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시판에 올려도 괜찮은지 모르습겠니다만...

디시의 공지와 비슷한 것인가 보더군요.

센고쿠(戦国) 시대 게시판의 기초 지식

이 정도는 알아 두지 않으면 병진 취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센고쿠 시대 전반적인 것에 대해.

  • 치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쿄우토(京都)도 자치조직 같은 것이 있었다).

  • 하지만 역시 다이묘우(大名)끼리의 국경 근처는 위험했다.

  • 영토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석고(石高). 예를 들면 오와리(尾張)같은 곳은 저렇게 조그맣지만 50만석이 넘는 대국.

  • 1만석X250이 대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수. 예를 들어 50만석이면 12500, 100만석이면 25000 정도가 기준

  •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기에 숫자가 굉장히 엉망.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4만이라던가 미미카와(耳川 오오토모(大友)와 시마즈(島津)의 싸움 역자 주)에서 오오토모 6만이라던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

  • 노부나가는 인망이 있었다.

  • 노부나가는 이외로 좋은 사람.

  • 노부야스(信康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아들)는 노부나가가 죽인 것이 아니다.

  • 노부나가에게 좋지 않고 이에야스에게 좋은 이야기는 대체로 에도 시대의 창작(아네가와(姉川) 전투, 노부야스죽이기 등)

  • 노부나가와 미츠히데는 사이가 좋다.

  • 아무 때나 방화를 일삼는 것은 아니다(미노(美濃) 공략때도 산 전체를 불태우면 을 취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 노부나가는 아스퍼거 증후군

  • 삼단철포 같은 것은 없다.

  • 낙시낙좌()는 노부나가의 오리지널이 아닌 롯카쿠(六角)의 것을 베낀 것. 참고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도 했던 것.

  • 오케하자마는 어쩌다 이겼다는 것이 대세.

  • 하지만 그걸로 노부나가를 과소평가하면 이노우 전투( 노부나가와 동생 노부유키(信行)간의 싸움 700 vs. 1700 – 역자 주), 모리베 전투(森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목 사냥꾼 아다치(頸取足立)’를 쓰러뜨렸다는 전투. 3000 vs. 6000(사이토우()) – 역자 주), 텐노우지 전투(天王寺 텐노우지 요새(7000)을구원하는 노부나가 3000 vs 혼간지 15000의 전투. 노부나가는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고 한다 역자 주) 등 적은 수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몇 번 더 있었기에 오케하자마에서 어쩌다가 이겼다고 하여도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 최대의 피해자.

  • 신겐 정도는 여유롭게 쓰러뜨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

  • 백성에게 사랑 받은 타이코우(太閤) 어르신이라는 것은 거짓말.

  • 혼노우(本能)()의 변시점에서 히데요시의 위치는 가신 필두인 시바타(柴田), 2위인 아케치(明智), 여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니와(丹羽) 아래인 4번째 정도.

  • 가난한 농민 출신이 아니라 부잣집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 잔혹한 행위를 많이 했다.

  •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부터 노부나가 뒤따마로 없던 것도 만들어서 퍼트린 것을 보면 정말로 성격이 나쁘다.

  • 알려진 만큼 타케나카(竹中)나 쿠로타()의 도움을 받지 않았지만 히데나가(秀長)의 힘 없이 천하인 히데요시는 될 수 없었다.

  • 토요토미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 아기씨(精子)가 없다.

  • 히데요리()는 아마 이 녀석의 아이가 아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편.

  • 자기한테 안 좋은 것은 전부 노부나가에게 덮어 씌었다(아들 죽이기, 미카타가하라에서 3000밖에 병사를 보내 주지 않았다 등)

  • 아네카와에서의 분투 같은 것은 없었다 - 라기보다 아네카와 전투 자체가 알려진 만큼 대규모 전투는 아니었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미스라기 보다 거기서 물러난다면 코쿠진()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게 되기에 어쩔 수 없이 출진. 별로 신겐이 굉장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는 것이 타당.

  • 실은 알려진 만큼 괴로운 인질 시대 같은 것은 없었다(요시모토에게는 굉장한 기대를 받았고,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에게 교육을 맡길 정도였다)

타케다 신겐 편.

  • 센고쿠 시대에서 가장 과대평가 받고 있는 과대사천왕(타케다, 우에스기, 시마즈, 다테, 쵸우소카베(長宗我部) 5명이 있지만 단어 가지로 따져서는 안 된다)의 필두.

  • 항상 우세한 상태에서 싸움을 걸기에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없다.

  • 그런 주제에 몇 번이나 졌던 것을 보면 이 녀석 역시 전쟁 하수일 것이다.

  • 노부토라(信虎) 이상으로 세금 폭탄을 먹였다.

  • 영민들에게 미움 받았다.

  • 기껏해야 코쿠진() 연합의 맹주적인 존재이기에 조직 만들기는 안 된다.

  • 사람을 쓰는 것이 정말로 뛰어난지 어떤지는 미묘.

  • 노부나가가 두려워하거나 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 자기보다 격이 떨어지는 인물밖에 이기질 못한다.

  • 오야붕(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는 개기질 못한다.

  • 미카타가하라는 3배의 병력 차이가 있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 별로 신겐이 굉장한 것은 아니다.

  • 메뚜기전법(상대의 지역에서 물자를 약탈)과 인신매매로 겨우 버텼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정도.

  • 카와나카지마는 안개 속에서 퇴각하다가 우연 부딪혔을 뿐.

  • 타케다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 상대방이 일부러 동맹을 신청해서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히 동맹을 끊는 것을 보면 너무 멍청이 같아서 옹호해 줄래야 옹호해 줄 수가 없다.

  • 처음부터 카이(甲斐) 22만석을 전부 가지고 있는 등 굉장히 좋은 환경.

  • 처음부터 5000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굉장히 좋은 환경.

  • 시나노(信濃)에는 다이묘우(大名)가 없는(소규모 호족 밖에 없었다) 굉장히 좋은 환경.

  • 기본적으로 역사 게임이라거나 TV 방송 등에서는 최강 취급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테나 시마즈와 그리 차이가 나질 않는다.

우에스기 켄신 편.

  • 실은 여자가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 그 이상한 행동도 여자라고 하면 왠지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많다.
  • 메뚜기 전법과 인신매매가 특기

  • 우에스기는 **성을 뺏어 100의 금과 200의 식량을 얻었다 - 라는 게임 같은 것을 실제로 한 무서운 다이묘우(大名).

  • 10만의 대군으로 호우죠우()를 공격하지만 니노마루()도 없었던 오다와라(小田原)()을 낙성시키지 못했다.

  • 영토 확장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영토 확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마지막 즈음은 북새통에 호쿠리쿠(北陸)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 10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

  • 오다 가문과의 국력 차이를 보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다.

  • 테토리가와 전투(手取川)는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멋대로 전선 이탈하여 혼란에 빠진 카츠이에(勝家)를 쓰러뜨린 것뿐.

  • 우에스기측이 주장하는 만큼 큰 전투는 아니다.

  • 라기보다 실제로 있었는지 어떤지 조차도 미묘(있었다고 하여도 그걸로 우에스기 켄신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듯한 큰 전투는 아니다)

호우죠우 가문 편.

  • 호우죠우라는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우지츠나(氏綱) 때부터라고 한다.
  • 알려진 소우운(早雲) 실적의 대부분은 우지츠나가 한 것.

  • 우지야스가 한 카와고에 전투(河越 - 11000으로 60000의 군세를 물리친 전투)는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우에스기와 호우죠우의 밸런스를 보는 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투로 센고쿠 시대에 기리 남을 멋진 전투.

  • 우지야스, 츠나시게(綱成), 우지시게, 우지마사 등 농성만 하였다.

  • 명군(名君)이 비교적 많은 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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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22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잘못 아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워낙 에치고가 폭설이 내리는 지역인데다가 코즈케와 접경의 산지때문에 겨울에 길이 끊겨서 돌아가는 것이고 그 결과 겨울에는 무슨짓을해도 나가오가의 원군이 오지 않기 때문에 관동피관 현상이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아닐려나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23 1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동피관… 주제에서는 벗어나는 얘기지만 하나 해보겠습니다.
    춘추 초기에 정(鄭)·제(齊)·노(魯) 3국이 연합하여 허(許/鄦)나라를 공격했습니다. 허는 남작국으로 작위도 낮고 성도 견고하지 못해 이 셋 중 하나만 가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셋이나 갔으니 연합군은 성이 금방 함락되리라 여겼을 겁니다. 그러나 원군으로 나온 노, 제의 군사는 거의 팔짱이나 끼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정군만 X빠지게 싸워 겨우 허를 함몰할 수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상황에서도 이러한데 오다와라라면…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23 1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프로이스와 조선쪽 기록에 따르면 악마(;;)급이긴 하지만, 일본쪽에서도 썩 평이 안좋긴 안좋나보군요. (엔도 슈사쿠도 상당히 깠던 걸 보면.. 참; 서민이 서민일적 생각 못한다랄까..)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5.24 0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게 모두 사실이라면 충격인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4 08: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저 항목들 중에서 특수 상황의 병력 동원, 과대 평가 된 부분이 있는 신겐, 켄신 여성설을 뺀 것이 어째서 반 '밖에' 안 된다고 하시는지요? 서로 얼굴 보면서 하는 것이 아니니 될 수 있으면 공격적인 어투는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리더쉽님//아뇨. 저도 모릅니다. 그냥 무예가 뛰어난 자였다는 것 정도만이죠.
    (토시이에도 한 무예 한다는 데 그도 고생시킬 정도면 정말 굉장했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죠)

    고사천사님//칸토우 출병 1560~1574년까지의 12번 칸토우 출병하여 월동한 것은 8번입니다. 혹자는 봄에서 여름 사이에 가장 많은 아사자가 나오는 당시 상황에서 칸토우 출병은 그런 것을 피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사본론님//좋은 지식 감사드립니다. 중국 전국 시대는 관심이 있어서 책은 몇 권 사다 놓고서는 쌓기만 해서..

    다메엣찌님//평가라는 것은 남긴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기록을 남겨놓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기록을 남겨 놓는 사람도 있겠죠. 다만 미증유의 해외 원정을 치루었다 보니 아무래도 세금같은 것은 많이 거두었고, 검지를 하여 새롭게 세금을 거 부과하였을 테니 밑바닥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턴오버님//모두 사실일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 다만 제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죠.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4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네가와 전투가 그렇게 까지 큰전투가 아니였단 말인가요? 흠...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24 1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단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굉장히 참신하고 재미있는 글이네요.
    후타챤이 일본의 디씨라고 하던데 정말 재미있네요. ㅎㅎ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4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확실치 않은 점이 많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누군지 기억 안나니 물어보시면 곤란...)은 이에야스가 도와 주지 못해서 타케다 카츠요리에게 넘어간 토오토우미의 타카텐진 성의 오가사와라 씨 대활약을 지우는 과정(신군께서 수하를 버리면 좀 그렇기에)에서 여러 정치적인 고려(노부나가 병진인데 이에야스가 도와서 이길 수 있었다, 오가사와라가 활약한 것이 아닌 혼다 타다카츠다. 카스가노츠보네로 연결된 이나바 씨의 활약이 필요하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의 부인이 아자이 씨다 등)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도 하더군요 -> 요것도 하나의 설입니다. 참고만 해 주시길..

    shotokanfist님//원문은 코에이의 신장의 야망에서 저평가 혹은 고평가 받은 인물들의 수치에 대해 따지다가 나온 글인지라...
    http://www26.atwiki.jp/sengokujidai/pages/4.html?PHPSESSID=9900ddbeba1dd633a6d2b9103303ce40&flag_mobilex=1
    원문은 이곳입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24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의 야망. 저도 해본 적이 있는 게임입니다. 삼국지 시리즈도 좋아하고요.
    최근판이 혁신이던가요... 그거 하다가 관위 받는게 힘들어서 좀 좌절했었죠.



    그건 그렇고, 며칠 전에 사무실에서 이 글 읽으면서 혼자 낄낄거렸네요. ㅎㅎ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24 1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 거기에다 “몇몇”까지 더해서 반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공격적인 표현”에 대해선 사과드립니다. 글 써 놓고 나서 서버로 데이터 보내기 전에 적어도 한 번씩은 생각해 봐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까 미처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24 1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원문을 보니까 ?가 있군요. 무슨 뜻일까요?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07: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그런가요? 보는 방향의 문제이지 비웃으실 것 까지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신사본론님//약간 미묘한 것 까지 포함해서 10개 정도라 치고 10/66이 어째서 반이 되는지 알 수가 없군요.

    배려라... 현실 사회에서는 자기보다 하급자에게라도 배려라는 말은 직접 쓰지 않습니다. 신사본론님이 저한테 배려라는 말을 쓰실 정도로 굉장한 인물이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는 아직 그 항목이 생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25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웃은게 아니라 센스가 좋고 재미있어서 웃은건데요. ㅎㅎ
    2ch랑 비슷한 디씨인사이드를 출입하는 처지라, 이런 센스있는 글을 좋아합니다.
    제 리플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나 보네요...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0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군요. ^^;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25 1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서 제가 동감하지 않는 항목을 다시 세 봤습니다. 20여개군요. 이 정도면 1/3이지, 반은 아닙니다. 제가 대강 셌었군요. 죄송합니다.
    배려란 말이 그렇습니까? 만약 맞다면 그것은 저의 착오입니다.

  1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19: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의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이었군요. 제가 늘어놓은 것을 그대로 따라서 하시면서 반문하시길레 제 생각을 넘겨짚으시면서 이야기를 하시나 했습니다. 제가 오해했군요. 실례했습니다.

    세상에는 어쨌든 맞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신사본론님과 제가 그런가 보군요. 담부터는 댓글 달아주시지 말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18. Favicon of http://blog.naver.com/taebong0721 BlogIcon 태봉이 2008.06.21 2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악하악.. 형.. 나의 켄신은 그렇지 않다능...

  1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1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디씨나 투챤이나 안 까이는 존재가 없다능...
    (거긴 서울대에 이어 아이비리그에 유학 간 이순신 장군이라도 까이는 곳이라서..)

  20. 바우와우 2015.02.04 0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21. 이승희 2016.07.16 03: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에도() 시대에 스즈키 시게히데(鈴木 重秀)라는 사람이 호우죠우 가문의 역대 당주들을 평가하면서 우지야스에 대해서, '문무겸비의 무장으로 생애에 걸쳐 몇 번이나 전투에 나섰지만 패한 적이 없다. 거기에 인덕도 있었다. 이 시대에 관팔주(八州 = 칸토우())의 병란을 평정하여 크게 가명을 높였다. 고금의 명장이다'고 절찬하였다.

 우지야스는 칸토우의 태반을 자신의 산하에 두어, 조부인 소우운(早雲)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우지야스가 다스리던 오다와라(小田原)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51 4. 하코네(箱根) 유모토(湯本)소우운(早雲)사(寺)에 참배하고 오다와라에 들린 쿄우토(京都) 난젠()사(寺)261대 토우레이치오우(東嶺智旺)가 직접 보고 쓴 것이다.

 [유모토의 소우운 사()에서 1(4km). 수도인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거리는 작은 길만 수만 개. 땅에는 먼지 하나도 없다. 동남쪽은 바다이다. 바닷물이 오다와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의 성()은 거목 울창한 곳에 있으며 크고 아름답다. 삼면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의 물은 가득 차 있어 깊고 낮음을 잴 수 없다. 백조나 물새들이 날개를 쉬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는 겉으로는 문(), 속으로는 무()의 인물로 형벌(刑罰=정치)이 깨끗하여 원근(遠近)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시대 천하 무쌍의 패왕이다.]

 이렇게 전성기의 호우죠우 씨()의 오다와라를 굉장히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불패의 용장이라 일컬어지며 16살의 첫 출진(初陣)을 경험한 이후 병으로 죽을 때까지 36번의 전투에 출격하여 한번도 적에게 아게마키([각주:1])를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군의 선두에 서서 적과 부딪쳐 몸에는 도창(刀槍)의 상처가 7군데 있었고, 얼굴에도 2군데의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몸 정면에 있는 상처를 [우지야스상처(氏康傷)]라고 부르며 존중 받았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의 사람됨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12살 때였다. 철포는 아직 드물었던 시기로 어느 날 우지야스는 철포의 사격 연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우지야스는 일순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우지야스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확 빨개져서는 곧바로 작은 칼을 꺼내어 자해(自害)하려고 하였다. 근시(近侍)의 무사가 당황하여 이것을 막았다. 우지야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우지야스를 부속 가로(家老)인 시미즈()라는 자가 옛날부터 용기 있는 무사일수록 잘 놀란다고 합니다. 뛰어난 말도 성격이 예민하여 잘 놀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참았다고 한다.[각주:2]


 우지야스의 무명(武名)을 천하에 널리 알리게 한 것은 일본 3대 기습전[각주:3] 중에 하나로 꼽히는 카와고에(河越) 전투이다.

 1545 8.

 호우죠우 가문의 영국(領国)과 국경을 접하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 上杉 憲政)는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토모사다(扇谷 上杉 朝定)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와 손을 잡고 우지야스를 일거에 괴멸시키고자 하였다.

 요시모토는 우지야스 측의 스루가(駿河) 나가쿠보(長久保)성(城)을 포위하였고,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역시 공격해 왔다. 한편 노리마사는 토모사다와 함께 호우죠우 츠나시게( 綱成)가 지키는 카와고에(河越)() 탈환을 꾀했다. 카와고에 성() 1537년에 츠나시게에게 빼앗긴 토모사다의 거성(居城)이었다. 츠나시게는 원래 쿠시마(福島)라는 성()이었지만 호우죠우 씨()의 보호를 받으며 우지야스의 동생 격의 신분이 되어 있던 인물이었다[각주:4].

 더욱이 이 카와고에 공성(攻城)에는 우지야스의 매제(妹弟)인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도 가담하고 있었다. 노리마사의 꼬임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카와고에 성()은 노리마사, 토모사다, 하루우지 8만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다. 그리고 반년에 걸친 공격을 받아 언제 낙성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1546 4.

 우지야스는 카와고에 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8천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병력의 차이는 10 1이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우지야스에게 승산이 없었다.

 우지야스는 거기서 사자(使者)를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 보내어 카와고에에서 농성(籠城)하고 있는 병사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그래 주신다면 카와고에의 성과 영지(領地)를 쿠보우(公方)님에게 바치겠습니다하고 몇 번에 걸쳐 애원한 것이다. 하루우지는 듣기는커녕 비웃으면서 네놈들이 바치지 않아도 당장 내일 즈음은 성이 떨어질 것이다. 성 안의 병사들은 전부 죽이고 또한 우지야스도 잡아 죽일 테다고 잘난 척 했다.

 우지야스는 또한 우에스기의 부장(副將) 오다(小田)()의 부하인 스게노야(菅谷)라는 자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어떻게든 성의 츠나시게를 도와줄 방법은 없겠습니까? 도와만 준다면 카와고에 성()은 당신에게 받치겠습니다. 만약 전투라도 일어난다면 우리 쪽은 병사 수가 적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고 전했다. 우에스기 측은 우지야스의 이러한 애원에 [호우죠우 측은 겁쟁이 병이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 소문은 우에스기 연합군 전체로 퍼져, 이제는 다 이기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지야스의 노림수였다. 우지야스는 시노비([각주:5])를 써서 적측의 정세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4 20일 밤.

 우지야스는 경장(輕裝)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돌격대를 편성해서는 적진 깊이 잠입시켜 놓고서는 불을 밝혀 성안에 있던 병사들과 호응하여 기습을 하였다. 어두운 밤 중의 습격에 우에스기 연합군은 단지 당황하여 허둥댈 뿐으로, 결국 도망을 치다 오우기가야츠 토모사다는 전사하였고 노리마사, 하루우지는 간신히 도망쳤다(카와고에 전투:위키 한글판).


 1554.

 그때까지 적이었던 타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삼국동맹(同盟)을 맺었다. 우지야스의 장남 우지마사(氏政)와 신겐의 딸을 결혼시키고, 우지야스의 딸을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에게 시집 보내어 상호간에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스루가(駿河)젠토쿠()사(寺)에서 모여 맺었기에 세상에서는 이를 [젠토쿠 사의 회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동맹도 요시모토가 죽은 다음에는 깨어진다.


 우지야스는 민정가(民政家)로서도 뛰어나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보다 먼저 본격적인 검지( 전답의 석고를 정하는 것)와 세제(稅制) 개혁을 행하였고, 전마(傳馬 수송용의 말)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통화를 명나라의 영락전(楽銭)으로 통일하여 상공업자를 보호하는 등 경제 정책에도 능하였다. 또한 아시카가 학교(足利[각주:6])를 원조하거나, 와카(和歌)를 산죠우니시 사네타카(西 )에게 배우는 등 문화인(文化人)적인 측면도 겸비하고 있었다.


[호조 우지야스( 氏康)]

1515년 우지츠나(氏綱)의 아들로 태어나다. 소우운(早雲)에서부터 3대째이다. 1541년 부친 우지츠나가 죽은 뒤 27살의 나이로 가독을 이었다. 카와고에의 야전(夜戰)에서 승리하여 무사시()의 태반을 영유(領有)하였고, 1551년에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히라이(平井)성(城)을 공략하여, 칸토우()를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과도 싸웠다. 1571년 죽었다.

  1. 갑옷의 등 뒤에 묶은 끈을 지칭. 링크타고 가시면 이미지를 볼 수 있습죠. [본문으로]
  2. 우지야스 12살이면 1527~8년경. 많이 알려진 타네가시마(種子島) 섬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 이지만, 위의 우지야스 일화가 실린 [호우죠우 오대기(北条五代記)]에 따르면 1510년에 외국에서 일본 사카이(堺)로 전래되었고 1528년 즈음에 오다와라에 있던 늙은 중(山伏)이 사카이에 갔다가 신기하여 한 정 사서는 우지츠나(氏綱 – 우지야스의 부친)에게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나머지는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 [본문으로]
  4. 둘 다 1515년 태생으로 동갑이긴 하다 [본문으로]
  5. 닌쟈(忍者)를 말한다. [본문으로]
  6.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 후에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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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02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기 쉽게 정리가 참 잘 되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2 1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칭찬 고맙습니다~
    (참...月山殿의 이야기 건필을 기원하겠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02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月山朝鮮守殿의 전기문도 구상중입니다.
    攝津浪人의 자제로 태어나 云云하는 스토리로요. ㅋㅋ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5.02 1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사람도 보면 전국사를 통틀어도 빠지지 않은 명장인데 주위에 너무 괴물(다케다씨, 우에스기씨)들이 많아서 묻히는 경향이 있죠. 마치 우리나라가 지금 위치에서는 미국, 일본 이런 애들 땜에 새우로 보이지만 유럽 한복판에 갖다놓으면 한따까리하는것과 비슷하달까 -_-;;
    이 사람이 3할인가 4할을 세금으로 거둔다고 하던가? 지금 현대의 기준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은 세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도쿠가와가가 들어왔을 때 잇키가 좀 일어났다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2 15: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다(小田) 씨의 가신 菅谷씨는 스게노야씨입니다.

    가와고에 싸움은 호조측이 잘 한 건지 간토 바쿠후(?)가 삽질한 건지…

  6.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5.02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풍림화산>에서 카와고에의 야전을 본 것 같은데 정말 대담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3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그 셋츠도 정말..센스 짱이십니다~

    흰꿈님//전 주변에 맞게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 아마 쪼그만 애들이 모인 격전구에서는 거기에 알맞게만 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잇키까지 일어났나요? 불만은 있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거기까지는 모르겠군요. 함 검색해봐야 겠습니다.

    신사본론님//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얼릉 고쳐야겠군요 ^^)
    뭐... 강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강하다는 말에 따르면 호우죠우 측이 잘 한 것이겠죠.

    턴오버님//그...그런가요!! (..라고 말할 때는 항상 보고 싶더니 막상 시간나면 딴 거 보기만 하다 보니...^^)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kirkeis BlogIcon 키르케 2008.05.03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전부 오빠가 번역하는거에요? 오앙. 멋지당.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3 1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새삼스럽게...*-_-*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04 12: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상화는 뽀샵 덕택에 피부에 잡티하나 없이 깨끗하군요(-_-..칼빵은 어디 숨기고;)
    한니발 초상화 같은 것도 아닌지라 각도로 숨길만한 상처가 아닌듯 싶은데(;;...)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군상 등에 실린 그림과 미묘~하게 다르더군요. ^^
    뭐 다테 마사무네같은 경우도 초상화에 양쪽 눈 그려달라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거 보면 모델의 희망이 아니었을지...^^ 뭐 저 그림 자체가 언제 그려졌는지 모르다보니(아...제가 말입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군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5.27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분명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守의 인장은 대세 판단미스가 아니었나 싶군요.. 다케다 오다가 천하포무를 실현시켜가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7 2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보면 오다 가문의 영토 확장 속도가 그만큼 빨랐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20년 사이에 일본의 1/3을 차지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누구도 그렇게 빨리 확장할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일본판 北条早雲

  소우운은 센고쿠 다이묘우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들 한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낭인에서 칸토우[東]를 제패하는 거대 다이묘우까지 성장한 것이었다.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 아사쿠라 토시카게[朝倉 敏景]의 아들]는 소우운을 평하며,

 창고에 바늘을 모으는 듯이 인색하게 모으면서막상 싸울 일이 있으면 귀중한 보석이라도 깨부숴 사용하는 듯 하였다
 고 말하였다.

 

 소우운은 '소우운님 이십개조[早雲寺殿二十箇]'라는 가훈(家訓)을 남기며, 여기에서 '밤에는 저녁 8시에 취침하고 아침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몸가짐을 가다듬도록……'이라고 일상의 세세한 점까지 배려하고 있다. 소우운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노력가로 늙어서도 여전히 눈과 귀가 건강하였고, 이빨도 빠지지 않아 장년기(壯年期)와 변함없는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45살까지의 전반생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가
시나노[信濃]의 오가사와라 사다모토[小笠原 定基]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오가사와라의 가신 세키 우마노죠우[ 右馬允]가 자신과 같은 이세[伊勢] 출신으로 동족(同族)이라 말하였다. 처음에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는 이름을 썼던 소우운의 출신에 대해서 이것이 가장 유력한 근거라 평해지고 있다.

 

 또 하나 유력한 것이 쿄우토[京都] 출신이라는 것이 있다.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요직(要職)을 역임하는 쿄우토[京都] 이세 씨[伊勢氏]의 사다후지[貞藤]의 아들이라고 하며, 사다후지는 쇼우군[軍] 요시마사[義政]의 분노를 사서 낭인이 되었으며 '오우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세[伊勢]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빗츄우[備中]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빗츄우에서 쿄우토[京都]로 갔고 이어서 스루가[駿河]로 내려갔다고 한다.

 사서에 따르면 빗츄우[備中] 시츠키 군[後月郡] 에바라[江原]타카고에야마[高越山] 성주(城主) 이세 스루가노카미 사다미치[伊勢 駿河守 貞通]의 양자(養子)가 소우운으로, 키비츠 다이묘우진[吉備津 大明神]의 계시를 받아 주변 명가(名家)의 자제들과 함께 큰 꿈을 품고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현지에는 이에 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시카가 바쿠후의 기록 중에는 빗츄우 출신의 이세 카몬노스케 모리요리[伊勢 掃部助 盛頼]의 이름도 보인다.

 

 어찌되었든 출신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우운은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 義忠][각주:1]의 측실이 된 여동생의 신세를 지기 위해서 스루가로 왔다고 한다. 이 때 행동을 함께 한 6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소우운을 포함한 7명의 사무라이는 함께 칸토우[東]로 무사(武者) 수행을 하러 갔는데, 그 출발에 앞서 신수(神水)를 나누어 마신 후, “ 7명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싸우지 않겠으며, 이 중 한 명이 다이묘우[大名]라도 된다면 나머지 6명은 그의 부하가 되어 돕자는 약속을 맺었다고 한다.

  6명은 후에 '소우운님 초창기의 가로중[(早雲)寺殿草創御家老衆]'으로, 호우죠우 일족에 준하는 '어유서가(御由)'라 불리며 존중 받았다.

 

 소우운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이마가와 가문의 내분(內紛)이었다.

 1476 2.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쇼우군[軍] 요시히사[尚]의 명령으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시바 씨[斯波氏]의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서 출진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시바 씨의 잔당에게 습격 받아 죽음을 당했다. 남아 있는 아들 타츠오우[龍王=후에 우지치카[氏親][각주:2]]가 아직 어려 가신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타츠오우는 난을 피하여 모친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타츠오우는 소우운의 여동생 키타가와도노[北川殿]의 아들로 소우운의 조카였다.

 

 내란 진압을 위해서 호리고에 쿠보우[堀越公方]인 마사토모[政知]에게서 우에스기 마사노리[上杉 政憲], 오오기가야츠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에게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이 파견되었고, 소우운은 이 둘에게 중재안을 제안했다.

 이마가와의 가신들이 둘로 나뉘어 싸워서는 가문 멸망뿐 아니라 주변으로 전쟁이 확대될 뿐이다. 우선 오시카 노리미츠[小鹿 範満][각주:3]가 당주가 되고, 후에 타츠오우가 성인식을 치렀을 때 가독을 물려받게 해 달라

 도우칸도 마사노리도 이치에 맞는 이 제안에 찬성하여 중재는 성공되었다.[각주:4]

 소우운은 이 공로로 인하여 후지[富士郡] 시모카타[下方] 장원의 13고을을 하사 받아 코우코쿠지 성[城]의 성주가 되었던 것이다.

 

 소우운은 민심을 잡는데 뛰어났다.

 코우코쿠지 성주가 되자 곧바로 영내(領內)의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에게 이 영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받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존경 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소우운은 제2의 찬스를 맞이하게 된다.

 1491년에 일어난 호리고에 쿠보우의 내란이었다.

 당주 마사토모가 죽어 챠챠마루[丸]가 뒤를 이었지만, 배다른 동생인 쥰도우지[潤童子][각주:5]와 그 모친을 한꺼번에 죽인 것이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즈[伊豆] 혼란에 빠졌다.

 

 호시탐탐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우운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스루가[駿河]의 무사들을 이끌고 질풍과 같이 이즈를 침공하여 챠챠마루를 죽이고 순식간에 이즈를 점령해 버렸다.

 침공에 앞서 소우운다운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병(病)을 가장하여 이즈[伊豆] 쥬센 사[修善寺] 온천에 머물면서 나무꾼들을 불러 소문을 청취하고, 이즈[伊豆]의 지리나 무사들의 재정 상태 등 모든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것이 이즈 공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점령 후의 행정에도 소우운의 탁월한 수완이 발휘되었다.

 난을 피해 산 속으로 도망친 무사나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던 것을 그대로 허용한다고 하는 한편 만약 이렇게 해주는데도 나오지 않으면 논과 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집도 불태운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또한 소우운은 과감한 선정을 펼쳤다. 연공(年貢)을 사공육민(四公六民)으로 해서, 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받고 나머지 60%는 백성이 가지게 한 것이다. 당시의 세율로는 오공오민(五公五民)이라도 대단히 기뻐들 하였기에 얼마나 이즈[伊豆]의 백성들이 기뻐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우리 지역도 신쿠로우 님의 지역이 되었으면……”하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즈를 수중에 넣은 소우운의 다음 표적은 칸토우[東]였다.

 소우운의 칸토우 제패의 야망을 알려주는 일화로써 미시마 묘우진[三島 明神]에게 참배를 가 꾼 영몽(靈夢)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 2일의 새해 첫 꿈이었다.

 넓은 들판에 두 그루의 큰 삼(杉)나무가 치솟아 있었다. 어디선가 쥐새끼 한 마리가 조르르 달려 나와 큰 삼나무의 뿌리를 갉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쥐새끼가 점점 커져 커다란 호랑이로 변했다. 그때 꿈에서 깼다

 소우운은 이 꿈을,
 “
두 그루의 큰 삼()나무는 칸토우[
東]를 지배하는 두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6]을 뜻할 것이다. 나는 쥐띠니까 두 그루의 삼나무를 갉은 쥐는 나 자신이다. 이것은 소우운의 자손이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멸하고 칸토우[東]의 지배자가 된다는 굉장히 경사스러운 꿈이다
 
하고 점쳤던 것이다. 이것은 소우운이 꿈을 빌어 가신들에게 말한 장대한 포부였던 것이다.

 

 칸토우 진출의 시작은 오다와라[小田原] 공략이었다.

 이 작전에 앞서 소우운은 교묘한 계략을 생각해 내었다. 오다와라 성의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 藤頼]에게,
 “
우리 영지(領地)에 있는 산에서 사슴 사냥을 하였더니, 사슴들이 모두
하코네[箱根] 을 넘어 도망간 듯 합니다. 그래서 몰이꾼을 오오모리 님의 영내(領內)로 들여보내어 이즈[伊豆] 쪽으로 사슴을 몰고 싶습니다만……”

 하고 몰이꾼을 오다와라 영내(領內)로 들여보내는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사실 이 몰이꾼들은 젊고 건장한 젊은 무사들이었다. 소우운은 수백 명을 몰이꾼으로 변장시키고, 거기에 또 수백 명을 개 몰이꾼으로 보이게 하여 은밀히 죽창 등의 무기를 가져가게 하였다.

 

 1495 2.

 심야가 되어 어둠이 짙어지자 오다와라 성 밑이 내려다 보이는 이시가키야마 산[石垣山][각주:7] 하코네야마 산이 한 순간에 밝아졌다. 불이었다. 그 불이 순식간에 오다와라 성 밑까지 다가왔다. 마치 불의 파도가 덮치는 듯 했다. 이는 소우운 측이 횃불을 달아 풀어놓은 소()들이었다. 그 뒤 몰이꾼으로 변장한 무사들이 계속해서 공격하였다. 이 기습 전법으로 오다와라는 눈깜짝할 사이에 함락되었다.

 

 소우운은 오다와라를 손에 넣자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사가미[相模]를 시작으로 칸토우[東] 각지를 차츰 제압해 갔던 것이다.[각주:8]

 

[호우죠우 소우운( 早雲)]

1432년에 태어났다. 처음엔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 칭하였고, 후에 불문에 들어가 소우운안소우즈이[早雲庵宗瑞]라는 호를 칭하게 된다. 1519년 이즈[伊豆] 니라야마[韮山]에서 죽었다. 88.

  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죽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할아버지 [본문으로]
  2. 요시모토의 아비. [본문으로]
  3. 요시타다와는 사촌지간. [본문으로]
  4. 결국 타츠오우가 15살이 되어 우지치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성인식을 치렀음에도, 가독을 물려받지 못했기에 소우운은 병사를 모아 노리미츠를 죽이고 우지치카를 이마가와 당주로 세웠다 [본문으로]
  5. 이 쥰도우지가 2대 호리고에 쿠보우로 결정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야마노우치[山内]와 오오기가야츠[扇谷]의 우에스기 가문. [본문으로]
  7. 당시는 카사카케야마(笠懸山)라 하였다.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 이 산에 하루밤만에 이 산에 성을 쌓을 때 이시가키[石垣]를 가진 성을 쌓았다고 해서 이시가키야마[石垣山]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문으로]
  8. 거성은 니라야마 성[韮山城]이었다. 오다와라로 본거지가 옮겨진 것은 아들 우지츠나(氏綱) 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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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12 1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마가와 요시타다가 1473년생인데(제 기억이 맞다면), 소운의 여동생이 낳았으니, 1456년 소운 탄생설은 좀 빡빡하군요.. 흠냐..

    그나저나 혁신에소 소운 전용기술로 화우계가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요(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3 13: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즈음은 여동생이 아니라 누나라고 하는 것 같더군요(예전 여동생이라고 할 때도 배다른 여동생이라 나이가 그 만큼 벌어졌다고...) 오히려 1456년 쪽이 힘을 얻는 것 같지만, 여전히 대기만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아마래도 이 쪽이 더 드라마틱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화우소는.... 일본엔 그 전에도 예가 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라고... 쿠라카라 계곡의 전투(倶利伽羅峠の戦い)에서 역시 화우계를 이용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선 산 전체를 가득할 정도의 소를 짧은 시간에 구하기도 힘들 것이며, 소가 귀해 말로 밭을 갈던 나라이니 만큼(그 만큼 쿠교우(公卿)들은 신분의 상징으로 우마차를 끌고 다닌 것을 보면), 중국에 있던 고사를 가져다 쓴 것이 아닐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3.14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쨌든 장군님>이신 키소 요시나카 이야기군요. ㅎㅎ
    헤에케 모노가타리 읽을 때 나오긴 했습니다만, 토모에고젠에만 관심이 가서 요시나카는 듣보잡 취급이었죠. ㅎ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5 08: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사히 쇼우군]과 [어쨌든 장군님]은 묘하게 어울리네요 ^^
    확실히... 요시나카보다는 토모에고젠이 더 인지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코에이의 원평합전(源平合戦)이라는 게임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요상하게 무력이 높아서 인상적이었습죠)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1578 3 13 병사 49

1530~1578.

에치고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의 아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이어서 마사토라(政虎), 테루토라(輝虎)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불문에 귀의한 후 켄신(謙信).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온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를 보호하여, 우에스기의 성()과 칸토우칸레이의 역직(役職[각주:1])을 물려받았다.








다섯 번에 걸친 카와나카지마(川中島)합전


 1553 4월.

 북부 시나노(北信濃) 카츠라오(葛尾)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쫓겨 와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된 카와나카지마 전투.

 이유도 없이 타국을 침략하는 신겐의 무법자적인 행동에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겠다고 일어선 우에스기 켄신(이 때는 아직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이 이후 12년간에 걸쳐 다섯 번 싸운 것이[카와나카지마 전투]이다.


 1차는 이 해인 1553 8월. 우에스기 군()은 젠코우지(善光寺)분지로 진출하지만 신겐은 시오타(塩田)성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켄신의 전력을 관찰하는 듯이 후세(布施)와 오미(麻績)에서 자그마한 전투를 하는 정도로 끝났다. 이후 2차는 1555 7, 3차는 1557 8월에 행해졌지만 두 번 다 작은 전투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1561 9월. 역사상 유명한 제 4차를 맞이한다. 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하치만바라(八幡原)에서의 전투가 유일한 격전이었다.

  5차는 1564 8월에 이루어졌는데 사실상 카와나카지마의 네 개 군(郡)을 지배하고 있던 신겐은 자웅을 겨루려는 켄신의 시도를 무시하며 한달 가량 대치만 한 후 9월 중순 서로 물러난 뒤, 다시 카와나카지마에서 대결하는 일은 없었다.


정의를 위하여 동분서주


 제1차 카와나카지마 합전이 일어나기 전년인 1552년.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보호를 청하며 에치고로 온 것을 계기로 켄신은 1552 8월에 처음으로 산코쿠토우게(三国峠) 고개를 넘어 칸토우에 출진하여 누마다(沼田)성으로 입성했다. 이후 주가(主家)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14번이나 칸토우로 출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1560년부터 1571년에 걸친 12년간은 8번이나 칸토우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새해를 칸토우에서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켄신이 에치고로 돌아가면 우지야스가 농성을 풀고 칸토우로 출진하여 시모츠케(下野)의 사노 마사츠나(佐野 昌綱)나 오야마 히데츠나(小山 秀綱), 히다치(常陸)의 오다 우지하루(小田 氏治), 무사시(武蔵)의 나리타 우지야스(成田 長泰)들이 호우죠우 측으로 돌아 섰고, 켄신이 오오타 스케마사(大田 資正),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 사타케 요시아키(佐竹 義昭), 사타케 요시시게(佐竹 義重)들의 요청을 받아서 칸토우로 출진하면 우지야스는 또다시 물러나 농성을 했고 배반했던 호족들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어 진전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나 빙고(備後)() 토모()로 물러나 있던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를 협격(挾擊)하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노부나가로 돌아선 노토(能登) 하타케야마(畠山) 씨의 중신(重臣) 쵸우 츠나츠라(長 綱連)가 농성하는 나나오(七尾)성을 공략하였고, 오다의 구원군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군을 카가(加賀)의 테토리가와(手取川) 강에서 물리친 기세로 쿄우()로 진격하려 했지만,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 제패를 노리고 있다며 출진 요청을 해왔기에 우선 귀국하여 칸토우를 진정시킨 뒤 상경(上京)하기로 하였다.


최후의 대동원령


 하지만 카스가야마(春日山)성으로 돌아온 켄신에게 호우죠우 우지마사로부터 평화롭게 지내자는 요청서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를 통하여 도착했기에, 켄신은 칸토우로의 출진을 상경 원정으로 전환하여 휘하 장수의 명부를 작성하였다. [上杉謙信自筆将士書上]이라 불리는 것으로, 우에스기 군단 39명의 무장에 코우즈케(上野), 엣츄우(越中), 노토, 카가의 여러 장수를 합친 81명의 무장의 이름이쓰여 있다. 마지막에 [天正五年(1577년)十二月二十三日法印大和謙信]이라 서명되어있기에, 이것은 명백히 우에스기 군단 동원 명부라 할 수 있다. 켄신은 다음해 1 19일. 명부에 기재된 여러 장수들에게 대동원령을 내리며 눈이 녹는 3 15일을 출진하는 날로 정했다.


 그러나 출진의 날이 다가 온 3 9일 켄신은 돌연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뇌졸중이라 한다. 의원들이 열심히 고치려 했지만 보람도 없이 켄신은 혼수 상태인 채로 13일 죽었다. 향년 49. 장의는 출진의 날로 정해졌던 15일 행해졌다.

  1. 무로마치 바쿠후의 관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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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lsndmsrud BlogIcon 키르엘린 2007.07.30 1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데려가겠습니다//ㅅ/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7.30 1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프리이니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xkore BlogIcon 포증 2008.04.28 04: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 그의 죽음은 대략 어이가 없지만 마지막 대동원령은 비장미까지 감도는군요.
    필자의 문장력이 좋은 것인지 발해지랑님의 해석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제가 너무 겐신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ㅎㅎ
    그런데... 요즘에는 마지막 대동원령이 상경이 목표라기보다는 간토가 목표였다는 시각이 중론이라는데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상경이 목표라는 주장은 당연히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들어 가쓰이에를 격파하는 등 서진했기 때문이라는걸테지만 간토가 목표라는 주장은 아직 근거를 못본지라...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30 0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증님의 켄신을 좋아하셔서 일 것입니다. ^^

    본문에 언급된 호우죠우 우지마사의 편지를 인정하느냐 인정 못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칸토우는 칸토우칸레이라는 역직에 있고 또한 그런 면에서 보수적인 켄신에게는 칸토우의 무장들이 요청이라도 해 오면 될 수 있는한 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즈음해서 사타케, 유우키 등의 출진 요청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쪽에 무게를 실리는 것인가 봅니다....
    켄신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이것도 조금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kumkang1471 BlogIcon 지족자부 2008.08.17 1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의 임종전의 멋찐 시 한수가 생각하네요. ㅎㅎ "영원토록 영번하는 한잔의 술, 생을 모르고 죽음또한 모르니 세월또한 꿈과 같구가" 무장다운 시 라고 볼수 잇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18 2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기 한 달 전 쯤에 그냥 만든 시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저도 멋진 시라고 생각합니다.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

1574 6 1 병사(病死)


1507 ~ 1574.

호우죠우(北条)씨의 원조를 얻어 숙부 요시토요(義豊)를 무너뜨리고 아와(安房)를 장악하였다. 후에 카즈사(上総)에 진출하여 쿠루리(久留里)성을 본거지로 삼았다. 바다를 건너 카마쿠라(鎌倉)미우라(三浦)를 침공하는 등 호우죠우(北条)씨와 대립. 미후네야마(三船山)합전(合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카즈사(上総)를 확보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에서)






호우죠우(北条)씨에 철저항전


 센고쿠(戦国) 초기의 칸토우(関東)의 무장들 사이에는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있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원군을 요청 받아 에치고(越後)에서 곧잘 코우즈케(上野),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등 칸토우(関東)로 진공(進攻)해 오면 호우죠우(北条)씨를 따르고 있던 무장들도(領內)를 통과하는 동안만은 켄신(謙信)에게 신종(臣從)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을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 했다.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나 우지마사(氏政)도 켄신(謙信)과 직접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하여 퇴각하는 일도 많아 결국 켄신은 커다란 수확을 올리는 일 없이 에치고(越後)로 돌아갔다. 그 후 칸토우(関東)는 다시 원래대로 호우죠우(北条)씨의 세력하(勢力下)에 두어졌다. 이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졌다. 그러한 주변 정세 속에서 어디까지나 호우죠우(北条)씨에게 끝까지 항전을 계속 한 것이 보우소우(房総 아와(安房)과 카즈사(上総)의 양지방을 이름)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였다.


 그런 요시타카(義堯) 1534년 부친 사네타카(実堯)의 원수인 숙부 사토미 요시토요(里見 義豊)를 물리치고 사토미가()의 당주(当主)가 되어 아와(安房) 일국(一国)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는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 氏綱 우지야스의 부친)의 원군에 의지했었다.


 그러나 3년 후.

 호우죠우(北条)씨가 보우소우(房総)에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뒤로는 약 40여년에 걸쳐 일관돼게 호우죠우씨를 적대하며 싸웠다.

 호우죠우씨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진공(進攻)을 경계하면서도 뒤로는 언제나 사토미 요시타카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토미 요시타카가 적자(嫡子) 요시히로(義弘)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준 것은 1561년으로 요시타카 55, 요시히로는 32살 때였다. 이 해의 3 우에스기 켄신은 호우죠우 우지야스의 오다와라(小田原)성을 2개월간에 걸쳐 포위하였는데 사가미(相模)를 제외한 칸토우(関東) 7개국의 무가(武家) 250여 가문이 참가하였고 그 중에는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참가한 요시히로도 있었다. 보우소우(房総) 사토미(里見)씨의 통솔자로서 대외적인 요시히로의 데뷔 무대였지만 사토미씨의 실권은 이후로도 카즈사(上総) 쿠루리(久留理)성에 있던 요시타카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평온한 은거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투를 벌이는 사토미(里見), 호우죠우(北条)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와 몇 번이고 싸웠다.

 그중에서도 중대한 전투가 세번있었다. 1538년과 1564년 두번에 걸친 시모우사(下総) 코우노다이(国府台)의 싸움에서는 두번이나 대패하여 아와로 도망쳐 돌아왔다.

 두번째 때에는 우지야스()이 카즈사(上総)까지 공격해 들어와 한때는 요시타카의 거성(居城) 쿠루리성도, 요시히로의 사누키(佐貫)성도 점령당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세력을 되찾는다.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사토미씨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카즈사로 침공하여 1566년 미후네야마(三船山)에 요세를 쌓았다. 요시히로의 사누키성에서 북쪽으로 불과 4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다음해 우지야스는 우지마사(氏政), 우지테루(氏照)에게 3만의 병사를 주어 사누키성, 쿠루리성의 공격을 명했다.

 요시타카는 쿠루리성에서 아들인 요시히로에게 기동전(機動戰)을 명했다. 8천의 병력으로 선수를 쳐서 미후네야마(三船山)의 호우죠우군()을 남과 북에서 협격했다. 호우죠우군 3만은 산 위에 있었기에 잘 움직이질 못하고 밀려 무너지는 형태로 서쪽의 쇼우지(障子)계곡으로 내려갔으나 그곳은 땅이 물렁물렁해 발이 빠져 전투태세를 취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사토미군의 맹공을 받았다. 호우죠우군은 2500여의 사상자를 내고는 패주했다.

 사토미 요시히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선(兵船)을 보내어 미우라(三浦) 반도의 키쿠나우라(菊名浦)까지 계속 항해하여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수군(水軍)을 물리쳤다. 호우죠우씨의 사토미 공략은 대패로 끝나 번 다시 보우소우(房総)로 침공하지 않았다.


무너진 호우죠우 협격책(挾擊策)


 미후네야마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요시타카는 이미 61.

 계속해서 호우조우씨 토멸(討滅)에 의욕을 보이며 시모우사(下総)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569 지금까지 함께 호우죠우씨를 협격하고 있던 우에스기 켄신이 호우죠우와 동맹을 맺어버렸다. 타케다 신겐의 스루가(駿河) 침공과 서진(西進)에 따른 결과였다.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를 칠 절호의 기회를 잃었고 켄신의 배반에 격노하며 반대로 신겐과 동맹을 맺어 호우죠우씨 협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2년 후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켄신과 절교하며 타케다 신겐과 재동맹을 맺었기에 요시타카, 효시히로 부자는 다시 우에스기 켄신과 반()호우죠우의 공투(共闘)동맹을 맺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상경(上京)으로 인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의 행동이 크게 변화할수 밖에 없던 것이 보우소우(房総)의 사토미 요시타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1574년 6월 1일.

 요시타카는 카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의 산과 들이 내려다 보이는 쿠루리성에서 반()호우죠우의 불길을 계속 지펴온 68년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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