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쵸우슈 한[長州藩]은 매년 1월1일이 되면 하기 성[萩城]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비밀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중신들이 번주(藩主)에게 신년 인사를 올린 뒤, 필두 가로가 앞에 나아가, “올해는 어떻게 할까요?”라 물으면 번주가 “아직 이르네”라 답하는, 아주 간단한 의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복수전의 시기를 주종간에 문답한다는 것이 정말 쵸우슈우[長州]다운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패하여 츄우고쿠[中国] 8개국[国][각주:1]이라는 거대한 영지에서 단번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된 당사자 - 그것이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이다.
 테루모토
는 시대의 영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손자이다. 1563년 테루모토의 부친 타카모토[隆元]가 지 아비 모리나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불과 11살의 나이로 가문을 이었다. 당연 어린 테루모토를 대신하여 모토나리가 실질적인 당주로 정무를 계속 보았고,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 천[両川] ’이 모토나리를 보좌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모토나리는 어려서 아비를 잃은 테루모토가 건강하고 예의 바르게 성장해 줄 것을 기도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무사히 테루모토는 15살의 봄을 맞이했다. 모토나리는 그 기쁨을 편지로 써서 테루모토의 모친에게  보낼 정도였다.

 테루모토는 위대한 할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는 감이 있었다. 모토나리가 1567년 은거하려고 하자,
 “아버지 타카모토는 40살이 되어서도 뒤를 돌보아 주셨으면서 이제 막 15살이 된 저를 버리시려고 하시다니 뭐라 할 말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저도 모우리 가문[毛利家]을 버리고 어디까지건 할아버지가 가시는 곳에 따라가겠습니다.”
 며 정말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해댔다.
 모토나리는 이런 테루모토를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귀엽다고도 생각했다.[각주:2]

 테루모토가 13살인 1565년.
 모우리 가문[毛利家]는
토다갓산 성[富田月山城]의 아마고 가문[尼子家]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가 테루모토 전쟁터 데뷔였다. 4월 16일 테루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선봉에 서고 싶다며 자원하였다. 그러나 이날 적은 아마고의 주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데뷔전을 치를만한 상대가 아니라며 테루모토의 선봉을 막았다. 테루모토는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어린 테루모토는 장수(將帥)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다 테루모토 자체가 격정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이었던 듯 하다. 시간이 흘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그런 테루모토를 ‘대장의 그릇이 아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즉 테루모토는 정치적 감각이 결여된 인물이었던 듯 하다.

 예를 들면 1574년 빗츄우[備中] 미무라 사네치카[三村 実親][각주:3]의 키노미 성[鬼身城]을 공격하였을 때, 사네치카를 손녀사위로 둔 오우미 뉴우도우[近江 入道][각주:4]가 자기 가문만 살려 주면 사네치카를 잡아다 바치겠다고 하자, 테루모토는 그 더러운 수법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략을 중시하는 다른 중신들이 오우미 뉴우도우의 내응을 받아들이도록 테루모토를 설득시켰다고 한다.

 또한 1578년에는 ‘양 천[両川]’이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던 아마고의 유신(遺臣)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를, 테루모토는 2번이나 살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반항한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며, 독단으로 시카노스케를 죽였다.[각주:5]

 1571년 모토나리의 죽음 이후에도 이런 성질 급한 테루모토가 큰 실수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양 천[両川]’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잘 컨트롤했기 때문이다. 모토나리가 죽은 뒤 모우리 가문은 과감한 킷카와 모토하루, 진중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양 기둥이 되어 모우리 가문의 안태를 지키고 있었다. 테루모토는 이 두 숙부 중 성격적으로는 모토하루에 가까웠지만 접촉의 기회는 타카카게 쪽이 많아 정치력이 탁월한 타카카게의 의견을 자주 따랐다.[각주:6]

 하지만 성격적으로도 대조적인 ‘양 천[両川]’은 1577년부터 시작되는 오다 가문[織田家]와의 전쟁 속에서 대응법을 둘러싸고 차츰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582년 히데요시[秀吉]가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가 지키는 빗츄우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포위하였을 때 킷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대립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때 킷카와 모토하루는 철저항전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강화교섭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천하의 정세에 밝은 타카카게의 주장으로 인해 사태는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교섭으로 이어졌다.
 이때 테루모토는 상기의 움직임 속에서 타카카게 노선을 따르기는 하였지만, 위험에 빠진 타카마츠 성의 구원을 주장하며 무네하루의 목숨과 바꾸어 강화교섭에 나서는 것에 세찬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테루모토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테루모토는 무네하루의 유족들에게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하고 후히 대했다.[각주:7] 이보다 전에 ‘말려 죽이기[干殺し]’ 작전이 펼쳐진 톳토리 성[鳥取城]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의 유족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했다.[각주:8]

 1582년 히데요시를 혐오하던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가 은거하고 4년 뒤에는 죽어,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하에서 활로를 찾으려 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노선을 밟아가[각주:9], 1588년에는 테루모토가 히데요시에게 초청받아 타카카게,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 모토하루의 아들]와 함께 상락(上洛)하여 쥬라쿠테이[聚楽第]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환대를 받고 임관의 영예[각주:10]까지 맛본 것이다. 즉 모우리 가문[毛利家]은 완전하게 토요토미 정권에 속하게 된 것을 의미했지만 그것이 테루모토가 바라는 방향이기도 했다.

 1597년. 모우리 가문의 기둥이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케가 죽고 다음 해인 1598년에는 히데요시가 죽었다. 모우리 가문의 중추는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로 옮겨져, 코바야카와 노선의 후계자는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의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다. 양자는 각자 놓여진 입장에 따라 킷카와 히로이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무공파 다이묘우[大名]와 친했고,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와 손 잡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決戦] 때 테루모토는 안고쿠지 에케이의 요청에 응하여 서군의 총수가 되어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다. 히로시마[広島]를 출발할 때 중신 대부분이 반대했음에도 테루모토는 굳이 출마하였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하나로 선정된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교활한 정권탈취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일지도 – 격정가(激情家)인 테루모토라면 양쪽 다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553년 출생. 히데요시[秀吉] 휘하가 되자 시코쿠 정벌[四国征伐][각주:12],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13]에 참가하였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4]에도 참가. 1595년에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총사령관으로 출진[각주:15].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패하여 120만석에서 수오우[周防], 나가토[長門] 36만석 9천석으로 감봉되었다. 1625년 4월 죽었다. 73세.

  1. 나가토[長門], 스오우[周防], 이와미[石見], 아키[安芸], 이즈모[出雲],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호우키[伯耆].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이때의 생활을 1613년 테루모토가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 후쿠하라 히로토시[福原 広俊]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11살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났고, 13살에 시마네[島根]로 불려가 19살 때까지 할아버지(모토나리)에게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냈다. 모든 것을 할아버지 의견에 따라야 했으며 때로는 엄청나게 맞은 적도 있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이 당시는 우에다 이에자네[上田 家実]의 딸과 결혼하여 양세자가 되었기에 우에다 사네치카[上田 実親]로 불림. [본문으로]
  4. 우에다 이에자네[上田家実]의 아비 [본문으로]
  5.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명령이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앞서 언급한 편지에서 테루모토는 이에 대하여 “나는 할아버지에게도 맞았지만 타카카게, 모토하루에게도 엄하게 교육받아 이래서는 몸이 견뎌나질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테루모토는 그의 아들 시미즈 카게하루[清水 景治]를 중용하였고, 카게하루는 세키가하라 이후 감봉으로 인해 힘든 모우리 가문의 재정상황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본문으로]
  8. 츠네이에의 아들 츠네자네[経実]는 이와쿠니 번[岩国藩] 킷카와 가문의 사숙노[四宿老]의 한 명이 되었다. [본문으로]
  9. 여담으로 킷카와 모토나가와 형 모토나가[元長]까지 죽어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당주가 된 히로이에는 이런 타카카게를 '타카카게는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간 결단을 자신의 가장 큰 공적이라며 자랑했다'며 빈정댔다. [본문으로]
  10. 토요토미 씨[豊臣氏]가 되어 토요토미노 테루모토[豊臣 輝元]라는 이름으로 종사위하(従四位下) 지쥬우[侍従]에 임명되었고. 같은 날 산기[参議]가 됨.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1585년 히데요시가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를 공격한 전쟁. 테루모토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1진, 킷카와 모토나가[吉川 元長]를 2진으로 출진시켰을 뿐 참가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3.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14. 테루모토는 쿄우토[京都]를 수비하는 역할을 맡아 칸토우[関東]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군세를 이끌고 히데요시 주변을 지켰다. [본문으로]
  15. 테루모토는 정유재란 때 병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참가한 것은 테루모토의 대리인[名代]으로 우군(右軍) 사령관이 된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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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5.11 0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도 빛나는 별이었던 모토나리, 다카모토, 모토하루, 다카카게의 곁에 있었던 터라 데루모토라는 별의 빛이 가렸던 것 같습니다. 세키가하라라는 최악의 악수를 비록 두기는 했지만 그 이후 영국의 경영이나 가신단의 체제 재정비 등을 본다면 암군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어보입니다. 어쩌면 좋은 할아버지와 숙부를 만나서 엄하게 다뤄진 것이 효과를 거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한자를 보고 즉석에서 생각난 농담입니다만. 시즈키(指月)를 직역하면 달을 가리키다, 즉 천하를 가리키다라고도 될 수 있겠군요. 과연 모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었을런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1 07: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테루모토를 높게 평가하는 편입니다.

      어떤 일화에 히데요시가 쿠로다 칸베에에게,
      "만약 내가 죽으면 누가 천하를 쥘 것 같나?"
      라는 물음에 칸베에가,
      "모우리 테루모토겠죠"
      라고 하자 히데요시는, 그렇지 않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천하를 쥘 것일세...
      라는 일화가 있습죠. 여기서는 칸베에를 높여주려고 했나 봅니다만, 테루모토 역시 천하를 손에 넣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도련님은 맞으면서 커야 하나 봅니다.

      달...을 천하와 대칭시키나요? 이런 쪽은 지식이 부족해서 잘 모르겠군요.

  2. Gyuphy IV 2011.05.11 16: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할아버님한테 칭얼대는 테루모토씬을 전국무쌍3에서도 본적이 있는데 그게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에서 유래된것이었다..는데에 좀 놀랐습니다(..)

    그러고보면 세키가하라의 최악의 한수... 뭐 그렇다 쳐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3년 더 살았다 하더라도 세키가하라때 천하를 노리지는 못했을것 같다는게 제 생각이네요. 기껏해야 마에다가 정도의 영지안도쯔음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군요. 어이쿠 뭐 지식이 일천해서 그저 제 단견일 다름입니다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1 2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카카게가 살아 있었음 금오중납언 히데아키도 섣부리 나서지 못했겠지요. 아무래도 히데아키가 데려온 상층부 일부를 제외하곤 나머진 타카카게의 의향에 따랐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무엇보다 그 조심스럽다는 이에야스다 보니 마에다 토시이에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정도 대화로 풀어나가려 했을 것 같습니다.

  3. 맹꽁이서당 2011.05.11 2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세키가하라 때 우에스기 가게카스의 행동을 놓고 질문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싸우려면 싸우고 말면 말지 난의 시발점을 일으켜놓고 가만히 대치한건 무슨 의도였나), 모리 데루모토에 대해서도 '대망'을 읽으면서 비슷한 생각(제대로 싸우든지 말든지, 서군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나서 왜 가만히 있었나)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리 가 내부에 이런 노선 갈등이 있었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1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리 가문 내부 갈등은 제가 생각하던 것 이상이더군요.

      특히 킷카와 가문[吉川家] 그것도 세키가하라 때 대활약(??)을 펼친 히로이에[吉川広家]의 삐뚫어진 정신상태가 재미있더군요.

      이건 언제 따로 포스팅을 하려 합니다.

  4. 본다충승 2011.06.03 14: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대로 물 먹으셨지예~ ㅎ 이 양반 유족 처리에 관해선 좀 의외네요. 세키가하라엔 당시 아마 데루모토 본인 대신 양자 히데모토가 대리출정 했지요? 그 히데모토의 본진을 막아서고 공격하지 못하게 땡깡부린게 히로이에 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테루모토가 물 먹은 건에 대해선, 당시의 시스템 상(토리츠기[取次] 제도) 굉장히 신의에 벗어난 짓을 한 것 같더군요. 테루모토(...아니 킷카와 히로이에 조차)가 속을 만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토리츠기가 정한 것은 대개 인정받던 시대였거든요)

      개인적으로 히로이에가 모우리 가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 따로 포스팅하겠습니다.

  5. 123 2011.08.27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기 번의 새해 첫 회의 부분 수정 바랍니다.
    가신이 "올 한 해 도바쿠(토막討幕, 막부를 쓰러뜨리는 일)의 일은 어찌 하실 것입니까?"라고 물으면
    번주가 "시기상조일세"라고 대답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 게 옳습니다.

    최근 모리 가의 당주가 TV에서 자기는 정작 그런 관습에 대해 종가에서 들은 바가 없는데,
    아마 후세의 창작일 거라고 대답했다고 하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0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선 리플 늦어진 것에 사과를 드립니다.

      "옳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밑에 123님도 써 놓으셨듯이 실제 있었는지가 의문인 상황에서 어째서 그렇게 확실한 어투로 "옳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수정을 요구하시는지요?

      거기에 일본방송을 보셨으니 일본어를 아실테니 御庭番의 임무 중 遠国御用라는 것이 있으니 찾아보실 것을 권합니다. 과연 번주와 중신의 대화에서 감히 "討幕"이란 단어를 쓸 수 있는지 회의감이 드실 것입니다.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만큼이나 무사다운 화려한 의식 속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는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에 임하여 우선 모우리 세력권의 최전선에 있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시미즈 무네하루를 오다(織田) 측으로 배신하도록 꾀했다. 노부나가(信長)의 서약서에 자신도 편지를 써서는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와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를 무네하루에게 사자로 보냈다. 노부나가의 서약서에는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2개국(国)을 항복의 조건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무네하루는 곧바로 이 서약서와 편지를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輝元)에게 받쳤고 히데요시에 대한 답신에는 “테루모토가 나를 신뢰하여 국경의 땅을 맡겼기에 그 믿음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는 없소이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2개국이라는 맛있는 떡밥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무네하루에게는 모우리에게 빚이 있었다. 예전에 아들 사이타로우(才太郎)가 적에게 유괴당하였을 때 테루모토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 덕분에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센고쿠 난세에 있어서는 진귀한 의리의 무장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타카마츠 성 공격은 1582년에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4월 4일에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우키타 씨(宇喜多氏)의 본거지 오카야마 성(岡山城)에 입성하였다. 타카마츠 성은 이 오카야마 성에서 12km정도 떨어진 지점인 키비 평야(吉備平野)의 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외교로 타카마츠 성을 항복시키는 것에 실패하였는데 그렇다고 이것을 힘으로 뺏기에도 어려웠다. 성안의 사기가 왕성하였으며 성은 요해였다. 작고 높은 성 주변에는 말의 발도 빠질 듯한 진창 깊은 밭으로 연못이나 늪이 많았다. 그 속에는 불과 말 한 마리 지날 수 있을 정도의 외길밖에 없었다. 함락시키는데 필시 2년은 걸릴 것이다.

 히데요시는 본영 류우오우산 산(竜王山)에서 타카마츠 성을 멀리 바라보며 이 성의 공략법에 대해 생각하였는데 그 결과 이 천하의 지혜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수공(水攻)]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즉 타카마츠 성의 서쪽에 흐르는 아시모리가와 강(足守川)를 막아, 그 지점에서 성의 동쪽 이시이야마 산(石井山)의 남쪽기슭 카와즈가하나(蛙ヶ鼻)까지 약 4km에 걸쳐 제방을 쌓아 성을 이 인조호수 안에 수몰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공성이라기 보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토목공사 계획이었다(부대 배치 및 알기 쉽게 나온 그림이 있는 곳)

 제방의 규모는 높이 7m, 밑바닥 폭이 20m나 되어 그 위는 도로가 있어 이 도로의 폭은 약 10m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단기간에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히데요시는 10여일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으로 ‘천재적인 토목건축가’라는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신속함이었다. 흙은 가마니로 옮기는 방법을 취하여, 그 가마니 한 개당 무려 돈 100문과 쌀 한 되를 준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당연하게도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일대의 사람들은 이 짭잘한 돈벌이에 달려들었다. 이야기는 엄청난 전파력으로 각지에 전해져 흙 가마니를 쌓은 백성들의 수레가 타카마츠로 쇄도하였다. 히데요시에게 행운이며 타카마츠 성에게 있어 불행인 것은 때마침 장마의 계절이었기에 완성된 이 인조호수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 볼 때마다 수량이 늘어갔다. 호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뜨이게 된 타카마츠 성은 3일째에 성의 일층까지 물에 잠겼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형제를 중심으로 한 모우리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도착해 있었지만 이 인조호수를 둘러싼 하시바 히데요시의 대포위망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화해 협상밖에 방법이 없었다. 모우리 씨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으로 파견되었다. 모우리가 제시한 조건은 빗츄우 등 5개국을 할양할 테니 타카마츠 성의 모든 장병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우리 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했다. 히데요시의 조건은 5개국 할양 외에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이라는 것이었다.

 일시 화평교섭은 좌초되었지만 안코쿠지 에케이가 성주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양해를 구했다. 조건 수락의 서장이 히데요시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6월 2일이었다. [4일에 할복]이라고 정해졌다.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며 타카마츠 성으로 술과 안주를 보냈다. 이 2일 새벽에 실은 쿄우토(京都)에서 대사건이 일어나있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었다. 히데요시 쪽으로 그 급보를 가진 밀사가 도착한 것이 3일 심야. 히데요시는 앙천했다. 어쨌든 이 사실은 철저하게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우리 측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화평교섭의 와해는커녕 고립된 히데요시는 곧바로 적의 맹공을 받게 된다.

 4일.
 무네하루의 자인이 행해지는 날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입장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온히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배가 타카마츠 성에서 배를 저으며 나왔다. 배 위에는 죽은 사람이 입는 흰 옷의 무네하루가 있었다. 죽음을 확인하는 사람이 탄 배의 앞에 오자 무네하루는 그 역을 맡은 호리오 모스케(堀尾 茂助[각주:1])와 조용히 마지막 잔을 기울이고는 흰 부채를 펼쳐 쿠세마이(曲舞) ‘세이간지(誓願寺[각주:2])’를 추었다. 적과 아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화려한 죽음의 의식이었다. 무네하루가 배를 가르자 등뒤에서 칼날이 번쩍거리며 목이 떨어졌다. 동승하고 있던 형 겟세이(月清) 이하 따르던 자들도 계속해서 무네하루의 뒤를 따랐다.

무네하루 사세구(辭世句),

이제야 이승을 떠나는 무사의
이름을 타카마츠의 이끼에 새겨두고
浮世をば今こそわたれ武士の
名を高松の苔に残して

 히데요시는 이 이후 곧바로 행동을 일으켜 후에 히데요시의 대반전(大返し)이라 일컬어지는 초인적인 속도로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야마자키 전투(山崎合戦)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것이었다.

[시미즈 무네하루(水 宗治)]
1537년생. 처음엔 빗츄우(備中) 시미즈 성(清水城)의 성주.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 속해 타카마츠 성(高松城) 성주 이시카와 히사타카(石川 久孝)의 딸과 결혼하여 타카마츠 성주가 되었다. 1582년 타카마츠 성에서 자인(自刃).

속영웅백인일수(続英雄百人一首)에 그려진 시미즈 무네하루

  1.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를 말한다. [본문으로]
  2. 헤이안 시대 중기의 시인으로 남녀 관계없이 1~2위를 다투던 여류 시인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의 영혼이 가무(歌舞)의 보살이 되어 성불한 기쁨을 나타내는 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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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6 1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나가의 죽음을 모리 측에서 알고 있었더라면 시미즈 무네하루가 죽지 않아도 됐을텐데 참 안타까운 장수 하나가 비명에 갔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7 2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입니다만...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킷카와 모토하루인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인지가 오다의 침공에 앞서 그 지역 무장들에게 충성 서약서를 쓰게 하였는데, 참가했던 모우리의 직신들은 큰 소리를 치며 호기롭게 썼으나 토자마(外様)인 무네하루만은 행동으로 보여 줄 것이지 기껏 종이 서약이 무슨 소리냐며 쓰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후에... 큰 소리 치던 녀석들은 히데요시에게 항복...끝까지 버틴 놈은 무네하루 뿐....뭐...그런 것입죠..네.

  2. 유우 2009.11.09 0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시대에서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 농성전만큼이나 인간성이 극한으로 몰린 것은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대규모 포위작전으로 인해 성은 완전히 아귀지옥으로 떨어져 사람 고기를 먹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은 그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전략)… 벼 베고 남은 그루가 최고의 먹을 것으로 나중에는 이조차 떨어져 말과 소를 먹었으며, 서리와 이슬을 맞고 약한 자는 아사(餓死)…(중략)… 말라 뼈만 남아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남녀가 성의 책(柵)에 달라붙어 포위군을 향해서 살려주소~하고 울어도 그것에 용서 없이 공격군의 철포가 집중되었다. 맞은 자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도 성안의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모여들어 다투어가며 그 살을 떼어 먹었다. 몸에서도 특히 머리가 맛있다고 하여 머리를 서로 뺏어가며 도망 다녔다…(후략)…

 히데요시의 ‘굶겨 죽이기. 칼도 창도 필요 없다’는 장기 포위공성전[兵量攻め]의 전형이 이 톳토리 성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다. 장기 포위공성전의 이점은 아군 병사의 손해 없이 상대의 자멸을 기다리는 것에 있다. 단지 시간이 걸린다. 이 공성전은 1581년 7월에 시작되어 낙성을 보기까지 반년을 요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서 출진한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를 정복한 뒤 산인[山陰] 방면으로 더 진출하여 톳토리 성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진귀한 현상이 일어났다. 성주인 야마나 토요쿠니[山名 豊国]가 단 혼자서 히데요시에게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모우리[毛利] 측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가신들은 원군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에게 청하였다. 그래서 파견된 이가 킷카와 일족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였다. 츠네이에는 성격이 우직하며 남다른 각오로 톳토리 성에 입성한 것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대규모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히데요시는 톳토리 성 멀리 3리(里) 사방부터 포위하였다. 그 포위한 진영은 산과 들의 형태를 바꿀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성밖 타이샤쿠산 산[帝釈山]의 정상을 깎아서 본진을 세웠고, 연장 2리(약 8km)에 이르는 포위선에는 흙으로 된 보루를 쌓고 책(柵)을 둘러 참호를 팠다. 약 1km마다 삼 층짜리 작은 성과 같은 망루(櫓)에 사수 100명씩을 두었고 또한 500m마다 초소를 만들어 사졸 50명씩 두었다. 밤에는 하늘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화톳불을 활활 피워서는 파리가 드나들 틈도 없을 정도로 엄중하게 경계를 섰다. 거기에 더해 히데요시는 이 진영에서 축제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시장을 만들어 여러 지역의 상인을 불러 모았고, 종을 치고 북을 때려 시끌벅적함 속에 유녀(遊女)들까지 불러들였다. 전투라기 보다는 관광유람에 가까웠다.

그러는 한편 히데요시는 이미 주변지역의 쌀과 보리 사재기에 빈틈없는 손을 쓰고 있었다[각주:1]. 시가 이상의 가격으로 쌀과 보리를 사들였기에 톳토리의 농민들은 앞다투어 팔았다[각주:2]. 톳토리 성 주변에서는 차츰 식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킷카와 측이 모우리에 부탁한 식량선도 오는 족족 히데요시의 수군으로 인해 격침되어 버렸다. 히데요시는 성안이 굶어가는 것을 기다릴 뿐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안의 식량난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가 결국에는 기아(飢餓)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 뒤는 지옥이었다. 이 공방전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성안의 사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져 간 것이다. 적은 철포보다도 무서운 배고픔이었다. 이대로 포위가 계속 된다면 전원이 성안에서 굶어 죽을 뿐이었다.

 츠네이에는 결심했다. 히데요시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츠네이에가 배를 갈라 책임을 지겠으니 성병의 목숨만은 살려주길 바랍니다’고 청원한 것이다. 일족인 킷카와 모토하루의 셋째 히로이에[広家]에게 보낸 편지에 ‘오다와 모우리가 싸우는 일본에서 가장 화려한 전쟁터에서 배를 가르는 것, 후대까지 명예라고 생각한다’고 써서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냈고,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듯 훌륭한 최후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킷카와 일족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는 심경을 적어 보냈다. 히데요시는 츠네이에의 담백함에 감동하여 될 수 있으면 목숨을 구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듯, 처음에는 목숨을 바꾼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엔 츠네이에의 바램을 인정하였다. 그 뒤 츠네이에는 성의 병사들과 이별 잔치를 벌이고 싶다며 술과 안주를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술 10상자, 그릇 10상자, 안주 다섯 종류를 보냈다.

 마지막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써 시동(小姓)으로 마지막까지 지켜본 야마가타 나가시게[山県 長茂]의 보고서가 남아있다. 츠네이에는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한 뒤 녹황색의 의상을 입고 주연에 참석하여 껄껄거리며 웃는 등 쾌활하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배를 가를 때가 되었을 때 갑옷상자에 앉아서는 큰 목소리로 “연습 같은 것도 해 본 적 없을 테니 필시 서투를 테지”하고 카이샤쿠닌(介錯人[각주:3])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은 더 세세하다. 와키자시[脇差[각주:4]]를 배에 꽂고는 기합과 함께 휘저었고 한번 칼을 뽑고는 다시 찔러 심장 아래까지 그어 올린 다음 배꼽 밑에까지 밀어 내리고선 와키자시를 배에 꽂은 채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 머리를 내밀었다… 츠네이에가 배를 가를 때 야마나 가문의 중신 몇 명도 뒤를 따라 배를 갈랐다.

 이리하여 성병의 대부분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성병들의 목숨이 사라져 버렸다. 극심한 기아를 겪은 후엔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 기아상태인 사람은 위나 내장이 쪼그라들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이 먹으면 급사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간을 들여 조금씩 먹으라고 지시를 하였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적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모처럼 도움 받은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家)]
이와미[石見]의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분가 출신이다. 본가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元春]가 이은 가문이다. 톳토리 성[鳥取城]에서 자해하였을 때 츠네이에 35세였다.

  1. 이나바의 근린인 와카사[若狭]의 상인들을 시켜서. [본문으로]
  2. 성병들 조차 돈에 눈이 멀어 성 안의 쌀을 팔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베어주는 사람. [본문으로]
  4. 일본 무사들이 차는 칼 두 자루 중 작은 칼을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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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증 2009.09.21 1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사람도 있었군요.. 전 시미즈 무네하루만 알고 있었는데...
    더군다나 할복장면은 시바타 가쓰이에보다 더한 '무사의 귀감'으로 평가받을만한 장면인듯도 하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9.22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리마[播磨] 진격을 주장하는 산요우[山陽] 방면 담당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역시 산인[山陰] 방면 담당인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주도권 싸움에 새우등 터진 듯한 인상이 있더군요.
      그래도 당시 일본에선 짱센 오다 가문과 싸우는 것이니 힘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할텐데, 이미 모우리 가문 자체가 산요우 진격으로 정한 것 같던데, 모토하루가 개인플레이 한 것 같더군요.

 모략으로 점철된 센고쿠 시대라 하여도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정도의 음모가는 드물다.

 그가 어렸을 적의 에피소드로 이런 것이 있다.
 나오이에는 백치와 같았다 한다. 동생 타다이에[忠家]는 똑똑했기에, 모두 형인 나오이에를 바보취급하고 동생을 칭찬하였다. 단 한 명 우라가미 가문[浦上家][각주:1]의 가로인 잇칸 노인[一閑老人]만이 "그렇지 않다. 나오이에는 마음 속 깊이 큰 뜻을 품고 있기에 보통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나오이에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일부러 바보 흉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동생 타다이에는 나오이에가 죽자, "형만큼이나 무서운 인물은 없었다. 날 귀여워해주었지만 형과 만날 때는 반드시 옷 안에 사슬갑옷[鎖帷子]을 입고 조심하였다"하고 술회하였다.

 
 대충 나오이에 모략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주군인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를 국외 추방한 후 그의 영지(領地)를 빼앗았다. 거기에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실력자 미무라 이에치카[三村 家親]를 철포로 암살, 그와 친하다는 이유로 장인 나카야마 노부마사[中山 信正]를 독살하였다. 이때 장인의 유언을 위작하여 그의 땅을 손에 넣었다. 고토우 미마사카노카미[後藤 美作守]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낸 후 독살하였고, 이 직후 매형인 타니카와 히사타카[谷川 久隆]도 같은 수단으로 죽였다. 이렇게 악랄한 수단으로 결국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와 빗츄우[備中] 일부를 수중에 넣은 것이다.

 1577년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国] 공략이 시작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와의 사이에서 치열한 항쟁이 전개되자 나오이에의 정절 없는 기회주의자적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항상 이기는 편에 붙는다. 그러기 위해서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도록 손을 쓴다"
 
이것이 그의 모토였다.

 1577년 12월 나오이에의 가신 코우즈키 쥬로우[上月 十郎]가 지키던 코우즈키 성[上月城]이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함락당하자 곧바로 오다 노부타다[織田 信忠 – 노부나가의 적자]에게 "앞으로 오다 측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예전과 마찬가지로 모우리 가문과도 끈을 놓지 않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설득하여 코우즈키 성 탈환을 꾀했다. 거기에 교활하게도 이 전투에는 병을 칭하며 출진하지 않고 승리 소식을 듣자 그제서야 기어나와 킷카와-코바야카와 양 진영에 인사를 한 것이다.

 나오이에의 계략은 이로 끝나지 않았다. 모우리의 두 장수에게 "쿄우토[京都]로 진격하신다면 제가 선봉이 되겠습니다. 또한 귀국하신다면 제 영내(領內)에 잔치를 열겠으니 꼭 참석해 주시길"고 하였다.

 이 뒤편에는 나오이에의 무서운 간계가 숨어있었다.

 쿄우토로 진격한다면 그대로 따라가겠지만,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성안에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두 장수를 죽이고 그 목을 들고 오다 측으로 배신하겠다는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략은 모우리 측에게 그 내막이 알려져 버렸다. 킷카와 모토하루는 더 이상 나오이에를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이후 그는 오다 측으로 넘어갈 결심을 굳히고 인질로 세자 하치로우(후의 히데이에[秀家])를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1581년 11월 나오이에는 병상에 누웠고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자, 히데요시를 한번 보고 싶다고 부탁을 하였다. 나오이에 최후의 연기였다. 머리맡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임종이 가깝다는 것을 고한 후,

 "인질로 받친 하치로우를 생각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부디 하치로우의 뒤를 잘 돌보아 주셨으면 해서…"

 하고 애원했다. 인정에 약한 히데요시는 다 죽어가는 나오이에의 탄원에 넘어가 그의 유언을 지켜 히데이에(하치로우)를 유자(猶子)[각주:2]로 키워 후에 오대로(五大老)까지 만들어 주었다.

 여담으로 일설에 따르면 나오이에의 병은 매독으로 남 앞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추하게 부었다고 한다.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비젠[備前]의 슈고[守護] 아카마츠 씨[赤松氏]의 슈고다이[守護代]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의 가신이었지만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지원으로 주군을 멸하고, 이어서 미마사카[美作]를 공략하여 모우리 씨의 휘하가 되었지만,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秀吉]가 츄우고쿠[国]에 진출하자 오다[織田] 측에 붙었다. 1582년 2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53세였다고 한다.

  1. 당시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주가. [본문으로]
  2. 양자와 비슷하나, 성까지 따를 필요는 없는 부자관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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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lexsan 2015.06.20 2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갑니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라고 하면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하더라도 이야기꾼들의 무용담(講談)은 물론 교과서에까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산 끝에 걸린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나에게
칠난팔고(七難八苦)을 주소서"
 라고 비는 장면이다. 주군 가문의 부활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2차대전 이전 충군애국을 위한 정신교육에 딱 알맞은 소재였던 것이다.
 그의 인생드라마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주군인 아마고 가문[尼子家] 부활을 위해서 싸우는 – 그 집요한 게릴라 활동에 있을 것이다.

 시카노스케의 무용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마고 가문이 멸망하여 순례자의 모습으로 여러 지역을 유랑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오우미[近江]의
반바쥬쿠[番場宿]라는 곳에서 어느 노승의 친절로 암자에서 머물게 되었다. 2~3일 지났을 즈음 십여 명의 건장한 무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들어와서는 식사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보기에 식사만 하고 얌전히 돌아갈 듯한 쌍판이 아니었다. 시카노스케가 마당에 있던 큰 바위를 가볍게 들어올리고는 "어서 꺼지지 못할까!"하고 소리치자 무사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 날 밤. 그 무사들이 습격해왔다. 그들은 산적, 도적들이었던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재빨리 노승과 동자승을 숨기고는 정면으로 들어오는 자는 함정에 빠뜨리고, 창문에서 들어오는 자는 창문 아래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한 사람씩 사로잡았다. 이렇게 해서 별 어려움 없이 14명의 도적을 잡았지만, 노승의 말을 듣고 생명을 살려주자 두목 같은 남자가,
 "제가 도둑질하기 백여 번,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길 칠십여 번에 이르지만 이렇게 당한 적은 처음이외다"
 고 말하며 적어도 존명이라도 말해달라 하였다 한다.

 시카노스케의 파란만장한 삶의 막이 오른 것은 1566년 아마고 씨[尼子氏] 멸망부터였다. 한때 츄우고쿠[中国] 11개 쿠니[国]의 영토를 가지고 패권을 세웠던 아마고 씨도, 신흥 세력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군에게 패하여 멸망해 버린 것이다. 한때는 이 모우리 씨[毛利氏]도 아마고 가문의 휘하였다.
 이 1566년에 아마고의 본거지 이즈모[出雲]
토다 성[富田城]이 함락당하자 당주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와 그 동생 토모히사[倫久], 히데히사[秀久] 세 명은 포로의 몸이 되어 모우리의 근거지 아키[安芸]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나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 등의 활약이 시작된다. 은밀히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토우후쿠 사[東福寺]를 방문하였다. 거기에는 중이 되어 있는 아마고의 혈통이 있었다. 최후의 당주 요시히사의 부친 하루히사[晴久]의 숙부[각주:1]의 아들이었다. 시카노스케들은 그를 환속시켜 '아마고 마고시로우 카츠히사[尼子 孫四勝久]'라는 이름을 쓰게 하였다.

 카츠히사를 대장으로 옹립한 일당 200여명은 타지마[但馬]로 내려가 해적 나사 니혼노스케[奈佐 日本之助]의 배로 오키[岐]로 건너가 이곳의 사사키 타메키요[佐為清]의 협력으로 대망의 옛 영토 이즈모[出雲]의 흙을 밟게 된 것이다. 옛 주인의 입국에 이즈모는 들끓었다. 각지에 숨어있던 아마고 낭인 3000여명이 곧바로 달려와 그들의 세력은 1개월 안에 이즈모의 반을 석권하였다. 이와미[石見], 호우키[伯耆]에서도 줄을 대는 자가 속출했다. 본거지 토다 성을 되찾으면 옛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할 수가 있었다.
 그 토다 성에도 모우리의 군사는 불과 300명의 병사밖에 없었다. 아마고는 6000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가 무너졌다. 토다 성의 수비장수 아마노 타카시게[天野 隆重]가 계략을 쓴 것이다.
 "깨끗하게 성을 넘기고 싶다. 그러나 한번도 싸우지 않고 넘기는 것은 무사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그러니 일전을 벌이는 척을 하고 넘기겠으니 군세를 이끌고 오시길"
 아마고 측은 이 사자(使者)의 편지로 기세 등등해졌다. 완전히 안심을 하고 2000의 병사를 보냈다. 하지만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활과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마고 측은 예상 못했던 습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번엔 성병 300이 밀고 내려와 아마고 측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시카노스케는 1570년 모우리 가문의 이즈모 총공격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그의 집요함을 볼 수 있다. 참수에 처해질 운명이었지만, 모우리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여 목숨을 건졌다. 모우리를 위해서 시코쿠[四国] 정벌의 선봉을 자처까지 하였다. 그런 것들은 전부 살아남아 또다시 아마고 부활의 기회를 잡기 위한 연기였다. 그리고 시카노스케는 화장실을 이용하여 모우리 진영에서 탈출하였다. 게릴라 활동가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을 숨기며 미마사카[美作]를 거쳐 쿄우토로 갔다. 이번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의지하였다. 당시 노부나가는 혼간지[本願寺]와 손잡고 있는 모우리 측과 적대하고 있었다. 다시 쿄우토에 모인 시카노스케 일행의 아마고 잔당은 츄우고쿠 담당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휘하로 들어가 하리마[播磨]로 갔다. 타지마[但馬]의 코우즈키 성[上月城]를 함락시키자 히데요시는 아마고 카츠히사의 바램대로 이 성을 지키게 하였다. 히데요시를 따라 이즈모로 진격하여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 믿는 아마고 일당은 피가 끓었다.

 바로 그때 모우리 측이 대군을 이끌고 코우즈키 성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군세[각주:2]를 선봉으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군세가 몰려와 아마고 섬멸을 노린 것이다. 모우리 군세는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의지할 것은 히데요시의 원군이었다. 성안의 식량은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탈주병도 계속 생겼다. 쿠마미가와 강[熊見川]을 사이에 두고 타카쿠라야마 산[高倉山]에 진을 친 히데요시 군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모우리 군세 2만이 유리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는 히데요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작전변경이 하달되었다. 코우즈키 성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아마고 일당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코우즈키 성은 모우리에게 항복하였다. 당주 카츠히사는 자결, 시카노스케 등 60여 명은 빗츄우[備中]로 보내졌다. 시카노스케는 도중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결국 빗츄우로 들어서는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모토하루, 타카카게는 시카노스케를 부하로 삼으려 했던 것 같지만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
輝元)의 뜻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
1545년생.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를 섬기며 미마사카[美作] 2만석에 봉해져 가로(家老)의 지위에 있었다. 아마고 멸망 후는 카츠히사[勝久]를 옹립하여 싸움을 거듭하였지만 1578년 7월 17일 살해당했다. 34세.

  1. 아마고 가문[尼子家] 최강의 전투집단이었던 신구우 당[新宮党]의 당수 아마고 쿠니히사[尼子 国久]. [본문으로]
  2. 나오이에는 병을 칭하여 동생 타다이에[忠家]를 대신 출진시켰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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