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 이에야스[家康]로 이어지는 소위 겐키[元亀][각주:1] - 텐쇼우[天正][각주:2]의 천하 통일기에 저 3명과 가까이 하며 백만석의 기초를 쌓아 올린, 센고쿠[戦国] 역사에서도 특필할 만한 무장이었다.

 토시이에는 14살 때 당시 나고야[那古野] 성주였던 4살 연상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각주:3], 같은 해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섰다[각주:4]. 19살 때 노부나가가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信行]를 공격한 이노우 전투[稲生の合戦]에서 노부유키의 청년 친위대장[小姓頭] 미야이 칸베에[宮井 勘兵衛]라는 강적을 쓰러뜨리는 공적을 세웠다.[각주:5]

 이 즈음 토시이에는 카부키모노[かぶき者]로 성질이 급하여 자주 남과 싸웠다.
 ‘카부키모노’라는 것은 기발하고 특이한 복장이나 행동을 해서 남을 놀라게 하고는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기풍이었다. 예를 들어 토시이에는 굉장히 화려한 장식을 한 창을 들고 다녔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창의 마타사에몬[槍の又左衛門][각주:6]’이란 이명(異名)을 붙었기에 이를 들은 토시이에는 기뻐하였다.
 그런 토시이에였기에 늙어서도 특이한 젊은이를 사랑하였으며, 또한 말하길,
 “젊은이에게는 큰소리 치도록 만드는 편이 좋다. 그러면 자신이 했던 말들을 거짓으로 만들 수 없다며 분투하게 되니까”
 라고 하였다.

 카부키모노였던 22살의 1559년, 토시이에는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노부나가의 도우보우[同朋][각주:7] 쥬우아미[十阿弥]가 토시이에의 남성용 비녀[笄][각주:8]를 훔쳤다. 토시이에는 곧바로 노부나가에게 쥬우아미를 처벌할 테니 허락을 내려달라고 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토시이에는 주군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이런 토시이에를 보고 쥬아미 등이 ‘용기도 없는 놈’ , ‘무사라는 자가 한번 벤다고 했으면 베어야지 주군의 명령이라고 베지도 못하다니’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깠다.[각주:9]
토시이에는 이를 듣고 불문곡직하고 쥬우아미를 베어 죽였다. 더구나 일부러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을 골라서 죽여버린 것이다. 평소부터 카부키모노라는 점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토시이에로서는 당연한 행위였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토시이에를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노(宿老)들의 중재 덕분에 목숨만은 건져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낭인(浪人)이 된 토시이에가 취한 방도는 슬며시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세워 복귀를 허락 받는 것이었다.[각주:10] 그런 기회가 그 다음 해인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가 되어 찾아왔다. 토시이에는 오다 군[織田軍]에 참가하여 이마가와[今川] 측의 목을 세 개를 가져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시이에가 그 목을 노부나가의 앞으로 가져왔지만 노부나가가 무시했기에 그 목들을 버리고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결국 노부나가의 용서는 없었다.

 그 2년 뒤, 노부나가가 미노[美濃]를 침공하였을 때 토시이에는 또 참가하여 모리베 전투[森部の合戦]에서 ‘목 사냥꾼 아다치[首取り足立]’라는 이명(異名)을 가진 강한 무사를 죽이는 수훈을 세우자 노부나가도 용서를 하여, 다시 오다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복귀하게 되었다.[각주:11]

 그 후 토시이에는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함께 호쿠리쿠 방면[北陸方面]에서 활약하며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자,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곧이어 이 둘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토시이에의 입장은 복잡했다. 토시이에에게 있어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에서 쫓겨나 낭인으로 보내던 시대에 몇 번이나 도와주었던 은인이며, 오랜 기간 전쟁터를 함께 해 온 의리가 있었다. 한편 히데요시와도 젊었을 적부터 친교가 있어, 딸 중 하나인 ‘고우[豪]’[각주:12]는 태어나자마자 히데요시에게 양녀로 주었을 정도였다. 토시이에는 어느 쪽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 는 것이 본심이었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영지가 이웃인 시바타 측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1583년 4월 21일부터 다음 날 아침에 걸친 시즈가타케의 전투[賤ヶ岳の戦い]는 히데요시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지만, 이때 마에다 군[前田軍]은 그다지 전투에 참가하는 일 없이 영지(領地)인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로 철퇴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가 이 전투에 대한 기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히데요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토시이에가 농성하고 있는 후츄우의 성은 단숨에 낙성시킬 수 있었다. 이때가 토시이에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각주:13]

 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포위망을 친 히데요시는 혼자 말 타고 후츄우의 성문 앞에 와서는 “마타사[又左]~ 마타사~”하고 토시이에의 통칭을 불렀고, 성안에 들어 온 히데요시는, 서로 원한이 없으니 앞으로도 사이 좋게 지내자며 토시이에에게 말하였다. 이런 것은 히데요시의 특기인 남의 마을을 끌어들이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미움 받지 않는 토시이에의 인덕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리하여 토시이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멸망 당하여 죽은 뒤 히데요시의 둘도 없는 한 팔이 되어 신뢰를 받았고, 나중에는 여러 장수들에게서도 신뢰를 받아 히데요시 정권에서 무게감을 더해 갔다.

 토시이에가 여러 장수의 인망을 모았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병들었을 때, 토시이에는 당시 명의로서 명성을 떨치던 의사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에게 직접 의뢰하여 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며, 우지사토가 죽자 그 아들 츠루치요[鶴千代 = 후에 히데유키[秀行]]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즈[会津]라는 중요한 곳을 지키기 힘들다는 의견이 높았지만, 부인 호우슌인[芳春院]과 함께 히데요시 부부를 설득하여 가모우 가문[蒲生家]의 영지 상속을 실현시켜 주었다.[각주:14]
 
 또한 이해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 사건이 일어나 평소 히데츠구와 친밀했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가 연좌의 혐의를 받자, 토시이에는 온갖 수단을 다해 변호하여 아사노 부자에게 쏠린 혐의를 벗게 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조선에서의 행동 때문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근신 당하고 있다가 ‘지진 카토우[地震加藤]’[각주:15]라는 이명(異名)을 얻을 때의 활약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풀었는데, 이것도 토시이에의 중재에 의한 것이 컸던 듯 나중에까지 키요마사는 토시이에의 중재를 고마워하였다.

 이렇듯 토시이에가 장수들의 위기를 구했기에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신뢰할만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토시이에는 말년이 되어 적자 토시나가[利長]에게 여러 다이묘우들의 차용증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죽은 뒤 마에다 가문의 편에 선 다이묘우의 차용증은 돌려주라고 하며, 그렇게 되면 한층 더 아군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는 단순히 ‘좋은 인간성’만의 무장이 아니라 상당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시이에는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그것도 센고쿠 무장[戦国武将]로는 드물게 경제감각의 소유자로 수치에 밝아 항상 주판을 가지고 다니며 병사의 수를 세거나 금전 출납, 곡물을 계량할 때도 주판을 튕겼다. 그랬기에 토시이에는,
 “돈이 많으면 남에게도 세상에게도 겁먹을 일이 없지만, 가난해지면 세상이 무서운 법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1598년 8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가 죽었다. 정치와 어린 히데요리[秀頼]의 안전은 오대로(五大老)[각주:16], 오봉행(五奉行)[각주:17]의 손에 맡겨지게 되어, 토시이에는 주로 히데요리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대로의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우들과 사돈관계를 맺으려 하는 등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기 시작하기에 이르자, 토시이에는 긴박한 정치의 장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이에야스를 가장 적대시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봉행이었다. 그리고 이 미츠나리는 무공파(武功派)라 일컬어지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의 격한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리 되자 천하는 이에야스-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등 반 이에야스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에야스의 다음가는 실력자 마에다 토시이에는 미츠나리 등과 함께 이에야스에게 힐문장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변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답변으로 응대하였다. 오오사카의 토시이에와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간에 불온한 공기가 흘렀다.
 이 사태에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8]와 토시이에에게 은혜를 입은 카토우 키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 여러 장수들이 열심히 양자간의 사이를 중재하여 겨우 화해하였다고 한다.
 그때 토시이에는 이미 병상이 깊어 마에다 가문의 의지는 적자 토시나가가 결정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인망이 두터웠던 토시이에였기에 여러 장수들도 중재에 힘썼던 것이며, 이에야스 역시 예부터 알고 지낸 그런 토시이에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는 죽었다.
 그 임종의 자리에서 토시이에는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이빨을 간 뒤 베갯머리에 있던 ‘신도우고 쿠니유키[新藤吾 国行]’의 작은 칼[脇差]을 뽑지도 못해 칼집 채 가슴에 누르고는 무언가 크게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9]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83년
오와리[尾張] 출신. 통칭 이누치요[犬千代]. 오다 가문[織田家]를 섬겼고, 형 토시히사[利久]를 대신하여 본가를 이었다[각주:20].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공적을 세워 에치젠[越前] 후츄우 성[府中城]의 성주가 되었고[각주:21], 이어서 노토[能登] 나나오 성[七尾城]의 성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후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카가[加賀] 오야마 성[尾山城][각주:22] 성주가 된다. 1585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각주:23]의 칭호를 하사 받았고, 1590년에는 토요토미 성[豊臣姓]을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 죽은 지 8개월 후인 1599년 죽었다. 62세.[각주:24]

  1. 1570~1573년. [본문으로]
  2. 1573~1592년 [본문으로]
  3. 봉록은 50관.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이며 키요스[清須]의 성주인 오다 노부토모[織田 信友]와의 카야즈 전투[萱津の戦い]. [본문으로]
  5. 오와리 통일전에 참가하며 봉록은 100관으로 증가. [본문으로]
  6. 토시이에의 통칭이 마타사에몬[又左衛門]이었기에. [본문으로]
  7. 다이묘우[大名] 곁에서 잡무를 맡거나 다도[茶道]에 관련된 일을 하던 스님. [본문으로]
  8. 일본 시대극을 자주 보시는 분이라면, 주인공이 도망치는 적이나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표창 대신 젓가락 비슷한 것을 던지는 장면을 보셨을 것이다. 그것이 코우가이[笄]. 이것으로 머리를 긁거나 머리를 다듬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가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10. 이런 행위를 '진가리[陣借り]'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복귀하면서 얻은 봉록 300관. [본문으로]
  12. 토시이에의 4째 딸. 나중에 오대로 중 한 명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에게 시집간다. [본문으로]
  13. 도망치던 시바타 카츠이에는 토시이에의 후츄우 성[府中城]에 들러, 무단 퇴각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오랜 기간 자신을 잘 도와 주웠다는 것에 감사한 뒤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여기에는 토시이에의 2남 토시마사[利政]의 부인이 우지사토의 딸인 점이 컸을 듯. 즉 서로 사돈지간. [본문으로]
  15. 596년 9월 5일 킨키[近畿]에 지진이 일어나 후시미[伏見]가 혼란에 빠졌을 때 키요마사는 근신의 몸임에도 군사들을 이끌고 후시미 성[伏見城]에 가 히데요시를 수비하였기에 붙은 이명. [본문으로]
  16. 이 당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7.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18.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는 타다오키의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 즉 토시이에와 타다오키는 사돈지간. [본문으로]
  19. 일설에는 복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신도우고 쿠니유키의 작은 칼로 스스로 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토시이에는 4남이어서 원래 자격은 없으나, 1569년 토시히사가 병약해서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토시이에가 당주가 되도록 명령. [본문으로]
  21. 나가시노의 공적보다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감시역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2. 후에 카나자와 성[金沢城]으로 이름을 바꾼다. [본문으로]
  23. 히데요시가 한참 동안 쓰던 성과 관직명. [본문으로]
  24. 가보나 계보도에는 62세라고 하나, [케타신사 문서[気多神社文書]]나 [토시이에 야화[利家夜話]] 등에서 63세로 하는 사료도 많아 63세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노부나가 가신단 연구가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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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4.12 0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시대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지녔던 오다계열의 필두가신들 중에서 센고쿠 시대의 끝자락까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란 점에서 도시이에란 인물의 역량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니와나 삿사는 히데요시 손에 의해 숙청되었고 시바타, 다키가와, 아케치들은 히데요시에게 칼을 겨누는걸 택하고 패망했으니 말이죠. 예외라면 장렬히 죽으면서 아들 데루마사와 가문을 지킨 이케다 쇼뉴 정도일까요.

    결과론적으론 가모 히데유키를 아이즈에 놔두게 되면서 가모 가문이 쇠퇴하게 된 셈이네요. 차라리 가모 가문을 아이즈보다 중요도가 덜한 곳으로 전봉했으면 어떻게 되었을런지. 전국에 이러한 우호 가문들을 만들어놓은 것이 에도가 훗날에도 가가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동맹의 울타리에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2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1588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가 쥬라쿠다이[聚楽第]에 행재하여 다이묘우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문서를 쓸 때, 노부나가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히데요시 일족과 이에야스, 모토나리 등과 함께 오다 가문 계열 무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것만 보아선 히데요시의 신뢰와 더불어 역량도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시바타, 아케치, 타키가와 등은 아무래도 히데요시 보다 서열이 위거나 동등하다 보니 천하를 노리는 히데요시로서는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가모우 가문[蒲生家] 자체가 우지사토[氏郷]를 중심으로 급격히 커져 신규 가신들을 다수 받아들이다 보니 가모우 가문 자체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계자라고 하여도 히데유키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졌나 봅니다. 이건 아무래도 일찍 죽은 잘못이 있는 우지사토 때문인 듯 합니다.

      좀 벗어난 이야기 입니다만, 에도 시대 때 혼슈우[本州]에 있는 마에다 가문을 시코쿠[四国]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습죠. 막부도 나름 마에다 가문에는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습죠.

      마에다 가문도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자식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를 자신의 가문으로 초빙하여, 가신으로서는 파격인 7만석을 안겨주며 막부와의 절충에 힘쓸 정도로 에도시대 초기에는 카가 번[加賀藩]과 막부는 나름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었던 듯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06.03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즈카타케에서의 무단 이탈 + 딸 2명중 한명은 히데요시의 양녀로, 또다른 한명은 히데요시의 측실로... 갠적으로 이 두가지로 인해 평소 좋게 생각했던 마타자의 환상이 팍 깨져 버렸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가타케 전투 때 토시이에의 마에다군은 마지막까지 후군에서 달려드는 히데요시를 막았고, 토시이에는 직접 창을 쥐고 싸웠다고 하는 기록도 있더군요.

      히데요시도 니와 나가히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시이에를 살린 것은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방파제로 남긴 것으로 에치젠에 있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임. 토시이에에게 마음을 열지 마시길'
      이라고 보낼 정도로 시즈가타케 전투 직후에는 토시이에와 히데요시가 알려진 만큼 친하진 않았던 것 같더군요.

      더더군다나 딸 2명 중 하나(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 간 고우히메[豪姫])는 태어나자 마자 간 양녀이고, 마아히메[摩阿姫=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는 원래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바쳐진 인질을 히데요시가 인수했던 것이라, 당시 인식으로 보아서 토시이에를 욕하기는 좀 부족하지 않을지...

  3. 지나다가 오타지적 2011.11.06 04: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바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4문단 6번째 줄

  4. 한남충 2018.06.24 0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아무리 의리가있고 인덕이 있어도
    시바타와의 의리를 지키기위해 수많은 식솔들과 가신들의 목숨을 뒤바꾸기는 힘들었을겁니다.
    저는 토시이에의 상황이 이해가는군요..
    참 의외인게 이에야스가 히데타다의 딸 타마히메를 마에다가문에 시집보낸것인데..
    토시이에 사후라 카가정벌까지 결정할뻔했던걸 혼인동맹을 맺어주며 포용한것이..
    포상할 땅을 엄청 필요로해서 카가를 먹기는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듯한데..

 하지만 히데요시[秀吉]의 그녀에 대한 태도는 이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당신은 특별에서도 특별하니까

 라고 히데요시는 말버릇처럼 말했다. 수 많은 측실을 거느리고 있지만 네네 당신과 그녀들은 다르다. 각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당신이 사랑스럽다는 애정의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한 지위를 지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네는 토요토미 가문의 유일한 정실(正室)이며 토요토미 가문 그 자체였다. 많은 측실들은 법제상 고용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히데요시가 주군(主君)인 것과 마찬가지로 네네 역시 주군이었다. 때문에 '특별에서도 특별하다'는 것이다.

 사실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인 네네의 지위는 어떤 시대의 어느 귀부인(貴婦人)보다 더욱 화려했다.
 
히데요시가 나이다이진[大臣]이 되었을 때[각주:1] 동시에 그녀는 종삼위(從三位)가 되었고, 더욱 지위가 높아져 1587년에는 종이위(從二位)가 되었다. 계속해서 이 해의 9 12, 그녀는 시어머니인 오오만도코로[大政所]와 함께 오오사카[大坂]에서 쿄우()의 쥬라쿠테이[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히데요시의 취향대로 꾸며진 행렬, 행장(行裝)은 과거에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수행하는 여관(女官) 만으로도 500명 이상에 달했을 것이다. 네 명 이상이 메는 화려하게 치장한 가마가 2백정, 두 명이 메는 평범한 가마가 100, 짐을 멘 상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에 따르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경호 무사들은 전부 타는 듯이 붉은 색의 복장을 하고 있어, 그야말로 이 나라 최고 귀부인(貴婦人)의 상경 행렬을 장식하는데 어울렸다.

 더구나 길가에서 남성은 구경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라고 하더라도 구경꾼 속에 섞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유는 그들이 젊은 여관(女官)들의 미모를 보고 저속한 마음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배려 때문이었다. 속으로 품는 마음조차 키타노만도코로에 대해서 불경(不敬)이라고 하였다. 이 행렬은 굉장한 평판을 불러 천하에 선전되었다. 키타노만도코로야 말로 일본국 넘버 원 귀부인이라는 인상을 60여주()에 전해진 것은 히데요시가 연출한 이 행렬의 성공에 의한 것이 컸다.

 다음해인 1588 4 19.
 
즉 키요마사가 히고[肥後] 책봉되기 1개월 전, '토오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는 종일위(從一位)로 승진하였다. 이미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위계였다.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의 다세대 주택에서 조악한 결혼식을 올린 옛날을 생각해보면 그녀 자신조차 믿기 힘든 영달(榮達)이었다.

 그러나 제가 저 자신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요

 라고 네네는 항상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녀의 굉장한 점은 그 영달보다도 오히려 그 영달로 인해 조금도 그 인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그녀는 종일위(從一位)가 되었어도 절대 쿄우[京] 말투나 궁중 말씨를 사용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건 듣기 힘들 정도로 빠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썼다. 평소 히데요시에게도 그러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의 마누라라고 불렸던 아주 옛날 화장도 못하던 맨얼굴일 때랑 조금도 변함이 없어,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떠들썩하게 말싸움을 펼쳤으며, 또한 시녀들을 상대로 항상 큰소리로 웃었고, 밤에 이야기라도 할 때에는 옛날 가난한 시대의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말하여 모두를 웃겼다. 또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부인인 오마츠[松]와는 기후 성[岐阜城] 밑의 오다 가문[織田家]의 무사들이 사는 곳에서 이웃사촌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그 당시 담을 사이에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네네의 태도는 오마츠에 대해서도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다시는 없을 분이시다

 고 오마츠는 자주 말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님은 타이코우(太閤)님 이상 일지도 모른다

 오마츠는 예전부터 그 적자(嫡子)인 토시나가[利長], 둘째인 토시마사[利政]에게 말했다.
 
이 오마츠라는 마에다 토시이에의 조강지처 자체가 토시이에의 창업(創業)을 도우며 왔던 만큼 보통의 여성은 아니었다. 토시이에가 죽은 후에는,
 
'
호우슌인[芳春院]'
 
이라는 요염한 법명(法名)으로 불리며[각주:2], 마에다 가문에서는 '비구니 쇼우군[尼将軍]'[각주:3]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의 권세가 있었다.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만 토시이에가 죽은 뒤 그녀는 마에다 가문의 앞날에 대해서 하나하나 네네와 상담하였고, 하나하나 네네의 의향에 따랐다. 그 적자(嫡子) 토시나가에게도,

 모든 것을 키타노만도코로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따르렴

 이라 훈계하였다. 이럴 정도로 네네가 가진 소탈함과 총명함은 그녀의 인기를 만들었고, 그것이 토요토미 다이묘우[大名]들 속에서 은연 중에 정치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네네가 가진 위엄과 덕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네네에 대한 과대할 정도의 애정과 존경이 세상에 투영되어 있었다. 세상의 누구나 히데요시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 중 넘버 원은 키타만도코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보게, 이보게

 하고 히데요시는 쿠게(公家) 말투로 네네를 불렀다. 편지에도 그렇게 썼다.

 이보게 밥을 많이 취하시게

 라는 단지 그렇게만 써서는 성을 지키고 있는 네네에게 보냈다. 밥을 많이 먹고 있는가? 라는 정도의 것만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농담도 잘 하셔
 
라고 그럴 때마다 네네는 생각했다. 그녀는 남다른 정도로 건강하였으며 평소 식욕이 왕성하였고, 그렇지 않아도 살집도 넉넉한데 이 이상 먹는 것에 격려 받는다고 하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만 앙상한 히데요시는 풍만한 여성을 좋아하는 부분도 있었으며, 시대도 그러한 여성을 미인이라고 하였기에 미용 상의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식욕이 어떻든 이러한 히데요시의 극진함이 토요토미 가문에서 그녀의 위치에 한층 더 무게를 실려 준 것은 확실했다. 예를 들면 1587년의 큐우슈우[九州] 공략전에서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서 수백 리 떨어진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의 진영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오오사카[大坂]의 네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투 상황이나 큐우슈우(九州)의 정세 등을 알린 후 그 말미에

아니~ 나도 이번 싸움에서는 나이를 먹은 게 느껴지더군. 나도 모르는 새에 흰머리가 많아진 것이 아닌가? 이래서는 하나하나 뽑는 것도 힘들 정도야. 이제는 그쪽과 만나는 것도 창피할 정도네
마치 연인에게 보내는 듯한 내용이었다. 더구나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네네를 기쁘게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리 흰머리가 늘었다고 해도 다른 여자라면 모를까 그쪽이라면 거리낄 것도 없지. 그쪽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이렇게 흰머리가 늘어난 것이니까

 여전히 아부는 천하제일이시군
 
라고 네네는 반은 어처구니 없이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본심은 기쁘지 않을 턱이 없다. 그 증거로 이 편지를,

 모두 보세요. 칸파쿠(関白) 전하의 웃긴 편지를

 라고 말하면서 시녀들에게도 읽게 해 주었다.
 
히데요시의 육체는 이 즈음부터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큐우슈우[九州]에서 개선한 즈음부터 밤에 네네의 침실을 찾아 오는 것이 드물어 졌다. 오더라도,

 여어~ 건강하신가? 오늘도 밥은 취했나? 그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지

 라고 여전히 시끄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더욱더 네네에 대해서 친밀한 태도를 보이기만 할 뿐으로, 그런 주제에 남편으로써의 의무인 침실의 일까지는 기력이 미치질 못했다. 과연…… 히데요시는 늙었다. 먼 큐우슈우의 진중에서 보내왔던 늙음을 한탄한 편지의 내용대로 몸이 쇠약해졌을 것이다. 다른 측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칸파쿠님이 너무 오시질 않사옵니다

 라고 그녀들은 규원(閨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쓸쓸함을 네네에게 호소했다. 네네는 허물없이 그것을 들어 주었다. 그 때문인지 네네는 그런 그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어, 특히 카가노츠보네[加賀ノ局], 산죠우도노[三条殿], 마츠노마루도노[松ノ丸殿]등은 네네를 마치 언니와 같이 따랐다. 이 때문에 그녀들의 친정에서도 네네를 우러르는 곳이 많았다. 카가노츠보네는 마에다 토시이에와 그 부인인 위에서 언급한 오마츠를 양친으로 하는 딸이었으며, 산죠우도노는 카모우 가문[蒲生家] 출신이었고, 마츠노마루도노는 쿄우고쿠 가문[京極家] 출신이었다. 그녀들의 친정은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다이묘우(大名)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으며, 그런 가문들이 히데요시의 측실들을 통해서 네네와 엮여, 그것을 연줄로 삼고 있었다. 네네의 강한 정치력은 그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는 하여도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토요토미 가문 내의 세력에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이 남을 배려하는데 세심했던 남자이기에 여태까지 그랬던 적이 없었지만, 단 한 여성의 침실에만 완전히 빠져 살게 되었다. 아자이 가문[浅井家] 출신으로 어렸을 때의 이름을 챠챠[々], 토요토미 가문에 들어와서 처음엔 니노마루도노[丸殿]라 불리며, 결국에는 요도도노[淀殿]라 불리게 된 여성이었다. 그 미모는 물론이거니와 요도도노의 혈통만큼은 히데요시가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네네는 깨닫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비천한 몸에서 출세를 했기 때문인지 귀한 가문에서 자란 여성에 이상할 정도로 동경을 품고 있었으며, 그것은 지금의 신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아직 낮은 신분이었을 때, 당시의 위치로써는 오다 가문의 하급 무사를 양갓집으로 하고 있는 네네가 그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자의 동경이라는 것은 나이를 먹어도 성장하지 않는 듯하군
 
하고 네네는 오히려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귀족을 좋아한다고 하여도 무가(武家) 귀족 만으로 상급귀족[公卿]이나 친왕(親王)의 딸 등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상급귀족이나 친왕의 딸들을 후궁에 데려오려고 하지도 않는 것은 그런 귀족들을 히데요시가 아직 젊었을 적에는 본 적도 없었기에, 현실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의 성적인 동경은 젊은 시절 눈으로 스친 범위 안을 한계로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히데요시의 가까운 무가 귀족은 오다 가문[織田家]이었다. 그 즈음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지금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노부나가[信長]의 일족만이 최고의 귀족이었으며, 그 피를 잇는 여성이야 말로 히데요시에게는 공주님이라 불리기에 어울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 즈음 오다 가문에는 오이치[市]라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이 있었다. 미모를 따지면 가까운 지역에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의 용색을 가지고 있어기에, 히데요시도 맘 속으로는 높은 곳의 꽃이라도 쳐다보는 듯이 사모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오이치는 오다 가문에서 북() 오우미[近江]의 다이묘우[大名]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 정세가 변하여 아자이 씨는 오다 가문에 멸망 당하여고, 오이치는 딸들을 데리고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재혼하였다. 그 카츠이에를 히데요시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에 몰아넣고 멸망시켰을 때 오이치도 자살했다. 남겨진 딸들은 '우다이진[右大臣=오다 노부나가']님의 조카분들 이다'고 하며 소중히 다루고 교육시켰다. 그 세 명의 딸 중 장녀가 요도도노였다. 그녀를 오오사카 성[大坂城] 두 번째 성곽에서 살게 하였기 때문에 '니노마루도노[丸殿]'라 통칭되었는데, 그 즈음에 요도도노가 히데요시를 받아들였는지 어땠는지는 네네에게도 알 수 없었다. 네네가 추측하기에 요도도노가 히데요시를 그 침실에 받아들인 것은 큐우슈우[九州]에서 개선 후인 1588년 가을 즈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증거로 이 해 즉 1589 1월 히데요시는 갑자기,

 요도()에 성을 만들겠다

 라고 말을 꺼내 그 건축을 동생인 야마토 다이나곤 히데나가[大和 大納言 秀長]에게 명하였다. 요도는 야마시로[山城]에 있으며, 오오사카[大坂]에서 쿄우[京]에 올라갈 때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거기에 요도도노를 살게 하겠다고 하였다. 측실을 위해서 성 하나를 세운 예는 지금까지 히데요시에게 없었던 것으로, 그만큼 이 여성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굉장한 일이군요

 라고 네네는 그것을 들었을 때,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히데요시는 목을 움츠리며 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들었는가?”

 마치 남일을 딴사람이 들을까 두렵다는 듯한 그런 말투였지만, 얼굴만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이 애교로 가득 찬, 악의를 완전히 없애버린 웃는 얼굴에 네네는 몇 번이나 속아 넘어왔던 것일까? 어쩌면 반평생을 웃는 얼굴에 낚여서 보내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건 주인댁이시다

 라고 히데요시는 힘을 실어 말했다. 보통의 측실이나 여관(女官)들이 아니라 노부나가의 조카인 이상 주인댁이다. 주인댁이기 때문에 각별한 대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의리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주인댁인 것입니까?”

 노부나가에게서 보면 여동생의 딸이었다. 여동생의 딸까지 주인댁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주인댁이다

 히데요시는 근거를 들었다. 1583 4 23.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서의 옛 동료 시바타 카츠이에를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로 몰아넣었을 때, 카츠이에는 결국 싸움을 포기하고 자살하겠다는 뜻을 히데요시에게 통고하였다. 그때 토미나가 신로쿠로우[富永 新六郎]라는 가신을 히데요시의 진영에 파견하여,

 여기 세 명의 딸이 있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들이다. 귀하도 알고 있겠지만 3명은 돌아가신 주군과 같은 피를 잇고 있으니, 귀하에게 있어서도 주군의 혈통에 해당한다. 필시 귀하라면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귀하의 진영으로 보낸다.”

 고 입으로 전해왔다. 히데요시는 당연히 카츠이에의 희망을 받아들였다. 이 때 [주군의 혈통]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요도도노와 두 명의 여동생이 히데요시 주군의 혈통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 이미 공시되었고 공인되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네네에게 그 전말을 이야기하며, 그에 따라 요도도노에게 행하는 각별한 대우에 이유를 붙이고자 하였다.

 그건 당연히...

 죽은 노부나가인 것이었다.

 알겠습니다만

 하고 네네는 말하며 턱을 끌어서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이상 이 호색한을 몰아넣어보았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힘이 빠져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의 핑계로는 그녀의 이성도 감정도 납득은 할 수 없었다.
 
주군의 혈통이기에, 즉 그렇기에 밤마다 그 여성의 침실에서만 보내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라는 점을 언제나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죠우도노나 카가노츠보네도 그 점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들은 네네의 방에 놀러 올 때마다 자란 환경에 비하면 이외라 할 정도로 노골적이게 험담을 하였다. 물론 히데요시에 대한 험담이 아니었다. 요도도노에 대해서였다.
 
요도도노는 자신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다거나, 콧대가 높아서 히데요시님에게 대해서도 거만하다거나, 요도도노 소속 시녀(侍女)의 수는 밥짓는 여자까지 포함하면 500명은 될 거라는 거나, 또 요도도노는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卿局]나 쇼우에이니() , 예전 아자이 가문을 섬겼던 여자 낭인(浪人)들을 너무 모으고 계십니다 등, 그러 종류의 험담이었다.

 저런~저런~”

 네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안색도 바꾸지 않고 끈기 있게 잘 들어주고 있었다.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녀들에게 동조했다가는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이라는 자신의 입장과 체면을 손상시킬 것이다.

 우선은 화를 푸시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켜 보아 주세요.”

 라고 네네는 때때로 그녀들을, 그녀들의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달랠 수 밖에 없었다.
  1. 1583년. 정이위(正二位). [본문으로]
  2. 방춘(호우슌=芳春)에는 ‘아름다운 여성의 젊은 시절’이란 뜻이 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막부[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죽자 비구니가 된 그의 부인 호우죠우 마사코[北条 政子]가 아직 어린 쇼우군[将軍]의 정무를 대행했던 예가 있어, 이후 성주 혹은 다이묘우[大名]였던 남편이 죽고 후계자가 어려 미망인이 권세를 가졌을 때 ‘비구니 쇼우군’이라 일컬어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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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eomin61 BlogIcon 푸른하늘 2008.03.16 13: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너무 좋은 글이라 불펌해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 같네요. ㅎㅎㅎㅎ
    그런데... 이런 좋은 콘텐츠가지고 계시면서 네이버 블로그에 남아있을 필요가... 있나요?
    티스토리 같은데로 독립해 보지 그러세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6 15: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른하늘님 오셨군요 ^^
    방문 감사드립니다. 네이버에도 좋은 분들은 많으셔서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16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역시나 요도도노는 참 인기가 없으시군요(-_-;;) 뭐 제가 봐도 아버지의 원수에게 잠자리를 허락하면서 썩 건실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긴 힘드리라 생각은 했지만서도.. 아무래도 요도도노 그 개인의 자질의 문제이려나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6 2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싹싹했더라도 역시 미움받지 않았을까요? 이건 행동의 문제라기 보다는 질투라는 정신적인 문제이다 보니 그 때가서는 또 다른 것을 가지고 꼬투리잡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3.17 0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총애 측면에서는 마츠노마루나 카가씨가 더 뛰어났는데도 요도기미만 유독 두번이나 수태한걸 보면 역시 의심스럽지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7 2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治長)랑 칙폭해서 나은 거 같기는 하지만....
    히데요시는 그 전에도 (실존은 불분명하지만) 1남1녀를 가진 적도 있은 만큼 단정은 지을 수는 없는 것 같더군요.
    요도도노만 임신한 것도 그녀가 난자를 많이 배란할 수 있는 몸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현재도 임신 유도제 같은 것을 먹을 경우 쌍동이 낳을 확률이 높다고 하니까요).

  7. 이노센스 2010.02.13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도시이에의 아내인 마츠의 법명은 일본어로 호슌인이라 읽습니다. 난코보 덴카이처럼 승려의 이름이나 은거 이후의 자호는 대개 음독으로 읽는다는 이 점 참고하시면 더욱 매끄러운 번역이 되시리라봅니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99년 윤 3 3 병사 62

1538 ~ 1599.

오와리[尾張] 아라코[荒子] 성주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昌]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전공을 세웠고,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따르며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영지를 받아 '카가 백만석[加賀百万石]'의 기초를 쌓았다.









히데요시의 말벗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출생 후 1년 뒤인 1538년에 태어난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보다 1년 더살아 1599년에 62세로 죽었다. 히데요시와 산 시간이 거의 겹치는 토시이에의 인생은 좋건 나쁘건 히데요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말년 히데요시 정권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1591년부터 토시이에의 존재는 무게감을 더해 갔다.


 1591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가 병사했으며, 센노 리큐[千 利休]가 할복하였다. 정권의 중추에 있던 두 사람을 잃고 계속해서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일찍 죽어버리는 불행을 맛 본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오토키슈우[伽衆]에 임명하여 공과 사에 걸쳐 상담 상대로 하였다. 이 때 토시이에 54.


 다음 해인 1592년.

 히데요시의 조선 출진에 토시이에는 병 8천을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 길어지고 있던 진중 생활에 살기(殺氣) 어린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사이를 중재하고 가난한 시골 다이묘우의 뒤를 보아주는 등 남을 잘 살펴주는 인품을 발휘했다. 이때 함께 했던 측실인 치요가 임신하여 후에 3대 번주가 되는 4남 토시츠네[利常]를 낳았다.


깊어지는 히데요시와의 친밀도


 토시츠네가 카가 카나자와[金沢]에서 탄생한 1593년.

 히데요시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아이 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났다. 이 히데요리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을 물려주고 있던 조카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와 그의 일족, 파벌을 멸하였다. 그 직후 모든 다이묘우는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온 천하에 인식되었다.


 히데츠구와도 친했던 토시이에였지만 히데요시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후견인[=傳役]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모든 다이묘우[大名] 중에서 유일하게 항상 수도권[上方]에 머물면서 후견을 맡는 큰 역할이었다. 육친조차 믿지 않던 독재자도 토시이에의 '의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양녀가 된 토시이에의 딸들과의 2, 3중으로 엮어진 연도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은 그러한 친밀함을 우려하여 이에야스나 토시이에 둘 다 야심이 많기에 언젠가 둘이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예언은 반은 적중했지만 반은 빗나갔다.


 1598 8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에야스, 토시이에 등 대로와봉행(五奉行)들에게 계속해서 후사를 부탁한 히데요시가 죽자 곧바로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토시이에였다. 이때 토시이에도 또한 병들어 있었다. 조선과의 평화 교섭으로 일본에 와 있던 명()심유경(沈惟敬)에게 지속성의 독을 히데요시와 함께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퍼지는 등 병증의 악화가 매우 빨랐다.

 이 때문에 토시이에는 이미 가독(家督)을 토시나가[利長]에게 물려준 은거료 15천석의 신분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유언을 무시하며 여러 다이묘우와 혼인을 맺으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다이묘우들도 양 쪽으로 나뉘는 큰 소동으로 발전했지만,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연을 맺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들의 노력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의리 있는 사나이의 평범한 죽음


 1599년 정월.

 토시이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를 만나 화해를 의한 회담을 가졌다.


 3 8일에는 이에야스의 답례 방문이 이어졌다.

 토시이에는 괴로운 숨소리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토시나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이에야스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은 이때 이에야스를 죽이고자 했지만 가신들이 반대했다고도 토시나가가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토시이에에게는 이미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3 15일. 죽음이 가까워 짐을 안 토시이에는 자잘하고 상세하게 유산 분배를 하였다.


 3 21일.

 머리맡으로 정실인 마츠를 불러 토시나가에게 보내는 '유훈 11개조[遺戒十一箇条]'를 필기시켰다. 앞으로 3년간 토시나가는 본거지 카가[加賀]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병사 1 6천을 카가[加賀]와 오오사카[大坂]에 둘로 나누어 주둔시키고 모반의 징조가 있으면 합류해서 싸우라며 마지막까지도 히데요리를 걱정하였다.


 10일 후.

 점점 더 중태에 빠졌다. 마츠가,
 
"당신은 예전에 싸움터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에 갔을 때를 대비해 이것을 입어주세요"
 라며 준비한 경문이 쓰여진 수의를 입으라고 하자 토시이에는,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힌 적은 없다. 때문에 난 죄가 없다. 죄가 없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만약 지옥의 염라대왕이나 도깨비들이 날 얕보고 괴롭힌다면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 우리 가문의 용사들을 이끌고 그 곳을 정벌하겠다"
 
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윤 3 3일.

 마츠와 토시나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센고쿠 무장[戦国武将]치고는 드문 평범한 죽음이었다.

  1.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타카[忠隆]와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世]는 부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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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overmint BlogIcon 한걸음씩 2006.07.28 2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갈게요... 정말 잘 쓰셨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edge7744 BlogIcon 우에스기 2006.08.08 1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갔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oisiimir BlogIcon 유코유코 2006.08.13 0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지나가다 한마디 적고 갑니다. 말년에 이에야스 암살계획 시 직접 이에야스를 베겠다고 자청한 자가 바로 토시나가입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oisiimir BlogIcon 유코유코 2006.08.13 0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히려 봉행자(미츠나리 등)들과 이에야스 사이에서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던 사람은 토시이에였습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08.13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오히려 전 유코유코님의 토시나가 주도설을 처음 듣는군요. 토시나가가 그렇게 과감했다면, 토쿠가와 막부가 아닌 마에다 막부가 들어섰을 것 같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lovenoran BlogIcon 럽노란 2006.10.09 1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가 딸 치요가 결혼한 사람은 호시카와 타다타카 였습니다. 타다오키의 아들입니다. 타다오키의 부인은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 부인이었구요~ 세키가하라 이후 치요히메는 호소카와 가로부터 이혼당합니다. 하지만 타다타카는 아버지의 이혼 명령을 납득하지 못한채 이혼후에도 교토에서 치요히메랑 몇 년간 함께 살았다고 하더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10.09 2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럽노란'님의 말씀이 맞군요.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입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l91768 BlogIcon 이번에는 2007.06.16 1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라고 좋게 말을해도 우리입장에서는 국토를 유린하고 인구의 1/3이상이 죽었으며..10만명가량이 포로로 끌려간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정권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이죠..내가 일본사람이었다면 뭐..조금은 멋있었다고도 생각할수도 있으나..한국인의 입장에서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6.16 17: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시각에서의 주장 고맙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군요. 종국엔 토요토미 정권의 유지에 필요한 세금을 낸 일반 시민들 까지도 모두 미워해야 할테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l91768 BlogIcon 이번에는 2007.06.25 0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인전체를 미워한다는 시각이 아니라..특정정권의 중심인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위에 자료는 정말 좋은 자료인것은 분명하나..저건 분명 일본인의 시각에서의 역사적사실이니까요..토시이에라는 인물이 임진왜란때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는데..위의 자료 이상의 자료는 찾을수가 없네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oir3197 BlogIcon 누와르 2007.08.02 16: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토시이에와 마츠를 보면서 알게?榮쨉 주인공이라 그런지 호감도가 팍팍 상승하더군요.. 히데요시에게 이런 멋진 가신이 있었다니..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02 2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케일이 워낙 커진 토시이에다 보니, '가신'이라는 말씀에 위화감이 드는군요. ^^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830922790210 BlogIcon 830922790210 2008.06.28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토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함께 임진왜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시대 통일 후, 즉, 도요토미 정권의 모든 무장이 전부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지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들은 정권의 정점에 있던 대명(다이모)들보다 전국시대 이후 공적을 세울 수 없어 출세할 수 없게 된 일반 무장들의 참전이 더 많았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의 경우는 도요토미와는 오다 노부나가의 근습이였던 시절부터 친구라고는 하나 그의 유언장을 보면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향수는 없고 오다가의 가신이었을 때를 회상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이 오다 노부나가에 더 향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 다 차치하고도 일단 한국사람인지라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호감도 상승입니다...;;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1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음, 굳이 변명하자면 전 황금왕보다는 오다가 좋다는... 그쪽으로 좀 더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토시이에의 유훈의 내용에 대해서도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만은 이에야스에게 남긴 말 중에 몇가지만을 기억할 뿐...;; 도쿠가와라는 둥 도요토미라는 둥 떠드는 소리가 만연한데 지나간 도요토미에 몰중에서 도쿠가와를 무시하는 자나 반대로 도요토미를 무시자들을 멀리하라라던지, 전국시대의 유물을 계승하지 말고 천하인으로서 신도나 불교, 상업과 외교 가능하면 크리스찬도 포용하라고 했다든지 말년에 병으로 인해 누워만있던 토시이에의 식견이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히데요리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진정 도요토미가를 생각한 장은 도시이에 뿐' 이라는 말도 전해지는 것 같고 말이지요. 정말 개인적으로는 전국시대 당시 오다가의 수하에서 함께 싸우던 이누(犬)와 사루(猿),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와 키노시타 토오키치 시절까지가 제가 좋아하는 기간이랄까...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했을 당시부터 지략가로서의 기량을 더 펼치는 도요토미이지만 왠지 싫다는... 그것도 다 저 또한 갖고 있는 전국시대 오와리에서부터 시작한 오다가의 향수랄까요...;;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1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끔없는 이야기 입니다만...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의 무기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아무리 찾아도 도요토미에게 하사받았다라고 해야할까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여하튼 현재 일본 국보로 마에다육성회에서 소지하고 있는 오오텐타 미츠요(大典太 光世)라는 칼에 대해서만 나올 뿐 애용했던 창의 이름이랄까 하는 것은 없더군요. 혹시 아신다면 리리플 부탁드리겠습니다...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2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변명을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측면을 살펴 보는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근거로 한 가지만을 가지고 내세워서는 조금 그렇지 않나? 라는 뜻에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글쎄요. 저도 아는 것이라고는 그 천하오검의 하나인 오오텐타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토시이에 정도의 인물이 어떤 한 무기에 구속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오오텐타는 미술품일 뿐이고).

  1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2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나가다님... 의견 감사드립니다. 다만 출세할 수 없게 된 일반 무장들 보다는,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이 원정에 나섰다고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말씀하신 토시이에의 유훈(遺誡11か条)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위키는 그렇게 쓰여 있는 듯 합니다만).
    히데요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고, 난이 일어날 때의 대처 등이 쓰여있으며, 노부나가에 대한 것은 '공격시는 무조건 침공! 자국에서 방어 즐~. 노부나가공은 한 번도 자국내에서 합전을 한 적이 없다'인데, 그 외는 합전 시의 마음가짐, 중신과 공신에 대한 처우와 평가 등인데 이걸로 노부나가만 짱, 히데요시 그냥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위키는 개인적인 감상이 개입될 수 있는 백과사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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