

 

 히데요시는 거부하지는 않고 중얼거렸다. 3000석의 직무밖에 경험하지 못한 26살의 젊은이를 갑자기 거대 다이묘우로 삼는 다는 것이 좀 그렇다는 의미였지만, 그러나 갑자기 정권을 얻은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뭐든지 속성(速成)으로 해야 했다.

 

 괜찮겠지

 

 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키요마사로 하겠다

 

 고 마음 정한 후, 히데요시는 이 인사(人事)에 자신의 장대한 다른 구상을 결부시켜 화려함을 더하게 하였다. 다른 구상이란 언젠가 대명(大明)을 공격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대명 정복이라는 것은 히데요시가 아직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이었을 즈음부터의 꿈으로 살아있는 동안 이 꿈만은 실현하고 싶어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가 히메지 성[城]에서 아즈치[安土]로 가서 노부나가에게 인사를 올렸을 때 반은 농담삼아,

 

 큐우슈우[九州]를 하사해 주시면 그 곳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라고 말한 것은 대명(大明)으로 바다를 건너가기에 편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히고[肥後]는 큐우슈우에서도 온 지역에 미전(美田)으로 가득 차,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병사를 기를 수 있었다. 더욱이 히고 사람들은 그 지역에 있던 키쿠치 씨[菊池氏][각주:3] 이래 용감하기로 유명했다. 이 지역을 키요마사에게 하사하면 어떻게 될까? 히데요시 휘하에서 토라노스케 키요마사 만큼이나 외정(外征) 선봉대장에 어울리는 남자도 없었다. 히고[肥後]의 경제력은 그 과중한 군역(軍役)에 견디기에 충분했으며, 키요마사 정도의 남자가 히고 병사를 이끌고 가면 대명(大明)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반국()을 주자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고의 반이라고 하여도 25만석이여서, 3000석인 키요마사의 신분에서 말하면 기절할 정도의 출세였다.

 

 키요마사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히데요시의 큰 은혜를 느끼는 한편 그보다도 더 깊은 감정으로 자신의 양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의 따스함을 느꼈다. 어린 아기가 막 목욕을 끝낸 모친의 향기를 맡고 싶어하는 듯한 기분과 같은 것이 언제나 키타노만도코로에 대한 키요마사의 마음 속에 있었다. 키요마사에게 표면적인 주인(主人)은 히데요시였으며, 감정상의 주인은 키타노만도코로였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머지 반국 24만석은 야쿠로우[弥九朗]에게 주기로 하였다. 사이 좋게 지내라

 

 라는 말을 히데요시에게 들었을 때, 키요마사는 얼굴을 숙여 절을 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저 약방(藥房) 출신의 야쿠로우 놈과……’

 라는 생각이 들자 히데요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키요마사는 무공(武功)이 있어야만 값어치가 있다는 소박한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보호자인 키타노만도코로의 가치관과 일치하였으며, 가치관이 일치하였기에 그녀는 키요마사를 사랑하였으며 키요마사도 그녀를 따를 수 있었다. 그런 키요마사에게 히데요시의 인사(人事)는 이해할 수 없었다.

 

 코니시 야쿠로우 유키나가[小西 弥九朗 行長]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으로 츄우고쿠[国] 공략을 하고 있을 때 주워온 남자였다.

 임기응변에 뛰어났고 외교 감각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그를 부하로 삼아 하급 참모장교로써 여러 곳에서 부렸다. 또한 유키나가의 부친인 사카이()약종상(藥種商) 코니시 쥬토쿠[小西 寿徳]나 형인 죠세이[清]도 가신으로 삼아 행정을 맡기거나  경리(經理)를 담당시키는 등 총애하고 중용하였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자 키요마사와 같은 야전(野戰), 공성(攻城)의 군인보다도 유키나가처럼 경제를 보는 눈이 있는 정략가(政略家) 쪽을 중용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참고로 상인(商人)인 코니시 일족은 사카이[]에서 오오사카[大坂]에 걸쳐 번영하였지만, 유니나가의 코니시 가문은 그 일족 중에서도 중급 정도의 위치에 있는 가문이었기에 그쪽 방면에서도 명문가(名門家)라고 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니었다.

 

 약종상이라는 가업 상 대대로 조선 무역에 숙지(熟知)하여 유키나가도 몇 번인가 바다를 건너 간 적이 있어 조선의 지리나 정세에 밝았고 거기에 조선말도 할 줄 알았다. 그 점이 히데요시에게는 매력이었다. 언젠가는 대 조선 외교를 담당시키고 싶었고, 막상 조선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키요마사와 함께 선봉대장을 맡기고 싶었다. 키요마사의 무용(武勇)에 유키나가의 기략(機略)과 해외 지식이라면 원정군에게는 범에 날개를 단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키요마사는 이해 할 수 없어,

 결국 이런 것이겠지

 라는 편견만으로 사태를 보았다. ()로 공적을 세우지 못하여도 성 안의 방바닥에 앉아서 손바닥이나 비벼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는 무사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자보다 중용되어 가는 세상이라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 성 안의 무리들이 토요토미 정권의 중추(中樞)에 들러붙어 강고한 단결심을 보이고 있었다. 재자(才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당수격(黨首格)이 되어 오우미[近江]계의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코니시 유키나가도 그 계열에 속해 있었다.

 

 먼 곳에 가면 어찌 될지……’

 라는 걱정이 당연히 키요마사에게는 있었다. 키요마사는 성 안의 무리들을 미워했고 또한 소원(疎遠)했기에, 중앙에서 말도 안 되는 참언(讒言)을 당하기라도 하면 삿사 나리마사와 같이 부임 후 영지(領地) 몰수 이어서 할복이라는 운명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리마사가 만약 성 안의 무리들과 친했다면 중앙의 무마가 먹혀 들어 그런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키나가는 미츠나리와 사이가 좋다. 이런 점에서 잘 해나갈 것임에 틀림 없다

 라는 그 하나만이 키요마사를 신경 쓰이게 하였다. 이 때문에 봉지(封地)로 떠나기에 앞서 키타노만도코로를 배알(拜謁)하여,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라고 마치 하소연이라도 하는 듯이 아뢰었다.

 

 저는 그 약방놈하고 사이가 나쁘옵니다. 한 나라() 50만석을 둘로 나누어 각각 통치하는 이상, 당연 분쟁도 일어나 서로간의 기분도 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약방놈은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 = 미츠나리]를 통해서 주군에게 졸자(拙者)를 참언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때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해주시옵소서... 라는 것이 키요마사의 바램이었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키요마사가 앞날을 우려하는 것 - 이것을 그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상으로 같은 걱정을 하는 사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녀 자신도 키요마사와 같이 요즈음의 문치 중시로 치우친 토요토미 정권에 은근히 분노를 느끼고 있어 미츠나리나 유키나가와 같은 무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심하시고 떠나십시오.

 

 라고 그녀는 키요마사에게 말했다. 언제나 말이 명쾌한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다. 이 변함없는 시원시원함을 접하여 키요마사는 얼굴 표정까지 밝아져 들뜬 마음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명쾌하게 말했던 만큼 기분이 밝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키노시타 성[木下姓]이었을 즈음부터 그녀의 내조(內助) 없이는 히데요시의 공()을 말할 수 없었다. 인사(人事)의 상담도 하였고, 밖으로 원정을 나간 히데요시를 위해서 오다 가문과의 사교(社交)에도 힘썼으며, 가문 내의 정세도 조사하여 정리해서는 히데요시에게 알려주었고, 또한 일가의 가계를 꾸려나가는 한편, 부하들의 뒤도 잘 돌봐주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히데요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였던 하시바 성[羽柴姓]시대에도 그러했다. 이 시기의 히데요시는 츄우고쿠[国] 방면에 나가 있어 거의 부재였기 때문에 사실상의 성주는 그녀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에 그녀가 했던 그런 역할을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행정관[奉行]들이 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시스템이 정비됨과 동시에 그녀는 그 역할에서 실직(失職)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힘도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키요마사가 참언 당했다고 하여도 그것을 처리하는 미츠나리 등의 행정기관에 그녀는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호해 줄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1. 한 나라(国)를 소유할 정도의 거대 다이묘우. [본문으로]
  2. 1척 = 약 30.3cm 따라서 180 이상. [본문으로]
  3. 예전부터 많은 무용을 남겼다. 도(刀)가 주류였던 일본의 전쟁에 창[やり(槍)]를 발명하여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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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8 1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라도 있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그렇게까지는 마음쓰진 않았을 듯 싶은데.. 도요토미 가문에 적자가 없다는건 치명적인 약점이었군요.. 재능 있는 사람들의 구심점이 없다는 것음 참.. (세키가하라를 보면..-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9 1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교적인 권선징악에 따른 올바른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시선에서 보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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