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음력으로 9월 15일[각주:1]이 되면 카고시마 현[鹿児島県] 히오키 군[日置郡] 이쥬우인 정[伊集院町]이 시간여행의 무대라도 된 듯 센고쿠 시대처럼 갑주를 몸에 걸친 무사들이 오며 “체스토! 세키가하키라”를 외치면서 행진한다.
 ‘체스토[チェスト]’라는 것은 카고시마 방언으로 ‘
치쿠쇼우[畜生]’라는 의미이며 화 났을 때나 분노했을 때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 행사를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라고 하며, 9월 15일에 행해지는 것은 1600년 9월 15일[각주:2]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의 패전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묘우엔 사[妙円寺]는 시마즈 군[島津軍]의 대장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위패를 안치한 절이다.[각주:3]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

  시마즈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의 패장이다. 그러나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 보여준 모습에 패자의 비참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러기는커녕 당시 요시히로의 후퇴는 ‘시마즈의 전진철수[島津の背進]’라 칭송 받으며 무명(武名)을 높였다. 요시히로의 무명(武名)은 시마즈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때부터 유명했지만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조선에서의 활약과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우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상대방인 명나라 측에 ‘석만자(石曼子)’로 계속 기억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8년 가을. 요시히로는 사천(泗川)의 성에 7천의 병사를 이끌고 농성하고 있었다. 사천성(泗川城)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가 지키는 울산성(蔚山城),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지키는 순천성(順川城)과 함께 명나라 군이 ‘왜의 세 소굴(倭之三窟)’이라 부르며 최대의 공격목표로 삼은 곳이었다.

 10월 1일, 명나라 군 20만[각주:4]은 사천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요시히로는 명나라 군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를 충분히 끌어들이는 작전이었다. 명나라 군은 의심 없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알맞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요시히로는 총공격을 명했다. 시마즈 군의 철포가 굉음을 내며 일제히 불을 뿜었다. 더구나 미리 숨겨놓았던 화약통을 저격하여 대폭발 시킨 것이다.[각주:5] 명나라 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런 명나라 군에 시마즈 군이 돌격하였다.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던 명나라의 피해는 굉장히 컸다. 기록에는 시마즈 군이 이 일전에서 벤 목은 3만8천7백여[각주:6]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각주:7]
 
요시히로 스스로도 “명예를 중국, 일본에 드높였다”고 할 정도로 이 사천의 대승리를 자랑스러워 하였다. 더구나 이 승리의 영향은 커 울산, 순천의 두 성을 포위하고 있던 명나라 군도 사천에서의 패전소식을 듣고 철퇴한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요시히로는 벤 적의 목들 대신 코를 베어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공적의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몸보신하라며 호랑이의 머리, 고기, 내장 등을 소금에 절여 보내거나 하였다.

 어쨌든 요시히로가 특출한 장수의 그릇이며 또한 개인적으로도 무예, 무용이 뛰어났다는 것은, 이 조선에서의 전쟁에서 “스스로도 칼로 공적을 세웠다” – 즉 스스로도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는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요시히로도 또한 조부 짓신사이 타타요시[日新斎 忠良][각주:8] 이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전통에 따라 아군, 적군 구별 없이 전사자의 공양에 힘썼다는 것에 있다. 현재 와카야마 현[和歌山県]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조선진공양비(朝鮮陣供養碑)”가 그것이다.

 참고로 요시히로의 조부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시마즈 가문의 중흥의 시조로 유교, 불교, 신도(神道)에 밝은 학자이며 실천자였다. 1583년 사츠마[薩摩] 카세다 성[加世田城]을 공략한 타다요시는 당시 경험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해 전사자는 모두 부처라 깨닫고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극진히 공양하였고, 이 전통은 아들인 타카히사[貴久][각주:9] 그리고 타카히사의 아들인 요시히사[義久], 요시히로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1600년 9월 15일 –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의 일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300기(騎), 총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부대의 오른 편에 진을 쳤다.[각주:10] 그 시마즈의 우측에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본진이 있었다.
 오전 8시[각주:11].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군 중에서 주력으로 싸운 것은 이시다, 코니시, 우키타의 부대였다. 요시히로는 어째서인지 병사 한 명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시다 측의 사자[각주:12]가 싸워달라고 부탁하여도, 말투가 싸가지 없다
[각주:13] 쫓아내는 식이었다.[각주:14] 결국 미츠나리 자신이 직접 움직여달라고 요청하러 왔다. 그러자 요시히로[각주:15]는,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 라고 하며 더 이상 대화도 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요시히로는 당초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뜻을 같이하고,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 때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를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거병하자 농성군 주장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가 요시히로의 입성을 거부한 것이다.[각주:16] 요시히로는 미츠나리의 세력범위의 한 가운데 남겨진 꼴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서군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각주:17]

 정오가 조금 지났을 즈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황 [각주:18] [각주:19]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이 급격히 무너졌다. 요시히로는 그래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군이 붕괴하자 동군은 요시히로의 진영으로 밀물처럼 다가왔다.

 이때가 되자 요시히로는 처음으로 싸우려 결심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이제 싸우다 죽는 것 외에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대장이 싸우다 적의 손에 죽는 것은 예부터 사츠마 군[薩摩軍]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요시히로 주종은 사력을 다하여 전쟁터에서 탈출을 꾀하려 하였다. 퇴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동군의 후방에 있는 ‘이세로[伊勢路]’뿐이었다. 요시히로 이하 300기(騎)는 기치(旗幟)를 버리고, 부대표식[馬標]을 부러뜨린 뒤 전군 일환이 되어 고함을 지르며 동군의 한가운데로 돌진하였다.

 동군은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부대가 시마즈 군을 포위하면서 공격해 왔다. 요시히로의 조카 토요히사[豊久][각주:20]가 요시히로의 진바오리[陣羽織][각주:21]를 입고 요시히로의 영무자가 되어 전사, 이어서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이 “내가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다”고 외치며 동군의 주의를 끌다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그들 외의 다른 병사들도 길 위에 각각 앉아 총을 쏘는 “좌선진(座禪陣)”이라는 진형을 취해 추격해오는 동군을 저지하였다. (대충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 듯(링크))

 이러한 휘하의 용감한 싸움 덕분에 요시히로는 구사일생하여 이세로[伊勢路]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때 당초 300기였던 무사는 80기로 줄어있었다.[각주:22]
 
이 요시히로 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탈출 전투는 장렬히 싸운 모습으로 인해 패주라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고 반대로 크게 무명을 드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 후, 종전처리는 형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가 중심이 되어 뻐팅김과 끈질긴 외교를 전개하여 2년 뒤, 요시히로의 무죄와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안도를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요시히로는 은거의 몸이 된다.
 이때부터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을 이은 아들 타다츠네[忠恒=이에히사[家久]][각주:23]에게 치세의 마음가짐 등을 가르쳤다. 화려함과 문약(文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말년에 저술한 한문체의 자서전에 그러한 정치철학을 담았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무시하고 단지 일신의 능력만을 믿고 세상을 살아가려는 자는 곧 멸망해 버리지만, 우리 시마즈 가문은 대대로 신불(神佛)을 우러르며, 선조를 공경하였다. 학문을 갈고 닦으며 번영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 가문을 잇는 자는 더욱 이 전통을 지켜나가야만 한다”
 라는 것이었다. 또한 나중에는 “쿄우[京]의 말투를 쓰거나 다른 지역[国]을 따라 한다면 사츠마는 멸망한다”고까지 말했다.

 요시히로는 굉장히 건강했다. 세키가하라에서 장거리 도피행에 이어 귀국했을 때가 66세였다. 그리고 1607년 이때 나이 73세였다. 이해에 전 관백[前関白]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가 보내온 편지에,
 “귀공은 여전히 천하에 그 무명을 떨치고 있으면서도, 여기까지 들려오는 바에 따르면 지금도 여자들에게 하자고 조른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스스로 무명을 깎아 내리는 일이 아니오?”
 라고 놀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요시히로도 차츰 쇠약해져 곧이어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늙어갔다. 그래도 이 노웅(老雄)에게 식사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밥상을 준비하고는 측근들이 큰 소리로 전쟁터의 함성을 지르며 “적이 다가왔습니다. 어서 식사를 하시고는 적에 대비하십시오”라고 말하면, 그 순간만은 요시히로도 정신이 돌아와 혼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85년의 생애에서 수많은 격전을 쌓아 온 무인의 면목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535년생. 형 요시히사[義久], 동생 토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와 함께 ‘시마즈 사형제[島津四兄弟]’[각주:24]로 용명을 떨쳤다.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25]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시마즈의 본령(本領) 중 오오스미를 히데요시에게 영유를 인정받았다.[각주:26]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해 용명을 떨쳐, 그 공적으로 총 69만9천석이 된다[각주:27]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하지만, 패장인 채 그대로 영지를 인정받은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1619년 죽었다. 85세.

  1. 지금은 참가하기 쉽게 10월 넷째 주 일요일 날 행해진다고 함. [본문으로]
  2. 서력으로는 10월 21일. [본문으로]
  3. 그러나 지금은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망하고 들어선 메이지 정부[明治政府] 초기 불교탄압과 신도 일원화를 위한 폐불훼석(廃仏毀釈) 때 사라진 묘우엔 사[妙円寺]가 있던 자리에 대신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받드는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가 세워진 후에는 "「토쿠시게 ‘신사’」에서 「묘우엔 ‘사’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조선측 기록에서는 약 3만 9천. [본문으로]
  5. 선조실록[선조 105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0월 8일(경신) 7번째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에 따르면 모국기의 진영에서 취급주의로 인하여 폭발이 있었던 듯. [본문으로]
  6. 「시마즈가문 문서[島津家文書]」의 주장. [본문으로]
  7. 사족으로 일본 측에서 전쟁 중이나 후에 가증을 받은 가문은 없지만 시마즈 가문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요시히로의 아들 타다츠네[忠恒]가 종사위하(従四位下) 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로 임관됨과 동시에 5만석의 가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8. 짓신사이[日新斎]는 33살에 은거 후 불문에 들어가면서 칭한 호칭. [본문으로]
  9. 요시히로의 아비. [본문으로]
  10. 근래의 주장으로는, 이 자리 즉 미츠나리 진영의 우측에는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있었으며, 요시히로는 미츠나리 진영 후방에 있었다는 듯. [본문으로]
  11. 오전 10시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야소지마 스케사에몬[八十島 助左衛門]. 임진왜란 때부터 미츠나리가 시마즈 측에 자주 사자로 보내던 인물이었기에 시마즈 측의 면면들과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미츠나리의 사자가 되어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린 것도 이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이었다. [본문으로]
  13. 말투라기 보다는 야소지마가 급하다며 말 위에서 출격을 부탁한 것이 당시 예의나 군법에 어긋났기에, 사츠마의 병사들이 욕하며 죽인다고 난리를 쳤다. 오히려 야소지마와 안면이 있었던 상급지휘관들이 말리는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사족으로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은 이에 대한 일건을 미츠나리에게 보고한 뒤 본진을 빠져나와 전쟁터에서 도망쳤다. 세키가하라 후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에게 취직하여 500석, 후에 타카토라에게 인정받아 타카토라의 문서담당관[右筆]이 되어 1000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15. 요시히로가 아닌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와의 대화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이에야스[家康]는 상경을 거부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행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처벌하기 위해 아이즈[会津]로 향하면서 요시히로에게 후시미 성[伏見城]에 입성하여 지켜줄 것을 명령하였으나, 구두로만 전했을 뿐 문서로 남기지 않았기에 모토타다는 요시히로를 믿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당시 후시미 성을 지키던 군세는 전부 이에야스 휘하의 군세였던 만큼 이질적인 사츠마의 군세가 들어왔을 시 명령계통과 통일적인 움직임에 균열이 생길까 하여 모토타다가 거부하였을 수도 있다 [본문으로]
  17. 요시히로의 사츠마 군세가 이런 것을 포함하여 여러 이유로 세키가하라 때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현재도 주류이지만, 카고시마[鹿児島] 출신으로 사츠마[薩摩] 관련 전문가인 키리노 사쿠진[桐野 作人]씨는 이때 사츠마의 군세가 방관이나 눈치보기를 했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야소지마의 일건과 이시다 미츠나리의 내방 사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일어나 서군이 무너지는 시점이었기에, 미츠나리의 요청으로 군을 움직인다고 하여도 사츠마 1500명의 군세로는 전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츠마 측 참전인물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오히려 전투 초반 요시히로는 활발히 미츠나리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수고한다고 격려하면서 작전계획을 면밀히 짜는 한편 응원이 필요한 곳에 철포 부대를 파견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시간흐름과 전황은 일본군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세키가하라역[日本戦史・関ヶ原役]」에 따른 것인데, 문제는 일본군 참모본부는 센고쿠 관련 연구를 당시의 일차사료가 아닌 에도시대에 나온 군기물(軍記物)에 주로 의존하여 정리하였기에 80년대 중반부터 관련연구가들로부터 자주 까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 [본문으로]
  19. 참고로 사츠마 참전 병사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군세는 2시간도 버티지 못하였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듯이 서군의 분전은 없었다는 인식인 듯. 뭐 전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쓰여진 회고록인지라 아군의 붕괴에 일어났던 일보다 과장된 감정과 지식을 가질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해선 감안해서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0. 시마즈 4형제 중 막내 이에히사[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21. 갑옷 위에 덧입는 조끼처럼 생긴 전포(戰袍) [본문으로]
  22. 요시히로와 함께 탈출한 이는 50명 정도인 듯, 밤 10시 즈음 오와리 코마노 고개[駒野峠] 앞마을 주민들에게 밥 좀 달라고 할 때 50명 정도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3.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고, 시마즈 가문 당주의 통자 ‘히사[久]’를 결합하여 타다츠네에서 이에히사로 바꿈. [본문으로]
  24. 사족으로, 본문에도 나오는 시마즈사형제의 할애비인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사형제의 인물됨을 평하며, "요시히사[義久]는 삼주(=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총대장이 될 덕목을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었으며, 요시히로[義弘]는 영웅의 무략을 갖추어 이에 따를 자 없으며, 토시히사[歳久]는 사건처리의 일부시종의 이로움과 해를 깨닫는 지략에는 견줄 이 없으며, 이에히사[家久]는 군법전술의 묘를 터득했다"고 평하였다. - 덕분에 듣보잡인 토시히사는 신장의 야망이 버전업 할 때마다 지략이 상향조정되어 등장한다. [본문으로]
  25.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6. 그러나 사츠마에 태합검지(太閤検地)가 끝난 1596년에는 히데요시 측의 의중으로, 요시히로가 사츠마[薩摩]를,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의 영지였던 오오스미[大隅]로 영지가 바뀌게 된다. 당시는 본거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였던 때인지라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있는 사츠마를 영유하게 된 요시히로가 시마즈 가문을 대표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사족으로 요시히로는 형 요시히사를 의식하여 사츠마에는 자신의 자식이며 요시히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후계자 취급을 받던 타다츠네[忠恒]를 입성시키고, 자신은 오오스미와 사츠마의 국경에 있는 쵸우사[帖佐]라는 곳에 머문다. [본문으로]
  27. 실제로는 61만 9430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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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2.01.14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견인지 모르겠지만 미나미큐슈사람들은 (제가 본 주변에 한해서지만) 시마즈가의 영향이련지 꽤 운동부계열의 기질의 애들이 많더군요. 하긴 활동하기 좋은 따스한 동네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보니 전 관백 부분에서 혁신같은 게임을 플레이할적엔 코노에 마에히사라고 그냥 읽고 다녔는데 요미가 달랐었군요(..아 부끄럽네요) 이쪽방면으로는 정말 익혀도 익혀도 이래저래 끝이없는 것 같습니다(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1.16 0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카고시마 쪽 사람들은 아예 본 적이 없어서.. 일본사 속에서도 사츠마하야토[薩摩隼人]라고 하여 날랜 이민족의 있었다 하니 조금이나마 그런 형질의 피가 흐를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자주 헷갈리더군요. 특히 야마시나 토키츠기[山科 言継], 토키츠네[言経]의 경우 항상 코토츠기, 코토츠네...로 읽습지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koviet2 BlogIcon 꼬비에뚜 2012.01.18 1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웹에 이렇게 성의있는 번역물을 올리는 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너무 늦게 알게 되서 ...
    네이버에 안 계시니 소통은 좀 더딜 듯합니다만 자주 찾아와서 뵙겠습니다.

  3. dsfsd 2012.03.23 0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귀석만자 귀신 석만자라는 소문은 무슨 실록인가? 보니까 그런 얘기 들은 적이 없다 라고 조선관료가 그랬다는데 사실인지..??? 그리고........ 생각해보니........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명장을 귀신이라고 붙이질 않잖아요 ...ㅋㅋㅋ ...........오직 동아시아에서 일본에서 鬼자 붙이잖아요 ㅋㅋㅋ 귀의중 귀진벽 귀신 도청흥 적귀 아카이 나오마사 청귀 인정교업 오니 도세츠 오니 시바타 오니 미노 오니 토라..... 개나소나 귀신이라잖아요 ㅋㅋㅋㅋㅋ 그 때 한번 제대로 이기긴했는데. 귀신 시마즈라고 소문났대 라고 시마즈 진영에서 뻥튀기한 거 같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뇌내망상의 사츠마"라 지칭하고 있습죠. ...뭐 근데 자기 공적이나 조상들 공적 뻥튀기하는 거야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으니..

  4. Favicon of http://megathinking.tistory.com BlogIcon ijaeho 2012.08.25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쓰마 관련 배경지식을 찾다가 들어와서 보고 글 남깁니다. 도장에서 지겐류 이야기를 들을때 전율했던 기억이 납니다. 괜히 =_= 지겐류가 강했던게 아니었군요.

  5. primeseals 2014.03.21 0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자료네요. 뒤늦게 이 블로그를 알게됬지만 정말 잘보고 갑니다^^ 하시는 일 잘 풀리시길..

  6.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6: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인물열전 100화를 처음부터 감사히 잘보고있습니다. 요시히로 말년에 밥먹이는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네요.

 쿄우토[京都]의 산쥬우산켄 당[三十三間堂] 앞에 요우겐 원[養源院]이라는 절이 있다. 사람들은 요우겐 원 본당의 천장을 일컬어, ‘혈천정[血天井]’이라고 하다. 기분 나쁜 흑색으로 천장에 늘러 붙은 혈흔 – 그것이 장렬한 낙성을 보여준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와 그의 사졸들이 흘린 피였던 것이다.

 절의 역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절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가 망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였지만 나중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각주:1] 요도도노의 동생이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수우겐인[崇源院][각주:2]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각주:3] 재건할 때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이 세웠던 절을 재건시킬 수 없다고 하자, 후시미 성에서 전사한 토리이 모토타다 들의 혈흔이 새겨진 후시미 성의 마루바닥을 요우겐 원의 천장으로 하여 모토타다 들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세웠다고 한다.[각주:4]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의 전초전 격으로 치러지고 낙성된 후시미 공방전이야 말로 미카와 무사[三河武士]의 본질을 잘 알려주는 전투였다. 의리 있고 완고하며 주군을 위해서는 온 몸을 바친다. 그러한 미카와 무사의 전형을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 토리이 모토타다가 농성전에서 보여준 것이다.

 토리이 모토타다는 부친 이가노카미 타다요시[伊賀守 忠吉][각주:5]의 아들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당시엔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을 대대로 섬겼다는 가문[普代]에서 태어났다. 모토다다는 13살 때부터 3살 연하인 이에야스[家康]를 근시(近侍)하였다.

 미카와 무사 모토타다의 충섬심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땐가 이에야스가 모토타다에게 몇 번 모토타다의 공적을 상찬하는 표창장[感状]을 주려고 하자 모토타다는,
 “표창장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다른 가문에 취직할 때 이력서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토쿠가와 가문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가진 적이 없기에 그러한 표창장은 저에겐 휴지쪼가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고 거절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히데요시[秀吉]가 모토타다에게 조정의 관직을 주력 하자 모토타다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뭘 하건 서투르기에 이군(二君)에게 충성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거기에 미카와에서 자란 시골뜨기라 역시 뭘 하건 투박하여 도저히 관위를 얻어 전하(=히데요시)의 앞에서 어떤 실수를 할 지 모르옵니다. 부디 관위에 관해서는 생각을 거두어 주시길.”
 하고 완고히 사퇴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정중하면서도 히데요시에 대한 접근을 거부한 것이다.

 모토타다의 경우 이러한 의리 있는 모습, 완고함은 자신의 주군 이에야스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1580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 측의 타카텐진 성[高天神城]을 공격하였을 때, 격전을 치른 뒤 모토타다의 부대는 험한 산길에 본진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급부대가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계속 된 격전에 피로와 굶주림으로 지쳐갔다. 그러던 중 모토타다에게 한 병사가 밥을 한 상 차려왔다. 부근의 민가를 돌아다니며 조달해 온 것이었다. 모토타다는 병사의 얼굴을 보고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으나 행여라도 싶어 보급대가 도착하였는지, 병사들은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역시 아니라고 하였다. 모토타다는 말했다.
 “장수인 자가 병사들과 함께 고생도 하지 않고 무슨 전공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식량이 없다면 너희 병사들과 함께 굶어 죽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고 말하며 차려온 밥상을 눈 앞의 절벽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1600년 5월 17일. 이에야스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기 전날이었다. 중간에 후시미 성에 들른 이에야스는 이미 62세가 된 모토타다를 불러, 자신이 부재 중 후시미 성의 수비장수로 임명하였다.
 이미 이에야스는 자신이 동쪽으로 떠나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거병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여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이 후시미 성은 사방에서 이시다 측에게 포위되어 고성(孤城)이 될 것이다. 그런 희생양을 부탁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토리이 모토타다 말고는 없다고 이에야스는 생각한 것이다.
 모토타다는 이에야스에게 수비장수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이시다 측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있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수비장수의 역할은 힘들 것이네. 수비병도 많이 남기지 못하여 고생할 테이지만…”
 하고 말을 꺼내자,
 “지금은 아이즈로 출병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한 부대라도 많이 데려가시길”
 하고 답하며 모토타다와 함께 후시미 성의 수비역할을 맡게 된 나이토우 이에나가[内藤 家長],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 家忠]들도 아이즈로 데려가길 바란다며 반대로 이에야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이것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날 밤. 이에야스와 모토타다는 술을 마시며 어렸을 적 추억 등[각주:6]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모토타다가,
 “만약 이시다의 거병 등이 있다면 오늘 밤이 이번 생의 마지막이옵니다.”
 고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모토타다의 뒷모습을 보며 이에야스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예상대로 한 달이 지나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거병하여 곧바로 후시미 성 공격에 나섰다. 공성군 총세 4만에 수비하는 병사는 2000미만[각주:7]이었다. 누가 보아도 낙성은 시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성 수비병의 사기가 높아 10일간의 포위공격이 이어져도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공격군 속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가 휘하의 코우가[甲賀] 출신자를 이용하여 그의 일족으로 성안에서 수비를 하고 있던 자에게 내응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고향에 있는 너의 부인이나 아들을 전부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응자가 지른 불로 성안에 불이 나 혼란에 빠지자 공격군이 단번에 성 안으로 진입했다. 세 번째 성관[三の丸]의 수비장인 마츠다이라 이에타다, 서측 성관[西の丸]의 수비장인 나이토우 이에나가도 연달아 전사하여 남은 것은 본성[本丸]의 토리이 모토타다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모토타다는 마지막까지 할복을 거부, 적병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죽이기 위해 계속 분전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62세의 노구에 피로가 쌓였다. 지친 모토타다는 나기나타[薙刀]를 지팡이 삼아 계단에 앉아있을 때 적 사이카 마고이치[雑賀 孫一][각주:8]가 그 목을 베었다고 한다.

도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1539년 생. 토쿠가와[徳川]를 대대로 섬긴 집안 출신.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공을 세웠고,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때 발에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한다.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뒤 카이[甲斐]에서 호우죠우 우지카츠[北条 氏勝][각주:9]의 부대를 격파[각주:10]하여 카이 군[甲斐郡] 안에 영지를 하사[각주:11]받았으며, 이에야스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 됨에 따라 시모우사[下総] 야하기[矢作] 4만석에 봉해졌다.[각주:12]

  1. 1619년. [본문으로]
  2. 2011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 오고우[お江]. [본문으로]
  3. 1621년. [본문으로]
  4. 요우겐 원 뿐만이 아니라 후시미 성의 혈천정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본문으로]
  5. 소설 ‘대망’에서, 인질시대의 이에야스가 조상의 성묘를 핑계로 오카자키에 잠깐 들렸을 때, 타다요시는 자신의 집 창고에 이마가와 가문 파견 무장들의 눈을 피해 쌀과 돈, 무구 등을 축적하여 보여주며 다시 이 성의 주군이 되었을 때 쓰라며 미카와 무사들의 와신상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에 나오는 그 인물. [본문으로]
  6. 모토타다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인질로 잡혀있을 때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었다. 또한 이에야스는 같이 놀다 맘에 안 들어 모토타다를 발로 찼다는 일화도 있다. [본문으로]
  7. 처음엔 약 1800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이에야스의 정무소였던 오오사카 성[大坂城] 서측성곽[西の丸]를 지키던 사노우 츠나마사[佐野 綱正]와 휘하 600명이 모우리 가문[毛利家]에 쫓겨 후시미로 왔고, 이에야스의 오우미의 영지 코우가 군[甲賀郡]의 호족 - 이 들중 하나가 나중에 서군과 내통 - 들이 입성하여 후시미 성의 수비군은 총 2500~3000 사이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사이카 마고이치는 스즈키 시게토모[鈴木 重朝]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미토 토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에 임관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의 맹장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손자. [본문으로]
  10. 호우죠우 1만에 대하여 미즈노 카츠나리[水野 勝成]와 함께 2000여를 이끌고 기습하여 승리. 이에야스는 “이 땅은 자네가 무용으로 취한 땅이니 앞으로도 이 땅을 다스려라” [본문으로]
  11. 사족으로 이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에야스가 타케다[武田]의 명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의 딸을 찾아서 데려오라고 하자 모토타다는 찾을 수 없다며 보고했다. 나중에 어떤 이가 이에야스에게 노부후사의 딸이 있는 곳을 보고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모토타다가 데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모토타다 녀석 빈틈이 없구만”이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모토타다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3남1녀를 낳았다.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삼걸인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2만석,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10만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0만석에 이어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와 같은 4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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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kyup 2011.03.30 0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전형적인 이에야스 가신이지요. 이 친구 아들이 이에야스 큰칼잡이 시동이었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30 09: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토리이 모토타다는 항상 덧붙여지는 말이 "미카와 무사의 거울"이더군요.

      큰칼잡이 시동이라...죄송하지만 거까지는 모르겠군요. ^^;
      대충 언제 쯤의 큰칼잡이[太刀持ち]면 모토타다의 몇 번째 아들정도는 추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그런 일을 맡았는지는 제 지식이 부족하여 모르겠습니다.

    • ckyup 2011.04.01 0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는 잘 기억이 않나지만요, 이름은 아마 '신타로'로 기억하네요. 그때가 아마 히데요시가 한참 정권잡고 잘나갈때 였던가...?, 암튼 그랬던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2 1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밑에 소슈님의 말씀을 듣고 대망에서 찾아 보았더니... 있군요. 이에야스가 상락하여 히데요시의 군문에 들어가는 자리에서 칼을 들고 있던 토리이 신타로[鳥居 新太郎]우 나중에 토리이 타다마사[鳥居 忠政]가 되는 인물이군요.

      대망에선 확실히 몇 시간 동안 칼을 들고서 조금도 흩으러지지 않아 그것을 맘에 들어한 히데요시가 이부제 히데나가의 딸(양녀)과 신타로우를 결혼시키려고까지 하는 것으로 나오는군요(어이가 안드로메다로~)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서는 그의 아비인 토리이 모토타다가 확실히 이에야스를 따라 상락하는 인물 중에 한 명으로 나오긴 하는데, 역시 (대망에 따르면)당시엔 코쇼우[小姓]라는 미관말직에 있었던 지라 신타로우의 이름을 찾아 볼 수는 없군요.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02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분의 기억이 맞습니다.

    대망에서는 도리이 신타로가 큰 칼을 하도 잘 잡고 있어서 히데요시에게 무쇠팔뚝이란 이름을 하사받는다는 챕터가 있지요.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의 결혼 동맹을 체결하기 직전 쿄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이야기는 잠시 각설하고, 후시미 성의 방어는 아마 세키가하라의 승부에서 동군에게 큰 이득을 안겨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일설에는 시마즈가 동군쪽을 편들고 싶었던 것을 거부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서군의 진행을 늦추면서 이에야스에게 많은 시간을 벌어준 셈이니까요.

    아마 그 이후로도 도리이 가문은 다이묘의 위치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막부와 함께 운명을 다했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2 1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대망의 해당 부분을 찾아보았는데, 이에야스의 코쇼우[小姓]따위에게 무려 종사위하(従四位下) 산기[参議]의 양녀와 맺어주려고 하는군요. 제가 가진 지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후시미 성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입성은....
      우선 요시히로의 편지를 보면 이에야스의 입으로 직접 부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근데 그걸 문서화 해서 달라는 요시히로에게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에 바쁜 이에야스는 깜빡 잊고 그냥 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몇 번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요시히로를 토리이 모토타다 등이 거부했다고 하는군요.

      당시 요시히로는 휘하에 군사가 적어서 (약 1000 미만이었다고 하네요 - 것도 대부분 조카 토요히사[豊久]의 군사였다고 하네요. 요시히로 직속은 대략 200~300정도) 주도적으로 자신의 거취를 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던 듯 합니다. 사츠마[薩摩]로 편지를 보내서는 계속 '군사 좀 보내주세요 징징~'댄 거 보면 한탕 노리려고는 했는지 몰라도 동군 편에 설려고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이에야스하고는 굉장히 친했다고는 합니다...만 주위가 온통 서군인지라...)

      토리이 가문은..
      신타로우 즉 토리이 타다마사[鳥居 忠政] 때 아비 모토타다가 후시미 성에서 죽은 덕분에 차츰차츰 가증되어 모가미 가문[最上家] 카이에키[改易] 뒤 빈땅이 되어 있던 야마가타[山形]에 최대 24만석의 영주가 되었습니다만....모토타다의 손자(타다츠네[忠恒] 때 병크(남아있는 배 다른 동생을 양자로 세우면 되는데 다른 가문에 양자로 보낸 친동생을 다시 데려와 죽기 바로 직전에 양자로 세우려다 막부에게 인정 못 받음)로 3만 여석(최저일 때는 1만석) 정도로 떨어지는 식으로 부침이 있었지만 이후 모토타다의 핏줄은 끊기는 일 없이 6대 타다테루[忠英] 이후는 대대로 막부의 요직(소우샤반[奏者番] 겸 지샤부교우[寺社奉行] -> 와카토시요리[若年寄])을 거쳤고 그 중 한명(8대 타다오키[忠意])은 막부의 수상인 '로우쥬우[老中]'가 될 정도로 중용 받습니다.

      막말유신기 때는 에도[江戸]에 가까운 미부 번[壬生藩]에 있으면서도 좌막이 아닌 근왕으로 신정부 측에 서 번을 유지할 수 있었고(12대 타다토미[忠宝]), 폐번치현 이후 신정부의 거물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의 구미사절단[岩倉使節団] 때 꼽사리 껴 미국에 사비유학한 뒤 자작(子爵) 위를 받았다(13대 타다후미[忠文])고 합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02 2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도리이 가문이 그렇게 존속이 되는군요. 시대의 흐름을 나름대로 참 잘 읽은 셈이네요. 미부라는 단어를 보니 생각나는건 미부로시가 생각나는군요. 역사란 배우고 배워도 여기서 튀어나오고 저기서 튀어나오고.

      그나저나 제가 언제나 이 곳에서 가르침을 받아가서 너무 이문(?)이 많이 남는군요. 감사함을 어떻게 표시해야할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3 08: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부로시[壬生浪士] 즉 신센구미[新選組]는 쿄우토[京都]의 미부[壬生]라는 곳에 있는 곳이고, 토리이의 미부 번[壬生藩]은 칸토우[関東] 시모츠케[下野] 즉 지금의 토치키 현[栃木県]에 있던 곳입죠.

      미부[壬生]의 어원의 저습지..라고 하더군요. 칸토우에 있는 미부건 쿄우토의 미부건 그런 이유로 같은 이름이 붙지 않았을지..

      이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그저 우연히 관련 자료가 있었을 뿐입니다.

  3. Gyuphy IV 2011.04.03 0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PS3에 쩔어살다보니 이래저래 답방이 늦습니다(__) 그러고보면 플3계 게임 전국무쌍3에서 토리이 모토타다 지키는 후시미성을 불바다로 만드는 미션이 있긴 했었는데 큐슈에서 텔레포트 해오신겐지 긴치요님이 낙성 시킨다는 황당무계한 설정이더군요(허어..)

    그러고보면 이야기가 좀 삼천포로 가버리긴 합니다만 이와쿠라 토모미 구미사절단이 미국에 내려놓고(;)간 사람들이 꽤 되는군요. 이를테면 오오쿠보 토시미치의 차남 마키노 백작이라거나.. 시대는 좀 다르지만 카네코 후작이라거나 니토베 이나조라거나 미국유학파출신이 메이지후기에 큰 영향을 주는걸 보면 참 메이지때의 이나라 사람들의 선견지명은 좀 놀라운데가 있습니다(ㄷㄷ..)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03 0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 그 부인은 왜 후시미 성에... 남편 따라 이세[伊勢] 오오츠 성[大津城]에나 가시지...아....사이 안 좋으시지..

      과연 규피 님!! 그쪽에 먼저 눈이 가시는군요. ^^
      근데 전 메이지 신정부 이후는 문외한에 가까운지라...

      다만 그런 것 같습니다.
      바로 전까지 양이(攘夷)를 외치던 인간들이 그것이 허황됨을 깨닫자 마자 순식간에 몰려가 배우려는 자세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물론 이것도 요즘엔 '다이죠우이[大攘夷]'라 해서 외국문물을 배우는 것도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펼쳐 서양에 대항하기에 '죠우이 '라는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지만 말입죠)

.

 히데요시[秀吉]의 사후(死後), 쟁란(爭亂)이 일어났다. 1600 5월 여름. 미츠나리[三成]가 거병하였다. 간적(奸賊) 이에야스[家康]를 토벌한다고 하였다. 미츠나리에게 있어 모든 것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淀殿]를 위해서였으며 이 남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자신 말고는 토요토미 정권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천하의 제후는 동서(東西)로 나뉘었다.

 이러는 사이,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쿄우[京]에 있었으며,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이후 코우다이인[高台院]이라 불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에야스를 후원하며, 이에야스의 힘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보존하고자 그녀의 영향 아래 있던 여러 무장들에게 권하여 이에야스 측에 가담시키려 하였고 거의 성공하였다. 단지 그녀는 히데아키[秀秋]의 우둔함이 두려웠다. 서군(西軍)의 달콤한 말에 넘어갈 위험이 있어 히데아키의 깃발이 어느 쪽으로 향할 지, 이 젊은이에 한해서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코우다이인은 그를 쿄우로 불러,

 에도()[각주:1]은 당신의 은인입니다. 결코 방향을 틀리지 마시길

 하며 정성 들여 타일렀다. 히데아키는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이미 그 몸이 오오사카[大坂]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엔 온통 서군 뿐이라 서군 측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싸움에 이기고 난 후 100만석 영지를 준다는 뜻을 전해왔다. 히데아키는 다소 동요했다.
 
서군에 붙을까?’
 그러나, 칸토우[東]에도 사자(使者)를 보냈다. 그러는 한편 서군에 붙어 동군(東軍)의 소부대(小部隊)가 수비하는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에 참가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도대체 히데아키는 어느 쪽에 붙어있는 것인가? 더구나 그 후 서군의 지시에 대해서 굉장히 애매한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오우미[近江]의 타카미야[高宮]라는 곳에 틀어박혀서는 군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히데아키의 거동을 의심하여,
 
아군에게 큰 해가 된다.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 히데아키를 불러들여 몇 번이나 그 기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히데아키는 응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뿐만 아니라 칸토우[東]에 있던 이에야스도 히데아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해,
 
뭐라 해도 좆병진이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다
 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의 밀사(密使)가 왔어도 만족스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戰場)으로 향하던 도중, 토우카이도우[東海道] 오다와라[小田原]에서 또 다시 히데아키의 밀사가 이에야스가 머무르는 곳으로 왔다. 그것을 이에야스의 부하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가 응대하여 이에야스에게 만날 의향이 어떤지 물었다. 용건은 '서군을 배반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한다.

 만날 필요 없다

 고 이에야스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서군에 가담한 여러 무장들을 와해(瓦解)시키고자 온 힘을 다하여 뒷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료(幕僚)들은 이런 이외의 태도에 놀랐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서군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대부대(大部隊)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 머릿수는 얕볼 수 없었다. 더구나 이쪽에서 꼬시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내응(內應)하겠다고 자청하고 있는데, 그걸 만나지도 않겠다는 것은 어쩌자는 것일까?

 애송이 놈의 말, ()을 주기에 부족하다

 라고 이에야스는 그 이유를 말했다. 만약 함부로 응했다가 막상 그 때가 되어서 내응하지 않았을 경우 애송이의 잔머리에 넘어간 꼴이 되는 것이다. 이에야스로써는 승패 이상으로 명예가 걸린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5
일 후, 이에야스가 시라스카[白須賀]에 도착했을 때 히데아키의 세번째 밀사가
진중(陣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부하에게 시켜 적당히 응대하게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1600 9 15일 아침부터 벌어졌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서군에 속하여있었으며 더구나 계속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분지(盆地)의 서남부에 있는 표고(標高) 293미터인 마츠오 산[松尾山]의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아래쪽의 전황(戰況)을 관망(觀望)하고 있었다.

 킨고[金吾]는 도대체 어쩔 생각인가?”

 그 산을 올려보는 동서 양군의 어느 누구던 그런 의혹을 가졌다. ()은 마치 저 먼 하늘에 있는 듯했다. 당연히 아래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알 수 없었고 싸울 의지가 있는지 어떤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죽은 히데요시가 킨고를 위해서 붙여준 히라오카 이와미[平岡 石見], 이나바 탄고[ 丹後] 두 명은 이미 이 전날 밤 동군의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를 통해서 내응을 약속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나가마사가 그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히데아키의 신청을 승낙했다. 더구나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약속이 되지 않게 토쿠가와 가문에서 오쿠다이라 사다하루[平 貞治], 쿠로다 가문[黒田家]에서는 오오쿠보 이노스케[大久保 猪之助]가 각각 연락과 감시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진중에 가 있었다.

 한편, 서군 측도 될 수 있는 만큼의 회유(懷柔策)은 쓰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입니다

 라 히데아키를 설득하여 전의(戰意)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단순한 충절론(忠節論)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에게 거대한 이익을 약속하였다. 이익이라는 것은,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시기 전까지 킨고님에게 천하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관백[白]추대(推戴)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조건에는 히데아키도 적잖이 마음이 흔들렸다.

 이 좁은 세키가하라 분지에 동군 약 7, 서군 약 8만의 군세가 대치하였다.
 아침. 전날 밤에 내린 비가 갬과 동시에 교전 상태가 되어
정오(正午)가 가까워짐에 따라 전황이 격렬해졌다. 더구나 서군의 주력 부대인 이시다[石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 등이 사력을 다해서 싸웠기 때문에, 밀린 동군은 기세가 눈에 띌 정도로 저하되었다. 이어서 오전 11시가 넘자 동군의 일부에서는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8천의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산꼭대기에서 내려올 기색조차 없이 동서 어느 쪽에도 붙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아키는 산 아래의 전황이 뜻밖이었다. 아군인 서군이 진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적인 동군에 내응을 약속하였는데 산 아래의 전황은 서군이 유리했다. 산꼭대기에서 히데아키는 이 남자 나름대로 계산을 하였다. 이대로 상황을 봐서 이기는 것이 결정된 쪽에 붙으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터이다.

 한편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시다 쪽의 분전은 더욱 뜻밖이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후 몇 번이나 마츠오 산을 올려다보며,

 킨고는 아직인가? 아직 내응하지 않는 건가?”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단 말인가? 하지만 산꼭대기에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코바야카와 가의 깃발은 움직이질 않았고 그 거취도 알 수 없었다. 히데아키의 거동은 이에야스가 예측했던 대로가 되었다. 결국 정오 전의 이에야스는 그가 낭패(狼狽)했을 때의 버릇인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해,

 애송이에게 속다니…… 분하구나 분해!”

 라고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비상수단을 택했다. 위협이었다. 곧 철포대의 일부를 전진시켜 히데아키가 있는 마츠오야마의 기슭으로 보내 산꼭대기를 향해서 이에야스의 분노를 표출하는 듯이 연달아 발포하게 하였던 것이다.

 히데아키라는 남자에게는 이 발포가 무엇보다도 큰 효과가 있었다. 산꼭대기의 히데아키는 놀라 두려움에 허둥거리듯이 서군을 향해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정오였다. 8천의 코바야카와 군세는 산을 내려와 아군의 진지로 내달렸다. 전세(戰勢)는 이 순간 역전되었다.

 싸움에 이긴 후 분지 서쪽의 이에야스 진지에 여러 무장들이 모여들어 축하가 이어졌지만 이 싸움에 승리를 가져다 준 최대의 공로자인 히데아키만은 아직 자신의 진지에서 비를 계속 맞고 있었다.
 
이에야스에게 혼난다
 는 공포가 있었고 또한 자신이 연기했던 역할이 얼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킨고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듯하군

 하고 이에야스가 말하여 전령(傳令)인 무라코시 모스케[村越 茂助]에게 맞이해 오도록 명했다.
 
저 좆병진에게는 여러 번 손이 가는구먼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곧이어 히데아키가 왔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부축하는 형태로 이에야스의 진지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에게만은 예()를 취하여 우선 자리에서 내려와, 투구의 턱끈만 풀고 말하길,

 츄우나곤님. 오늘의 전공(戰功)이 아주 크시니 앞으로 원한을 가지지 않겠소

 라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히데아키는 놀라 앞으로 자빠지듯이 절을 하였다. 원래의 태생으로 돌아간 듯 마치 백성과 같았다. 이런 인물이 토요토미 가문일문(一門)이었다. 그 보기 흉한 모습에 그곳에 있던 토요토미 계()의 여러 무장들 역시 창피해져 모두 눈을 돌렸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소곤거렸다. 마사노리는,

 당연한 것.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네. 그렇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사노리 자신도 아직 사태를 충분히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참새가 몇 시간 동안 역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가 결국 공포에 떤 나머지 뛰쳐나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쥐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만이 그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지하(地下)의 히데요시도 이 양자(養子)가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만드는 일을 할거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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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의 전공을 칭찬하며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0만석을 하사하여 그 공적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그 후 히데아키는 매일 밤 광란(狂亂)하며 음란(淫亂)에 빠졌고 적은 양의 술을 마시곤 취하여 곧이어,

 세키가하라의 전공 일등은 내다!”

 고 시녀(侍女)들을 모아서는 칼을 뽑아 들고 전쟁 흉내를 내었다. 보좌하던 노신(老臣)들도 그 광포함을 두려워하여 주요한 자는 대부분 그가 살아있을 때 뿔뿔이 흩어졌다. 곧이어 머리에 병을 얻어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2년 후인 1602 9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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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었다고?”

 쿄우[]의 코우다이인[高台院]은 이 조카의 부고(訃告)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었다. 계명(戒名)도 물어보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그녀가 만든 이 양자는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이 세상에서  완수하였다.

=======================================================金吾中納言,======================
  1. 이에야스. 이에야스의 거성이 에도에 있었기 때문이 이렇게 불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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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jw321 BlogIcon 이그네스 2008.01.12 15: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의야망 혁신에서는 소성 패다가 오히러 자기가 죽는 그런 비슷한 이벤이 있었던거 같은데.. (본인은 대충 봐 넘겨서 정확하진 않지만....) 여기선 병으로 죽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2 15: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군요(왜 이게 해석이 저는 그토록 어려웠던걸까요..ㅎㄷㄷ; 해석하느라고 참새와 매에 관한 소설을 머릿속에서 한편 썼었더랩던;;)

    그나저나 시바선생은 몰년의 히데아키의 나이를 기입하지 않는 센스를 보여주심으로서 '실수'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시는 센스를 발휘하셨군요(-_-..ㅎㄷ...)

    그.. 히데아키의 죽음에 관한 여러 이설을 안 넣고, 그냥 '뇌에 병이 들어 죽었다'로 간결하게 끝내는 센스도, 괜찮더군요. 역시 시바선생..이라는 느낌이랄까.

    모쪼록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미려한 히데이에 차례이군요(ㅎㅎ..)-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13 1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그네스님//그런 설도 있습니다. 술 먹고 전쟁 흉내내다가 소성 혹은 시녀에게 칼을 빼앗겨 죽었다는 설이나, 매사냥 나갔다 오다가 파이어볼을 채여서 그걸로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 혹은 (가장 유명한)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유령에 괴롭힘 받다가 죽었다는 설. 혹은 암살 & 독살설 등...
    한번 이것도 읽어 보시길..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9195550

    다메엣찌님//참새 & 매는 문맥상 그렇게 했습니다. 대항한다는 글자로 쓰여있긴 합니다만, 까분듯하게..
    저는 그 다음 문맥의 것을 살리지 못한 느낌이 드네요. [그가 말하는 ~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투구의 턱끈만 풀어 놓는 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더군요.

    そんなこといっちゃダメ!

    저 간결함 정말 맘에 들더군요. ^^ 보통 생각하면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저주의 말 한마디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 그냥 [이 순간 전세가 역전 되었다]로 끝내시다니..

    그쵸.. 다음은 [미남의 파동]에 눈을 뜬 [미의 극에 달한 히메] 고우키(豪姫)가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진정한 미남을 찾다가 걸린 눈이 아름다운 청년 히데이에... 그의 고난과 역경이 다음 주부터 여러분을 찾아갑니다.(by CAPCOM)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3 22: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 아무튼 세키가하라 이후 반세기 넘게 사신 분이니.. 천수까지 복받은 미남자(ㅋㅋㅋ)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1.31 05: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투구의 턱끈만 풀어놓는다" 라는것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히데아키에게 각인시키려고한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0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 과연....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전 예의상의 표현인 것 같기도 한데..
    (나름 많은 책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처음 본 표현이거든요)
    근데 히데아키가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이에야스가 과연 생각했을지...
    (...라고 할까 마치 세익스피어 문학 토론하는 것 같군요 ^^)

기노시타 가쓰토시(木下 勝俊)

1649 6 15 병사 81

1569 ~ 1649.

호는 쵸우쇼우지[長嘯子=장소자]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조카. 와카사[若狹]의 오바마성[小浜城]성주였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임무 방임죄로 영지(領地)를 잃었다. 후에 풍류의 세계에 살며 가인(歌人)으로 이름을 남겼다. 저서로는 가집(歌集) '쿄하쿠슈우[举白集]'











전도유망했던 와카사 소장(若狹少将)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컬어 '천하를 가르는 싸움'이라 하는데 이번에 등장하는 무장 키노시타 카츠토시에게 있어서도 인생이 갈려 버린 싸움이었다.

 카츠토시는 1569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 동생이 히데토시[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각주:1]였다. 성인식을 치른 후 카츠토시는 1548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히데요시를 따라 종군하였는데 아마 이것이 전장에 처음 출진일 것이다.

 

 1587년.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도 1천의 병력을 이끌고 종군했다. 이 시기에 시키부다이후[式部大輔]에 임관.

 다음해 1588년 4 14 쥬우라쿠테이[聚樂亭]로 천황이 놀러 갔을 때, 카츠토시는 칸파쿠[関白] 히데요시의 우마차 바로 뒤를 따랐다. 그때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 뜻을 적은 서약서에 [타츠노 지쥬우 토요토미노 카츠토시[龍野 侍從 豊臣 秀俊]]라 서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당시 하리마[播磨] 타츠노 성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90년.

 칸토우[関東], 오우슈우[奧州] 원정에서는 9백명을 동원. 이어서 1592년 조선 출병으로 인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주둔하지만 조선에는 건너 가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591 1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뒤를 이어 와카사 오바마 6 2천석으로 이봉되었다. 이 때 동생인 토시후사[利房]도 같은 와카사 내의 타카하마 성[高浜城] 2만석으로 봉해졌기에 카츠토시, 토시후사 형제가 다이묘우[大名]로서 와카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1598 4월에는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코노에노곤쇼우쇼우[佐近衛権少将]에 임관되었기에, 와카사 쇼우쇼우[若狹少将]라 불렸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 거기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기에 카츠토시의 앞날은 그야말로 전도유망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2년 뒤에 운명의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맞이한 것이다.


후시미(伏見)성의 수비에서 도망치다.


 1600 7월.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토벌하기 위해 칸토우로 내려가면서, 카츠토시에게 후시미 성의 수비를 명령하였기에 카츠토시는 후시미 성의 마츠노마루[丸]를 수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를 타도하려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의 서군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자 몰래 후시미성에서 빠져나온다. 공격군 중에는 동생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츠토시가 후시미성의 수비를 방기(放棄)한 것은 이에야스의 명령을 배신하고 서군에 가담한 것을 의미했다. 결국 서군의 맹공을 받은 후시미성은 곧바로 낙성되었고 이에야스의 부하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등 농성군은 장열한 전사를 했다.


 9 15일 세키가하라 전투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나자 전후 처리과정에서 임무 방임의 책임에 따라 와카사 오바마 62천석을 몰수당한다. 이때 카츠토시의 정실 모리 씨[森氏]는 카츠토시의 행동에 정이 떨어져 비구니가 됨과 동시에 카츠토시에게 시를 한 편 보내고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다. 참고로 이 정실 모리씨는 예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력 부장이었던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딸로,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전사한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여동생이었다.


낙동[洛東[각주:2]]의 은거자


 그 후 다이묘우에서 전락하여 낭인이 된 카츠토시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의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죽은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던 키타노만도코로는 조카인 카츠토시를 불쌍히 여겨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608 8월.

 카츠토시의 부친인 키노시타 이에사다가 쿄우토에서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에사다의 영지였던 빗츄우[備中] 아시모리[足守] 2 5천석을 카츠토시와 토시후사에게 나누어 물려받게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끼어든 키타노만도코로가 이에야스의 명령과는 다르게 이에사다의 영지를 카츠토시 한 명에게만 몰아주었기에 격노한 이에야스는 영지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시모리 2 5천석은 아사노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인 나가아키라[長晟]들에게 주어 버렸다. 이 직후 다시 다이묘우가 되지 못한 카츠토시는 머리를 깎고 '쵸우쇼우지[長嘯子]'라 호를 칭한 것 같다.


 1610 6월.

 카츠토시는 키타만도코로의 영지인 셋츠[摂津] 히라노 장[平野庄]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관리직도 원래는 부친 이에사다가 하고 있던 것으로 영주(領主)인 키타노만도코로의 배려로 카츠토시가 이어받게 된 것이다.

 후에 히가시야마에 은거한 카츠토시는 와카[和歌]의 길을 정진하면서 근세 초기의 와카의 무대에 이름을 남겼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 하야시 라잔[林 羅山]등의 문인이나, 상급귀족[堂上=도우죠우], 하급귀족[地下=지게]의 사람들과 넓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1649년 6월 15 쿄우토 서쪽의 오오하라노[大原野]에서 81세로 죽었다. 묘는 숙모인 키타만도코로가 잠든 코우다이 사에 만들어졌다.

  1.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즉 금오중납언. [본문으로]
  2. 쿄우토(京都)의 동쪽을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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