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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11 다테 하루무네

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

1577 12 5 병사(病死) 59.


1519~1577.

다테(伊達)씨 제 15대 당주(当主). 동생 사네모토(実元)에치고(越後) 우에스기(上杉)()에 양자로 들어가는 문제로 부친인 타네무네(稙宗)를 유폐하여 [텐분(天文)의 난]을 일으킨다. 가중에서는 권력의 강화에 힘썼고, 외교에서는 11명의 자식들로 동북 여러 가문들과 연을 맺어 다테 씨의 지위를 높였다.






부친은 토우호쿠(東北) 호족들의 영웅.

 

 1522년.

 그 전년에 쇼우군(将軍)이 된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는 대대로 쿄우()에 올라와 인사를 해 온 다테 타네무네에게 므츠(陸奧)국 슈고쇼쿠(守護職)의 임명서를 주었다. 타네무네는 일약 바쿠후(幕府)의 관직을 얻어 일개의 호족에서 다이묘우(大名)로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아들에게 장군의 이름 한자를 얻어 하루무네(晴宗)로 이름 짓는 것도 허락 받았다.


 원래 토우호쿠(東北)지방은 토지의 생산성이 낮아 말을 키워 헌상하는 것 외에는 산물을 받칠 수가 없었다. 헤이안(平安) 즈음부터 금()을 산출할 수 있게 된 후 후지와라(藤原) 4대의 화려한 시대가 지난 후부터 차츰 촌락이 발달해 조정의 관직도 임명 받게 되고 바쿠후(幕府)에서도 오우슈우탄다이(奧州 探題)가 설치 되었다. 탄다이의 핏줄을 잇는 오오사키(大崎), 모가미(最上)의 양 가문이 다른 슈고쇼쿠(守護職)의 후예와 함께 차츰 센코쿠 다이묘우(戦囯 大名)가 되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다이묘우(大名)다른 지방에서 임명, 파견된 자들의 후손들이었기에 오우슈우(奧州) 지방의 토박이인 다테씨가 슈고쇼쿠를 받은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던 것이다.


 타네무네는 다테군() 외에 10개의 군()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진카이슈우(塵芥集)]라는 법령집을 만들었다. 이것은 전시대인 카마쿠라(鎌倉)막부의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과 똑같다고 하기에 문화적인 후진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내용은 당시 토우호쿠지방 독특한 농촌사정도 반영되어 171개조에 걸쳐 세분화되어 있다. 이렇게 군사, 정치, 경제, 재판권에 걸쳐 영지 지배의 기반을 세워 올렸다.


하루무네와 텐분의 난.


 타네무네의 명예욕은 더욱 커져 모친 쪽의 가문인 에치고(越後)의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実)에게 친아들이 없자 자신의 차남 토키무네마루(時宗丸)를 양자로 보내는 공작을 하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즈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의 부친)에게 불순한 움직임이 있어 분쟁이 진정될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1542(천문 11) 6월.

 정예병을 이끌고 에치고에 가려고 했던 타네무네를 장남 하루무네가 반대하여 갑자기 부친을 유폐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단순한 부자간의 싸움이 아니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내란이 점차 근린으로 확대되어 타무라(田村), 니혼마츠(二本松), 소우마(相馬), 모가미(最上),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 쿠로카와(黒川), 이와키(岩城) 등의 다이묘우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까지 끌어 들여서는 7년에 걸쳐 싸우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어째서 이러한 사태가 되었느냐를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인척관계에 의한 동맹은 일대(一代)로 끝나는 것으로 다음 세대가 되면 그대로 동맹이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다테씨만의 문제가 아닌 다른 곳도 비슷한 사정이었기에 결국은 세대간의 항쟁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복잡해 지면 대개혁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무네(다테씨 15대 당주)는 우선 본거지를 대대에 걸쳐 지켜왔던 다테군()에서 데와(出羽) 오이타마(置賜)군의 중심지 요네자와(米沢)성으로 옮겨 다테씨가 명실공히 일신되었다는 것을 내외에 알렸다. 거기에 1553(천문 22) 1월 내란의 논공행상이라는 명목으로 영지 재편을 단행하였다. 반항했던 신하의 영지는 몰수하는 식으로 가신들의 영지를 대담하게 맞바꾸었다. 이것은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행한 전국적인 영지 바꾸기의 소규모이지만 선행판(先行版)이라 할 수 있는 효과를 올려 일족(一族), 일가(一家), 토자마(外様)라는 가신단의 서열을 확립했다.


말년은 오우우(奥羽)지배의 포석


 영내의 정비에 성공한 하루무네는 말년까지도 오우우 일대에 다테가문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 갔다.

 하루무네 자신의 정실은 아시나(盧名)씨의 출신이며, 아시나씨에게는 여동생이 시집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즈(会津)의 유력 다이묘우와는 2중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 위에 자매의 연으로 소우마(相馬), 니카이도우(二階堂), 타무라(田村), 카케다(掛田)씨와는 인척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갖추어지자 하루무네는 세자인 테루무네(輝宗)를 모가미 씨의 딸과 결혼[각주:1]시켰고, 이와키성에는 차남 치카타카(親隆), 루수(留守)씨에게는 삼남 마사카게(政景), 이시카와씨에게는 아키미츠(昭光), 코쿠부(囯分)씨에게는 모리시게(盛重) 등등 정치력을 배경으로 한 강제적으로 양자를 들여보냈고, 딸들을 사다케(佐竹)씨와 니카이도우(二階堂)씨에게 시집보냈다.


 타네무네, 하루무네 2대에 걸쳐 다테씨는 오우슈우(奧州)의 패권을 쥐기 위한 싹을 틔우려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1565년 가독을 상속받은 아들 테루무네(輝宗) 조부나 부친의 미지근한 센고쿠(戦囯) 다이묘우(大名)제를 거부해서 부친 하루무네와 대립한다. 테루무네는 인척관계에 의존하는 동맹을 맺지 않고 아들인 본텐마루(梵天丸 후에 마사무네(政宗))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 세력을 확대해 가는 것을 하루무네는 은거한 시나오(信夫)군 스기노메(杉目)성에서 계속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1577년 12월 5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테루무네는 불행하게도 뜻을 펼치는 도중에 죽게 되나 그 뒤를 마사무네가 이어받아 무력에 위한 오우슈우 제패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1. 이들과의 사이에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태어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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