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쿠고[筑後]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는 용맹하고 정직한 성격이었다. 이러 성격 덕분에 나중에 기적적인 복귀를 할 수 있게 된다.

 무네시게는 큐우슈우[九州]의 강호인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일족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 이 도우세츠라는 인물은 오오토모 가문에서도 굴지의 명장이었다.

 무네시게는 이 도우세츠에게 스파르타 교육을 받으며 키워졌다.
 예를 들면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식사 중의 일이다. 도우세츠가 보자 무네시게는 생선의 뼈를 발라내며 입안에서도 뼈를 혀로 골라내서는 손으로 집어 상 위에 놓았다. 도우세츠는 천둥 같은 큰소리를 지르며 화냈다. 
 “계집애처럼 뼈를 골라내며 쳐먹다니. 머리부터 입에 넣어라. 뼈도 이빨로 으깨어 삼켜라. 타치바나 가문을 잇는다고 하는 녀석이 생선 뼈도 삼기지 못하다니 앞길도 훤하구나!”
 이렇게 성장한 무네시게이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그 용명(勇名)은 높아져만 갔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의 출진명령으로 인하여 전국에서 여러 다이묘우[大名]이 쿄우토[京都]로 상경하였다. 이때 히데요시[秀吉]는 일부러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불러 그 휘하에 있는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도 함께 호출하여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대면하게 한 뒤,
 “동국(東国)에 그 누구보다 뛰어난 혼다 헤이하치[本多 平八], 그리고 서국무쌍의 타치바나 무네시게.”라고 하며 여러 다이묘우들 앞에서 소개했다고 한다.

 무네시게는 용맹함에 더하여 인정미도 넘쳤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의 시마즈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큐우슈우로 내려오자, 무네시게는 그런 토요토미 가문의 휘하 무장으로 어느 성을 공격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무네시게는 히데요시를 알현하게 될 일이 생겼는데, 그때 적의 성에 사자를 보내어,
 “태합[太閤] 전하를 알현하기 위해 잠시 휴전하고자 하오. 당신들이 지금 정전을 받아준다면 반드시 당신들을 위해 구명탄원하겠소.”
 라고 말하였기에, 성 측도 무네시게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겼다고 한다.
 무네시게가 알현하러 오자 히데요시는 굉장히 기뻐하며 명마(名馬)와 명도(名刀)까지 주며 대접하였지만, 무네시게가 성을 수비하는 자들을 살려달라고 하자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열심히 탄원하였다. 너무도 끈질기게 달라붙자 히데요시의 참모인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손으로 저리가라는 시늉까지 하며 쫓아내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굴하지 않고,
 “그들을 살려주시지 않는다면 저도 역시 함께 죽여주십시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무네시게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결국 받아들여 수성하던 자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도리를 지킨다는 점에서도 무네시게는 명쾌했다. 삿사 나리마사가 다스리기 시작한 히고[肥後]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무네시게도 동원되어 공적을 세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때의 공적에 대한 상으로 무네시게를 사위(四位) 지쥬우[侍従]에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네시게는 이때,
 “생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오나, 주인 뻘인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 소우린[宗麟]의 아들, 분고[豊後] 후나이 성[府内城]의 성주]의 관위가 오위(五位)이기에, 관위로 주인을 뛰어넘는 것은 도리가 아니옵니다.”
고 하며 오위(五位)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히데요시의 의향에 따라 사위(四位)에 서임되었다.[각주:2]

 임진왜란 때 무네시게의 용맹함에 대해서도 명성이 높다. 조선 측에 “일본군의 맹장 타치바나”라 평판이 높을 정도였다.
 특히 경기도 벽제관(碧蹄館)에서는 명나라 군의 총대장 이여송(李如松)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격파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군감(軍監)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무네시게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이렇게 발군의 무공을 세우더라도 히데요시[秀吉]에게는 총사령관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공적으로 알려질 터이지만, 만약 나에게 부탁한다면  무네시게의 공적으로 히데요시에게 전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무네시게는 쌀쌀맞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거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구려. 있는 그대로 태합 전하에게 전하는 것이 군감인 당신의 임무가 아니었습니까? 부탁하면 잘 말해주겠다니 그 무슨 소리입니까?”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권세를 부리던 미츠나리라 하더라도 굴함이 없는 강직함이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 측에 서 오우미[近江]의 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 高次]가 지키는 오오츠 성[大津城]을 공략하였지만, 주전장(主戰場)인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서군은 참패하였다. 무네시게는 군을 되돌려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한 뒤 동군에 대한 철저항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할 수 없이 군을 재정비한 뒤 큐우슈우[九州] 야나가와[柳川]로 철수하였다.
 도중 역시 같은 서군에 서서 장렬한 적중돌파에 이은 철수를 감행한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각주:3] 
 타치바나 가문의 부대는 거의 손실이 없는 편인 것에 비해, 시마즈 가문의 부대는 참담한 모습의 패잔병으로 7~80명에 불과했다. 이를 보고 타치바나의 가신들 중에는, 
 “지금이야말로 아버님의 원수를!” 
 하고 은밀히 무네시게에게 권하는 자가 있었다. 무네시게의 친아비 타카하시 죠우운[高橋紹運]은 시마즈와의 전투에서 성을 함락당해 자해했기 때문이다.[각주:4]
 무네시게는 그 가신에게 용사가 할 짓이 아니라며 혼을 내고는, 시마즈와 함께 일심하여 큐우슈우로 향했다고 한다.[각주:5]
 나중에 시마즈에서는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무네시게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야나가와 성[柳川城]가 공격 당했을 때 원군을 보냈다.[각주:6]

 야나가와로 귀향한 뒤 큐우슈우에 있던 동군 측의 무장들과 싸웠지만 승산이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하였다. 무네시게가 성을 떠날 날이 되자, 영내의 백성 150여명 정도가 무네시게의 앞길을 막고,
 “치쿠고[筑後] 네 고을(四郡)의 백성들 모두 무네시게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이오니, 부디 성으로 돌아가시옵소서”
하고 탄원한 것이다.
 무네시게는 백성들의 마음씀씀이에 감사한 뒤,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것은 영민을 위해 개성하는 것임을 알리자, 백성들은 모두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무네시게는 일개 낭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지만 기적적으로 컴백을 이루어낸다. 유랑하던 무네시게를 이에야스[家康]가 고용한 것이다. 처음엔 오우슈우[奥州] 타나쿠라[棚倉] 1만석이었지만, 차츰 승진하여 결국 옛 영지였던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 10만석[각주:7]의 성주로 복귀한 것이다. 무네시게의 인덕이 이에야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568년생. 무네토라[宗虎, 統虎], 시게토라[鎮虎], 마사나리[正成] 등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고 ‘무네시게[宗茂]’라고 한 것은 말년에 와서이다. 1587년 치쿠고[筑後]의 네 개 군(四郡)에 13만 2천 석을 하사 받아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하였기에, 전쟁 후 치쿠고 영내에서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 勝茂][각주:8]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등과 싸우나 항복. 1620년 재차 야나가와 성의 성주가 된다. 1642년 11월 25일 죽었다. 75세.    

  1. 타치바나 도우세츠의 딸이며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타치바나 가문[立花家]의 가독을 잇고 있던 긴치요[立花誾千代]와 결혼해서.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이 끝난 다음 해인 1588년 당시, 큐우슈우[九州]에서 '지쥬우[侍従]'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류우조우지 마사이에[竜造寺政家], 타치바네 무네시게[立花宗茂] 단 4명 뿐이었다. 요시히로는 사츠마[薩摩], 요시무네는 분고[豊後], 마사이에는 히젠[肥前]이라는 각각 한 지역[国]의 주인[国主]이었으나, 무네시게는 치쿠고[筑後]의 절반 정도만을 소유함에도 지쥬우[侍従]가 되었다. 이는 무가관위(武家官位)로 다이묘우들의 서열을 만들려 하던 히데요시의 의향에 비추어보았을 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휘하에 있던 무네시게를 히데요시가 얼마나 맘에 들어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3. 1600년 9월 22일 오오사카 앞바다인 니시노미야 앞바다[西宮沖]에서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실제로는 세키가하라 전후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후계자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인 며느리 카메쥬[亀寿]의 오오사카 탈출을 도운 것이 먼저 오오사카에 와 있던 타치바나 무네시게였다고 한다. 타치바나는 임진-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함께 싸운 요시히로를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여담으로 둘이 함께 츄우고쿠[中国] 스오우[周防]에 도착하였을 때, 무네시게는 요시히로의 배로 건너가 인사를 하였는데 둘은 만나자 마자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생존을 기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사실 시마즈 가문이 원군을 보낸 것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清正]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영지를 공격하였기에 코니시 가문이 같은 서군이었던 시마즈 가문에 원병 요청에 따른 것. 오히려 시마즈 가문과 카토우 키요마사의 군이 대치 중일 때 먼저 항복한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시마즈 가문에 편지를 써서 화해를 권고하였다. [본문으로]
  7. 정확히는 10만 9200석이라 한다. 참고로 세키가하라 전쟁 이전에는 13만 2000석. [본문으로]
  8.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아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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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명 2012.07.20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사람입니다! 분명히 장수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조선에 있어서는 적이었겠지마는, 대단한 장수인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20 2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 뿐만 아니라 토쿠가와 삼대[徳川三代-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츠]에게 중용받은 것을 보면 확실히 인격적으로 남을 매료시키는 매력이 있었던 듯 합니다.

  2.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사람 일생도 드라마로 만들면 인기 좀 끌겠는데요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시마바라(島原)의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싸워 패사(敗死)했을 당시의 모습을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하였다.
 [타카노부는 너무 뚱뚱해 말에도 타지 못하였기에 6명이 메는 가마에서 지휘하였다]
 주색에 빠진 말년의 타카노부를 생생히 전해주는 기록이다.

 처음에 타카노부는 절에서 생활하였다. 류우조우지 가문과 인연이 깊은 호우린 원(淋院)에 들어가 '엔게츠(円月)' 혹은 '츄우나곤(中納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승려답지 않게 호방하며 거칠고 난폭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엔게츠가 17살 때 류우조우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행이 찾아온다.
 1545년 1월에 조부 이에즈미(家純), 부친 치카이에(周家)를 시작으로 한 숙부 등 일족의 주요한 면면들이 아야베(綾部) 성주 바바 요리치카(馬場
周)의 모략으로 인해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이다. 그때 90세가 넘는 증조부 이에카네(家兼)가 바바 요리치카를 물리쳐 복수했지만 그 다음해의 봄,
 "츄우나곤(타카노부)는 남다른 기개와 그릇을 가지고 있다. 류우조우지 가문을 재흥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아이일 것이다. 츄우나곤을 환속시켜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류우조우지 가문은 사가 성(佐賀城)에 종가인 '무라나카 류우조우지(村中 造寺)'와 분가인 '미즈가에 류우조우지( 竜造寺)'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타카노부는 분가 출생이었다. 증조부의 유언에 따라 환속하여 타네노부(胤信)라는 이름을 칭한 타카노부는 종가의 당주 타네미츠(胤栄)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종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그 2년 뒤에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의 이름 글자 하나를 하사 받아 타카노부()로 이름을 고쳤다.

 1551년 그 오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타카후사( 隆房)에게 살해당하자 타카노부의 주변도 소란스러워 진다. 여러 호족들과의 항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이들을 전부 정복하였으며, 1559년에는 큐우슈우(九州)의 명문 쇼우니 토키히사(少弐 時尚[각주:1])를 물리쳐 무명을 높였다. 그 후인 1570년 8월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 대군을 이끌고 타카노부의 본거지 사가 성에 육박하는 큰 위기에 빠지지만 타카노부의 외사촌[각주:2]이며 동생이기도 한[각주:3] 모신(謀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활약으로 간신히 낙성은 면했다.[각주:4]

 그 전투에서의 일이다.
 오오토모 측에서 타카노부의 어떤 중신에게,
 "타카노부를 배신하고 우리 쪽으로 온다면 무엇을 바라건 다 해주겠다"
 는 편지가 화살에 엮여 날라왔다. 이 중신은 평소 타카노부와 사이가 안 좋았던 가신이었다. 그 편지가 타카노부에게 전해지자,
 "우리의 결속을 무너뜨리려는 오오토모의 책략이다"
 고 하며 그 편지를 펴 볼 생각도 안하고 버렸다고 한다.

 1580년 오오토모 휘하의 벳키 아키츠라(戸次 鑑連=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와 화의를 맺었을 때도 타카노부는 호방한 태도를 보여준다.
 벳키 측에서 큰칼(
太刀), 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온 사자(使者)가 오자 마침 식사 중이던 타카노부는,
 "마침 잘 되었군. 그 술을 이리 다오"
 라고 한 것이다. 측근은 예부터 적이 보내온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통례이며 어쩌면 독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지만 타카노부는,
 "아키츠라는 당대의 명장. 그런 더러운 수를 쓸 사나이가 아니다"
 고 말하며 밥그릇에 술을 세 번 따라 마신 뒤,
 "이 잔을 아키츠라에게 주마"
 하고는 사자의 발 앞으로 던졌다. 사자는 그 호쾌한 태도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1580년 가독을 적자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준 뒤부터 주색에 빠진 타카노부는 정신이 황폐해지기 시작하여 류우조우지 가문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딸의 남편을 속여서 죽이거나[각주:5]어린 인질을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이거나 하는[각주:6] 등의 행태에 휘하 장수들의 마음도 떠나기 시작한다.

 1584년 3월. 타카노부에게 최후의 시간이 온다. 시마바라 반도의 모리타케()에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 싸워 무턱대고 돌격만 하다가 패하여 죽은 것이다.
 시마즈의 용사 카와카미 사쿄우노스케(
川上 左京亮)에게 목이 잘렸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비참하게도 그 수급을 류우조우지 가문에 전해졌을 때,
 "재수없는 머리통은 우리도 필요 없다"
 며 아군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국경 부근의 간고우 사(
願行寺)로 보냈다고 한다.

[류조지 다카노부(竜造寺 隆信)]
1529년생. 히젠(
肥前) 사가(佐賀) 성주. 한때는 5개 지역()[각주:7]과 두 개의 섬(島)[각주:8]. 1584년 3월 시마즈(島津),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시마바라(島原)에서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56세.

  1. 후에 후유히사(冬尚) [본문으로]
  2. 나오시게의 모친은 타카노부의 숙모. [본문으로]
  3. 타카노부의 모친이 나베시마 가문과의 끈을 강화하기 위해서 48살의 나이로 홀아비가 된 나오시게의 아비에게 멋대로 시집갔다. [본문으로]
  4.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 오오토모 6만 vs 류우조우지 5000. 류우조우지 군은 사가 성(佐賀城)에서 농성. 오오토모 군의 허술한 틈을 눈치챈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야습하여 승리한 전투. 그러나 전술적인 작은 승리에 불과하여 이후 류우조우지는 오오토모에 화의를 청하여 그 휘하로 들어간다. [본문으로]
  5. 카마치 시게나미(蒲池 鎮漣). 증조부 이에카네와 함께 도망친 곳이었으며, 그 후에도 분가출신이기에 류우조우지 종가의 가신들에게 추방당했던 타카노부는 카마치 가문의 신세를 지며 그 군사를 빌려 다시 당주에 앉을 수 있었으나 카마치의 영지인 야나가와(柳川)가 너무 탐났고 시마즈로 접근하며 독립심 강한 사위를 놀러 오라고 꼬셔서 살해. [본문으로]
  6.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 統家)의 14살짜리 적자와 8살짜리 딸. 무네이에는 이때의 원한으로 타카노부가 패사하는 '오키타(沖田) 외길(畷)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시마즈 측의 선봉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본문으로]
  7.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8.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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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ente21 BlogIcon 클레멘테 2009.06.16 09: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584년 아리마 하루노부가 류조지씨를 배신했을 때 타카노부는 마사이에에게 아리마씨 토벌을 명령했지만 마사이에가 아리마씨 출신 아내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본인 스스로 아리마 토벌에 나섰다고 하더군요.

    그런 부분을 감안하면 타카노부가 전사한 것에 마사이에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17 1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류우조우지 당주인 마사이에가 제 앞가림 하는 놈이었다면 타카노부가 죽을 일은 확실히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뭐 아무리 뛰어났어도 자식 농사 못 지은 사람이 많은지라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도 나온 것 같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6.16 1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마 오오토모 프란시스코는 경건한 종교인으로서 몰락했으니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이 센고쿠판 동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죠(먼산)

    개인적으로는 별로 맘에 안드는 인물이라..(역시 종교에 따라 취향을 좀 타서..) 뭐 저 비참한 죽음도 자업자득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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