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나가마사[田 長政]

1623년 윤8 4일 병사(病死) 55.

1568 ~ 1623.

쿠로다 요시타카[田 孝高]의 장남. 부친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략 때 데뷔전[初陣].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어 조선 침공[朝鮮役][각주:1]에 종군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치쿠젠[筑前] 52만석을 하사 받아, 후쿠오카 번[福岡藩]번조(藩祖)가 되었다.








모친과 처를 탈출시켜 준 것에 대한 은상(恩賞)


 1600 12 11일.
 쿠로다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다음 해인 1601년에는 후쿠오카 성[福岡城] 축성에 착수함과 동시에 영내(領內) 6개의 지성(支城)을 쌓아, 세키가하라[
ヶ原] 때 전공이 있던 중신들을 죠우다이[城代][각주:2]로 임명, 배치하였다.

 쿠라테 군[鞍手郡]의 타카토리 성[鷹取城]의 죠우다이에는 모리 타헤이[母里 太兵衛]가 임명되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서 명창(名槍) '니혼고우[日本号]'를 술내기로 따낸 일화로 유명한 타헤이는 세키가하라 때도 활약하였다.


 나가마사가 이에야스[家康]의 우에스기 토벌[会津征伐][각주:3]에 출진하자, 나가마사의 예언대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세력은 오오사카[大坂] 텐마[
満]의 쿠로다 저택을 포위했다. 타헤에는 밤을 기다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부인 코우엔[幸圓]과 나가마사의 부인인 네네[]를 가마니 안에 넣고, 두 개의 가마니를 바구니에 담아 긴 막대 끝에 걸쳤다. 그리고 상인으로 변장하여 그 막대를 어깨에 메고 뒷문 쪽에 있는 목욕탕의 벽을 뚫고 탈출, 쿠로다 가[黒田家]에 출입하는 상인 나야 쇼우자에몬[納屋 小左衛門]의 집으로 옮겨 숨겼다.


 부친 죠스이가 나카츠[中津]에서 파견한 배가 오오사카[大坂] 포구에 도착했지만, 이시다 측의 군선이나 작은 배들, 병사들의 경비가 심해서 타헤이,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 미야자키 스케다유우[宮崎 助太夫]의 세 가노(家老)들은 당혹하였다.


 7 17일 밤.
 타마츠쿠리[玉造]의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이시다 쪽의 인질요청을 거부하고 자살한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각주:4]와 호소카와 저택이 불타오른 것이었다. 경비하던 병사들이 타마츠쿠리로 향한 틈을 타서 코우엔과 네네는 729일 본국인 나카츠에 무사히 도착했다.


 모친과 부인을 탈출시킨 그들의 공적을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던 나가마사는 새로운 영지(領地) 후쿠오카 번()을 지배함에 있어서 지성 주둔 제도를 택하여 타헤이를 타카토리 성(), 쿠리야마 토시야스를 아사쿠라 군[朝倉郡] 마테라 성[左右良城]에 죠우다이로 각각 임명했다. 또한 가중 통제의 일환으로 '화내지 않는 모임[腹立てずの会]'이라는 것을 만들어, 중신부터 하급 무사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토론회를 열어 그들의 의견을 나가마사에게 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의 미래를 생각하며……


 1623.
 55
세가 된 나가마사는 에도[
戸]에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약을 복용했지만, 열격(噎膈)이 같이 생겼다. 쿄우토[京都]에 들리지 않고 후시미[伏見]에서 오오사카[大坂]로 이동. 치쿠젠에 귀국해서 몸을 돌보려 했지만, 이에미츠[家光] 3대 쇼우군[軍] 취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결국 오오사카에서 2~3일 정도 머문 후 상경하여 호우온 사[報恩寺]를 숙소로 정했다. 상경한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도 나가마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병문안 하였다.


 나가마사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깨달았을 때, 부하에게,

 지금 죽을 때가 되니 안타까운 것이 세 가지 있다
 고 말했다고 한다(쿠로다 가문 족보[黑田家譜]).


 [첫째는 어머니 코우엔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며,
 
둘째는 적자(嫡子) 타다유키[忠之]가 아직 약관(21)임에도 뒤를 돌보아 주지 못하고 죽는 것.
  셋째는 휘하의 장졸들을 데리고 평소 훈련시키며, 전투에 임해서는 엄숙과 절제를 지키고, 내 수족과 같이 움직이고 싶었다. 이것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이 이외에 미련은 없다.]


 윤 8 4일.

 나가마사는 일어나 앉아서 타다유키에게,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자비롭게 대하거라. 절대 게으름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속세를 떠돌아다녔지만 이제는 돌아간다 극락정토의 하늘로

 此のほどはうき世の旅にまよひきて今こそかへれあんらくの空

  1.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2. 성주를 대신해서 성과 그 주변을 행정, 관리, 방어하는 직책. [본문으로]
  3.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4.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이 글에선 자살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크리스천이었기에 가신에게 자신을 창으로 찌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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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0 1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격은 어땠나요? 아버지와는 달리 우직하고 성실했을 것 같습니다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0 16: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사람을 에피소드에는 항상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가 따라 붙는데, 이 고토우라는 인물이 나가마사의 애비 죠스이에게 엄청 사랑을 받았나 봅니다. 일생 미워했고 결국엔 참다 못한 마타베에가 뛰쳐 나갔는데, 다른 다이묘우에게 취직 못하도록 상대 다이묘우를 압박하여, 결국 코토우는 쿄우토(京都)에서 거지짓하다가 오오사카 겨울과 여름 싸움 때 오오사카 입성을 하게 만들죠.

    또한 위에도 나오는 모리 타헤에에 관한 것인데, 나가마사의 아들 타다유키가 아주 어렸을 때, "부친보다 더 뛰어난 공을 세우시오"라고 했더니, 그것을 듣고선 "난 조선에서도 공을 세웠고, 세키가하라에서도 전공이 넘버 원이었는데, 요즘같은 평화시에 어떻게 나보다 더 세울 수 있느냐"하고 지랄을 했다는 이야기나..

    너무도 뛰어난 아버지를 가진 컴플렉스로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는 좋겠다. 지 애비(나가마사(長政))가 별 다른 무공이 없으니 그에게 쪼금만 공이 있으면 천하가 칭찬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공을 세웠는데도 누구도 칭찬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했다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질투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담으로...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시마 사콘이 갑옷을 입고 살기를 내 뿜고 있는 것을 본 부인이 덜덜 떨었더니, 하는 말이...
    "겁도 많으시군. 아마 부인이 쿠로다 카이노카이를 본다면 기절하시겠구랴"라고 했다더군요.
    세키가하라때의 시마사콘의 살기 등등한 모습에 쿠로다의 가신들은 겁을 먹어 악몽에 시달렸다고 하던데, 그런 시마 사콘이 자기 보다 더 무섭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이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4 1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직, 성실과는 거리가 있었군요 ㅋㅋㅋ
    그런 컴플렉스를 가졌다니;;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4 2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직, 성실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군요... 똑똑하고 능력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컴플렉스는 많이 가졌던 것 같습니다만..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16 2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쿠로다 나가마사는 혁신에서도 적당하게 나오더군요. ..후반 시나리오 치고는 훌륭한 능력인데, 아무래도 부친에 비하면 '적당한'..;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7 0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래도 부친에 비하면 역시 적당해야 겠죠.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ttl00013 BlogIcon 라빈스텐 2008.08.31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친 간베에는 아무래도 히데요시가 엄청 경계할 만큼 머리좋은 사마의 정도라고 보면 되겟죠.
    머리하나같고 전국통일할수잇다는 평을 같고잇으니깐요..
    아들은 따지고 보면 원래 노부나가에게 죽을뻔 했지만 다카나카 한베에의 재치땜에 살은인물..
    결국 한베에땜에 살아가주고선 임진왜란때 3군 주장이되어 조선측에선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원수같은놈이 되엇다.. 결국 그?? 죽엇어야될 인물~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8: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약 쿠로다 가문이 단절되었다면 칸베에에게 그런 평가가 남아있을까? 하는 의문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죽었더라도 다른 인물이 3군 사령관이 되었겠지요 ^^

구로다 요시타카[ 孝高]

1604 3 20일 병사(病死) 59.

1546 ~ 1604.

()인 죠수이[如水]가 더 알려져 있다. 통칭 칸베에[官兵衛].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더불어, [하시바의 두 명의 베에(羽柴兵衛)]라 일컬어 졌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후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었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큐우슈우[九州]의 서군과 싸웠다.








천하인(天下人)에의 야망과 좌절


 1604 3 20일.

 야마시로[山城]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쿠로다 요시타카는 59세의 생애를 마쳤다.

 세키가하라[ヶ原]로부터 4 늦은 봄의 이별이었다.


 요시타카가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유언으로 남긴 내용이 [무공담 모음집(咄聞書)]에 전해지고 있다.

 “나는 도박을 잘하지만 너는 못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세키가하라[ヶ原] 이에야스 공[家康公]과 지부[冶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100일 정도 서로 싸우게 냅두면, 그 동안 난 츠쿠시[筑紫[각주:1]]를 제압한 후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천하를 잡을 수 있었을 터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가 하루 만에 끝나질 않고 이에야스와 미츠나리가 100일 간 싸웠다면 자신은 얼른 큐우슈우[九州]를 평정하여 승기(乘機)를 타 츄우고쿠[国]의 모우리[毛利], 우키타[宇喜田]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 쿄우[京]에 올라가 어느 쪽이건 승자와 대결하여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 죽기 직전에 나가마사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10월 15일.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논공행상을 행하며 공이 있는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영지(領地)를 배분했다.

 카토우 기요마사[加藤 正]에게는 히고[肥後] 54만석, 나가마사에게는 치쿠젠[筑前] 50 2416석이라는 큰 영토가 주어졌지만 요시타카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이에야스는 요시타카의가 천하를 손에 넣으려 했던 숨겨진 야망을 꿰뚫어 보았던 것은 아닐까?

 치쿠젠[筑前]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그때까지의 영지 18 2천석 - 에서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 입성하였다.


 나지마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요해(要害)였지만 원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의 영지에 있던 조그만 요새에 불과하였고 더구나 마을을 만들 땅이 좁아 성 밑 마을(城下町)을 발달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나카 군[那珂郡] 후쿠사키[福崎]에 새로이 성을 만들어 쿠로다 씨[黒田氏] 발상(發祥)의 땅인 비젠[備前] 오쿠 군[邑久郡] 후쿠오카[福岡]의 이름을 따와, [후쿠오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지마 성[名島城]을 없애고 후쿠오카에 새로 성을 축성하기로 결정이 나자 요시타카는 은거하여 모든 것은 나가마사에게 맡기고, 나지마 성에서 나와 다자이후[太宰府[각주:2]]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거기로 옮겨 살았다.

 다자이후 텐마 궁[宮] 경내(境內)에 세워진 초가집에서 매일매일 풍류를 즐기며, 다도(茶道)와카[和歌], 렌가[連歌] 등의 소양을 쌓았다.


문인으로써의 풍류의 나날


 예전에 멀리 떨어진 조정[遠の朝廷=발음은 とおのみかど’]”라고 불렸던 다자이후.

 그곳의 초가집에서 풍류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요시타카는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에게 땅을 하사하여 살게 해서는 예전에 융성했던 다자이후 렌가의 부흥을 꾀했다.

 또한 다자이후 덴마궁()2천석을 기부하여 아치형 다리(太鼓橋), 석등(石燈)을 만들어 받치고, 큰 칼[太刀] 외에 [텐진엔기 에마키[天神絵巻[각주:3]]] 세 권과 렌가를 봉납함과 동시에 궁 사무 책임자인(宮司務別) 오오토리이 신간[大鳥居 信岩]과 친교를 맺었다.


 1601 1 17일.

 오오사카[大坂] 텐마 궁[宮]에서 개최된 렌가회()에 오오토리이 신간과 함께 참여했다.

 이 모임에서는 중앙 렌가계()의 중심적 존재인 사토무라[里村] 일문(一門)의 총사() 쇼우하[紹巴[각주:4]]나 쇼우시츠[昌叱[각주:5]],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다음 해인 1602 1 16.

 다자이후 덴마궁()에서 아들 나가마사, 신간[信岩],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 등과 렌가회()를 열어, 예부터 큐우슈우[九州] 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자이후 문예의 부흥을 꾀한 것은 특필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인(茶人)으로써도 뛰어났다.

 센노 리큐우[千 利休]와 친교를 맺고 그의 다도관을 몸에 익혔으며, 다이토쿠 사[寺]의 슌노쿠 화상[春屋和尙]을 참선(參禪)의 스승으로 삼아 다도에도 선()의 정신을 가미하여 깊이를 더해 갔다.


 1601 5월.

 이에야스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개최한 잔치에 참가했던 요시타카는 그곳에서 가장 큰 차 가루를 넣어 두는 단지인 [葉茶壺]를 그냥 들고 나와 그 호방함에는 이에야스도 놀랐다고 한다[각주:6].


 2년간의 다자이후 생활 후 일부 완성된 후쿠오카 성 세번 째 성곽[丸] 은거 저택으로 옮긴 요시타카는 부인인 코우엔[幸圓]과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평생 부인 한 사람만 사랑한 그는 경건한 크리스천 다이묘우[大名]이기도 했다. ‘돈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SIMEONJOSUI]라 쓰여진 로마자 도장을 사용했다.

 유해(遺骸)는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寺]에 매장되었고, 하카타[博多]의 소우후쿠 사[崇福寺]에도 분골(分骨)[각주:7]되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真)


  1. 큐우슈우(九州)의 옛 이름. [본문으로]
  2. 과거 일본 조정이 힘이 있을 때의 큐우슈우[九州]와 부속 도서(島嶼)를 관장하던 관직인 다자이[太宰]의 정무소가 있던 곳. [본문으로]
  3.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받들고 있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真]'의 일생과 그가 죽은 뒤에 텐진[天神]으로 신앙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그림과 설명이 쓰여진 두루마기. [본문으로]
  4. 당시 렌가계(界)의 일인자. 여담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의 반역을 일으키기 직전에 아타고[愛宕]에서 연 렌가회의 사회자로 참가했었다. [본문으로]
  5. 죠우하의 아들. [본문으로]
  6.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훔쳤다는 뜻. [본문으로]
  7. 유해를 두 개소 이상으로 나뉘어 매장하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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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08 17: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재의 등장이군요.
    히데요시도 이 사람의 야망을 꿰뚫어보고 그렇게 중용하지 않았었다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08 23: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그런 말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다 후에 퍼진 소문들이라, 실제로 그랬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더군요. 중용을 안 했다고는 하지만, 임진왜란 시의 수륙병진책이라는 전략을 세운 것, 떨거지가 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에 양자로 보낸 것, 이순신 장군이 없으실 때, 원균 휘하의 조선 수군을 충분히 끌어 들인 상태에서 괴멸시키는 등, 생각 외로 그 후에도 많이 이용당했다고 봅니다.

    영지에 관해서도, 부젠 12만석 ~ 25만석이라고 여러 설이 있는데, 최대 25만석으로 할 경우에는, 당시 히데요시 휘하에서 친족들을 제외하곤 높은 편이었으니까요.(카토우 키요마사 - 코니시 유키나가는 삿사 나리마사가 죽은 후에 빈 히고를 둘이서 나눠 관리했어야 할 특단의 조치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실제로 그렇게 냉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7.10.09 0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시타카는 도요토미 정권의 크리스트 교 금지령에 따라 배교했는데, 말년에는 배교를 취소했다는 것입니까?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09 0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겉으로는 그랬지만, 속으론 버리지 않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같은 경우도, 세키가하라에서 진 후에 자결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크리스챤이었지만, 히데요시 휘하에서 임진왜란 때 선봉을 맡을 정도로 신임받은 것을 보면, 요시타카 또한 그러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유언으로 교회에 돈을 기부하라고 했을 정도인 것을 보면, 역시 죽을 때까지 속으론 믿고 있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09 08: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었군요.
    어제 TV에서 공명의 갈림길을 보는데 마침 시즈가타케 전투에 앞서 작전을 짜는 부분이더군요.
    죠스이도 볼 수 있었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09 0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턴오버님이 말씀하신 것이 주류니까요. 제가 말씀 드린 것은 어디까지나 이런 일도 있겠다..라는 정도로만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0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키가하라 전투와 관련해 그가 품었던 생각을 보니 참 무서운 인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듯 합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0 1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그래서 세키가하라 때의 행동이, 그 후에 그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생애 단 한 번도 남을 배반한 적도 없었던 죠스이를...
    뭐 히데요시가 누군가에게 "죠스이는 무섭다. 내가 머리를 싸매고 생각한 것을 그는 단번에 똑같이 이야기하고, 더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효율이 좋았다"라는 말이 후에 더 부풀려져 그를 방심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16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독탓에 머리에 난 종기 탓에(;) 저 트레이드마크 흰두건을 쓰고 다녔대더군요.. 이거야 우에스기 겐신씨도 아니고..(ㅇㅎ)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16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시메온이 텐카비토 사후에 크리스챤인걸 내세우고 다닌걸 보면 참.. 장수했다면 다카야마 우콘처럼 마닐라 유람을(..;) 했을지도 모를 노릇이군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7 0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죠스이가 매독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군요. 저 두건은 비슷한 것을 쓰고 있는 위풍당당한 모습의 이시다 미츠나리 그림이 있긴 한데.. 음 좀 더 그 쪽은 알아보아야 겠군요.

    '돈 시메온'이 해외 추방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믿지말라는 히데요시의 말에 "예 알겠습니다"라고 순순히 대답해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을 정도인 것을 보면, 융통성있게 처신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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