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라는 시대의 무서움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1574년의 설날, 기후(岐阜)성(城)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정월 잔치를 연 자리였다. 중신들과 종속 다이묘우(大名)들이 물러간 뒤 친위대(馬廻) 장수들만의 술자리가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검은 상자 세 개를 가지고 오게 하였다. 누군가가이번에는 어떤 안주인 것입니까?”하고 묻자, 노부나가는이 세상에 진귀한 안주다라고 말했다.

 노부나가가 꺼낸 내용물을 보고 자리는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아름다운 금은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인간의 두개골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거기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 아사쿠라 사쿄우다이부 요시카게[朝倉 左京大夫 義景]

. 아자이 시모츠케[井 下野(=히사마사(久政)]

. 아자이 비젠[井 備前(=나가마사(長政))

 바로 전년도에 노부나가에게 쓰러진 자들의 두개골이었던 것이다.

 

 부자가 함께 사람들 앞에 두개골이 내보이게 된 아자이 가문은 오우미(近江)의 명문가였다.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북부에 그들의 거성 오다니(小谷)성(城)이 있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으로는 산기슭을 둘러싼 거대한 연못이 천연의 해자(垓子)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남쪽에도 커다란 늪이 있었다. 지키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고 공격하기에 역시 이보다 더 어려울 수 없는 성이었다.

 

 오다니 성()이라고 하면 아자이 나가마사의 부인 [오이치노카타()]가 유명하다. 이곳에 시집온 다음부터 [오다니노카타(小谷)]가 된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시집을 온 것은 나가마사 20, 오이치가 18살 때였다. 평판이 자자했던 미모의 여성이었다. 나가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은 각각 화려한 생애를 보내게 된다. 장녀는 요도기미(淀君[각주:1])가 되었으며, 차녀는 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 高次)의 부인, 삼녀는 토쿠가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부인이 된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불행은 범용한 부친을 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부인 스케마사(亮政)는 기량이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히사마사는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가신들의 신망도 적었다. 스케마사가 죽자 이 히사마사는 아자이 가문의 원로 격인 오오하시 히데모토(大橋 秀元)를 강제로 할복시켜 버렸다. 나가마사와도 의견이 맞지 않았다. 어렸을 적의 나가마사는 부친의 분노를 사서 일년 정도 오다니의 키요미즈다니(水谷)에 있는 묘우오우(明王)()에 감금당한 적이 있다.

 

 결혼 문제로도 충돌했다.

 나가마사 15살 때였다. 상대는 오우미(近江) 칸논지(音寺)성(城)의 성주 사사키 요시카타( 義賢[각주:2])의 노신 히라이 이가노카미(平井 伊賀守)의 딸이었다. 히라이 씨()는 사사키의 일족이라고는 하여도 그 가신에 불과하였다. 나가마사로서는 사사키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우미 명문의 긍지가 있었다[각주:3]. 아무리 부친의 권유라고는 하여도 승복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 결혼 이야기를 확실히 거부했던 것이다[각주:4]. 부친 히사마사는 화를 내었지만 가중의 신망은 이미 젊은 주군 나가마사에게 모이고 있었다. 히사마사는 이 다음 해에 가신들의 청원으로 은거 당하게 된다.

 

 여기서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이 아자이 가문 비극의 원인은 조부 스케마사 대부터 이어져 왔던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가문과의 친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 당시의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 요시카게는 사이가 나빠 천하포무(天下布武)를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가 두 번이나 상경을 재촉했는데도 불구하고 요시카게는 이를 계속 거절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에 대한 도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때 요시카게는 동맹자인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밀사를 보내 자신들과 함께 움직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괴로운 입장에 놓였다.

 노부나가는 마누라의 오빠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사쿠라와의 친분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에게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무단으로 아사쿠라를 공격하지 않도록 약속시켰다.

 

 하지만 1570 4.

 노부나가는 대군을 일으켜 에치젠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때 나가마사의 결단이 아자이 가문의 명운을 가르게 되었다. 아자이 가문은 노부나가의 침략을 보고 마누라의 오빠라는 노부나가와의 관계보다, 50년에 걸친 아사쿠라 가문과의 교분을 우선시한 것이다. 보수적인 부친 히사마사의 의견이 강했던 것이다.

 

 오다 측에서는 아자이가 공격해 올 턱이 없다고 믿고 에치젠에 진공하였던 것이지만 거기에 갑자기 등뒤에 있던 아자이 군이 공격해 온 것이다. 오다 군은 완전히 퇴로가 가로막힌 꼴이 되었다. 괴멸의 위기였다. 오다 군은 간신히 비와고(琵琶湖) 호수 서쪽 산맥으로 우회하여 퇴각했다.

 이 결단으로 인해 아자이 가문은 노부나가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리게 된다. 파죽지세와도 같은 신흥세력을 버리고 늙은 대국 아사쿠라 가문과 운명을 함께하고자 결의한 것이다.

 

 1573 8.

 오다 군은 재차 에치젠(越前)에 침공하여 별 힘 안들이고 아사쿠라 군을 괴멸시키고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로쿠보우(六坊) 켄쇼우(賢松)()에 몰아넣어 자살하게 만들었다.

 오다니 성()의 아자이 가문은 이젠 완전히 고립되었다. 압도적 우세에 선 오다 군은 이번에야말로 아자이의 숨통을 끊어놓고자 성 밑 마을(城下町)을 오다 군의 군사들로 메운 것이었다.

 곧바로 토라고젠야마(虎御前山) 산이 오다 측의 공격을 받았다. 이곳은 오다니 성()을 지키는 요해(要害)의 땅으로 아자이의 병사 482명은 끝까지 오다 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남은 것은 아자이의 본거지 오다니 성()만이 남게 되었다.

 오다의 대군은 슬금슬금 성을 포위하여 파리가 드나들 틈도 만들지 않았다. 이제 오다니 낙성은 시간의 문제였다. 여기까지 이르자 노부나가는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를 사자로 보내어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얌전히 성을 건네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야마토(大和)() 전체를 준다고 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나가마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오다니 성() 최후가 다가오자 나가마사는 장졸 700여명을 모이게 한 후 자신의 위패를 내보이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 다음날인 8 27, 오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나가마사는 낙성이 되기 전에 오이치노카타와 딸 셋을 노부나가에게 보내었고, 부친 히사마사가 28일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성에 불을 지르고 배를 갈라 죽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아자이 부자의 목은 쿄우토(京都)로 보내져,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목과 함께 옥문에 내걸렸다.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

1545년 히사마사(久政)의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신쿠로(新九朗)’라고 하였다.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에게 장가간 것으로 유명. 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를 물리치고, 쿠츠키(朽木)()를 거느리며 오우미(近江)의 대부분을 영유(領有)한다. 처음엔 오다 씨()와 사이가 좋았지만,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와의 맹약으로 인하여, 노부나가의 에치젠(越前) 침공 때는 아사쿠라 측에 서서 노부나가와 싸웠다. 1570년 아네가와의 전투(姉川の戦い)에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대패. 1573년 거성 오다니를 노부나가에 공격받아 패사(敗死).

  1.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를 낳는 히데요시의 측실. 키미(君)는 에도 시대 유곽에 있던 여성의 끝에 붙이던 것으로, 그녀를 낮추려는 의도가 이어진 것으로, 당시에 여성을 부를 때는 그냥 '도노(殿)(ex;요도도노)’나 ‘노(の)’ 다음에 ‘카타(方)’(ex;요도노카타=淀の方)를 붙였다. [본문으로]
  2. 롯카쿠 요사카타(六角 義賢)를 말한다 [본문으로]
  3. 아자이 씨(氏)는 지역 호족 출신으로, 사사키의 분가인 쿄우고쿠(京極)씨(氏)의 부하에 지나지 않아 그다지 격이 높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사키 즉 롯카쿠 씨(氏)는 무가로써는 최상격의 가문이었다. [본문으로]
  4. 실은 결혼식만 치른 후 이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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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cogwtw.tistory.com BlogIcon NOA 2008.07.25 04: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보다 익숙해지긴 했지만...저는 지금도 아자이보다 아사이가 입에 잘 붙습니다;;;
    이게 참...안고쳐지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5 1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그렇습니다. 아명은 사루야샤(猿夜叉 + 아이 이름으로 끝에 잘 붙는 마루(丸)가 붙을 때도 있더군요), 신쿠로는 케묘우(仮名 - 보통 '통칭'이라고 하는..)이며 말씀하신 중간에 붙는 이름입니다.
    노부나가가 아명이 키치호우시(吉法師), 통칭이 사부로우(三郎)...라면,
    나가마사는 아명이 사루야샤, 통칭이 신쿠로우
    이에야스는 아명이 타케치요(竹千代), 통칭이 지로우사부로우(次郎三郎)....인 식입니다.

    NOA님//저도 처음 들은 것이 아사이...라서 아직도 조금은 어색합니다.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5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사쿠라 요시카게도 죽었건만 지킬 의리도 없을텐데.. 토도 타카도라만 좋은 일 했군요(-_-;;)

    뭐 현대인의 사고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초상은 대체로 비만체로 그려지던데, 여기서도 목살이 늘어져있군요(..ㅎㄷ;; 외손자도 물론 스모선수 체형이었습니다마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6 1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가사마의 딴에는 의지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의리였다기 보다는...

    '멋'과 '미'야 시대별로 달라지는 것이니.... 히데요리는 확실히 이 외조부의 DNA가 이어졌나 봅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7.27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 1부 마지막을 장식했던 인물이네요. 권위있는 학설이 따로 있겠습니다만, 만화에서 제시한 나가마사가 노부나가를 배신한 동기가 그럴듯하더군요.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8 2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만화 저 팬입니다. 그럴 듯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이 또 맘에 들더군요.
    (...노부나가가 멋있게 그려져서 일지도 모릅니다...^^)

  7. 보통사람 2009.11.26 1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세개의 두개골은 아자이 부자와 아자이 가문의 참모였던
    아카오 키요츠나의 것이 아닌가요? 아사쿠라 요시카케는
    이치죠다니성 근처의 절간에서 자결하고 그대로 묻어졌다고
    들었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15: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목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신장공기 권7에 보면...

      一、朝倉左京大夫義景首。一、浅井下野、首。一、浅井備前、首。

      라고 나와...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사이 히사마사, 아사이 나가마사(순서대로)...라고 나옵죠.

      요시카게의 목에 관해서는...신장공기 권6에...

      朝倉式部大輔、義景の頸を府中龍門寺へ持たせ越し、八月廿四日、御礼申さる。
      8월 24일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式部大輔], 요시카게의 목을 부츄우 류우몬 사[府中 龍門寺=당시 노부나가가 있던 곳]에 가지고 와서 인사를 올렸다....

      고 한 다음....노부나가는 그 목을...

      義景が頸、長谷川宗仁に仰せ付けられ、京都へ上せ、獄門に懸けさせられ、
      요시카게의 목을 하세가와 소우닌[長谷川 宗仁]에게 명령해 쿄우토로 가져가게 해서 효수(獄門)하고...

      라고 나옵니다. 그대로 묻지는 않았나 봅니다.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난세를 위해서 태어난 듯한 인간이다. 출신이 수수께끼이며 더불어 악역무도(惡逆無道)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1570 4.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니죠우(二条) 어소(御所)에서 성대한 사루가쿠(猿楽)의 공연이 행해졌을 때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한 사람의 노장(老將)을 소개했다. 그것이 마츠나가 히사히데였다.

 이 분은 보통의 인간으로써는 절대 할 수 없는 짓을 세 번이나 하였지. 우선 주가(主家)인 미요시(三好) 가문을 멸망시킨 것, 다음으로는 쇼우군()을 살해하였고 거기에 나라(奈良)의 대불전(大佛殿)을 불태워 버렸다

 노부나가의 거리낌 없는 막말에 주변은 일순 긴장했다고 하는데 이 말에는 히사히데가 걸어온 길이 축약돼 있다.

 그러나 [분별(分別), 재각(才覺)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무용(武勇)은 무쌍(無雙)하며 또한 굉장히 욕심이 많았다]는 동시대 사람의 평도 있다.

 

 근세 성곽 건축의 선구자로써도 이름이 높다.

 1567년에 쌓은 나라(奈良)타몬야마(多聞山)성(城)은 외국인 선교사도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근세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흰 벽에 주택 형식의 타몬야구라(多聞櫓[각주:1])는 히사히데의 타몬야마 성에서 처음 만들어졌기에 그런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성 안에는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벽화가 있는 호화로운 쇼인(書院[각주:2])도 있었다고 한다.

 

 히사히데의 주인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도 또한 난세의 인물로, 주가인 호소카와(細川) 가문을 하극상에 의해 제치고 올라서서는 쇼우군까지도 압도하는 실력자였는데 그 과정에서 음지에서 활약한 히사히데의 힘도 컸다. 이 시기에 쿄우토(京都) 행정관(奉行)으로써 힘을 기른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되었다. 이 즈음 쵸우케이의 장남 요시오키(義興)가 병사하였는데 이는 히사히데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쵸우케이가 죽자 히사히데의 마음 속에 쇼우군() 타도의 음모가 싹을 틔었다.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이라 불리는 미요시 가문의 중신들에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가 미요시 가문 토벌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불안을 조장시켰다. 쵸우케이의 양자(養子) 요시츠구([각주:3])를 지키자는 것이, 히사히데가 미요시 삼인중에게 불어 넣은 대의명분이었다.

 이리하여 미요시-마츠나가의 군세는 1565 5 19일 쇼우군 어소를 습격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사히데는 이 쇼우군 암살을 함께 했던 미요시 삼인중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쫓겨나 사카이() 도망친다. 히사히데는 예전에 이곳의 대관(代官) 적이 있었으며, 이곳의 대표자들인 나야(納屋)()과도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사히데는 사카이 나야중에 도움을 받아 재기할 있었고 곧이어 야마토(大和)에서 미요시의 군세를 쳐부수었다. 토우다이(東大)() 대불전을 불태운 것은 시기의 일이다.

 

 이로써 14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 후견인으로써 위세를 떨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다 노부나가로 인해 종지부가 찍힌다.

 다음 해인 1568.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입경한 것이다. 히사히데는 싸워보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노부나가에게 항복한다. 그러나 히사히데는 속으로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나가가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격에 애를 먹게 되자 히사히데는 갑자기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간지 측이 츄우고쿠() 모우리(毛利)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에치고(越後) 우에스기(上杉)와도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것이다.

 히사히데는 거성(居城) 시기산(信貴山)()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성도 일본 텐슈(天守) 시조라 일컬어지는 근세형의 성곽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패자(覇者) 노부나가의 기세에는 대항하지 못하였고 노부나가 휘하의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의 군세에 패배를 당한다.

 

 그 낙성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에 빠져있던 노부나가가 탐내던 천하의 명기 [히라구모의 차 솥(平蜘蛛茶釜[각주:4]]을 손수 깨 부수고 성에 불을 질러 자인했다는 것과 또한 막 낙성이 되기 직전에 평소 앓고 있던 중풍때문에 머리에 뜸을 떴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되었는데도 또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냐는 부하에게 자인을 하게 되었을 때 행여라도 중풍이 발작되어 몸을 못 움직이는 것을 남들이 배 가르는 것이 두려워서 꾀병을 부린다고 할 것 같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히사히데다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일화이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미요시 쵸우케이의 유우히츠(右筆[각주:5])에서 입신 출세하였다. 쵸우케이의 대리인으로써 쿄우토(京都)에 머물며 여러가지 일을 처리했다. 기독교의 교회를 파괴하였으며 토우다이(東大)()의 대불전을 불태웠다. 1577 9 10일 야마토 시기산 성()에서 자해.

  1. 링크는 후쿠오카(福岡)성(城)의 것. [본문으로]
  2. 무가(武家)에서는 손님 접대나 여러 행사를 치르는 건물을 지칭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부친은 쵸우케이의 동생으로, 무용이 뛰어나 ‘오니소고우(鬼十河)’라는 이명을 가졌던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이다. [본문으로]
  4. 구모(蜘蛛)는 일본어로 거미를 말한다. 거미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平) 모습이라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문서, 기록 담당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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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almi BlogIcon 아케치 2008.07.05 02: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림이 잘 안 나왔네요.
    히사히데의 표정과, 산산조각나는 히라구모가 압권인 작품인데.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7.05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하.. 히라구모를 던져서 깨뜨리는걸 묘사한 그림이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5 2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의 무장들은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결단성을 배워야 한다..랬던가요. 세키가하라에서의 시마 사콘이 야그 했던 내용으로 기억하는디..(뭐 위키에서 얼핏 본듯하니 다 거기서 거기인 썰이겠지만서도..)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6 22: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케치님//그림이 좀 작죠? ^^ 처음 저 그림을 보았을 때 손하고 머리하고 겹쳐서 잠깐 무슨 그림인가 하고 이해를 못 하겠더라구요.

    리더쉽님//퍼져가는 파편이 생생함과 동시에 땡깡부리는 얼굴 표정이 잘 살린 그림 같습니다.

    다메엣찌님//아케치 미츠히데와 동급으로 묘사되었죠. 그 말에서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7.08 0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 저게 얼굴 옆모습을 그려논거였습니까..??
    발해지랑님 말듣고보니.. 이제야 얼굴이 보이네요.
    여태껏 전 팔이 얼굴 정면을 다 가린 그림인줄 알았네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8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말이~~~~!!
    ^^ 실은 저도 그러했습니다. 그림 클릭하면 일본 위키로 이동하는 데, 거기서 확대 그림을 보고서야 알게되었습니다.

  7.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7.13 2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의 야망 '혁신'에서의 캐릭터 모습이 떠오르네요.

    최후 역시 정말 그답네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5 0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사람 이야기 나오면 빠짐 없이 나오는 것이, 삼대악행과 죽을 때의 모습이더군요.
    그만큼 당시로써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모습이었나 봅니다.

 미요시 쵸우케이는 당시의 쇼우군() 부자를 쿄우()에서 추방하는 등 킨키(近畿) No.1의 실력자로 올라섰지만 음모가(陰謀家)라기 보다는 오히려 섬세한 문화인(文化人)이었다.


 고전(古典)을 즐기고 와카(和歌)렌가(連歌)를 읊으며, 다인(茶人)들과 함께하는 풍아(風雅)한 면이 있었다. ()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다이린소우토우(大林宗套) 화상(和尙)에게 지도를 받았다. 특히 사카이()의 호상(豪商)들과는 다도(茶道)와 선()을 매개로 하여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에도 깊은 이해를 가졌다고 한다.


 렌가의 자리에서는 마치 신이 들린 듯이 굉장히 신비로운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쥘부채(扇子)를 이용하거나 할 때도 예법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왼손으로 거들어 오른손으로 조용히 펼치고 접어서 놓을 때는 원래 있던 곳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놓았다고 한다. 범상치 않을 정도로 세세한 신경의 소유자였다.


 당시 가톨릭 포교자의 눈에는 일본의 지배층이 다음과 같이 비쳐졌다고 한다.

수도의 통치는 삼 인이 행한다.

1의 사람은 쿤보우사마(=쿠보우(公方),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전국의 왕.

2의 사람은 미요신도노(=미요시 쵸우케이)’라고 하는 쿤보우사마의 신하.

3의 사람은 마스만가(=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라고 하는 미요신도노의 신하이다….

 이런 정도의 실력자이면서 쵸우케이는 관위(官位)를 바라지 않고 종사위(從四位) 슈리노다이부(修理大夫)에 머물렀으며 바쿠후(幕府)에서의 역직(役職)도 쇼우반슈우(相伴衆 바쿠후의 중신)에 만족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의 가계(家系)는 원래 아와(阿波) 슈고(守護) 호소카와 씨(細川)의 지배하에 있는 일개 토호(土豪)에 지나지 않았다. 증조부 유키나가(之長)의 대()부터 일약 쿄우토(京都)의 중앙 정계에 등장하는데, 이후 피로 점철된 3대의 역사였다. 3대는 전부 이불 위에서 죽지 못했다.


 부친 모토나가(元長)의 마지막은 무시무시하다.

 모토나가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각주:1])를 받들고 있던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 高)에 대항하여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와 함께 요시하루의 배다른 형제인 요시츠나(義維[각주:2])를 내세워 싸움을 계속하였지만 후에 하루모토에게 버림받아 사카이의 켄폰(本)사(寺)에서 자살을 강요 당했다. 이 때 모토나가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자기 손으로 장()을 끄집어 내어 천장에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 때 쵸우케이 불과 10. 은밀히 복수의 칼날을 가며 성인이 되었다.


 1542.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온다.
시코쿠()에 내려가 아와지(淡路), 아와(阿波)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다시 되돌아 와서는 키자와 나가마사( 長政)카와치()에서 죽이고 이어서 하루모토의 부하이며 같은 일족인 미요시 마사나가(三好 政長)셋츠()에서 전사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초코벌레님의 이 곳을 함 가보시길……

호소카와 미요시의 싸움(http://blog.naver.com/chocoworm/30006940287))


 쵸우케이의 무위(武威)는 이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각지의 토호가 앞다투어 쵸우케이 밑으로 모여들었다. 쵸우케이의 킨키(近畿) 제압에 맞추어 시코쿠()에서는 동생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미요시 유키야스(之康[각주:3]),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각주:4]), 아다카(아타기) 후유야스(安宅 冬康)의 세 명이다.


 이 일족은 아와(阿波), 사누키()세토 내해(瀬戸内)에 세력을 확대했다.

 이리하여 미요시 가문의 하인이나 하인이라 할지라도 팔꿈치를 펴고 어깨를 흔들거리며 쿄우()의 대로를거들먹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쵸우케이에게는 권력자로써의 비정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용서하는 등 문화인적인 허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허술함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파고든다.

 1562. 적자 요시오키(義興)가 급사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독살이라고들 한다. 이 적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쵸우케이는 갑자기 소극적이 되어 히사히데의 참언(讒言)을 믿고 동생 후유야스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쵸우케이도 죽었다.


 그 장례식 광경을 쿄우토(京都) 쇼우코쿠()사(寺)의 중 사이쇼우 쇼우(죠우)타이(西笑 承兌)가 그의 일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목메어 울었고 한탄하며 슬퍼했다. 쵸우케이가 생전에 베푼 은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1522년생.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센쿠마마루(千熊丸-'치쿠마마루'라고도 읽는다), 후에 노리나가(範長). 칸레이(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집사(執事)가 되어, 이즈미(和泉), 카와치()를 대관(代官)이라는 형식으로 지배. 쿄우토(京都)의 병권을 잡자 그 세력은 킨키(近畿), 시코쿠() 8개국에 이르렀다. 1564년 죽었다. 43.


Ps; 長慶나가요시로 읽으나, 이 책은 존중해서 이름을 읽어주는 유우소쿠요미(有職)’쵸우케이로 쓰여있기에 계속 쵸우케이로 하였다.

  1. 검호 쇼우군 13대 요시테루의 부친. [본문으로]
  2. 그의 아들인 요시히데(義栄)는, 검호 13대 쇼우군 요시테루가 죽자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옹립되어 14대 쇼우군이 된다. [본문으로]
  3. 요시카타(義賢)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카즈’나가’는 카즈’마사’라고도 읽는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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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7.04 0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름을 읽는 방법에도 종류가 있나보죠?

    일본어 한자는 이래서 늘 어렵네요.

  2.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7.04 0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어 잘 하시는거 보면 항상 부러워요.

    일본어를 언제부터 어떻게 배우셨는지 제 블로그 방명록에 간단히 좀 남겨주세요. 부탁드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4 15: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틀린 이야기겠지만...

    일본에선 명함 받을 때, 반드시 상대방 이름 읽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럴 때 이름 묻는 거 실례가 되지 않습니다.)
    읽을 수 있는 방법이야 X꼴리는 데로라서...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다 &quot;海&quot;자를 이름으로 쓰고, 읽을 때는 &quot;マリン(마린)&quot;이라고 읽더군요)

    저렇게 읽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경우라 그냥 무시하셔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05 0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가 비정한 면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않으면
    결국 누군가에게 먹혀버리는 것 같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5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배가른 오오우치 요시타카보다야 나은 죽음 아니겠습니까마는.. 생각해보면 나가요시 본인도 이른 죽음이라 볼 수 있는데 독살설이 없는게 참 신기하더군요.

    P.S. 3년동안 나가요시의 죽음을 숨겼다는 얘기가 있는데 장례식도 했다니.. 우키다 나오이에때와는 좀 다른 모습이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6 2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선생님//그래서 창업보다는 수성이 어렵다는 말이 생겼나 봅니다.

    다메엣찌님//히사히데의 독살설도 있는 듯 하던데요. ^^
    3년 동안 숨겼다던가요?... 제삼자의 일기에 쓰일 정도인 것을 보면 숨겼다고는 볼 수 없을 것도 같은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7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위키에 나왔군요. ^^; 상을 숨긴 후 3년 뒤에 행해졌다고.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8 1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게요. 그런데 위키란게 영 근거로 삼기엔 아리송한지라.. 정보 찾기엔 편하지만 저도 긴가민갑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8 19: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찾아보니 [細川&amp;#20001;家記]에 그리 실렸다고 하네요.[역사군상-전국합전대전, 상권, 48페이지]
    세상에 잡설을 돌 것 같아서 3개년(즉 2년)뒤인 永&amp;#31108;9년에 카와치에서 장례식이 치루어 졌다고.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9 0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고 보면 요시테루가 나가요시의 죽음을 알고 오토모나 우에스기에 분주하게 추파를 던진건 또.. 음.. 어렵군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0 0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정확하게 보낸 편지들이 1564년부터 요시테루가 죽는 1565년 사이인지는 모르겠군요.
    (그 전부터 빈번히 보냈다고 하니까요)


 그야말로 이색의 쇼우군[軍]이었다.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게 비기 [히토츠노타치(太刀)]를 전수받았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전란 다발하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자기단련이었다. 1546년에 쇼우군[軍]이 되면서부터 요시테루에게는 하루라도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요시테루 치세인 1546년부터 1565년에 이르는 20년간은 중세의 암흑기에서 근세의 여명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였다. 일본에 온 하비에르[각주:1]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노부나가[信長]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쓰러뜨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격동기의 고뇌를 요시테루는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친 요시하루[義晴]와 함께 전란의 쿄우[京]에서 피신하여 오우미[近江]에 있었던 요시테루는, 쇼우군[軍]이 되어 쿄우[]로 돌아와서도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의 다툼에 휘말려, 부평초[浮萍草]처럼 양 세력 사이를 떠도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오우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 그러나 결국 미요시 쵸우케이의 실력에 굴복하여 미요시 체제에 옹립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때가 1558 11.

 쿄우()로 돌아온 요시테루는 이것이 정말로 기뻤던 듯, 어소[御所][각주:2]의 마당에 서서는 밤하늘을 향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이 즈음, 그제서야 칸파쿠[白]였던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친인 케이쥬인[寿院]이 오랫동안 권해왔던 이야기였다. 요시테루의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 준다.[각주:3]


 미요시 쵸우케이가 죽자, 요시테루는 지금이야말로 막부(幕府)의 실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붕고[豊後]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나,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등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쇼우군의 의도는 죽은 쵸우케이의 모신(謀臣)이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義栄][각주:4]를 새로이 쇼우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간파하기에 이른다. 히사히데는 같은 쵸우케이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과 상담한 후 선수를 쳐 요시테루의 어소(御所)를 습격하기로 한다.

 

 1565 5 19.

 때는 장마의 계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마츠나가, 미요시 군세는 갓과 우비를 입고서, 키요미즈 사[寺]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쿄우[京]로 올라가고 있었다.

 히사히데는 밤이 되기 직전에 일부러 어느 소송(訴訟)에 대한 서장을 어소에 제출했다. 응답에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노림수였다. 그 사이에 히사히데의 무리들은 어둠에 섞여 어소 안으로 잠입하여 마루나 복도 밑에 몸을 숨겼다.

 

 갑자기 함성이 울려 퍼졌다. 궐기의 신호였다. 어소에는 사무를 보는 몇몇 외에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명확해지자, 검호 쇼우군답게 각오를 정하여 금생의 이별 주연(酒宴)을 열었다. 호소카와 타카요시[細川 隆是]가 여관(女官)코소데[小袖]를 뒤집어 쓰고 춤을 추었다.

 이때 요시테루는, 그 코소데 위에 사세구(辭世)의 시를 적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내 이름을 알려라 구름 위에까지

五月雨は露かかほととぎす

わが名をあげて雲の上まで

 그때부터 요시테루의 활약은 눈부셔 몇 자루나 되는 칼을 마루에 꼽고서는 날이 무뎌지면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달려드는 적을 마구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다. 한 적병이 문틈에서 창으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 요시테루는 넘어졌다. 거기에 적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장지문으로 몸을 누르고는 그 위에서 창으로 내리 찔렀다. 그때 불길이 한꺼번에 번져 요시테루의 목을 베지 못한 채, 건물은 화재로 무너져버렸다고 한다.(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

1536년생. 첫 이름은 요시후지[義藤].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아들. 1546년 아시카가 제 13대 쇼우군이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를 칸레이[管領=쇼우군의 보좌역]로 임명 하였지만,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 氏綱],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등이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미요시 측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바쿠후의 실권은 쵸우케이가 쥐게 된다. 쵸우케이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서 정권탈환을 기도하지만 히사히데 등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1565년 당시 아직 30살이었다.
  1. 일본에서는 ‘자비에르[ザビエル]’ 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높은 귀인의 거처 겸 정무소.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요시테루의 모친 ‘케이쥬인’은 장인인 ‘코노에 타네이에’의 여동생이다. 즉 요시테루는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본문으로]
  4. 아시카가 바쿠후 14대 쇼우군, 요시테루와는 할아버지가 같은 사촌지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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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6.24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생각하는 사나다 노부시게와 더불어 사나이의 로망 중에 한사람이라고 취급받는 그 사람이네요. 원래 단기필마로 다수와 맞짱뜨기는 영원 불멸의 로망이랄까요 (먼산-_-)
    그러고 보니 고노에 가문이 어떻게 된지 궁금하군요. 아마 1600년대 당시 얼마 못가 단절 된걸로 아는데 찾아봐야겠네요. 마법선생 네기마보는 중에 코노에 코노카 보다가 이거 보니 갑자기 떠오른 물음 ^^
    요즘 전기공사실기 땜에 죽겠네요. 완전 삽질 ㅠㅠ 더운 여름입니다. 잘 보내세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플레쉬 오버덕분에 추한꼴을 면했군요(;; 노부나가도 그 덕을 봤더랬던;;;) 뭐 생각해보면 하늘에도 눈이 있어 히사히데 어르신도 염상에서 녹아나버리지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정말 막말의 간지쇼군(ㅋㅋㅋ) 어느 막부의 말에도 이런 쇼군은 없었다(!)랄까요.. 그런데 서른에 죽은 사람치고는 너무 삭아보이는군요(;;젊을적 고생이 심해서 그런겐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세구를 읽다보니 호토토기스를 번역을 빠뜨리신 듯 하네요. 위키에는不如&amp;#24112;라 적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촉의 망제의 설화를 떠올리게 하려 하지 않았으려나 싶네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5 0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로유메님//저도 갑자기 궁금해 져서 찾아보니 지금도 코노에 가는 있는 것 같습니다. http://ja.wikipedia.org/wiki/%E8%BF%91%E8%A1%9B%E5%AE%B6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5 1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로유메님//노부타다도 꽤나 멋있었다고 하더군요.
    제일 앞에 서서 정면 돌격하여 몰려드는 아케치의 잡병을 단번에 20명 가까이 벤 노부타다의 옆에 있던 근시에게 한 말...
    [용감하도다! 이번 생에서는 은상을 줄 수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은상을 내리마]... 라는 말이 있더군요.
    코노에 가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죠. 예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amp;#29013;)의 외갓집이 코노에 가문이죠.
    전기 공사 실기. 무운을 빌겠습니다.

    다메엣찌님//플레쉬 오버?? 뭐죠 그건?? ^^; 저는 노부나가도 나름 멋지게 싸웠다고 생각하지만요 ^^.
    네덜란드의 로번(로벤)이라던가, 맨유의 전설 바비 찰튼의 10대 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젊은 편...
    참... 전 시쪽은 딸려서 그러는데, 그 호토토기스...는 번역할 때 집어 넣어야 하는 것인가요?
    형식의 하나다 보니 빼도 될 것 같아서 뺐습니다만...

    고사천사님//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 워낙 명문가다보니 단절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6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토토기스는 불여귀(두견새)를 의미하는 말인데 여기서 그냥 제 생각에 두견새전설(촉 망제가 부하에게 쫓겨나서 피를 토하며 죽었더라..)을 떠올리고 요시테루가 읊은게 아니었나 싶어서요.

    그나저나 그 난국에서도 살아 도망간 사람이 있었으니 저런 멋진 사세구가 남았지.. 그런 의미에서 혁신 켜서 한번 참수시켜봐야겠습니다(쿨럭;)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6 09: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플레쉬 오버는 제가 이쪽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론으로 설명하긴 힘든데.. 공장 화재 때 현장에서 한번 봤는데 잘 타던 건물이 한쪽 격벽 부서지니까 엄청난 불길이 바로 그쪽 격벽의 연소 가능한 산소를 태우러 몰려가더(..;)군요.

    불 났을때 엘리베이터 타지 말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엘리베이터에는 불이 좋아하는 맛있는(;) 산소가 가득 차 있는 상태기 때문에.. 신나게 내려가다 화재층에서 멈춰서 문 틈이 열리기라도 하면 그 사이로 엄청난 불길이 화르르르..들어와 버리거나 하는 일 때문에(;;)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6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군요.(좋은 거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근데 [鳴かぬなら殺してしまえ、ホトトギス]라는 말과 같이 왠지 형식적으로 집어 넣은 듯 해서 두견새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플레쉬 오버란 것이 그런 것이었군요!!! 이 또한 좋은 지식 감사드립니다.
    (전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기법 중의 하나를 말씀하시나 해서 착각했습니다. ^^; 그래서 노부나가 운운해 버렸구요...그러고보니 비오는 날의 혼노지도 그렇게 불타오른 것을 보면 거기도 비슷했나 봅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82 6 2자인(自刃) 49.

1534 ~ 1582.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주(城主).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우()()를 멸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입경(入京).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지만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해 자해(自害)







최후의 상경(上京)


 1582 5 29.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安土)()을 출발하여 오래간만에 상경하였다. 이보다 앞선 1 28일에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중지된 적도 있기에 작년 3월 이래 실로 1 2개월 만의 상경이 되었다.

 2년 전. 이시야마(石山) 혼간지(本願寺)를 굴복시킴으로써 더 이상 키나이()에서 노부나가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게 되었다. 안도감(安堵感)때문인지 왕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을 이 즈음의 노부나가에게서는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유흥(遊興)적인 면을 [신장공기(信長公記)]의 기사에 빈번히 볼 수 있다.


 1581 2월에 상경한 노부나가는 선교사에게서 데려온 흑인[각주:1]을 선물 받았고 그 직후에는 궁궐의 동쪽 마장(馬場)에서 텐노우(天皇)나 쿠게(公家)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오다 군단의 열병식(閱兵式)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조로에(馬揃)를 행하였다.


 같은 해 9.

 차남(次男) 노부카츠(信雄)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가(伊賀) 정벌을 명하였고, 또한 1582 3월에는 첫째인 노부타다(信忠)를 총대장에 임명하여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정벌을 명하였지만, 노부나가 자신은 직접적으로 작전에 관여하는 일 없이 평정 후에 현지 검분(檢分) 만을 했을 뿐으로, 그 모습은 전적(戰跡地)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이(甲斐) 원정에서 귀국했던 노부나가에게 조정(朝廷)에서 칙사가 파견되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각주:2])추임(推任)한다는 뜻이 전해졌지만 노부나가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우(本能)()의 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5 29.

 오후 12시 즈음부터 내린 비 속에서 아와타(粟田口[각주:3]) 쪽을 통해서 시죠우() 니시노토우인(西洞院)에 있는 혼노우(本能)()에 도착했다. 아와타구치에는 미리 노부나가 일행을 마중하려는 쿠게(公家)의 무리들이 다수 모여있었지만 마중할 필요는 없다는 고지를 모리 란호우시(森 乱法師=란마루(蘭丸)) 나리토시(成利)가 와서 전했기에 쿠게(公家)들도 집들로 돌아간 후 였고 또한 함께 한 수하들도 [코쇼우(小姓) 2~30] 정도였기 때문에 상경 모습은 조용했다. 상경한 시각은 오후 2시 즈음이라고도 오후 4시 즈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건 이것이 마지막 상경이 될 것이라고 노부나가 자신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경의 주요한 목적은 츄우고쿠(), 시코쿠() 정벌이라는 양 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이즈미(和泉)의 사카이()에서 철갑선(鐵甲船)을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6 4일에는 쿄우토(京都)를 출발할 예정으로 있었기에 5일간 쿄우토에 있을 예정이었다. 혼노우(本能)()의 변은 그 재경(在京) 3일째에 일어난 것이다.


상경 축하의 나날


 그렇다면 그 3일간의 모습을 살펴보자.

 5 29일 상경했던 노부나가는 아와타구치에서 첫째 아들 노부타다(信忠)의 마중을 받아 함께 혼노우(本能)()로 왔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인 21.

 노부타다는 토오토우미(遠江)의 하마마츠(浜松)에서 아즈치(安土)로 올라 와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함께 쿄우토(京都)에 와 있었다. 하지만 27일이 되어서 노부나가가 갑자기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자, 구경하러 오오사카(大坂), 사카이()로 내려가는 이에야스 일행과 헤어져 쿄우토 니죠우()에 있는 노부타다 전용 숙소인 묘우가쿠()()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재경 이틀째인 6 1.

 혼노우(本能)()에는 텐노우(天皇)와 사네히토 신노우(誠仁 親王)가 파견한 곤다이나곤(大納言) 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 ), 곤츄우나곤(中納言) 카쥬우지 하레토요(修寺 晴豊)가 상경을 축하하는 칙사로서 방문했다. 또한 총 40명에 이르는 쿠게(公家)들을 시작으로 승려나 상인 등 다수의 사람들이 노부나가 상경을 축하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쿠게들과의 대면은 수 시간에 이르렀고 노부나가는 환담 중에 칸토()를 평정했을 때의 이야기와 삼일 후인 4일에 서쪽으로 출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공략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다회()가 행해져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수 많은 명물(名物) 다기(茶器)피로(披露)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밤이 되자 노부타다가 방문하여, 쇼시다이(所司代[각주:4])인 무라이 사다카츠(村井 貞勝)나 코쇼우(小姓)들과 환담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밤이 깊어져 노부타다가 묘우가쿠사()로 돌아가자 노부나가도 마지막 침상에 들었다.


 노부나가가 취침한 바로 그 즈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 3000의 군세를 이끌고 탄바(丹波) 카메야마(亀山)성(城)을 출발하여 한밤중에 쿄우토(京都)를 향해서 군세를 진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 2일 밤이 새기 전에 카츠라가(桂川) 천을 건너 쿄우토(京都)에 들어오기 직전, 미츠히데는 그제서야 혼노우(本能)()를 습격한다는 것을 전군에 전하였고 여명(黎明)에 이르러 혼노우사()를 포위하였다.


 6 2일 여명.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에게 습격 받았을 때, 노부나가는 아랫 것들의 싸움으로 인한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함성과 철포(鉄砲)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모반(謀反)임을 깨달아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싸웠지만 물량에는 당해내지 못하여 팔꿈치를 창에 찔리자 물러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깊숙이 들어가 침실 입구를 닫고 결국 배를 갈라 죽었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할복했다고 하는 사람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중략)…… 머리카락 한 올 남기는 일 없이 재로 변했다]

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 처음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계속 씻겨도 광택만 더할 뿐 검은 색이 없어지지 않자 그제서야 믿고서는 맘에 들어하며 '야스케(彌介)'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때 싸우다 잡혔지만 미츠히데는 '사람도 아닌 미물이 뭐 알겠냐'는 식의 말을 하며 풀어 주었고 이후 소식은 불명. [본문으로]
  2. 바쿠후(幕府)를 열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쿄우토(京都)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입구 중 하나. 요즘으로 치면 톨게이트와 같다고 할까.. [본문으로]
  4. 이 때는 쿄우토(京都)의 행정, 치안, 여러 집단(조정, 상인, 절 등)과의 교섭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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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1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육천마왕이 마계로 돌아간거죠(;)

    아무튼 말년의 깽판(...하타노가 징벌 때 있었던 미츠히데 숙모를 죽게 한 일이라던가..)덕에, 박통처럼 심복의 손에 사라지는 운명은 예견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만화... [KING OF ZIPANGU 信長]라는 만화의 끝 부분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quot;저 남자는 &quot;전국(&amp;#25126;&amp;#22269;)을 끝내기 위해서 &quot;사신(死神)&quot;으로 이 세상에 강림했다. 쉴 새없이 계속 싸우다 떠나 갔다. 사람의 몸으로 &quot;신&quot;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이였던 것일까&quot;

    ... 말씀대로 마계로 돌아간 것 같다는... ^^

    에이~ 설마 그거 믿으시고 계신 것은 아니시죠? 하타노는 성내의 반란으로 인해 성내 반란 세력이 하타노 형제를 받쳤다고 하더군요. 숙모인지 친모 이야기는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이 유력하다고 하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2.12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라니 미츠히데의 고지식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거 같군요.
    히데요시였다면 소사체 적당히 골라서 선전했을텐데, 이후 토벌당하기까지 미츠히데의 행보를 그대로 예고하는거 같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2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타노쪽 얘기가 그런 얘기이군요(오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2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와우~ 색다른 충격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겠군요. 이야~ 안목을 넓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메엣찌님//어이쿠... 이런... 설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 혹은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을테니까요. 단정을 지다시피 한 말. 죄송합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3.09 0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볼리바르님 말씀이 일리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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