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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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2.02.23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나다 가문의 인물들은 평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수많은 창작물에 의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센고쿠시대의 아이돌급 인물들이기 때문이겠죠.

    신슈가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생각은 자주 듭니다. 신겐도 무참히 박살난 것이 여러번이요, 도쿠가와도 신슈 전역을 통치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이에야스는 본인이 마사유키에게 직접 패한 적은 없었는데 왜 마사유키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느꼈던걸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3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도 막부의 창시자를 부자이대에 걸쳐 괴롭혔다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나노信濃는 아무래도 남북으로 길며 거기에 산악지방이다 보니 하나의 쿠니国치고는 다양한 세력들이 작게나마 많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생각합니다.
      거기에 시나노라는 지역이 무로마치 시대 때 좀 특수한 지역이었습니다. 쿄우토 무로마치 막부에서 보기에 라이벌인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영향권과 맞다은 곳이다 보니 다른 곳과는 다른 특혜나 명예가 좀 주어졌던 곳이더군요. 아무래도 그러다보니 다른 곳에서 시나노를 차지하는데 더 힘이 든 것 같습니다.

      상기의 일화 등은 에도시대 사나다 가문의 가신인 타케노우치 노리사다[竹内 軌定]가 지은 진무내전(真武内伝)이란 책에 실린 것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조금 의문시됩지요. 이에야스가 실제로 두려움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 대전란에서 도쿠가와 잡는 장면 정말 재밌게봤는데 6편 이후로 번역이 안되니 너무 아쉽습니다.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는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에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뛰어난 무용(武勇)의 장수이지만, 센고쿠[戦国] 무장 특유의 연극적 행동이나 허세가 없어 어렸을 때부터 노련(老鍊)한 느낌을 준다.

 반 단에몬[塙 団右衛門]이라고 하는 요시아키의 가신이 있었다. 그는 소위 호걸형 무사였기에 주종간에 다툼이 많았다. 어느 날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카토우 키요마사가, 저렇게나 유명하고 뛰어난 무사를 어째서 우대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었다고 한다. 보통 자기 부하의 무명(武名)이 높으면 기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를 선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단에몬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한 부대의 지휘관으로 출진했지만, 지휘관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 필마단기로 돌격하여 가장 먼저 적진에 돌입하였으며(一番槍), 적의 목을 베어 오는(一番首) 수훈을 세웠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네 녀석은 지휘관을 맡기엔 부족한 놈이다”
 고 차갑게 질책하여 단에몬을 화나게 하였다. 결국 단에몬은 요시아키에게서 떠났다[각주:2]. 즉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탠드플레이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아키 자신도 떠들썩하게 남의 주목을 끄는 행동을 싫어하였다.

 요시아키가 얼마나 침착했는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요시아키의 부하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장난 삼아 불에 달구어진 불쏘시개를  거꾸로 세워 나중에 온 사람이 그것을 쥐다 뜨거움에 놀라는 것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거기에 요시아키가 지나치게 되었다. 부하들은 만약 요시아키가 불쏘시개를 쥐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말하는 타이밍을 놓쳐 누구 하나 말하지 못하던 중 결국 요시아키가 아무 생각 없이 불쏘시개를 잡았다. 요시아키의 손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태연히 그 불쏘시개로 땅바닥에 한 일(一)자를 그리고 잠시 떠들다 갔다고 한다. 더구나 나중에 어떠한 문책도 없었다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 침략의 본거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여러 장수들이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서 포획한 호랑이를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가던 중 호랑이가 그들을 뿌리치고 날뛰었다. 구경하던 다이묘우[大名]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빴지만, 그런 소동 속에서 요시아키 단 한 사람만이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눈을 뜨며, “뭔 일 있었나?”하고 입을 열었다 한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요시아키 한 사람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가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획책하였고 키요마사, 마사노리 등 무공파가 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행동을 일으켜 일촉즉발의 긴박한 공기가 떠돌 때도 요시아키는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 저택을 방문하여,
 “세상이 소란스러운 듯 합니다만 이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지금까지 곁에 두고 있던 50기(騎) 중 20기를 제 본거지인 이요[伊予]로 돌려보냈습니다. 남은 인원은 이에야스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바칠 생각입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요시아키는 냉정침착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西軍)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동군(東軍)은 앞다투어 가며 도망치는 적을 쫓아갔기에 진형이 흐트러져 각 무장의 본진을 지키는 방비가 부실해졌다. 하지만 요시아키의 부대만큼은 질서정연했다. 요시아키의 지시가 구석구석 잘 전해져 일사불란한 방비태세를 유지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적이 패주하자 요시아키는 출진할 때 몸에 걸치고 있던 화려한 갑주를 재빨리 벗어버리고 평범한 갑주로 갈아입었다. 이는 결사의 각오를 한 적병이 적어도 대장만이라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나중에 이를 전해 들은 이에야스는,
 “사마노스케[左馬助=요시아키]는 정말 빈틈이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초전인 기후 성[岐阜城] 공성전에서 승리하였을 때, 승리를 알리고자 칸토우[関東]의 이에야스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자(使者)를 고르려 했으나 아무도 사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막 결전이 시작되려는 때에 사자가 되어 전쟁터에서 이탈해 버리면 공적 세울 기회를 잃기 때문이었다. 이 때 요시아키는 가신 한 명을 지목하여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칸토우에 사자를 보내는 것은 긴급을 요하는 일이며 이것 역시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부디 가주지 않겠는가?”
 하며 간절히 부탁했다고 한다.

 역시 세키가하라 때의 일이다.
 요시아키 진영에 잠입한 닌쟈[忍者]가 잡혔을 때 요시아키는,
 “이자도 자기 주군의 명령에 죽음을 각오한 용사이다. 지금 여기서 이자를 죽여도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며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적이라 하더라도 용사를 인정하는 도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공적으로 인하여 요시아키는 이요 마츠야마[松山] 20만석에서 아이즈[会津] 40만석의 가증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이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에야스는 요시아키를 위해 50만석을 주려고 하였지만 이에야스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너무 많다며 막았다고 한다. 이를 들은 요시아키는 곧바로 마사노부에게 가서 이유가 뭐냐며 따졌다. 마사노부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많은 은혜를 입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무나도 많은 봉토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게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의 화근거리가 될 수도 있기에 그렇게 처리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리 요시아키라도 이에는 반론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각주:3]

 이에야스는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히데타다[秀忠]를 병상(病床)으로 불러 여러 다이묘우들에 관해 자신이 가진 인물평을 전해 주었는데 요시아키에 대해서는,
 “우직하고 의리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사사로운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불만을 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부분을 잘 판단해서 처리하도록”
 하고 말하였으며 또한,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는 다면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모반을 일으키는 법이다.”
 고 말하며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말을 남겼다 한다.

 카토우 요시아키의 가문은 아들인 아키나리[明成] 때 아이즈 42만석을 몰수당하여 단절을 맛보게 된다.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563년생. 통칭 마고로쿠[孫六], 사마노스케[左馬助].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를 섬기며 시즈카다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의 공으로 3000석을 하사 받았다. 1585년 아와지[淡路] 1만5천석, 조선침략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참전. 1597년에는 거제도에서 조선 수군의 배를 탈취했다[각주:4].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 마츠야마 성[伊予松山城]를 축성. 후에 아이즈 42만석으로 이봉(移封). 1631년 9월 12일 죽었다. 69세.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떠날 때 성문에 ‘결국 시골 좁은 천에 머물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를 높이 나는 갈매기 처럼 유유히 떠난다[野水江南遂に留まらず、高く飛ぶ 天地の一閑鷗]' – 즉 요시아키는 그릇이 작아서 대인배인 나님은 떠나마..라는 뜻일 것임. 아마... - 라는 시를 붙이고 갔기에, 이에 분노한 요시아키는 단에몬이 다른 가문에 취직 못하도록 타 다이묘우에게 편지를 돌렸다(이를 奉公構라고 한다). 그래서 단에몬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 밑에 있었으나 얼마 안가 그곳에 있지 못하고 쿄우토[京都]에 가서 탁발승을 하다가 나중에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 때 오오사카 성에 입성하게 된다. [본문으로]
  3. 전후 처리과정에서 이에야스가 논공행상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대리인과 후견인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키가하라 이후 동군이 영토를 하사 받은 것은 이에야스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닌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본문으로]
  4. 元凶(원균..이라고도 읽는다)의 칠천량 해전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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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01.09 05: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카토우 요시아키의 멸봉당한 아들내미가 제법 비중 큰 보스격으로 나오는 만화도 있던 기억인데요.. 아이즈 40만석을 걸 가치가 있다던가...(내용은 안드로메다였던 기억입니다만;)

    아무튼 담력이 참 멋지군요(..근데 왜 저는 한편으론 뭔가 마초짓은 바보같다고 느껴지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규우 쥬우베이[柳生 十兵衛]가 등장하는 와이쥬우엠 야규우인법첩[Y+M 柳生忍法帖]인 듯 하군요.

      http://ja.wikipedia.org/wiki/Y%E5%8D%81M_%E3%80%9C%E6%9F%B3%E7%94%9F%E5%BF%8D%E6%B3%95%E5%B8%96%E3%80%9C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유일한 딸인 치요히메[千代姫]를 아이즈의 시골 무사가 무시하는 쌍큼한 시작이 짱이었습죠.

      여담으로 호랑이 소동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호랑이와 눈싸움하였고 서로 노려보다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합니다.(...풋~)

      시간과 문화가 다르다 보니 느껴지는 것도 천차만별이라 생각합니다.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0.01.09 1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 중에서 마사노리나 기요마사가 최정상급 스타고, 다케노리나 나가야스가 단역에 그치는 인기를 누린다면, 요시아키나 가쓰모토는 중간급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말많고 탈많은 와키자카는 제외하겠습니다. 이순신 덕에 인기는 제대로 끌었으니)

    그나저나 아이즈는 정말 일본역사에 많은 이들이 오간 장소군요. 아시나, 다테, 우에스기, 가모, 가토 요시아키, 거기에 호시나 번까지 있었으니 .. 막말의 아이즈는 말할 필요도 없군요. 간토와 오슈 사이의 요충지라서 그런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막부가 호시나번을 아이즈에 둔 까닭은 대 다테 방어선의 역할이 맞는지요?

    P.S : 발해지랑님께선 원균 명장론을 믿지 않으시는 듯 하군요 (낄낄) 원균이 용맹하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튀어나오기는 한다만, 6년간의 모아온 전력을 한 번의 전투에서 모두 날려먹은 게 명장의 기준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발해지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1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일본 위키에 따르면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는 나머지 등등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 것을 싫어했다고도 하더군요.

      그러게요. 그래서 아이즈라는 쿠니[国]도 아닌 일개 지역을 따로 태그로 지정하였습죠. 언젠가 함 능력되면 아이즈에 관해서도 함 쓰고 싶습니다.

      ps..에 관해서는...
      승패야 병가지상사다 보니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동료를 참언하여 나락에 빠뜨린다거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사복을 채우고자 돈 받고 병사 제대시키거나, 충무공의 운주당이라는 참모부 건물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여성들을 데려다 하렘을 만든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더군요.

    • 정동희 2010.01.11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즈가 확실히 요지는 요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3. 맹꽁이서당 2010.01.09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엔 센고쿠 히데히사는 없네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쪽도 결국 막부시대에 단절당한 도요토미 가문 출신 인물이었군요.
    새해부터 좋은 지식 얻어갑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0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카다케 전투 당시 히데요시의 배후 중 가장 위험스러웠던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에 대한 방비책으로 시코쿠에 파견나가 있었습니다.

      시바타 카츠이에(...정확히는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측은 히데요시의 배후를 위협하는 의미로 모토치카에게 협력을 요청. 그에 응한 모토치카는 시코쿠의 히데요시 파인 소고우 마사야스[十河 存保]를 공략. 그러자 마사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원군 요청. 그래서 파견된 것이 히데히사였습죠.

      히데히사는 휘하 2000을 거느리고 시코쿠에 도하. 모토치카는 그 소식에 휘하의 카가와 노부카게[香川 信景]에게 5000을 주어 요격을 명령. 그 움직임을 캐치한 히사히데는 복병을 배치하여 카가와의 선봉대는 격파하나 깊숙히 추격하다 후속부대에 패배. 도망쳐 히케타[引田]라는 곳에서 머물다 기세를 타고 야습해 온 카가와의 군세에 대항도 못하고 도주. 도주할 때 부대 깃발까지 빼앗기는 굴욕도 맛보았다고 하는군요.(바로 시즈카다케 전투가 벌어지는 날과 같은 날이었다고 합니다[1583년 4월21일])

      이렇게 쓰면 히데히사가 조금 바보 같지만, 당시 가장 불온한 움직임을 펼치던 모토치카에게 대항하도록 파견한 점. 만약 모토치카의 그릇이 커, 과거 미요시 가문[三好家]이 그러했듯이 사카이[堺]에 상륙하여 쿄우토[京都]를 노리기라도 했으면 히데요시의 정권은 없었을 것이기에, 그런 것을 방비하기 위해 파견한 센고쿠 히데히사는 당시 히데요시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담으로...히케타[引田]에서 패하여 도망친 센고쿠 히데히사는, 본거지 아와지[淡路] 근방 수역을 장악하였다는 공로로, (졌음에도 불구하고) 4개월 뒤에는 아와지[淡路] 스모토[洲本] 5만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패했는데도 영지가 4000석에서 5만석이 늘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사족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은 아즈키자카 고개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을 베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즈가타케 전쟁이 히데요시 vs 카츠이에와 같이 보이는 것도 또한 실상도 그러하지만 그들이 각각 내세운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vs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즉 오다 가문 내부의 싸움입죠)
      오다 가문에는 과거 미카와 아즈키자카 고개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군세를 격파한 적이 있었고, 거기서 대활약한 7명의 용사에게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하니, 히데요시는 자신이 직접 키웠다는[子飼い] 무장 7명에게 저 칭호를 줌으로써, 무장들에게는 더욱 활약할 수 있는 동기부여와 발판을 마련해 줌과 동시에, 오다 가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적 효과를 노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도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정동희 2010.01.11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역시 마지막이 중요한건가요?
      일찌감치 히데요시 막하에서 많은 무공을 세웠고,
      발해지랑님 말씀처럼 사랑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다만 역시
      한 방면의 총책을 맡기에는 신중함이 많이 부족한
      인물이었죠
      돌격대장형 인간이랄까...

      암튼 그 뒤로 큐슈 원정 때, 시마즈씨 낚시걸이에 말려 들어서 대패해 도망치고, 가이에끼

      하지만 오다와라 원정 때, 백의종군(?)해서 다시 복귀

      세끼가하라때도 동국에 속해서 그 뒤로도 계속
      가문을 이었던 것 같네요(요건 좀 불확실)

      전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4.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1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동희님께//
    "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 그렇습니다. 키요마사는 조선침략의 최중요 후방 기지라 할 수 있는 히고를.
    마사노리는 토요토미 씨 발상의 지라고 할 수 있는 오와리를 영유한 것만 보아도 기타 등등과는 확실히 틀린 취급을 받은 것 같습니다.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 확실히 게임 상에서 센고쿠는 절망입죠. ^^

    말씀대로 센고쿠는 선봉대 대장 정도가 한계인 인물인 것 같습니다.

    "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 덕분에 우리는 매력적인 만화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01.14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에서 가정만큼 무의미 한 건 없지만
      히데요시에게 가족이나 인척이 많았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하다 못해 동생 히데나가쪽이라도 좀 번성했으면 어땠을지
      가토나 후쿠시마 등도 싸움에만 능했지 정치, 외교에 약해서 히데나가 사후에는 미쓰나리등 젊은 관리들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았나 싶네요(물론 그래도 다 지 하고 싶은 대로 했지만)

      센코쿠 히데히사 만화책은 저도 읽어 봤는데,
      고증도 잘 되있고, 재미도 있더군요
      센코쿠 같은 전국무장도 정말 드물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도도 다카토라 같은 인물이
      역시 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서 보통 한 번의 패배나 반역,가이에끼
      은거는 거의 그 인물의 종막이 되기 마련인데
      위에 언급한 센코쿠나 도도가 보기 드믄 케이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밖에 또 누가 있을 까요... 앞 선 인물들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다치바나 무네시게 정도...
      찌질거리면서도 오래 버틴걸로 따지면
      롯카쿠 쇼테이 부자도 만만찮죠...

      이런 인물들도 나름 드라마 성은 있을 것 같은데... ㅋ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5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조선이나 일본이나 불행이 더 길어졌겠죠. ...아마. 개인적으로 히데나가가 계속 살았다면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해 있던 기간이 더욱 늘어나지 않았을지...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도 내정면에서 뛰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오래 살았다면 나름 유능한 지방행정관으로 남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센고쿠 천정기라고...센고쿠 시즌2가 현재 일본에선 진행되고 있습죠. 시간 되시면 함 보시길. 신촌 북오프에 센고쿠 천정기가 있더군요...일본어 판이긴 합니다만. 재미있습니다. ^^ 전 지금까지 나온 것 다 가지고 있습죠. 원하시면 만날 때 들고 나가겠습니다. ^^

      아~ 다음에 등장할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입니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롯카쿠가 찌질하시다고 하니 생각나는 것인데, 롯카쿠 가문은 대군이 몰려들었을 당시는 본거지를 버리고 코우가 산중으로 도망쳐 게릴라 활동하는 것이 롯카쿠 가문의 방어 전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 1487년에 롯카쿠 타카요리[六角 高頼]는 아시카가 막부 9대 쇼우군 요시히사[足利 義尚]가 공격해 오자, 나중에 노부나가가 오우미에 진공했을 시 쇼우테이가 그러했듯이 코우가 산중으로 피신하여 게릴라 활동. 지친 막부군은 쇼우군이 진중에서 병으로 죽는 것도 있어 물러감으로써 싸움 종결.

      롯카쿠가 찌질했다기 보다는 노부나가가 너무 강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찌질하면서도 오래 버틴 듯한 인상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가 아닐지... 무려 아비 원수 노부나가 앞에서 공놀이를 할 정도였으니..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이마가와 우지자네로 1년짜리 대하드라마를 만들어도 꽤 이야기 성이 있을 듯... 아비 요시모토에 아비 원수 노부나가, 본거지를 공격해 온 타케다 신겐에, 도망친 처갓댁 호우죠우 우지야스와 그 우지야스가 죽자 눈치 겁나게 주는 처남 우지마사. 도움을 청한 과거 자기네 집에서 더부살이 하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쿄우토에 가서도 당시 귀중한 기록가인 야마시나 토키츠구와도 교류. 말년엔 히데요시와도 교류. 드라마 하면 등장할 인물들이 정말 풍부한 것 같습니다.

  5. 정동희 2010.01.18 13: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코쿠 천정기는 번역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일전쟁의 경과는... 참 예측하기가 어렵네요... 히데나가가 만약 총사령관급으로 왔다면
    조선측이 좀 더 힘들지 않았을까...

    롯카쿠는 본래 그런식의 게릴라전을 했군요... (이거 무슨 이가패도 아니고... 고가패인가...)

    우지자네는 찌질하긴 하지만 분명 얘기꺼리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뭐 나름
    노부토라 앞세워서 미카와 침공도 하고, 호죠에 원군청해서 신겐한테도 좀 버티고
    뭐 아주 싸움질을 안한건 아니더군요

    암튼 능력을 떠나서 운도 없었던 인물로 보입니다...(살아남는 처세술은 대단)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죽고 나서 100년 뒤,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의 학자 겸 정치가 아리이 하쿠세키[新井 白石]는 야스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役] 이후 소극적이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이에야스[家康]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막정(幕政)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였기에 그런 마사노부와 대립하면 주가(主家)인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그 마음 속을 헤아리며, 
 ‘그 당시의 무장으로서는 특별한 일이었다’
 고 야스마사라는 인물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성실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미카와[三河] 무사로, 같은 나이의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쿠가와 군단의 으뜸가는 맹장(猛將)이었다.

 야스마사는 미카와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에 16살의 나이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때 무공을 세운 덕분에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어 이에야스의 이름글자 중 ‘야스[康]’를 하사 받았다. 이후 이에야스가 출진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직속군[旗本] 선봉을 맡았으며, 1566년에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직속군 선봉부대 부대장[御旗本先手侍大将]'이 되어 토쿠가와 군단을 지휘하여 그 용장()을 전쟁터에 드러내게 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秀吉]와 싸운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 때 야스마사는 적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서 격문(檄文)을 만들어 히데요시에게 욕설을 선사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덕분에 출세한 가신[家臣] 주제에 지금은 그 주군의 아들을 상대로 활을 쏘고 있다. 이야말로 팔역의 죄[각주:2]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도(非道)한 히데요시와 같은 편에 서는 자에게는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군의 아들’이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로, 이에야스는 노부카츠를 맹주로 하여 히데요시와 싸웠던 것이다.
 야스마사의 격문을 본 히데요시는 분노하였다.
 “코헤이타[小平太]를 산 채로 잡아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은상은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
라고 사졸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히데요시의 분노도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이유 중 하나는 이에야스에 대한 야스마사의 충성스런 성격이 히데요시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1586년의 일이다. 코마키-나가쿠테가 끝난 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강화를 맺었다. 히데요시는 토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냈다. 그때 함을 가지고 온 사자로 온 것이 야스마사였다. 히데요시에게 알현하였을 때 히데요시는,
 “여어 야스마사 왔는가. 코마키 전투 때는 자네의 잘린 목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네의 충성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네”
 하고 가볍게 언급하였을 뿐이었으며, 거기에 함을 가지고 온 중요한 사자가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같은 해 11월 9일에 종오위하(従五位下) 시키부노타이후[式部大輔]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날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로 불리는 동료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도 서임되었다. 토쿠가와 가신 서임의 시초였다.

 세키가하라 결전 시에 야스마사는 히데타다[秀忠 – 후에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에 속해 있었다
 히데타다 군은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간 이에야스의 본군과 다른 길을 취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서상(西上)하였다. 야스마사 외에 혼다 마사노부,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 등이 속해있었다. 양군은 미노[美濃]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행군 도중 강적이 나타나 히데타다 군의 서상을 막았다.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부자였다.

 기략을 연발하는 사나다 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히데타다 군은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굉장히 불쾌해 했다. 히데타다가 겨우 오우미[近江] 쿠사츠[草津]에 도착했을 때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3일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히데타다는 안절부절 못했다. 히데타다 진중은 침묵이 지배하였다. 이때 결심한 야스마사가 밤에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야스마사는 우선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사죄한 뒤 이어서 소신을 당당히 말하였다.
 “주군의 분노가 만약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 맞추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라면 주군에게도 잘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자가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물리치고자 했으면 어째서 사자를 보내 빈번히 연락을 취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고 이에야스에게 따지며,
 “언젠가는 천하인(天下人)이 되실 히데타다 공이 무공 부족으로 인하여 부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무시한다면 이는 히데타다 공만의 치욕이 아니라 주군 자신에게도 그 비웃음이 쏟아질 것입니다”
 고 논리 정연히 설득하였다. 야스마사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분노를 풀고 다음 날에는 히데타다와 대면하고 격려하였다.
 히데타다의 한없이 기뻐하였다. 자신의 가문이 있는 한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야스마사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야스마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미담과 같은 이야기 외에 야스마사에게는 이에야스에 대한 반골심을 나타내는 일화도 전해진다.
 1606년 4월, 야스마사의 병이 중하여 이에야스, 히데타다의 병문안 사자로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가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다. 사자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이불 안에서,
 “저도 장(臟)이 썩어 이렇게 추해졌습니다”
 고 빈정대며 말했다. 예전 작전회의에서 혼다 마사노부가 발언하였을 때 마사노부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된장이나 소금이 늘고 주는지만 신경쓰는 장이 썩은 사람이 전투에 관해서 무엇을 안다고 말을 하는가?”
하고 매도한 적이 있었다.
 병상에서의 말은 마사노부 등을 중용하는 이에야스를 비난하는 것이고 하였으며, 평화로운 시대에 들어와 잊혀져 가는 존재인 예전 전쟁터 용사의 자조(自嘲)이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 중 한 명. 1581년 토오토우미[遠江] 타카텐진 성[高天神城]를 공격하였을 때 적의 수급 40을 취했다 한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 – 후에 칸파쿠[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군을 물리쳤다. 1590년 토쿠가와 에야스[徳川 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 10만석에 봉해졌다. 1606년 악성 종양을 앓아 5월에 죽었다. 59세.

  1. 잇코우 종[一向宗 - 정확히는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 반란. 미카와 잇코우잇키[三河一向一揆]는 세금을 내지 않던 미카와의 혼간지 계열의 절에 세금 징수하려 하다가 그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 [본문으로]
  2. '八虐'라고도 쓴다. 율령제 시대에 가장 무거운 죄. 기본 사형이며 감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텐노우[天皇]에 살해에 관한 모반(謀反), 황거나 황릉에 관한 불경인 모대역(謀大逆), 일본 국가에 관한 반란획책인 모반(謀叛), 신사에 관한 불경인 대불경(大不敬), 존속살해인 악역(悪逆), 대량 살인죄인 부도(不道), , 존속살인 이외에 존속에 관한 죄인 불효(不孝), 주군에 관한 배신인 불의(不義)...인 여덟가지 죄. 여담으로 이중 존손에 관한 악역, 부도, 불효의 경우 당시 일본에 유교논리가 없었기에 사법(死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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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1.10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쌍류의 게임에서는 언제나 클론장수(..;)의 안습함에 사실 신장의야망류에서도 전용 전법도 없고 참 어정쩡하다 싶었는데.. 에, 역시 게임은 게임이니까요. 실제론 역시 4천왕 다운 대인배스러움을...

    여담이지만 암이란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수년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아.. 역시 문제는 세키가하라였으려나(..;)

    그나저나 그저께 하마마츠도 지나갔었는데 왜 이에야스가 떠오르지 않았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천왕 중 하나가 클론이란 말입니까!!!
      ...하긴 사천왕 중 No.1격인 사카이는 나이도 나이니 만큼 별개로 치고, 톤보키리라는 전용무기를 장착한 혼다 타다카츠나, 적비대[赤備え]를 둔 나오마사와 비교하면 좀 임팩트가 딸리긴 하는 편인 듯.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니...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개연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타다 군의 실질 No.1 참모 격(경험이나 명성에 더해 동원한 군사도 히데타다 직속군 15000을 제외하곤 토쿠가와 가문에서는 최다인 3000)이었을텐데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없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존경하지만 아산 지날 때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괘의치 마시길...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0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휘관들을 많이 보유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면에서 항우나 유비, 제갈량이 결국 천하를 못 잡은 것은 그런 인재의 폭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요.

    ( 아, 물론 촉나라는 인재가 넘쳐도 국력이 부족해서 졌겠지만 )

    대망팬들에게는 야스마사보다도 고헤이타가 더 익숙하다는 점에서 대망은 획기적 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인재도 인재지만 그것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보급, 행정, 의사결정에 필요한 소통 등등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달리(그러니까 대망이 나왔던 시대) 요즘 소설류는 통칭보다는 이미나[諱]를 주로 쓰는 것 같더군요. 제가 읽은 같잖은 소설만 그렇게 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개인적으로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보다는 시바타 곤로쿠[柴田 権六]가 아직은 더 익숙하더군요. ^^...저도 대망이 첫 일본 소설이거든요.

  3. 골룸 2009.11.10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다다카츠와 더불어 전란의 시기에 용감히 싸운 무사였죠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도도다카토라 처럼 변화무쌍한 사람도 있는데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주석 단 거 다 날라가고, 나름 교정했던 것도 그대로군요... 초벌 올려서 실례했습니다....그럼에도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이에야스 탓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타다카츠나 야스마사가 전쟁터만의 인물로 인식되긴 하지만...

      후년 에스파니아의 돈 로드리고가 오오타키 성의 거대한 모습에 타다카츠의 둘째 아들 타다마사가 왕인 줄 알았다는 것이나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여러 장수들에게 수 많은 편지를 보내며 동군 측으로 끌어 들인 것을 보면 타다카츠의 정치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야스마사도 또한 이에야스가 행한 칸토우 다이묘우 배치의 틀을 제시한 인물인 것을 보면 그 역시도 야전공성만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정치력과 실적있는 인물들에게 아무런 상이나 영지 가증도 없이, 거기에 정치 중추에서 쫓아낸 이에야스를 아무리 주군이라곤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유교의 '충'이란 논리가 도입 이전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 있었을 것 같구요.

    • 골룸 2009.11.12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찌 보면 매정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2대째로 넘어가는데 좀 부담이 될만한 인물들을 사전에 정리 한 것도 같고
      아무튼 그런 와중에도 도쿠가와 가문내에 큰 문제 없이
      혼다나 사카키바라 가문이 계속 됐던 걸 보면
      가문내의 결집이나 충성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뭐 이에야쓰 입장에서야 쓸만큼 다 쓰고 어느 정도 포상도 한거니까요
      계속해서 느끼는거지만 이에야쓰는 참 짠 사람인거 같아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 사극 용의 눈물....인가에서 태종 이방원이 공신들을 내치면서 하는 말이....
      "저들이 기세등등하여 세자를 업신여길 것이 두렵소이다"....비슷하진 않지만 저런 뉘앙스였을 것입니다.

      공신들을 토사구팽하는 제왕들의 맘은 저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련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이에야스는 천하인의 그릇이 아니라며...
      "그는 가신들에게 영지를 아낌없이 나눠줄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를 잡진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짠 사람이긴 했나 봅니다.(...무엇보다 우지사토가 실제로 저런 말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4. 나라 2009.11.11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의 최대의 잘못은 히데타다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야스의 중뿔난 마음도 이해할만 합니다. 결과적으론 세키가하라 결전에 승리했지만, 히데타다군이 제대로 오지 못한 것은 확실히 불안 요인이었으니까요. 히데타다군이 제 시간이 왔으면 완승을 쉽게 보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2 0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다만 잘 나가는 부잣집 도련님, 말 좀 듣게 하기는 엄청 힘들 듯 싶습니다.

      사족으로....세키가하라 때 토쿠가와 가문의 실질적 전투집단은 이에야스 휘하에 있던 토우산도우[東山道] 방면군이 아니라, 히데타다가 이끌던 나카센도우[中仙道] 방면군이라 하더군요. 전투에 적합한 토쿠가와 가문 내의 만석 이상을 가진 무장들은 타다카츠와 나오마사를 제외하곤 히데타다 휘하에 속했다고 합니다.

      만약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히데타다 군이 있던 전쟁터에 있던 상태였다면 후쿠시마 마사노리, 쿠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토쿠가와 군만으로 승부를 결정지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또한 나중에 후쿠시마, 쿠로다 등에게 전공에 따른 막대한 영지를 줄 필요도 없었을 테고요.

  5. 나라 2009.11.12 1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나중에 후쿠시마에겐 제대로 엿을 먹이지 않습니까;;;
    히데타다가 제 시간에 오고 서군이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항상 그게 궁금하더군요. 만약 미츠나리가 이겼으면 가마쿠라 시대의 싯켄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이에키[改易]라는 손이 한번 더 가면 그 만큼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에도가 아닌 자기 영지에 있을 때 카이에키 영이 떨어졌다면 과연 역사처럼 순순히 응했을지는 궁금합니다만...

      뭐 그래서 참근교대라던가 일국일성령이라는 보험이 있었긴 합니다만, 이외로 히데요시 은고 다이묘우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면 서국에 몰려 있었던 만큼 다시 전화의 시대로 돌아갈 확률이 0%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불씨를 세키가하라에서 히데타다가 늦음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이라...개인적으로는 서군이 승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미 서군은 높은 곳을 전부 제압하여 동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포위하고 있었고, 동군은 전부 그 아래 혹은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던 입장인지라...
      (포진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ja/0/05/Sekigahara.png )

      장기전으로 가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군사들이 동군 후방 보급을 끊을 수 있는 반면 서군은 바로 뒤편이 이시다 미츠나라의 영지인지라 보급면에서는 서군이 비교적 자유롭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는 어땠을까요...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나중에 정쟁에 패하여 한때의 인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6. dsfsd 2012.03.23 04: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 - 서군 - 시마즈 모리 - 임진왜란의 주역들일 뿐 아니라 나중에 도쿠가와 막부 전복하고 메이지유신으로 조선을 다시 쳤던 그 뿌리 아닙니까 과거의 일이지만 고소하다는 얘기밖에 안나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

      ...근데 본문글과 리플은 좀 매치가 안 되는군요. 단지 이름이 거론되어서인가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알기 힘들군요. 인과응보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인가요?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는 가문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섬겨온 무공파(武功派)에 사천왕(四天王)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전형적인 센고쿠[戦国] 무장이다. 사서(史書)가 전하는 타다카츠는, ‘어려서부터 전쟁터에 향하길 50여 번에 이르렀으며, 뛰어난 무공에 공적이 많았음에도 한번도 상처를 입은 적이 없었다’는 용장이다.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으니 중국산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각주:1]
 이도 타다카츠의 무공을 전하는 말로써 유명하다.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合戦] 후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군이 타다카츠의 활약을 보고 절찬한 문구이다.

 타다카츠는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전을 치렀고[각주:2], 15살 때 미카와[三河] 나가사와 전투[長沢合戦][각주:3]에서는 적의 수급을 거두었다.[각주:4] 이때 숙부인 타다자네[忠真]는 타다카츠의 그릇이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며, 이에야스[家康]도 이에 동감하였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타다카츠가 씩씩한 면목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1561년, 타다카츠 14살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동맹을 맺기 위해 백여 명의 가신들을 이끌고 키요스[清洲]로 향했다.
 키요스 성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한때 오와리에 인질로 와 있던 미카와의 이에야스 행렬을 구경거리 삼아 몰려들어 시끌벅적거리며 떠들어댔다. 이에야스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동행했던 타다카츠는 그런 구경꾼들을 닥치고 못 본체 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가 탄 말 앞에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장도(長刀)를 양 손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 계시는 분은 미카와의 이에야스 공이시다. 노부나가 공과 친선을 맺기 위해 먼 길을 오신 분에게 이 무슨 무례란 말인가!?”
 어린 소년의 이 위풍(威風) 앞에 수 많은 구경꾼들도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때, 타다카츠는 25살이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대군에 맞서 토쿠가와 군은 대패를 당하고 거성(居城)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하게 되는데[각주:5], 이럴 때는 적의 추격을 막는 후군[殿]의 역할이 중요하며 또한 어려웠다. 타다카츠가 이 어려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타다카츠는 적과 아군 사이의 한가운데에 말을 타고 가 적진을 노려보며 아군의 퇴각을 성공시켰다. 후에 타케다 측의 하지카노 덴에몬[初鹿野 伝右衛門][각주:6]이 회고하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때 후군의 타다카츠를 추격하고자 했지만 타다카츠의 공포스러운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톤보키리[蜻蛉切り]라는 창을 한 손으로 휘두르며 저승사자와 같은 형상으로 노려보았기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도,
“오늘 헤이하치로우는 평소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는 필시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각주:7]이 우리 편을 들어서일 것이다”
 고 하며 그 분전을 칭송했다고 한다.

 참고로 타다카츠의 창은 창신이 길어 2장(약 6m)정도 되었고, 잠자리[각주:8]가 창 날에 부딪혀 두 동강이가 난 다음부터 ‘톤보키리’[각주:9]라는 이명을 얻게 된 명창이었다. 타다카츠는 그런 창을 가볍게 휘두를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한다.
 나중에 늙어서의 일이다. 거성(居城)이 있는 이세[伊勢] 쿠와나[桑名]에서 아들인 타다토모[忠朝]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 타다토모에게 배의 노로 물가에 있는 갈대를 베어 보라고 하였다. 타다토모가 한 손으로 노를 들고 휘둘렀다. 갈대는 약 5.4미터정도 쓰러졌다. 하지만 타다카츠는, “정말 힘이 약하구나”라고 웃으며 말한 뒤 이번엔 자신도 한 손으로 노를 들고 휘둘렀다. 그러자 갈대는 마치 낫으로 벤 듯이 깨끗이 절단되었다고 한다. 그 노는 보통 사람 둘이서도 쉽게 들어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은 미카타가하라의 패전에 버금가는 이에야스 생애에서 잊지 못할 큰 위기였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한 이 6월 2일, 이에야스는 사카이[堺]에 있었다. 전날 아즈치[安土]의 노부나가를 방문한 뒤 노부나가의 주선으로 쿄우토[京都] 근방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쿄우토는 이미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아케치의 제압 하에 있었다. 흉보는 토쿠가와 가문의 어용상인 챠야 시로우지로우[茶屋 四郎次郎][각주:10]를 통해 사카이에 있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이때는,
 “이리 된 이상 배를 갈라 오다 님의 뒤를 따르겠다”
 라면서 까지 각오를 정했지만, 타다카츠가 이를 말렸다고 한다.
 “오다 님의 후은에 응하려 하신다면 오히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본국 미카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뒤 군세를 이끌고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치는 것이 돌아가신 오다 님을 위한 공양이 될 것입니다”
 라는 타다카츠의 진언에 오카자키[岡崎] 귀성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일행은 이가[伊賀]의 산길을 통해 지역민들의 회유하면서 귀국에 성공한 것이다.

 1584년 3월,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와 손 잡고 히데요시[秀吉]와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타다카츠는 코마키야마[小牧山] 산을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강의 북편을 건너는 것을 보고 불과 800[각주:11]의 병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후방의 이에야스가 부대를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과감히 히데요시 군에 철포를 쏘아대며 공격하였다. 그 호담함에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감탄했다고 한다.[각주:12]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이후, 토쿠가와 가문이 패권을 확립하는데 활약한 무공파의 면면들은 차츰 활약할 장소를 잃어갔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를 대표로 하는 행정사무의 관료파(官僚派)가 대두한 것이다. 그런 풍조를 타다카츠는 참을 수 없었다. 세키가하라 후 이세 쿠와나에 봉해진 타다카츠는 에도[江戸]에서 사자(使者)를 맞이하였을 때,
 “답례로 에도에 오르고 싶으나 요즘 허리가 빠져서 갈 수가 없사옵니다[각주:13]"
 라고 답했다고 한다. 평소 ‘사도의 겁쟁이[佐渡の腰抜け]’라고 경멸하던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를 빈정대며 한 말이었다.

 또한 타다카츠는 늙어서,
 “문치파의 행정관[代官]은 연극에서 다이묘우[大名狂言] 역을 하는 배우들 같은 자들이다[각주:14]
 고 비판하며 막부의 중추 각료들을 계속 비판하였다.

 예전 전쟁터에서의 영광이 아무리 시간이 흘른 뒤라도 타다카츠의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을 것이다.

[혼다 다다카쓰(本多 忠勝)]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헤이하치로우 타다타카[平八郎 忠高]의 아들. 이에야스[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영지를 옮겼을 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10만석에 봉해진다. 1598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었을 때 유품으로 칼을 한 자루 받았다. 1601년 이세[伊勢] 쿠와나[桑名] 15만석[각주:15]에 봉해졌지만 1610년 죽었다. 63세. 여담으로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와는 같은 일족이지만 계통이 다르다[각주:16].

  1. 家康に過ぎたるものが二つあり、唐の頭に本多平八. 중국산 투구[唐の頭]는 티벳 근처에서 서식하는 소과의 야크(Yak)라는 축생의 꼬리털로 장식한 투구로, 당시 이에야스뿐만 아니라 미카와 무사들도 수집하고 있었다고 한다. 타케다 측 군기물인 갑양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미카와 무사 10명 중 7,8은 이 당나라 투구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1560년 오오타카 성[大高城] 군량 반입 때. [본문으로]
  3.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부하로 미카와 요시다 성[吉田城]의 성주 오하라 시게자네[小原 鎮実]와의 전투. 요시모토가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미카와의 호족들이 이마가와 씨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하자 우지자네는 시게자네에게 그런 호족들의 정벌을 명해 벌어진 전투. 단 이에야스 측과 이때 싸웠는지는 미묘. [본문으로]
  4. 처음엔 숙부 타다자네가 조카인 타다카츠에게 공적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자신이 쓰러뜨린 적을 타다카츠에게 목만 베라고 하였다. 타다카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적진에 돌진하여 직접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확히는 이에야스가 똥을 지렸다는 미카다카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가 아닌, 그 전에 일어난 후타마타 성[二俣城]의 전초전 히토코토자카 언덕 전투[一言坂の戦い] 때의 일. 이에야스는 타다카츠 등 3000을 이끌고 정찰 나갔다 타케다 군과 조우. 이 책의 저자는 미카타가하라 전투라 여기고 대패라고 하였으나, 이 히토코토자카 언덕 전투에서는 포위 당할 낌세를 보자 냅다 퇴각. 즉 대패는 아님. [본문으로]
  6. 이름은 마사츠구[昌次] [본문으로]
  7.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8. 일본말로 잠자리를 톤보[蜻蛉]라고 한다. [본문으로]
  9. 창 날 끝에 앉았는데 그 날카로움에 미끌어져 반토막이 났다고도 한다...오히려 이쪽이 더 유명한 듯. [본문으로]
  10. ...여담으로 이때 이에야스의 목숨을 구한 초대 챠야 시로우지로우의 둘째 아들 3대째 챠야 시로우지로우(2대는 장남이나 요절)는 이에야스에게도미 튀김을 강추하여 죽게 만든다. [본문으로]
  11. 300이라고도 500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또 다른 이야기로는 사이에 흐르는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는 등 대담한 행동을 하였기에, 죽여 버리자는 히데요시 측 무장들의 말을 물리치며 히데요시는 "저런 용사는 나중에 내 편이 될 수 있으니 살려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13. 일본말로 겁쟁이를 코시누케[腰抜け]라고 하는데 이는 허리[腰]가 빠진다[抜け]는 말을 합친 것이다. 앞에 적을 앞에 두고 쫄았을 때 허리가 뒤로 빠지는 모습에서 따온 말. [본문으로]
  14. 아마.. 겉만 그럴 싸 하고 실제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을 비유한 것 같음...大名狂言은 멍청한 다이묘우가 바보짓 하는 것을 비웃는 내용의 연극 종류를 말한다고 함. [본문으로]
  15. 10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6. 마사노부의 7대조, 타다카츠의 8대조는 혼다 스케마사[本多 助政]로 같다. 여담으로 타다카츠는 마사노부를 혐오하여 같은 혼다긴 하여도 같은 핏줄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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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08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천포로 빠지는 얘기지만 천도에서의 다다카쓰의 신창은 거의 사기더군요 ( ..)

    사타케 요시시게의 귀창으로 대응을 해봤지만 사정없이 녹아내리는 우리의 병력 ㅜ.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9 1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창과 귀창의 대결이라... 무협지의 한 장면 같군요. ^^

      역시 그런 놈과 맞붙을 때는 갑옷 업그레이드(胴丸??) 한 다음이나 맞붙어야 할 듯.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1.09 2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슴뿔투구 라는 챠밍 포인트(?) 때문인지 인상이 강한데 저는 어째 맨먼저 생각는건 꽃사슴이..(....)

    무쌍에선 전용 bgm이 들리면 괜히 움찔해서 주위를 살펴봅니다;;;
    (그렇긴해도 bgm은 참 좋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0 04: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저 사슴뿔 투구[鹿角の冑]는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맘에 드는 그림이 나올 때 까지 9번을 그리게 해서 나온 것이 저 그림일고 합니다(그 전 8폭의 그림은 전부 쓰레기 통).

      타다카츠가 쿠와나 성에 있을 시에 토사파[土佐派]의 화가에게 그리게 한 그림으로, 주제는 '세키가하라에 출전한 타다카츠'라 합니다. 즉 세키가하라 때 타다카츠는 저런 갑주와 투구를 썼었다는 말입죠.

      무쌍 시리즈는 초대 삼국무쌍 때 달려드는 여포에게 공포를 느낀 나머지 그 다음부터는 안 하고 있습니다.
      여포가 너무 강한 나머지 구석에서 숨어서 활만 쏘고 있었는데 몇 번 맞던 여포가 이쪽을 쳐다보고는 달려와서 '조운'이었던 절 죽이더군요. 화살 쏘는 시점에서 달려오는 여포는 공포 그 자체였습죠.....는 경험담이긴 하지만 그 이후 그런 류의 게임은 잘 안 해서...(늙어서 손이 느려진 이유도 없지않아 있긴 한 것 같기도 합니다)

  3. ckyup 2009.11.11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비에겐 자룡, 이에야스는 헤이하치로, 그 유명한 혼다얘기군요. 잘 읽었습니다. 근데 센코쿠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며 항상 궁금했는데요 - 장수끼리 소위 '맞짱'은 없었나요. 삼국지에서 관운장이 안량과 문추를 베었듯이, 뭐 예를들어 '백전의 노장 혼다헤이하치와 칠본창의 거두 기요마사와의 한판' 이딴거 말이죠. 생각만 해도 재밌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5 16: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다카츠는 보통 장비와 비교되더군요.

      장수끼리의 맞짱은 없었습니다. 이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가 활약하던 12세기때도 예전엔 그런 일기토[一騎打ち]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거 없다...고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 重忠 - 당시엔 엄청난 武의 소유자로 유명]에게 말해 준 노병사가 있을 정도로 과거의 유물이었습죠.

      ==================================================
      11월15일 추가:조금 추가합니다.

      삼국지연의와 같은 장수끼리의 맞짱은 없었습니다만 특이한 예로 전투 중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상대편 지휘관 중 하나를 직접 죽인 적은 있습니다.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 - 보통 '노부유키'로 유명]가 하야시[林] 형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이노우 전투[稲生の戦い]에서, 노부나가는 반란군 지휘관 중 한명이며 하야시 형제 중 동생인 하야시 미마사카노카미[林 美作守]를 직접 쓰러뜨리긴 하였습니다만 이도 난전 중 일어난 일이며 또한 스기와카[杉若]라는 부하의 종이 가세해 주었죠(즉 2:1로)

      ===================================================
      타다카츠도 젊었을 때는 물론 직접 창들고 싸우긴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죠. 아들이 창술 연습하는 거 보고 화를 내며,
      "전투에서 창을 드는 것은 무명소졸이나 할 일이고, 너희들 쯤 되는 신분이라면 사람들을 부리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나도 무명소졸이었을 때는 직접 창을 쥐었지만 지금과 같은 신분이 된 지금은 창을 쥘 일도 없으며 지휘채를 휘두를 뿐이다. 너희들도 헤이하치의 뒤를 이을 생각이 있다면 지휘채를 휘두르는 법, 사람을 부리는 법을 훈련하는 편이 좋다. 무명소졸이나 하는 연습은 할 필요가 없다"

  4. 써니데이 2009.11.15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인 토시이에와 같은 일본 사극보면서 항상 느끼던거군요 ..
    창의 명수로 알려진 토시이에가 저 나이에 지휘는 안하고
    창 들고 병사들 찔러죽이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모습만 나오니..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5 18: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비주얼 적으로 그게 좀 멋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나저나... 토시이에로 나온 카라사와 토시아키, 마츠로 나온 마츠시마 나나코 둘 다 좋아하는 배우에, 관심있는 시대이지만 아직까지 전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네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가장 비밀스런 모의를 할 때 상담을 나누던 모신(謀臣)이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아예 친구와 같이 대했다 한다.

 “백성의 재산을 남지도 않게 부족하지도 않게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로 유명한 [본좌록[本佐[각주:1]]은 마사노부가 썼다고 한다.[각주:2]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각주:3]]가 부친 요시히로[義弘]에게 보낸 편지에,
“이에야스 님은 정치에 관해 사슈우[佐州=마사노부]하고만 상담을 나누는 것 같이 보입니다”
라고 쓴 것을 보아도 마사노부가 이에야스 정권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이에야스가 살아있을 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한다.
 “카리 님, 사도 님, 오로쿠 님[雁殿、佐渡殿、お六殿]”라는 말로, 카리 님은 매사냥을 말하며[각주:4], 오로쿠 님은 측실 중 한 명[각주:5] 그리고 사도 님은 마사노부를 이른다.
 이렇게 이에야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노부는 불과 2만2천석의 영지를 받는 것에 만족하였다. 미움 받기 쉬운 자신의 존재를 잘 이해하고 있어 많은 영지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사서에 따르면 마사노부의 용모는 매독으로 인하여 피부가 떨어져 나가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심했다 한다.

 마사노부는 하급무사로 매조련사[ 출신이라고 한다. 1563년 미카와[三河]에서 봉기한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6]는 이에야스에게 처음으로 찾아 온 시련이었는데, 마사노부는 이 잇코우잇키 군의 참모가 되어 이에야스에게 반항하였다.
 반란군 측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의 사이에 화의가 맺어지자 마사노부는 쿄우토[京都]로 탈출, 일시적으로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弾正 久秀] 밑에서 지냈다.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살해한 이 효웅도 마사노부를 보고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며 기량을 인정했다 한다. 그 후 마사노부는 카가[加賀], 에치고[越後]를 유랑한 후 유명한 오오쿠보 히코자에몬[大久保 彦左衛門[각주:7]]의 형이며,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의 추천으로 다시 토쿠가와 가문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각주:8]

 전쟁터에서의 활약 같은 것은 마사노부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사노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다 가문[武田家]이 멸망하면서 부터로, 당시는 외교관적인 자리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기 전날 밤부터 오오사카 농성전[大坂の陣]에 걸쳐 마사노부의 모략적인 재능은 풀가동하게 된다.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시기였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자, 그때까지 히데요시의 측근 행정관으로서 권세를 떨쳐왔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미워하고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등 무공파의 면면들이 결국 미츠나리를 없애기 위하여 움직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미츠나리를 구했다. 이것도 마사노부의 헌책이었다.
 “미츠나리를 살려두면 타이코우[太閤[각주:9]]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는 다이묘우[大名]도 미츠나리를 너무 원망하는 나머지 언젠가 토쿠가와 편을 들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하였다.

 오오사카 농성전에서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으로 이끄는 스토리는 거의 마사노부 혼자서 쓴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에 일어난 농성전[大坂冬の陣] 강화 조건으로써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외측 해자를 메우게 되었는데, 토쿠가와 측은 세 번째 성곽[三の丸]뿐만 아니라 내측인 두 번째 성곽[二の丸]까지 마구 메워버린 것이다. 토요토미 측이 몇 번이나 항의하였지만 공사 책임자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마사노부의 아들]의 답변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회피하여 전혀 진전이 없었다. 참다 못한 요도도노[淀殿]가 쿄우토의 마사노부에게 사자를 파견하자, 마사노부는 오오고쇼[大御所[각주:10]]가 감기에 걸려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답변을 회피하였다. 더구나 그 후에는 자신이 감기 걸렸다며 역시 답변을 회피하였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오사카 성의 내측 해자도 전부 메워 버렸다. 마사노부는 적당한 때를 살펴 오오사카 성으로 향했다.
 이때 마사노부의 말이 기발했다. 메워진 내측 해자를 보고,
 “이런 기괴한 일이 다 있나”
 고 말하며 공사 책임자인 자기 아들 마사즈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화를 낸 것이다. 철저한 오리발 작전으로 오오사카 측을 가지고 논 것이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1538년생. 1590년 사가미[相模] 타마나와[玉縄] 2만2천석.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노중(老中)이 된다.[각주:11] 1616년 6월 죽다. 59세.

  1. 마사노부의 성 혼다[本多]의 앞 글자 本과 관도명 사도노카미[佐渡守]의 佐를 따서 만든 것으로, 이렇게 앞 글자씩을 따와 두글자로 상대를 부르는 것을 카타묘우지[片名字 혹은 片苗字]라 부르며 상대에게 경의를 표할 때 쓴다고 한다. [본문으로]
  2.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물음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정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관해 7개조로 쓴 책이라 한다. 혼다 마사노부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 유명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가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가명성리(仮名性理)라는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 손을 댄 후 마사노부의 이름을 사칭해서 나온 책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사츠마 번[薩摩藩] 초대 번주이자 요시히로[義弘]의 아들인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를 말한다. 처음엔 타다츠네 였으나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 받아 이에히사[家久]로 개명. [본문으로]
  4. 사냥을 뜻 하는 狩り와 기러기를 의미하는 雁는 둘 다 발음이 '카리'이다. 이에야스는 매사냥의 장점으로 하루 종일 사냥하느라 뛰어다니면 배가 고파져 식사도 더 맛있어 지고 밤에는 피곤하기에 일찍 잘 수 있어 자연스레 빠구리도 안 할 수 있기에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5. 이에야스 측실 중 가장 똑똑했다는 에이쇼우인[英勝院 - 여담으로 만화 '영무자 이에야스'의 여주인공 같은 역으로 나왔다]의 하녀 같은 존재였으나, 이에야스의 눈에 들어 그의 측실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에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한 갈래인 오유미 쿠보우[小弓 公方]의 피를 잇는 아시카가 요시치카[足利 義親]에게 시집간다. 29살에 닛코우에 있는 이에야스의 묘소[日光東照宮]에 참배하여 분향하였을 때 향로가 터져 파편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에도 쇼우군 가문의 여성들을 다룬 '막부조윤전[幕府祚胤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당시로서는 당연시 되던 남편 죽은 뒤 머리 밀고 비구니가 되는 일 없이 미모를 너무 뽐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쓰여 있다. [본문으로]
  6.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종교 반란. [본문으로]
  7. 오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 忠教]. 토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손에 넣는데 큰 공적을 세운 무공파들보다 신참이며 주판알 잘 굴리는 문치파들을 중용하는 체제를 비판하며 토쿠가와 가문이 걸어온 길과 자기 오오쿠보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설파한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를 써서, 당시 문치파에 밀려 불만 많던 무공파 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 [본문으로]
  8. 관정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따르면 7년 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 따르면 19년 뒤에 토쿠가와 가문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타이코우란 칸파쿠[関白]자리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 사람에 대한 경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10. 에도 시대에는 살아서 쇼우군[将軍] 자리에서 은퇴한 전 쇼우군을 지칭. 즉 여기서는 이에야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11. 아들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이에야스의 곁에 있었기에 이에야스의 의향을 히데타다에게 전하는(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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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10.29 1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오 저 이에야스 바둑친구가 원래 이에야스에 반기를 들었던 자라니... 역사란 참 재밌네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같은 침대를 썼다거나 연예 편지를 보낸 것 같지는 않지만 굉장히 친했던 것 같습니다.

      오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 長安]에서 보듯이 이에야스도 쓸 모가 있다고 생각하면 마구 이용하지만 쓸 모가 없다고 판단되면(여기서는 나가야스의 죽음) 씨를 말리는 것을 보면 마사노부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우정이라고도 생각합니다.

  2. 나라 2009.10.29 1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언제나 포스팅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0.29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람도 쿠로다 칸베에처럼 매독의 희생자(-_-..)였군요, 어금니가 보인다니 이거 뭐 할로윈 특집도 아니고(...;) (오늘 영어 수업에 할로윈 동영상을 보여주는데 딱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측이 됩니다 ㅎ;)

    여담이지만 카리라기에 문득 사냥狩り를 생각했는데 그 한자가 아니었군요. 그러고보니 결과적으론 뜻이 비슷한 센스..

    아.. 영무자 이에야스에서의 그 처자..는 아니고 그 처자의 여종이라지만; 아무튼 죽은 이에야스 폴터 가이스트 따위에 맞아 죽다니..(;;) 아쉬운 일이에요. 아니, 미인 박명이기에 어쩌면 더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결국 그것도 복이려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 전 칸베에 매독설을 부정합죠 ^^

      저 어금니 보인다는 것은 그의 정적 중 하나가 일기인지 뭔지에 마사노부가 그 꼴이 되었다고 낄낄대며 쓴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어디서 읽었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참고로 주석에도 썼던 막부조윤전이란 책에는 급사(頓死)라고만 나옵죠[日光御宮に参詣、神前に於て頓死す]. 일본 웹에서 파편에 죽었다고 해서 썼는데, 지금 보니 확인되지 않은 것을 쓴 쓸데없는 사족인 것 같군요...(개인적으로는 믿을 만한 사이트이긴 합니다만)

  4. ckyup 2009.10.30 0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하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마사노부는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을때쯤 서서히 드러나다가, 세키카하라 전후로는 거의 견줄만한 상대가 없을정도의 너구리 그림자가 되더군요.... 그러고보면 이에야스는 역시 현명한 정치를 펼친것 같습니다 - 혼란시에는 무관을 중용하고, 그 이후에는 문치중심으로 나가는..... 어쩌면 박대통령이 그점에서 인간경영에 실패한것 같군요 - 혁명과 정권안정때에 중용하던 군출신들을 끝까지 측근에 두었다가, 그 측근들이 술과 여자 바치는 아첨배로 점점바뀌며 저희들끼리 힘과 신임의 암투를 벌이는 가운데 암살당하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란의 시대때는 무공파를, 패권이 확립된 뒤로는 문치파를...한 고조 유방이나, 왕자의 난을 제패한 태종 이방원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 사후 무공파와 문치파의 싸움이 일어난 것(세키가하라 전쟁)도 그로 인해서 입죠. 히데요시가 더 살아 강력한 중앙집권(즉 문치파 득세)이 실현되었다면 세키가하라는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생각합니다.

      전혀 딴소리가 되겠지만 그만큼 외로웠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하가 그렇게 해 쳐먹는 것을 알면서도 왠간해선 곁에 두어야 할 정도로 대화상대가 필요하지 않았을지...권력자의 자리는 외롭다고들 하니까요.(참고로 외로워도 좋으니 전 그 자리를 꼭 맛보고 싶군요.)

  5. Favicon of http://strasbourg.egloos.com/ BlogIcon Orca 2009.10.30 0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사노부가 죽은 뒤, 마사즈미 대에서도 계속 쇼군 가의 측군으로 활약해, 나중에는 시모츠케 우츠노미야 15만석에 이르지만, 결국 히데타다 시대 때 한방에 몰락. 그냥, 나중에 그걸 알게 되니까 씁쓸하더라구요.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사노부는 죽으면서 마사즈미에게,
      "많이 바라지 마라, 3만석까지는 좋다. 그 이상은 바라지 마라"
      고 했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한방에 훅~ 갈 정도로 정적이 많은 것도 원인인 듯 싶습니다. 같은 편이 많았음 그렇게까지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역시 빽과 끈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6. 골룸 2009.11.05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한 사람의 성격과 기질이 태어나면서 완전히 정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타고난 기질이 중요하겠지만 살면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것도 달라지는 것 같네요
    잇꼬잇끼와 패배, 유랑, 복귀... 뭐 이런 걸 거치면서 혼다 마사노부라는 인간이 만들어 진 것 같습니다
    이거 절대 딴지는 아닌데 위에 마사노부 1583년생은 아닌거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5 17: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살아온 환경이나 경험에 따라 사람의 인성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예. 1538년을 오기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얼릉 고치겠습니다. ^^ 제가 워낙 오타가 많으니 보이시면 꼭 알려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립니다.

  7. seeker 2017.10.05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잘봤는데요. 혼다 마사노부는 59세가 아닌 79세 죽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정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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