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최종화에서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斎]가 어렸을 적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말하길,
 “난세에서 살기 싫다면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정점에 서서 난세를 끝내거라” 

 이는 아사쿠라[朝倉] 5대 100년의 번영을 쌓은 중흥조(中興祖)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의 [아사쿠라 소우테키 말씀집[朝倉宗滴話記]]에 나오는 말이 출처이다. 소우테키는 1477년생이며 셋사이는 1496년생. 기이하게도 아사쿠라 소우테키와 타이겐 셋사이는 같은 1555년에 죽는다. 그야말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인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소우테키는,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이기는 것이 최고다

 라고 하였다. 아사쿠라 가문[朝倉家]의 군사 책임자[軍奉行]로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장의 말이다. 그것은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중세인(中世人)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있다.

 소우테키는 간단하게 무자(武者)의 마음가짐을 말한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무자란 기본적으로 소규모이긴 하여도 재지영주(在地領主)이다. 자립한 센고쿠의 마을=총촌(惣村)의 영주는 그 마을 내의 재판권과 징세권[徵稅權]을 가진다. 그 영주들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살아 남는다”를 규범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거기에는 조정(朝廷)도 막부(幕府)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 행간에서 “나에 대한 것은 내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냉철한 사상이다. 철포나 칼로 무장하는 것도 자력(自力). 어떤 영주에게 붙는가도 자력.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자력. 물길 싸움으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자력. 중세인은 모름지기 자력(自力)이었던 것이다. 이를 역사용어로 “자력구제(自力救濟)”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자력’으로 ‘구제’한다는 사상이다.

 이 자력구제가 인정되는 아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중세에는 전쟁이 필요했으며 전쟁이 분쟁해결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4권에서 언급했듯이 “약탈[乱取り]’이라는 ‘전쟁작법(戦争作法)”에 따라 전투 그 자체가 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 변해간다.

 이 자력구제를 확실히 명문화(明文化)하여 법제도로 확립시킨 것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지 않을까? [이마가와 법률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내 영국[国]에 법도를 반포
(自らの力量を以って、国の法度を申しつけ)

함으로써,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자력’으로 재판권, 징세권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즉 ‘자력구제’를 ‘영국[国]’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확대하여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가 되어, 마침내 오와리[尾張]에 침공하지만 도중에 쓰러진다. 그러나 ‘영국을 자력구제’한다는 사상은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之次第]] 등 각 가문의 분국법(分国法)[각주:1]에 영향을 끼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오다 정권[織田政権]이 어떠한 천하통일을 구상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정권을 이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토쿠가와 정권[徳川政権]을 보면 ‘자력구제’를 어떻게 하면 배제하느냐가 정치과제가 되어 간다.
 토요토미 정권은 ‘태합검지[太閤検地]’로 석고(石高)를 명확히 하고, ‘칼사냥[刀狩り]’으로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다툼 정지령'[喧嘩停止例]’으로 총촌(惣村)의 전투를 금지하였고, ‘총무사령(惣無事令)’으로 다이묘우[大名]’간의 다툼을 중재하였다. 이는 전부 ‘자력구제’의 부정이었다. 자력구제를 뼛속까지 이해하며 하극상(下剋上) 최대의 구현자인
히데요시[秀吉]가 이런 것들을 전부 규제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그리고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서게 되자 전일본의 재판권, 경찰권을 막부가 장악하게 되어 중세의 종말, 근세의 시작을 보게 된다. 유일하게 신고제에 따른 ‘복수[仇討]’만이 허용되게 되지만, 이는 더 이상 ‘자력구제’라고 볼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렸을 적 셋사이와 요시모토에게 교육받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살아가며 그야말로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영국[国]에 법령을 반포’,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어 난세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자신의 영지에 반포한 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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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가와 요시모토라는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기습을 받아
오케하자마에서 죽은 것으로써 유명하다.
 토쿠토미 소호우[富 蘇峰]는 이 일전을 '귀족적 문약(文弱)과 평민적 무강(武强)의 충돌'이라 하였다. 요컨대 구() 명문가와 신흥 세력의 승부라고 한 것이다.


 요시모토의 풍채에 대해서 기록이 있다.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길었다고 한다. 머리를 밀지 않고 머리를 뒤로 넘겼으며(総髪), 이빨은 검게 물들인(漿) 상급귀족[公卿]처럼 화장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는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軍家]과 혈연인 명문가이다.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 義兼]를 선조로 하여, 증손자인 쿠니우지[
氏]가 이마가와 씨를 칭하게 되었다. 쿠니우지의 손자 노리쿠니[] 때부터 스루가[駿河]를 영유(領有). 유명한 사서 '난태평기(難太平記)[각주:1]'의 저자 이마가와 료우슌[今川 了俊][각주:2]은 이 노리쿠니의 아들이다.[각주:3]


 이마가와 씨는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의 슈고[守護][각주:4]로써 토우카이[東海]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다. 쿄우토[京都]와의 관계도 깊어서 귀족[公家]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요시모토의 모친도 다이나곤[大納言] 나카노미카도 노부타네[中御門 宣胤]의 딸이다.

 요시모토는 부친 우지치카[氏親]의 다섯째 아들로, 우지치카의 첫째 아들은 우지테루[氏輝]였다. 또한 우지치카의 누나는 나이다이진[大臣] 산죠우 사네모치[ 望]의 부인이다.
 쿄우토[京都] 문화에 심취한 요시모토는 순푸[駿府]의 구석구석까지 쿄우토로 만들었다. 지명도 쿄우토에 있는 키요미즈[
水], 아타고[愛宕], 키타야마[北山], 니시야마[西山]라 명명하였고, 케마리[蹴鞠]와카[和歌] 모임도 활발히 열었다.


 쿄우토 문화에 심취한 무장답게 요시모토에게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온다.
 어느 전투에서였다. 부하에게 적 선봉의 상태를 알아보고 오라며 정찰시켰는데, 이 부하가 싸움에 말려들어서는 정작 중요한 정찰을 하지는 못하는 대신 적의 목을 가지고 왔다.
 요시모토는 화를 내며 명령 위반에 따라 엄벌을 내리려 하였다. 센고쿠 무장으로써는 당연한 처치였다. 하지만 이 부하가 꾀를 써서, 옛 시를 이용한 것이었다. 후지와라노 이에타카[藤原 家隆]

솔새에 빠져들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슬에 꺾인 줄기
苅萱に身にしむ色はなけれども、見て捨て難き露の下折
라는 시를 읊었다.
 요시모토는 이를 듣자마자 태도가 변하였다.
 괘씸한 녀석이지만 순간적으로 옛 시를 생각해내다니 기특하구나
 라고 말하며 군령 위반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 만약 노부나가였다면 아니 노부나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령 위반이라는 것은 그럴 정도로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요시모토가 무장으로써 실각이라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후세에 요시모토에게 나쁜 평판만이 남게 된 것은 무엇보다 오케하자마의 패배자라는 것에 있다. 후세의 기록이라는 것은 모두 승리자에게 유리하게 쓰여지는 법이다. 승리를 한 노부나가는 후에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기에, 그와 대비되면 당연히 요시모토가 불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에도 시대가 되면서 신격화된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소년기에 이 요시모토 밑에서 인질이 되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고 하여 악의를 가지고 요시모토의 모습을 일그러뜨리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요시모토가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가 될 때 가문 내란이 일어났다.
 1536
. 형인 우지테루가 죽었을 때 요시모토는 걸승(傑僧) 타이겐 셋사이[太源 雪斎]의 제자로 후지 군[富士郡] 젠토쿠 사[寺]의 중이었다. 그리고 가독(家督)을 둘러싸고 역시 출가해 있던 배 다른 형인 에탄[探]과 다투어 승리하여 패한 에탄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각주:5]
 이때 요시모토는 환속하여 이마가와 가문을 잇고 은사(恩師) 타이겐 셋사이를 군사로 맞이하였다. 요시모토의 시대가 되자 종래의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에 더하여
미카와[三河]도 세력하에 두었다. 요시모토는 결코 쿄우토 문화에 정신 팔린 용렬한 무장이라는 일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케하자마의 전투는 1560 5 19일에 일어났다.
 이 때 요시모토는
스루가, 토오토우미, 미카와의 대군을 이끌고 서상(西上)을 개시하였다. 도중에 있는 오와리[尾張]의 그것도 반밖에 영유(領有)하지 못하고 있는 오다 가문[織田家]은 단번에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깃발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각주:6]
 오와리에 침입한 이마가와의 군세는 이미 오다 측의 성 두 개를 점령하고 있어 기세가 올라 있었다. 19. 요시모토의 본진은
덴가쿠하자마[楽狭]에 도착하였다.
 이날의 요시모토의 모습은 끝부분에 금칠을 한
안장을 얹힌 말을 타고서, 황금으로 용이 세워진 투구에 몸통이 흰색으로 된 갑옷을 입고, 이마가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28( 84cm)의 오오타치[大太刀]를 차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위엄서린 무장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서전(緖戰)의 승리에 취하여 노부나가를 얕보고 있었다.

 한편 이날 새벽 키요스[清洲]를 출발한 노부나가 군세는 질풍과 같은 기세로 달려와 덴가쿠하자마의 이마가와 본진까지 다가왔다. 때마침 폭풍우가 불어와 이마가와 본진은 혼란에 빠졌다(이에 대해선 아케치 님의 블로그: [ 說 ]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을 참조해 주시길).


 요시모토는 죽는 순간까지 잘 싸웠다.
 돌격해 온 오다 측의 핫토리 코헤이타[服部 小平太]의 창대를 자르고 무릎을 베어 물리쳤다. 거기에 모우리 신스케[毛利 新助]가 달려들어 마운트 포지션을 허용했지만, 요시모토는 목이 베이는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신스케의 집게손가락을 물어 뜯으며 싸웠던 것이다.


 참고로 오다 측에 있던 요시모토의 목은 나루미 성[鳴海城]에 있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 元信]가 건네 받아, 순푸[駿府]로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

1519년 태어났다. 우지치카의 다섯째로 처음엔 불문에 들어가 쇼우호우[承芳]라고 불렸지만, 환속하여 형 우지테루의 뒤를 잇고 요시모토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2개 지역을 영유(領有)하여 토우카이[東海] 지방 No.1 다이묘우[大名]가 된다. 미카와[三河]를 손에 넣은 후,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 상경을 꾀하였지만 오케하자마의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기습당하여 전사하였다. 42.


Ps; 역자인 저는 상경설을 부정합니다(물론 요즘 분위기도 비상경설이 대세지만요). 이 이야기는 길어지니 차후에……

  1. 이마가와 씨의 역사, 가계, 공적 등이 쓰여 있다. [본문으로]
  2. 1326~1420(?). 일본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무로마치[室町] 중기의 무장. 료우슌[了俊]은 불문에 들어서 부터이며, 이전엔 이마가와 사다요[今川 貞世]라는 이름을 썼다. 1371년 큐우슈우[九州] 지역을 관리하는 막부 직책인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가 되어 큐우슈우의 남조 측을 구축하나, 남북조(南北朝)가 합체하자 1395년 큐우슈우탄다이에서 경질된다. 1399년 오오우치 요시히로[大内 義広]와 손잡고 반항하지만 실패.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지녔으며, 고려의 정몽주와 회담하여 왜구 억제를 꾀하는 등 우리나라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는 이마가와 료우슌[今川 了俊]의 후손은 아니다. 료우슌이 큐우슈우탄다이[九州探題]에서 물러난 뒤 스루가 절반의 슈고가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이마가와 종가(宗家)의 당주이며 료우슌의 조카인 이마가와 야스노리[今川 泰範]가 슈고였다. 요시모토는 야스노리의 후손.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 [본문으로]
  5. 이를 하나쿠라의 난[花倉の乱]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근래엔 상락설(上洛說)보다는 오와리[尾張] 점령을 위한 설이 강한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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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5.10 2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번에 비상경설에 대해 한 번 올려주세요^^
    부담스럽게 만들기... ㅋ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5.10 2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시대를 풍미한 당당한 다이묘라고 하겠죠 역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10 2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저런 초상화는 어디서 구하시는건가요. 책에서 다 스캔하시는건가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0 2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턴오버님// 정리할게 많아서 지금은 힘들어요~ ^^;

    볼리바르님//실력있는 명문가의 당주에 걸맞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그렇기에 오다 노부나가를 더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겠고요.

    리더쉽님//제 블로그 주소가 있는 것은 제가 가진 책에서 스캔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주로 위키피디아를 이용(아무래도 자유이용이 가능한 것이라...)하고 그래도 없으면 구글신의 도움을 받습니다(이건 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요...예전에 가져다 써도 되냐고 문의했더니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불법으로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우하하하~.....^^; )
    뭐 요즘은 스캔도 불법이긴 하지만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10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공가풍의 이미지가 점수를 깎는 요인이 된듯 싶더군요. 죽는 순간의 격렬한 저항은 시시하게 시 한수만 남기고 목베인 류조지 타카노부보다 훨씬 나아보이니..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11 14: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쬐금은 들어 본 인물이 등장하네요... ^^
    아무리 잘나가는 가문이라도 당주가 죽은 후 후계자가 시원찮으면 10년 버티기도 힘들군요. --a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11 15: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마가와 요시모토 - 이마가와 우지자네
    롯카쿠 사다요리 - 롯카쿠 요시카타
    오토모 요시시게 - 오토모 요시무네
    류조지 다카노부 - 류조지 마사이에
    아사쿠라 다카카게 - 아사쿠라 요시카게
    등등… 역시 자식농사도 중요한 덕목인 것 같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2 1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역시 신군 이에야스를 턱으로 부린 인물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이였을 때의 이에야스의 방에 들어가...
    "이마가와 공"
    "흐흐~ 타케치요~ 등짝을 보자"...로 인한 트라우마가 에도 바쿠후에 뿌리 깊이 침투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맹꽁서당님//당분간은 유명한 인물들이 나옵죠.

    신사본론님//명문가라는 그만큼 대대의 후계자들이 쌓아 올린 이름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망한 가문들의 당주들은 시대를 잘못 골라 태어났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5.12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이마가와 요시모도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 듯 합니다. 현재는 아마 개략적으로는 이마가와군의 측면에서 들이 닥쳐 본진으로 쇄도하여 순식간에 목을 베었다는 통설이 강하지만 이런 견해도 있다고 합니다. 어느 지역 농민으로 위장한다. 공물을 바치는 척하면서 무기를 숨기고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친견을 청한다. 요시모토를 만나서 숨겨둔무기를 빼어들고 순식간에 죽인다
    ......................-_-;;
    쪼매 노부나가의 이미지에 비해서는 너무 비겁한 점도 있지만 이런견해도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의 군사적 규모의 차이로는 기습조차 제대로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죠. 저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비겁한 책략이 노부나가 답달까? 팬이라면 되게 싫어하겠지만 말입니다. 블로그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3 06: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위에 링크 시켜 놓은 아케치님의 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기에 링크를 걸어 놓았습죠)

    소설의 이야기를 견해로 하시면 위험합니다.
    요시모토도 그렇게 허술한 무장이 아니고요. 또한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급이면 이미 백성이 친견하기도 힘든 위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신 말씀대로 그럴 만큼의 행동을 노부나가가 보여주었다고 하지만 말이죠 ^^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16 1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1 14: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마가와 요시모토도 인기 많군요^^
    노부나가 첫 타이틀 도전의 타이틀 방어자라 그런가요? 말씀처럼 훌륭한 데코레이션이 되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케치님 블로그의 정면공격설을 보면
    충실히 군사원칙을 따르다가
    어느 순간부터 오다군이나 이마가와 군이나 "바보들의 행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친 적이라고 착각하고 들어가고, 때마침 방향바뀐 폭풍에, 무너지는 이마가와 전위대, 너무 깊숙히 들어와서 전선이탈 불가능에('아.. 그냥 싸우자.. ㅜㅡ'), 혼란스런 지휘부까지('얘네 이 정도 병력 가지고 여기까지 들어왔어?! 우리 전위대는 왜 무너져?! 이 폭풍은?!ㅜㅡ')
    웃기게도 술은 마셨으나 음주음전은 하지 않았다는 김모군의 말처럼
    오다군은 기습은 아니나 어쩌다보니 기습효과를 냈네요;;;
    정말 역사는 광기와 우연의 연속인 거 같습니다 ^^;;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2 0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보들의 행진이라기 보다는.... 아직 오케하자마의 전모는 이외로 수수께끼인 채입니다.
    저는 아케치님의 정면공격설이 가장 신빙성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일국만으로 60만석에 가까운(57만석 정도) 거대 쿠니(国) 오와리를 가진 노부나가와 미카와-토오토우미-스루가를 다 합쳐도 70만석 근처인 이마가와..
    더군다나 오와리는 홈그라운드라 동원할 수 있는 병사수도 수월한 노부나가와 쪼금 힘이 세다고는 하나 원정인 이마가와....

    제가 정면 공격설을 신봉하는 이유이며, 또한 생각 외로 드라마틱한 요소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입죠.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02 2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정면공격설을 허무맹랑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셨나보네요(다 제 말주변이 부족한 탓...^^;)

    저도 정면공격설이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동원이 수월한 노부나가 쪽이 애초부터 좀 더 유리했을 수도 있기에 드라마틱한 요소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05 21: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실례했습니다 ^^; 그렇지는 않고 다만 하신 말씀 중에 인용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오해를 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17.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06 0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요, 제가 말 주변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쓴 걸 다시 봐도 오해살만 하네요. 다음부터 댓글달 때는 정확히 써야겠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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