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을 방문하는 그림.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 때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에 대한 평판은 굉장히 나빴다. ‘우인(愚人)’[각주:1], ‘영승(佞僧)’[각주:2], ‘요승(妖僧)’[각주:3] 등 최저의 표현으로 기록되어 비난 받았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때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서군의 총수로 내세워 쓰라린 패전의 맛보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120만석이었던 영지를 단번에 37만석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가 퍼뜨린 악담인 듯 하다.

 우선 그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안코쿠지 에케이라고 하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횡사(橫死)와 히데요시[秀吉]의 천하제패를 예언한 통찰력이나 안목으로 유명하다.
 1573년. 당시 모우리[毛利]의 외교승이었던 에케이는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처우를 놓고 오다[織田]-모우리[毛利] 의 사이에 긴장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경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절충을 거듭하고 있었다.
예언은 이 교섭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 오카야마[岡山]에서 모우리 가문의 중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에케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부나가가 3~5년은 버틸 것입니다. 내년 즈음에는 공가(公家)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각주:4] 그러나 그 뒤 높은 곳에서 벌렁 자빠져 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각주:5]는 만만치 않게 뛰어난 사람입니다.
 에케이의 이 예언은 10년 뒤 현실이 되었다.[각주:6] 

 에케이의 출신성분에 대해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하지만, 아키[安芸] 카나야마 성[銀山城]의 성주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重][각주:7]  핏줄이라 전해지며[각주:8] 아키[安芸]의 안코쿠 사[安国寺][각주:9] [각주:10]에 들어가 중이 되었으며,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각주:11] 이러는 사이 에케이의 스승인 에신[恵心]이 당시 외교승(外交僧)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과도 친했기에, 에케이도 모우리 가문의 외교승이 되었다.

 앞의 예언에서 10년. 에케이는 급격히 바빠졌다.[각주:12] 1582년 5월,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군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포위하여, 당장이라도 오다-모우리 간에 대결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정세가 된 것이다. 이때 에케이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대리하여 히데요시와 강화교섭에 나섰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강화의 조건[각주:13]으로 냈다.[각주:14] 에케이는 독단으로 이것을 받아들여 시미즈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배를 가르게 만들었다.[각주:15] 

 얼마 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대승을 거둔 히데요시는, 강화 때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모우리 가문의 영지 할양을 다시 꺼냈다. 그거도 만약 불복한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에케이는 다시 히데요시와 절충을 거듭했지만, 히데요시의 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우리의 중신들 눈에는 에케이가 하는 일들이 모두 히데요시의 뜻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보여, 나중에는 에케이를 “대갈이만 큰 땡중놈”이라고 욕하는 자까지 생겼다.
 이에 대해 에케이는 “지금은 사람의 외모나 모습으로 떠들 때가 아닙니다. 서로가 진심을 나눌 때입니다. 부디 저의 진심을 믿어주길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은 모우리의 가문을 지키기 위함이며, 이것에 반대함은 천하의 정세에 어둡기 때문이다 – 라는 편지도 보냈다.[각주:16] 

 어쨌든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에케이도 이렇게 오랫동안 히데요시와 절충을 하는 동안 히데요시의 신뢰를 받아 승려인 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17]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항에서 언급했듯이,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모우리 가문은 에케이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각주:18]의 대립[각주:19] [각주:20]으로 인하여 결국 아무 것도 못한 채 패배한 것이었다.[각주:21]

 에케이는 일단 전장에서 벗어났지만 쿄우토[京都]에서 잡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와 함께 참수되었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
아키[安芸] 안코쿠 사[安国寺]의 주지가 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사승(使僧)으로 활약, 후에 히데요시[秀吉]에게 이요[伊予] 와케 군[和気郡] 2만3천석을 하사 받았고 몇 년 뒤 6만석이 된다. 참수되었을 때는 63~4세라 한다.

  1. 오오타 규우이치[太田 牛一]의 케이쵸우기[慶長記], [본문으로]
  2. 아첨하고 얍삽한 중이란 뜻으로, 이와쿠니 킷카와 가문[岩国吉川家]의 가로(家老)인 카가와 마사노리[香川 正矩]가 저술한 인토쿠기[陰徳記]에 나오는 표현. 이 책은 주군인 킷카와 씨를 정당성을 주기 위해 각색한 티가 많이 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1663년 아사노 히로시마 번[浅野広島藩]의 번 의사[藩医]인 쿠로카와 도우유우[黒川道祐]가 만든 지역 역사지인 게이비국군지[芸備国郡志] [본문으로]
  4. 실제로 노부나가는 다음 해인 1574년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가 되었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통칭 [본문으로]
  6. 저자는 이 예언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떠올린 듯 한데, 이는 결과론으로, 아마도 에케이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의미보다, 이 1573년 당시 노부나가의 권력기반이 강고하지 않다보니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노부시게는 다른 이름으로 ‘토모 노부시게[伴 信重]’라 하며, 아키 타케다[安芸武田家]의 당주인 카나야마 성주인 타케다 노부자네[武田 信実]의 사촌뻘이다. 사촌뻘이라 한 이유는, 노부자네가 와카사 타케다[若狭武田家]에서 아키 타케다 가문에 양자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케이[恵瓊]가 아키 타케다 가문의 핏줄인 점은 맞는 듯 하다. 에케이의 증조할아버지인 타케다 모토시게[武田元繁]는 아키 타케다 가문의 당주였으며, 모토시게의 아들이자 에케이의 할아버지인 ‘토모 시게키요[伴繁清]’ 부터 토모 씨[伴氏]를 칭했다. [본문으로]
  8.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 ‘후도우인 유래기[不動院由来記]’에 따름. [본문으로]
  9. 안코쿠 사[安国寺]는 14세기 초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전란으로 죽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의 각 쿠니[国]에 세운 임제종(臨濟宗) 계열의 절이다. [본문으로]
  10. 아키[安芸]에 있는 안코쿠 사[安国寺]는 아키의 슈고[守護]였던 아키 타케다 가문[安芸武田家]의 위패를 보관하는 보제사(菩提寺)였기에, 아키 타케다의 피가 흐르는 에케이도 이런 연으로 이 절에 들어간 듯 하다. 여담으로 이 절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후에 아키 지역에 들어 온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서군의 수괴가 주지였던 이 절을 임제종에서 진언종(真言宗)으로 바꾸고 절이름도 ‘후도우 원[不動院]’으로 바꾼다. 위의 주석에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준다는 기록이 ‘후도우 원 유래기[不動院由来記]’인 이유를 아실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11. 1569년. 쿄우토 오산[京都五山] 중 4위이며 임제종 총 본산인 토우후쿠 사[東福寺]의 도서관장인 장주(藏主) 겸임. [본문으로]
  12. 뭐 사실 이 이전에도 모우리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大友家], 우키타 가문[宇喜多家] 등과의 대결에서 외교절충이나 후방지원 등에 활약했다. 갑자기 바뻐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13.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쳐했던 모우리가 히데요시에게 화평을 청했고 이에 히데요시가 제시한 것이 ①모우리의 영지 중 5개 쿠니[国] 할양 ②인질제출 ③앞으로 개기지 않겠다는 기청문(起請文) 제출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4. 그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일어나,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처벌하기 위해 상경하고자 하여 일시정전을 바라며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 어차피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낙성과 마찬가지였던 타카마츠 성의 성주 무네하루가 성의 병사들 목숨을 구하는 대신 할복하여 죽었다. [본문으로]
  15. …는 모우리 가문[毛利家]이 에케이 악인-무네하루 충신설을 만들기 위해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무네하루 할복에 에케이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에케이는 이 이후 모우리-히데요시 간의 화평교섭 때 참가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6. 에케이의 끈질긴 교섭으로 본래 히데요시가 원했던 5개 쿠니[国] – 빗츄우[備中], 빈고[備後], 호우키[伯耆], 이즈모[出雲], 미마사카[美作] - 중 히데요시에게 비젠, 미마사카, 호우키의 세 개군(郡), 빗츄우의 동부를 할양하게 되지만, 대신 빈고[備後], 이즈모[出雲]와 호우키의 일부, 그리고 빗츄우의 서부를 지키게 된다. [본문으로]
  17.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는 것은 에도 시대의 편찬물에 쓰여졌을 뿐으로, 당시의 사료에는 안코쿠 사[安国寺]의 사령(寺領)으로 서국(西国)의 각 다이묘우 들의 영지에서 500~5000석씩 각출한 총 1만1500석이 주어졌다고 한다. 즉 에케이 개인이 아닌 절의 영지로 주어진 것이다. 거기에 만약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면, 히데요시 정권이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부과한 군역(軍役)처럼 군역을 부과받았겠지만, 에케이는 그것이 없었으며, 또한 영지 경영에 필수적인 가신단이 있어야 했지만, 역시 에케이에게는 가신단 또한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모우리 양천[毛利両川] 중 하나이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19. 대립이 있었다는 것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세키가하라 전쟁이 지난 후에 비망록[覚書]으로 적어 놓은 것에 나오는 것으로, 내용은 모우리 가문이 서군에 붙게 된 것은 에케이의 말빨에 이은 독단에 이은 것이며, 나님(히로이에)는 말쌈하면서 까지 말렸지만 에케이가 듣지 않았다. - 는 식으로, 나쁜 것은 모두 에케이때문이라는 것과 그에 따라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개긴 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용을 날조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후세의 편찬물이 아닌 당시의 서장 들을 살펴보는 한 히로이에와 에케이가 특별히 사이가 나쁘다거나 혹은 싸운 적은 없다. [본문으로]
  21. 사실 이는 서군 총사령관이면서도 양다리를 걸쳐 동군과도 부전조약을 맺은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 탓이 크다. 테루모토는 은거해 있던 미츠나리[三成]에게 에케이를 파견하여 반 이에야스 공작을 주도하였고, 한편으론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와 친한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명령하여 동군과도 연락하며,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에는 동군-모우리 가문간에 부전조약을 맺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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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i IV 2011.10.29 16: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어디서 굴러들어온지 모를 돌인데 굉장히 출세(...여담이지만 무려 코에이사 모리 모토나루전에서는 모토나리 사후 가입캐러로 대활약 하더군요)한 사람이라 궁금했었는데 이런 연유가 있었군요.

    상대적으로 같은 교토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된 두명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쓰신 글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던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아무튼간에 승려신분으로 1만석 이상을 받은 사람이 더 있던가요? 텐카이는 어땠으려나..)

    그러고보면 같이 로쿠죠가와라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유골발굴때 보았던 포스팅인데, 同時に1本の「小づか」も発見されました。小づかとは打ち首にあった人を埋葬する時に首と銅をつなぐためのものです。라네요. 대충 잘린 목과 밑부분을 이어주기위한 것으로 해석하면 되려나요? 다른 참수된 사람들도 이렇게 묻는게 상례였는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어이쿠 고인께 실례되는 생각이나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30 0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활동이나 업적 등을 보면 그 둘 보다 더하면 더했다고도 생각합니다.

      승려 신분으로 영지라...글쎄요..승려들은 寺領이라는 형식으로 받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보니...
      말씀하신 텐카이도 텐카이 개인이 받은 것은 모릅니다. 다만 그가 세운 칸에이 사[寛永寺, 쇼우군의 위패가 있고, 만약 막부와 쿄우토 조정과의 사이가 틀어질 경우 텐노우로 만들기 위해 황족의 인물을 주지로 받는 절]의 경우 최전성기 때 1만1790석을 소유했다고는 하지만, 이도 단계적으로 높아진 것이라...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무엇보다 참수형은 최고형이다 보니 유족들이 가져가 따로 모시는 것도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때때로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가령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경우는 목이 베인 뒤, 목은 효수된 뒤 이후를 알 수 없지만, 몸통은 기독교도들이 쿄우토[京都]의 기독교 사제관으로 몰래 가져와 묻었다고 합니다.(참수될 때 유키나가가 입었던 옷에 유언이 쓰여있다고 하더군요)

      여담으로 고승이었던 에케이의 유체를 따로 묻기 위해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承兌]'가 운반의 허가를 구하자, 당시 쿄우토 책임자였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信昌, 나가시노 전투의 계기가 된 나가시노 성을 지키던 인물]는 그런 허가를 받지 못했다며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는 알 수가 없네요.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02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시대나 그러한 인물들이 있는 법입니다만 16세기 일본의 인물들은 가깝게 느껴지면서 때론 이해할 수 없는 매력들이 있는데 안고쿠지 에케이 역시 그러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케이가 뛰어난 외교능력을 가졌다고는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론 히데요시와 모리의 외교에서 에케이가 외교 책임자라고 보는 것보다 고바야카와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모리 가문의 명운을 건 교섭에서 외교승을 중용한다는건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고 봐야겠지요. 그의 역할은 보좌로 봐야 맞는게 아닐런지.

    대 미쓰나리 외교도 데루모토와 깃카와를 비롯한 모리 혈족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의 처리로 인해 에케이가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이라고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에케이가 참 불쌍하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3 0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제권이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가지긴 했습지요. 다만 실무를 맡은 것이 에케이였습니다. 에케이는 쿄우토 오산[京都五山]의 인맥들을 활용하여 정보수집과 히데요시 측의 의중을 알아보는 한편, 히데요시 측의 실무진인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와 조정에 힘썼다고 합니다. 오히려 모우리 가문 산요우[山陽] 방면 담당인 타카카게(뿐만 아니라 모우리 가문 거의 전부가)는 비젠, 빗츄우가 관할지였다 보니 반대하는 편이었습죠. 히데요시의 힘을 인지하지 못하고 양보할 수 없다며 반대만하는 모우리 가문의 면면들에게, 에케이는 술 마시고 술기운에 투정을 마구 부린 편지도 현재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교승이라는 것이 센고쿠 시대에서는 꽤나 널리 퍼졌던 시스템입니다. 세속적인 무가(武家)의 싸움에,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여겨지던 승려는 중간에서 여러가지 조정을 맡곤 했습니다.

      가령 게임 상의 이야기입니다만, 신장의 야망에서 승려가 방문했을 때 외교적 선택(타세력의 침입시 강제적인 전투종결 및 단기간 부전합의, 포로를 반드시 데려 올 수 있음)에서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것에는 당시의 그러한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루모토는 그런 짓이 특기인 것 같더군요.
      후년의 일입니다만 토요토미 가문을 멸한 오오사카 공성전 때 테루모토는 토요토미 측에 줄을 대기 위해서 중신 나이토우 모토모리[内藤 元盛]를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로 변신시켜 오오사카로 보내며, 모토모리에게 만약 실패했을 시에는 모토모리의 자손들을 보호하겠다고 하면서도, 종전 후 모토모리가 토쿠가와에게 잡혔을 때 모토모리는 모우리 가문과의 관여를 끝까지 부정하며 모우리 가문에 충성을 다하지만, 테루모토는 이에야스에게 혼날까봐 모토모리의 아들을 전부 죽입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03 15: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렇다면 에케이가 대 히데요시와의 외교 전반에 관여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군요. 그렇다면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았을테인데 정보의 입수가 늦었다는 것이 되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여하튼 어긋난 지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하사해주셔서 오늘도 새로운 정보를 얻고 가게 되는군요. 열심히 받아먹도록(?!) 하겠습니다.

      모토나리의 음험함을 가장 잘 이어받은 것이 데루모토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숙부인 다카카게보다도 더요.

  3.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가 시즈카타케 전투 후 종전에 맺은 모리와의 강화를 무시하고 다시금 처음 강화를 맺을때의 요구사항을 들이댔다는건가요?

 눈치보기의 대명사 '호라가토우게 고개[洞ヶ峠]'라는 에피소드[각주:1]로 유명한 쥰케이[順慶]는 원래 불문(佛門) 출신이다. 유식론(唯識論 – 법상종(法相宗)의 중요한 경전))에 정통하고 와카[和歌]나 다도(茶道)에도 능한 문화인이었다.

 언제나 성성이의 가죽을 테두리로 한 두건을 쓰고, 금으로 수를 놓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적주머니를 비스듬히 어깨에 걸치고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야마토[大和]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대장을 맡아온 호족이었다. 야마토에는 츠츠이 가문 외에도 오치[越智], 토이치[十市], 와카오[若尾] 등의 승병대장이 있어 츠츠이를 포함하여 '사인방(四人衆)'이라 일컬어졌는데 츠츠이의 세력이 가장 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비호아래 야마토[大和]를 지배하게 된다.

 '호라가토우게 고개'라는 에피소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야마자키[山崎]에서 싸웠을 때 생긴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포된 이야기에는 이때 츠츠이 쥰케이가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올라가 아케치와 하시바의 싸움을 방관하다가 하시바 측이 명백히 유리해진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제서야 아케치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진상은 이것과 꽤나 다르다.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오른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 쪽이었던 것이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은 1582년 6월 2일이었다.
 노부나가에게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
国] 공략에 원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의 거병이었다. 이 당시 쥰케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등과 함께 미츠히데 휘하 다이묘우[大名]로 츄우고쿠로 출진하기 위해 거성(居城) 야마토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출진하여 쿄우토[京都]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도중 혼노우사의 변보를 접한 것이다.

 쥰케이의 입장은 미묘했다. 단순한 아케치 휘하 다이묘우가 아니었다. 친족관계였던 것이다. 미츠히데의 넷째 아들은 쥰케이의 양자로 들어와 있었다[각주:2]. 거기에 미츠히데는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은인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빼앗겼던 야마토의 츠츠이 가문 영지(領地)를, 노부나가가 마츠나가를 정벌한 후에 미츠히데가 잘 말해주어서 영지(領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각주:3]

 그런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쥰케이는 당초 미츠히데가 모반을 일으키자 미츠히데 측에 붙어있었다.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 노부나가의 셋째]의 출병요청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 성주 이도 요시히로[井戸 良弘][각주:4]와 함께 병사의 일부를 떼내어 아케치의 오우미[近江] 평정에 참가시켰다. 그러나 쥰케이 자신은 코오리야마 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쥰케이의 행동은 미묘하게 변해간다. 미츠히데의 요청을 받고 카와치[河内]에 출진할 예정이었던 것을 취소시키고 더구나 성 안에 식량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벌하기 위해서 산요우
[山陽]를 맹렬히 올라오고 있다 – '
 쥰케이에게는 이미 이 정보가 들어간 듯 했다.

 6월 10일.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상경한 히데요시의 군세는 이제 쿄우토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효우고
[兵庫][각주:5]까지 와 있었다. 미츠히데는 이 너무도 빠른 움직임에 앙천했다. 이제 인기가 떨어진 아케치 세력은 1만 수천밖에 없었다. 쥰케이의 가세가 절실했다.

 미츠히데는 쿄우토를 나와 야마자키 하치만[山崎八幡]에 있는 구릉의 일각인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진을 쳤다. 이 고개는 눈 아래로 쿄우토-오오사카[大坂] 간의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요충지였다. 야마토 코오리야마까지는 약 20여km. 미츠히데는 "가세하지 않으면 코오리야마를 공격하겠다"고까지 말하여 쥰케이에게 엄포를 놓았지만 쥰케이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미츠히데는 계속 기다렸지만 이때 쥰케이는 이미 히데요시와 서약서를 교환한 상태였던 것이다. 쥰케이의 조심스러움은 그래도 여전히 눈치를 보는 태도를 유지하게 만들어 14일이 되어 그제서야 코오리야마 성을 나온 것이다. 이때 미츠히데는 이미 오구루스[
小栗栖] 마을에서 그곳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쥰케이는 1천의 병사를 이끌고 타이고[醍醐]에 있는 히데요시의 진영으로 가서 승리를 축하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눈치를 본 태도를 책망하였지만 그대로 용서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이때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츠츠이즈츠[筒井筒]라는 이름 높은 고려차완(高麗茶碗)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9년 생. 대대로 코우후쿠 사[
興福寺]의 중도(衆徒)로, 환속한 후에 후지시로우 후지마사[藤四郎 藤政]라는 이름을 칭했다. 1559년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츠츠이 성[筒井城]에서 쫓겨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도움으로 영지(領地)를 회복하고 야마토[大和]를 영유하게 된다. 1584년 죽었다. 36세.

  1. 관용어로 "洞ヶ峠を決め込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기회를 엿보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하나[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 결국 실현까진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야마토[大和]는 무로마치 시대에도 막부가 슈고[守護]를 두지 않았던 유일한 곳으로, 이곳은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왕국이라고 할 정도로 코우후쿠 사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한 곳이었다. 노부나가도 처음엔 자신이 키웠다고 할 인재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던 반 나오마사[塙 直政]에게 야마토를 지배하게 하나, 나오마사가 전사하자, 야마토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기던 코우후쿠 사의 승병 출신인 쥰케이를 야마토의 지배자로 임명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의 판단이었지 결코 미츠히데 덕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4. 그는 부인은 쥰케이의 딸이다. [본문으로]
  5. 코우베[神戸]의 옛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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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1.31 1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 살아남으려 애썼건만 아버지처럼 암으로 요절했고 아들대엔 카이에키 당했으니 뭐..-_-; 인생무상이라지만 참 덧없는 일인가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1 1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짧지만 굵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격전지 킨키에서 그 눈 높다는 노부나가의 신임으로 나라 하나 소유했을 정도면 뭐... 그럭저럭 괜찮았던 듯 싶습니다.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8 8 11일 병사 35

1549~1584.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성주. 부친인 쥰쇼우[順昭]가 죽자 2살에 가독을 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대립하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도와 마츠나가를 멸망시켜 야마토를 영유(領有). 야마자키 전투[山崎 合戦]에서는 미츠히데를 버리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 섰다.







승의(僧衣)의 무장


 츠츠이 쥰케이의 부친인 쥰쇼우는 나라[奈良]의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이었다. 쥰쇼우는 소에시모 군[添下郡]의 츠츠이 성[筒井城]을 본거지로 삼고, 야마토 지역에서 최강인 무사단을 이끌고 야마토 전역을 거의 평정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551년, 아직 쥰케이가 2살일 때 쥰쇼우가 병으로 죽었다.


 주변 가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여 18세에 코우후쿠 사[興福寺] 세이신 원[成身院]에서 득도(得度)하여 '요우슌보우 쥰케이[陽舜坊 順慶]'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승의의 무장이 된 쥰케이는 쇼우죠우히[猩[각주:1]]로 물들인 두건을 쓰고 금색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출진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시기산 성[信貴山城]에 웅거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여러 번 압박 받던 중 아케치 미츠히데의 주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히사히데보다 쥰케이를 신뢰하여 야마토를 맡긴 것이다.[각주:2] 이에 불만을 품은 히사히데는 돌연 시기산 성에서 모반을 일으켜 자멸하였다.


 1580년.

 쥰케이는 성을 야마토[大和]의 코오리야마[郡山]에 축성한다. 미츠히데가 성의 건물 배치를 맡았다고 하니 둘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각주:3].


갑자기 찾아온 복통(腹痛)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츠히데가 싸운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출진 요청에도 불구하고 '호라가토우게 고개[洞峠]'에서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실제로는 출병하지 않고 코오리야마 성()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곧바로 히데요시의 진()으로 달려가 천하의 명기(名器)인 이토 차완[井戸茶碗]을 헌상하고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내어 야마토 일국(一国)의 영유를 허락받았다.


 1548 1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히데요시에게 신년인사를 한 후 후나바[船場]의 자택에서 체재하고 있던 2월 중순. 쥰케이는 갑자기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수반하는 복통을 일으켰다. 소강상태를 지나 3 2일에 코오리야마 성()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출진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이 전쟁은 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이라 불리게 되는 전쟁이 된다.


 히데요시에게 충심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로 본 쥰케이는 병든 몸을 이끌고 3월에 오우미[近江]로 출진하였고, 거기서 이세[伊勢] 마츠가시마[松島]에서 싸운 후 쉴 틈도 없이 6월에 미노[美濃]의 타케노하나[竹鼻]로 이동하였다. 양군이 대치한 상태가 된 7월이 되자, 복통은 더욱 심해져 제대로 먹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에 더해 한 여름의 더위까지 겹쳐 몸은 갈수록 말라 갔다.


명의(名醫)의 치료도 보람없이


 코우후쿠 사()의 중도(衆徒)로서는 제일 높은 자리인 호우인 소우토[法印 僧都]가 되어 있던 쥰케이의 병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코우후쿠 사(),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는 여러 가지 기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효과는 없어 결국엔 쿄우토[京都]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쿄우토에는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의 병을 고친 명의(名醫)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우산의 치료에도 진전이 없어 격통이 멈추지는 않았다. 쥰케이의 병은 요즘으로 말하면 악성 위궤양 혹은 위암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코오리야마 성()으로 돌아왔다.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쥰케이의 묘.

 흔들리는 가마에 타고 오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오는 도중 우치[宇治]나 나라[奈良]에서 정양(靜養)해 가면서 귀성한 것은 8 7일이었다. 그 동안에도 쥰케이는 계속 고통을 느꼈다. 또 다시 코우후쿠 사()나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 기도가 행해졌지만 역시 효험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쥰케이도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10일에는 머리맡에 일족들과 중신들을 불러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모친 오오이카타 토노[大方殿] 등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5.


 쥰케이는 츠츠이 가문의 앞날을 걱정하였지만 뒤를 이은 사다츠구[定次][각주:4], 죠우케이[定慶][각주:5] 둘 다 뛰어나지는 못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카이에키[改易][각주:6], 단절(斷絶)[각주:7] 당하게 된다.

 사다츠구는 이가[伊賀] 우에노[上野]로 영지가 옮겨져 20만석을 영유하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쪽에 속했으나 후에 카이에키가 되어 이요[伊予]로 유배당한다.

 또한 그 다음 대인 죠우케이[定慶]에게는 코오리야마 성() 1만석이 주어졌지만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에서 오오사카 측에 너무도 간단히 성을 빼앗긴 일로 무가(武家)로써 어울리지 않다하여 가문이 끊겼다.

 

 
  1. 파란 빛을 띤 진홍색을 말함. [본문으로]
  2. 이전까지만 해도 히사히데가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휘하였기에, 히사히데의 적인 쥰케이는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은 노부나가의 군세에 공격받아 위기에 빠지나, 1571년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뜬금없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노부나가를 거역하더니 쇼우군 요시아키 휘하 장수들의 영지를 공격. 이에 요시아키는 히사히데의 적이었던 쥰케이를 옹호하게 된다(자연스레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있던 노부나가도 쥰케이를 옹호). 이후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사이가 벌어지자 히사히데는 요시아키 측에 붙고, 쥰케이는 히사히데에게 대항하기 위해 노부나가에게 붙는다. 덧붙여 요시아키를 쫓아낸 후 히사히데와 쥰케이의 상위에 자신의 측근 반 나오마사[塙 直政]를 두었으나 전사. 이후에 비로서 야마토를 지배하게 된다. 본문의 글처럼 미츠히데의 힘이라기 보다는 이전부터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긴 쥰케이 노력의 결과라 봐야 할 듯. [본문으로]
  3. 성 안의 건물 배치는 극비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맡기질 않았다. [본문으로]
  4. 쥰케이에게는 사촌이며, 외조카(모친이 쥰케이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확실하진 않으나 쥰케이와는 이종사촌지간인 듯. [본문으로]
  6. 무사의 신분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강등 됨. [본문으로]
  7. 가문이 끊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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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0 2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쓰이 조케이는 오사카 싸움에서 패전한 뒤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자결했다고 합니다만, 맞습니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1 0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결했다는 말들이 대세인데, 일설으로는 자결을 가장해서는 본가(후쿠즈미(福住), 혹은 후쿠스미(福須美))로 돌아가 살았다는 말도 있더군요.

    근데...신사본론님의 이번 댓글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신사본론님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찾아 보실 수 있으실텐데...
    혹시라도 글이 부정확하다고 하시려고 한다면, 이 글은 쥰케이에 대한 글이어서 그 이후에 대한 글은 그냥 첨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찾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서 저는 일본식 발음과 일본식 한자를 쓰고 있습니다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1 0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쇼우죠우히.. 파란색을 띤 진홍색이란 어떤 색일까해서 눌러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
    그래도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실제로 봐야할 듯합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1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 글을 읽고 나니까, 혹시 조케이의 자결에 혹시 외압이 가해진 것이 아닌가 궁금증이 들어서 그렇게 댓글을 썼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1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쇼우죠우히.. 오호, 이것은 유머감각이 드러나는 링크군요.

    어쩐지 너무 빨리 죽는다 싶었는데.. 하긴 뭐 2살때 가독을 이어서 30여년 했으니 일한 평균치는 다른 다이묘처럼 어느정도 맞은듯?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2 05: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선생님//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 행여라도 이렇게 해두면 다음부터는 저렇게 링크건거 보시는 분들이 생길까봐서..(물론 다른 링크는 저런 것은 없습니다...아마...솔직히 자신이 없군요..^^; 박선생님께서 언급하시기 전까지 저런 링크를 달아 놓았다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까요)
    참고로
    http://ja.wikipedia.org/wiki/%E7%8C%A9%E3%80%85%E7%B7%8B
    에 있는 색이 쇼우죠우히..라고 합니다.
    정확히 보실려면 뽀샵에서 저 수치를 찾아보시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브라우져는 이용하시는 것에 따라 색이 다르다고 하더군요.(색에 관해서는 애플의 '사파리'가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하네요)

    신사본론님//이번에 다신 댓글이 저에게는 너무 함축적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번거러우시더라도 조금 정확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현실에서는 제법 눈치 빠르다는 소리를 듣습니다만, 아무래도 넷상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봅니다.)

    워낙 마이너한 인물이다 보니 제가 가진 정보라고는 넷상에서 얻을 수 밖에 없는 정도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숨어 살았다는 일화와 싸우다 죽었다는 상반되는 말이 있다보니 죽기 싫어했던 것을 주위 부하들이 강제로 배를 가르게 하지는 않았나 싶습니다. 이 이상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메엣찌님//아이 참~ 또 그렇게 말하시면 궁금해서 클릭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 너무도 이른 가독 상속에 대해서...
    [ 元の木阿弥 ]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말로 번역할 때 저는 '도로아미타불'이라고 하는데, 그 말의 어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건 직접 찾아보심을 권합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2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정확한 댓글을 달아서 헷갈리게 한 점 죄송합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2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닙니다 ^^ 담부턴 그렇게 좀 부탁드립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3 2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놀란 건 아니구요 의도하신게 아니었네요^^; 발해지랑님 센스가 넘치시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ㅋ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4 19: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S. 元の木阿弥에 대해 한번 찾아봤습니다. 오호...

    P.S.2. 생각해보니 마나세 도우산은 센고쿠의 화타급인듯(-_-ㅋㅋㅋ)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4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선생님//칭찬이신거죠? 데헤헤~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처럼 등으로 말하며)

    다메엣찌님//태합입지전에서는 플레이어 캐릭터를 가리키시는 존재일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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