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는 이름을 후지타카(藤孝)라고 한다. 센고쿠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단정지어도 좋다. 고전(古典)을 산죠우니시 사네에다(三西 枝)와 쿠죠우 타네미치(九 種道)에게 배워 고금전수(古今授), 중세 시학(歌) 등을 집대성하였다.

 태어나 자란 환경이 좋았다. 모친은 역사상 굴지의 석학 키요하라 노부카타(原 宣賢)의 딸로, 표면적인 부친으로는 미츠부치 하루카즈(三淵 晴員)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12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라고 한다. 쇼우군이 코노에 히사미치(近衛 尚通)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기에 이미 요시하루의 애를 배고 있던 모친은 미츠부치 가문에 하사된 것이다.

 후지타카는 미츠부치 가문(三淵家)에서 태어났지만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양자가 된다[각주:1]. 자란 것은 모친의 친정 키요하라 가문으로 거기서 후년의 와카(和歌), 문학적 소양 등을 기초를 길렀을 터인데 달리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후지타카가 시에 눈을 뜬 것은 어느 전투에서 함께 있던 무사가 옛 시(古歌)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적을 쫓다가 도중에 놓쳐서 포기하고 돌아오려고 할 때에 이 무사가,

당신은 아직 멀리 안 갔을 거요 내 옷깃에,
눈물도 아직 식지 않았으니
君はまだ遠くは行かじ我袖の、
も未だ冷かならねば
라는 옛 시를 읊으며 적이 타다 버린 말을 조사한 것이다. 안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 무사는 적이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한 증거라고 후지타카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말을 듣고 더 추격해서 적병의 모습을 발견하여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후지타카는 시에 뜻을 두었고 후에 결국 달인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지타카가 처음으로 섬긴 주군은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후지(足利 義藤[각주:2]=후에 요시테루(義輝)이다. 13살 때였다. 아시카가 바쿠후의 쇠망기로 1554년에는 쇼우군 요시테루 자신이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에게 쫓겨나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로 도망쳤다. 이때 후지타카도 그를 따르며 쓴맛을 맛보았다. 이 쿠츠키 계곡(朽木谷)에서 후지타카는 책을 읽기 위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 가까운 신사(神社)의 등불에서 기름을 훔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68년 이 요시테루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와 미요시 일당에게 살해당했을 때는 영지(領地)인 야마시로(山城) 쇼우류우지 성(勝寺城)에 있었기에 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가 32살이었다. 이때부터 고난의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사(寺) 이치죠우(一)원(院)의 몬제키(門跡)였던 카구케이(慶=후에 요시아키(義昭))를 옹립하여 쇼우군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를 돌아다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만나 요시아키를 15대 쇼우군 자리에 앉히는 것에 성공한다. 이때 후지타카는 노부나가에게 야마시로 나가오카(長岡)를 하사 받아 성(姓)을 '나가오카'로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지타카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불신감을 품기 시작한다. 노부나가의 괴뢰에 지나지 않는 쇼우군 자리가 불만인 요시아키는 은밀히 반오다(反織田) 세력과 손을 잡았고 결국에는 모반까지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후지타카의 날카로운 정치적 감이 빛난다. '요시아키는 망하고 천하는 노부나가의 것이 된다' - 후지타카는 그리 확신하여 요시아키가 모반을 꾀한다는 사실을 예전 함께 요시아키를 섬겼고 지금은 양다리로 노부나가까지 모시고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전하여 노부나가 측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1582년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일어났을 때도 이 정치적 감이 빛을 발한다.
 그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츠히데의 능력으로는 천하를 유지시킬 수 없을 거라 판단하였다. 이 때문에 평생의 친구인 미츠히데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때 미츠히데의 딸 타마(たま=가라샤(ガラシャ))를 부인으로 둔 아들 타다오키(忠興)에게,
 "나는 노부나가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그러나 너는 미츠히데와 사위-장인이라는 사이. 아케치에게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너의 마음대로 하여라"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결국 타다오키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해 미츠히데의 요청을 물리쳤다.

 머리를 민 후지타카는 가독을 타다오키에게 물려주고 자신 본래의 문화인적인 특질을 발휘하게 된다. 유우사이(幽)라는 호는 이 시점에서의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유우사이는 항복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를 위해 따스한 온정을 베풀었다.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쳐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亀寿)를 유우사이가 노력하여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유우사이와 요시히사가 귀여운 딸에 관한 시를 지어 서로 받고 보낸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가 그 모습에 감동하여 카메쥬를 인질인 신분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히데요시의 황금시대. 고전파 지식인으로서 유우사이는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쥬라쿠테이(聚
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행행(行幸)을 기획하였는데 이는 전년도의 키타노 대다회(北野大茶)와 마찬가지로 토요토미 정권의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한 거대 정치 이벤트였다. 유우사이는 이때 와카(和歌)의 자리에서 조정의 예법에 맞추어 예식을 거행하고 대표로서 와카 몇 수를 헌상하는 등 고전의 교양 없이는 불가능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런 행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우사이 자신은 그런 화려함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소 그는 어디까지나 옛 전통에 따라 의상 같은 것도 검은색 일색이었다고 한다.

 유우사이의 고전에 대한 조예는 전쟁에서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
 천하가 둘로 나뉜 세키가하라(
ヶ原) 때의 일이다. 아들인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칸토우(東)로 내려가 있었기에 아들을 대신해서 탄고(丹後) 타나베 성(田城)에서 농성전을 치르게 된다. 후쿠치야마(福知山)성주 오노기 누이노스케(小野木 縫殿助)를 시작으로 한 1만5천여의 서군이 포위한 타나베 성에는 불과 500여의 수비병밖에 없어 낙성은 시간문제라 여겨졌다. 유우사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 유우사이가 죽게 됨으로써 옛 것들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해 유우사이에게 개성을 권한 것이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이를 정중히 거절. 다만 고금전수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기에 이들 전부를 텐노우(天皇)의 동생 하치죠우노미야 토모히토(八宮 智仁)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조정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텐노우의 칙령으로 서군에게 타나베 성의 포위를 풀게 하였고 대신 유우사이는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山城)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말년의 유우사이는 쿄우토 닌나(仁和)사() 주변에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유사이(細川 幽斎)]
1534년생.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가 된다. 효우부다이후(兵部大輔)에 서임받았다. 처음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속해있었지만 1573년 오다 노부나가로 말을 갈아타 1580년 탄고(丹後)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에 가문을 타다오키(忠興)에게 물려주었고 1589년 타다오키의 영지(領地)와는 별도로 미야즈 성(宮津城) 4만석을 받는다. 1610년 8월 20일 77살로 죽었다.

  1. 유우사이의 부친 미츠부치 하루카즈는 호소카와 가문의 서류 이즈미 슈고가문(和泉守護家) 출신으로, 하루카즈의 모친의 친정인 미츠부치 가문에 아들이 끊겼기에 양자로 들어갔으며, 유우사이는 다시 후계자가 없던 큰아버지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본문으로]
  2.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의 '후지'는 이 요시테루의 전 이름의 글자를 하사받은 것(一字拝領)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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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2.04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킨텐슈 그러니 처음 산죠니시 사네에다를 봤을때, 에? 산죠 니시사네에다 아닌가?..로 착각했던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산죠니시라는 성이 따로 있을줄이야(;)

    닌나지는 쿄토에 갔을때 스쳐 지나갔었습니다만.. 하긴, 쿄토의 버스 정류소는 죄다 절이름 투성이니(;)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역사적으로 공부할만한 사적이 많다는 증거이겠죠. (이름 있는 유적만 가더라도 이틀씩이나 걸리는 쿄토니;) 개인적으로는 아쉽습니다만 뭐 나고야가 싸니; 음, 아시가루는 싼맛에 쓰는 것 처럼 역시 싼게 좋은게죠(머엉;)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7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성 읽기 어렵죠... 위키는 그런 면에서 정말 좋습니다.

      일본 개그맨 하나와의 "SAGA"라는 노래를 보면 사가현(佐賀県) 지역은 버스정류장이 "**씨 집 앞"...이라고 하더군요...^^

      천하인을 둘이나 배출한 지역!!!
      어디든 근성만 있으면 됩니다. 멋진 근성 발휘를 기대하겠습니다.

  2. 朴先生 2009.04.13 1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덕후는 아니지만 왠지... 古今傳授어택을 시전하는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모습이
    G건담의 도몬이 샤이닝 핑거를 쓸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군요

    "나의 고전이 빛나며 울부짓는다! 포위를 풀라고 찬란하게 외친다! 必殺!! 고오그으으음저어언수우우우어태에에엑!!!"

    결론은... 아무튼 이래서 인문학이 완전히 쓸모없진 않나보다라는 겁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8 1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건담G무투전을 아시면 훌륭한 건덕후십니다.
      (저는 아무로 팬이라 아무로 나오는 건담만 보고 그 이후는 아예 무시하는 편입죠)

      예전에 소문으론 저 성우가 용산인지에 나타나 저 대사를 외치자 덕후들이 따라 외쳤다는 전설이 있던데...

      유우사이야 잘 하니까 그랬겠죠... 어중간 했으면 그냥 戰死!...였지 않을까요.

.

 

 미야는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되었다.

 유자라는 것은 [또한() 아들()과 같다()]는 말에서 유래하고 있다. 양자(養子)와의 차이는 거의 없으며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구별되기도 한다. 양자인 경우는 그 양갓집에 살며 양갓집의 성()을 쓰는 것이 원칙인 듯싶지만, 유자의 경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양자인 미야[宮]는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修寺家]에서 살며, 텐노우[天皇]의 일족으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그 환경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달이 저물었다. 2월에 들어서자 따스한 날들이 많아져, 그 달의 중순 즈음에는 궁궐(御所)에 심어져 있는 꽃의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 올해는 꽃구경 연회(宴會)가 일찍 열릴 것이다.

 하고 궁정에서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25일이 지나 따스한 비가 내렸고, 다음 날 궁궐의 이누이고몬[乾御門] 부근에 있는 벚꽃이 별안간 60%정도 꽃피었다. 텐노우[天皇]는 놀라 예정되었던 연회를 서둘러 28일로 정하였다.

 

 당일 미야도 이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라고는 하여도 텐노우의 말하자면 사적인 놀이이기에, 출석자도 친왕(親王)과 그 일족이나 미야몬제키[宮門跡][각주:1], 측근인 상급귀족[公卿] , 말하자면 궁궐 내의 사람들로 한해져 있었다.

 자연히 히데요시는 초대받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초대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현재 토우카이[東海]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외교적 절충에 바빴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오오사카[大坂]에 있을 터인 히데요시가 갑자기 가벼운 차림을 한 병사들을 이끌고 쿄우토[京都]궁궐에 입궐한 것이다. 다른 용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쿄우토에 온 김에 텐노우에게 문후(問候)드린다 는 것만이었다.

 어쩌다 이날 궁궐의 정원에서 벚꽃구경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 즐거운 기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고 하여 텐노우에게 알리지 않고, 궁궐 정원의 구석에 몸을 숨기고 선 채로 꽃을 구경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출하였다. 그것을 나중에 텐노우가 알게 되었고, 굉장히 흥겨워하였다. 이런 종류의 정취만큼 궁정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호우 칸파쿠[ 白]에게

 

 하고 직접 쓴 시 한 편을 무가담당(武家)의 귀족에게 맡겼다.

나무 숲에 색향이 남은 활짝 핀 꽃

떨어지면 궁궐의 봄도 지날 지어다.

木立より色香もる花ざかり

散らで雲井の春やいぬらむ

 히데요시는 그것을 받자마자 곧바로 답례의 시를 만들어 받쳤다.
안개 속에 숨어서 바라보건만

있는 것을 들킨 꽃나무 아래

忍びつつ霞みとともに眺めしも

けりなのもと

 라는 것이었다. 이 주종간에 시를 주고받은 아름다운 광경은 순식간에 궁정의 좋은 화제(話題)가 되었고, 미야도 당연히 그것을 들었다. 시를 보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황송한 일이지만 텐노우의 시보다도 히데요시의 즉흥 쪽이 몇 배나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우 칸파쿠[白]는 시에 관한 소질도 있으시군요

 

 하고 미야는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에게 말했다. 하루토요는 이 즈음 곤다이나곤[大納言]으로 승진하여 무가담당(武家)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텐노우의 시를 히데요시에게 전한 것은 그였으며, 답례의 시를 가지고 온 것도 그였다.

 

 그러하옵니다

 

 하고 하루토요는 무탈하게 답했다. 하루토요도 히데요시에게 시의 소질이 있는 듯 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멋진 답례시는 히데요시의 작품이 아니라 아무래도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첨삭(添削)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미야에게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미야는 평생 이 시를 히데요시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믿을 만큼의 근거가 후년의 미야 마음속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해, 1598 3 15일에 다이고[醍醐] 꽃구경이 개최되었을 때, 히데요시는 미야의 앞에서 미야와 노는 재미를 즉흥적으로 시로 만들었다. 시는 극히 자연스러운 가락으로,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미야는 자신의 생애에서 히데요시의 시를 많이 보았고, 그 중 몇 수는 수작(秀作)으로 기억하였다. 미야에게 있어서 히데요시라면, 그가 가진 재능 중에 가장 서툴렀을 터인 시가(詩歌)조차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미야가 히데요시의 유자가 된 1586년에 미야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7 24, 친부 사네히토(誠仁)친왕이 갑자기 와병(臥病)하여, 그 날 중으로 죽은 것이다. 사네히토 친왕은 텐노우인 오오기마치[正親町]의 세자였기에, 이 급사(急死)는 궁정에 있어서도 정말 큰일이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 있어,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쿄우토[京都]에 올라왔지만 임종의 시간에는 맞추지 못했다. 나중에 황위계승이라는 문제가 남았다. 당연 미야의 형인 카네히토 친왕[周仁親王]이 계승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다.

 

 이 해의 9.

 새로운 황태자인 카네히토 친왕이 성인식(元服)을 치렀다. 에보시오야[烏帽子親]의 역할은 궁정에서 가장 높은 신하인 히데요시가 맡았다. 이어서 오오기마치 텐노우가 예전부터 희망하던 대로 상황(上皇)가 되었고, 11 25일 카네히토 친왕이 황위를 물려받아 시신덴[紫宸殿]에서 즉위하였다. 이 새로운 텐노우가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이다.

 

 미야의 친형인 새 텐노우[天皇]는 아직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아직 황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미야가 황족으로서는 필두의 위치에 앉게 되었다. 이 텐노우[天皇]에게 만약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미야가 텐노우[天皇]로 즉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토요토미 가문의 유자였다.

 - 그래서는 곤란하다.

 라는 감정이 상급귀족[公卿]들에게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족보에서 지워둘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한층 더 강하게 가졌다. 자신이 외척으로 있는 그 황자가 토요토미 가문을 이어받는 것보다 텐노우[天皇]가 되어 주는 편이 훨씬 고마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토요도 말을 꺼내기 어려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새로운 텐노우[天皇]의 죽음을 바라는 듯 하여 온당치 않았다.

 

 정작 미야는 그러한 사태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에 살며 일본문학에 정진하고 있었다. 특히 요즈음은 쿠죠우 타네미치[ 稙道]에게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강석(講釋)을 듣기 시작하고 있었다.

 양아비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다음해의 봄,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 정벌을 위해서 오오사카 성을 출발하였을 때, 미야는 수많은 상급귀족[公卿], 상급승려[門跡] 등과 함께 히데요시의 출진을 배웅하기 위하여 오오사카로 내려갔다. 히데요시가 말을 탄 채 성문을 나설 때,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칙사가 도착하였다. 사람이 달려 그것을 말 위의 히데요시에게 알렸다.

 

 그때부터가 상식을 벗어났다. 히데요시는 일순 공황(恐惶)하여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땅에 앉아 서둘러 투구를 벗고 배례(拜禮)하였다.

 도열해 있던 다이묘우[大名], 쇼우묘우[小名]들은 히데요시의 정중함에 놀라 그들도 또한 땅에 굴러 떨어져서는 엎드려 절을 하였다.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도 이 생각지 못했던 광경에 눈을 크게 떴고, 또한 넋을 빼앗겼다. 히데요시야말로 이 지상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지배자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히데요시가 낭패하여 엎드려 절을 할 수 밖에 없는 텐노우[天皇]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란 말인가?

 미야는 그 눈으로 이 광경을 보고, 미야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頼朝]카마쿠라[鎌倉]에 막부(幕府)를 연 이래, 정권(政權)은 무가(武家)로 옮겨졌다. 지금까지 무가의 우두머리(棟梁) 중에 이 히데요시만큼이나 텐노우[天皇]를 존숭(尊崇)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때의 광경을 미야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 해. 히데요시는 여름 중순까지 큐우슈우[九州]에 있었다. 미야는 이해 나카노인 미치카츠[中院 通勝]에게 신고금(新古今)[각주:2]에 대해서 강석을 받았다. 양부인 히데요시는 매우 바빴지만, 미야는 그렇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1. 황족이 불문에 들어간 것 또는 주지로 있는 절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시집 여덟 편의 모음 하치다이슈우[八代集]의 마지막 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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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12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확실히 유우사이가 첨삭해줬다면야..(-_-;) 당대 최고의 강사가 첨삭해준 본고사 문제지 제출하는 느낌이겠군요(-_-;)

    생각해보면 히데요시또한 당대의 관습을 많이 깨어버린 사람이 아닐가 싶습니다. 저렇게 존숭하는 면도 있긴 하지만.. 우다이진까지 오른 노부나가야 그렇다 쳐도 고셋케의 전유물인 칸파쿠에 오른건 참..

    그런데 그런것 치고는 반발이 적군요. (역시 천하인의 포스라는건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16 0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화도 잘봤습니다. (NOA입니다^^;)
    히데요시가 데리고 가지는 않았군요. 어쨌든 가족이 되긴했지만 뭐랄까...
    시기가 시기인만큼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지금의 입양은 가슴으로 낳는다라는 말로 당시를 생각해보면 왠지 오묘한 느낌이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늦어져 죄송합니다.

    다메엣찌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칸파쿠에 오른 것은 당시로써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었을지...

    그쵸~ 천하인의 포스!!
    (뭐 자기만 칸파쿠 되었다가 다시 되돌려 준다고 해 놓고서는 토요토미 가문을 창설하여 자기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행동을 하였기에, 코노에 가문은 다른 가문들에게 속아서 빼앗겼다고 욕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말이죠)

    zardizm님//아이디가 티스토리의 주소와 같군요. ^^
    일본사에도 유사한 예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유자의 경우.... 관위승진을 빨리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들 하더군요.
    (사족으로... 저는 입양이라고 하면, 과거 여배우 최진실씨의 초창기 작품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작품이 먼저 생각이나서 왠지 슬픈 느낌이 듭니다)

  4.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9 09: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가 천황께 답장한 저 시 참 좋네요 언젠가 써먹고자 메모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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