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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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2.02.23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나다 가문의 인물들은 평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수많은 창작물에 의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센고쿠시대의 아이돌급 인물들이기 때문이겠죠.

    신슈가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생각은 자주 듭니다. 신겐도 무참히 박살난 것이 여러번이요, 도쿠가와도 신슈 전역을 통치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이에야스는 본인이 마사유키에게 직접 패한 적은 없었는데 왜 마사유키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느꼈던걸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3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도 막부의 창시자를 부자이대에 걸쳐 괴롭혔다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나노信濃는 아무래도 남북으로 길며 거기에 산악지방이다 보니 하나의 쿠니国치고는 다양한 세력들이 작게나마 많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생각합니다.
      거기에 시나노라는 지역이 무로마치 시대 때 좀 특수한 지역이었습니다. 쿄우토 무로마치 막부에서 보기에 라이벌인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영향권과 맞다은 곳이다 보니 다른 곳과는 다른 특혜나 명예가 좀 주어졌던 곳이더군요. 아무래도 그러다보니 다른 곳에서 시나노를 차지하는데 더 힘이 든 것 같습니다.

      상기의 일화 등은 에도시대 사나다 가문의 가신인 타케노우치 노리사다[竹内 軌定]가 지은 진무내전(真武内伝)이란 책에 실린 것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조금 의문시됩지요. 이에야스가 실제로 두려움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 대전란에서 도쿠가와 잡는 장면 정말 재밌게봤는데 6편 이후로 번역이 안되니 너무 아쉽습니다.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의 비극은 부친 신겐[信玄]이 너무나도 거대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겐이 죽은 뒤 그 대단했던 다케다 가문[武田家]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직 신겐이라는 거인과의 끈으로 이어져 있던 노신(老臣)이나 숙장(宿將)들 사이에 어린 카츠요리[勝頼]를 얕보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겐이 죽은 지 11일째에 카츠요리는 숙장들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기청문(起請文)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츠요리에게는 초조함이 있었다. 빨리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서 노신들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신겐은 “3년간 죽음을 숨겨라. 병사를 일으키지 말고 영토를 지켜라”하고 유언을 남겼지만, 카츠요리는 그것을 기다릴 수 없었다.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도발해왔기 때문이다. 타케다 측의 미카와[三河] 전선기지인 나가시노 성[長篠城]을 점거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츠쿠데 성[作手城]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 信昌][각주:1]가 토쿠가와 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격노한 카츠요리는 노부마사의 부인과 동생을 십자가에 메달아 옆구리를 찔러 죽였다.

 1575년. 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나가시노 성주가 되었다. 이제 카츠요리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노신들의 간언(諫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츠요리가 정병 1만5천을 이끌고 나가시노를 향해서 코우후[甲府]를 출발한 것이 이 해의 4월 5일이었다.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타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城)을 포위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그러던 중 오다-토쿠가와의 원군이 도착. 결전의 장소는 나가시노 성 밖의 시타라가하라[設楽原]로 옮겨졌다.

 노신들은 주저하였다.
 “결전을 피하고 우선은 병사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카츠요리는 듣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오다-토쿠가와와의 결전을 정했다.

 1575년 5월 21일.
 이날 나가시노 성 밖의 시다라가하라에서 펼쳐진 전투는 일본역사상 획기적인 전투로써 너무나도 유명하다. 정예를 자랑하는 카이[甲斐]의 기마대가 출격했다. 아침안개 속에서 중앙대, 우익의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부대에서 함성이 일었다.

 선두가 오다-토쿠가와의 마방책(馬防柵)을 향하고 돌입하여 단번에 유린하고자 했던 그 순간 엄청난 굉음의 총성이 일었다.
 오다 군의 일제사격이었다. 일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카이[甲斐]의 인마(人馬)가 연달아 쓰러졌다. 보통이라면 이런 후 적과 아군이 뒤섞여 백병전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런 때야말로 카이의 기마 병단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최초의 사격으로 상처를 입지 않은 기마대가 개의치 않고 돌진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또다시 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아무리 용맹하다 하는 타케다 기마대도 이 새로운 전법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은 노부나가가 고안한 전법이었다. 노부나가는 아시가루[足軽]의 철포집단 3천명을 3대로 나누어, 천 정씩 교대하며 쉴 틈 없이 일제사격을 반복하게 한 것이다. 당시 유효 사정거리는 기껏해야 100미터였는데, 노부나가는 카이[甲斐]의 군세를 마방책 앞으로 충분히 끌어들인 다음에 섬멸한 것이다.[각주:2]

 타케다 군은 도망. 사상자 1만여에 더해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후사 등 유명한 무장들도 다수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 그야말로 멸망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전이었다.

 1582년에 오다 군의 진공이 시작되자 타케다에 속해있었던 장수들의 배반이 이어졌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木曽 義昌]의 모반은 타케다 가문 붕괴에 박차를 가했다. 요시마사는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두고 있는 소위 친족이었다. 그 외에도 타케다의 앞날이 어둡다 보고 적에게 달려가는 가신들이 속출하였다.

 결국 타케다 가문의 본거지 신푸 성[新府城] 최후의 날이 왔다.
 성에서 도망치는 초라한 카츠요리의 모습을 당시의 기록자는, [산길을 맨발로 걸었기에 발은 붉게 물드니, 도망자의 모습 애처롭도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니….]라고 전하고 있다.

 1582년 3월 11일.
 카츠요리 일행은 불과 100여명. 무사는 그 중 43명이 되어 있었다. 후에후키가와[笛吹川] 천을 거슬러 올라 최후의 거점으로 정해두었던 텐모쿠잔[天目山] 산으로 향했다. 산허리의 협곡에 있는 마을 타노[田野]까지 갔지만, 여기도 안주의 땅은 아니었다. 다음날 수천의 오다 군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좁은 계곡은 눈뜰 수 없을 정도의 참상이 되었다.

 이때 츠치야 소우조우 마사츠네[土屋 惣蔵 昌恒]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겨, 외길을 타고 공격해 오는 적병을 활로 쏘아 수십 명을 쓰러뜨렸으며, 다음에 칼을 쥐고 싸워 '소우조우 한 손 베기[惣蔵片手斬り][각주:3]'라는 용명(勇名)을 후세에 남겼다. 코미야마[小宮山], 아키야마[秋山] 등의 용사들도 달려드는 군세 속에서 칼춤을 추며 수십 명을 베었다.

 전멸은 이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카츠요리의 아들 노부카츠[信勝]도 십문자[十文字] 창을 들고 눈부신 분전을 펼쳤지만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 일족인 승려(僧侶)와 서로를 찌르는 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일족의 최후였다. 카츠요리는 부인[각주:4]에게 살아서 도망칠 것을 권했지만 부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렸다. 19살의 그녀는 법화경(法華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난 후 사세구(辭世句)를 읊은 뒤 자신의 가슴에 몸칼을 찔러 자결했다.

 카츠요리는 자결하는 여성 16명의 자살을 일행의 장로(長老)가 도와주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카츠요리는 배를 가르고 자결했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46년생. 신겐[信玄]의 넷째 아들로 1573년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미노[美濃]에 침공하였고,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 등에도 진출하지만, 나가시노[長篠]의 패전 이후 회복하지 못하였고,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오다 군[織田軍]과 싸우다 죽었다. 37세였다.

  1. 당시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자 하나를 하사 받은 뒤에 ‘노부마사[信昌]’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상의 이야기는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신쵸우키[信長記]에서 거론된 픽션으로 지금은 의문시되고 있다. [본문으로]
  3.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6번째 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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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영어판 >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부하 장수로 유명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는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그는 용모가 특이했다고 한다. 거기에 에비스(えびす(모습))다이고쿠텐((모습))이 입고 있는듯한 카미코로모(紙衣 두꺼운 종이에 과일인 감의 즙을 발라 만든 천)로 된 하오리(羽織)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남과 다른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듯 하다[각주:1]. 품행은 특이했지만 붓글씨는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주가(主家)인 타케다(武田) 가문과는 대단히 짙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 타케다 가문의 선조 노부타케(信武[각주:2])의 넷째 아들인 시로우 요시타케( 義武)카이(甲斐)아나야마(穴山)를 영지(領地)로 삼아서는 아나야마 씨()를 칭했다고 한다. 그것뿐이라면 동족(同族)에 지나지 않겠지만 바이세츠의 모친은 신겐의 누나이며, 신겐의 딸 켄쇼우인(見性院)은 그의 부인인 것이다. 신겐은 외삼촌이며 또한 장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나 짙은 혈연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하고 적 측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간 것이다.


 신겐이 죽고 젊은 카츠요리()가 타케다 가문의 당주가 되고 난 바로 다음부터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이세츠는 당시 스루가(駿河) 에지리(江尻) 성주[각주:3],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하마마츠(浜松)성(城)과는 거리적으로도 가까워, 카이(甲斐)의 산골과는 달리 오다(織田)()나 토쿠가와 씨에 관한 새롭고 자세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던 장소에 있었다.


 바이세츠가 일찍부터 배신을 마음에 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1575 5월 나가시노(長篠) 전투 때의 일이다. 바이세츠는 아군의 질 것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예상하고는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이탈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정강(精剛)을 자랑하던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은 근대전법의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신겐 때부터 무용을 자랑하던 많은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1581.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에게 진언하여 니라사키(韮崎)신푸(府)성(城)을 쌓게 만들었다. 코우후(甲府)에서 이곳으로 타케다의 본거지를 옮긴 것인데, [사람은 성벽, 사람은 성]이라 말하며 성()이라는 것을 쌓지 않았던 신겐 시대를 뒤돌아볼 것도 없이, 이 축성이야말로 타케다 가문에 말기적 증상이 도래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이 다음 해(1582), 타케다의 유력한 부하장수인 키소 요시마사( 義昌)가 노부나가에게 달려갔다.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둔 일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직후 바이세츠도 배신하였다. 그는 배신에 앞서 신푸 성()에 인질로 보냈던 처자식을 빼돌리는 빈틈없음도 보여주었다. 불쌍하게도 키소 요시마사의 모친과 여동생은 신푸 성()의 정문으로 끌려 나와 십자가에 꺼꾸로 매달린 채 옆구리를 창으로 꿰뚫려 죽었다. 신푸 성()의 인질 천 여명 중 900명이 배신자들의 가족이었다고 한다.


 바이세츠가 배반한 이유는 타케다에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명문 타케다 가()의 혈통을 끊어지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의 자식 노부카츠(信勝)보다 자신의 자식인 카츠치요(勝千代) 쪽이 타케다의 혈통이라는 점에서 더 짙다고 생각한 듯하다. 언젠가 카츠요리 계통은 전쟁 속에서 끊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계통의 존속을 꾀하고자 고심한 것은 아닐까? 카츠치요의 할머니는 신겐의 누나이며, 모친은 신겐의 딸인 것이다.


 어쨌든 이에야스의 알선으로 오다의 군문(軍門)에 항복한 바이세츠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에 일본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과 조우하게 된다.

 혼노우(本能)사(寺) 이었다. 이때 바이세츠는 영지(領地)를 안도해준 것에 대한 사례인사차 아즈치(安土)의 오다 노부나가를 만난 후 사카이(堺)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함께였다. 거기에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변보가 전해진 것이다.

 급히 본거지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가(伊賀)를 지나려 했지만 이때 어째서인지 이에야스와는 다른 길을 취한 바이세츠는 그 도중에 쿠사치(草地())의 나루터에서 농민반란군(一揆)의 습격을 받아 어이없이 죽음을 당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어렸을 때의 이름(幼名)은 카츠치요(勝千代).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겐바노카미(玄蕃頭), 므츠노카미(陸奥守)를 칭했으며, 1580년 머리를 밀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바이세츠사이(梅雪斎)라는 호를 칭했다. 1582년 타케다 멸망 시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붙어 소유하고 있던 영지(領地)를 인정 받지만 혼노우(本能)() 변 후 귀국 도중 농민반란군(一揆)에게 습격 당하여 살해당했다.

  1. 당시 무가의 사람이나 하이쿠(俳句 - 일본의 시)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행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카이 타케다 10대 당주. 참고로 신겐은 19대 당주. [본문으로]
  3. 정확히는 행정과 사법, 군정을 위임받은 죠우다이(城代)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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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10.03 0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무한 죽음 덕분에 배신이 많이 까이는 사람이라지만.. 뭐 그렇게 따지면 토도 다카토라도 세키가하라에서 전사 했다면 더 까일 구석이 많을 사람이니;;

    적어도 그 시점에서 선택이 아주 틀려먹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뭐 다케다가에 끼치는 영향이야 어떻든 간에;;)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10.03 2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이에야스 이외의 누군가가 다음 세대의 정권을 잡았으면 그렇게까지 까일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듣보잡 취급은 받을지 언정). 이 인물이 까이는 것은 자기를 이긴 인물이 킹왕짱이 아니면 안 되도록 만든 이에야스의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당시로써는 적절한 배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타케다 가문과는 동맹국 사이였다고 하니까요(일문이기는 하지만). 굳이 망해가는 동맹국과 함께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10.04 0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아나야마 바이세츠의 혈육은 타케다씨를 칭하는 것에 대해 이에야스놈에게 허가를 얻고 막신으로 일하게 되는 ㅋㅋㅋㅋㅋㅋ 가문살리기의 측면에서 보면 괜찮은 결정을 내린듯하기도..ㅎㅎ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10.04 1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이세츠의 아들 카츠치요는 일찍 죽어서 막신이라고 평가할 수 없지 않나요?
    또한 신하라기 보다는 휘하의 다이묘우로 봐야 하지 않을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시로써는 그리고 그로써는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10.04 2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겐 동생놈중에서 헷갈렸네요.. 타케다 노부자네의 후손들이 막신으로까지 일했는데 아나야마 바이세쯔의 계통과 헷갈린모양입니다 ㅎㅎ 타케다 성을 받은건 확실하니 ㅋㅋㅋ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10.06 18: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바이세츠의 갑옷은 좀 옛날(?)형식인건가요? 오요로이라던가..
    전국시대 말기의 무사들 갑옷을 보면 거의 당세구족(?)형태 같은데.. 바이세츠는 달라보이네요.
    좀 딱딱한 디자인이랄까..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10.07 0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눈썰미 좋으시군요. 전 생각도 못했는데...

    확실히 오오요로이(大鎧)인 것 같습니다.
    허리 아래 부분이 딱딱한 쿠사즈리(草摺), 양 가슴을 보호하는 이타(鳩尾板, &amp;#26676;檀板) 등을 보니 그러한 것 같습니다.

  8. 보통사람 2009.11.26 1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과적으로 보면 반년도 못되는 삶을 위해서
    배신을 택했군요. 저승에서 크게 후회했을듯...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1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명(家名) 존속은 최중요 사항 중에 하나였습죠. 특히나 겐지[源氏]의 명문 타케다 가문[武田家]이라면 바이세츠에겐 배신 보다 가명이 더 중했을 수도 있고요.

      후회보단 오히려....아케치 ㅆㅂㄻ...라는 원망이 더 강했을 것 같습니다.

  적자 노부야스[信康]의 죽음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가 말년이 되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론할 정도로 슬픈 사건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입으로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카와(三河) 지방의 사람들도,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지"

 라 하며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노부야스를 자해(自害)로 몰아넣은 것은 역사상 유명한 '츠키야마도노 사건[築山殿事件]'에 의해서였다. 진상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1579 7 16. 이 날 이에야스는 가신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를 오우미[近江] 아즈치(安土)성(城)으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좋은 말을 헌상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노부야스의 자해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노부야스가 생모 츠키야마도노와 함께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측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노부야스의 부인이며 노부나가의 딸인 토쿠히메[徳姫]가 은밀히 그에 대한 것을 부친 노부나가에게 일러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시대에 결혼한 부인으로, 그녀는 출신이 이마가와의 일족 세키구치 교우부노쇼우 치카나가[口 刑部少輔 親永]의 딸이었기에 콧대가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어떤 사서에서는 츠키야마도노를 히스테리성의 여성이었다고 하며, 이에야스는 그 엄청난 질투심에 넌더리가 나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로 거성(居城)을 옮겼을 때, 데려가지 않고 노부야스의 오카자키 성[岡崎城]에 남겨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이[甲斐]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내통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쩌다가 츠키야마도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카이[甲斐]에서 온 중국인 의사에게 진찰받던 중 그와 관계를 맺었고, 나중에는 이 의사를 매개로 해서는 타케다 카츠요리와 내통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노부나가-이에야스를 물리칠 방도를 카츠요리와 함께 꾀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신빙성은 거의 없다.

 

 진상은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두려워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노부나가는 노부야스라는 존재가 장래 오다 가문에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느낀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와 자신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를 비교해 보면,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노부야사가 월등했다. 오다 가문은 이 노부야스에게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의 싹은 일찌감치 뽑아 두는 것이 좋다 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는 17살 때 이미 그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1575년 토쿠가와 군이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타케다 카츠요리의 군과 싸웠을 때의 일이다.

 카츠요리의 대군을 피하여 퇴각을 하려고 하였을 때, 노부야스는 나서서 신가리[殿]를 맡았다. 아군 퇴각의 무사안전을 위해 최후미에 위치하며 적의 추격을 막는 임무로, 역전의 무장이라도 극히 어렵다는 큰 임무이다.

 더구나 이때 타케다 군은 10만의 대군이었다[각주:1]. 하지만 노부야스의 말은 기특했다.

 장래에 있을 큰일을 위해서 지금은 연습을 해 두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어린 나이로 타케다의 대군과 대치하며, 적이 오오이가와 강[大井川]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후에 세키가하라[ヶ原] 결전 시, 이에야스는 정말 나이 먹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니. 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피곤할 것도 없었을 텐데하고 용감한 노부야스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부야스는 또한 육친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바로 다음 동생인 오기마루[於義丸-후에 히데야스[秀康]]가 정식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노부야스의 힘이 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오기마루에 대한 애정이 없어 좀처럼 자신의 아들로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노부야스는 직접 오카자키 성[岡崎城]으로 3살 먹은 오기마루를 데려가 여러 노력을 기울여 이에야스와 만나게 하였다. 이에야스도 노부야스의 열의에 져, 오기마루를 자신의 아이라고 승인했던 것이다.

 

 그러한 반면 노부야스에게는 포학한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춤을 좋아하여 자주 그런 무리들을 초대하였는데, 어느 날 옷이 맘에 들지 않고 더구나 춤 실력도 떨어지는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노부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아이를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고 한다.

 매사냥의 결과가 신통찮은 것을 만난 승려 탓으로 하여, 그 승려의 목에 끈을 묶어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각주:2]


 1579 8 29.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우선 츠키야마도노를 토오토우미[遠江] 토미츠카[塚]에서 살해했다.

 이에야스로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곧바로 토쿠가와 가문의 멸망을 의미했다. 자신의 힘은 아직 노부나가에 비해 미약했기에 자기 가문 보전을 위해서는 부인과 적자의 목숨도 뺏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해의 9 15.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하는 이에야스의 사자가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 성[二俣城]에 도착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天方 山城)와 핫토리 한조우(服部 半) 두 사람이었다.

 노부야스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확실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키려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부친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시 가부장 권력의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노부야스는 조용히 핫토리 한조우에게 자신의 카이샤쿠[介錯][각주:3]를 명했다.

 한조우는 흘러 넘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어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로 대신하였다.

 카이샤쿠의 칼이 번뜩이며, 여기에 21살의 생명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 信康)]

1559이에야스[家康]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 모친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지만,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 독립함에 따라,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인질이 된다. 1567년 오카자키[岡崎]로 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결혼하고 오카자키 성주가 되지만, 노부나가에게 자해를 명령 받는다.

이 글은 거의 전체가 사실과 다른 글입니다. 필히 밑에 트랙백과 함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타케다 가문의 동원력은 무리를 해도 3만정도로 10만 가까이 동원하기에는 무리다. [본문으로]
  2. 승려는 불살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에, 승려 주변에 있는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사냥 결과가 신통치 않다며 툴툴대는 노부야스를 부하가 달래려고 말했다가 지나가던 승려가 그 짜증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배를 가르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어야 했기에, 믿을 만한 사람에 더해 단번에 목을 자를 수 있는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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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5 2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조에 대해서는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만.
    다른 말들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시점의 문제이지.
    &quot;...그 잣대는 우리 나라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까?&quot; 라며 비꼼을 당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틀린 말을 쓴 것입니까? 무라시게의 경우는. 이미 노부나가가 엔라쿠지를 불태우고 쇼군을 내?는 폭정을 한 이후가 아닙니까?. 노부나가의 여러가지 폭압적인 태도에 두려움을 느꼈고 사소한 사건으로 배반했다..는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고. 그럴 경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지 관리를 엉망으로한 노부나가의 문제가 아닙니까?

    미츠히데의 반란역시. 쇼군이나 사찰등은 제쳐놓고서라도. 사쿠마, 하야시 같은 후다이 가신들을 별 것 아닌 이유로 내?고, 나이 50이 넘은 미츠히데의 영지를 빼앗아 전봉시키고... 주변에서 보기에도 얼마나 틈이 벌어졌기에 '높으신 분'으로부터의 편지가 왔겠습니까?. 이건 잔인한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행동거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잣대란 비교할 대상이 있기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한국사와 중국사를 비교하여 제 기준의 잣대를 만들었기에. 그 잣대를 일본인에게 비교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비꼼을 당하는군요....
    한정된 공간이기에 많은 예를 들기 뭐합니다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5 2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력과 병권을 잡고도 그저 신하를 자처한 주공단의 예. 춘추,전국 시대에는 상대 임금은 핍팍하는 것이 아니다. 라며 풀어준 예들이 있고. 전한 말의 악인으로 꼽히는 왕망도 선양을 받아서 황제가 되었지. 누구처럼 ?아내어 황제가 된것이 아니며. 후한의 화제는 생모에게도, 의모이자 생모의 원수인 두태후에게도 효행을 하여 미덕으로 남았습니다.
    '유교'가 없었거나. 국가의 기본 방침이 '황로술 =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 후한 대 까지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은 더더욱 예를 찾기가 힘듭니다. 유교가 보급된 이후에는 수양제, 형제를 죽인 이세민 정도를 제외하면 더더욱 찾기 힘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닌의 난 이후 전국시대 기껏해야 백년 정도에. 부하가 주군을 배반하고 죽이는 사건은 그야말로 비일비재 하였으며.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일이나, 아들이 아비를 죽이거나 추방하는 일 역시 드물지 않지 않았습니까? 일족을 죽이는 일은 뭐 수두룩 하고요. 모가미 요시아키, 가이 소운, 다케다 하루노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토 요시타츠 등. 거기에 인질을 희생하는 행동을 한 다이묘들까지 추가 한다면 더욱 범위는 늘어나겠죠.

    전국 역사를 잘 아시는 것은 훌륭하십니다만. 최소한 임진왜란 7년만 공부하셨어도 아실텐데요?.. 화약 한통을 얻기 위해 여성 50명이 노예로 팔려가고, 공을 세우기 위해 민초들의 목과 귀가 잘리고, 사찰과 서고가 불에 타고. 책과 보물과 도공들을 약탈해가는...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설과 생각을 취사 선택하고, 그렇게 해서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전국시대에 대한 정보량이 많으시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실망스럽군요. 이후 블로그 잘 운영하시기 바랍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6 0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략쿠지는 당시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고 엔락쿠지에는 아사이와 아사쿠라 군사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노부나가로서는 당시 정권의 중심지였던 교토를 막을 수 있는 방어망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엔락쿠지는 점거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엔락쿠지 침공하기 전에는 미리 내 편을 들면 포상을 내리겠고 적어도 아사이 아사쿠라 잔당들을 숨겨주지 말 것을 청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무라시게가 쫓겨난 것이랑 쇼군이 쫓겨난 것이랑 제가 알기로는 시간 간격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라시게가 1578년에 배반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1575년에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쇼군이 당시 오다가의 적대 다이묘들에게 궐기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아나요?
    덧붙여서 말하자면 엔하운스 님의 방식대로 줏대를 적용하면 한국사의 경우에는 태종의 경우는 자기를 계속 지지했던 왕후쪽 친척을 몰살시켜버렸고, 이성계나,견훤은 자기 자식에게 쫓겨났으며 중국의 경우에도 한 고조 유방도 항우를 물리치는 데 일익을 하였던 한신이나 팽월을 팽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주원장의 공신 척살은 대대로 유명하죠. 그 잣대는 이 쪽에서는 댓수 없는지요?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이 아비나 자식도 몰라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고 이건 세계 역사상 대대로 벌어졌던 일에 지나지 않는데, 딱히 일본이라서 인성이 낮다고 무시하는 것을 진짜 가소롭기 그지없네요. 그리고 전국시대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경우도 나름 합리적인 이유나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이토 요시타츠는 생모에게 토키씨라는 것을 알자. 도산을 죽일려고 했습니다. 가이 소운의 경우는 주가를 위해서 자식을 죽였다는 것을 볼 때는 중국에서 보는 효와 충의 관점에서 오히려 충에 가깝지 않나요? 오히려 엔하운스님이야말로 취사선택하는 설이네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7 1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이상의 답글은 없고.. 지난 시간은 이틀.
    대충 정황을 보니. 세컨 정도로 짐작가는군요. 욕을 하곤 싶지만, 욕을 먹긴 싫다. 이건가요?
    아니시라해도 상관없으니 말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일단, 반박은 쉽지요. 암만 무식한 자라고 해도. 열마디 말 중 한 마디의 꼬투리를 잡아서 물고 늘어지면 그뿐이니까요.
    중국 역사 5천년과 한국 역사 5천년을 통털어서 일본역사 백년과 비교하고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시군요.

    뿐만아니라. &quot;세컨아뒤에 아나요?, 가소롭기 그지없다.&quot; 면서 말을 택함에 언뜻 노기까지 보이시는군요.
    인터넷에서의 시점에 따른 단순한 의견 차이가 발해님에게는 그렇게까지 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만..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7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칼 구스타프 융의 저서 '인격과 전이'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충족되지 못한 명예욕. 자존감을 가진 사람일수록 무의미한 것. 에 몰두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남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채운다고 합니다.

    정말로 아무 의미도 없는 블로그에 이렇게 열중하시고, 남을 가소롭게 여기며 분노하시는 것을 보니
    자신의 망상에 비하여, 세상에게서 받는 대우 자체가 그다지 좋지않으신 분처럼도 보이는군요.

    도경에 이르기를 대인은 스스로 도를 깨우치고, 중인은 들으면 깨우치며. 소인은 가르쳐주어도 깨우치지 못한다. 라고 합니다.
    대인이나 중인으로 보이지는 않으니.. 아마 제 덧글을 보시고 분노하여, 제 글을 지우거나 반박하는 답글을 다실 게 뻔합니다만...

    좌전에 현명한 새는 나무를 가리는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다지 현명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언뜻 고목으로 보였으나 썩어서 속이 텅빈 나무에 앉아서는 안될법이지요. 제가 이 시간부로 확실히 이 블로그에 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답글을 다시더라도 제가 볼 일은 없을 겁니다.
    편지로 보내시거나, 쪽지로 보내시면 스팸메일과 같이 잘 처분하겠습니다.
    역시 무의미한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시면 그쪽의 울분이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7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마디 덧붙이자면. 잘난체 하는 것 같아 문자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만.. 가소롭다기에 얄량한 문자를 조금 덧붙여 보았습니다.
    뭐, 인터넷 검색이면 10초만에 주해본까지 찾을 수 있을 좌전, 도덕경, 융. 공부는 했지만 별로 대단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환절기인데 쓸데없이 스트레스받고 감기걸리지 마시고 몸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블로그따위와 넷질보다야 몸이 재산아니겠습니까? 그럼 안녕히 계시지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27 2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지 자랑에 편협한 시각, 저 혼자 발끈해서는 무식하게 지껄여대는 꼴이라니
    남의 블로그에 와서는 뭔 짓이지? 자기야말로 자존감을 채우는 거? 이거 완전 자위행위
    안 온다면서 답글 확인하러 또 오겠지^^;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8.28 0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하지만, 전 세컨이 아닌데 어떡하시나? -.-;; 단지 발해지랑님 블로그를 애독하는 독자일 뿐인데. 성급하게 세컨아뒤라고 하는 그 성급함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반박을 하면 제대로 해보세요. 괜히 어려워 보이지만 실은 공허하기 그지 없는 문자 쓰지 마시고 그리고 임진왜란도 귀찮아서 반박안했는데, 내전도 아니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입장에서 조선에서 뜯어낼 것 뜯어내는 것이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거 아닌가요? 뭐, 중국이나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는 안 그럴것 같습니까? -.-;;
    오히려 엔하운스님이야 말로 아무 의미도 없이 남을 헐뜯고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상한 문자를 써서 남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자신감을 채우는군요.
    자아비판 하시는거 보니 안스럽군요. Ellis의 REBT 상담이나 받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8.28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E 세컨이래 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 아주 그냥 자폭하는 구나 ㄲㄲㄲㄲㄲㄲㄲㄲ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하우스님//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이중잣대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이렇게까지 장문의 글로 변명을 하시는 분이라면 적어도 저와는 대화가 통할 분이 아닌 것 같군요. 나름 답변 리플은 빼먹지 않으려 합니다만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허공님//저와 동일인물로 되시다니....지못미 허공님...

    박선생님//저도 어렸을 때, 누군가와 언쟁이 붙으면 무시 받지 않으려고 여러 지식을 늘어놓았었죠. ^^;

    본다충승님//저도 잠시 웃을 수 있었습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9.01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괜히 고상한척 하네 ㅋㅋ
    꼭 저런사람들이 별거 없더군요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2 1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더쉽님//그래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신 편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허당님//달아주신 리플을 멋대로 삭제하여 미안합니다만, 그런 말씀은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 왜 남의 댓글 삭제 하고 ㅈㄹ인가요?? 헐. 편들어줘도 ㅈㄹ이네. 하여튼 일빠 새끼들.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빠 들이 영어 써가면서 ㅈㄹ은 ㅋㅋ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4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욕썰 싸지르구선 가만 냅두는 사람은 없단다. 혐한찌질이 레벨 녀석이 편들어 주어도 하나도 안 고맙단다. 하여튼 혐한찌질이 레벨주제에...

  1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4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좆병신 ㅈㄹ하네 일빠새끼가 왠 발해??? 발해도 독도처럼 뺏고 싶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 미친듯

  1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4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극일을 하려면 먼저 지일을 해야 한단다(뭐 이건 일본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건 통용되는 것이지).
    예전에 니 조상중에도 다른 나라 것은 무조건 배척하는 사람이 있었겠지. 그 결과는 알지? 멀리 보면 너는 그렇게 우리나라를 약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지... 역시 너는 혐한찌질이같은 놈이다.

  19.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8 1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님 왠만하면 로그인안한사람은 덧글 못달게 설정을 바꿔놓으시는게..-_-;

  2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9 2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그렇게 해 놓았는데, 근시일 내에 다시 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

  21. 늙은친구 2010.05.17 2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머 워낙 여기서 눈팅 많이 하다가 가는 편이라 여기저기 보곤 햇었는데 몇년이나 지나서 댓글 쓰는 것도 우스워서 몇번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솔직히 까놓고 애기하자면 엔하우스님의 의견에 주관적으로 비꼬아서 블로그 주인장?이신 분이 일을 시작은 한게 맞네요..

    물론 그 이후에 반박이 반박이 아니라 조롱조가 되서 보는 사람들이 욱하는 기분도 알겠고 내용 자체가 적절한 예를 들기보다 현학적으로 빠져서 웃기다는 부분도 있겠지만 남의 의견에 토론조로 부드럽게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자기 의견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 비꼬기 시작한 것은 까칠하신 성격 같으신 엔하우스님만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드네요...

    결론적으로 얘기드리면 부드럽게 상식적인 선에서 얘기햇으면 이렇게까지 안 됬을듯 하네요.그리고 엔하우스님의 반박문은 참 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답답하군요.

    마지막으로 댓글을 안 지워서 몇년후에 이렇게 이상한 인연으로 남기게 해준 블로그 주인장님의 아량도 대단합니다 ㅎㅎ.

    하여간 글 같은 거 써서 먹고사는 부류라 자료나 이야기등등 찾아다니는데 꽤 흥미롭게 봤네요...

    머 마지막으로 흥이 나서 쓰긴 햇는데 누가 볼래나 몰겟군요 ㅋㅋㅋㅋ


 사시모노[指物]라는 것은 무사(武士)가 전쟁터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자 등에 매다는 작은 깃발을 말한다. 그 사시모노에 토리이 스네에몬[鳥居 右衛門]의 모습을 그리게 한 사람이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부하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히사[落合 左兵次 道久]였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처형당한 스네에몬을 보고 사시모노의 그림으로 처형대 위의 처참한 모습의 스네에몬을 그린 것이었다.

 이 사시모노는 대대로 오치아이 가문의 자손에게 전해졌고, 현재 토우쿄우 대학[東京大学] 사료 편찬소에 보존되어 있다.[각주:1]

 그럴 정도로 토리이 스네에몬의 용기는 센고쿠[戦国]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 것이었다.

 

 1575 4.

 토쿠가와 측의 나가시노 성[長篠城]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남은 군량은 불과 4~5. 성은 25천의 타케다 군에게 물샐틈없이 포위당해 있었다. 남아있는 계책도 없어 이제는 성안에 있는 병사 모두가 뛰쳐나가 옥쇄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나가시노 성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각주:2]는 당시 24. 예전에는 부친 사다요시[貞能]와 함께 타케다 씨[武田氏]에 속해있었지만, 신겐[信玄]이 죽은 후 토쿠가와 측으로 말을 갈아탔다.

 오쿠다이라 부자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 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배후에는 토쿠가와-오다 연합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군세가 제 시간에 맞추어 와주기만 한다면…'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버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이에야스에게 이 어려운 상태를 하루라도 빨리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타케다 군의 엄중한 포위를 뚫고 사자를 보내야 했다.

 처음에 성주 노부마사는 오쿠다이라 지자에몬[平 次左衛門]이라는 수영을 잘하는 자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였었다. 그런데 지자에몬은 거부했다. 성안에서 탈출한 다음에 만약 성이 함락당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후세에까지 도망자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른 자들도 그러한 이유로 사자의 임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노부마사는 결심했다. 자기 한 사람 배를 갈라 개성한다면 가신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그 각오를 성병 모두에게 털어놓았다. 토리이 스네에몬이 자원한 것은 이 때였다. 이때 스네에몬 36.


 스네에몬이 성을 빠져나온 것은 14일 밤이었다. 운 좋게 가랑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이었다. 그럼에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는 타케다 군의 눈을 피해 빠져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화장실의 하수구를 이용하였다. 암벽을 내려오면 칸사가와 천[川]이었다. 천바닥으로 잠수하였다. 강 건너편에 닿아 올라서자 방울 달린 줄이 장치되어 있었다. 조심스레 그것을 잘랐다

 

 다음 날인 15일 새벽.

 간보우도우게 고개[鴈峰峠]에 한 줄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탈출 성공 시에 피우기로 했던 약속한 신호였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었다. 이에야스와도 만났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도 만날 수 있었다.

 

 16.

 간보우도우게 고개에서 두 번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구원 결정의 신호였다.

 스네에몬은 구원의 군세가 온다는 것을 성의 모두에게 자신의 입으로 전하고 싶었다. 노부나가는 위험하게 타케다의 포위진을 돌파하면서까지 성에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다 군과 동행하라고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또다시 적지에 잠입한 것이었다.

 스네에몬은 나가시노 성()의 건너편인 시노바노[篠場野]라는 곳까지 도착했다. 이제 성은 눈 앞이었다.

 

 그러나 피어오르는 연기를 의심하였는지 타케다 측의 경계는 한층 더 삼엄해져 있었다. ()을 두르고, 바리케이트[鹿垣]를 설치하여 바닥에는 모래까지 뿌려 발자국까지 확인하려 하였다.

 스네에몬은 이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되었고 거동이 수상한 자라 하여 타케다 측에 잡혀버렸다. 타케타바[竹束][각주:3]를 든 타케다의 아시가루[]로 변장하였다가 각반의 형태가 다른 다는 것을 검문 받아 잡혔다고도 한다.

 

 어쨌든 카츠요리 앞으로 잡혀온 스네에몬은 숨기지 않고 밀사의 임무를 진술하였다.

 이때 카츠요리[頼]는 오히려 스네에몬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가신으로 맞이하여 중하게 쓰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리고 하나의 임무를 명하였다.

 나가시노 성[長篠城]의 정면에 처형대를 세우고 거기에 묶인 스네에몬이 성안의 병사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 노부나가의 원군은 오지 않는다. 이젠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스네에몬은 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목숨만 구해주신다면 어떤 일이건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땅까지 주신다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형대가 높이 세워졌다. 기둥에 묶인 스네에몬에게 초여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 앞의 나가시노 성벽에 많은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타케다의 군사들도 숨을 죽이고 처형대 위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스네에몬의 입이 열렸다. 큰 목소리였다.

 노부나가님은 이미 오카자키[岡崎]에 와 있으시다. 이에야스님도 노다[野田]까지 군을 진출시키셨다~”

 카츠요리를 시작으로 타케다의 군사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스네에몬의 목소리는 한번 더 나가시노 벌판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성안의 모두들~ 반드시 3일안에 원군이 온다!”

 타케다 측에 혼란이 일어났다. 병사들이 처형대로 달려갔다. 몇 자루나 되는 창이 스네에몬의 몸을 찔러 반대편으로 뚫고 나왔다.

 

 1575 5 21.

 타케다 카츠요리의 25천의 대군은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게 나가시노 성밖의 시타라가하라[原]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타케다 군은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하루[馬場 信春], 사나다 노부츠나[ 信綱] 등 신겐 때부터 활약해온 용장들을 다수 잃었으며, 카츠요리 자신도 겨우 도망쳤다.

 

[토리이 스네에몬(鳥居 右衛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信昌]의 부하로 미카와[三河] 이치다[市田]에서 태어나 이름을 카츠아키[勝商]라 하였다고 한다. 나가시노 성터 부근의 스네에몬 처형장터에는 석비가 서있다.

  1. 위에 있는 그림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이때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후에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글자 ‘노부[信]’를 하사 받은 다음부터 노부마사[信昌]라는 이름을 쓴다. [본문으로]
  3. 철포 탄환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묶은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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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taebong0721 BlogIcon 태봉이 2008.08.25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악하악.. 형.. 이사람 진정한 사나이 같다능...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27 21: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사나이입니다. 살아남았다면 어떤 활약을 펼쳤을란지요. 먼저 가서 구원소식을 알리겠다고 설레발만 안쳤어도... 뭐 농성하는 아군의 입장에선 구원요청 갔다가 도망을 간건지, 아군이 구원하러 오는지 어떤지, 오면 그게 언제쯤인지 X줄 타고 있으니
    토리이 스네에몬으로선 당연히 그랬어야 했겠지요. 덕분에 농성 인원이 3일을 버틴 걸지도 모르겠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8: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봉이//단 하나의 사건만으로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좋은 쪽으로 남겼으니까 말이지..

    박선생님//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큰 활약(즉 역사에 이름을 남길정도의 활약)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역시 개인적으로 당시 여포급의 활약을 했을 것이라 여겨지는 카니 사이조우(可&amp;#20816; 才&amp;#34101;)도 그렇게까지 크게 취급받지 않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는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닐테니까요. 확실히 그가 그냥 도망쳤을지 어땠을지는 농성하는 측에서도 반신반의였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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