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던 불교의 중이 쿄우토[京都]를 방문했다. 그는 굉장한 사기꾼에 변설이 뛰어났지만 위대한 설교자로 유명하며, 더할 나위 없이 거만한 자세에 모든 불승(佛僧)의 통념을 파괴하는 극도로 특이한 중으로, 이름을 무헨[無辺]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무한(無限)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본 전국에 그 이름을 떨쳤다.

어떤 사람은 그가 기적을 행한다고 말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무헨이 마음 속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며 마음 속 비밀을 파헤친다고 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무헨에게 모여들었다. 무헨을 한 번 보고 그의 의상에 입맞춤하고자, 무헨의 숙소에 대군중이 모여들어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다.

원래 노부나가[信長]는 과도하게 기이한 짓을 뽐내는 자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며 또한 노부나가 자신 역시 거만하였기에,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노부나가의 영내(領內)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하였기에, 예전부터 무헨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무헨과 사자이보우[栄螺坊]라는 – 무헨을 자신의 처소에 숙박시키고 있는 다른 중과 함께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출두한 무헨을) 꿰뚫어지도록 쳐다본 뒤,
(너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무헨은 단지 “무한[각주:1]“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노부나가는 “중국, 시암 어느 쪽 사람인가? 하고 신문했다.
무헨은 자신이 순례하고 있다고 하였다.
노부나가는 “모든 인간은 일본, 중국, 인도가 아니면 안 된다. 너가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분을 알려고만 하면 곧바로 알 수 있으니 어서 말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무헨은 “반도우 지방[坂東地方]인 데와[出羽]의 하구로[羽黒] 출신입니다”라고 말하였다.(확실히 이곳은 악마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각주:2]이다).
노부나가는 이에 답하여 말했다. “나는 이 자가 사기 치는 것을 좋아하는 요술사라고 예전부터 너희(가신)들에게 말하였다. 이 놈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출생지도 거주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을 (일본의 옛 중인) 코보 대[弘法大師]라고 선전하며, 남들이 준 그 어떤 것도 받지 않고 자신에게 욕심이 없다며 받은 것들을 숙박했던 집에 놓고 간다 – 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 이 놈은 항상 같은 집에서만 머무는가? 나는 그것을 물욕이 없기에 하는 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은 받은 물건들을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한 잔꾀이다. 무헨 너는 기적을 행한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내 앞에서 행해보거라”
고 하였지만 무헨은 기적의 ‘기’자도 보이질 못했기에,
노부나가는 “기적을 행하는 인간은 본성, 마음가짐, 눈의 움직임, 표정에서 그가 가진 덕을 나타낸다. 그러나 너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꾼보다도 천하며 야비하다. 너는 무지한 부녀자들을 속여 너가 통과하는 지역이나 마을에서 돈을 쓰게 만들고, 불쌍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있다. 그건 정말 악한 일이다”고 말하고선 가신들에게 “너희들 어서 이 놈을 혼내주거라”고 말했다.

무헨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조금 구타 당하고, 길고 아무렇게나 길렀던 머리를 빡빡 깎인 뒤 목줄에 매여 거리를 돌게 하는 불명예를 안겨준 뒤 도시에서 쫓아냈다.

나중에 노부나가는 또다시 무헨이 여전히 사기를 치며, 밤중에 남녀가 무헨을 방문하고, 무헨이 병든 여성들을 낫게 한다며 주술을 부린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명령이 엄격히 지켜지길 바라는 노부나가는 모든 길에 보초를 배치하여 무헨을 잡도록 명령하여 무헨이 잡히자 곧바로 참수시켰다. 이교도들은 노부나가가 무헨을 죽이는 것에 약간의 공포를 느꼈지만, 무헨이 죽고 난 뒤 그가 행했던 위선과 사기를 알려짐에 따라, 노부나가의 굉장히 사려 깊은 행위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각주:3] 제2부 29장


무헨에 대해서[無邊の事]

3월 20일. 무헨이라는 행각승이 이시바 사[石馬寺]의 사자에보우[栄螺坊]의 처소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다. 자주 기이하고 특이한 술법을 부린다고 한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만큼의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술시의 비법[丑の時大事の秘法][각주:4]’을 전수받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절의 문 앞에 모여있다고 한다.

노부나가 공[信長公]은 무헨에 대한 소문을 평소 자주 들으셨는 바, 무헨을 만나보고 싶다 말씀하셨기에, 사자에보우는 무헨과 함께 아즈치로 왔다. 곧바로 마구간으로 행차하셔 이곳에서 무헨을 천천히 살펴보시더니 평소 생각하던 모습과 같더라.

(노부나가가) 행각승의 태어난 곳은 어딘가? 하고 물으시자

(무헨은) 무변(無邊)이라고 답했다.

(노부나가가) 다시 묻네만 중국인인가? 천축인인가? 하고 거듭 물으시자

(무헨은) 단지 수행자일 뿐, 이라고 답했다.

(노부나가는) 인간이 태어나는 곳은 중국, 천축, 일본 밖에 없는데도 그 외라고 하니 참으로 수상하구나. 그렇다면 네 놈은 틀림없이 괴물이겠구나. 그렇다면 불로 지져버리겠다. 여봐라 불을 이리 가지고 오너라. – 라고 명령하시자,

그 말에 겁이 난 무헨은, 데와[出羽]의 하구로[羽黒]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더냐? 여태까지 태어난 곳도 없고, 사는 곳도 없다면서 속였다. 또한 불법을 널리 퍼트린다(弘法)고 떠들고 다니며, 욕심이 없다면서 사람들이 물품을 주면 받아서 자신이 머무는 곳에 두면서 계속 그곳만 이용하는 것은 일견 욕심 없이 보이겠지만, 반대로 이는 무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이한 술책을 행할 수 있다고 하니 그 기이한 짓을 보여 보거라 – 고 명령하셨지만 무헨은 전혀 하지 못했다.

(노부나가가 말하길) 대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용모에서 안색까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 네놈은 산적만도 못하다. 여자나 아이들을 속이고 내 영지에서 그들의 돈을 갈취하다니 참으로 괘씸하도다. 이놈에게 창피를 주어라 – 고 명령하셔서, 긴 머리를 가위로 군데군데 자르고 나체로 만들어서는 끈으로 묶어 조리돌림을 한 뒤 아즈치에서 추방하였다.

또한 나중에 노부나가는 무헨이 어찌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으셨는데, 여전히 술시의 비법을 전수한다거나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 또는 병에 걸린 여성 등에게 ‘배꼽비교’라는 것을 행한다고 하였다. “미래를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노부나가 님 직할지와 휘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명령을 내려 잡아들이도록 하여 잡히자 심문 후 처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헨을 머물게 했던) 사자에보우에게 “어째서 아즈치 근방에 저런 종자를 머물게 하였는가?”하고 물으시자,

“이시바 사의 본당에 비가 새, 그것을 수리하고자 권선(勸善)을 위해서 잠시 머물게 하였습니다”고 말하자,

노부나가는 이 돈으로 절을 수리하라며 은자 30매를 하사하셨다.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 신장공기(信長公記)[각주:5] 권13[각주:6]


개인적으로 기독교 프로이스의 이교도를 바라보면서 쓴 서술과 일본인 오오타 규우이치의 서술의 차이가 재미있었습니다.
거기에 배꼽비교...라는 은근 성적인 표현을 프로이스가 알면서도 안 썼는지 혹은 몰랐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의 세계사상인 중국, 천축, 일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천축(인도)를 시암(태국)이라 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또한 무헨이 칭했다는 것이 정말 프로이스의 기술대로 일본의 옛 승인 '코우보우 대사[弘法大師]'인지, 아니면 일본의 연구자들이 말하는대로 '불법을 넓힌다(弘法)'으로 쓰인 것인지도 궁금.
또한 그 후의 처방에서 프로이스는 기술 안 했지만, 오오타 규우이치의 기술에는 나오는 절의 수리비를 주는 노부나가의 모습은 나름 츤데레?

ps:...노파심 삼아 추가합니다만, 이 기술만으로 노부나가가 불교를 억압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노부나가가 싫어했던 것은 있지도 않는 것으로 남들을 현혹시키는 사람 혹은 단체를 혐오하고 벌을 주었을 뿐입니다.
  1. 포르투갈어로 infinito라 쓰여 있다 함 [본문으로]
  2. 하구로는 슈겐도우[修験道]의 수행장이다. [본문으로]
  3. 현대어역은 추오우코우론 사[中央公論社], 마츠타 키이치[松田毅一] 선생의 것을 이용. [본문으로]
  4. 술시는 오전 2시 즈음. 그래서 프로이스의 기록에 무헨의 처소로 밤중에 남녀가 찾아간다고 나온다. [본문으로]
  5.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마치다 판[町田版]을 이용 [본문으로]
  6. 신장공기 권13은 1580년의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행해진 전투[合戦]에 대해서는 굉장히 복합적인 연구가 다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런 다채로운 세계가 우리들을 매료하고 있다. 이번에는 작중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전시약탈[乱取り=乱妨라고도 한다]이라는 단어를 축으로 당시의 전투 풍경에 대해 추구하고자 한다.

 [갑양군감[甲陽軍鑑]]에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한 말로 유명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투에서 이기려는 목적은 남의 영지를 점령하여 자국의 영지를 확대하는 것에 있다. 영지를 확대해야만  자국의 사람들은 은상을 얻어 기뻐한다. 때문에 소령(所領)을 얻고 거기에 또 가증을 받아 입신출세하는 것이 사무라이[侍]의 본망인 것이다.
  즉 “창 한 자루로 무공을 세워 언젠가는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다”는 사상이며 지금까지의 센고쿠 시대 전투 이미지는 이 말에 다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당시의 전투를 묘사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각서[日本覚書]]의 기사를 살펴보자. 일시를 보면 ‘1585년 6월 14일’이라고 한다. 전 661항목 중 3개 항목을 소개한다.

一. 우리들(유럽인)에게는 하사관, 소대장, 십인조장(十人組長), 백인대장(百人隊長) 등 (계급이) 있다. 일본인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一. 우리들의 국왕이나 대장은 병사에게 보수를 준다. 일본에서는 병사들 각각이 종군하면서 먹거나 마시거나 입는 것들을 전부 자비로 해야만 한다. 
一. 우리들은 토지나 도시, 촌락 및 그곳의 부(富)를 빼앗기 위해 다툼이 일어난다. 일본의 전투는 언제나 대부분이 밀, 보리, 쌀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일본 군대는 지휘계통을 가진 계급제도가 없고, 병사들은 종군 중에 식사나 의복도 전부 자비로 준비하며, 토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쌀이나 보리 등의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한다.
 프로이스는 일본 무사의 군대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핀 [갑양군감]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과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다시 [갑양군감]을 보면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텐분11년[각주:1]에 행해진 [다이몬 고개 전투[大門峠合戦]]의 한 구절이다.
10월 7일에 코우후[甲府]를 출진했다. <중략> 25일에는 우미지리[海尻=현 미나미사쿠 군[南佐久郡]]로 출진하시는 것이 결정되자 주민의 가옥을 부시고[小屋落し][각주:2], 약탈[乱取り], 전답에 남아 있던 농작물 약탈[刈田働き]를 행하는 잡병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중략> 약탈이 3일간 밤낮에 걸쳐서 행해졌다. 내일부터는 조금 멀리 약탈하러 나가고자 하여 아침에 출발 저녁에 본진에 돌아왔다.
 여기서 나오는 약탈[乱取り]이라는 것은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납치, 물건의 약탈 등을 말하는 단어다. 전쟁하러 간 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 사용할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등 모든 것을 빼앗았다는 묘사다. 
 결국 4일 후 신겐은 스와 대명신[諏訪大明神]에게서 신탁을 받았다는 형식으로 약탈을 정지시킨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은 프로이스가 기록한 것을 방불케 하여 군단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잡병의 약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이 당시 전쟁터 약탈[乱取り]의 실태가 아닐까? 앞서 본 ‘입신출세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약탈[乱取り]을 위한 전투'인 것이다. 유추해 보자면 신겐이 주창한 ‘사무라이의 본망’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부대를 이끄는 무장(武將)의 마음가짐이지 적장의 목을 베어 은상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잡병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 4권 19화에 등장하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1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도 ‘약탈[乱取り] 당하였다. 1550년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카오 성[中尾城]에서 농성하던 요시테루는 미요시 군의 공세에 결국 철퇴. 성을 넘겨 주고 도망쳤다.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를 살펴보자. 

오늘 밤(11월 21일), 히가시야마[각주:3] 무가[東山武家=요시테루[義輝]]의 성이 함락되었다.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중략> 그저께 불타고 남은 건물에 다시 불을 질러 약탈했다고 한다. 히가시야마 무가의 성 오늘 미요시 군세 약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미요시 군은 공성전에서 승리한 후 철저하게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쇼우군의 권위도 잡병들의 약탈[乱取り]를 막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잡병들의 약탈[乱取り]을 묵인했다. 약탈이 전투에 참가시키는 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가 보다 합리화된 텐쇼우 연간[天正年間] 즈음이 되자 ‘약탈[乱取り]’은 주로 인간을 납치하는데 의미가 좁혀진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전투의 상태를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은 전투의 작법을 볼 수 있다. 
 ①. 출진한 군단은 야전이나 공성 등의 전투를 행한다. 
 . 승패가 결정된 뒤 또는 전투가 행해지던 중에도 잡병들은 약탈[乱取り]을 한다. 쌀이나 일용품 등(또는 인간)을 약탈한다. 사무라이 타이쇼우[侍大将]나 다이묘우는 그런 약탈[乱取り]을 묵인한다. 
 . 전투에 승리하여 약탈[乱取り]이 행해지는 기간(3~4일간) 후에 푯말을 세워 [약탈 금지] 등의 명령을 내린다. 
 . 다이묘우는 점령한 영지(領地)의 지배권, 잡병은 빼앗은 쌀이나 일용품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기근에서 탈출하기 위한 전투 – 라는 측면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노부나가[信長]가 특별히 귀여워하던 하얀 매(鷹)에게 ‘란토리[乱取り] – 즉 약탈 –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란토리가 나오는 매사냥을 보기 위해서 군중이 모일 정도로 인기를 떨쳤다고 한다. 우뢰와 같은 갈채를 받으면서 사냥감을 잡는 ‘란토리’. 센고쿠 시대의 세상을 잘 표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1542년. [본문으로]
  2. 진영에 세우는 가건물을 세울 때, 나무를 베어 가공을 하면 시간이 걸리기에 주변 가옥을 부셔서 세웠고 이것을 小屋落し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아시카가 쇼우군의 정무소가 있던 지역 이름. [본문으로]
마쓰라 시게노부[松浦 信]

1614 5 26일 병사(病死) 66

 

1549 ~ 1614.

부친 타카노부[隆信]와 함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큐우슈우[九州] 정벌군을 따랐으며, 조선의 역[朝鮮役][각주:1]에서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수군 부대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영지(領地)히라도[戸]이키[岐] 등도 영유(領有)하며 초대 히라도[平戸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적남(嫡男)의 갑작스런 죽음

 

 히젠[肥前] 히라도 번주 마츠라 시게노부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의 다음 해인 1601년에 53세에 은거하여, 적남(嫡男) 히사노부[久信]에게 히라도 번()을 잇게 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때 시게노부는 아들 히사노부를 쿄우토[京都] 후시미 성[伏見城]을 수비하도록 출진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현해탄에 배를 띄어놓고서는 거의 마지막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각주:2], 전쟁이 끝난 뒤 토쿠가와 가문[家]에게서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3]

 

 그러나, 사태는 급변하여 1602년 가을 갑자기 후시미[伏見]의 마츠라 저택에서 번주 히사노부가 급사(急死)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게노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히사노부의 급사에 관하여 번의 기록인 『가세전(家世伝)』에는, '후시미(伏見)에서 치질에 걸려 8 29일 죽다. 향년 32'라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다른 가보(家譜)에는 '할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저하면서 어느 쪽에 붙을지 망설이던 부친 시게노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는 며느리이며 히사노부의 부인 쇼우토우인[松東院]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은 마츠라 씨[松浦氏]와 오오무라 씨[大村氏]가 서로 다투었던 시기에 양 가문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 마츠라 가에 시집 온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의 딸로 이름은 소노였다.

 소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 도나 메시아), 시집올 때 배교(背敎)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부인이 된 쇼우토우인은 첫째 아들을 비밀리에 세례 받게 하였고, 히사노부의 세례마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열심인 모습은 곧바로 선교사들간에 널리 알려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가라샤 타마코[ガラシャ 玉子][각주:4]와 함께 칭송받았다. 또한 시아버지인 시게노부의 계속된 개종 요구에도 신을 버리는 것 보다 천 번의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프로이스의 일본사[フロイスの日本史]』

 

 이러한 사정이 번주 히사노부의 할복에 영향을 끼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히사노부가 죽은 다음 해인 1603년 손자인 타카노부[隆信]를 데리고 순푸[駿府]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알현하고나서야 3대 번주로 인정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성[居城] 카메오카 성[城] 불타오르다.

 

 3대 번주 타카노부의 뒤를 봐주면서 주로 남만무역(南蠻貿易)[각주:5]에 전념했다.

 이미 부친 타카노부[隆信][각주:6] 때부터 '하비에르'나 '루이스 프로이스'를 히라도에 초대하는 등 무역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609년에 네덜란드의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613년에는 영국 배도 입항하여 성 밑 마을[城下町]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의 거점이 1641년에 나가사키[長崎][각주:7]로 이전되기 전까지 30여 년간 히라도에서 사키카타 쵸우[崎方町]부두(埠頭)를 만들고 상관이나 주택을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일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즈음 히라도에는 남만인(南蠻人)[각주:8]들에 더해 수 많은 상인들이 모였기에 서국(西国)[각주:9]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어 번영의 극을 달했다.

 

 그러나 1613 10 3일 밤.

 시게노부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1599년에 새로 축성한 거성 카메오카 성[亀岡城][각주:10]에 불을 질러 무너뜨렸고, 다음 해인 5 26일에 의사 타케노 소우후우[武野 宗楓]의 간병을 받는 중 66세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가세전[家世伝]』

 

 이 사건은 자살한 아들 히사노부의 망령에 괴로워하다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건의 진상(眞相)은 무역 이익을 독점하던 것과 나아지지 않고 있던 기독교 금지령에 있지 않았을까?

 혹독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히라도 번[平戸藩]에는 이키츠키[生月] 등 영내(領內)의 섬들에 많은 신도들이 숨어있었고, 쇼우토우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에야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히라도 번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남만무역의 유지와 기독교 개종의 유예(猶豫)를 조건으로 거성을 불에 태워 없애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하극상의 센고쿠 시대부터 근세 초기의 혼란기까지 살아 남은 마츠라 시게노부.

 기독교 덕분에 철포(), 오오츠츠[大筒][각주:11]나 막대한 무역 이익을 손에 넣어 히젠[肥前] 서부(西部)의 패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 기독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신, 히라도의 상징이었던 카메오카 성[亀岡城]까지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쿄우 사[最教寺]에 있는 시게노부의 묘 - 히라도 시[平戸市]


  1.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2. 마지막에 동군에 서게 됨. [본문으로]
  3. 가독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선 용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가라샤는 세례명, 타마코는 이름. [본문으로]
  5.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말함. [본문으로]
  6. 시게노부의 손자와 부친의 이름이 똑같이 타카노부(隆信)이다. [본문으로]
  7. 에도 시대에는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8. 유럽인들을 말함. [본문으로]
  9. 쿄우토[京都]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을 지칭. [본문으로]
  10. 보통 히라도 성[平戸城]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11. 대포를 말한다고 하지만, 구경이 큰 철포를 지칭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97 6 12일 병사(病死) 65


1533~ 1597.
모우리 모토나리
[毛利 元就]의 셋째 아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와 함께 모토나리, 테루모토[輝元]를 보좌. 히데요시[秀吉]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을 포위하자 교섭에 임했다. 분로쿠의 역[[각주:1]] 때는 조선에 출병. 벽제관[碧蹄館]의 싸움에서 명()나라 군과 싸워 이겼다. 토요토미[豊臣] 정권에서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었다.[각주:2]









모우리 가의 안녕을 지탱하는 인물


 권모술수로 가득 찬 센고쿠[戦国]시대에 죽을 때까지 모우리 종가(宗家)의 안녕을 생각하며 부친 모토나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 것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뿐이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조카인 테루모토를 보좌한 명참모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나누어 다음 셋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 코바야카와 가문을 상속하여 부친 모우리 모토나리 아래서 부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시기.

(2) 모토나리가 죽은 후 둘째 형인 모토하루와 함께 모우리의 중진(重鎭)으로 활약했던 시기.

(3)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토요토미 정권의 정치가로 활약했던 시기.


 1582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츄우고쿠 대반전[大返[각주:3]]때는 히데요시 군을 추격하지 말자고 모우리 군에선 단 혼자서 주장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이로인해 후에 토요토미 정권의 중신(重臣)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6군의 사령관으로 1만여의 장병을 이끌고 활약했다.

 특히 벽제관의 전투에서는 이 여송(李 如松)장군이 이끄는 명()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염전기운이 만연하여 의기소침해 있던 일본군의 사기를 높인 의미는 크다. 킷카와 모토하루가 걸핏하면 성급해졌던 것에 비해 타카카게는 형에 뒤지지 않는 용맹함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상황을 멀리 내다보는 주도면밀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595 8월.

 치쿠젠[筑前]의 나지마[名島]로 돌아와 있던 타카카게는, 후계자가 없던 모우리 테루모토에게 자신의 외조카인 하시바 히데토시(羽柴 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모우리 가문의 후계자로 앉히려고 하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저지하여, 모우리 종가의 피를 지키기 위해 대신 히데아키를 자신의 양자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에게 은거를 신청한 타카카게는 그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코바야카와 씨의 본거지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에 은거하였다. 히데요시가 3만여석의 은거료(隱居料[각주:4])를 하사하여 타카카게의 공로를 치하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내 정치(領內 政治)와 교양(敎養)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日本史)]에서 타카카게를,

사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지역을 평온히 다스렸기에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그 지역에는 오랜 기간 시끄러운 일이나 반란이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타카카게가 영내 통치에 선정(善政)을 베풀고 있었다는 것은 외국인의 눈에도 특필할 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95 11월.

 미하라로 온 타카카게는 우선 은거할 성()으로 미하라 성()의 개수(改修)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를 행했다.

 붓츠우 사[]의 재건 공사에서는손이 많이 가긴 하겠지만 앞을 내다봐서라며 절을 세울 땅의 선정부터 건축공사까지 세세히 지시를 내렸다. 또한 교량(橋梁)공사에 있어서도 건축 용재는 오래된 배를 재이용하는 쪽이 내구성이 높다고 하여 세토[瀬戸]와 온도[]에 계류되어 있던 아타케 선[安宅]을 모으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렇듯 민정의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쏟았다.


 말년의 타카카게는 무라사키노[紫野]의 다이토쿠[]의 오우바이 원[]의 암주(庵主)인 교쿠센 소우슈우[玉仙宗秀]에게 사사(師事)받으며 참선(參禪)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실한 선종(禪宗)의 신자로 오우바이 원()을 시작으로 미하라의 베이산[米山[각주:5]], 쿄우신 사[], 다이젠 사[大善], 치쿠젠 하카타[博多]의 쇼우후쿠 사[聖福] 타카카게가 정재(淨財)를 한 곳은 여러 곳에 이른다.

 또한, 유학(儒學)을 좋아한 타카카게는 치쿠젠 나지마에 나지마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의 육성에 힘쓰는 등 문무 양쪽에 주목할 점이 많다.


타카카게의 죽음

베이산 사[米山寺]에 있는 타카카게의 묘(미하루 시[三原市]


 1597년 봄 즈음 부터 아프기 시작한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세번에 걸친 상경 요청에 대해서도 병 조리를 이유로 나중에 찾아 뵙겠다며 연기를 요청했다. 죽기 직전에는 코다마 나리히데[玉 就英]가독 상속이 아무 문제없이 행해지도록 테루모토에게 부탁했다.


 이것을 최후의 업무로 같은 해 6 12. 65세의 생애를 마쳤다.

 타카카게의 죽음은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듯 유언도 남기질 못했다.

 [마치 자기에게 죽음이 갑자기 찾아온 듯이 앙천했다] 테루모토는 그 죽음에 놀라 모우리 가문의 대들보를 잃은 슬픔과 앞으로의 의지할 데 없는 불안함을 절절히 기록했다.


  3년 뒤에 일어난 세키가하라[ヶ原]의 전투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으로 추대 받았으면서도 택해야 할 길을 잘못 택해, 영지 대부분을 잃은 것을 보면 타카카게의 죽음이 얼마나 모우리 씨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손실이었는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2. 타카카게가 죽은 후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본문으로]
  3. 노부나가[信長]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한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 때 통상보다 더 빨리 철수한 것을 이름. [본문으로]
  4.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 가문의 묘나 위패가 있는 곳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