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코우[日光]에 가면 토우쇼우 궁[東照宮][각주:1]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오오토리이[大鳥居]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가 저 먼 큐우슈우[九州]에서 거대한 바위를 옮겨와 건조한 것이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힘들었을 듯한 이런 공정을 나가마사는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에도[江戸]에서 닛코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돌기둥 하나를 배 한 척에 싣고, 그 배의 양쪽에 굵은 밧줄을 연결한 배 두 척이 끌게 하였다. 육로로 옮겨지자 슈라구루마[修羅車]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나 큰 목재를 옮기는 수레에 싣고 수 마리의 소로 끌게 하였다. 닛코우로 가는 길은 흑토(黑土)라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두꺼운 널빤지를 200여 미터정도 빈틈없이 깔아가며 옮겼다.
 
오오토리이를 조립하는데도 고생하였다. 기둥을 양쪽에 세운 후 상부에 돌을 얹어야 했는데, 나가마사는 근처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쌀, 보리, 메밀, 콩을 채운 가마니를 사 모은 뒤 이 가마니를 쌓아 발판으로 삼고 도르래를 장치하여 돌을 끌어 올렸다. 이것만으로도 천 명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였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호쾌한 기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덩치가 컸기에 전쟁터의 모습은 괴물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가신(家臣) 시마 사콘[島 左近]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사'라고 경외 받았는데, 어느 날 갑주를 입고 살기를 풍기는 사콘을 보고 사콘의 부인조차 공포에 떨었다. 그러자 사콘은 "참 겁도 많으시군. 쿠로다 카이노카미[黒田 甲斐守=나가마사]가 갑주 입은 것을 보면 아예 기절하시겠구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터에서의 활약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는 나가마사의 부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때부터 쿠로다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나가마사는 전투에서 언제나 이 마타베에와 치열한 공적다툼을 벌였다. 가신들이 목숨을 아까지 않는 이런 무모한 모습에 간언하자,
"아버지(죠스이)가 안 계시다면 아들 타다유키[忠之]에게 선봉을 맡기고 나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겠지만, 아직 아버지는 건재하시다. 만약 내가 전사하더라도 우리 집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라고 말했다 한다.

 부친 죠스이의 교육 방침으로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형제처럼 자랐지만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욕하여, 둘은 어렸을 때부터 끝없이 싸웠다.[각주:2]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마타베에는 나가마사가 강 한가운데서 조선 장수[각주:3]와 필사적으로 격투하고 있는 것을 방관만하며 도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각주:4].
  나가마사에게는 마타베에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전의관(全義館)에 포진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마굿간에 침입하여 말을 잡아먹은 사건이 일어났다. 가신 칸 마사토시[菅 政利][각주:5] [각주:6]가 퇴치하고자 달려들었지만 호랑이는 더욱 날뛰었다. 마사토시가 위험에 처하자 마타베에가 달려들어 호랑이의 미간에 두 번 칼질을 퍼부어 겨우 잡았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마타베에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부대의 대장이라는 자가 축생과 싸우다니 이 무슨 짓이더냐?"하고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각주:7]

 1606년 결국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헤어진다. 나가마사가 노[能]를 관람하는 자리에서 마타베에의 아들 모토노리[基則]에게 작은 북[小鼓]을 치게 만든 것에 분노[각주:8]하여 마타베에는 1만6천석의 가록(家祿)을 버리고 쿠로다 가문을 떠났다.[각주:9]

 나가마사는 무용일변도인 외견과는 달리 굉장히 뛰어난 정략가(政略家)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은 뒤의 혼돈스런 정치정세 속에서 토쿠가와 정권수립을 위해 암약한 것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토벌군을 일으켜 시모츠케[下野]의 오야마[小山]까지 갔을 때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여기서 토쿠가와 가문의 운명을 나누는 사상 유명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야스를 따라온 다이묘우[大名] 대부분이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의 다이묘우였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명령에 따라 토쿠가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향배가 이에야스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이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존재가 급격히 클로즈업 된다.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맹장(猛將)이며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런 사내가 토쿠가와 편에 선다고 표명한다면 다른 장수들도 전부 이에 따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가마사는 이런 흐름을 민감히 캐치하여 이에야스에게 부탁받기 전에 마사노리의 진소(鎭所)를 방문하였다. 나가마사는 다음과 같이 마사노리를 설득했다고 한다.
  "미츠나리놈은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천하를 쥘 심산이다. 생각해보게나. 어리신 히데요리님에게 거병의 의지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무공파 다이묘우[武功派大名]의 대표격인 인물로, 문치파인 미츠나리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나가마사는 마사노리의 그런 증오심을 자극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나가마사의 교묘한 설득에 넘어가 단번에 미츠나리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켜 미츠나리와 싸우는 것을 맹세한 것이다.

 다음 날 열린 오야마 군의는 마사노리가 발언한 말에 따라 장수들은 전부 토쿠가와 측에 서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의 행동이 굉장히 기뻤는지 애용하던 투구와 말을 한 마리 주었다. 나중에 나가마사에게 치쿠젠[筑前] 52만 3천석이라는 거대한 영지를 준 것도 이 오야마 군의에서의 공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각주:10]

 정계의 막후 모사라 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나가마사였지만 그의 부친 죠스이의 기량에는 결국 이르지 못했다. 나가마사는 항상, "나는 14살 때부터 여러 번 공적을 세웠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칭찬해 주지 않았다.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아들]는 천하의 누구나가 그의 무용을 칭송한다. 이는 요시나가의 부친 나가마사에게 특별한 무공(武功)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나가의 이름이 빛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은근히 너무나 위대했던 아비를 갖았다는 것에 한탄하였다고 한다. [각주:11]

 그렇다고 하여도 부친 죠스이의 영향은 커 영지경영에 대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친의 방식을 지켰으며, 임종할 때에도 아들 타다유키에게 오로지 죠스이의 노선을 지키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1568년생. 요시타카[孝高=죠스이[如水]]의 아들. 1589년 가문을 이어 부젠[豊前]의 6개 군(郡)과 카와치[河内] 탄보쿠 군[丹北郡][각주:12]을 영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하여 김해성(金海城) 공략. 1597년 정유재란에서는 직산(稷山)에서 1만의 명나라 군을 격파[각주:13].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 18만석에서 치쿠젠[筑前] 52만석[각주:14]이 된다. 1623년 8월 4일 죽었다. 56세.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神社).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쿠로다 죠스이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혀 유폐되었을 때, 마타베에의 백부 2명이 쿠로다 가문을 떠나는데, 마타베에도 함께 쿠로다 가문을 떠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를 섬긴다. 그러나 나가마사가 마타베에의 기량을 아까워해 다시 불러들였다. 오히려 죠스이는 배신자의 핏줄이기에 가까이 쓰지 말라고 하여, 나가마사는 쿠리야마 시로우에몬[栗山 四郎衛門]의 요리키[与力]로 삼아 100석만 주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응리(李應(応)理)라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겠음. [본문으로]
  4. 당신의 주군이니 구하라고 하는 코니시[小西] 부대 사람의 말에 "내 주군이라면 저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오" 라고 고토우 마타베에는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나가마사는 간신히 이기고 나왔는데, 마타베에는 태연히 부채질하면서 구경하고 있었기에 벙쪄했다 한다. [본문으로]
  5. 菅은 '스게'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사족으로 이 칸 마사토시는 세키가하라에서 시마 사콘[島 左近]을 부상(혹은 사망)당하게 하는 철포대의 지휘관이었다. [본문으로]
  7. 물론 칸 마사토시도 함께 혼났다. [본문으로]
  8. 모토노리는 원래 작은 북을 잘 쳐 나가마사가 시킨 것이기는 했지만, 무사인 자신이 연극배우[能楽師]의 흥을 위해서 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비인 마타베에에게 일러 일이 발생. [본문으로]
  9. 마타베에의 영지는 오오쿠마 성[大隈城]였는데, 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興元]의 영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쿠로다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는 호소카와 가문이 부젠[豊前]에 오기 전 영주인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으로 이동하면서 연공(年貢)을 싹슬이 가져가는 바람에 호소카와는 초기 영지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만큼 쿠로다 나가마사를 미워했다. 나가마사 역시 자꾸 항의하는 호소카와 가문에 화가 나 가신들에게 호소카와 가문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였다. 호소카와를 감시하고 압박을 주라고 배치한 마타베에가 오히려 호소카와와 친하게 지내자 나가마사가 자주 화를 내었기에 이런 불화가 쿠로다 나가마사와 코토우 마테베에 양측에 쌓인 면도 있다. [본문으로]
  10. 거기에 세키가하라 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신하도록 암약한 것도 나가마사였다고 한다. 전투가 행해질 때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지 않자 초조해진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에게 사자를 보내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는 것이 확실한지 다그칠 정도였다. 즉 히데아키는 나가마사가 담당했다. 여담으로 다그치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나가마사는, “히데아키가 배신할지 어떨지 내가 지금 그걸 어케 알어!! 싸우기 바쁜데 짜증나게 할래?”…라고 했다고 한다. 보고를 들은 이에야스는 짜증이 확 나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물어뜯어 피 철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그러나 효심은 깊어,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전초전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의 강공 때 사쿠마 군세의 공세에 놀란 죠스이가 죽음을 각오하며 부하 쿠리야마 시로베에[栗山 四郎兵衛]에게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하여 쿠리야마는 나가마사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은채 나가마사와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나중에 쿠리야마에게 이동지를 묻다가 사정을 알아챈 나가마사는 “아무리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아들이 아비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면서 전장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덧붙여 이 시즈가타케에서 수급을 얻어 450석을 하사 받음. [본문으로]
  12. 전부는 아니고 쿠로다 나가마사의 시즈가타케 활약 450석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때 후방을 노리던 네고로[根来], 사이카[雑賀]를 격퇴하여 2000석 + 쿠로다 죠스이 가족 재경료 500석. [본문으로]
  13. 직산 전투를 말하는 것인데, 명나라 기병 4000에 쿠로다 5000의 격돌. 몇 차례 접촉은 있었으나 서로 물러났음. [본문으로]
  14. 치쿠젠 전부, 히젠[肥前] 2군(郡), 치쿠고[筑後] 2군을 포함하여 정확히는 52만2천4백여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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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08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망의 세키가하라 전투 대목을 읽다보면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나가마사와 마타베에의 일화와 똑같은 포지션에 놓이는 일이 있었지요. 소하치씨는 뻔뻔한(?) 소설가인 셈이군요.

    그러고보니 다케나카 가문은 시게카도가 번을 세웠나요? 한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큰 은인셈이지만 자기 가문엔 마땅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 되는건데 말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8 08: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 어떤 에피소드인가요? 대망은 노부나가 죽은 이후부터는 읽질 않아서요.

      입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분발하고 나름 큰 공적(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생포)에 자기 영지에서 전투(세키가하라)가 일어났는데도 가증을 못 받은 것을 보면 정치외교력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08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망 9권 '늙은 호랑이와 젊은 표범'이란 챕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탈출과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추격이 주 소재인데 여기서 다다요시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섣불리 추격을 하다가 시마즈 무사에게 목숨을 잃게 될 상황에 처하지요.

      이때 (여기선 이에야스의 전령이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호로무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오구리 다이로쿠란 도쿠가와 무사가 지나가다가 요코타 진에몬이란 다른 무사가 다다요시를 구해주려는 것을 저지합니다. 다다요시는 가까스로 살아나온 후 눈이 벌개져 다이로쿠와 진에몬을 찾지만 이미 주위에선 사라졌지요.

      세키가하라의 피냄새가 멎을 무렵 이에야스가 군대를 점검할때 다다요시가 오구리 다이로쿠에 대해 따지게 되고, 이에야스의 질문에 다이로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대장의 신분이었으므로 그리하였습니다"

      이에야스는 다다요시에게 자상한 훈계를 하면서 훈훈한 엔딩을 맞습니다.

      볼때마다 매우 흡사한 에피소드라고 생각됩니다만 학식이 짧은터라 다른 분들에겐 아니라고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케나카 시게카도가 글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아는데 애석히도 그쪽의 재주는 없군요. 그러고보면 미노계 인물들 중 마지막까지 웃은 사람은 별로 없다는게 또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9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도련님께서 직접 싸우신다는 것이 우선 에러군요(^^)

      아마 찾으면 좀 있을 것 같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은 모리 란마루 집안의 모리 가[森家]군요. 미마사카 18만석으로 입번하지만 중간에 후계없어서 폐번크리.

      뭐 그래도 미노 계열 중 가장 출세한 사람이라면 이번 년도 NHK대하드라마 고우[江]의 라이벌이 되는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인 듯하군요(태어난 곳은 탄바[丹波]라고 합니다만..)

  2. ckyup 2011.03.09 05: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친구에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치도 나쁘지도 않은것 같던데요, 마사노리나 기요마사와 더불어 전국말기에 흥미를 더해주는 무장임에는 분명한것 같습니다 - 왠지 전투에 데리고 나가서 본진 앞에두면 든든할것 같은....

七.

 하치죠우노미야토모히토 친왕[八宮智仁親王]이 가진 히데요시에 대한 추억은 그 정도밖에 없다. 미야[宮]는 너무 어렸다. 히데요시가 지혜를 뽐내며 기운이 넘칠 때의 미야는 꼬꼬마나 소년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력이 풍부해지기 시작할 즈음의 그 히데요시는 노쇠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하지만 미야의 정신은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크게 성장했다. 동시에 미야의 마음 속에 있는 히데요시도 그의 사후 쑥쑥 성장하기 시작한 듯 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이 시작된 것은 미야가 24살 때이다.
 -
이에야스[家康]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라는 것은 궁정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이전부터 명확한 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 휘하의 일개 다이묘우[大名] 주제에 단독으로 궁정에 접근하여 금은(金銀) 등을 헌상하였다. 그 꿍꿍이는 장래에 무언가 일으켰을 경우를 상정하여 미리 궁정의 호의를 얻어두기 위함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 사이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율법을 어기며 자주 오오사카 정부[大坂公儀]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 감정을 대표해서 일어선 것이 오봉행(五奉行)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로, 이에야스의 죄를 꾸짖고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이에야스가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천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동서(東西) 어느 쪽에건 속하게 되었다.

 미야의 시학(歌) 스승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탄고[丹後] 타나베 성[城]에 머문 채 이에야스에 속했다. 유우사이는 자기 가문의 생존을 이에야스 측에 걸었다. 도박은 결과로써 성공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궁지로 몰렸다. 왜냐면 서군의 대군단이 이 타나베 성을 포위하였기 때문이다.
 
서군의 병사수는 1만 5천이었고, 농성하는 유우사이 측은 불과 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우사이의 아들인 타다오키[忠興]가 호소카와 가문의 주력을 이끌고 칸토우[東]에 있었기 때문에 유우사이 아래에 남아있던 병사는 그것 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만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잘 싸웠다.

 “도저히 유우사이는 이길 수 없겠지. 유우사이는 죽을 것이다”

 하고 세간의 누구나가 생각했다.
 
하지만 유우사이에게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를 경탄케 할 정도의 무용(武勇)이 있었다. 그 이상으로 이 인물에게는 지모(智謀)가 있었다. 이 사지(死地)에서 자신의 목숨을 탈출시키는 한편 세상의 비웃음 받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머리를 이 노인은 가지고 있었다.

 하치죠우노미야[八宮]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유우사이는 재작년이래 고요우제이[後陽成]와 이 미야를 위해서 옛 시집 전체[古今集全巻]에 걸쳐서 주석을 강의하여 작년에 완료하였다. 제1회는 70여 일을 필요로 했으며, 제2회는 40여 일을 필요로 했다. 그걸로 전부강의한 것이 되었는데, 남은 것은 거기에 ‘비전(秘傳)’이라 부름직한 것이었다.
 [
고금전수(古今)]
 
라고 세상에서는 일컫는 것으로, 옛 시집(古今集) 해석의 비전이며 게임에서 말하는 필살기이다. 이것은 문외불출(門外不出)로 만약 유우사이가 전사라도 한다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소멸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유우사이의 지모가 노리는 바였다.

 “나의 죽음은 가볍다. 그러나 고금전수(古今)는 중하다. 내가 죽기 전에 그것을 하치죠우노미야에게 물려드려서 후세에 전하고 싶다”

 며 쿄우토[京都]에 있는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요청한 것이다. 그 밀사(密使)로서 유우사이의 가신(家臣)이 포위을 돌파하여 하치죠우노미야의 저택에 도착하였다.

 미야는 경악했다.
 
곧바로 입궐하여 형인 텐노우[天皇]를 배알하고서는 탄고의 전황을 알리면서 고금전수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유우사이는 황상께 전수해 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사옵니다”

 하며 다소 왜곡하였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전수받는다 하더라도 천하는 신경도 쓰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텐노우[天皇]가 전수를 받는다고 한다면 칙명으로 정전(停戰)을 시킬 수 있고, 칙명이라면 유우사이의 목숨도 떳떳하게 구할 수있게 된다. 유우사이는 미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야라면 그렇게 말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텐노우[天皇]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칙사를 오오사카의 히데요리[秀頼]에게 보내어 탄고 방면의 서군(西軍)에게 정전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이 칙사로서 시에 밝은 산죠우니시 다이나곤 사네에다[三西 大納言 実条], 나카노인 츄우나곤 미치카츠[中院 中納言 通勝],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烏丸 頭弁 光広] 등 3명이 내려갔다. 히데요리는 승낙했다. 칙명을 황송해하며 받드는 것이 토요토미 가문의 가법이었다.

 현지에 칙사로서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가 임명되어 떠났으며,히데요리에게서는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前田 主膳正 義勝 – 토요토미 가문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아들)] 사자로 임명되었다. 이들보다 한발 앞서 미야의 개인적인 사자로서 가신 오오이시 진스케[大石 甚助]라는 자가 탄고 타나베로 급행하여 양측에,
 -
칙사가 내려오신다.
 
는 뜻을 알리고 또한 유우사이와 만나서는, 미야가 유우사이의 말과는 달리 ‘고금전수’를 자신이 아닌 텐노우[天皇]가 받는 것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렸다.

 유우사이는 복잡한 연기를 하였다.
 
칙사가 성안으로 들어서자 처음엔 그 정전권고의 칙명을 사양했다. 목숨을 아쉬워하는 것 같이 보여 무도(武道)의 길을 가는 자로서 수치스럽사옵니다 – 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는 한편 칸토우[東]의 이에야스에게도 사자를 보냈다. 이에야스에게도 이에 대한 사정을 납득시켜놓지 않으면 나중을 위해서 좋지 않았다.
 
설왕설래 끝에 겨우 개성해서는, 그 성을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에게 맡긴다는 명목으로 성을 나왔다. 동시에 포위군도 진을 풀고 떠났다.
 
유우사이는 전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城]으로 몸을 피했고, 곧이어 싸움이 동군(東軍) 측의 승리로 끝나자 우선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이에야스를 배알했다.

 이어서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미야에게 ‘고금전수’를 전수하기 위해 하치죠우노미야 저택에 들렸다. 미야는 이 날의 의식을 위해서 일부러 저택 내에 방 하나를 따로 만들어 전수를 받는 곳으로 하였다. 전수의 내용은 특별한 것도 없었다. 옛 시집(古今集) 중 난해한 몇 개소나 구절 등에 대해 하나하나 메모지를 끼워 넣으며 구전(口傳)하는 것으로, 내용보다도 오히려 권위를 신비화시키기 위한 종교의례였다. 미야는 전해 내려오는 작법대로 유우사이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서약서에는 [천지신명에게 맹세컨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음. 만약 어기는일이라도 있을 때는 어떠한 신벌불벌(神罰佛罰)이건 달게 받겠음]이라고 쓰여있었다.

 이에야스의 천하가 되었다.
 
히데요시에 대한 빠심이 있었던 고요우제이[後陽成]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불과 3년 만에 찾아온 이 변화에 실망하여 텐노우[天皇]인 것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퇴위하여 뒤를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와 그의 관료들이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앞 시대의 히데요시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궁정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퇴위는 토쿠가와 가문[川家]에 대한 비꼼과 같은 것이며 그러한 제멋대로인 행동은 용서할 수 없사옵니다. 더군다나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신다는 것은 특히 적절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미야는 한때 히데요시의 유자였던 분으로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황위에 오르시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시대와는 달랐다. 히데요시가 있을때 설치되었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은 어디까지나 궁정본위인 - 궁정의 아래에서 용무를 원활하게 하는 기관이었지만, 이에야스의 치세가 되어 설치된 ‘쿄우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는 궁정의 감시역[目付]으로, 때로는 검단관(檢斷官)과 같은 위압적인 태도로 임했다. 이 때문에 텐노우[天皇] 이하 여관(女官)에 이르기까지 일상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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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문 것입니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天皇]를 위로하였다. 태양은 히데요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궁정에게 있어서 히데요시의 출현은 태양이 솟아오른 것과 같았으며, 그가 살아있을 때 궁정에는 하루 종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그늘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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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는 원래부터 토요토미 씨와는 다르옵니다.
 
라고도 미야는 말했다. 미야가 이에야스의 얼굴을 본 것은 몇 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이나 모습은 결코 시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시인이었다. 시인이 아니기에 궁정의 고상함과 아름다움, 예술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면 궁정에 대한 애정도 생길 턱이 없었다.

 그 후 십 년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황위를 유지하였으며 이어서 황위를 세자인 코토히토 친왕[政仁 親王]에게 물려주었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이다. 1615년 이에야스는 소위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陣]’ 을 일으켜, 히데요리를 포위해서는 불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어서 이에야스는 쿄우토[京都]에 사람들을 보내어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봉우리에 있는 히데요시의 묘소(墓所)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그에게 내려진 호칭인 [호우코쿠다이묘우진[大明神]]을 박탈케 하였다.
 -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미야는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 이에야스는 궁정도 그 활동을 궁궐 안으로 제약하기 위한 법을 만들어 속박했다. [공가법도(公家法度)]가 그것이다.

 미야는 모든 것에 실망했다. 결국 쿄우토를 멀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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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
 미야는 카츠라가와 강[桂川] 근처에 오이구경(瓜見)을 하러 간다. 그러다 거기에 살 장소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 별장을 만들어 거기에 살고 그러면서 일본 시의 아름다움 속에서 몰두하다 죽고자 하였다.
 
이 미야는 후세에 말하는 ‘카츠라 별궁(桂離宮)을 만들었다. 현재 있는 별궁의 모든 것을 만들지는 않았고 그는 원형만을 만들어 나머지는 늦은 결혼으로 태어난 적자(嫡子) 토모타다친왕[智忠 親王]에 의해 완성되었다.
 
미야가 만든 별장은, 미야의 표현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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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밭의 아담한 찻집[瓜畑のかろき茶屋]
 
이었다. 아담하기는 하였어도 궁정에서 그 아름다움은 평판이 자자하였다. 미야는 이 별장의 설계에 있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 ‘일본 시집(古今和歌集)거기에 미야가 좋아한 ‘백씨문집(白氏文集)등에서 발상(發想)하여, 그런 시들의 마음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여름 달이 오이 밭 위로 떠오르는 밤에는 이 별장에 히데요시를 되살려서 초대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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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는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치세인 1629년에 50살의 나이로 죽었다. 미야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모츠케[下野] 닛코우[日光]에 이에야스의 묘소인 토우쇼우 궁[東照宮]을 조영(造營)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후년 사람들은 토우쇼우 궁(宮)에서 볼 수 있는 토쿠가와 가문의 미의식과 쿄우토(京都) 교외에 있는 이 카츠라 별궁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 극과 극이라며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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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9.30 0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성을 내어준 것은 모양새가 어찌되었든 무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서 그 아들은 아버지와 대면하는것도 수년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이래서야 연기를 한 것도 허사가 되었달지(웃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9.30 0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에 대해 "와카 한 수 제대로 지을 줄 모르는 놈은 죽어버려"
    라고 '문학소년 미야'는 생각했을지도...^^;
    어느덧 마지막까지 달려오셨네요
    늦어도 좋으니 마지막 편도 부탁드립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9.30 0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후지타다.ㅋㅋㅋㅋ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30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화도 잘 보았습니다.
    미야는 히데요리도 좋아했으려나요... 특별히 교류 같은게 없어 보이는듯 하기도 하고...
    음..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부담 가지시마시고 작업하세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9.30 14: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박선생님 너무 웃겨요. 문학소년 미야 ㅋ 풍신가의 사람들 마지막은 요도도노와 히데요리 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30 15: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천하로 따지면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쿄-는 미야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갔다랄까..하는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군요.
    하긴 정치의 중심이 에도로 넘어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려나..;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30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왠지 타다오키라면 능히 그랬을 것 같군요 ^^

    박선생님//'죽어버려~!!'라는 장면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허공님//섬긴 주군들이 다 멸망하는데도 끝까지 살아 남았으니 [역시]의 칭호를 붙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zardizm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땠을까요.... 히데요리에 대해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히데요시'만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상의 미야는 '시(歌)'를 우선시하다 보니, 히데요리의 시를 보아야 그에게 호불호를 느끼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본다충승님//예.... 꽤 두껍고 빽빽하게 글자가 들어서있습죠.

    다메엣찌님//좀 이야기가 새지만....'風光る'라는 신선조가 중심인 만화에서 히지카타 토시조우가 말하는 것인데...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게 한 다음에 떨어뜨려야 제대로 된 절망을 맛보지'(뭐 대충 이런 뉘앙스)...
    라는 대사가 있습죠...
    히데요시라는 인물을 만나 몇 백년 동안 잊고 있었던 양지를 맛보다, 히데요시가 죽고 이에야스라는 놈을 곧바로 만나 버로우 할 수 밖에 없었던 쿠게(公家) 측 사람들의 실망은 정말 컷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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