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분수령이 대전투의 승패를 배반이라는 행위로 결정짓게 한 인물 – 때문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사상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秀吉]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각주:1]로 태어났지만, 히데요시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가 되어 키타노만도코로의 손에 키워졌다. 이 즈음에는 히데토시[秀俊]라는 이름을 썼다.

 1588년. 히데요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의 행행(行幸)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는데, 7살의 히데아키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 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淀殿]가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이 첫 아들에게 츠루마츠[鶴松]라는 이름이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불과 3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 사망이라는 충격을 잊으려는 듯 조선 침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도 또한 히데요시의 총애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침략이 한창이던 1593년, 요도도노는 또다시 남자아이(히데요리[秀頼])를 낳았기에 히데요시의 히데요리에 대한 눈먼 사랑이 시작되어, 우선 관백(関白)인 히데츠구[秀次]를 실각시켰다. 히데아키의 신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헤아려,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각주:3]

 정유재란 때 히데아키는 일군의 대장으로 출진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의 농성으로 유명한 울산성(蔚山城)에 대규모 구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도망치는 명나라 군사를 쫓아 총대장인 히데아키가 직접 창을 꼬나 쥐고 휘두르며 짐승을 쫓는 사냥꾼처럼 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 해인 1598년. 돌연 히데아키는 귀국 명령을 받았다. 히데아키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히데요시에게 출두하였다. 필시 조선에서의 활약에 대한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아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은 의외로 조선에서의 경거망동을 질타하는 히데요시의 노호였다. 히데요시는 “네 녀석과 같은 놈을 대장으로 삼다니 내 눈이 삐었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큐우슈우[九州] 33만 6천 석을 삭감하여, 에치젠[越前] 15만석의 이봉이라는 가혹한 결정까지 내렸다.
 히데아키는 이 사태가 모두 군감(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온화한 얼굴로 히데아키의 불평을 들어주고서는, 히데요시에게도 가 히데요시의 분노가 풀리도록 노력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에야스의 조처로 감봉에 따른 이봉을 피한 히데아키의 처우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쥐고자 계획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이러한 히데아키에게 은혜를 입힌 형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아키가 배반한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결전 당일,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히데아키는 시간이 흘러도 어느 편인지 확실히 나타내지를 않고 지켜만 보았다. 애간장이 탄 이에야스는 철포대에게 명령하여 히데아키의 배반을 재촉하는 철포를 쏘게 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서 히데아키는 병사들을 움직여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것이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갈랐다.[각주:4]

세키가하라 포진도. 왼쪽 중간 마츠오 산[松尾山]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후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을 배반한 공적으로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1만석을 하사 받아 오카야마 성[岡山城]의 성주가 되었지만, 2년 뒤인 160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계속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아 정신이 병들었다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괴롭힘을 받아 미쳤다는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의 괴제백선상(魁題百撰相)에 나오는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에게 원령(怨霊)이 되어 나타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년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 밑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의 양자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출진. 이때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로 관직은 쇼우쇼우[少将]였다. 이어서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 산기[参議]
[각주:6] 겸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이례적인 스피드로 승직하였다. 1594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1.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본문으로]
  2. 이때 다른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는 텐노우[天皇] 나아가서는 텐노우의 대리인인 히데요시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는데, 다이묘우들이 서약한 대상이 히데아키였다. [본문으로]
  3. 히데츠구의 실각이 나중(1595년)이며, 히데아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간 것은 1594년의 일. [본문으로]
  4. 지금까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때 히데아키가 서군이었다는 시각이었으나(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 히데아키가 동군이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군의 총대장이었던 것도 있어), 근래에 들어서는 동군으로 참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정황증거로 마츠오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 이토우 모리마사[伊藤 盛正]를 쫓아내고 차지한 점, 이후 행해진 서군 군의(軍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 말단인 시마즈의 사츠마 병사들 역시 히데아키를 동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런 동군으로 참가한 히데아키가 참전을 주저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내건 당근인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関白)직과 킨키[近畿] 근방에 2개국 가증에 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1590~92년 사이의 관직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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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11.08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금오중납언에서는 시바료타로선생이 따로 언급하진 않았었던듯 하지만 그래도 82년 출생설이 정설인가보네요. 82년생이라면 정유재란때 활동했을시 나이가 너무..라고 생각해보니 아사노가 도련님은 오다와라전역때 15살이었던걸 생각하면 꼭 그런것도 아닌것같고(...)

    거 그렇다곤 쳐도 21세에 사망이라 이래저래 설이 많긴 많나봅니다. 딱히 지병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괴설이 나돌만도 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8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당시는 15살이면 일반적으로 데뷔전[初陣] 치를 나이인 것 같더군요.

      매사냥에 갔다 돌아 온 뒤 '기분이 안 좋아'라는 말 한 마디 뒤 자빠져 계속 자다가 한번 깨곤 사망... 당시도 이해하기 힘든 죽음 방식이었는지 농부에게 불알 채여서 죽었다는 소리까지 나왔나 봅니다.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2 0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밖엔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도요토미가의 황태자였으나 결국엔 도요토미가의 멸망을 이끄는 단초를 마련해준 인물이니 말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을테니 히데아키를 두고 도요토미를 배신했다는 비난은 안 주어졌을테니 그것 역시 극적인 요소군요.

    어쩌면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가타쿠라에 대한 상사병이 아닐런ㅈ..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2 1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말씀대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히데아키는.

      카타쿠라라.. ^^
      하지만 카타쿠라의 몸도 마음도 이미 마사무네의 것... 애송이 히데아키가 오우슈우의 독안룡에게 情人을 빼앗기는 여러모로 힘들겠군요. 으익~ 상상만해도.. ㅋㅋ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7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잉? 마사무네와 시게나가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7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사카 공성전 때 시게나가에게 선봉을 명하면서 "너 말고 누구한테 시키겠니~♡"라면서 볼에 뽀뽀했다고 하더군요.

      카타쿠라 가문의 기록[片倉代々記]에 마사무네와 시게나가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하네요.

  3. 2011.11.26 1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一.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통칭 네네(寧々). 히데요시의 정실이기에 당연히 토요토미 가문[豊臣家門] 가정(家庭)의
주재자(主宰者)이다. 소탈하고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종일위(從一位)라는 신분이 되어서도 잘난 척하지 않았고 삶이 끝나는 날까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사용하였으며 히데요시와의 대화도 누가 보건 말건 꺼리낌이 없었다.

 어느 날, 부부가 함께 란부[舞]를 보고 있었다. 보던 중 뭔 일인지 말싸움이 시작되어 서로 언성을 높였지만 둘 다 오와리 사투리로 빨리 내뱉었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가 깔깔거리며 웃었고 히데요시도 등이 휘도록 웃어 제꼈다.
 ‘싸움이 아니었나 보군’
 이라 생각하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안심하였는데, 히데요시는 그런
예인(藝人)들에게,

 “지금 싸움을 어떻게 보았나?”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어떤 때이건 밝은 분위기로 만들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어, 쿄우카[狂歌]나 임기웅변(臨機應變)적인 재치를 굉장히 좋아했다. 예인들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우선 큰 북을 치던 이가,

 “부부싸움에 모두 놀랐습니다요”

 라며 갑자기 북을 쳐 좌중을 놀라게 하며 대답했다. 피리를 불던 이가 곧바로,

 “어느 쪽이건 삐리리비리리♪”

 어느 쪽이건 잘못 하였고() 또한 말이 맞다()……라고 피리의 음에 맞추어 말하였다. 이 재치 있는 대답에 부부는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런 귀부인(貴婦人)이었다.

 이 귀부인이 아이를 낳았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운명도 크게 변했을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토요토미 정권이 성립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이 입에는 담지 않았지만 맘속으로는,
 ‘이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하가 살아계신 동안만이다.’
 라 생각하여 다음에 이 천하를 계승할 사람이 누굴까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당연 누구의 눈에건 실력을 말해도, 혈통을 말해도, 인물을 말해도, 관위를 말해도
제후(諸侯) 필두(筆頭)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을 존중하고는 있었지만, 뒤로는 이에야스와 끈을 잇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히데요시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은 이에야스와 다이묘우[大名]라는 점에서는 동격이면서도 은밀히 이에야스에게,

 “절 부하로 여기시옵소서.”

 라고 까지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요토미 가문은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이 그런 의미에서는 이 정권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불행은 혈연(血緣)이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히데츠구 이외에 더 이상 적당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혈연이 아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까지도 양자로 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일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히데요시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킨고 츄우나곤[金吾 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까지 히데요시의 양자 중 한 명이 된 데에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히데아키는 키타노만도코로의 혈연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친정집은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두 곳이 있다.
 그녀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미관(微官)이었던 스기하라[杉原 = 후에 키노시타[木下]로 성을 바꾸었다] 스케자에몬 사다토시[助左衛門 定利]의 딸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이모가 있던 아사노 가문[浅野家]에서 키워졌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 것과 동시에 이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도 아사노 가문도 제후가 되었고, 기묘하게도(이유는 있지만) 키타노만도코로의 이 두 친정만은 토쿠가와 다이묘우[徳川大名]로 남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살아 남는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할 즈음, 키타노만도코로의 생가 스기하라 가문 당주는 그녀와 연년생 동생 이에사다[家定]였다. 그 이에사다에게는 자식들이 많아 키타노만도코로는 일찍부터,

 “니가 가진 많은 아이들 중에서 한 명 갖고 싶구나”

 고 말했었다. 그 키노시타 가문에 다섯 번째 남자아이가 1582년 태어났다. 히데아키였다.
 이 당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츄우고쿠[中国] 방면 사령관이었으며, 키타노만도코로는 거성(居城)인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었다. 스기하라 가문은 이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있었기에 당연히 그 집은 나가하마 성 밑에 있었다. 그녀는 성주 부인이면서도 자신의 친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동생이자 부하인 이에사다의 집에 방문하였다.

 “얘는 참 귀엽구나”

 아기를 들여다보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손벽을 치며 기뻐했다. 아예 이 아이를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에사다에게 말하자,

 “그 정도로 맘에 드신다면”

 하면서 누이의 뜻에 따라주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서 돌아 온 히데요시에게 그 뜻을 말하자,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양자로 삼자구”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 히데요시는 간단히 처의 요청을 승낙하였고, 이로 인해 히데아키는 나가하마 성에서 돌보게 되었다. 물론 유모가 있었지만 키타노만도코로 자신도 아이를 좋아하였기에 아기보기도 –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 치고는 능숙했다.

 히데아키는 무사히 성장했다. 통칭을 타츠노스케[辰之助]라고 하였다.
 동그란 얼굴에 흰 피부로 눈동자 움직임이 빨랐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서도 굉장히 똑똑해 보였다.

 “저 아이가 자라면 한 몫을 할만한 인물이 될 거에요”

 라고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군”

 히데요시도 고양이와 아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거기에 히데요시는 자기 처의 장점 중 하나가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다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히데요시도 히데아키에게 기대를 하였다. 집안 내에서 히데아키의 위치는 양자 서열 1위인 히데츠구의 동생이라는 순위였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에게 만약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가문의 상속권을 주어도 좋다고까지 히데요시는 생각하여,

 “네네, 이 가문을 저 아이에게 물려주어도 좋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시게”

 라고 까지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말하였다.

 1585년 히데요시는 관백(関白)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조정에 요청하여 12살인 히데아키를 종사위하(從四位下)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에 임명 받게 하였다. 이 관을 당명(唐名)으로는 킨고쇼우군[金吾将軍]이라고 한다. 궁문(宮門)의 경비대장이며, 금혁(金革)을 차고 문을 지킨다고 하여 [금오(金吾=킨고)]라는 호칭이 생겼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제후들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소년을,
  "킨고님"
 이라 부르며 각별한 경의를 표했다. 물론 뒤에서는 ‘킨고놈’ 이라고 소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즈음부터 히데아키는 아이였을 때의 귀여움이 사라지고 영특함이 사라져, 간단히 말하면 우매해지고 얼빠지기 시작했다. 장래
상급 귀족(公卿) 사회에서 창피를 당하지 말라고 글과 시의 선생을 붙여주었지만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것 같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것을 깨닫기에 이르러 차츰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조정에서도 행동거지가 나빠 코를 흘리고 엄숙해야 할 곳에서 갑자기 웃거나 했다. 아주 조심히 걸어야만 하는 조정의 복도에서 동동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저 아이만큼은 창피하네요”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푸념했다.
 원래 그녀의 생가인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의 핏줄은 모두 무사(武士)로서의 용기나 과감함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닮아서 총명한 인물도 많아, 히데아키의 큰 형 
카츠토시[勝俊 = 지쥬우[侍従], 후에 쵸우쇼우지[長嘯子]] 등은 시에 대한 재능에 있어서만은 어느 제후의 자식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게”

 히데요시는 그 점에 있어서 낙관적이었다. 어렸을 때의 얼간이 짓이라면 자기 또한 그러했으며, 그의 옛 주군이며 생애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악동(惡童)스러움은 당시 오다 가문의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그에 비추어보아 어릴 때의 난폭함과 우둔함을 가지고 나중의 그 인물이 현명하게 될지 어리석게 될지를 잴 수 없다.

 “뭐 그런 것일세”

 히데요시는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키타노만도코로를 달랬다.
 그러나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은 좋아지질 않았다. 왜냐하면 히데아키는 12살의 꼬꼬마인 주제에 성(性)에 대한 관심만은 이상할 정도로 강하여,
여관(女官)들이 방에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을 때면 어느 순간에 들어왔는지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타이르면 미친 사람마냥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히데요시는,

 “색을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개성이나 경향과 같은 것으로 착하고 나쁘고 현명하고 우둔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가~ 킨고도 벌써 훔쳐보기인가.. 나이에 비하면 빠르군”

 이라 말하며 웃을 것이 뻔했다. 호색(好色)과 조숙(早熟)이라는 점에서는 히데요시 자신도 그러했기에 이런 남편에게 호소해 보았자 였다.
 히데요시는 오히려 자신의 친족인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 쪽을 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1588년.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조영(造營)하여 4월 14일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방문을 요청하였다. 텐노우[天皇]가 신하의 사저(私邸)에 방문하는 것은 요 백 년 동안 없었기에,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화려하게 알릴 수 있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온 힘을 다하여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날 쿄우토[京都]의 근방은 물론 먼 지방 사람들까지 구경을 하려 몰려들어, 길가와 거리를 경비하는 경비병 만으로 6000명이 동원되었다. 행렬은 화려함의 극을 달했다.
 -텐노우님이라는 것은 이렇게까지 존귀하신 것인가?
 라고 다이묘우[大名] 이하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가 기대했던 이 의식의 정치적 효과였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천하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텐노우 다음가는 이는 관백(関白)이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알게 됨에 따라 자연히 관백의 신성함도 알 수 있게 됨에 틀림이 없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천하가 갑자기 성립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후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가신으로 있었을 때의 옛 동료들이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오다 가문과 동맹했던 나라의 국주(国主)로 히데요시보다 오히려 지위가 높았다. 거기에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는 옛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이었다. 히데요시가 무력과 운(運)으로 그들을 휘하에 두고는 있었지만 출신이 출신인만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복종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에게 존비(尊卑)의 가치관만큼이나 완고한 것은 없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부수고자 했다. 천자의 존귀함을 빌려 그것을 선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존비관(尊卑觀)과 질서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텐노우는 쥬라쿠테이에서 4일간 머물렀다.
 머물던 중 마당을 구경하려는 텐노우[天皇]의 짚신을 천하의 지배자인 히데요시가 마당으로 내려가 자기 손으로 직접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또한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방 하나에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힘 있는 여섯 명의 제후를 모아 놓고 텐노우를 모시고 와 이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여섯 명은 다음과 같다.

나이다이진[内大臣]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다이나곤[大納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곤다이나곤[権大納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 히데요시의 동생]
츄우나곤[権中納言]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산기사코노에노츄우죠우[参議左近衛中将]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우코노에노곤쇼우쇼우[
右近衛権少将]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들에게,

 “너희들은 들으라. 이제 천자(天子)의 고마움과 고귀함에 감루(感淚)를 흘렸을 것이다.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서에 써서 제출하도록”

 하고 명령하였다. 앉은 자리 앞으로 서약서가 놓였다. 이미 문장은 쓰여있었기에 일동은 여기에 혈판(血判) 서명을 하기만 한 것이다. 서약서에 쓰인 문장의 말미에,

칸파쿠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것이든 따르며 조금이라도 거부하지 않겠다.

 고 적혀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텐노우[天皇] 앞에서 제후에게 복종을 맹세시키는 이 일이야말로 이번 텐노우의 쥬라쿠테이[聚楽第] 방문 최대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서약서를 받는 인물은 히데요시 본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대리인(代理人)이었다.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대리인에 히데아키를 선택하였다.
 [킨고님]
 이라고 서약서에는 미리 쓰여져 있었다. 맹세하는 상대는 15살의 킨고 히데아키에 대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는,
 ‘이외로 킨고님이?
 라는 것이 되었다. 당연한
추찰(推察)이었다. 이 서약서로 인해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의 히데아키 지위는 명확해졌다. 비약(飛躍)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에게 천하를 물려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킨고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되지’
 라 다이묘우[大名]들은 생각하며 이제 막 ‘이방 수염’이 나기 시작한 소년에게 알랑거리기 위해서 다투듯이 선물을 보내게 되었다.

 “저래서는 거만해지지 않을까?”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걱정했지만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히데아키에 대해서도 제후들이 떠받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 했다.

 “선물 같은 것 받게 내비 두시게. 히데아키가 얼마나 존귀한가를 천하에 알리는 편이 좋은 것일세”

 “그러나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킨고님에게는 독이 될 것입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말했지만 그러나 가정(家庭)에서의 히데요시는 팔불출(八不出)에 가까웠다.

 “쓸데없는 걱정일세”

 그 총명함에 있어서는 고금무쌍(古今無雙)이라 일컬어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단점이 있었다. 자식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하지만, 교육은 원래 쓸데없는 걱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히데요시는 교육을 받지 않고 어른이 되었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결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문은 갑자기 성립된 귀족(貴族)인 만큼 다른 다이묘우[大名]나 하다못해 촌구석의 조그만 호족 가문에도 반드시 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는 자녀교육이라는 것을
가풍(家風)으로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관위를 승진시켜주는 것 정도였다.
 히데아키가 15살이 되는 해인 1591년에는 산기[参議]에 임명되었는데,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는 그대로 겸하게 하였다.
 16살인 1592년에는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되어 정삼위(正三位)로 승진하였다. 이리하여 세간에서는,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이라 불렀다. 단 히데아키 승진의 속도는 이 곤츄우나곤에서 우선 멈추게 된다. 왜냐면 이 해에 형 뻘인 히데츠구가 갑자기
약진(躍進). 관백에 임명되어서는 명실공히 천하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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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7.12.15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왜 서약서에 히데아키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이때는 히데아키의 성이 도요토미 였을려나?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15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을 읽어보니, 히데아키가 1577년에 태어난건가요? 위키페디아나 여타 자료처럼 1582년에 태어난건가요..(음..)

    도요토미가의 자식교육이 캐실패(;)였다는건 공감합니다. 오히려 거의 손을 못댄 히데요리쪽이 가장 괜찮아 보일 정도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7 0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이 당시는 아직 토요토미 성이었죠.

    다메엣찌님//그렇습니다... 본문은 천정 5년이라고 나왔지만, 1582로 고쳤습니다. 문맥상(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함 즈음...)으로 보아도(다른 책들을 보아도 천정 10년 1582년생이라고 하더군요)

    중간에 1584 -> 1585로 고칩니다... 근데 그럼 두살인데 열두살... 책이 잘 못 된것인지... 시바 선생이 착각했는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1.31 04: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가 조정의 권한으로 히데요리를 교토로상경하라고 명했을때,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 가토,아사노 2명에게 호위를 하도록하여 상경한것을 보고, "히데요리는 어지리만 얕잡아볼수 없는 인물이다, 살려놓으면 나중에 큰 후환이 될 것이다."라고도 말한적이 있지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1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이 글에 어째서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만남에 대한 덧글을 다셨는지 조금 의문이군요...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 언급하셔서 인가요?)

    미묘하게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군요.

    조정의 권한이라기 보다는 손녀 사위 얼굴 함 보자는 의미였고, 토요토미 가문은 쿠게(公家)에서도 쿠교우(公卿)인지라 텐노우(天皇)가 바뀌는데 참석 안 할 수가 없었죠.

    상경하면 죽인다뇨? 대의명분 없이 자기 주인격인 히데요리를 죽이면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할려구...이에야스도 그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서 호우코우(方広)사(寺) 종명 사건을 만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대의명분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있더라도 상전을 이유없이 죽였다간 후에 당장은 자기한테 머리를 숙이고 있는 토자마(外様)들에게 나중에 들고 일어날 명분을 줄 수 있으니까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를 언급하셔서 몇자 더 적어보았구요.
    이에야스가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 히데요리의 장인어른의 신분이였지만, 정략결혼에 의한것이지요. 도요토미가가 공경가문인것 맞는말이지만 그 당시 시국으로보아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이미 세키가하라 전투후 도요토미가를 표면적으로 받느는 가문은 거의 없다시피했지요. 히데요리가 교토로 상경하면 이에야스가 표면적으로 죽이지않고 암살을 할것이기때문이죠. 외냐하면 새로운 천황이 등극하는시기에 히데요리가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는 데리고 교토로 상경할수 없으니, 히데요리는 십중팔구 이에야스의 의지에따라 교토로상경하면 암살될것이란걸 알고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경하지않는다면 반역으로 몰아 도요토미가를 공격하려고 했던것이죠.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를 멸할 명분은 찾고있었으므로.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기때문에 히데요리가 얻은 방법이 자신에게 교토로 상경할것을 설득하러온 카토,아사노에게 호위를 하도록 하죠. 이렇게되면 이에야스에게있어서는 히데요리는 결국 교토에 상경하였으니 반역으로 몰아넣을수도 없었고, 암살을하자니 가토와 아사노까지 죽이면 도요토미계 출신장수들이 반발할것임은 분명했으니 말이죠. 그래서 히데요리는 얕볼수없는 자라고 평하기도했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코사종명사건은 상황이 좀 틀립니다. 호코사종명사건은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서 칩거할때의 얘기죠.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 틀어박혀있는동안은 암살은 꿈도 못꾸는것이니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암살에 대의명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암살을해도 대명들은 심증만 있을뿐잊 물증이 없을테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리에게 오사카성 밖은 결코 안전할수 없는곳이였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글 감사합니다.

    미묘하게 서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전 chaosrinor님께서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라고 언급하시길레 그에 대한 반론으로 상경한다고 죽이면 대의명분이 없기에 나중에 호오코우사 종명 사건을 이으켜 대의명분을 얻었다고 말씀 드린 것이고....

    chaosrinor님께서 오늘 달아주신 말씀은 저와 비슷한 의견이시군요.
    (표면적으로 죽이지 않고 암살을 한다는 말씀은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겠고, 상경하면 암살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다르지만...)

    상경하면 부하인 이에야스의 명령에 주가인 토요토미 가문이 부하에게 굴복한 꼴이 되고,
    상경을 거부하면 실질적인 힘(무가의 톱인 쇼우군 가문)을 가진 이에야스가 대의명분으로 삼을 것이고..

    때문에 그 중간책을 사용해서, 손녀 사위의 얼굴을 본다는 말이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끝나지 않으셨었군요...

    자꾸 반역 반역 하시는데, 반역이란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가는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부하가문은 토쿠가와.
    하지만 토쿠가와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이이다이쇼우군 이라는 무가 정치를 만들어서 복잡하게 된 것입니다.

    호코우사 종명 사건은 왜 일어났을 까요?
    토요토미 가문이 가지고 있던 재산(즉 '힘')을 소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쿄우토에서 만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토요토미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쟁이란 그리 쉽게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이에야스가 그렇다고는 전 생각할 수 없군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1602 10 18일 병사(病死) 21

1582~1602.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1]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 처음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이어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승리할 수 있도록 서군을 배신하여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50만석 다이묘우[大名]가 되지만 곧 젊은 나이에 죽었다.









역사를 바꾼 선택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이름을 단번에 알린 것은 다름 아닌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하지만 히데아키는 그 2년 뒤인 21살의 나이에 죽어버렸다. 따라서 히데아키에게 있어서 말년은 그 2년간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날 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서로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한 모략 싸움이 활발히 펼쳐졌다. 하지만 결전 당일인 9 15, 히데아키는 고민 끝에 아군인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내응을 결심하여 머물고 있던 마츠오 산[松尾山]을 내려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진영을 급습한 것이다. 히데아키의 배반에 당황한 서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연달아 무너져 결국 서군이 괴멸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 전투로 인해서 동군의 총대장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패권(覇權)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직접적인 승리의 요인은 히데아키의 결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10 15일 논공행상에서 히데아키는 큐우슈우[九州]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에서 서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영지였던 비젠[備前], 미마사카 57만석으로 가증(加增) 이봉(移封)되어 오카야마 성[岡山城] 거성으로 삼았다.


 하지만 비젠의 오카야마 성으로 옮겼을 즈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예전보다 더 술을 즐기기 시작하였고 그것도 날이 갈수록 더 마시게 되어, 쿄우토[京都]에서 죽은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를 공양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던 양어머니 키타노만도코로를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히데아키는 1582년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 3살 때 히데요시 부부의 양자가 되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후계자로 길러졌다.

 히데요시 부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히데아키는 당대 제일의 문화인으로 알려진 쇼우고인 도우쵸우[聖護院 道澄]에게 글자를 배우거나 와카[和歌] 그리고 케마리[蹴鞠][각주:2]를 할 때의 손 움직임, 축이 되는 발의 움직임 등도 단번에 습득할 정도로 똑똑한 소년이었기에 기대를 받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1593년에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피를 이은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다. 이것은 히데아키가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 후보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친족으로 중히 여겨 1597년 조선 재출병[각주:3] 때에는 총대장으로 파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보낸 히데아키를 불쌍히 여긴 히데요시는 살아 생전에 히데아키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내가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어떠한 것이건 들어주길 바란다고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히데아키 자필(自筆) 돈 차용증.


매사냥 직후의 급사(急死)


 1602년 초두에 히데아키는 이름을 히데아키라[秀詮]로 개명하였다.

 이는 전년에 일어난 - 히데아키에게 간언(諫言)한 스기하라 키이노카미 시게마사[杉原 紀伊守 重政]를 죽인 사건이나, 숙노(宿老)인 이나바 마사나리[稲葉 正成][각주:4]를 쫓아 낸 사건 등 가문 내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나아가겠다는 의미에서 개명했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 히데아키는 쿄우토[京都]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고모 겸 양어머니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어떤 때는 황금 50(500)이라는 거금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빌리기도 했다. 사용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등 혼란 속에서 술에 빠져 평판이 좋지 못한 히데아키를 키타노만도코로는 죽은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마지막까지 뒤를 돌봐준 것이라 생각된다.


 히데아키가 죽은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에게서 거금을 빌린 불과 반년 후인 10 18일. 향년 21살이었다.

 사인(死因)에는 여러 설이 있어 확실치 않지만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 동서 양군의 내응 공작에 마지막까지 고민한 끝에 결국 아군을 배신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여 양심의 가책과 주위의 비난에 견딜 수 없어 미쳐 죽었다고도 한다.


 죽기 직전인 10 15일.

 매사냥을 하러 나갔던 히데아키는 해가 저물어서 성으로 돌아왔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한 채 눕자마자 인사불성이 되었다. 다음 날에는 숨이 중간에 멈추기도 하여 놀란 측근들이 쿄우토[京都]에 파발을 보내기도 했다. 17일에 잠깐 눈을 떴지만 다음 날 새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히데아키가 죽기 3일 전인 15일에 형인 키노시타 토시사다[木下 俊定]도 급사하였기에 그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1.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네네[寧々]를 말함. [본문으로]
  2.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축구의 리프팅과 같은 경기. 여러 명이서 사슴 가죽으로 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발등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경기.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이름. [본문으로]
  4. 아직 이 때의 성은 하야시[林]였다. 코바야카와 가문을 떠난 후 미노[美濃] 이나바 시게미치[稲葉 重通 – 이나바 잇테츠[一鉄]의 서장자(庶長子)]의 사위가 되어 성을 ‘이나바’로 바꾸었다. 여담으로 이때 결혼한 것이 후에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의 유모]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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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7.05 14: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인에 관한 글은 보기가 딱 좋은데, 본문은 글씨가 작아서 읽기가 좀 힘드네요;;
    죽음의 원인이 좀 황당하긴 하군요... 특히 3번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7.05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그러더니 또 그러는 건가....
    좀 고쳤는데 이번엔 어떠신가요? 글구 이 포스트 말고 다른 곳도 그런가요?
    -------------------------------------------------------------------------
    히데아키의 사인은 그가 배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무사답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1.21 2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번 설에서, 제가 알기로는 시동이 그랬는데, 그 시동이 여자였던 겁니까?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1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시동에게 죽었다는 것도 읽은 적은 있지만, 무사다운 죽음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곳엔 '시녀'를 썼습니다.(흐름이 똑같다 보니.. 술먹고 깽판 -> 몇 몇 죽어 나감 -> 공포를 느낀 시녀(혹은 시동)이 칼을 탈취하여 죽임)
    "시녀(혹은 시동)"이라고 할 걸 그랬네요.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lucktoyou326 BlogIcon 2008.09.08 2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한정보, 담아갑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12 0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신다고 하여도 링크인지라 실망 안 하셨을지...

기노시타 가쓰토시(木下 勝俊)

1649 6 15 병사 81

1569 ~ 1649.

호는 쵸우쇼우지[長嘯子=장소자]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조카. 와카사[若狹]의 오바마성[小浜城]성주였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임무 방임죄로 영지(領地)를 잃었다. 후에 풍류의 세계에 살며 가인(歌人)으로 이름을 남겼다. 저서로는 가집(歌集) '쿄하쿠슈우[举白集]'











전도유망했던 와카사 소장(若狹少将)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컬어 '천하를 가르는 싸움'이라 하는데 이번에 등장하는 무장 키노시타 카츠토시에게 있어서도 인생이 갈려 버린 싸움이었다.

 카츠토시는 1569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 동생이 히데토시[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각주:1]였다. 성인식을 치른 후 카츠토시는 1548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히데요시를 따라 종군하였는데 아마 이것이 전장에 처음 출진일 것이다.

 

 1587년.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도 1천의 병력을 이끌고 종군했다. 이 시기에 시키부다이후[式部大輔]에 임관.

 다음해 1588년 4 14 쥬우라쿠테이[聚樂亭]로 천황이 놀러 갔을 때, 카츠토시는 칸파쿠[関白] 히데요시의 우마차 바로 뒤를 따랐다. 그때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 뜻을 적은 서약서에 [타츠노 지쥬우 토요토미노 카츠토시[龍野 侍從 豊臣 秀俊]]라 서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당시 하리마[播磨] 타츠노 성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90년.

 칸토우[関東], 오우슈우[奧州] 원정에서는 9백명을 동원. 이어서 1592년 조선 출병으로 인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주둔하지만 조선에는 건너 가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591 1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뒤를 이어 와카사 오바마 6 2천석으로 이봉되었다. 이 때 동생인 토시후사[利房]도 같은 와카사 내의 타카하마 성[高浜城] 2만석으로 봉해졌기에 카츠토시, 토시후사 형제가 다이묘우[大名]로서 와카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1598 4월에는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코노에노곤쇼우쇼우[佐近衛権少将]에 임관되었기에, 와카사 쇼우쇼우[若狹少将]라 불렸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 거기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기에 카츠토시의 앞날은 그야말로 전도유망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2년 뒤에 운명의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맞이한 것이다.


후시미(伏見)성의 수비에서 도망치다.


 1600 7월.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토벌하기 위해 칸토우로 내려가면서, 카츠토시에게 후시미 성의 수비를 명령하였기에 카츠토시는 후시미 성의 마츠노마루[丸]를 수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를 타도하려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의 서군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자 몰래 후시미성에서 빠져나온다. 공격군 중에는 동생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츠토시가 후시미성의 수비를 방기(放棄)한 것은 이에야스의 명령을 배신하고 서군에 가담한 것을 의미했다. 결국 서군의 맹공을 받은 후시미성은 곧바로 낙성되었고 이에야스의 부하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등 농성군은 장열한 전사를 했다.


 9 15일 세키가하라 전투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나자 전후 처리과정에서 임무 방임의 책임에 따라 와카사 오바마 62천석을 몰수당한다. 이때 카츠토시의 정실 모리 씨[森氏]는 카츠토시의 행동에 정이 떨어져 비구니가 됨과 동시에 카츠토시에게 시를 한 편 보내고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다. 참고로 이 정실 모리씨는 예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력 부장이었던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딸로,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전사한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여동생이었다.


낙동[洛東[각주:2]]의 은거자


 그 후 다이묘우에서 전락하여 낭인이 된 카츠토시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의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죽은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던 키타노만도코로는 조카인 카츠토시를 불쌍히 여겨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608 8월.

 카츠토시의 부친인 키노시타 이에사다가 쿄우토에서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에사다의 영지였던 빗츄우[備中] 아시모리[足守] 2 5천석을 카츠토시와 토시후사에게 나누어 물려받게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끼어든 키타노만도코로가 이에야스의 명령과는 다르게 이에사다의 영지를 카츠토시 한 명에게만 몰아주었기에 격노한 이에야스는 영지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시모리 2 5천석은 아사노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인 나가아키라[長晟]들에게 주어 버렸다. 이 직후 다시 다이묘우가 되지 못한 카츠토시는 머리를 깎고 '쵸우쇼우지[長嘯子]'라 호를 칭한 것 같다.


 1610 6월.

 카츠토시는 키타만도코로의 영지인 셋츠[摂津] 히라노 장[平野庄]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관리직도 원래는 부친 이에사다가 하고 있던 것으로 영주(領主)인 키타노만도코로의 배려로 카츠토시가 이어받게 된 것이다.

 후에 히가시야마에 은거한 카츠토시는 와카[和歌]의 길을 정진하면서 근세 초기의 와카의 무대에 이름을 남겼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 하야시 라잔[林 羅山]등의 문인이나, 상급귀족[堂上=도우죠우], 하급귀족[地下=지게]의 사람들과 넓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1649년 6월 15 쿄우토 서쪽의 오오하라노[大原野]에서 81세로 죽었다. 묘는 숙모인 키타만도코로가 잠든 코우다이 사에 만들어졌다.

  1.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즉 금오중납언. [본문으로]
  2. 쿄우토(京都)의 동쪽을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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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ponet 2018.11.27 2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 문단,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의 연도가 1548년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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