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가 만약 이에야스[家康]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면, 어엿한 센고쿠[戦国]의 영웅으로 한자리를 차지하며 찬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그 핏줄로 인하여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일생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히데야스의 자질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이라는 큰 영지에 봉해졌을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방문해서는,
 “만약 천하에 이변이 일어났을 시에 소인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의 눈으로 보건 동생인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보다 히데야스의 기량이 뛰어나 보였던 듯 하다. 아비 이에야스조차 히데야스를 두려워 했던 듯한 흔적이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결전에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봉쇄하는 임무를 주며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한 것은, 행여 히데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전공이라도 세워 쇼우군 히데타다를 능가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1]. 히데야스라면 이런 혼란을 틈타 천하를 취할법한 실력을 가졌다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생모는 이름을 오만[お万]이라고 하며 미카와[三河] 치리후[池鯉鮒[각주:2]]에 있던 신사에 근무하던 신관[각주:3]의 딸이었다고 한다[각주:4]. 이에야스의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였던 것을 이에야스가 미카와 오카자키 성[岡崎城]의 목욕탕에서 손을 대어 히데야스를 낳게 했다고 한다. 오만이 임신한 것을 알아챈 츠키야마도노는 질투를 증오로 바꾸어 오만의 옷을 모두 벗겨 나무에 매달아 채찍질했다고 한다.[각주:5] [각주:6] [각주:7]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히데야스는 그 용모가
동자개[ギギ – 매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와 닮았다 하여 ‘오기마루[於義丸]’ 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혼다 사쿠사에몬 시게츠구[本多 作左衛門 重次]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꾀를 내어 대면시켜 결국엔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기마루에 대한 이에야스의 애정은 박했다. 그리고 히데야스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お愛の方]에게서 히데타다[秀忠], 타다요시[忠吉]가 태어나자 한층 더 히데야스의 존재감은 엷어져 갔다.

 11살 때, 오기마루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에야스가 바친 인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호탕한 기질을 사랑했다. 이름을 자신의 ‘히데[秀]’와 이에야스의 ‘야스[康]’를 따 ‘히데야스[秀康]’로 지은 것도, 거기에 칸토우[関東]의 명족(名族) 유우키 씨[結城氏[각주:8]]를 계승하게 한 것도 히데요시의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때, 히데야스가 후방에 있어 공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 것을 보고,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가 히데요시에게,
 “역시 토쿠가와 님의 기풍을 물려받으신 듯”
 하고 말하자 히데요시가,
 “그렇지 않네. 히데야스는 이제 내 아들이니 무(武)에 관해서는 이 히데요시를 닮은 것일세”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히데요시가 히데야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었는지를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히데야스가 16살 때의 일이라 하는데, 히데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승마장 관리인이 경주라도 하려는 듯이 히데야스의 옆으로 달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것이다. 히데야스는 그 무례에 분노하며 단칼에 베어 죽여버렸다. 관리인의 죽음에 승마장에 있던 관리인의 동료들이 살기를 띠며 히데요시에게 히데야스를 벌 주라고 간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오히려,
 “내 아들에게 무례를 범한 승마장 관리인이야말로 죽어 당연하다”
 고 말하며 히데야스의 호방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응어리져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 관료들의 알력이 표면화 되었다. 결국 카토우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꾀함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하였고 그 후 목숨을 건지는 대신 사와야마[佐和山]에 은거 당하게 된다. 사와야마로 향하는 미츠나리의 안전을 위해서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에게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와 함께 호위를 맡도록 지시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때 병사[足軽]들에게는 철포의 화승에 불을 붙인 채 경계하면서 행군하도록 하였으며[각주:9], 무사들에게도 갑주를 두르게 하여 완전 무장한 채로 행군하는[각주:10] 등 히데야스는 철저한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데야스는 에치젠[越前] 후쿠이[福井[각주:11]]로 이봉(移封)되어 마츠다이라 성[松平姓]를 칭하였는데[각주:12], 1605년 히데타다가 쇼우군[将軍]이 되자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님이었기에 히데야스의 에치젠 가문은 “제도 밖의 에치젠 가문[制外の越前家]’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남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데야스가 에도[江戸]에 올 일이 있을 때에는 쇼우군 히데타다가 일부러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왔고,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향하는 길에서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아랫자리에 위치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히데야스의 행렬이 에도로 가기 위해서
우스이 고개[碓氷峠]]의 관문소[関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때 에치젠 가문은 철포 10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도 에도로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천하의 법도였다. 당연히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철포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보고 히데야스가 말했다.
 “그것은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3]]에게나 적용되는 법도일 것이다. 내가 에치젠 츄우나곤 히데야스[越前 中納言 秀康]임을 알고 막는 것인가?”
 히데야스가 이렇게 말하자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츄우나곤이건 다이나곤[大納言]이건 법도는 법도올시다. 통과시킬 수는 없소 하며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시팔시팔댔다. 히데야스는 격노했다.
 “관문소의 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욕설들과 츄우나곤 다이나곤하며 운운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 뒤, 부하들을 향해서,
 “저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버려!”
 하고 명령한 것이다.
  에치젠 가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창을 꼬나 쥐고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하급 관리들은 놀라 모두 도망쳤다.
 이것이 에도에 전해지자 히데타다는,
 “관리들이 도망친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도다. 아무리 관리들이 죽더라도 함부로 츄우나곤(히데야스)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
 이라 말하며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히데야스의 마음 속에 배다른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 후시미[伏見]에서 오쿠니[阿国]를 불러 그 춤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오쿠니의 춤을 보면서 히데야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천하에는 수천 만의 여성이 있겠지만 이 오쿠니를 천하 제일의 여인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남자가 될 수 없으니 여자인 오쿠니에게조차 이르질 못하는구나. 이 어찌 분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히데야스는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된지 2년 후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1574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아들. 1584년 코마키-나카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의 강화 교섭 후 인질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고, 1590년 시모우사[下総]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의 양자가 되어 10만 1천석을 상속.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마츠다이라 성[松平姓]으로 복귀하여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에 봉해졌다. 1607년 죽었다.

  1. 우에스기 정벌을 앞두고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되는 오야마 평정[小山の評定] 후 약 1개월 간은 히데타다가 우츠노미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히데타다는 후방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를 정벌하러 떠나고 대신해서 그제서야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 히데야스이다. 그 사이 미노[美濃]의 기후 성[岐阜城]이 너무도 단기간에 함락되어 상황이 변화되자 히데타다는 급히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된다....한줄 요약하면 히데야스가 공 세울 것을 두려워 하여 처음부터 우츠노미야에 남긴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현 치류우 시[知立市]. 당시 연못[池]에 잉어[鯉]와 붕어[鮒]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신사(神社)의 말단 사무를 보는 직책인 샤닌[社人]이었다 한다. [본문으로]
  4. 나가미 시마노카미 요시히데[永見 志摩守 吉英]의 딸. 혹은 셋츠[摂津]의 의사인 무라타 이치쿠[村田 意竹]의 딸(또한 나가미 시마노카미가 나중에 셋츠로 가서 무라타 이치쿠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5. 그렇게 매달린 오만을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가 구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낳게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또는 오만이 매질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갔으며, 한에몬은 시게츠구에게 이런 일을 보고하여 시게츠구가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에치젠 가문의 가전[越前家伝]에 따르면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에야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큰엄마(伯母)에게 와서 도망치겠다고 하자 한에몬의 큰엄마는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오만은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한에몬의 큰엄마는 과거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 시중 들던 여성이라 한다. 한에몬의 큰엄마 다음 날 입성하여 이에야스를 만나 오만에 대해 보고하였지만 이에야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냥 한에몬 큰엄마 집에서 머물다 30일 뒤 쌍둥이를 낳았다 한다. 한 명은 곧바로 죽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히데야스라고 한다....(여담으로 쌍둥이 중 하나가 죽지 않고 나가미 사다치카[永見 貞愛]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당시는 동물이나 한꺼번에 여럿 낳지 사람은 한 명씩만 낳기에 쌍둥이는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의 할머니부터 9대 쇼우군 이에시게[家重]의 생모에 이르기까지 에도 막부의 역대 쇼우군의 생모, 정실, 애첩, 측실 및 유모를 기록함과 동시에 그녀들의 출신 가문들을 기록한 [옥여기(玉輿記)]에 따르면, 유우키 가문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초대 쇼우군[将軍]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셋째 아들인 유우키 토모미츠[結城 朝光]를 시조로 하며 - 공인된 요리토모의 아들은 2대 쇼우군 요리이에[頼家], 3대 쇼우군 사네토모[実朝]로 두 명뿐. - 히데야스의 양아버지가 되는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는 토모미츠의 19대손이라 한다. 참고로 유우키 토모미츠는 그 어미가 요리토모의 씨를 품은 상태로 요리토모가 오가와 토모미츠[小山 朝光]에게 하사하였고 그 후 태어난 것이 유우키 토모미츠라 한다....근데 이걸 믿으면 질 확률이 높다. [본문으로]
  9. 오발의 위험과 화승을 아끼기 위해서 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0. 갑옷과 투구 무게도 무시할 수 없는 터라 행군 시에는 상체 갑옷과 투구를 따로 챙겨서 이동하였다. [본문으로]
  11. 이때까지는 아직 키타노쇼우[北ノ庄]. 후쿠이[福居]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 3대이며 히데야스의 차남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 忠昌] 때. 키타노쇼우[北ノ庄]의 키타[北]가 패배(敗北)와 글자가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에 후쿠이[福井]로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바뀌게 된다. [본문으로]
  12. 위키에 따르면 확실히 마츠다이라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세키가하라 이후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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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2.06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인은 매독이 가장 유력하지요?

    본디 성정이 색을 밝혔는지 혹은 삶에 대한 불만이 그 쪽으로 향했는지 (개인적으로는 후자) 모르겠으나 뛰어난 재능이 센고쿠 시대에 발휘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아, 물론 발휘되면 히데야스의 손에 수많은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질테니 오히려 인류애적 차원에서는 잘된 일인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런데 마쓰다이라 가문은 장남에게 있게 했지만 유키 가문은 4남에게 상속시켰던게 맞는가요? 벌써부터 까먹으면 안되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6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죠....
      히데야스의 얼굴에는 츠키야마의 증오가 서려 있어서 이에야스는 그것을 볼 때마다 꺼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스님(텐카이[天海]라고 하지만 텐카이가 이에야스와 만나는 것은 빨라야 1590년인지라...)에게 그것을 없애는 기도를 부탁하자, 효험이 있었는지 그 증오가 떨어지긴 했지만 대신 얼굴에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정나미가 떨어진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양자(...라 쓰고 '인질'이라 읽는다고 합니다)로 보냈다고 합니다.(1584년)

      상기의 이야기에서는 이에야스가 매독균을 보유하고 있었는 듯 하고 히데야스는 모친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 매독균에 감염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쵸. 난세의 재능이라야 결국 사람 죽이는 것으로 이어지는지라.... 그래도 자질(뭐! 패왕의 자질을 가졌다고!? - by 삼국전투기 4권 장수가 조조를 평하며)과 성망을 갖추었으면서도 결국 반란 일으키지 않은 것만은 평가해야 할 듯.

      다섯째 아들 나오모토[直基]라고 하는데 바로 위에 넷째가 일찍 죽었으니 넷째라 해도 무방할지도...

      전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닌지라 그럴 땐 위키를 자주 이용합죠. ^^

  2. 나라 2009.12.07 1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우키 히데야스가 실제로 기량을 보인 적이 있나요? 기량을 펼친 적이 없다면 있는지 없는지 아는 건 불가능할텐데..
    물론 히데타다에 비한다면야...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8 0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에피소드 3개만 들으면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뭐 머리 짱 좋은 니체니 할 수 있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도 대여섯개 이상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인물의 그릇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3. Asura 2010.01.10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의 씨라고 믿겨지지 않는다'면서 좋아했던 유키 히데야스군요.
    '그' 미츠나리가 좋아했다면.. 분명 재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얼굴이 동자개 닮았든, 고름이 뚝뚝 떨어졌든, 상대가 미츠나리라면 납득이 가네요..(업병(한센병유력)을 앓은 오타니 요시츠구와 친하게지냈던 인물).

    이사람에 대해서는 유곽에 들락날락하다가 스스로 코를 잘랐다는 애기도 있던데.

    저는,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받은 마사무네를 '이시다 마사무네'라 명명하고 평생 아꼈다는 에피소드가 제일 좋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0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쩌면 말씀하신 대로일지도 모릅니다.
      (후세에 전해진 미츠나리에 대한 잘못된 인상이 워낙 많아, 있던 사실도 없애다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코를요? 으~ 끔찍하군요.(전 처음 들어봅니다만... ^^; )

  4. shiroyume 2012.02.13 15: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재밌네요. ^^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는 이름을 후지타카(藤孝)라고 한다. 센고쿠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단정지어도 좋다. 고전(古典)을 산죠우니시 사네에다(三西 枝)와 쿠죠우 타네미치(九 種道)에게 배워 고금전수(古今授), 중세 시학(歌) 등을 집대성하였다.

 태어나 자란 환경이 좋았다. 모친은 역사상 굴지의 석학 키요하라 노부카타(原 宣賢)의 딸로, 표면적인 부친으로는 미츠부치 하루카즈(三淵 晴員)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12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라고 한다. 쇼우군이 코노에 히사미치(近衛 尚通)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기에 이미 요시하루의 애를 배고 있던 모친은 미츠부치 가문에 하사된 것이다.

 후지타카는 미츠부치 가문(三淵家)에서 태어났지만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양자가 된다[각주:1]. 자란 것은 모친의 친정 키요하라 가문으로 거기서 후년의 와카(和歌), 문학적 소양 등을 기초를 길렀을 터인데 달리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후지타카가 시에 눈을 뜬 것은 어느 전투에서 함께 있던 무사가 옛 시(古歌)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적을 쫓다가 도중에 놓쳐서 포기하고 돌아오려고 할 때에 이 무사가,

당신은 아직 멀리 안 갔을 거요 내 옷깃에,
눈물도 아직 식지 않았으니
君はまだ遠くは行かじ我袖の、
も未だ冷かならねば
라는 옛 시를 읊으며 적이 타다 버린 말을 조사한 것이다. 안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 무사는 적이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한 증거라고 후지타카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말을 듣고 더 추격해서 적병의 모습을 발견하여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후지타카는 시에 뜻을 두었고 후에 결국 달인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지타카가 처음으로 섬긴 주군은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후지(足利 義藤[각주:2]=후에 요시테루(義輝)이다. 13살 때였다. 아시카가 바쿠후의 쇠망기로 1554년에는 쇼우군 요시테루 자신이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에게 쫓겨나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로 도망쳤다. 이때 후지타카도 그를 따르며 쓴맛을 맛보았다. 이 쿠츠키 계곡(朽木谷)에서 후지타카는 책을 읽기 위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 가까운 신사(神社)의 등불에서 기름을 훔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68년 이 요시테루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와 미요시 일당에게 살해당했을 때는 영지(領地)인 야마시로(山城) 쇼우류우지 성(勝寺城)에 있었기에 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가 32살이었다. 이때부터 고난의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사(寺) 이치죠우(一)원(院)의 몬제키(門跡)였던 카구케이(慶=후에 요시아키(義昭))를 옹립하여 쇼우군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를 돌아다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만나 요시아키를 15대 쇼우군 자리에 앉히는 것에 성공한다. 이때 후지타카는 노부나가에게 야마시로 나가오카(長岡)를 하사 받아 성(姓)을 '나가오카'로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지타카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불신감을 품기 시작한다. 노부나가의 괴뢰에 지나지 않는 쇼우군 자리가 불만인 요시아키는 은밀히 반오다(反織田) 세력과 손을 잡았고 결국에는 모반까지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후지타카의 날카로운 정치적 감이 빛난다. '요시아키는 망하고 천하는 노부나가의 것이 된다' - 후지타카는 그리 확신하여 요시아키가 모반을 꾀한다는 사실을 예전 함께 요시아키를 섬겼고 지금은 양다리로 노부나가까지 모시고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전하여 노부나가 측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1582년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일어났을 때도 이 정치적 감이 빛을 발한다.
 그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츠히데의 능력으로는 천하를 유지시킬 수 없을 거라 판단하였다. 이 때문에 평생의 친구인 미츠히데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때 미츠히데의 딸 타마(たま=가라샤(ガラシャ))를 부인으로 둔 아들 타다오키(忠興)에게,
 "나는 노부나가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그러나 너는 미츠히데와 사위-장인이라는 사이. 아케치에게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너의 마음대로 하여라"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결국 타다오키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해 미츠히데의 요청을 물리쳤다.

 머리를 민 후지타카는 가독을 타다오키에게 물려주고 자신 본래의 문화인적인 특질을 발휘하게 된다. 유우사이(幽)라는 호는 이 시점에서의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유우사이는 항복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를 위해 따스한 온정을 베풀었다.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쳐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亀寿)를 유우사이가 노력하여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유우사이와 요시히사가 귀여운 딸에 관한 시를 지어 서로 받고 보낸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가 그 모습에 감동하여 카메쥬를 인질인 신분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히데요시의 황금시대. 고전파 지식인으로서 유우사이는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쥬라쿠테이(聚
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행행(行幸)을 기획하였는데 이는 전년도의 키타노 대다회(北野大茶)와 마찬가지로 토요토미 정권의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한 거대 정치 이벤트였다. 유우사이는 이때 와카(和歌)의 자리에서 조정의 예법에 맞추어 예식을 거행하고 대표로서 와카 몇 수를 헌상하는 등 고전의 교양 없이는 불가능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런 행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우사이 자신은 그런 화려함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소 그는 어디까지나 옛 전통에 따라 의상 같은 것도 검은색 일색이었다고 한다.

 유우사이의 고전에 대한 조예는 전쟁에서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
 천하가 둘로 나뉜 세키가하라(
ヶ原) 때의 일이다. 아들인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칸토우(東)로 내려가 있었기에 아들을 대신해서 탄고(丹後) 타나베 성(田城)에서 농성전을 치르게 된다. 후쿠치야마(福知山)성주 오노기 누이노스케(小野木 縫殿助)를 시작으로 한 1만5천여의 서군이 포위한 타나베 성에는 불과 500여의 수비병밖에 없어 낙성은 시간문제라 여겨졌다. 유우사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 유우사이가 죽게 됨으로써 옛 것들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해 유우사이에게 개성을 권한 것이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이를 정중히 거절. 다만 고금전수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기에 이들 전부를 텐노우(天皇)의 동생 하치죠우노미야 토모히토(八宮 智仁)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조정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텐노우의 칙령으로 서군에게 타나베 성의 포위를 풀게 하였고 대신 유우사이는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山城)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말년의 유우사이는 쿄우토 닌나(仁和)사() 주변에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유사이(細川 幽斎)]
1534년생.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가 된다. 효우부다이후(兵部大輔)에 서임받았다. 처음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속해있었지만 1573년 오다 노부나가로 말을 갈아타 1580년 탄고(丹後)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에 가문을 타다오키(忠興)에게 물려주었고 1589년 타다오키의 영지(領地)와는 별도로 미야즈 성(宮津城) 4만석을 받는다. 1610년 8월 20일 77살로 죽었다.

  1. 유우사이의 부친 미츠부치 하루카즈는 호소카와 가문의 서류 이즈미 슈고가문(和泉守護家) 출신으로, 하루카즈의 모친의 친정인 미츠부치 가문에 아들이 끊겼기에 양자로 들어갔으며, 유우사이는 다시 후계자가 없던 큰아버지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본문으로]
  2.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의 '후지'는 이 요시테루의 전 이름의 글자를 하사받은 것(一字拝領)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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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2.04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킨텐슈 그러니 처음 산죠니시 사네에다를 봤을때, 에? 산죠 니시사네에다 아닌가?..로 착각했던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산죠니시라는 성이 따로 있을줄이야(;)

    닌나지는 쿄토에 갔을때 스쳐 지나갔었습니다만.. 하긴, 쿄토의 버스 정류소는 죄다 절이름 투성이니(;)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역사적으로 공부할만한 사적이 많다는 증거이겠죠. (이름 있는 유적만 가더라도 이틀씩이나 걸리는 쿄토니;) 개인적으로는 아쉽습니다만 뭐 나고야가 싸니; 음, 아시가루는 싼맛에 쓰는 것 처럼 역시 싼게 좋은게죠(머엉;)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7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성 읽기 어렵죠... 위키는 그런 면에서 정말 좋습니다.

      일본 개그맨 하나와의 "SAGA"라는 노래를 보면 사가현(佐賀県) 지역은 버스정류장이 "**씨 집 앞"...이라고 하더군요...^^

      천하인을 둘이나 배출한 지역!!!
      어디든 근성만 있으면 됩니다. 멋진 근성 발휘를 기대하겠습니다.

  2. 朴先生 2009.04.13 1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덕후는 아니지만 왠지... 古今傳授어택을 시전하는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모습이
    G건담의 도몬이 샤이닝 핑거를 쓸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군요

    "나의 고전이 빛나며 울부짓는다! 포위를 풀라고 찬란하게 외친다! 必殺!! 고오그으으음저어언수우우우어태에에엑!!!"

    결론은... 아무튼 이래서 인문학이 완전히 쓸모없진 않나보다라는 겁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8 1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건담G무투전을 아시면 훌륭한 건덕후십니다.
      (저는 아무로 팬이라 아무로 나오는 건담만 보고 그 이후는 아예 무시하는 편입죠)

      예전에 소문으론 저 성우가 용산인지에 나타나 저 대사를 외치자 덕후들이 따라 외쳤다는 전설이 있던데...

      유우사이야 잘 하니까 그랬겠죠... 어중간 했으면 그냥 戰死!...였지 않을까요.

.

 

 미야는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되었다.

 유자라는 것은 [또한() 아들()과 같다()]는 말에서 유래하고 있다. 양자(養子)와의 차이는 거의 없으며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구별되기도 한다. 양자인 경우는 그 양갓집에 살며 양갓집의 성()을 쓰는 것이 원칙인 듯싶지만, 유자의 경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양자인 미야[宮]는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修寺家]에서 살며, 텐노우[天皇]의 일족으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그 환경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달이 저물었다. 2월에 들어서자 따스한 날들이 많아져, 그 달의 중순 즈음에는 궁궐(御所)에 심어져 있는 꽃의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 올해는 꽃구경 연회(宴會)가 일찍 열릴 것이다.

 하고 궁정에서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25일이 지나 따스한 비가 내렸고, 다음 날 궁궐의 이누이고몬[乾御門] 부근에 있는 벚꽃이 별안간 60%정도 꽃피었다. 텐노우[天皇]는 놀라 예정되었던 연회를 서둘러 28일로 정하였다.

 

 당일 미야도 이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라고는 하여도 텐노우의 말하자면 사적인 놀이이기에, 출석자도 친왕(親王)과 그 일족이나 미야몬제키[宮門跡][각주:1], 측근인 상급귀족[公卿] , 말하자면 궁궐 내의 사람들로 한해져 있었다.

 자연히 히데요시는 초대받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초대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현재 토우카이[東海]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외교적 절충에 바빴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오오사카[大坂]에 있을 터인 히데요시가 갑자기 가벼운 차림을 한 병사들을 이끌고 쿄우토[京都]궁궐에 입궐한 것이다. 다른 용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쿄우토에 온 김에 텐노우에게 문후(問候)드린다 는 것만이었다.

 어쩌다 이날 궁궐의 정원에서 벚꽃구경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 즐거운 기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고 하여 텐노우에게 알리지 않고, 궁궐 정원의 구석에 몸을 숨기고 선 채로 꽃을 구경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출하였다. 그것을 나중에 텐노우가 알게 되었고, 굉장히 흥겨워하였다. 이런 종류의 정취만큼 궁정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호우 칸파쿠[ 白]에게

 

 하고 직접 쓴 시 한 편을 무가담당(武家)의 귀족에게 맡겼다.

나무 숲에 색향이 남은 활짝 핀 꽃

떨어지면 궁궐의 봄도 지날 지어다.

木立より色香もる花ざかり

散らで雲井の春やいぬらむ

 히데요시는 그것을 받자마자 곧바로 답례의 시를 만들어 받쳤다.
안개 속에 숨어서 바라보건만

있는 것을 들킨 꽃나무 아래

忍びつつ霞みとともに眺めしも

けりなのもと

 라는 것이었다. 이 주종간에 시를 주고받은 아름다운 광경은 순식간에 궁정의 좋은 화제(話題)가 되었고, 미야도 당연히 그것을 들었다. 시를 보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황송한 일이지만 텐노우의 시보다도 히데요시의 즉흥 쪽이 몇 배나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우 칸파쿠[白]는 시에 관한 소질도 있으시군요

 

 하고 미야는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에게 말했다. 하루토요는 이 즈음 곤다이나곤[大納言]으로 승진하여 무가담당(武家)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텐노우의 시를 히데요시에게 전한 것은 그였으며, 답례의 시를 가지고 온 것도 그였다.

 

 그러하옵니다

 

 하고 하루토요는 무탈하게 답했다. 하루토요도 히데요시에게 시의 소질이 있는 듯 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멋진 답례시는 히데요시의 작품이 아니라 아무래도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첨삭(添削)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미야에게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미야는 평생 이 시를 히데요시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믿을 만큼의 근거가 후년의 미야 마음속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해, 1598 3 15일에 다이고[醍醐] 꽃구경이 개최되었을 때, 히데요시는 미야의 앞에서 미야와 노는 재미를 즉흥적으로 시로 만들었다. 시는 극히 자연스러운 가락으로,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미야는 자신의 생애에서 히데요시의 시를 많이 보았고, 그 중 몇 수는 수작(秀作)으로 기억하였다. 미야에게 있어서 히데요시라면, 그가 가진 재능 중에 가장 서툴렀을 터인 시가(詩歌)조차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미야가 히데요시의 유자가 된 1586년에 미야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7 24, 친부 사네히토(誠仁)친왕이 갑자기 와병(臥病)하여, 그 날 중으로 죽은 것이다. 사네히토 친왕은 텐노우인 오오기마치[正親町]의 세자였기에, 이 급사(急死)는 궁정에 있어서도 정말 큰일이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 있어,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쿄우토[京都]에 올라왔지만 임종의 시간에는 맞추지 못했다. 나중에 황위계승이라는 문제가 남았다. 당연 미야의 형인 카네히토 친왕[周仁親王]이 계승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다.

 

 이 해의 9.

 새로운 황태자인 카네히토 친왕이 성인식(元服)을 치렀다. 에보시오야[烏帽子親]의 역할은 궁정에서 가장 높은 신하인 히데요시가 맡았다. 이어서 오오기마치 텐노우가 예전부터 희망하던 대로 상황(上皇)가 되었고, 11 25일 카네히토 친왕이 황위를 물려받아 시신덴[紫宸殿]에서 즉위하였다. 이 새로운 텐노우가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이다.

 

 미야의 친형인 새 텐노우[天皇]는 아직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아직 황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미야가 황족으로서는 필두의 위치에 앉게 되었다. 이 텐노우[天皇]에게 만약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미야가 텐노우[天皇]로 즉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토요토미 가문의 유자였다.

 - 그래서는 곤란하다.

 라는 감정이 상급귀족[公卿]들에게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족보에서 지워둘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한층 더 강하게 가졌다. 자신이 외척으로 있는 그 황자가 토요토미 가문을 이어받는 것보다 텐노우[天皇]가 되어 주는 편이 훨씬 고마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토요도 말을 꺼내기 어려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새로운 텐노우[天皇]의 죽음을 바라는 듯 하여 온당치 않았다.

 

 정작 미야는 그러한 사태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에 살며 일본문학에 정진하고 있었다. 특히 요즈음은 쿠죠우 타네미치[ 稙道]에게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강석(講釋)을 듣기 시작하고 있었다.

 양아비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다음해의 봄,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 정벌을 위해서 오오사카 성을 출발하였을 때, 미야는 수많은 상급귀족[公卿], 상급승려[門跡] 등과 함께 히데요시의 출진을 배웅하기 위하여 오오사카로 내려갔다. 히데요시가 말을 탄 채 성문을 나설 때,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칙사가 도착하였다. 사람이 달려 그것을 말 위의 히데요시에게 알렸다.

 

 그때부터가 상식을 벗어났다. 히데요시는 일순 공황(恐惶)하여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땅에 앉아 서둘러 투구를 벗고 배례(拜禮)하였다.

 도열해 있던 다이묘우[大名], 쇼우묘우[小名]들은 히데요시의 정중함에 놀라 그들도 또한 땅에 굴러 떨어져서는 엎드려 절을 하였다.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도 이 생각지 못했던 광경에 눈을 크게 떴고, 또한 넋을 빼앗겼다. 히데요시야말로 이 지상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지배자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히데요시가 낭패하여 엎드려 절을 할 수 밖에 없는 텐노우[天皇]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란 말인가?

 미야는 그 눈으로 이 광경을 보고, 미야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頼朝]카마쿠라[鎌倉]에 막부(幕府)를 연 이래, 정권(政權)은 무가(武家)로 옮겨졌다. 지금까지 무가의 우두머리(棟梁) 중에 이 히데요시만큼이나 텐노우[天皇]를 존숭(尊崇)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때의 광경을 미야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 해. 히데요시는 여름 중순까지 큐우슈우[九州]에 있었다. 미야는 이해 나카노인 미치카츠[中院 通勝]에게 신고금(新古今)[각주:2]에 대해서 강석을 받았다. 양부인 히데요시는 매우 바빴지만, 미야는 그렇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1. 황족이 불문에 들어간 것 또는 주지로 있는 절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시집 여덟 편의 모음 하치다이슈우[八代集]의 마지막 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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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12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확실히 유우사이가 첨삭해줬다면야..(-_-;) 당대 최고의 강사가 첨삭해준 본고사 문제지 제출하는 느낌이겠군요(-_-;)

    생각해보면 히데요시또한 당대의 관습을 많이 깨어버린 사람이 아닐가 싶습니다. 저렇게 존숭하는 면도 있긴 하지만.. 우다이진까지 오른 노부나가야 그렇다 쳐도 고셋케의 전유물인 칸파쿠에 오른건 참..

    그런데 그런것 치고는 반발이 적군요. (역시 천하인의 포스라는건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16 0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화도 잘봤습니다. (NOA입니다^^;)
    히데요시가 데리고 가지는 않았군요. 어쨌든 가족이 되긴했지만 뭐랄까...
    시기가 시기인만큼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지금의 입양은 가슴으로 낳는다라는 말로 당시를 생각해보면 왠지 오묘한 느낌이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늦어져 죄송합니다.

    다메엣찌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칸파쿠에 오른 것은 당시로써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었을지...

    그쵸~ 천하인의 포스!!
    (뭐 자기만 칸파쿠 되었다가 다시 되돌려 준다고 해 놓고서는 토요토미 가문을 창설하여 자기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행동을 하였기에, 코노에 가문은 다른 가문들에게 속아서 빼앗겼다고 욕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말이죠)

    zardizm님//아이디가 티스토리의 주소와 같군요. ^^
    일본사에도 유사한 예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유자의 경우.... 관위승진을 빨리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들 하더군요.
    (사족으로... 저는 입양이라고 하면, 과거 여배우 최진실씨의 초창기 작품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작품이 먼저 생각이나서 왠지 슬픈 느낌이 듭니다)

  4.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9 09: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가 천황께 답장한 저 시 참 좋네요 언젠가 써먹고자 메모해둡니다

三.

 히데요시[秀吉]가 이 마고시치로우[孫七郎]를 위해서 붙여 준 숙노(宿老)라는 것은 -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히토츠야나기 나오스에[一柳 直末],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로 모두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의 장교일 때부터 직접 키워 온 다이묘우[大名]들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히데요시의 의도인지.
  그들은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온화하며 상식적이고 세상일에 익숙하여 [얼굴에 주름 많고,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건 조용히, 어떤 일이건 모나지 않게, 무슨 일이건, 참으세요, 참으세요 - 하고 그들은 입을 열면 입버릇처럼 말했다. 계속 그렇게 말하며 마고시치로우를 인형처럼 다루며 마고시치로우의 자유를 능수능란하게 봉하였고 더구나 히데요시에게는,

 "굉장히 뛰어난 기획력이 가지고 계시옵니다.”

 라고 하며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마고시치로우가 생각한 것처럼 말하여 히데요시의 기분을 좋게 하는데 전념했다.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그 후에도 마고시치로우가 큰 잘못이 없자,
 '과연……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변하는 법인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타사(又左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도 그랬지”

 하고 측근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마에다 토시이에도 10대일 때는 손을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양아치였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토시이에가 옛날의 그 마타사인가하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중후한 인물로 변해있다.

“송충이가 나비가 나비가 되듯이 마고녀석도 언제까지나 송충이일 턱이 없지”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도 없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이 혈연자 중 우두머리인 젊은이를 다음 해인 1585년 아직 18살짜리를 키슈우[紀州] 정벌군의 부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운이 좋았는지 큰 실수는 없었다. 이어서 그 해에 시코쿠[四国]정벌에 참가시켰고 이때도 큰 실수 없이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드디어 마음을 굳혀 같은 해의 윤8월 마고시치로우에게 하시바 성[羽柴姓]을 허용함과 동시에 오우미[近江]를 하사했다. 또한 히데요시가 칸파쿠[関白]가 되자 마고시치로우는 아직 18살이지만 – 조정에 요청하여 종사위하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로 만들었다.
 성(姓)도 없이 백성으로 자란 젊은이가 갑자기 조정의 대신이 된 적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다음해인 19살에 산기[参議]가 되었다. 이미 산기 이상은 공경(公卿)이다.

 이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행운에 공포를 느낀 사람이 있었다.
 실부(實父)인 야스케[弥助] – 지금은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였다. 쿄우[京]에서 자신의 아들인 마고시치로우를 만나,

 “천도(天道)를 두려워혀라”

 하고 오와리 백성들이 사용하는 말로 지겹도록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했다. 야스케는 어디서 들었는지,

 “감투가 크면 어깨를 누른다는 말이 있고, 높은 가지가 부러지기 쉽다는 말이 있다. 옛날부터 그 실력 없이 영달을 얻은 사람치고 제대로 된 말로를 보낸 사람이 읍어.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딘다. 두려워혀라”

 고 야스케는 말했다.

 “필시 너는 너무 빠른 승진 때문에 니 마음이 그것에 따라가지 못하여 결국 마음이건 뭐건 산산조각 나 버릴 것이여. 그것을 두려워혀라”

 하고 계속 말했다.

 “어떻게 두려워하라는 건데요?”

 마고시치로우는 무능한 그리고 언제나 무언가에 떨고 있는 듯한 이 친아비의 안스러운 농사꾼 얼굴이, 자신의 미천한 출신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기분 좋지 않았다. 마고시치로우는 말했다.

 “나는 무예가 뛰어나요. 지위는 그것에 걸맞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녀 아녀, 너는 잘못 생각혀고 있다”

 고 야스케는 말했지만, 산기[參議] 히데츠구 공[秀次公]이 된 마고시치로우의 날카로운 시선을 되받아 칠 기력도 없어 고개를 숙였다. 침묵은 했지만 야스케는 마고시치로우가 장식 인형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일 턱이 없다.
 단순히 토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 증거가 자신이었다. 오와리 오오타카 마을에서 끌려와 세 명의 아들을 전부 빼앗겼고, 더구나 자신은 토요토미 가문의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서 자기 성과 이름도 아닌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고향 사람들은 이런 나를 뒤에서 뭐라고들 지껄이고 있을까?

 “아버지. 이젠 오지 마세요”

 마고시치로우는 참다 못하여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였다. 이미 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받았으며, 후지와라 성[藤原姓]을 가진 입만 산 공경(公卿)들과 사귀지 않으면 안 되는 이때에, 궁상맞은 얼굴을 하고 이곳에 와서는 오와리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듯한 것을 하나하나 말하는 부친이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날 괴롭히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양부(養父)인 히데요시는 달랐다.
 마고시치로우에게 부귀영화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 천하의 모두가 납득할 만한 화려한 이력을 계속해서 만들어 주었다.

 20살 때에는 히데요시를 따라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종군하였다. 이때도 숙노(宿老)들의 보좌로 큰 잘못 없이 맡았고, 다음 해인 1588년에는 정삼위(正三位) 곤쥬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했다. 거기에 그 다음 달에는 종이위(從二位)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이례였다.

 “이 상태라면 필시 내년에는 다이나곤[大納言]이 되실 것입니다”

 하고, 이 즈음 토요토미 가문에서 조정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던 승려 출신의 쿄우토 봉행[京都奉行]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는 맛깔머리 없는 아부를 하여, 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가 될 것 같은 젊은이를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고시치로우는 너무도 빠른 승진에 이미 감동이 둔해져 있었다.

 “그런가……내년에는 다이나곤인가”

 하고 멍해서는 기뻐하지도 않았기에 겡이는 마음속으로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바보녀석’

 겡이는 안색 하나 바꾸진 않았지만 마고시치로우의 예법지도를 담당하고 있었던 겡이였던 만큼, 이 마고시치로우를 경멸하는데 겡이만한  인간도 없었다.
 ‘이건 암만 가르쳐도 안 되겠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시 다이나곤이 얼마나 높은 지위인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이나곤이라는 함은 후지와라 가문[藤原家]의 공경(公卿)중에서도 아네코우지[姉小路], 아스카이[飛鳥井] 가문이라는 우린[羽林[각주:1]]의 가격을 지닌 가문조차 노년(老年)이 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관위(官位)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이진[大臣[각주:2]] 다음 가는 관위이옵지요.”

 라고 말을 하자, 과연 마고시치로우도 안색을 바꾸며,

“그런가? 그런 다이나곤에 내년에는 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기뻐 되물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사건이라고 해선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에게 있어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사였다. 히데요시의 측실 아자이씨[浅井氏[각주:3]]
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내 몸에는 아기씨가 없는 것인가 하고 거의 포기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름은 장수(長壽)를 약속한다는 미신에 따라, 스테[捨[각주:4]]라고 이름 지어졌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뻤했다.
 천하는 거기에 맞추어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각각 영지(領地)가 휘청댈 정도로 수 많은 양의 축하 선물을 보냈었으며, 텐노우[天皇]조차 이 새롭게 등장한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를 위해 호화로운 애기 옷을 보냈다. 이 덴노우의 하사품(下賜品) 행사를 빈틈없이 처리한 것이 마에다 겡이였다.

 마고시치로우의 존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다이나곤은?’
 하고, 이 해에 마고시치로우는 기대했지만 결국 히데요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당연했다. 마고시치로우의 관작(官爵)을 너무 높여버리면 이 아기의 장래를 위해선 좋지 않다는 명쾌한 그리고 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히데요시와 토요토미 가문의 관료들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마고시치로우의 막중한 임무는 예전과 같았다. 스테가 탄생한 다음 해에 행해진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5]에서도 이 인물은 여전히 부사령관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그 정벌이 끝나자 히데요시는 후계자의 위치를 잃은 마고시치로우를 위해서 공경(公卿)으로서의 관작은 올려주지 않았지만 다이묘우[大名]로는 가장 내실있는 위로를 해 주었다. 석고가 일약 100만석이 되었다. 주어진 것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와 그 옆의 이세[伊勢]였다.

 “기쁘지?”

 라는 말을 히데요시에게 들었지만, 마고시치로우는 어떻게 기뻐하면 좋을지 몰랐다.

 “열심히 해라”

 라고 히데요시는 또 말했다. 더 이상 열심히 하면 후계자로 한다는, 오랫동안 계속했던 그 말은 없었지만 대신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너는 내 대리인이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가 생각하기에 대리인은 직무이지 관작이 아니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오다와라 정벌이 끝나자 마자 계속해서 마고시치로우는 오우슈우[奥州] 정벌에 종군하였고, 개선하자 마자 쿄우[京]에서 쉴 틈도 없이 다시 쿠노헤의 반란 진압을 위해서 오우슈우로 출정했다.
 이때는 히데요시가 직접 가지 않고 마고시치로우가 처음으로 히데요시를 대리하여 참전하였다. 단지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의 실력이 불안하였기에 사실상의 총사령관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동행시켰다. 이때 어쩌다 보니 이에야스의 관직이 다이나곤이었기 때문에 격을 맞추기 위해서, 단지 그런 이유 하나 만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 젊은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곤다이나곤[権大納言[각주:6]]에 임명받았다. 그러나 기뻐할 틈도 없이 출정하였고 오우슈우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후 반란은 진압된 이 해 10월 오오사카로 개선했다.

 오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형식적인 치하를 받았지만, 놀랍게도 이 외숙부의 자랑이며 육체적 특징 중에 하나인 북을 치는 듯한 목소리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말에 힘이 없었기에 떨어져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예전엔 시끄러울 정도로 활기찼던 쥬라쿠테이[聚楽第]도 마치 절간과 같이 조용했다.
 마고시치로우는 그 이유를 개선하는 도중 들었다. 2개월 정도 전에 츠루마츠[鶴松 – 스테를 말 함]가 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1. 고급 귀족인 공경(公卿)의 가문의 격(格) 중 4번째에 해당하는 문벌. 코노에쇼우쇼우[近衛少将], 코노에츄우죠우[近衛中将] 등 무관을 거쳐 다이나곤까지 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2. 조선시대 식으로 말하면 좌의정이나 영의정 급을 말한다. [본문으로]
  3. 후에 요도도노[淀殿]를 말함. [본문으로]
  4. 버린 애라는 뜻. 즉 내 놓은 자식은 오래 산다는 미신. [본문으로]
  5.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를 멸망시킨 전쟁. [본문으로]
  6. 곤[権]은 정규인수 외에 임명받은 사람에게 붙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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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1 05: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되고 말았군요.
    더군다나 양자인 그는 히데요시에게 적자가 생기면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구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2 2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로는 나름 능력있었기에, 그것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고도 합니다.
    역사의 패자(敗者)란 없던 사실도 뒤집어 쓰는 것이다 보니, 정말 실제로는 어땠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3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긴 그런 경우도 많죠. 역사는 승자가 써내려간 것이라고들 하니까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5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 ㅎㄷㄷ군요.. 이녀석을 보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떠오르는군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도 무능의 극치로만 그려진다지만 실체는 어땠을련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5 17: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갸는 무능했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좋게 생각할려고 해도 그렇게 삽질만 하는지... 뚜렷하게 뭔가를 정해놓은 것도 없이, 그 때 그 때 땜빵메우기 식이다 보니 줏대도 없어보이고...결국엔 배신자라는 낙인밖에 남은 것이 없으니까요.

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1587 4 17일 병사(病死) 55


스미타다의 사인[花押]

1533 ~ 1587.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城主) 아리마 하루즈미[有馬 晴純]의 아들.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서로 싸우던 양 가문의 화해(和解)를 위해서 오오무라 스미사키[大村 純前]의 양자가 된다. 또한 영내(領內)를 방문한 선교사(宣敎師)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가문[大村家] 18대 당주인 스미타다는 1563년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중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사실 스미타다는 히노에 성주인 아리마 하루즈미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伊][각주:1]의 딸이었다.

  17대 당주 스미사키에게는 타카아키[貴明]라는 서자(庶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타케오 성[武雄城]의 고토우 씨[後藤氏]를 잇게 하고,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일부러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하였다. 이 때문에 오오무라 가의 가신들은 분열되어 오오무라 가문 아래에 있던 열 여덟 가문이 타카아키를 따랐다.

 

 이 타카아키를 시작으로 스미타다의 정실(正室) 부인 오엔[おえん]의 친정이며 이사하야[諫早]에 본거지를 둔 사이고우 씨[西氏], 히라도[戸]의 마츠라 씨[松浦氏] 등 주변 영주(領主)에게 공격 받는 등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위협에서 영지(領地)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들을 인질로 받치는 등 말년에 이르러도 스미타다의 기반은 굉장히 약했다.

 

 이 약소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스미타다는 외국과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였고, 1569년 포르투갈의 배를 요코세[横瀬] 포구에 입항시켰다. 또한 다음 해 31살이 된 스미타다는 이 곳에서 선교사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세례를 받고 돈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주변 호족 연합은 이런 오오무라 씨의 이권을 뺏고자 요코세 포구를 공격하고 불을 질러 없애고, 스미타다도 일시적으로 거성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미타다는 예수회 선교사, 포르투갈 상인과 끊임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것이 영토 안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미타다가 세례를 결의한 배경에는 포르투갈에게 기대어 부와 무기를 얻고자 하는 흑심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차츰 기독교에 대해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다.

 

적은 인원으로 성을 지키다

 

 그러한 스미타다의 후반생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미타다에게는 4명의 측실(側室)이 있어 세자인 요시아키(善前)도 측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로 측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타다는 이를 무시하고 측실을 계속 두었다.

 한 편 정실 오엔은 남편이 측실을 두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처음엔 기독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은 지 7년 후에 기독교의 교리에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

 이 때 38살이 되어있던 스미타다는 오엔과 기독교의 서약에 따른 결혼식을 하였다. 이는 오엔의 희망에 따라, 처는 오엔 한 사람이며 측실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스미타다가 완전히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1573.

 스미타다는 주변 호족 연합에게 거성인 산죠우 성[三城城]까지 공격당하는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빠진다. 이때 선교사는 어떠한 때라도 자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미타다는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신의 목에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를 선교사와 교환하였다. 여기서도 신앙을 선택한 스미타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미타다는 과감히 성을 나와 돌격하는 등 적은 인원으로 성을 사수하여, '산죠우 칠기 농성[三城七騎籠もり]'[각주:2]이라 일컬어지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해, 스미타다는 6만의 오오무라 영민(領民)봉헌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1580년 오오무라를 방문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게 나가사키[長崎]와 모기[茂木]의 땅을 예수회에 기증했다. 나가사키는 이후 세계로 열린 항구로써 각광을 받게 된다.

 

하늘로 날려진 작은 새

 

 말년.

 스미타다는 사가[佐賀]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압박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세자인 요시아키를 사가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 요시아키가 인질이 된 2년 후, 동생 두 명도 인질로 보낼 수 밖에 없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강압적인 타카노부가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함으로 인해 스미타다가 겨우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이 51살 때이다.

 

 히데요[秀吉]가 시마즈 토벌의 군을 큐우슈우[九州]로 보낸 것은 15873월이었다. 오오무라 씨는 이 때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는데 스미타다는 종군(從軍)하지 않고 아들인 요시아키가 대신해서 출진했다. 왜냐면 이때 스미타다는 후두암폐결핵을 앓고 있어, 몸이 말라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신력은 신을 받아 들여 아름답게 빛났다고 기독교 사료는 말한다.

 

 스미타다는 의사가 하는 미신(迷信)에 바탕을 둔 치료를 원치 않았고, 신부에게 천당에 대해서 계속해서 들려주길 원했으며 그것을 들으면서 대단히 만족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카구치[坂口]의 은거 저택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스미타다는 영내(領內)구류(拘留)되어 있던 포로 200명을 석방했다. 마지막으로 새장에 있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4 17일. 반년에 걸친 투병 생활 끝에 5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1. 나중에 양아비가 되는 스미사키의 부친. [본문으로]
  2. 1500명을 상대로 7명의 무장과 70명의 여자들로 성을 지켰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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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07 1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우린과는 다른 말년이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07 14: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우린은 죽을 때 대부분을 잃은 상태이긴 했지만, 스미타다는 그렇진 않았을 테니... 적어도 죽을 땐 정말 행복하게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한 달뒤에 있을 격변을 모른 채 죽을 수 있었을테니까요..

    (여담이지만, 히데요시가 선교사들을 쫓아보낸 계기가 되는 것도 저 나가사키와 모기가 일본인의 땅이 아닌 남만인들의 땅이라는 것과 그 지역 주민들이 신사를 깨부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니까요. 일본은 다 자기 것이며, 죽어서 신으로 떠받들여지길 원했던 히데요시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니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1 0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텐노 다음가는 위치에 있던 히데요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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