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던 불교의 중이 쿄우토[京都]를 방문했다. 그는 굉장한 사기꾼에 변설이 뛰어났지만 위대한 설교자로 유명하며, 더할 나위 없이 거만한 자세에 모든 불승(佛僧)의 통념을 파괴하는 극도로 특이한 중으로, 이름을 무헨[無辺]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무한(無限)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본 전국에 그 이름을 떨쳤다.

어떤 사람은 그가 기적을 행한다고 말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무헨이 마음 속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며 마음 속 비밀을 파헤친다고 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무헨에게 모여들었다. 무헨을 한 번 보고 그의 의상에 입맞춤하고자, 무헨의 숙소에 대군중이 모여들어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다.

원래 노부나가[信長]는 과도하게 기이한 짓을 뽐내는 자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며 또한 노부나가 자신 역시 거만하였기에,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노부나가의 영내(領內)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하였기에, 예전부터 무헨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무헨과 사자이보우[栄螺坊]라는 – 무헨을 자신의 처소에 숙박시키고 있는 다른 중과 함께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출두한 무헨을) 꿰뚫어지도록 쳐다본 뒤,
(너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무헨은 단지 “무한[각주:1]“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노부나가는 “중국, 시암 어느 쪽 사람인가? 하고 신문했다.
무헨은 자신이 순례하고 있다고 하였다.
노부나가는 “모든 인간은 일본, 중국, 인도가 아니면 안 된다. 너가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분을 알려고만 하면 곧바로 알 수 있으니 어서 말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무헨은 “반도우 지방[坂東地方]인 데와[出羽]의 하구로[羽黒] 출신입니다”라고 말하였다.(확실히 이곳은 악마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각주:2]이다).
노부나가는 이에 답하여 말했다. “나는 이 자가 사기 치는 것을 좋아하는 요술사라고 예전부터 너희(가신)들에게 말하였다. 이 놈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출생지도 거주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을 (일본의 옛 중인) 코보 대[弘法大師]라고 선전하며, 남들이 준 그 어떤 것도 받지 않고 자신에게 욕심이 없다며 받은 것들을 숙박했던 집에 놓고 간다 – 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 이 놈은 항상 같은 집에서만 머무는가? 나는 그것을 물욕이 없기에 하는 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은 받은 물건들을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한 잔꾀이다. 무헨 너는 기적을 행한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내 앞에서 행해보거라”
고 하였지만 무헨은 기적의 ‘기’자도 보이질 못했기에,
노부나가는 “기적을 행하는 인간은 본성, 마음가짐, 눈의 움직임, 표정에서 그가 가진 덕을 나타낸다. 그러나 너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꾼보다도 천하며 야비하다. 너는 무지한 부녀자들을 속여 너가 통과하는 지역이나 마을에서 돈을 쓰게 만들고, 불쌍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있다. 그건 정말 악한 일이다”고 말하고선 가신들에게 “너희들 어서 이 놈을 혼내주거라”고 말했다.

무헨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조금 구타 당하고, 길고 아무렇게나 길렀던 머리를 빡빡 깎인 뒤 목줄에 매여 거리를 돌게 하는 불명예를 안겨준 뒤 도시에서 쫓아냈다.

나중에 노부나가는 또다시 무헨이 여전히 사기를 치며, 밤중에 남녀가 무헨을 방문하고, 무헨이 병든 여성들을 낫게 한다며 주술을 부린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명령이 엄격히 지켜지길 바라는 노부나가는 모든 길에 보초를 배치하여 무헨을 잡도록 명령하여 무헨이 잡히자 곧바로 참수시켰다. 이교도들은 노부나가가 무헨을 죽이는 것에 약간의 공포를 느꼈지만, 무헨이 죽고 난 뒤 그가 행했던 위선과 사기를 알려짐에 따라, 노부나가의 굉장히 사려 깊은 행위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각주:3] 제2부 29장


무헨에 대해서[無邊の事]

3월 20일. 무헨이라는 행각승이 이시바 사[石馬寺]의 사자에보우[栄螺坊]의 처소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다. 자주 기이하고 특이한 술법을 부린다고 한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만큼의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술시의 비법[丑の時大事の秘法][각주:4]’을 전수받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절의 문 앞에 모여있다고 한다.

노부나가 공[信長公]은 무헨에 대한 소문을 평소 자주 들으셨는 바, 무헨을 만나보고 싶다 말씀하셨기에, 사자에보우는 무헨과 함께 아즈치로 왔다. 곧바로 마구간으로 행차하셔 이곳에서 무헨을 천천히 살펴보시더니 평소 생각하던 모습과 같더라.

(노부나가가) 행각승의 태어난 곳은 어딘가? 하고 물으시자

(무헨은) 무변(無邊)이라고 답했다.

(노부나가가) 다시 묻네만 중국인인가? 천축인인가? 하고 거듭 물으시자

(무헨은) 단지 수행자일 뿐, 이라고 답했다.

(노부나가는) 인간이 태어나는 곳은 중국, 천축, 일본 밖에 없는데도 그 외라고 하니 참으로 수상하구나. 그렇다면 네 놈은 틀림없이 괴물이겠구나. 그렇다면 불로 지져버리겠다. 여봐라 불을 이리 가지고 오너라. – 라고 명령하시자,

그 말에 겁이 난 무헨은, 데와[出羽]의 하구로[羽黒]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더냐? 여태까지 태어난 곳도 없고, 사는 곳도 없다면서 속였다. 또한 불법을 널리 퍼트린다(弘法)고 떠들고 다니며, 욕심이 없다면서 사람들이 물품을 주면 받아서 자신이 머무는 곳에 두면서 계속 그곳만 이용하는 것은 일견 욕심 없이 보이겠지만, 반대로 이는 무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이한 술책을 행할 수 있다고 하니 그 기이한 짓을 보여 보거라 – 고 명령하셨지만 무헨은 전혀 하지 못했다.

(노부나가가 말하길) 대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용모에서 안색까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 네놈은 산적만도 못하다. 여자나 아이들을 속이고 내 영지에서 그들의 돈을 갈취하다니 참으로 괘씸하도다. 이놈에게 창피를 주어라 – 고 명령하셔서, 긴 머리를 가위로 군데군데 자르고 나체로 만들어서는 끈으로 묶어 조리돌림을 한 뒤 아즈치에서 추방하였다.

또한 나중에 노부나가는 무헨이 어찌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으셨는데, 여전히 술시의 비법을 전수한다거나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 또는 병에 걸린 여성 등에게 ‘배꼽비교’라는 것을 행한다고 하였다. “미래를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노부나가 님 직할지와 휘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명령을 내려 잡아들이도록 하여 잡히자 심문 후 처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헨을 머물게 했던) 사자에보우에게 “어째서 아즈치 근방에 저런 종자를 머물게 하였는가?”하고 물으시자,

“이시바 사의 본당에 비가 새, 그것을 수리하고자 권선(勸善)을 위해서 잠시 머물게 하였습니다”고 말하자,

노부나가는 이 돈으로 절을 수리하라며 은자 30매를 하사하셨다.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 신장공기(信長公記)[각주:5] 권13[각주:6]


개인적으로 기독교 프로이스의 이교도를 바라보면서 쓴 서술과 일본인 오오타 규우이치의 서술의 차이가 재미있었습니다.
거기에 배꼽비교...라는 은근 성적인 표현을 프로이스가 알면서도 안 썼는지 혹은 몰랐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의 세계사상인 중국, 천축, 일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천축(인도)를 시암(태국)이라 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또한 무헨이 칭했다는 것이 정말 프로이스의 기술대로 일본의 옛 승인 '코우보우 대사[弘法大師]'인지, 아니면 일본의 연구자들이 말하는대로 '불법을 넓힌다(弘法)'으로 쓰인 것인지도 궁금.
또한 그 후의 처방에서 프로이스는 기술 안 했지만, 오오타 규우이치의 기술에는 나오는 절의 수리비를 주는 노부나가의 모습은 나름 츤데레?

ps:...노파심 삼아 추가합니다만, 이 기술만으로 노부나가가 불교를 억압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노부나가가 싫어했던 것은 있지도 않는 것으로 남들을 현혹시키는 사람 혹은 단체를 혐오하고 벌을 주었을 뿐입니다.
  1. 포르투갈어로 infinito라 쓰여 있다 함 [본문으로]
  2. 하구로는 슈겐도우[修験道]의 수행장이다. [본문으로]
  3. 현대어역은 추오우코우론 사[中央公論社], 마츠타 키이치[松田毅一] 선생의 것을 이용. [본문으로]
  4. 술시는 오전 2시 즈음. 그래서 프로이스의 기록에 무헨의 처소로 밤중에 남녀가 찾아간다고 나온다. [본문으로]
  5.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마치다 판[町田版]을 이용 [본문으로]
  6. 신장공기 권13은 1580년의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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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07.22 1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머리빨로 만들어냈던 권위가 머리를 깎인뒤에 사라졌다는 점에서 삼손씨와 비슷한 스토리진행처럼도 보이는데요, 그런 성경적(?) 해석의 프로이스씨와는 다르게 신장공기쪽은 한국 중고딩들 두발단속하듯 몇군데에 고속도로를 내버렸다며 적어놓은걸 보면...

    같은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느껴집니다(;!)(어이쿠 이게 아니려나..)

    어휴 요샌 그나저나 꽤 덥군요.. 발해지랑님도 이래저래 건강 신경쓰며 잘 보내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22 1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깍인 다음에도 여전히 배꼽비교를 하고 다닌 것을 보면, 여전히 권위는 살아있었던 듯.

      그차이가 재미있더군요. 악마라던가, 노부나가에게 거만하다는 수사를 붙여 놓는다거나..

      그러게요. 많이 덥군요. 규피님께서도 夏バテ가 되지 않도록 많이 그리고 잘 드시길 비옵니다.

  2. 정동희 2011.07.25 1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나가를 보면 중세를 넘어 근대적인 합리인이란 생각이 듭니다
    종교를 억압했다기 보다는 부처를 등에 업고 혹세무민하는 자들을 싫어했다고 생각하구요
    요즘도 이렇게 되도 않는 짓거리 하면서 예수나 부처를 팔아 제 욕심 챙기는 놈들이 있는데
    노부나가 처럼 불러다 때리고 창피를 줬으면 좋겠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25 1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장공기에서도 노부나가가,
      "미래를 위해서다(先々までの爲めにて候)"라고 했듯이, 나중을 생각한다면 위정자는 분명히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합습죠. 다만...국내 정치가들은 정치꾼이다보니, 눈 앞의 표가 더 중요하지 나라의 미래 따위...

      여담으로...
      지금의 일본에서도 노부나가만한 리더가 없다면서, 미래를 위해서라면 당장의 비난 같은 것은 감수해야 하는데 그런 인물이 없다면서 투덜대더군요.

  3.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7.25 18: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꼭 글을 쓰면 그 글의 요지는 안 읽고 엉뚱한걸 찾는 부류가 더러 있는데, 오늘은 제가 그러한 형국이었습니다. 저 글을 읽자마자 다른건 안 떠오르고 손책과 우길이 떠오르더군요(..) 우길 역시 무헨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리는 참화를 피하지 못하였으며 손책과 노부나가 역시 폭력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이 자꾸 떠오르는 덕분에 글을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손책의 모습이 그러했지만 노부나가 역시 자신의 위에 누군가가 선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인것 같습니다. 요시아키는 이것을 빠르게 파악했던 듯 합니다만 말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프로이스는 무헨과 노부나가의 대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확실한 파악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노부나가의 세계관에서 왜 조선은 빠져있었던 것일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25 2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군요. ^^
      못 보던 것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만 손책은 멸망시킨 적의 세력에 죽고, 노부나가는 자신의 부하에게 죽었으니 동일하게 보기에는 좀....
      ( 거기에 저는 노부나가가 동시대 일본의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포악하다거나 폭력적인 면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 서는 것에 이것도 포함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노부나가의 경우 텐노우의 권위를 세워주는 편이었습죠. 가령 조정이 노부나가에게 관백, 태정대신, 장군...셋 중 원하는 것에 되시오...라는 삼직추임문제[三職推任問題] 때 조정의 칙사를 만나는 문제에 있어서, 너무 급작스러운 말이라 답변을 미루어야 하는데 그래도 칙사를 만나도 되나? 라고 물을 정도였습죠. 오히려 조정의 칙사인 카쥬우지 하레토요[勧修寺晴豊]는 "어쨌든 우선 만나뵙고 싶다"고 할 정도로 절차를 무시하집요.

      직접 보지는 않았을테고 아마 노부나가의 가신들 중 누군가에게 들었을테죠.

      중화라는 문명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7.26 0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매일 가르침만 받아가서 적자나실까봐 걱정입니다. 좋은 지식 또 알아가네요.

      음식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ㅎㅎ

  4. Favicon of http://ndd247.tistory.com BlogIcon needled247 2011.07.31 2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공기의 한 부분을 볼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 그런데 신장공기는 어디서 번역된 걸 찾으셨나요? (아니면 직접 번역하셨나요?) 소설, 드라마 말고 제대로 된 일본전국시대 역사서를 한번 보고 싶은데, 번역된 책이나 온라인 도큐먼트 같은게 있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01 06: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계획 상으로는 전국무장 100이라는 책을 다 번역하고 나면 신장공기의 번역을 할 생각입니다.

      음... 아무래도 제 관심사가 일본쪽이다 보니 주로 일본에서 검색을 하는지라, 한국에서 일본측 역사서 등을 번역하는 분이 계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한분 계셨지요. 중간에 관두셨습니다만)

    • Favicon of http://ndd247.tistory.com BlogIcon needled247 2011.08.01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어를 잘 하시는군요. 부럽습니다^^

마쓰라 시게노부[松浦 信]

1614 5 26일 병사(病死) 66

 

1549 ~ 1614.

부친 타카노부[隆信]와 함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큐우슈우[九州] 정벌군을 따랐으며, 조선의 역[朝鮮役][각주:1]에서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수군 부대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영지(領地)히라도[戸]이키[岐] 등도 영유(領有)하며 초대 히라도[平戸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적남(嫡男)의 갑작스런 죽음

 

 히젠[肥前] 히라도 번주 마츠라 시게노부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의 다음 해인 1601년에 53세에 은거하여, 적남(嫡男) 히사노부[久信]에게 히라도 번()을 잇게 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때 시게노부는 아들 히사노부를 쿄우토[京都] 후시미 성[伏見城]을 수비하도록 출진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현해탄에 배를 띄어놓고서는 거의 마지막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각주:2], 전쟁이 끝난 뒤 토쿠가와 가문[家]에게서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3]

 

 그러나, 사태는 급변하여 1602년 가을 갑자기 후시미[伏見]의 마츠라 저택에서 번주 히사노부가 급사(急死)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게노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히사노부의 급사에 관하여 번의 기록인 『가세전(家世伝)』에는, '후시미(伏見)에서 치질에 걸려 8 29일 죽다. 향년 32'라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다른 가보(家譜)에는 '할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저하면서 어느 쪽에 붙을지 망설이던 부친 시게노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는 며느리이며 히사노부의 부인 쇼우토우인[松東院]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은 마츠라 씨[松浦氏]와 오오무라 씨[大村氏]가 서로 다투었던 시기에 양 가문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 마츠라 가에 시집 온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의 딸로 이름은 소노였다.

 소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 도나 메시아), 시집올 때 배교(背敎)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부인이 된 쇼우토우인은 첫째 아들을 비밀리에 세례 받게 하였고, 히사노부의 세례마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열심인 모습은 곧바로 선교사들간에 널리 알려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가라샤 타마코[ガラシャ 玉子][각주:4]와 함께 칭송받았다. 또한 시아버지인 시게노부의 계속된 개종 요구에도 신을 버리는 것 보다 천 번의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프로이스의 일본사[フロイスの日本史]』

 

 이러한 사정이 번주 히사노부의 할복에 영향을 끼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히사노부가 죽은 다음 해인 1603년 손자인 타카노부[隆信]를 데리고 순푸[駿府]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알현하고나서야 3대 번주로 인정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성[居城] 카메오카 성[城] 불타오르다.

 

 3대 번주 타카노부의 뒤를 봐주면서 주로 남만무역(南蠻貿易)[각주:5]에 전념했다.

 이미 부친 타카노부[隆信][각주:6] 때부터 '하비에르'나 '루이스 프로이스'를 히라도에 초대하는 등 무역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609년에 네덜란드의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613년에는 영국 배도 입항하여 성 밑 마을[城下町]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의 거점이 1641년에 나가사키[長崎][각주:7]로 이전되기 전까지 30여 년간 히라도에서 사키카타 쵸우[崎方町]부두(埠頭)를 만들고 상관이나 주택을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일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즈음 히라도에는 남만인(南蠻人)[각주:8]들에 더해 수 많은 상인들이 모였기에 서국(西国)[각주:9]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어 번영의 극을 달했다.

 

 그러나 1613 10 3일 밤.

 시게노부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1599년에 새로 축성한 거성 카메오카 성[亀岡城][각주:10]에 불을 질러 무너뜨렸고, 다음 해인 5 26일에 의사 타케노 소우후우[武野 宗楓]의 간병을 받는 중 66세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가세전[家世伝]』

 

 이 사건은 자살한 아들 히사노부의 망령에 괴로워하다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건의 진상(眞相)은 무역 이익을 독점하던 것과 나아지지 않고 있던 기독교 금지령에 있지 않았을까?

 혹독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히라도 번[平戸藩]에는 이키츠키[生月] 등 영내(領內)의 섬들에 많은 신도들이 숨어있었고, 쇼우토우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에야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히라도 번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남만무역의 유지와 기독교 개종의 유예(猶豫)를 조건으로 거성을 불에 태워 없애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하극상의 센고쿠 시대부터 근세 초기의 혼란기까지 살아 남은 마츠라 시게노부.

 기독교 덕분에 철포(), 오오츠츠[大筒][각주:11]나 막대한 무역 이익을 손에 넣어 히젠[肥前] 서부(西部)의 패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 기독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신, 히라도의 상징이었던 카메오카 성[亀岡城]까지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쿄우 사[最教寺]에 있는 시게노부의 묘 - 히라도 시[平戸市]


  1.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2. 마지막에 동군에 서게 됨. [본문으로]
  3. 가독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선 용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가라샤는 세례명, 타마코는 이름. [본문으로]
  5.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말함. [본문으로]
  6. 시게노부의 손자와 부친의 이름이 똑같이 타카노부(隆信)이다. [본문으로]
  7. 에도 시대에는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8. 유럽인들을 말함. [본문으로]
  9. 쿄우토[京都]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을 지칭. [본문으로]
  10. 보통 히라도 성[平戸城]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11. 대포를 말한다고 하지만, 구경이 큰 철포를 지칭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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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4 17: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네요;;
    소우린에 비하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드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4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임진난때 건너온 사람이니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6 1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수군이었으면 신나게 깨졌겠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6 2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군이라고 해도 코니시 휘하의 1군단으로 함께 행동했을 테니, 이순신 장군과 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평양까지 함께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수군이라고 해도, 대마도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병력 수송 선단을 호휘하는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설마 일본도 경상도 수군이 그렇게 자멸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16 2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역 안당했으니 쇼린보다는 나은걸려나요(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7 0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명(家名)을 남기는 것이 의무로 생각하던 시대의 사람이기에 소우린 보다는 훠~씬 성공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마츠라 가문의 핏줄은 현재의 일본 황실과 연결되어 있을 정도니까요.(9대 번주 마츠라 키요시(松浦 清)의 손녀가 코우메이 텐노우(孝明 天皇)와 결혼해서 메이지 텐노우(明治 天皇)를 낳았으니까요)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87 5 23일 병사(病死) 58.

1530 ~ 1587.

이름은 요시시게[義鎮].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城主). 선교사 하비에르를 후나이[府内]로 초대하였고 후에 세례를 받아 이토우 만쇼[伊藤 マンショ] 등 텐쇼우 견구소년사절(天正遣少年使節[각주:1])을 로마로 파견했다. 큐우슈우[九州] 6개국을 지배했지만, 미미가와 강의 전투[耳川い]에서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패하여 쇠퇴(衰退)하였다.








신앙으로 인한 부부싸움.


 센고쿠[戦国]의 시대.
 오오토모 소우린의 전성기 때에는 붕고[豊後]를 중심으로 큐우슈우[九州]의 붕고, 부젠[豊前], 히젠[肥前], 히고[肥後],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의 슈고[守護][각주:2]에 임명 받았고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각주:3]도 병행해서 수행했다. 그러나 말년은 시마즈 씨()의 위협, 부인과의 싸움 건강 악화라는 고난으로 가득 찬 나날들이었다.


 소우린이란 이름은 불교인 선종()에 들어갔을 때 얻은 호() 원래는 요시시게라고 하였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으며 적자(嫡子)인 요시무네[義統[를 낳은 부인은 쿠니사키[東] 반도에 있는 나타 하치만 궁[奈多 八幡宮]의 대궁사(大宮司) 나타 아키모토[奈多 鑑基]의 딸이었다. 이 부인과 소우린은 자주 부부싸움을 하였다.


 젊었을 때의 소우린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남편을 죽이면서까지 남의 부인을 빼앗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그러나 나타 씨[奈多氏]라고 불린 부인과의 부부싸움 원인은 여성 문제가 아니었다. 부인은 해가 갈수록 소우린이 기독교에 빠져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소우린은 해외무역의 막대한 이익에 주목, 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권한을 가진 선교사와의 우호를 위해서 가신들 뿐만 아니라 혈연들에게까지 입교를 권했다.


 나타 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정은 대궁사(大宮司)를 하고 있으며 신도(神道)를 깊이 믿고 있던 나타 씨에게 있어 기독교는 사교(邪敎)였다.

 남편이 둘째 아들 치카이에[親家]에게 세례받도록 권한 것을 따졌으며, 또한 그녀는 자신의 친오빠 치카카타[親賢]와 함께 교회를 파괴하거나 선교사를 죽이려고 병사를 보내 크리스천 무사들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기에 부부 사이는 더 멀어졌다.


 선교사들은 이런 나타씨에게 이세벨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세벨이란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예언자를 추방한 여자였다. 프로이스의 [日本史] - 나타 씨는 행실이 좋지 못하였고 성격차이가 심했기에 소우린은 그녀를 혐오하였고 너무 고민한 나머지 병에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나타 씨의 시녀장(侍女長)은 병상에 있던 소우린을 정성껏 간호하였는데, 이 여성은 집안일을 다스리는데 뛰어났다. 소우린은 이 여자를 나타 씨의 저택에서 데리고 나와 세례를 받게 하여 '쥬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하였고 나타 씨와 이혼한 후 그녀와 결혼하였다. 1678년의 일로 소우린 49, 쥬리아 40세였다. 또한 소우린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순수하게 믿게 되어 결국 자신도 세례를 받고 [동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몰락의 시작


 이 즈음인 휴우가[日向]의 영유하고 있던 이토우 요시스케[伊東 義祐]가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에게 패해 도망쳐 와서는 소우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소우린은 침략자 시마즈를 쫓아내고 휴우가[日向]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고자 했다.


 처음에 해로를 택한 소우린은 배에 인도의 부왕(副王)에게 선물받은 붉은 십자가의 깃발을 앞세웠으며, 거기에 새로운 부인인 쥬리아 그리고 선교사들과 함께 휴우가[日向]로 향했다. 도중에 육로(陸路)를 택한 소우린은 가는 곳 마다 신사(神社) 절을 파괴하였으며 길이 험한 곳은 불상으로 메우면서 진격했다.

 오오토모 5만의 병사들 대부분은 기독교도가 아닌 신불을 믿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신불을 무시하는 소우린을 불신하여 사기는 낮아만 갈 뿐이었다. 또한 소우린은 시마즈를 경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도 커서 11월.

 7(里)[각주:4]의 산과 들에 2만이 넘는 시체가 널릴 정도로 미미가와 강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가신들은 신불이 내린 벌이라며 소우린을 비난하였고 이는 오오토모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기도로 보낸 은거생활


 가독(家督)을 물려주었던 적자 요시무네도 변변치 못하여 지역 호족들의 모반이 이어졌다.

 1586. 57세의 소우린은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큐우슈우[九州]로 군사들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마즈 씨의 압박은 계속 되어 우스키 성[臼杵城]이 포위당했다. 2문의 대포 '쿠니쿠즈시[国崩]'가 성 방어에 크게 활약했지만 성 밑 마을은 재로 변하였고 후나이[府内]도 불에 타고 파괴당했다. 이때 소우린은 전투 지휘는 물론 쥬리아 부인과 함께 영민(領民)들을 도우고자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농성에 의한 피곤으로 인하여 눈에 띌 정도로 쇠약해져 갔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에 와서 시마즈 씨를 쫓아 버렸다.

 그런 와중에 소우린은 자신의 남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츠쿠미[津久見]에 은거하며 쥬리아 부인과 함께 기도로 가득 찬 날들을 보낸다. 히데요시는 큐우슈우를 제압해 가는 도중에 소우린의 아들 요시무네에게 붕고[豊後]의 영지(領地)를 안도(安堵)해 주었다. 소우린은 안심했다. 또한 히데요시는 소우린에게 휴우가[日向]의 일부를 은거료(隱居料[각주:5])로 하사하려 했지만 사양하고 받질 않았다.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사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15일 후인 1587 5 23일.

 츠쿠미에서 쥬리아의 병간호를 받는 도중 58세의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렸다.

  1. 텐쇼우[天正]는 당시의 일본 연호. 이토우 만쇼, 치지와 미겔[千々石 ミゲル]의 정사(正使)와, 나카우라 쥬리안[中浦 ジュリアン], 하라 마르티노[原 マルティノ]의 부사로 구성된 사절단으로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왔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지던 지방관.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가 큐우슈우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의 장관. [본문으로]
  4. 리(里)는 길이의 단위, 약 4Km. 7리는 약 28Km. [본문으로]
  5.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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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3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앙으로 가정도 파탄나고, 민심도 잃고, 영지도 없애고, 수명도 단축하고 말았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3 1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죠.(아~ 정말 슬픈 일입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16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국붕..! 무려 오토모가 전용기술이건만 이런 슬픈 인연이..(;;)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7 0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름부터가 "나라 뭉개기".... 뭐 어느 쪽을 뭉개는지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만...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1.18 23: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도로 보낸 은거생활 부분에 년도가 잘못 된것 같아요. 1577년보다는 1586-1587사이 정도가 되겠네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0 1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컥~ 텐쇼우(天正) 14년이니 1586년인데.. 고맙습니다. 얼릉 고쳐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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