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불행은 재능도 없으면서 히데요시(秀吉)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칸파쿠(関白)까지 출세한 것에 있다.
 히데츠구는 오와리(
尾張)의 성()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친이 히데요시의 누나[각주:1]였다. 그런 관계로 출세하기 시작하여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의 양자가 됨에 따라 예가 없을 정도의 승진을 이룬 것이다.

 18살에 종사위하(四位下)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에 임명되었으며, 21살 때는 정삼위(正三位)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하였다. 24살 때,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죽자 칸파쿠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바랄 수 없다고 본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쥬라쿠테이(楽第[각주:2])를 히데츠구에게 주고 히데요시 자신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가 이후 타이코우(太閤[각주:3])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2년 후인 1593년 히데요시에게 오히로이(おい – 후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난 것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에게 칸파쿠를 물려준 것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그런 감정을 히데츠구도 느낄 수 있었다.
  히데츠구가 여기서 깨끗하게 '칸파쿠'라는 직책을 히데요시에게 반환하였다면 비극의 인물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맛본 권력의 맛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때 일본 전국을 5분할하여 그 중 4/5는 히데츠구에게, 1/5을 히데요리로 나누는 계획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장래 히데요리의 부인으로 히데츠구의 딸을 맞이하여 토요토미 가문(
豊臣家)을 잇게 하는 방안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데츠구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오히려 자포자기와 같은 행위를 거듭하게 된다. 히데요시가 칸파쿠의 직책을 거두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강박관념이 그를 난행으로 몰고 갔다.
 철포(
鐵砲) 연습을 핑계로 쿄우토(京都) 교외 키타노(北野) 근방에 가서 밭일을 하던 농부를 표적으로 쏘아 죽였고, 또한 활의 표적으로 지나가던 사람을 멈추게 한 후 맞추어 죽였다. 나중에는 살인에 맛을 들여 밤중 시내에 나가 돌아다니다 마주친 사람을 계속해서 칼로 죽였다. 자신의 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 – 그 손맛이 죽였다. 히데츠구는 이렇게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 수백 명을 죽였다고 한다.

 히데츠구의 난행은 끝이 없었다. 오오기마치 죠우코우(正親町上皇)가 죽었다[각주:4]고 하는데도 사슴사냥을 하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다.

죽은 상황에게 공양하기 위해서 사냥을 하니, 이것을 살생관백이라고 한다
御所のたむけのためのなれば、これをせっしょう関白という[각주:5]
 는 낙서마저 나왔다.

 히데츠구는 그 다음으로 성지(聖地)라 일컬어지는 히에이잔(比叡山)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금녀의 구역인 히에이잔에 여성들까지 함께 데리고 올라가 사슴사냥을 한 것이다. 히에이잔은 물론 살생이 금지된 땅이었다. 스님들이 멈추어달라고 사정을 하자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원숭이, 너구리까지 잡아 그렇게 사냥해 온 것들을 본당() 네모토 중당(根本中堂)으로 가지고 들어와 대놓고 요리해 먹은 것이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승려들이 쓰고 있던 소금이나 식초통에 사냥한 개나 사슴의 시체를 던져 넣었다.[각주:6]

 이런 난폭한 행위들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저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히데요시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 있으니 히데츠구가 조정에 막대한 헌금을 한 행동이었다[각주:7]. 1595년의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것을 모반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판단하였다. 파견된 힐문사(詰問使)에게 히데츠구는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칸파쿠, 사다이진(左大臣)이라는 요직()을 박탈당했다. 히데요시와의 면담도 거부당하여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당한 뒤 그곳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다.

 히데츠구의 가족들에 대한 히데요시의 처치는 잔혹의 극을 달했다. 처첩과 자식들 모두 쿄우토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으로 끌려가 히데츠구의 목 앞에서 사형당했다. 2~3세의 아이까지 모친의 면전에서 살해되었으며 그 모친도 곧바로 목이 베어져 죽음을 당했다.

[도요토미노 히데쓰구]
1568년생. 처음엔 '미요시 야스나가(
三好 康長)'의 양자가 되어[각주:8] '미요시 마고시치로우(三好 孫七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585년 오우미(近江), 야마토(大和)에서 43만석[각주:9]. 1591년 칸파쿠(関白)가 되었다. 1595년 추방당하여 자살. 28세.

  1. 즈이류우인 닛슈우(瑞龍院日秀). [본문으로]
  2. 히데요시가 자신이 세운 정권의 권위와 상징을 위해 쿄우토에 세운 정청(政廳)겸 주거지. [본문으로]
  3. 은퇴한 칸파쿠에게 붙여주는 경칭. [본문으로]
  4. 1593년. 1586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 양위한 상태였다. 여담으로 히데요시는 이 오오기마치가 양위하고 살 집(센토우고쇼(仙洞御所))을 마련한 공로로 칸파쿠(関白)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원어로는 'せつせう'라고 되어 있는 듯... 살생(殺生)과 섭정(摂政)의 발음은 둘 다 셋쇼우(せっしょう). 그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 섭정관백을 살생관백으로 말장난한 것. [본문으로]
  6. 히에이잔 측의 기록에는 없는 말이라고 한다. 야마시타 토키츠네(山科 言経)의 일기인 [토키츠네 경기(言経卿記)]에 따르면 히데츠구는 당일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뭐 이 헤이케모노가타리 듣는 것도 향락에 속하는지라 상황 붕어의 자숙하는 분위기에서 해선 안 될 행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이 뿐만 아니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이른 것에 따르면, 뭔 일이 있을 시에는 관백인 자신(히데츠구)을 따른다는 서약서를 비밀리에 제출하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그전(3살 즈음)에 '미야베 케이쥰(宮部 継潤)의 양자가 된 적이 있다. 양자가 되었을 당시 미야베는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의 유력 무장이었는데, 히데요시는 미야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며 안전보장 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조카를 양자라는 이름의 인질로 보냈다. 아자이 가문이 멸문되자 반환되었다. [본문으로]
  9. 그 후 오와리와 이세 등에 100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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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08.01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저 히데츠구의 고뇌라는것도 납득이 갈만도 합니다. 칸파쿠직을 다시 내어준들, 잠재적 경쟁자일 조카를 갓난아기인 친자식이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둘리도 없잖겠습니까..랄까, 애시당초 신뢰로 형성된 관계라면 모를까 저 센고쿠에 그런관계따위 있을리가 없죠.

    히데요시가 1592년 전에 죽었다면 어땠을까 싶긴 하군요. 뭐 느슨한 연합체이긴 하겠지만 도요토미 정권 비슷한게 에도바쿠후를 대신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2 1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군상 56, 센고쿠 무심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항목을 쓴 오오노 노부나가(大野信長)씨는 마지막에 흥미로운 해석을 해 놓았더군요.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이며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인인 고우히메(豪姫)를 히데요시가 평하며 한 말인...
      "남자였다면 칸파쿠를 물려줄 텐데..."라는 것을 들어, 히데요시는 가장 사랑하고 평가하는 인물에게 주는 칭호였다고(...문제는 저는 아직 히데요시가 고우히메에게 한 저 '칸파쿠 운운'하면서 천하를 준다는 말을은 고우히메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했는지 본 적이 없어서...뭐..임진왜란에서 대성공해서 히데요시가 중화황제가 되었을 시 일본 칸파쿠(즉 일본총독)으로 임명할 생각을 가졌다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은 있지만요)

      흥미롭군요. 1592년 히데요시 사망이라...
      아마... 히데츠구의 정권이 주욱 이어졌다고 쳤을 때... 히데츠구 인생의 유일한 패전이었다는 코마키-나가쿠테는 아마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처럼 말타고 달려드는 이에야스와 젊은 나이지만 중후한 히데츠구가 그것을 맞받아 치는 이야기도 생겼을 것이고...

      히데요시의 갖은 성공 뒤에는 어린 나이의 천재 군략가 히데츠구가 활약했다고 나온다던가..

      이에야스의 신격화가 진행되지 않았을 테니 이에야스를 똥싸개로 만든 타케다 신겐도 그냥 지방군벌 찌질이 레벨, 그에 이은 우에스기 켄신도 신경질 졸 부리는 약탈방화범...정도로 인식될지도요.

      (저런 것으로 IF전기를 써도 재미있겠군요 ^^ )

  2. 나라 2009.08.02 2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는 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3 0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운이 없는 편이라 생각합니다.

      코마키-나가쿠테에서 본전만 찾았더라도 이에야스는 코너로 몰렸겠고, 그랬다면 히데요시의 위상도 더 높아짐과 동시에 동국의 방파제로서의 히데츠구의 가치도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츠루마츠의 죽음도 어쩌면 운이 없다고 볼 수 있죠. 츠루마츠가 살았다면 적당한 위치에서 적당한 보호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겠지만, 츠루마츠의 죽음으로 준비도 없이 단번에 No.2 이후는 뭐...

      가장 운에서 버려진 것은 역시 히데요리의 탄생. 속 좁아져 자기 아들밖에 안 보이는 권력자의 눈에 No.2는 단순한 방해물밖에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뭐 머든 결과론이지만 말입죠.

  3. 나라 2009.08.03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는 히데요리가 탄생했을 때에 관백을 반납하고 머리를 낮췄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아니면 오슈의 제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_-;;)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들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그것땜시 나중의 비극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우선 절대로 없었을 것 같군요.
      오우슈우에서 조선까지 가는 동안(즉 일본 내에서의 이동 만으로) 어마어마하게 드는 쌀과 돈을 생각하면...
      거기다가 오우슈우의 무장들은 카사이-오오사키의 난, 쿠노헤의 난에서 이미 병역을 치루었기에 임진왜란 때는 면제가 된 것 같더군요. 굳이 갈 필요 없는데 간 다테 마사무네가 특이하다면 특이 케이스....하긴 임진년 초기에는 우에스기 패거리들도 건너가서는 금방 돌아온 애들이고.

  4.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8.03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게 다 히데요시 때문이다 랄까(...)
    물론 살생관백이라 불려질만큼 히데츠구가 저지른 일은 옹호할수 없지만... 히데요리에 정신이 팔려서 마무리가 흐지부지한것이...
    그냥 조용히 불러서 히데츠구 너님 다음 칸파쿠로 히데요리는 어떻냐 나중에 물려주면 안되겠냐 하고 좋게좋게 협상해서 끝났으면 나중에 이에야스 러쉬가 와도 토요토미씨 멸망까진 안갔을텐데 싶네요.

    그나저나 구레나룻이 뭔가 인상적이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살생관백으로 유명한 여러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소스를 시작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려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의 [태합님 군기에 대해서(太閤さま軍記のうち)]...것도 '그랬다!'가 아닌...'~라고 하더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며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이럴 때마다 느끼는 비애.. 원본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죠. '누가 그러더군요'는 식으로 쓸 수 밖에 없어 안타깝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히데츠구가 악행을 저질렀을지 어땠을지...개인적으로 청개구리파인지라 남들이 대세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비틀어 보는 경향이 있는지라 전 히데츠구 무실설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 히데요리도 히데츠구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눈치는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히데츠구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구렛나루 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도 한 구렛나루 합죠.... 그러고 보니 우지사토는 엄청 미남이라고 하며 히데츠구도 잘 생겼다는 이야기도 보이더군요...그렇담 센고쿠 미남의 조건 중 하나는 구렛나루?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는지요 ^^

    여기 오면서 <역사군상>이란 책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어떤 책인가 싶으면서도 머릿 속에 대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제가 생각했던게 그거였네요. 꼭 사고 싶지만 일본어와 비용의 압박이 심하군요 -ㅅ-;;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 잘 지내시죠? 전 덕분에 (돈 없는 거, 애인 없는 거, 집 나간 고양이 생각하는 거 빼 놓고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진 편입죠. 예전엔 고문을 그대로 쓰고 해석도 안 해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요즘엔 그래도 해석도 써 주고 루비(한자 위에 발음 써 주는 거)도 달려서 읽기는 많이 편해졌습니다....만 그 대신이랄지.. 가끔 황당한 주장을 실어서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황당한 주장이라면 학설같은건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6: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제가 또 말을 실수했네요. 그냥 잊어주시길. ^^; 료우마에 관한 것에서 료우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었다는 글이 워낙 인상에 남아서 실수를 저질렀네요.

  6. shiroyume 2009.08.08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양반... 전에는 히데요시한테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대망의 영향인지...)

    역시 생각해봐도 설사 히데요리가 안태어나도 붙잡혀 죽었을 듯. 어째 우리의 고려의 막장군주 충혜왕과 겹쳐지는건 -_-;

    그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양자가 되었을라나.

    저는 팩트를 중요시하는편이라 시바료타로를 재밌게 읽긴 하지만 링크걸어놓은걸 보니 확실히 뭐라고 해야하나...가독성은 떨어지는군요. 한국에서 인기가 없었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일본은 문화적성향상 디테일도 중요시 여기지만 한국은 가독성이 있고 흐름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최악의 사서로 평가받는 이문열 삼국지가 잘 읽히는건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주 무능하거나 알려진대로 좆병진이었다면 내버려 두어도 인심은 알아서 떠날 것이며 또한 자멸할 터이니 죽일 필요까진 없었겠죠. 아주 뛰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능력과 인덕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자신이 일군 업적을 빼앗길까 두려워 한 것이고 그렇게 참혹히 관련된 사람들을 죽인 거 아닐까요?

      츠루마츠 죽은 시점에서라면 히데아키처럼 처의 친족보다는 히데츠구의 친동생이며 역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히데카츠(秀勝)가 되었을지도...무엇보다 히데요시의 친아들 히데카츠의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이니까요.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야 제가 번역해서 그런 거고요. ^^;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역사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제대로 번역작업하시는 분이 하셨다면 정말 좋은 글이 나왔을 듯.

  7. 1 2009.08.10 0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료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라는 글 굉장히 구미가 땅기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블로그에 소개해주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그런 글을 올렸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분들이 있을까봐 피하고 싶군요.

      우리나라에 들어온 료우마의 인식이야 시바 선생의 '료마가 간다' 정도일텐데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유포시킬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불가능합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덧붙이자면 음모론은 거의 대부분이 구라입니다. 있는 사실을 빼놓고 주장하고픈 사실들만 나열해서는 독자를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료우마의 프리메이슨 꼬붕설은 그런 류의 하나입니다.

      일본어 아신다면 '신 역사군상 시리즈④ - 유신창세 사카모토 료우마' 150~152페이지를 참조해 주십시오.(몇 일전 들린 교보문고에 저 책은 아직 몇 권 더 있더군요)

  8. agger 2009.10.08 0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츠구의 여타 능력은 솔직히 잘 모르겠으나 정치적인 식견이 없었기에 죽음을 자초한것이라고 생각..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졌을때 알아서 기었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드는군요
    아니면 아예 요도도노에게 굽신굽신 하면서 히데요리의 후견인 비슷하게 가겠다는 정치적 움직임을 보여주거나..하튼 히데요시에게 안심을 주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어야 했는데..그런 부분이 안타까움..

    개인적으로는 히데요시를 참 좋아하고 그런 모습을 닮고 싶은데(말년빼구요 ㅋㅋ) 히데츠구가 죽은 시점이 도요토미가의 몰락?을 예견한 분수령이 된거같아서 아쉽게 느껴지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8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히데츠구에게는 히데요시를 안심케 할 만한 뭔가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런 일을 했는데도 히데요시가 부족했다고 느겼을 수도 있고요)

      히데요시가 히데츠구에게 붙여준 가신단의 면면들을 보면 확실히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단지 역시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이 토요토미 가문 그리고 히데츠구에게는 마이너스였던 것 같습니다.

.

 

 미야는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되었다.

 유자라는 것은 [또한() 아들()과 같다()]는 말에서 유래하고 있다. 양자(養子)와의 차이는 거의 없으며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구별되기도 한다. 양자인 경우는 그 양갓집에 살며 양갓집의 성()을 쓰는 것이 원칙인 듯싶지만, 유자의 경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양자인 미야[宮]는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修寺家]에서 살며, 텐노우[天皇]의 일족으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그 환경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달이 저물었다. 2월에 들어서자 따스한 날들이 많아져, 그 달의 중순 즈음에는 궁궐(御所)에 심어져 있는 꽃의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 올해는 꽃구경 연회(宴會)가 일찍 열릴 것이다.

 하고 궁정에서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25일이 지나 따스한 비가 내렸고, 다음 날 궁궐의 이누이고몬[乾御門] 부근에 있는 벚꽃이 별안간 60%정도 꽃피었다. 텐노우[天皇]는 놀라 예정되었던 연회를 서둘러 28일로 정하였다.

 

 당일 미야도 이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라고는 하여도 텐노우의 말하자면 사적인 놀이이기에, 출석자도 친왕(親王)과 그 일족이나 미야몬제키[宮門跡][각주:1], 측근인 상급귀족[公卿] , 말하자면 궁궐 내의 사람들로 한해져 있었다.

 자연히 히데요시는 초대받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초대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현재 토우카이[東海]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외교적 절충에 바빴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오오사카[大坂]에 있을 터인 히데요시가 갑자기 가벼운 차림을 한 병사들을 이끌고 쿄우토[京都]궁궐에 입궐한 것이다. 다른 용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쿄우토에 온 김에 텐노우에게 문후(問候)드린다 는 것만이었다.

 어쩌다 이날 궁궐의 정원에서 벚꽃구경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 즐거운 기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고 하여 텐노우에게 알리지 않고, 궁궐 정원의 구석에 몸을 숨기고 선 채로 꽃을 구경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출하였다. 그것을 나중에 텐노우가 알게 되었고, 굉장히 흥겨워하였다. 이런 종류의 정취만큼 궁정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호우 칸파쿠[ 白]에게

 

 하고 직접 쓴 시 한 편을 무가담당(武家)의 귀족에게 맡겼다.

나무 숲에 색향이 남은 활짝 핀 꽃

떨어지면 궁궐의 봄도 지날 지어다.

木立より色香もる花ざかり

散らで雲井の春やいぬらむ

 히데요시는 그것을 받자마자 곧바로 답례의 시를 만들어 받쳤다.
안개 속에 숨어서 바라보건만

있는 것을 들킨 꽃나무 아래

忍びつつ霞みとともに眺めしも

けりなのもと

 라는 것이었다. 이 주종간에 시를 주고받은 아름다운 광경은 순식간에 궁정의 좋은 화제(話題)가 되었고, 미야도 당연히 그것을 들었다. 시를 보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황송한 일이지만 텐노우의 시보다도 히데요시의 즉흥 쪽이 몇 배나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우 칸파쿠[白]는 시에 관한 소질도 있으시군요

 

 하고 미야는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에게 말했다. 하루토요는 이 즈음 곤다이나곤[大納言]으로 승진하여 무가담당(武家)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텐노우의 시를 히데요시에게 전한 것은 그였으며, 답례의 시를 가지고 온 것도 그였다.

 

 그러하옵니다

 

 하고 하루토요는 무탈하게 답했다. 하루토요도 히데요시에게 시의 소질이 있는 듯 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멋진 답례시는 히데요시의 작품이 아니라 아무래도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첨삭(添削)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미야에게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미야는 평생 이 시를 히데요시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믿을 만큼의 근거가 후년의 미야 마음속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해, 1598 3 15일에 다이고[醍醐] 꽃구경이 개최되었을 때, 히데요시는 미야의 앞에서 미야와 노는 재미를 즉흥적으로 시로 만들었다. 시는 극히 자연스러운 가락으로,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미야는 자신의 생애에서 히데요시의 시를 많이 보았고, 그 중 몇 수는 수작(秀作)으로 기억하였다. 미야에게 있어서 히데요시라면, 그가 가진 재능 중에 가장 서툴렀을 터인 시가(詩歌)조차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미야가 히데요시의 유자가 된 1586년에 미야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7 24, 친부 사네히토(誠仁)친왕이 갑자기 와병(臥病)하여, 그 날 중으로 죽은 것이다. 사네히토 친왕은 텐노우인 오오기마치[正親町]의 세자였기에, 이 급사(急死)는 궁정에 있어서도 정말 큰일이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 있어,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쿄우토[京都]에 올라왔지만 임종의 시간에는 맞추지 못했다. 나중에 황위계승이라는 문제가 남았다. 당연 미야의 형인 카네히토 친왕[周仁親王]이 계승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다.

 

 이 해의 9.

 새로운 황태자인 카네히토 친왕이 성인식(元服)을 치렀다. 에보시오야[烏帽子親]의 역할은 궁정에서 가장 높은 신하인 히데요시가 맡았다. 이어서 오오기마치 텐노우가 예전부터 희망하던 대로 상황(上皇)가 되었고, 11 25일 카네히토 친왕이 황위를 물려받아 시신덴[紫宸殿]에서 즉위하였다. 이 새로운 텐노우가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이다.

 

 미야의 친형인 새 텐노우[天皇]는 아직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아직 황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미야가 황족으로서는 필두의 위치에 앉게 되었다. 이 텐노우[天皇]에게 만약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미야가 텐노우[天皇]로 즉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토요토미 가문의 유자였다.

 - 그래서는 곤란하다.

 라는 감정이 상급귀족[公卿]들에게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족보에서 지워둘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한층 더 강하게 가졌다. 자신이 외척으로 있는 그 황자가 토요토미 가문을 이어받는 것보다 텐노우[天皇]가 되어 주는 편이 훨씬 고마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토요도 말을 꺼내기 어려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새로운 텐노우[天皇]의 죽음을 바라는 듯 하여 온당치 않았다.

 

 정작 미야는 그러한 사태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에 살며 일본문학에 정진하고 있었다. 특히 요즈음은 쿠죠우 타네미치[ 稙道]에게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강석(講釋)을 듣기 시작하고 있었다.

 양아비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다음해의 봄,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 정벌을 위해서 오오사카 성을 출발하였을 때, 미야는 수많은 상급귀족[公卿], 상급승려[門跡] 등과 함께 히데요시의 출진을 배웅하기 위하여 오오사카로 내려갔다. 히데요시가 말을 탄 채 성문을 나설 때,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칙사가 도착하였다. 사람이 달려 그것을 말 위의 히데요시에게 알렸다.

 

 그때부터가 상식을 벗어났다. 히데요시는 일순 공황(恐惶)하여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땅에 앉아 서둘러 투구를 벗고 배례(拜禮)하였다.

 도열해 있던 다이묘우[大名], 쇼우묘우[小名]들은 히데요시의 정중함에 놀라 그들도 또한 땅에 굴러 떨어져서는 엎드려 절을 하였다.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도 이 생각지 못했던 광경에 눈을 크게 떴고, 또한 넋을 빼앗겼다. 히데요시야말로 이 지상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지배자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히데요시가 낭패하여 엎드려 절을 할 수 밖에 없는 텐노우[天皇]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란 말인가?

 미야는 그 눈으로 이 광경을 보고, 미야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頼朝]카마쿠라[鎌倉]에 막부(幕府)를 연 이래, 정권(政權)은 무가(武家)로 옮겨졌다. 지금까지 무가의 우두머리(棟梁) 중에 이 히데요시만큼이나 텐노우[天皇]를 존숭(尊崇)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때의 광경을 미야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 해. 히데요시는 여름 중순까지 큐우슈우[九州]에 있었다. 미야는 이해 나카노인 미치카츠[中院 通勝]에게 신고금(新古今)[각주:2]에 대해서 강석을 받았다. 양부인 히데요시는 매우 바빴지만, 미야는 그렇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1. 황족이 불문에 들어간 것 또는 주지로 있는 절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시집 여덟 편의 모음 하치다이슈우[八代集]의 마지막 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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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12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확실히 유우사이가 첨삭해줬다면야..(-_-;) 당대 최고의 강사가 첨삭해준 본고사 문제지 제출하는 느낌이겠군요(-_-;)

    생각해보면 히데요시또한 당대의 관습을 많이 깨어버린 사람이 아닐가 싶습니다. 저렇게 존숭하는 면도 있긴 하지만.. 우다이진까지 오른 노부나가야 그렇다 쳐도 고셋케의 전유물인 칸파쿠에 오른건 참..

    그런데 그런것 치고는 반발이 적군요. (역시 천하인의 포스라는건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16 0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화도 잘봤습니다. (NOA입니다^^;)
    히데요시가 데리고 가지는 않았군요. 어쨌든 가족이 되긴했지만 뭐랄까...
    시기가 시기인만큼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지금의 입양은 가슴으로 낳는다라는 말로 당시를 생각해보면 왠지 오묘한 느낌이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늦어져 죄송합니다.

    다메엣찌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칸파쿠에 오른 것은 당시로써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었을지...

    그쵸~ 천하인의 포스!!
    (뭐 자기만 칸파쿠 되었다가 다시 되돌려 준다고 해 놓고서는 토요토미 가문을 창설하여 자기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행동을 하였기에, 코노에 가문은 다른 가문들에게 속아서 빼앗겼다고 욕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말이죠)

    zardizm님//아이디가 티스토리의 주소와 같군요. ^^
    일본사에도 유사한 예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유자의 경우.... 관위승진을 빨리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들 하더군요.
    (사족으로... 저는 입양이라고 하면, 과거 여배우 최진실씨의 초창기 작품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작품이 먼저 생각이나서 왠지 슬픈 느낌이 듭니다)

  4.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9 09: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가 천황께 답장한 저 시 참 좋네요 언젠가 써먹고자 메모해둡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1602 10 18일 병사(病死) 21

1582~1602.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1]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 처음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이어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승리할 수 있도록 서군을 배신하여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50만석 다이묘우[大名]가 되지만 곧 젊은 나이에 죽었다.









역사를 바꾼 선택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이름을 단번에 알린 것은 다름 아닌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하지만 히데아키는 그 2년 뒤인 21살의 나이에 죽어버렸다. 따라서 히데아키에게 있어서 말년은 그 2년간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날 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서로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한 모략 싸움이 활발히 펼쳐졌다. 하지만 결전 당일인 9 15, 히데아키는 고민 끝에 아군인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내응을 결심하여 머물고 있던 마츠오 산[松尾山]을 내려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진영을 급습한 것이다. 히데아키의 배반에 당황한 서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연달아 무너져 결국 서군이 괴멸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 전투로 인해서 동군의 총대장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패권(覇權)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직접적인 승리의 요인은 히데아키의 결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10 15일 논공행상에서 히데아키는 큐우슈우[九州]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에서 서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영지였던 비젠[備前], 미마사카 57만석으로 가증(加增) 이봉(移封)되어 오카야마 성[岡山城] 거성으로 삼았다.


 하지만 비젠의 오카야마 성으로 옮겼을 즈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예전보다 더 술을 즐기기 시작하였고 그것도 날이 갈수록 더 마시게 되어, 쿄우토[京都]에서 죽은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를 공양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던 양어머니 키타노만도코로를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히데아키는 1582년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 3살 때 히데요시 부부의 양자가 되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후계자로 길러졌다.

 히데요시 부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히데아키는 당대 제일의 문화인으로 알려진 쇼우고인 도우쵸우[聖護院 道澄]에게 글자를 배우거나 와카[和歌] 그리고 케마리[蹴鞠][각주:2]를 할 때의 손 움직임, 축이 되는 발의 움직임 등도 단번에 습득할 정도로 똑똑한 소년이었기에 기대를 받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1593년에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피를 이은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다. 이것은 히데아키가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 후보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친족으로 중히 여겨 1597년 조선 재출병[각주:3] 때에는 총대장으로 파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보낸 히데아키를 불쌍히 여긴 히데요시는 살아 생전에 히데아키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내가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어떠한 것이건 들어주길 바란다고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히데아키 자필(自筆) 돈 차용증.


매사냥 직후의 급사(急死)


 1602년 초두에 히데아키는 이름을 히데아키라[秀詮]로 개명하였다.

 이는 전년에 일어난 - 히데아키에게 간언(諫言)한 스기하라 키이노카미 시게마사[杉原 紀伊守 重政]를 죽인 사건이나, 숙노(宿老)인 이나바 마사나리[稲葉 正成][각주:4]를 쫓아 낸 사건 등 가문 내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나아가겠다는 의미에서 개명했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 히데아키는 쿄우토[京都]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고모 겸 양어머니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어떤 때는 황금 50(500)이라는 거금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빌리기도 했다. 사용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등 혼란 속에서 술에 빠져 평판이 좋지 못한 히데아키를 키타노만도코로는 죽은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마지막까지 뒤를 돌봐준 것이라 생각된다.


 히데아키가 죽은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에게서 거금을 빌린 불과 반년 후인 10 18일. 향년 21살이었다.

 사인(死因)에는 여러 설이 있어 확실치 않지만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 동서 양군의 내응 공작에 마지막까지 고민한 끝에 결국 아군을 배신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여 양심의 가책과 주위의 비난에 견딜 수 없어 미쳐 죽었다고도 한다.


 죽기 직전인 10 15일.

 매사냥을 하러 나갔던 히데아키는 해가 저물어서 성으로 돌아왔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한 채 눕자마자 인사불성이 되었다. 다음 날에는 숨이 중간에 멈추기도 하여 놀란 측근들이 쿄우토[京都]에 파발을 보내기도 했다. 17일에 잠깐 눈을 떴지만 다음 날 새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히데아키가 죽기 3일 전인 15일에 형인 키노시타 토시사다[木下 俊定]도 급사하였기에 그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1.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네네[寧々]를 말함. [본문으로]
  2.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축구의 리프팅과 같은 경기. 여러 명이서 사슴 가죽으로 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발등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경기.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이름. [본문으로]
  4. 아직 이 때의 성은 하야시[林]였다. 코바야카와 가문을 떠난 후 미노[美濃] 이나바 시게미치[稲葉 重通 – 이나바 잇테츠[一鉄]의 서장자(庶長子)]의 사위가 되어 성을 ‘이나바’로 바꾸었다. 여담으로 이때 결혼한 것이 후에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의 유모]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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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7.05 14: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인에 관한 글은 보기가 딱 좋은데, 본문은 글씨가 작아서 읽기가 좀 힘드네요;;
    죽음의 원인이 좀 황당하긴 하군요... 특히 3번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7.05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그러더니 또 그러는 건가....
    좀 고쳤는데 이번엔 어떠신가요? 글구 이 포스트 말고 다른 곳도 그런가요?
    -------------------------------------------------------------------------
    히데아키의 사인은 그가 배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무사답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1.21 2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번 설에서, 제가 알기로는 시동이 그랬는데, 그 시동이 여자였던 겁니까?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1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시동에게 죽었다는 것도 읽은 적은 있지만, 무사다운 죽음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곳엔 '시녀'를 썼습니다.(흐름이 똑같다 보니.. 술먹고 깽판 -&gt; 몇 몇 죽어 나감 -&gt; 공포를 느낀 시녀(혹은 시동)이 칼을 탈취하여 죽임)
    &quot;시녀(혹은 시동)&quot;이라고 할 걸 그랬네요.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lucktoyou326 BlogIcon 2008.09.08 2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한정보, 담아갑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12 0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신다고 하여도 링크인지라 실망 안 하셨을지...

토요토미가(家)의 사람들

일본서적 번역 2007.06.24 08:58 Posted by 渤海之狼


카테고리 "豊臣家의 사람들"의 책표지..

매주 월요일에 업데이트 하기로 했지만...

현 상태에서 그래도 꽤 많이 번역한 편이지만...

주석다는 것이 넘 귀찮아서 올리지 않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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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6.24 2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네요. 와... 새로운걸 하시는군요. 기대됩니다^^

도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1591 1 22일 병사 51.

1540~1591.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이부제(異父第[각주:1]). 히데요시를 보좌하며 하리마(播磨) 공략전 등 여러 지역에서 활약. 혼노우(本能)()의 변 후에는 히메지(姫路)()에서 천하 통일을 도왔다. 키이(紀伊), 이즈미(和泉), 야마토(大和)를 영유(領有)하며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으로 불리는 실력자였다.










히데요시를 지탱해 온 동생


  오다 가문(織田)에서 출세한 형 히데요시의 꼬임에 넘어가 억지로 사무라이가 된 '키노시타 코이치로우 히데나가(木下 小一郎 秀長)'. 하지만 형과 함께 전장(戰場)에서 활약하면서 형의 좋은 조언자, 보좌역이 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타지마(但馬)를 평정한 1581년.

 히데나가가 이즈시(出石)()에 입성하여 타지마를 통치하였으며 히데요시가 타지마, 하리마를 영유하자 1582년 히데나가가 히메지성으로 거처를 옮겨 그 지역의 경영에 힘썼다. 그리고 1585 히데요시와 함께 키이의 네고로(根来), 사이가(雑賀) 토벌에 참가하여 그 지역을 평정하자 히데요시에게서 키이, 이즈미 양 지역이 하사 받아 영지 경영을 위해서 와카야마(和歌山)에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의 시코쿠(四国)정벌에서는 병에 걸려 누워있던 히데요시를 대리하여 원정군을 지휘. 불과 50여일 만에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를 항복시키는 전공을 올렸다. 히데요시는 동생의 이런 생각하지도 못했던 전공을 기뻐하여 야마토, 이즈미, 키이의 3개국() 100만석의 영주로 임명하였고 거성(居城)으로 야마토 코오리야마(郡山)()이 주어졌다.


 히데나가는 히데요시를 닮아 인정미가 넘쳤고 거기에 온후하고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큐우슈우(九州) 원정 후인 1588 8월 종이위(従二位)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서임 받으면서 부터는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이라 불리며 [토요토미 가문 내에 관한 것은 소우에키(宗易 = 센노리큐우(千利休)]에게, 천하에 관한 일은 히데나가에게]라는 풍설이 돌 정도로 히데나가는 리큐우와 함께 히데요시의 양 팔이 되어 토요토미 정권을 뒤에서 지탱했다.


히데나가가 죽은 후, 갈팡질팡하는 히데요시


 1590 3월.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를 출발, 오다와라(小田原)를 토벌하기 위해 떠났다. 이 때 히데나가는 쿄우토(京都)에 있었는데 1월에 한 때 중태에 빠질 정도로 위중한 병에 걸려있었다. 히데요시는 걱정한 나머지 병상에 있는 히데나가를 세 번 병문안 한 후에야 출진하였고 이 병문안으로 안정을 찾았는지 히데나가의 병이 일단은 나아져, 4 15일에는 야마토 코오리야마에 귀성했다. 하지만 히데나가의 병은 회복되지 않고 재발하였다.


 10월 오다와라 토벌을 끝내고 쿄우토(京都)에 개선한 히데요시는 곧바로 야마토 코오리야마로 달려가 히데나가를 병문안 하였다. 그리고 나라(奈良)의 카스가(春日) 대사(大社)5천석을 기부하여 병이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의뢰하였고 쿄우토(京都)로 돌아와서도 쿄우토(京都) 안팎의 여러 절과 신사에 병이 낫게 하는 기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바램도 허무하게 히데나가는 새해가 밝은 1591 1 22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에서 죽었다. 향년 51.

 장례는 히데요시가 주최하였고 1 29일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보제(菩提[각주:2])사였던 다이토쿠(大徳)() 소우켄(総見)()에서 코케이 소우친(古渓 宗陳) 화상(和尙)을 도사(導師)로 초빙하여 성대하게 치렀다. 묘는 당초 성 아래인 미노야마(箕山)에 세워진 후 코케이 소우친 화상에 의해 보제소 타이코우(大光)()이 세워져 옮겨졌다.


 히데나가가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에 있던 것은 6년여에 지나지 않지만 히데요시를 보좌하는 한편 코오리야마 성()을 크게 개축하면서 성 밑 마을(城下町)을 정비하였고, 옛날부터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절 등이 가진 무력을 해체하여 지역에 바탕을 둔 세력을 뿌리째 없애버리는 등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에 이르는 길을 정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히데나가의 죽음으로 인해, 히데요시는 가족 중에 좋은 조언자를 잃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토요토미 정권의 장래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센노리큐우에게 할복을 명하는 등 히데요시 말년의 폭주가 시작된 것이다.


코오리야마 토요토미가() 폐절(廢絶[각주:3])


 후계자를 낳지 못했던 히데나가는 히데요시와 히데나가의 누나로 칸파쿠(関白) 히데츠구의 생모인 토모의 셋째 아들 히데야스(秀保)를 양자로 삼았다. 후에 [야마토 츄우나곤(大和 中納言)]이라 불린 히데야스가 히데나가의 영지를 이은 것은 그의 나이 13살 때.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성질이 더럽고 나아지질 않았다]고 할 정도였으며 더구나 악성 치질에 걸려 고생하여 이 치질 요양을 위해서 야마토의 토츠카와(十津川) 온천에 간 1595 4 16 잘못해서 절벽에서 떨어져 추락사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죽음을 불길하게 여겨 코오리야마 토요토미가() 2 11년 만에 폐절해 버렸다.


 히데요시는 이후 야마토 코오리야마에 오봉행(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20만석을 주고 배치하였지만, 세키가하라(ヶ原)의 싸움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했을 뿐만 아니라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을 폐성하기로 결정하여 철저하게 부서졌다.


 또한 히데나가의 묘가 있는 타이코우(大光)()은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大徳)()로 옮겨졌는데, 이것은 이장한 타카토라(高虎)1576년에 20살의 나이로 히데나가를 시작으로 1595년 히데야스가 죽을 때까지 코오리야마 토요토미 가()를 섬겼기 때문이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에서 토요토미 가()가 멸망하면서부터 해가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히데나가의 묘를 보고 안타까웠던 타카토라는 토요토미 일족의 묘가 있는 쿄우토(京都)로 옮겼으며 히데나가는 지금도 다이토쿠사()의 타이코우원() 안에 있는 묘소에서 타카토라의 묘와 사이좋게 나란히 잠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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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xkore BlogIcon 포증 2008.05.03 2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온후한 성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초상화는 왠지 날카로워보이는군요. 가네가사키 퇴각전 등에서 자신이 세운 군공도 형인 히데요시에게 양보를 했다고...
    섯부른 가정이기도 하겠지만, 히데나가가 장수했다면 임난이 일어나지 않거나 조기에 종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이 있긴 합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 그런가요? 아직 저때는 어차피 히데나가가 세운 공도 히데요시에 포함될 것 같은데...

    어땠을까요...(전 사이가 좋았다던 히데츠구와 트러블이 생겼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
    토쿠가와가 천하를 잡는 것이 굉장히 늦어지기는 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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