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타헤에[母里 太兵衛][각주:1]라고 하면 ‘쿠로다 타령[黒田節]’[각주:2]으로 유명한 무인이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히노모토 제일의 창[日ノ本一の槍]’ 니혼고우[日本号]는 원래 궁중에 있던 것이라고 하며,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게 하사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거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전해진 것이다. 창날이 약 70cm 거기에 약 2m30cm의 푸른 창자루가 달린 창이다.
 
어느 날 마사노리가 사자로 파견된 타헤에에게 술을 강제로 먹이려고 하면서, 이걸 마시면 뭐든 바라는 것을 준다고 하며 커다란 잔에 술이 넘치도록 따라서 주자 타헤에는 그것을 완샷하고 난 뒤 니혼고우의 창을 냉큼 집어 들고 왔다고 한다[각주:3]. 즉 술로 따낸
것이다.

니혼고우[日本号]의 창날의 앞뒷면. 상기의 링크와 함께 보시길.

타헤에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를 섬겼으며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와는 동료였다. 임진왜란 때는 쿠로다 카즈시게[黒田 一成][각주:4], 고토우 마타베에와 서로 번갈아 가며 선봉대장을 맡았다. 쿠로다 가문[黒田家]이
치쿠젠[筑前] 52만석의 대봉(大封)을 받았을 때, 타헤에도 쿠라테 군[鞍手郡] 타카토리 성[鷹取城] 1만 8천석의 높은 봉록을 하사 받았다. 가신이라고는 해도 다이묘우[大名] 클래스의 석고(石高)였다.

 타헤에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기풍을 사랑하던 사나이로 상대가 주군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이 없었다.
 주군 나가마사의 적자 만토쿠마루[満徳丸=후의 타다유키[忠之]]가 4살이 되어 처음으로 바지[袴]를 입는 축하연 때의 일이다. 만토쿠마루의 후견인[お守り]이 된 타헤에는 이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서 어른이 되셔서 아버님을 능가하는 공명(功名)을 세우소서”
 라고 말하였다.
 나가마사는 그것을 듣고 화를 내며,
 “타지마(但馬=타헤에)!! 아비를 능가하는 공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조선에서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처럼 태평스러운 시대에 어떻게 만토쿠마루가 나를 능가하는 공적을 세울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말하며 실언을 취소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타헤에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태연히 만토쿠마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라고 말하며 말을 취소하려 하지 않았다.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옆방에 있던 노신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가 중재하여 겨우 나가마사는 화를 풀었다.
 “이거 내가 실수했네. 이리 와서 이걸 마시게”
 하고 술잔을 건네자, 타헤에는 세 번이나 더 달라고 한 뒤 다 마신 후,
 “오늘은 경하스러운 자리인데 분위기가 내려갔군요. 제가 춤을 추어 다시 분위기를 끌어 올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때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마음 씀씀이가 깊은 것도 주군. 또한 사려가 부족한 것도 주군. 큰 얼간이는 타지마(=타헤에), 또한 믿음직스러운 것도 타지마”
 라고 했다고 한다.

 또 어느 해의 초반 신춘(新春)의 축하연에서 나가마사가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주연이 시작되어 밤 10시 즈음이 되자 나가마사가,
 “내가 있으면 젊은이들이 맘 놓고 술을 마시지 못하겠지. 난 이만 가니 맘 놓고들 술을 마시게”
 하고 말하곤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역시 이 자리에 있던 타헤에가 일부러 큰 소리로,
 “이런 날 좀 더 자리에 앉아서 젊은이들과 속 터놓고 즐기면 좋을 것을… 어쨌든 자기 멋대로인 주군이시군. 정수리에 커다란 뜸이라도 놓아 정신차리게 해야지 이거야 원…”
 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듣지 못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타헤에의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완고함으로 주군이라 하더라도 안중에 없다는 듯한 센고쿠 생존자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술을 좋아하는 타헤에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타헤에는 고토우 마타베에처럼 주군 가문을 버리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완고한 반면 주군 가문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리 다헤[母里 太兵衛]
출생은 확실하지 않지만 씨는 모우리[毛利]였다고도 한다. 이름은 토모노부[友信]로 타지마노카미[但馬守]를 자칭하였다.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죠스이[如水]]-나가마사[長政]를 섬기며 조선에서도 공을 세워 쿠라테 군[鞍手郡] 타카토리 성[鷹取城] 1만8천석에 봉해졌다.

  1. 위키에 따르면 쿠로다 가문[黒田家] 내에서는 모리는 ‘보리ぼり’라고 읽는 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지금도 유명하여, 일본 유명 사회자인 타모리[タモリ]는 상대가 후쿠오카 사람일 경우 “후쿠오카의 결혼식에선 항상 술 취한 할배가 나와서 쿠로다 타령을 부른다”는 소재를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유명한 듯. [본문으로]
  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의 정전기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파견된 모리 타헤에에게 마사노리가 자꾸 술을 권했다. 타헤에는 행여라도 실수할까봐 계속 거부했지만, 마사노리는 '마시면 뭐든 다 주마'라고 하며 결국에는 '술도 못마시는 쿠로다의 무사' 운운해대며 쿠로다 가문을 굴욕하자 술을 다 마신 뒤 '니혼고우'를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가신 카토우 시게노리[加藤 重徳]의 아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노부나가를 배신한 아라키 무라시게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혔을 때 죠스이를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그때의 보살핌을 잊지 않은 죠스이는 무라시게가 패해 몰락한 카즈시게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쿠로다 가문[黒田家]의 일문으로 대했다. 후에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 52만석에 봉해지자 그도 1만 6200여석에 봉해져 그의 후손은 대대로 쿠로다 가문 필두중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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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gorekun.com BlogIcon 고어핀드 2011.03.14 2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노부나가의 야망>을 할 때 언제나 애용하는 무장이지요. 보통 성격이 완고하면 딱딱하고 매력이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이 무장에게 남겨진 이야기들을 읽어 보니 오히려 아주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무장을 더 즐겨 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1. 그리고 니혼고우의 사진은 생전 처음 봅니다만... 저 창에 새겨진 것은 금강저라 하여, 부동명왕이 들고 다니며 마귀를 물리칠 때 쓰는 칼입니다. 부동명왕이든 금강저든 칼이나 창에 자주 새겨지는 대상이지요. 어쨌든, 굉장히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15 0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hima.que.ne.jp/tendou/tendou_data_d.cgi?equal1=E402 에 따르면 천도에서는 통솔 71에 무력 90이군요. 근데 저같은 경우 예전 시리즈를 할 때 보면 항상 오다 가문으로 하다 보니 모리 타헤에를 얻을 때 즈음(등장도 1571년이니)이면 이미 쩌리가 되더군요.

      과연 고어핀드님!!
      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
      위키에서 니혼고우에 대해서 찾아보니, 너무 아름다운 창이어서 창 제작의 장인들은 실력이 되면 일생에 한번은 복사에 도전한다고 하는군요.(그런 만큼 복사품도 많다고 하네요.)


 닛코우[日光]에 가면 토우쇼우 궁[東照宮][각주:1]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오오토리이[大鳥居]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가 저 먼 큐우슈우[九州]에서 거대한 바위를 옮겨와 건조한 것이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힘들었을 듯한 이런 공정을 나가마사는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에도[江戸]에서 닛코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돌기둥 하나를 배 한 척에 싣고, 그 배의 양쪽에 굵은 밧줄을 연결한 배 두 척이 끌게 하였다. 육로로 옮겨지자 슈라구루마[修羅車]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나 큰 목재를 옮기는 수레에 싣고 수 마리의 소로 끌게 하였다. 닛코우로 가는 길은 흑토(黑土)라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두꺼운 널빤지를 200여 미터정도 빈틈없이 깔아가며 옮겼다.
 
오오토리이를 조립하는데도 고생하였다. 기둥을 양쪽에 세운 후 상부에 돌을 얹어야 했는데, 나가마사는 근처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쌀, 보리, 메밀, 콩을 채운 가마니를 사 모은 뒤 이 가마니를 쌓아 발판으로 삼고 도르래를 장치하여 돌을 끌어 올렸다. 이것만으로도 천 명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였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호쾌한 기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덩치가 컸기에 전쟁터의 모습은 괴물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가신(家臣) 시마 사콘[島 左近]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사'라고 경외 받았는데, 어느 날 갑주를 입고 살기를 풍기는 사콘을 보고 사콘의 부인조차 공포에 떨었다. 그러자 사콘은 "참 겁도 많으시군. 쿠로다 카이노카미[黒田 甲斐守=나가마사]가 갑주 입은 것을 보면 아예 기절하시겠구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터에서의 활약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는 나가마사의 부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때부터 쿠로다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나가마사는 전투에서 언제나 이 마타베에와 치열한 공적다툼을 벌였다. 가신들이 목숨을 아까지 않는 이런 무모한 모습에 간언하자,
"아버지(죠스이)가 안 계시다면 아들 타다유키[忠之]에게 선봉을 맡기고 나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겠지만, 아직 아버지는 건재하시다. 만약 내가 전사하더라도 우리 집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라고 말했다 한다.

 부친 죠스이의 교육 방침으로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형제처럼 자랐지만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욕하여, 둘은 어렸을 때부터 끝없이 싸웠다.[각주:2]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마타베에는 나가마사가 강 한가운데서 조선 장수[각주:3]와 필사적으로 격투하고 있는 것을 방관만하며 도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각주:4].
  나가마사에게는 마타베에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전의관(全義館)에 포진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마굿간에 침입하여 말을 잡아먹은 사건이 일어났다. 가신 칸 마사토시[菅 政利][각주:5] [각주:6]가 퇴치하고자 달려들었지만 호랑이는 더욱 날뛰었다. 마사토시가 위험에 처하자 마타베에가 달려들어 호랑이의 미간에 두 번 칼질을 퍼부어 겨우 잡았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마타베에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부대의 대장이라는 자가 축생과 싸우다니 이 무슨 짓이더냐?"하고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각주:7]

 1606년 결국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헤어진다. 나가마사가 노[能]를 관람하는 자리에서 마타베에의 아들 모토노리[基則]에게 작은 북[小鼓]을 치게 만든 것에 분노[각주:8]하여 마타베에는 1만6천석의 가록(家祿)을 버리고 쿠로다 가문을 떠났다.[각주:9]

 나가마사는 무용일변도인 외견과는 달리 굉장히 뛰어난 정략가(政略家)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은 뒤의 혼돈스런 정치정세 속에서 토쿠가와 정권수립을 위해 암약한 것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토벌군을 일으켜 시모츠케[下野]의 오야마[小山]까지 갔을 때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여기서 토쿠가와 가문의 운명을 나누는 사상 유명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야스를 따라온 다이묘우[大名] 대부분이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의 다이묘우였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명령에 따라 토쿠가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향배가 이에야스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이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존재가 급격히 클로즈업 된다.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맹장(猛將)이며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런 사내가 토쿠가와 편에 선다고 표명한다면 다른 장수들도 전부 이에 따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가마사는 이런 흐름을 민감히 캐치하여 이에야스에게 부탁받기 전에 마사노리의 진소(鎭所)를 방문하였다. 나가마사는 다음과 같이 마사노리를 설득했다고 한다.
  "미츠나리놈은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천하를 쥘 심산이다. 생각해보게나. 어리신 히데요리님에게 거병의 의지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무공파 다이묘우[武功派大名]의 대표격인 인물로, 문치파인 미츠나리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나가마사는 마사노리의 그런 증오심을 자극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나가마사의 교묘한 설득에 넘어가 단번에 미츠나리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켜 미츠나리와 싸우는 것을 맹세한 것이다.

 다음 날 열린 오야마 군의는 마사노리가 발언한 말에 따라 장수들은 전부 토쿠가와 측에 서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의 행동이 굉장히 기뻤는지 애용하던 투구와 말을 한 마리 주었다. 나중에 나가마사에게 치쿠젠[筑前] 52만 3천석이라는 거대한 영지를 준 것도 이 오야마 군의에서의 공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각주:10]

 정계의 막후 모사라 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나가마사였지만 그의 부친 죠스이의 기량에는 결국 이르지 못했다. 나가마사는 항상, "나는 14살 때부터 여러 번 공적을 세웠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칭찬해 주지 않았다.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아들]는 천하의 누구나가 그의 무용을 칭송한다. 이는 요시나가의 부친 나가마사에게 특별한 무공(武功)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나가의 이름이 빛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은근히 너무나 위대했던 아비를 갖았다는 것에 한탄하였다고 한다. [각주:11]

 그렇다고 하여도 부친 죠스이의 영향은 커 영지경영에 대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친의 방식을 지켰으며, 임종할 때에도 아들 타다유키에게 오로지 죠스이의 노선을 지키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1568년생. 요시타카[孝高=죠스이[如水]]의 아들. 1589년 가문을 이어 부젠[豊前]의 6개 군(郡)과 카와치[河内] 탄보쿠 군[丹北郡][각주:12]을 영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하여 김해성(金海城) 공략. 1597년 정유재란에서는 직산(稷山)에서 1만의 명나라 군을 격파[각주:13].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 18만석에서 치쿠젠[筑前] 52만석[각주:14]이 된다. 1623년 8월 4일 죽었다. 56세.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神社).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쿠로다 죠스이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혀 유폐되었을 때, 마타베에의 백부 2명이 쿠로다 가문을 떠나는데, 마타베에도 함께 쿠로다 가문을 떠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를 섬긴다. 그러나 나가마사가 마타베에의 기량을 아까워해 다시 불러들였다. 오히려 죠스이는 배신자의 핏줄이기에 가까이 쓰지 말라고 하여, 나가마사는 쿠리야마 시로우에몬[栗山 四郎衛門]의 요리키[与力]로 삼아 100석만 주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응리(李應(応)理)라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겠음. [본문으로]
  4. 당신의 주군이니 구하라고 하는 코니시[小西] 부대 사람의 말에 "내 주군이라면 저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오" 라고 고토우 마타베에는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나가마사는 간신히 이기고 나왔는데, 마타베에는 태연히 부채질하면서 구경하고 있었기에 벙쪄했다 한다. [본문으로]
  5. 菅은 '스게'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사족으로 이 칸 마사토시는 세키가하라에서 시마 사콘[島 左近]을 부상(혹은 사망)당하게 하는 철포대의 지휘관이었다. [본문으로]
  7. 물론 칸 마사토시도 함께 혼났다. [본문으로]
  8. 모토노리는 원래 작은 북을 잘 쳐 나가마사가 시킨 것이기는 했지만, 무사인 자신이 연극배우[能楽師]의 흥을 위해서 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비인 마타베에에게 일러 일이 발생. [본문으로]
  9. 마타베에의 영지는 오오쿠마 성[大隈城]였는데, 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興元]의 영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쿠로다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는 호소카와 가문이 부젠[豊前]에 오기 전 영주인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으로 이동하면서 연공(年貢)을 싹슬이 가져가는 바람에 호소카와는 초기 영지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만큼 쿠로다 나가마사를 미워했다. 나가마사 역시 자꾸 항의하는 호소카와 가문에 화가 나 가신들에게 호소카와 가문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였다. 호소카와를 감시하고 압박을 주라고 배치한 마타베에가 오히려 호소카와와 친하게 지내자 나가마사가 자주 화를 내었기에 이런 불화가 쿠로다 나가마사와 코토우 마테베에 양측에 쌓인 면도 있다. [본문으로]
  10. 거기에 세키가하라 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신하도록 암약한 것도 나가마사였다고 한다. 전투가 행해질 때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지 않자 초조해진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에게 사자를 보내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는 것이 확실한지 다그칠 정도였다. 즉 히데아키는 나가마사가 담당했다. 여담으로 다그치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나가마사는, “히데아키가 배신할지 어떨지 내가 지금 그걸 어케 알어!! 싸우기 바쁜데 짜증나게 할래?”…라고 했다고 한다. 보고를 들은 이에야스는 짜증이 확 나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물어뜯어 피 철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그러나 효심은 깊어,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전초전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의 강공 때 사쿠마 군세의 공세에 놀란 죠스이가 죽음을 각오하며 부하 쿠리야마 시로베에[栗山 四郎兵衛]에게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하여 쿠리야마는 나가마사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은채 나가마사와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나중에 쿠리야마에게 이동지를 묻다가 사정을 알아챈 나가마사는 “아무리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아들이 아비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면서 전장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덧붙여 이 시즈가타케에서 수급을 얻어 450석을 하사 받음. [본문으로]
  12. 전부는 아니고 쿠로다 나가마사의 시즈가타케 활약 450석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때 후방을 노리던 네고로[根来], 사이카[雑賀]를 격퇴하여 2000석 + 쿠로다 죠스이 가족 재경료 500석. [본문으로]
  13. 직산 전투를 말하는 것인데, 명나라 기병 4000에 쿠로다 5000의 격돌. 몇 차례 접촉은 있었으나 서로 물러났음. [본문으로]
  14. 치쿠젠 전부, 히젠[肥前] 2군(郡), 치쿠고[筑後] 2군을 포함하여 정확히는 52만2천4백여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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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08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망의 세키가하라 전투 대목을 읽다보면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나가마사와 마타베에의 일화와 똑같은 포지션에 놓이는 일이 있었지요. 소하치씨는 뻔뻔한(?) 소설가인 셈이군요.

    그러고보니 다케나카 가문은 시게카도가 번을 세웠나요? 한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큰 은인셈이지만 자기 가문엔 마땅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 되는건데 말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8 08: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 어떤 에피소드인가요? 대망은 노부나가 죽은 이후부터는 읽질 않아서요.

      입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분발하고 나름 큰 공적(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생포)에 자기 영지에서 전투(세키가하라)가 일어났는데도 가증을 못 받은 것을 보면 정치외교력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3.08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망 9권 '늙은 호랑이와 젊은 표범'이란 챕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탈출과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추격이 주 소재인데 여기서 다다요시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섣불리 추격을 하다가 시마즈 무사에게 목숨을 잃게 될 상황에 처하지요.

      이때 (여기선 이에야스의 전령이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호로무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오구리 다이로쿠란 도쿠가와 무사가 지나가다가 요코타 진에몬이란 다른 무사가 다다요시를 구해주려는 것을 저지합니다. 다다요시는 가까스로 살아나온 후 눈이 벌개져 다이로쿠와 진에몬을 찾지만 이미 주위에선 사라졌지요.

      세키가하라의 피냄새가 멎을 무렵 이에야스가 군대를 점검할때 다다요시가 오구리 다이로쿠에 대해 따지게 되고, 이에야스의 질문에 다이로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대장의 신분이었으므로 그리하였습니다"

      이에야스는 다다요시에게 자상한 훈계를 하면서 훈훈한 엔딩을 맞습니다.

      볼때마다 매우 흡사한 에피소드라고 생각됩니다만 학식이 짧은터라 다른 분들에겐 아니라고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케나카 시게카도가 글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아는데 애석히도 그쪽의 재주는 없군요. 그러고보면 미노계 인물들 중 마지막까지 웃은 사람은 별로 없다는게 또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9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도련님께서 직접 싸우신다는 것이 우선 에러군요(^^)

      아마 찾으면 좀 있을 것 같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은 모리 란마루 집안의 모리 가[森家]군요. 미마사카 18만석으로 입번하지만 중간에 후계없어서 폐번크리.

      뭐 그래도 미노 계열 중 가장 출세한 사람이라면 이번 년도 NHK대하드라마 고우[江]의 라이벌이 되는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인 듯하군요(태어난 곳은 탄바[丹波]라고 합니다만..)

  2. ckyup 2011.03.09 05: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친구에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치도 나쁘지도 않은것 같던데요, 마사노리나 기요마사와 더불어 전국말기에 흥미를 더해주는 무장임에는 분명한것 같습니다 - 왠지 전투에 데리고 나가서 본진 앞에두면 든든할것 같은....

 죠스이(如水)는 호(號)이며 이름은 요시타카[孝高], 통칭을 칸베에[官兵衛]라고 한다.
 히데요시[秀吉]는 이 칸베에의 지략을 굉장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이미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가 측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쩌다 보니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가 천하인이 되느냐로 화제가 옮겨졌다. 측근들은 한결같이 '오대로 중 한 사람이 아닐까?'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머리를 저으며 "그렇지가 않네. 저 쿠로다 칸베에 말고는 생각할 수 없지"라고 말했다. 모두 이상히 여겼다. 칸베에는 기껏해야 부젠[豊前]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부나가[
信長]가 급사한 이래 자신은 아케치[明智] 정벌[각주:1]을 시작으로 여러 전투를 경험하였다. 전투에 임하여 아무리 고심해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가 생겨 이를 칸베에에게 상담하면 그 답은 자신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과 똑같았다. 오히려 칸베에 쪽이 훨씬 의표를 찌른 작전을 세웠다. –고.
 또한 히데요시는 "세상에 두려운 자가 둘 있으니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와 쿠로다이다. 토쿠가와는 그래도 온화한 사람이지만 쿠로다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알 수 없는 자이다."라고도 말했다 한다.

 칸베에가 센고쿠의 무대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히데요시와 만나면서부터이다. 히데요시가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을 위해 하리마[播磨]로 병사를 이끌고 왔을 때부터이다. 그때까지 칸베에는 하리마의 시골 다이묘우[大名]에 속한 가로(家老)에 불과하였다. 주군은 고챠쿠 성[御着城]의 성주인 코데라 마사모토[小寺 政職]라 하였다.
 1577년 10월 히데요시가 모우리 정벌의 사령관으로 하리마에 왔을 때 칸베에는 자신의 거성(居城)인 히메지 성[
路城]를 바치고 자신은 히메지 성의 두 번째 성곽(二の丸)으로 옮겨 살았다[각주:2]. 히데요시는 이 해의 7월 칸베에에게 보낸 편지에 '자네는 내 동생 코이치로우[小一=히데나가[秀長]]만큼이나 편한 사람일세'라고 까지 적었다. 칸베에의 기량에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이후 칸베에는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함께 히데요시 참모의 한 사람이 되었다.

 칸베에의 노력으로 인해 하리마의 대부분은 오다 측에 붙게 되지만, 1578년 3월 하리마 최대의 호족 미키 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모우리 쪽으로 돌아서자 다른 호족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칸베에의 주군인 코데라 씨에게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거기에 또 생각도 못했던 사태가 일어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리마에 구원하러 올 예정이었던 오다 가문의 유력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갑자기 반기를 치켜세웠던 것이다. 노부나가조차 벙찌기만 할 뿐인 급변이었다.

 여기서 칸베에는 친구이기도 한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서 단신으로 무라시게가 있는 이타미 성[伊丹城]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무라시게에게는 오다 쪽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예 없었다. 사자(使者)인 칸베에도 원래대로라면 살해당할 처지였지만 무라시게와 오랜 기간 친교를 맺어왔고 또한 종교가 같은 천주교였기에 살해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참혹한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습한 시궁창 같은 감옥이었다. 가려움을 일으키는 피부병이 머리 부분을 잠식하였으며[각주:3] 다리의 근육이 떨어지고 피부병 때문에 오른쪽 무릎이 썩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반년도 버티지 못했겠지만 칸베에의 생명력은 여기서 1년을 버틸 정도로 강했다. 낙성으로 인하여 구출되기는 하였지만 이 감옥생활로 인하여 죠스이는 오른쪽 다리의 자유를 잃었다. 또한 이 때 무라시게와 뜻을 같이한 코데라 씨는 히데요시에게 성에서 쫓겨났다. 칸베에가 코데라 성(姓)을 버리고[각주:4] 원래의 쿠로다[田]로 돌아온 것은 이때부터이다.

 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었다. 죠스이는 이때 히데요시를 따라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최전선기지인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수공(水攻)에 참전하고 있었다. 흉보가 그 진영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정신이 나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동요하고 있던 히데요시의 귓가에 "지금이야말로 히데요시님이 천하를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옵니다"하고 칸베에는 속삭인 것이다.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한 정세판단이었다. 히데요시는 이 때 이후 칸베에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며 히데요시 정권의 최대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가 칸베에에게 하사한 것은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2만석밖에 안 되었다.

 죠스이가 가슴 속에 숨기고 있던 천하에 대한 야망을 잠시나마 비친 것은 후에 천하를 나누는 싸움이라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때였다.
 당시 적자(
嫡子)인 나가마사[長政]는 이에야스의 부사령관 격으로 세키가하라에서 싸웠는데, 그 사이 죠스이는 전격적인 움직임으로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붕고[豊後] 등 큐우슈우[九州] 북-중부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 그 지역을 손에 넣은 것이다. 휘하의 주력병사들을 나가마사가 세키가하라로 거느리고 갔기에 죠스이에게는 소수의 병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죠스이는 백성, 낭인을 긁어 모아 용병군단을 조직하였다. 금은을 방 안에 산더미같이 쌓아서 지원자들을 모았다고 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쿠로다 군은 동군 토쿠가와 쪽이라고 깃발을 선명히 하고 있음에도, 죠스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이에야스[家康] 양 쪽을 저울에 메달며 수상쩍은 행동을 보였다는 말이 있다. 미츠나리에게서 협력을 요청하는 밀사가 왔을 때, "큐우슈우[九州] 중 7개 쿠니[国]를 준다면 – "하고 서군에 설 듯한 척을 하였다.

 본심은 이러했다. 토쿠가와와 이시다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 큐우슈우를 제압하고 양군이 싸우다 지쳤을 때를 봐서 단번에 중앙으로 진출, 천하를 손에 넣으려고 한 가공할 야망이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의 승패는 허무하게 결정이 나 토쿠가와가 이겼다.

 예상이 빗나간 데에 대한 애석함 때문인지 세키가하라 전쟁 후 죠스이는 아들인 나가마사가 토쿠가와 세력의 중심이 되어 뛰어난 활약을 보인 것을 알자 "이 천하의 얼간이 같은 놈"하고 투덜대었다고 한다.

 이 귀모(鬼謀)의 사나이는 죽을 때까지도 연기를 펼쳤다. 임종의 때가 다가오자 이유도 없이 중신들을 욕하며 쪽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도가 지나쳐 나가마사가 한마디 하자 "이는 너를 위해 서란다. 중신들의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 빨리 나가마사의 대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함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로다 조스이(田 如水)]
1546년 하리마[播磨] 히메지[
路]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코데라 마사모토[小寺 政職]를 섬겼지만 히데요시[秀吉]의 츄우고쿠([中国] 공략 때부터 히데요시의 모신(謀臣)이 되었다. 1580년 하리마 내에 1만석이 주어졌고, 1585년에는 야마자키[山崎] 성주가 되었으며, 1588년에는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2만 5천석이 되었다. 경건한 천주교도로 세례명을 '돈 시메온(Don Simeon)'이라고 하였다. 1604년 59세에 죽었다.

  1.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기 위한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し]에 이은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나머지 일족은 부친(쿠로다 모토타카[黒田 職隆]의 은거성인 코우노야마 성[国府山城]으로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로 인해 瘡頭라는 별명이 생겼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곰보'가 되겠지만, '瘡'라는 글자는 매독의 속칭이기도 하기에 그가 매독에 걸렸다는 말이 생긴 것 같다. [본문으로]
  4. 이때까지만 해도 '코데라 요시타카[小寺 孝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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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朴先生 2009.04.09 0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칸베에도 속을 알 수 없는 "厚黑"의 대가 였군요
    게다가 난국을 틈 타 저런 엄청난 계획을 세웠다니 정말이지... 멋져부러 '-^)b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9 05: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문만 번역하는 곳에 중국어 단어가 나와서 당황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동군 올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후세로 가면서 죠스이에게 있는 이미지 혹은 선입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커진 이야기가 저 세키가하라 때 정권쟁취...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는 아비인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에게 자랑했다.

 "나이후[内府]가 제 손을 잡고는 엄청 고마워하더군요. 하긴 뭐 제가 없었음 나이후가 졌을 테니까요. 킨고[金吾]만 하더라도 제가~" 나불나불 블라블라 페라페라..

 그 말을 들은 아비는 잠시 아들을 쏘아보곤 한 마디 하였다.

 "그래 어느 손을 잡고 고마워 하더냐?"

 "오른손이었습니다"

 "그 때 니 왼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

 오늘 이 사진을 보고 생각난 에피소드.

ps:


사이고우 테루히코[西郷 輝彦]씨와 악수를 나누었을 때..
일본 사람들은 저런 식의 악수가 익숙치 않은 듯..
사이고우 씨와 함께 있던 분이
"악수가 특이하네"
라고 말하자, 사이고우씨..
왼손으로 칼을 빼내어 베는 시늉을 하며
"이럴 지도 모르니까"
라는 말을 듣고 납득.
.
.
....근데
한국인도 칼을 차고 다닌 시절이 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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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루드림 2009.03.28 0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악수를 하면 왼손으로 칼을 빼낼지 모른다는 거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8 0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뇨. 한국식은 상대방이 지켜볼 수 있게 왼손을 보이게 하기에 칼을 뽑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제 설명이 부족했나 보군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워낙 말주변이 없다보니..흑..T.T

  2.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8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기보다 연배나 지위가 높은 사람과 악수할 때는 왼손을 오른팔에 올려놓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해야하기 때문에 칼을 빼기 힘들다 이런 뜻인거군요...
    그럼 저 모자이크 속의 주인공이 발해지랑님??
    그리고 저분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분인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9 16: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자이크는 접니다.
      하고자 했던 것은 영화 "링"에서 비디오 보고 나면 사진에 생기는 소용돌이 모양을 하고 싶었습니다만...실력부족...

      같은 카고시마(鹿児島) 출생이라는 것과 사이고우 씨가 존경하는 인물이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라는 것 말고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NHK 대하드라마 사상 최고로 평가받는 '독안룡 마사무네'에서의 배역인 카타쿠라 코쥬로우(片倉小十郎)도 꽤나 좋아하시더군요.

十.

 이에야스(家康)도 요도도노(淀殿)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그녀가 성질이라도 부려 히데요리(秀)를 내세워서는 또다시 옛 토요토미(豊臣)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규합이라도 한다면 곧바로 천하에 난이 일어나 이에야스가 어렵사리 손에 넣은 천하가 주먹에서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ヶ原)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일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등은 이에야스에게 각각 50만석 전후의 봉토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히데요리의 가신이기도 하다는 이중적인 입장을 지키며 틈만 나면 오오사카성(大坂城 )에 가 히데요리를 배알하고 인사를 올렸다. 만약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가혹하게 대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에도(江)에 있으면서도 토요토미 가문의 필두 대로라는 자격으로 천하에 임했다. 세키가하라부터 2년 뒤인 1602년 2월 14일에 재차 오오사카에 나타났고, 다음 해 3월 14일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평소 문안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이제서야 신년인사를 올리옵니다"

 라고 말하였다. 3월 중순이 되어서야 신년인사를 하는 것도 묘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가신으로써의 예를 취하였고 취함에 따라 카토우 키요마사 등 옛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감정을 진정시켰다. 다음 해 1603년의 배알을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오오사카에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제서야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한때 일본을 지배한 강성했던 이름을 잊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오오사카 성 밑도 쇠퇴하였고 대신해서 에도가 번창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도 에도에 저택을 세워서는 자신들의 처자식을 자발적으로 에도에서 살게 하는 식으로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바쳤다. 카토우 키요마사 조차 – 라기보다 오히려 키요마사가 앞장서 미야케자카(三宅坂) 고개 위에 집터[각주:1]를 달라고 해서는 황금을 여기저기 처바른 저택을 만들어 처와 자식을 살게 하였다. 이제 에도 정권에 거역하지 않겠다는 증거를 이에야스와 천하에 공언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키요마사를 따라 다른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들도 그리하였다. 이에야스는,
 - 이제 오오사카에 새해 인사할 필요가 없겠군
 하고 생각하여 오오사카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히데요리는 힘을 상실했다.
 하지만 관위만큼은 남다르게 승진했다. 승진하는 것이 당연했다. 토요토미 가문이 가진 봉토의 규모야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다이묘우와 다른 점은 부친 히데요시나 히데요리에게는 형 뻘인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츠구(秀次)가 칸파쿠(
白)에 임명 받은 것처럼 귀족(公家)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런 점은 다섯 셋케(五家-섭정, 칸파쿠가 될 수 있는 문벌)인 코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쿠죠우(九), 니죠우(二), 이치죠우(一条)와 다를 바 없었다. 히데요리는 소년이었지만 1601년에 종이위(從二位) 다이나곤(大納言)에 임명 받았으며, 1603년에 나이다이진(内大臣)이 되었다. 10살의 어린 나이다이진은 과거를 찾아보아도 드물 것이다.
 나이다이진 정도 되면 조정 백관의 총수라고 말해도 좋았다. 이 때문에 쿄우토(京都) 조정은 오오사카에 마땅한 예를 치렀다. 신년이라도 되면 친왕(親王), 상급귀족(公卿) 등이 오오사카로 대거 내려와, 성내에 있는 건물에서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이 토요토미 성(姓) 2대째인 귀인(貴人)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런 점에서만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만이 신년인사 하러 오는 것을 그만둔 이유, 더불어 상기와 같은 이유가 있음에도 그만 둔 더 큰 이유는 - 이 해에 이에야스가 조정에 주청하여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에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은 아주 옛날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
[각주: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각주:3]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겐지(源氏)가 아니면 임명 받지 못한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각주:4]도 겐지였기에 임명되었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도 토키 겐지(土岐 源氏)를 칭하였기에 임명 받았다[각주:5].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 시대에 본성(本姓)을 공개적으로 칭하지 않았으며 한때 헤이시(平氏)를 칭했기 때문에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주청하여 조정이 만들어 준 성(姓)을 받는(朝臣) 형식으로 토요토미(豊臣)를 하사 받아서는 귀족(公家)이 되었고 칸파쿠()라는 자격으로 일본을 통치하였다. 이에야스도 처음엔 겐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信長)와 동맹을 맺고 있던 시절에 조정에 청하여 겐지 공칭을 허락 받았다[각주:6]. 다행스럽게도 이로 인해 쇼우군 가문(軍家)에 임명되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의 최대 특전은 바쿠후(幕府)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쟁 후 이어지고 있던 에도의 비합법적 정부를 바쿠후 창설로 인해 정당화 할 수 있었으며 그런 합법성을 갖고 다이묘우를 거느리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형식상이나마 머리를 굽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지 이미 3년이 지난 상태였다.

 이 소식은 곧바로 오오사카에 전해져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을 놀라게 하였다.

 "가신 주제에 바쿠후를 연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바쿠후를 연 이상 이젠 정권을 토요토미 가문에게 반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아닌가?
 이때도 요도도노는 카타기리 카츠모토(
片桐 且元)를 불러 마치 카츠모토가 이에야스인 마냥 힐문했다.

 "자네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하고 요도도노는 숨을 거칠게 하며 책망하였다. 카츠모토는 즉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후 자기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남몰래 바라고 있던 것을 흡사 이에야스의 머리 속 생각인양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쇼우군() 직은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그 후에는 히데요리님께 물려주실 생각이옵니다"

 이 시기 에도에서 자기 영지(領地)인 히로시마(広島)로 돌아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오오사카에 들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배알하여 비슷한 말을 하였다.

 "잠시 동안만 참으시면 되옵니다"

 라는 것이었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는 1543년 호랑이띠로 이미 노령이다. 그와 반대로 나이다이진(内大事=히데요리)님은 어린 나무가 쭉쭉 자라듯이 커가며, 커갈수록 이에야스가 죽음에 가까워진다. 이에야스가 죽으면 졸자(拙者)를 시작으로 한 천하의 제후들은 더 이상 토쿠가와 가문에 세울 의리가 없어진다. 토쿠가와 가문 자체도 이에야스를 잃으면 지금과 같은 강한 전투력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옵니다. 초조해하지 말고 난을 일으킬 생각하는 일 없이 일단 에도의 지시를 따르시길. 언젠가 때가 오면 아무리 토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반환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활과 칼을 들고 토요토미 가문으로 되찾아 오겠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그리 하겠사옵니다"

 하고 마사노리는 힘주어 말했다.

 이 너무도 듬직한 말에는 안심이 되는 한편 아무리 요도도노라도 걱정도 되었다.

 "사에몬다유우(左衛門太夫=마사노리)님. 그러한 말씀하셔서 행여라도 에도(江戸)로 그 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하고 이 귀부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남을 걱정하였다. 마사노리는 그것만으로도 감동하여 눈물을 머금고,

 "고맙사옵니다"

 라며 목소리를 적셨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쳐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듣더라도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원래 에도님(江戸殿=이에야스)에게 있어 저는 은인이옵니다. 저 세키가하라 때 제가 미츠나리(三成)를 미워한 나머지 에도님에게 가담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제후들은 앞다투어 에도님을 따른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했다. 선대 히데요시와 친척인 자[각주:7]로, 그 때문에 토요토미 다이묘우 중에서는 키요마사와 더불어 후다이(譜代)[각주:8] 필두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세키가하라 즈음에는 그런 마사노리조차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였기에 다른 다이묘우들도 거리낌없이 오오사카 측을 물리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시기의 이에야스에게 있어 마사노리의 정략적 가치는 그만큼 거대한 것으로 그러한 자신의 가치를 마사노리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마사노리는 이에야스 측의 선봉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서 용맹한 활약을 벌여 서군을 무너뜨렸다. 어쨌든 마사노리가 이에야스에게 기여한 것은 누구보다도 컸다. 거기에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이전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에야스 편에 서라고 권유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에게 마사노리는,

 "에도님을 돕기는 하겠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츠나리(三成)에 대한 원한 때문일세. 이 전투에서 에도님이 이긴 후 결코 히데요리님의 신상에 지장이 없도록 에도님의 입으로 확약을 듣고 싶네"

 라고 말하여 이에야스는 나가마사를 통하여,

 "그러한 일은 없다"

 라는 뜻의 말을 받았다. 그런 후쿠시마 사에몬다유우이기에 가령 이 말이 칸토우(関東)에 전해지더라도 이에야스는 퉁퉁거리지도 못할 터이다 – 라고 말하였다. 요도도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러나 에도의 이에야스는 마사노리 정도의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가볍게 쇼우군 직을 사퇴한 것이다. 취임한지 2년 후인 1605년의 4월이었다. 그런데 그 사임한 그날 조정에 주청하여 쇼우군 직을 적자 히데타다(
秀忠)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지배권을 세습시켰다. 이 소식만큼이나 오오사카를 낙담시키고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단을 분개시킨 것은 없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쇼우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줌으로써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이때 히데요리는 13살로 관위는 우다이진(右大臣)에 임명된 상태였다. 앞으로 승진한다면 칸파쿠밖에 없었으며 칸파쿠가 되면 죽은 아비 히데요시의 선례를 따라 한편으론 백관을 거느리고 조정의 중심에 서며 한편으론 이백여 제후들을 이끌며 천하의 정치를 총괄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 이래 무가(武家)의 통솔자로 여겨지는 세이이타이쇼우군과 당연하게도 충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 현재 일본의 헌정기념관. '미야케자카 고개(三宅坂)'라는 이름은 시간이 흘러 17세기 중반에 미야케 가문(三宅家) 참근교대시에 이용하는 에도저택이 생기면서부터 생긴 이름으로 당시는 ...뭐라고 불렸는지 모르겠음. 데헤~ [본문으로]
  2. 미나모노토 요리토모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5.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미츠히데가 지원을 호소하며 호소카와 유우사이에게 보낸 편지(明智光秀公家譜覚書)에 나타나는 말로 종삼위(従三位)와 쇼우군에 임명받았다고 주장했다. 혼노우지의 변에 있어서의 조정흑막설의 증거로 많이 사용되는 떡밥이지만 개인적으로 당시까지 미츠히데의 관위인 종오위(従五位) 휴우가노카미(日向守)에서 무가로써는 하나의 허들인 사위(四位)를 뛰어넘어 단번에 종삼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빙성은 없다고 생각한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본문으로]
  6. 1566년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그때까지 쓰던 마츠다이라(松平)를 토쿠가와(徳川)로 바꾸면서. 마츠다이라 자체의 본성은 가모(賀茂)인 듯 싶지만 이때부터 본성은 미나모토(源)라고 우겼다. [본문으로]
  7. 마사노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숙모. [본문으로]
  8. 대대로 그 가문을 섬기는 가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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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13 18: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이번에도 시달리는군요(...)뭐 아무리 쪼고 볶은들 뭐 히데요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다이진 위로는 못올라가겠습니다만(ㅎㅎ;)


    히데요리에 대해 또 이글을 읽어 관심이 생겨 위키를 찾아보니, 히데요리의 남자아이들 중에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당한 쿠니마츠 말고도, 求猒上人라는 사람이 겐로쿠 초두에 80세로 죽었을때 낙성시에 3세였던 차남이었다는 설이 있다고 하더군요. 뭐 위키에도 이 대목 말고는 안나오는이니 누구인지는 잘 알수는 없지만;


    P.S. 전혀 관계 없는 사족입니다만 네이버블로그의 머리에 요구르트 핼멧을 쓴 쥐X이가 아주 인상깊었습니다(허허헛)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 보는 이름인지라 검색해 보니...

      [일본의 슬기로운 중들(浄土本朝高僧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

      태어날 때부터 현명하고 설법에도 뛰어난 '큐우엔(求猒)'이라는 고승(上人)이 말년에 후시미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겐로쿠 초반 80세의 나이로 죽었다.

      임종의 자리에서 제자에게 자신은 히데요리의 둘째 아들로 낙성시 3살이었다는 것, 에도에 숨어산 후 조우죠우 사(増上寺 - 에도에 있는 절)에서 학승이 되었다고 고백.

      중년이 되어서 간 오오사카 성의 거대함과 후시미 성터 쓸쓸함을 보고 세태의 흐름에 개탄도 하였지만 말년에는 '천하는 한 사람만의 천하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니들도 망념과 집착을 버리고 세태에 구애 받는 일 없도록 하라'

      ps;일본에 관한 것을 검색하실 때는 야후저팬에서도 꼭 검색해 보시길...일본에 관해서만이라면 구글보단 오히려 더 좋은 검색엔진입죠.

  2. 맹꽁이서당 2009.03.13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쿠시마도 말은 저렇게 했겠지만.. 결국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 측으로 참전한 다이묘는 없었겠죠?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 후쿠시마 편을 찾아보니 1619년까지 살아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신경쓰이는 다이묘우들는 에도성을 지키게 했습니다(에도성을 공격당할 일은 없으니 이름만 다른 억류). 그 중에는 물론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있었고, 그는 오오사카로 와 달라는 히데요리의 친서도 펼쳐 보지 않았고 사자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뭐 설사 억류당하지 않았더라도 오오사카 측에 서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만)

      여담으로...
      에도성에 남겨진 인물 중 가장 이외였던 인물은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라고 합니다. 본문에도 잠깐 언급되듯이 세키가하라에서는 거의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으며 실질 뒤에서 가장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결과가 되었으니까요. 뭐 결국 여름의 전투에는 참가하게 되지만요.

  3.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4 0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제부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이 이것과 비교적 겹치는 부분이 있군요. 언제 한 번 시바 료타로에 대해 알려주시길 부탁드려요 ^^ 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4 0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동시대의 이야기를 그리는 같은 작가의 것이다 보니 비슷할지도...참 저는 아직 그것을 읽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연이 닿으면 읽어 보고 싶군요.

      에...저같은 경우 시바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위키에 실린 거 읽는 정도? 그분의 책도 완독한 것이라곤 '타올라라 검'과 '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 "역사의 교차점에서" 뿐입죠.

  4. 카즈토요 2009.03.20 16: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시바 선생의 작품중에서도 그 방대한 사료의 토대위에 과감한 취사를 통해 극적인 내용들을 빠른 속도로 써내려가고 있어서 정말 빨리 읽히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근대를 결정짓는 극적인 사건의 원인과 전개, 연계된 인물들의 심리, 다양한 성격들의 조화와 갈등이 마치 큰 강이 흐르는 듯 속도감있게 읽혀졌습니다.
    대세앞에서 처세하는 군상들의 세세한 묘사와 여러 유명한 사건들이 주는 재미들도 솔솔하구요.

    다만... 시바 료타로 식의 역사 다루기가 조금 위험해 보일때도 있습니다. 마치 NHK사극을 보듯이 인물과 사건의 묘사가 너무나도 주관적으로 디테일하고 생생한데 이것은 독자가 해당역사에 대해 중도적 관점을 냉정하게 유지하고 있지 않다면 작가의 주관적 픽션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오류의 위험이 크다고 느끼곤 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미있는 책인가 보군요. 시바 선생의 세키가하라.
      틈나면 꼭 읽어 보겠습니다.

      그쵸...
      소설은 소설일 뿐입죠.
      이 10편을 쓰다가 이상한 것이 있어 따로 포스팅하려다 ....귀찮아서요~..못하고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20 19: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 하고 말했는데 불과 2년후에 히데타다가 넘겨 받았으니...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헐 님아...좀..." 싶겠군요(...)
    ...암튼 이번화도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선수끼리인데요..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인지...신경이 쓰이는 인물입니다. 카츠모토는..

  6. 본다충승 2009.05.06 1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구리 니 본성 가모 라며? ㄴㄴ 미나모토임... 우기면 장떙..... -_-;; 몇달 못봤더니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다시 읽고 있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4: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賀茂...는 이에야스의 선조 토쿠아미(徳阿弥)..가 오기 전의 마츠다이라(松平)의 본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이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마츠다이라고우(松平郷)라는 지역의 호족으로 마츠다이라 씨가 있었고 그곳에 떠돌이 중(遊行僧)을 하던 徳阿弥가 마츠다이라 씨의 사위로 들어가서 마츠다이라 치카우지(松平 親氏)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이옵죠.

      본문의 주석을 달 때만 해도 저는 미카와 통일 후 겐지(源氏)를 칭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요즘 새로 읽은 책(신 역사군상 12. 토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토쿠가와(徳川)란 성을 처음 칭했을 때만 해도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썼고, 후년 쇼우군(将軍)이 되고 나서야 그때부터 겐지(源氏)를 칭했다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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