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는 소위 전투의 프로페셔널로 센고쿠[戦国]의 세상을 유랑한 사나이이다.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한 사람의 무장이라는 말할 수 없다 – 고 일컬어지는 센고쿠의 풍조가 바로 그의 인생이었다.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시작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1],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각주:2],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주군을 바꾸가며 전전하였다. 이런 식이었기에 사이조우의 행동은 언제나 조직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를 섬기고 있을 즈음의 일이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와 이에야스[家康]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가 일어나, 사이조우는 하시바 히데츠구의 선봉을 맡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선봉이었던 사이조우는 갑자기 최전선에서 철퇴를 하기 시작하여 히데츠구를 화나게 만들었다. 사이조우는,
 “오늘은 적이 대군이고 더구나 강력하기에 여기서는 일단 물러나야만 합니다. 무리하게 공격했다가는 대패로 이어질 겁니다.”
 하고 히데츠구를 설득하였지만 전투를 모르는 히데츠구는 펄펄 날뛰며 사이조우의 진언을 물리친 후 오로지 군사를 돌진시켰다. 사이조우도 또한 히데츠구의 무식과 무모함에 화가 나,
 “에이 좆병진!”
 라는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철퇴했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말대로 히데츠구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여 히데츠구 자신도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는 전장에서 도망치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도망치던 도중 사이조우를 발견하고는 사이조우의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였지만, 사이조우는 단 한마디, “싫습니다.”라고 말하며 말에 채찍질하고는 도망가 버렸다.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섬기고 있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 사이조우는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명(異名)을 얻는 기발한 활약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전해지는데 여기서는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동서 양군의 결전이 시작되기 전날 미노[美濃] 세키가하라 근방 아카사카[赤坂]에 체진 중일 때의 일이다. 사이조우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돌격하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뛰쳐나가 서군의 용사 유하라 겐고로[湯原 源五郎]를 죽이고 와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질책을 받아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대로 얌전히 있을 사이조우가 아니었다.

 그 뒤 아카사카에 도착한 이에야스가 장수들을 소집하여 군의(軍議)를 연 뒤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지금까지 취한 목들을 살펴 봅시다”
 라고 말하였기에 각 부대가 취한 서군 무사들의 목을 검사하게 되었다.
 사이조우가 가져 온 유하라의 목 차례가 되자 이에야스의 옆에 있던 마사노리는,
 “너는 이 단 하나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군령을 어긴 어리석은 놈이다”
 라고 사이조우를 질타하였다. 그러자 사이조우는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였다.
 “사실 근신중인 몸이기에 매일 슬며시 나가서 적과 싸웠고 그럴 때마다 투구를 쓴 목[兜首][각주:3]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근신 중이기에 그 목을 가지고 올 수가 없기에 그런 목들에는 콧구멍이나 귓구멍에 조릿대[笹]를 끼어 넣은 채 버리고 왔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젊은 무사들이 주워와 자신의 공적으로 하였을 거라 사료됩니다.”
 사이조우의 이런 말투에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를 내었지만, 어쨌든 사이조우의 말대로 조사해 보자 정말 조릿대가 꽂힌 목이 17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에는 이에야스도 놀라,
 “오늘부터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름을 쓰라”
 며 이명(異名)을 하사하여 이때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무예를 알려주는 일화로 장도[長太刀] 기술이 있다.
 젊었을 때부터 장도[長太刀]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즐겨 사용하였지만 늙자 체력적인 부담이 있었던 듯 이 장도[長太刀]를 종자(從者)에게 들게 하고 다녔는데, 어느 무사[각주:4]가 이것을 보고 놀리며,
 “이제는 칼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늙으셨구랴. 그 정도라면 실력도 뻔하겠구먼”
 라고 말하자 사이조우는,
 “이거 참 부끄럽소. 하지만 실력이라면 그쪽이 보는 것만큼 늙진 않았소. 내 함 보여드리지”
 라며 재빨리 장도를 뽑아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 무사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사이조우는 젊었을 때부터 아타고 대권현[愛宕大権現][각주:5]을 믿었기에 항상 아타고의 신통력이 영효(靈效)로운 날[縁日]에 자신은 죽을 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대로 1613년 음력 6월 24일[각주:6]에 몸을 깨끗이 하고, 갑주로 몸을 감싼 후 미첨도[薙刀]를 든 채 의자에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60세라고 한다.

가니 사이조[可児 才蔵]
미노[美濃] 혹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라고 한다. 호우조우인 인에이[宝蔵院 胤栄]에게 창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 노부나가[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2.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본문으로]
  3. 아시가루[足軽]나 무가봉공인(武家奉公人)은 머리 방어구로 주로 삿갓[陣笠]였지만, 무사 계급이 되면 투쿠[兜]를 썼기에 투구를 쓴 목은 더 높은 전공의 대상이 되었다. [본문으로]
  4. 카헤에[嘉兵衛]라는 후쿠시마 일족의 인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불의 신. [본문으로]
  6. 양력 8월 10일. 여담으로 블로그 주인장의 생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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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04.09 2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혁신에도 나오시는 분이군요. 어린 마음에 '17명밖에 못 베었는데 무력이 90대야..'라는 진삼국무쌍적인 사고로 보았는데 참 이런 일화가 있을줄이라고는...;;...

    여담이지만 생신이 저랑 가까우시군요ㅇㅇ.. 학생신분으론 8월 생일이니 좀 어정쩡한 면이 있더군요. 다 방학때라 이것 참..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0 0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는 등장이 좀 늦은 편이었습죠.

      이 무장은 전략, 전술 레벨에서 노는 무장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는 곳에서 뛰는 무사더군요. 정말 1:1의 싸움에서라면 피하고 싶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규피님의 생신을 기억하고 있습죠. ^^
      여담으로 저도 학생 때는 그게 참 아쉬웠어요. 학기 중이라면 선생에 따라서는 공책이나 연필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방학 한 가운데다 보니..

  2. 효도롱 2012.04.26 0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일어 원문을 좀 보고싶은데 어디가서 찾을 수 있을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4.26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戦国武将100話』란 책은 1978년에 발간된 책으로 저도 일본에 있을 때 헌책방에서 구한지라, 국내에 이 책을 가진 다른 사람이 있을 거 같지는 않군요.

      혹시 어느 부분의 일본어 원문이 궁금하신가요?
      거기에 이 책은 일화 중심의 책이다 보니 사실적으로 다른 곳이 많은 책입니다. 굳이 일본어 원문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죽고 나서 100년 뒤,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의 학자 겸 정치가 아리이 하쿠세키[新井 白石]는 야스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役] 이후 소극적이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이에야스[家康]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막정(幕政)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였기에 그런 마사노부와 대립하면 주가(主家)인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그 마음 속을 헤아리며, 
 ‘그 당시의 무장으로서는 특별한 일이었다’
 고 야스마사라는 인물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성실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미카와[三河] 무사로, 같은 나이의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쿠가와 군단의 으뜸가는 맹장(猛將)이었다.

 야스마사는 미카와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에 16살의 나이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때 무공을 세운 덕분에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어 이에야스의 이름글자 중 ‘야스[康]’를 하사 받았다. 이후 이에야스가 출진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직속군[旗本] 선봉을 맡았으며, 1566년에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직속군 선봉부대 부대장[御旗本先手侍大将]'이 되어 토쿠가와 군단을 지휘하여 그 용장()을 전쟁터에 드러내게 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秀吉]와 싸운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 때 야스마사는 적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서 격문(檄文)을 만들어 히데요시에게 욕설을 선사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덕분에 출세한 가신[家臣] 주제에 지금은 그 주군의 아들을 상대로 활을 쏘고 있다. 이야말로 팔역의 죄[각주:2]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도(非道)한 히데요시와 같은 편에 서는 자에게는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군의 아들’이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로, 이에야스는 노부카츠를 맹주로 하여 히데요시와 싸웠던 것이다.
 야스마사의 격문을 본 히데요시는 분노하였다.
 “코헤이타[小平太]를 산 채로 잡아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은상은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
라고 사졸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히데요시의 분노도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이유 중 하나는 이에야스에 대한 야스마사의 충성스런 성격이 히데요시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1586년의 일이다. 코마키-나가쿠테가 끝난 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강화를 맺었다. 히데요시는 토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냈다. 그때 함을 가지고 온 사자로 온 것이 야스마사였다. 히데요시에게 알현하였을 때 히데요시는,
 “여어 야스마사 왔는가. 코마키 전투 때는 자네의 잘린 목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네의 충성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네”
 하고 가볍게 언급하였을 뿐이었으며, 거기에 함을 가지고 온 중요한 사자가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같은 해 11월 9일에 종오위하(従五位下) 시키부노타이후[式部大輔]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날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로 불리는 동료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도 서임되었다. 토쿠가와 가신 서임의 시초였다.

 세키가하라 결전 시에 야스마사는 히데타다[秀忠 – 후에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에 속해 있었다
 히데타다 군은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간 이에야스의 본군과 다른 길을 취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서상(西上)하였다. 야스마사 외에 혼다 마사노부,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 등이 속해있었다. 양군은 미노[美濃]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행군 도중 강적이 나타나 히데타다 군의 서상을 막았다.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부자였다.

 기략을 연발하는 사나다 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히데타다 군은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굉장히 불쾌해 했다. 히데타다가 겨우 오우미[近江] 쿠사츠[草津]에 도착했을 때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3일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히데타다는 안절부절 못했다. 히데타다 진중은 침묵이 지배하였다. 이때 결심한 야스마사가 밤에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야스마사는 우선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사죄한 뒤 이어서 소신을 당당히 말하였다.
 “주군의 분노가 만약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 맞추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라면 주군에게도 잘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자가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물리치고자 했으면 어째서 사자를 보내 빈번히 연락을 취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고 이에야스에게 따지며,
 “언젠가는 천하인(天下人)이 되실 히데타다 공이 무공 부족으로 인하여 부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무시한다면 이는 히데타다 공만의 치욕이 아니라 주군 자신에게도 그 비웃음이 쏟아질 것입니다”
 고 논리 정연히 설득하였다. 야스마사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분노를 풀고 다음 날에는 히데타다와 대면하고 격려하였다.
 히데타다의 한없이 기뻐하였다. 자신의 가문이 있는 한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야스마사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야스마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미담과 같은 이야기 외에 야스마사에게는 이에야스에 대한 반골심을 나타내는 일화도 전해진다.
 1606년 4월, 야스마사의 병이 중하여 이에야스, 히데타다의 병문안 사자로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가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다. 사자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이불 안에서,
 “저도 장(臟)이 썩어 이렇게 추해졌습니다”
 고 빈정대며 말했다. 예전 작전회의에서 혼다 마사노부가 발언하였을 때 마사노부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된장이나 소금이 늘고 주는지만 신경쓰는 장이 썩은 사람이 전투에 관해서 무엇을 안다고 말을 하는가?”
하고 매도한 적이 있었다.
 병상에서의 말은 마사노부 등을 중용하는 이에야스를 비난하는 것이고 하였으며, 평화로운 시대에 들어와 잊혀져 가는 존재인 예전 전쟁터 용사의 자조(自嘲)이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 중 한 명. 1581년 토오토우미[遠江] 타카텐진 성[高天神城]를 공격하였을 때 적의 수급 40을 취했다 한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 – 후에 칸파쿠[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군을 물리쳤다. 1590년 토쿠가와 에야스[徳川 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 10만석에 봉해졌다. 1606년 악성 종양을 앓아 5월에 죽었다. 59세.

  1. 잇코우 종[一向宗 - 정확히는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 반란. 미카와 잇코우잇키[三河一向一揆]는 세금을 내지 않던 미카와의 혼간지 계열의 절에 세금 징수하려 하다가 그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 [본문으로]
  2. '八虐'라고도 쓴다. 율령제 시대에 가장 무거운 죄. 기본 사형이며 감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텐노우[天皇]에 살해에 관한 모반(謀反), 황거나 황릉에 관한 불경인 모대역(謀大逆), 일본 국가에 관한 반란획책인 모반(謀叛), 신사에 관한 불경인 대불경(大不敬), 존속살해인 악역(悪逆), 대량 살인죄인 부도(不道), , 존속살인 이외에 존속에 관한 죄인 불효(不孝), 주군에 관한 배신인 불의(不義)...인 여덟가지 죄. 여담으로 이중 존손에 관한 악역, 부도, 불효의 경우 당시 일본에 유교논리가 없었기에 사법(死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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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1.10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쌍류의 게임에서는 언제나 클론장수(..;)의 안습함에 사실 신장의야망류에서도 전용 전법도 없고 참 어정쩡하다 싶었는데.. 에, 역시 게임은 게임이니까요. 실제론 역시 4천왕 다운 대인배스러움을...

    여담이지만 암이란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수년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아.. 역시 문제는 세키가하라였으려나(..;)

    그나저나 그저께 하마마츠도 지나갔었는데 왜 이에야스가 떠오르지 않았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천왕 중 하나가 클론이란 말입니까!!!
      ...하긴 사천왕 중 No.1격인 사카이는 나이도 나이니 만큼 별개로 치고, 톤보키리라는 전용무기를 장착한 혼다 타다카츠나, 적비대[赤備え]를 둔 나오마사와 비교하면 좀 임팩트가 딸리긴 하는 편인 듯.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니...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개연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타다 군의 실질 No.1 참모 격(경험이나 명성에 더해 동원한 군사도 히데타다 직속군 15000을 제외하곤 토쿠가와 가문에서는 최다인 3000)이었을텐데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없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존경하지만 아산 지날 때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괘의치 마시길...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0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휘관들을 많이 보유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면에서 항우나 유비, 제갈량이 결국 천하를 못 잡은 것은 그런 인재의 폭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요.

    ( 아, 물론 촉나라는 인재가 넘쳐도 국력이 부족해서 졌겠지만 )

    대망팬들에게는 야스마사보다도 고헤이타가 더 익숙하다는 점에서 대망은 획기적 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인재도 인재지만 그것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보급, 행정, 의사결정에 필요한 소통 등등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달리(그러니까 대망이 나왔던 시대) 요즘 소설류는 통칭보다는 이미나[諱]를 주로 쓰는 것 같더군요. 제가 읽은 같잖은 소설만 그렇게 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개인적으로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보다는 시바타 곤로쿠[柴田 権六]가 아직은 더 익숙하더군요. ^^...저도 대망이 첫 일본 소설이거든요.

  3. 골룸 2009.11.10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다다카츠와 더불어 전란의 시기에 용감히 싸운 무사였죠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도도다카토라 처럼 변화무쌍한 사람도 있는데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주석 단 거 다 날라가고, 나름 교정했던 것도 그대로군요... 초벌 올려서 실례했습니다....그럼에도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이에야스 탓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타다카츠나 야스마사가 전쟁터만의 인물로 인식되긴 하지만...

      후년 에스파니아의 돈 로드리고가 오오타키 성의 거대한 모습에 타다카츠의 둘째 아들 타다마사가 왕인 줄 알았다는 것이나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여러 장수들에게 수 많은 편지를 보내며 동군 측으로 끌어 들인 것을 보면 타다카츠의 정치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야스마사도 또한 이에야스가 행한 칸토우 다이묘우 배치의 틀을 제시한 인물인 것을 보면 그 역시도 야전공성만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정치력과 실적있는 인물들에게 아무런 상이나 영지 가증도 없이, 거기에 정치 중추에서 쫓아낸 이에야스를 아무리 주군이라곤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유교의 '충'이란 논리가 도입 이전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 있었을 것 같구요.

    • 골룸 2009.11.12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찌 보면 매정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2대째로 넘어가는데 좀 부담이 될만한 인물들을 사전에 정리 한 것도 같고
      아무튼 그런 와중에도 도쿠가와 가문내에 큰 문제 없이
      혼다나 사카키바라 가문이 계속 됐던 걸 보면
      가문내의 결집이나 충성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뭐 이에야쓰 입장에서야 쓸만큼 다 쓰고 어느 정도 포상도 한거니까요
      계속해서 느끼는거지만 이에야쓰는 참 짠 사람인거 같아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 사극 용의 눈물....인가에서 태종 이방원이 공신들을 내치면서 하는 말이....
      "저들이 기세등등하여 세자를 업신여길 것이 두렵소이다"....비슷하진 않지만 저런 뉘앙스였을 것입니다.

      공신들을 토사구팽하는 제왕들의 맘은 저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련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이에야스는 천하인의 그릇이 아니라며...
      "그는 가신들에게 영지를 아낌없이 나눠줄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를 잡진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짠 사람이긴 했나 봅니다.(...무엇보다 우지사토가 실제로 저런 말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4. 나라 2009.11.11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의 최대의 잘못은 히데타다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야스의 중뿔난 마음도 이해할만 합니다. 결과적으론 세키가하라 결전에 승리했지만, 히데타다군이 제대로 오지 못한 것은 확실히 불안 요인이었으니까요. 히데타다군이 제 시간이 왔으면 완승을 쉽게 보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2 0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다만 잘 나가는 부잣집 도련님, 말 좀 듣게 하기는 엄청 힘들 듯 싶습니다.

      사족으로....세키가하라 때 토쿠가와 가문의 실질적 전투집단은 이에야스 휘하에 있던 토우산도우[東山道] 방면군이 아니라, 히데타다가 이끌던 나카센도우[中仙道] 방면군이라 하더군요. 전투에 적합한 토쿠가와 가문 내의 만석 이상을 가진 무장들은 타다카츠와 나오마사를 제외하곤 히데타다 휘하에 속했다고 합니다.

      만약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히데타다 군이 있던 전쟁터에 있던 상태였다면 후쿠시마 마사노리, 쿠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토쿠가와 군만으로 승부를 결정지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또한 나중에 후쿠시마, 쿠로다 등에게 전공에 따른 막대한 영지를 줄 필요도 없었을 테고요.

  5. 나라 2009.11.12 1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나중에 후쿠시마에겐 제대로 엿을 먹이지 않습니까;;;
    히데타다가 제 시간에 오고 서군이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항상 그게 궁금하더군요. 만약 미츠나리가 이겼으면 가마쿠라 시대의 싯켄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이에키[改易]라는 손이 한번 더 가면 그 만큼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에도가 아닌 자기 영지에 있을 때 카이에키 영이 떨어졌다면 과연 역사처럼 순순히 응했을지는 궁금합니다만...

      뭐 그래서 참근교대라던가 일국일성령이라는 보험이 있었긴 합니다만, 이외로 히데요시 은고 다이묘우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면 서국에 몰려 있었던 만큼 다시 전화의 시대로 돌아갈 확률이 0%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불씨를 세키가하라에서 히데타다가 늦음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이라...개인적으로는 서군이 승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미 서군은 높은 곳을 전부 제압하여 동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포위하고 있었고, 동군은 전부 그 아래 혹은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던 입장인지라...
      (포진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ja/0/05/Sekigahara.png )

      장기전으로 가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군사들이 동군 후방 보급을 끊을 수 있는 반면 서군은 바로 뒤편이 이시다 미츠나라의 영지인지라 보급면에서는 서군이 비교적 자유롭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는 어땠을까요...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나중에 정쟁에 패하여 한때의 인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6. dsfsd 2012.03.23 04: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 - 서군 - 시마즈 모리 - 임진왜란의 주역들일 뿐 아니라 나중에 도쿠가와 막부 전복하고 메이지유신으로 조선을 다시 쳤던 그 뿌리 아닙니까 과거의 일이지만 고소하다는 얘기밖에 안나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

      ...근데 본문글과 리플은 좀 매치가 안 되는군요. 단지 이름이 거론되어서인가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알기 힘들군요. 인과응보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인가요?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는 가문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섬겨온 무공파(武功派)에 사천왕(四天王)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전형적인 센고쿠[戦国] 무장이다. 사서(史書)가 전하는 타다카츠는, ‘어려서부터 전쟁터에 향하길 50여 번에 이르렀으며, 뛰어난 무공에 공적이 많았음에도 한번도 상처를 입은 적이 없었다’는 용장이다.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으니 중국산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각주:1]
 이도 타다카츠의 무공을 전하는 말로써 유명하다.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合戦] 후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군이 타다카츠의 활약을 보고 절찬한 문구이다.

 타다카츠는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전을 치렀고[각주:2], 15살 때 미카와[三河] 나가사와 전투[長沢合戦][각주:3]에서는 적의 수급을 거두었다.[각주:4] 이때 숙부인 타다자네[忠真]는 타다카츠의 그릇이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며, 이에야스[家康]도 이에 동감하였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타다카츠가 씩씩한 면목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1561년, 타다카츠 14살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동맹을 맺기 위해 백여 명의 가신들을 이끌고 키요스[清洲]로 향했다.
 키요스 성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한때 오와리에 인질로 와 있던 미카와의 이에야스 행렬을 구경거리 삼아 몰려들어 시끌벅적거리며 떠들어댔다. 이에야스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동행했던 타다카츠는 그런 구경꾼들을 닥치고 못 본체 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가 탄 말 앞에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장도(長刀)를 양 손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 계시는 분은 미카와의 이에야스 공이시다. 노부나가 공과 친선을 맺기 위해 먼 길을 오신 분에게 이 무슨 무례란 말인가!?”
 어린 소년의 이 위풍(威風) 앞에 수 많은 구경꾼들도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때, 타다카츠는 25살이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대군에 맞서 토쿠가와 군은 대패를 당하고 거성(居城)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하게 되는데[각주:5], 이럴 때는 적의 추격을 막는 후군[殿]의 역할이 중요하며 또한 어려웠다. 타다카츠가 이 어려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타다카츠는 적과 아군 사이의 한가운데에 말을 타고 가 적진을 노려보며 아군의 퇴각을 성공시켰다. 후에 타케다 측의 하지카노 덴에몬[初鹿野 伝右衛門][각주:6]이 회고하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때 후군의 타다카츠를 추격하고자 했지만 타다카츠의 공포스러운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톤보키리[蜻蛉切り]라는 창을 한 손으로 휘두르며 저승사자와 같은 형상으로 노려보았기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도,
“오늘 헤이하치로우는 평소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는 필시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각주:7]이 우리 편을 들어서일 것이다”
 고 하며 그 분전을 칭송했다고 한다.

 참고로 타다카츠의 창은 창신이 길어 2장(약 6m)정도 되었고, 잠자리[각주:8]가 창 날에 부딪혀 두 동강이가 난 다음부터 ‘톤보키리’[각주:9]라는 이명을 얻게 된 명창이었다. 타다카츠는 그런 창을 가볍게 휘두를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한다.
 나중에 늙어서의 일이다. 거성(居城)이 있는 이세[伊勢] 쿠와나[桑名]에서 아들인 타다토모[忠朝]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 타다토모에게 배의 노로 물가에 있는 갈대를 베어 보라고 하였다. 타다토모가 한 손으로 노를 들고 휘둘렀다. 갈대는 약 5.4미터정도 쓰러졌다. 하지만 타다카츠는, “정말 힘이 약하구나”라고 웃으며 말한 뒤 이번엔 자신도 한 손으로 노를 들고 휘둘렀다. 그러자 갈대는 마치 낫으로 벤 듯이 깨끗이 절단되었다고 한다. 그 노는 보통 사람 둘이서도 쉽게 들어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은 미카타가하라의 패전에 버금가는 이에야스 생애에서 잊지 못할 큰 위기였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한 이 6월 2일, 이에야스는 사카이[堺]에 있었다. 전날 아즈치[安土]의 노부나가를 방문한 뒤 노부나가의 주선으로 쿄우토[京都] 근방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쿄우토는 이미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아케치의 제압 하에 있었다. 흉보는 토쿠가와 가문의 어용상인 챠야 시로우지로우[茶屋 四郎次郎][각주:10]를 통해 사카이에 있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이때는,
 “이리 된 이상 배를 갈라 오다 님의 뒤를 따르겠다”
 라면서 까지 각오를 정했지만, 타다카츠가 이를 말렸다고 한다.
 “오다 님의 후은에 응하려 하신다면 오히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본국 미카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뒤 군세를 이끌고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치는 것이 돌아가신 오다 님을 위한 공양이 될 것입니다”
 라는 타다카츠의 진언에 오카자키[岡崎] 귀성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일행은 이가[伊賀]의 산길을 통해 지역민들의 회유하면서 귀국에 성공한 것이다.

 1584년 3월,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와 손 잡고 히데요시[秀吉]와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타다카츠는 코마키야마[小牧山] 산을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강의 북편을 건너는 것을 보고 불과 800[각주:11]의 병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후방의 이에야스가 부대를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과감히 히데요시 군에 철포를 쏘아대며 공격하였다. 그 호담함에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감탄했다고 한다.[각주:12]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이후, 토쿠가와 가문이 패권을 확립하는데 활약한 무공파의 면면들은 차츰 활약할 장소를 잃어갔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를 대표로 하는 행정사무의 관료파(官僚派)가 대두한 것이다. 그런 풍조를 타다카츠는 참을 수 없었다. 세키가하라 후 이세 쿠와나에 봉해진 타다카츠는 에도[江戸]에서 사자(使者)를 맞이하였을 때,
 “답례로 에도에 오르고 싶으나 요즘 허리가 빠져서 갈 수가 없사옵니다[각주:13]"
 라고 답했다고 한다. 평소 ‘사도의 겁쟁이[佐渡の腰抜け]’라고 경멸하던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를 빈정대며 한 말이었다.

 또한 타다카츠는 늙어서,
 “문치파의 행정관[代官]은 연극에서 다이묘우[大名狂言] 역을 하는 배우들 같은 자들이다[각주:14]
 고 비판하며 막부의 중추 각료들을 계속 비판하였다.

 예전 전쟁터에서의 영광이 아무리 시간이 흘른 뒤라도 타다카츠의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을 것이다.

[혼다 다다카쓰(本多 忠勝)]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헤이하치로우 타다타카[平八郎 忠高]의 아들. 이에야스[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영지를 옮겼을 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10만석에 봉해진다. 1598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었을 때 유품으로 칼을 한 자루 받았다. 1601년 이세[伊勢] 쿠와나[桑名] 15만석[각주:15]에 봉해졌지만 1610년 죽었다. 63세. 여담으로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와는 같은 일족이지만 계통이 다르다[각주:16].

  1. 家康に過ぎたるものが二つあり、唐の頭に本多平八. 중국산 투구[唐の頭]는 티벳 근처에서 서식하는 소과의 야크(Yak)라는 축생의 꼬리털로 장식한 투구로, 당시 이에야스뿐만 아니라 미카와 무사들도 수집하고 있었다고 한다. 타케다 측 군기물인 갑양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미카와 무사 10명 중 7,8은 이 당나라 투구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1560년 오오타카 성[大高城] 군량 반입 때. [본문으로]
  3.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부하로 미카와 요시다 성[吉田城]의 성주 오하라 시게자네[小原 鎮実]와의 전투. 요시모토가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미카와의 호족들이 이마가와 씨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하자 우지자네는 시게자네에게 그런 호족들의 정벌을 명해 벌어진 전투. 단 이에야스 측과 이때 싸웠는지는 미묘. [본문으로]
  4. 처음엔 숙부 타다자네가 조카인 타다카츠에게 공적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자신이 쓰러뜨린 적을 타다카츠에게 목만 베라고 하였다. 타다카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적진에 돌진하여 직접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확히는 이에야스가 똥을 지렸다는 미카다카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가 아닌, 그 전에 일어난 후타마타 성[二俣城]의 전초전 히토코토자카 언덕 전투[一言坂の戦い] 때의 일. 이에야스는 타다카츠 등 3000을 이끌고 정찰 나갔다 타케다 군과 조우. 이 책의 저자는 미카타가하라 전투라 여기고 대패라고 하였으나, 이 히토코토자카 언덕 전투에서는 포위 당할 낌세를 보자 냅다 퇴각. 즉 대패는 아님. [본문으로]
  6. 이름은 마사츠구[昌次] [본문으로]
  7.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8. 일본말로 잠자리를 톤보[蜻蛉]라고 한다. [본문으로]
  9. 창 날 끝에 앉았는데 그 날카로움에 미끌어져 반토막이 났다고도 한다...오히려 이쪽이 더 유명한 듯. [본문으로]
  10. ...여담으로 이때 이에야스의 목숨을 구한 초대 챠야 시로우지로우의 둘째 아들 3대째 챠야 시로우지로우(2대는 장남이나 요절)는 이에야스에게도미 튀김을 강추하여 죽게 만든다. [본문으로]
  11. 300이라고도 500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또 다른 이야기로는 사이에 흐르는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는 등 대담한 행동을 하였기에, 죽여 버리자는 히데요시 측 무장들의 말을 물리치며 히데요시는 "저런 용사는 나중에 내 편이 될 수 있으니 살려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13. 일본말로 겁쟁이를 코시누케[腰抜け]라고 하는데 이는 허리[腰]가 빠진다[抜け]는 말을 합친 것이다. 앞에 적을 앞에 두고 쫄았을 때 허리가 뒤로 빠지는 모습에서 따온 말. [본문으로]
  14. 아마.. 겉만 그럴 싸 하고 실제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을 비유한 것 같음...大名狂言은 멍청한 다이묘우가 바보짓 하는 것을 비웃는 내용의 연극 종류를 말한다고 함. [본문으로]
  15. 10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6. 마사노부의 7대조, 타다카츠의 8대조는 혼다 스케마사[本多 助政]로 같다. 여담으로 타다카츠는 마사노부를 혐오하여 같은 혼다긴 하여도 같은 핏줄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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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08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천포로 빠지는 얘기지만 천도에서의 다다카쓰의 신창은 거의 사기더군요 ( ..)

    사타케 요시시게의 귀창으로 대응을 해봤지만 사정없이 녹아내리는 우리의 병력 ㅜ.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9 1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창과 귀창의 대결이라... 무협지의 한 장면 같군요. ^^

      역시 그런 놈과 맞붙을 때는 갑옷 업그레이드(胴丸??) 한 다음이나 맞붙어야 할 듯.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1.09 2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슴뿔투구 라는 챠밍 포인트(?) 때문인지 인상이 강한데 저는 어째 맨먼저 생각는건 꽃사슴이..(....)

    무쌍에선 전용 bgm이 들리면 괜히 움찔해서 주위를 살펴봅니다;;;
    (그렇긴해도 bgm은 참 좋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0 04: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저 사슴뿔 투구[鹿角の冑]는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맘에 드는 그림이 나올 때 까지 9번을 그리게 해서 나온 것이 저 그림일고 합니다(그 전 8폭의 그림은 전부 쓰레기 통).

      타다카츠가 쿠와나 성에 있을 시에 토사파[土佐派]의 화가에게 그리게 한 그림으로, 주제는 '세키가하라에 출전한 타다카츠'라 합니다. 즉 세키가하라 때 타다카츠는 저런 갑주와 투구를 썼었다는 말입죠.

      무쌍 시리즈는 초대 삼국무쌍 때 달려드는 여포에게 공포를 느낀 나머지 그 다음부터는 안 하고 있습니다.
      여포가 너무 강한 나머지 구석에서 숨어서 활만 쏘고 있었는데 몇 번 맞던 여포가 이쪽을 쳐다보고는 달려와서 '조운'이었던 절 죽이더군요. 화살 쏘는 시점에서 달려오는 여포는 공포 그 자체였습죠.....는 경험담이긴 하지만 그 이후 그런 류의 게임은 잘 안 해서...(늙어서 손이 느려진 이유도 없지않아 있긴 한 것 같기도 합니다)

  3. ckyup 2009.11.11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비에겐 자룡, 이에야스는 헤이하치로, 그 유명한 혼다얘기군요. 잘 읽었습니다. 근데 센코쿠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며 항상 궁금했는데요 - 장수끼리 소위 '맞짱'은 없었나요. 삼국지에서 관운장이 안량과 문추를 베었듯이, 뭐 예를들어 '백전의 노장 혼다헤이하치와 칠본창의 거두 기요마사와의 한판' 이딴거 말이죠. 생각만 해도 재밌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5 16: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다카츠는 보통 장비와 비교되더군요.

      장수끼리의 맞짱은 없었습니다. 이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가 활약하던 12세기때도 예전엔 그런 일기토[一騎打ち]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거 없다...고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 重忠 - 당시엔 엄청난 武의 소유자로 유명]에게 말해 준 노병사가 있을 정도로 과거의 유물이었습죠.

      ==================================================
      11월15일 추가:조금 추가합니다.

      삼국지연의와 같은 장수끼리의 맞짱은 없었습니다만 특이한 예로 전투 중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상대편 지휘관 중 하나를 직접 죽인 적은 있습니다.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 - 보통 '노부유키'로 유명]가 하야시[林] 형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이노우 전투[稲生の戦い]에서, 노부나가는 반란군 지휘관 중 한명이며 하야시 형제 중 동생인 하야시 미마사카노카미[林 美作守]를 직접 쓰러뜨리긴 하였습니다만 이도 난전 중 일어난 일이며 또한 스기와카[杉若]라는 부하의 종이 가세해 주었죠(즉 2:1로)

      ===================================================
      타다카츠도 젊었을 때는 물론 직접 창들고 싸우긴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죠. 아들이 창술 연습하는 거 보고 화를 내며,
      "전투에서 창을 드는 것은 무명소졸이나 할 일이고, 너희들 쯤 되는 신분이라면 사람들을 부리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나도 무명소졸이었을 때는 직접 창을 쥐었지만 지금과 같은 신분이 된 지금은 창을 쥘 일도 없으며 지휘채를 휘두를 뿐이다. 너희들도 헤이하치의 뒤를 이을 생각이 있다면 지휘채를 휘두르는 법, 사람을 부리는 법을 훈련하는 편이 좋다. 무명소졸이나 하는 연습은 할 필요가 없다"

  4. 써니데이 2009.11.15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인 토시이에와 같은 일본 사극보면서 항상 느끼던거군요 ..
    창의 명수로 알려진 토시이에가 저 나이에 지휘는 안하고
    창 들고 병사들 찔러죽이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모습만 나오니..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5 18: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비주얼 적으로 그게 좀 멋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나저나... 토시이에로 나온 카라사와 토시아키, 마츠로 나온 마츠시마 나나코 둘 다 좋아하는 배우에, 관심있는 시대이지만 아직까지 전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네요.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들 중에서도 용맹함으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무사였다.
 나리마사가 죽은 뒤의 일이다. 나리마사가 일평생 혐오했던 정적(
政敵) 히데요시(秀吉)도 나리마사의 용맹함을 인정할 정도였다.
 오다와라(
小田原) 정벌 때의 일화이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부대표식(馬標)을 [금박이 칠해진 삼단 갓(三階菅笠)]으로 바꾸고 싶다며 히데요시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 부대표식은 대단한 무용(
勇)을 자랑하던 나리마사의 부대표식이다. 아주 뛰어난 공을 세우지 않는 한 이것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어떤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줄 수도 있지"
 고 말했다. 우지사토는 그 말을 듣고 결사적인 활약을 펼쳐 명예로운 [삼단 갓]을 허용 받았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선조는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명장 사사키 모리츠나(佐々木 盛綱[각주:1])라고 한다. 오다 가문(織田家)에서는 늦깎이 출세를 하였다. 노부나가의 [검은 화살막이 부대(黒母衣衆)]에 발탁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였다. 이 즈음 노부나가는 옆나라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공격하였는데 나리마사는 이 전투에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함께 사이토우 측의 장수 이나바 마타에몬(稲葉 又右衛門)을 쓰러뜨리는 공을 세웠다. 그런데 수급을 취하는 단계가 되어서 나리마사와 토시이에는 상대방이 더 잘했다며 서로 공을 미루기만 하였다. 거기를 우연히 지나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서로 공을 미루는 말싸움을 지켜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주워서는 노부나가에게로 가 본 그대로를 말했다. 노부나가는 이 세 명에게 각각의 행동에 대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각주:2].

 나리마사는 그 후 입신출세하여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与力[각주:3])가 되어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자 그 후 자신의 운명을 카츠이에에게 걸었다. 나리마사는 히데요시를 혐오했다. 성격도 단순하여 한 가지를 생각하면 오로지 그것만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어 정치정세를 두루 살펴보고 행동하는 요령이 부족한 듯했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후세에 나리마사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전진미답의 일본 알프스[각주:4] 돌파였다.
 히데요시와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1584년이었다. 이 전쟁이 화해로 끝난 것을 안 나리마사는 철저항전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에게로 달려가려고 한 것이다. 당시 엣츄우에 있던 나리마사가 하마마츠에 가기 위해서는 에치젠(越前)에서 오우미(近江)를 거쳐 미노, 오와리(尾張)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거기는 전부 히데요시의 세력이 있는 적지였다. 남은 길은 중부 산악지대를 종단(縱斷)하는 직선코스였다.

큰 지도에서 일반적인 토야마(富山) 하마마츠(浜松) 루트 보기

 때는 11월[각주:5]. 엄동의 계절이었다. 몸의 반 이상이 빠질 정도로 쌓인 눈 덮인 험준한 일본 알프스를 돌파하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쉽지 않다. 살아서 하마마츠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했다. 나리마사는 그것에 도전하였다. 나리마사 일행은 험난한 쿠로베(黒部)의 비경에 들어섰다. 자라토우게(ザラ) 고개라는 난소를 극복하여 하리노키토우게(木峠) 고개를 넘어 간신히 시나(信濃)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것도 [인기척 끊겨 지나온 곳은 모두 산과 계곡(るところ皆山谷えて人煙無し)]라는 깊은 산속에서 나무꾼의 집 한 채를 발견하는 행운도 있었다. 이 나무꾼의 안내로 길을 잃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시모스와(下諏訪)를 거쳐 12월이 돼서야 하마마츠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와 만나자 나리마사는 노부나가에게 하사 받아 보물처럼 여기던 작은칼(脇差)을 이에야스에게 바치며, "내 영지인 엣츄우에 히데요시가 공격해 온다면 부디 원군을 부탁 드리옵니다"
 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한편, 토쿠가와와 삿사가 한 편을 이루면 예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합쳐진 만큼의 파괴력을 가져 히데요시 따위는 단번에 멸할 수 있을 것이오 – 하며 열변을 토했다 한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 확답을 피했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아 다음 해 1585년 히데요시가 엣츄우에 침공했을 때는 결국 이에야스의 원군은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까지 히데요시에게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용서하여 히고(肥後) 전역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마사는 영내(領內) 호족 반란의 책임을 요구 받아 영지(領地) 몰수와 함께 셋츠(摂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자살을 명령 받았다.

[삿사 나리마사]
1516년생. 오와리(
尾張) 출신.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지만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秀吉)에 대항하다 패하여 항복. 1587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성주. 다음 해 1588년 5월 자살. 73세[각주:6].

  1.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최측근 중 한 명. 겐페이 쟁란기 때의 활약으로 후에 에치고(越後)와 이요(伊予)의 슈고(守護)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 이야기는 [상산기담(常山記談)]과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것으로,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의 '쥬우시죠우 전투(十四条合戦)' 항목에는 稲葉又右衛門を、池田勝三郎・佐々内蔵佐、両人としてあひ討ちに討ちとるなり(이나바 마타에몬을 이케다 카츠사부로우(나중에 코마키-나가쿠테에서 죽는 사람), 삿사 쿠라노스케 둘이서 물리쳤다)고 나온다. 저 마에다, 삿사, 시바타는 나중에 호쿠리쿠(北陸)에서 함께 활약한 무장들이라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다. [본문으로]
  3. 이 즈음 오다 가문의 경우 각 유력 부장에게 파견된 오다 씨의 직속 신하를 뜻한다. 물로 세세히 들어가면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노부나가나 노부타다가 영지를 인정하였다. [본문으로]
  4. 윌리엄 골란드(William Gowland)라는 인물이 이 산맥을 조사한 후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 알프스'란 이름이 붙기 전에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 현 '키타(北) 알프스'), 키소 산맥(木曽山脈 – 현 '츄우오우(中央) 알프스'), 아카이시 산맥(현 '미나미(南)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본문으로]
  5. 일본 구력. 현재로 치면 12월 하순 쯤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덕편년집성(武徳編年集成)]과 [무가실기(武家事記)]에 따르면 1516년생으로 죽을 때 73세가 되지만,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과 [삿사 군기(佐々軍記)]에는 1536년생으로 되어 있어 죽을 때의 나이는 53이 된다. 일본어 위키는 1536년생을 채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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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07.26 1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 73세 설도 있었습니까. 처음 알았습니다@.@

    랄까, 결국 히데요시가 할복신킨것 보면 舊怨이 남아있던걸지도 모르겠군요. 뭐 결국 가토와 고니시 좋게 만들어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마는(..)

    그건 그렇다 쳐도 저 당시에 저 계절에 일본알푸스 돌파라니.. 뭔가 저것만으로도 중세 산악사에 신기원을 세울만한 일 아닙니까(@>@!) 어째서 이런게 잘 알려지지 않은거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7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가진 책들에서는 몰년 73세의 것들이 많은데(...문제는 쇼우와(昭和) 시대의 것들이지만요 ^^) 위키는 53세설을 취하고 있더군요.

      음...어땠을까요... 아직 개인적으로 일본의 서적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인데, 김성한 작가님의 소설 '임진왜란'에는 흥미로운 해석을 하셨더군요. 삿사 나리마사를 히고에 앉힌 것이 조선침략시에 선봉장으로 쓰기 위함이었다고. 잘 생겼고 뛰어난 전술적 역량에 주변 무장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고... 인기가 있었는지 잘 생격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문의 일화에도 나와 있듯이 나리마사의 용맹함을 인정하고 있었을 정도이니 아주 무책임한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김성한 작가님의 '임진왜란'은 지금 봐도 대단합니다. 아직도 이시다 미츠나리가 임진왜란 때 주도적인 침공론자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일본에서도 있지만 저 소설에서는 시작부터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전쟁 저지를 위해서 노력하거든요...히데요시 가족들에 관한 것은 시바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을 많이 참조한 듯 싶지만요 ^^ )

      나리마사는 더군다나 무려 '가마'를 타고 넘었다고 합니다. ^^ ...아랫사람들만 불쌍한 법...
      제가 가진 책들에는 94명설과 60여명설이 있는데 94명설에는 십 수명의 동사자가 나왔다고 하며 60여명설에는 약 반 수가 죽었다고 하네요.

  2. 나라 2009.07.26 1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 봤지만... 저 산을 겨울에 넘어가다니 후덜덜(..) 지금도 장난 아니던 걸요.
    니이가타현 눈 내리는 산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의 막막함을 생각하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7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오~ 그 드라마에서는 나왔나 보군요...하긴 드라마에서는 토시이에의 라이벌 격인 인물로 나왔다고 하니... 괜찮은 드라마일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연이 안 닿아 보질 못했네요.

      니이가타 현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던가요? 본문에서 나온 하리노키토우게 고개(이곳은 현재 나가노 현)에서 길을 잃어 좀 돌기는 했다고 하더군요.

  3. 나라 2009.07.27 16: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뇨 제가 거기서 길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어서(...) 눈이 가득가득 쌓이는 데 정말 막막하더군요.

  4. 써니데이 2009.07.27 2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나리마사와 더불어 그 일행들이 걸어서 산을 넘는걸로 나오죠.
    이 드라마가 나리마사, 토시이에, 히데요시 세 명 주축으로 한 드라마라..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9 1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자 주인공(카라사와 토시아키唐沢 寿明), 여자 주인공(마츠시마 나나코松嶋 菜々子) 둘 다 좋아하는 배우라 보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 강한데... 띄엄띄엄 본 적만 있고 아직 전부 다는 못 보았네요.
      나리마사에게도 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졌나 보군요.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토시이에의 진실한 친구로서 등장하더군요.
    며칠전 아들과 함께 실종된데 이어 각성제 복용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카이 노리코가 그 작품에서 오네(네네) 역으로 출연했었죠;;

    카라사와 토시아키를 거기서 처음 보고 얼마전 <하얀 거탑>을 감상했는데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우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던데 그의 대단한 연기력이 드러났던 명작이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4: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카이 노리코...는 예전 저 고딩 때도 한국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하기는 좀 그렇군요. 당시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이텔 같은 곳도 아직 생기기 전인지라...하여튼 이름은 알고 있던 처자였습죠. 당시는 주전법자(酒井法子)라고 그냥 한자로 읽던 기억이 나는군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조금 삐둟어진 앞니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라사와 토시아키...는...정말 재미있는 배우더군요.
      그분 부인이 또 유명 여배우로 야마구치 토모코(山口 智子)라고 있는데, 워낙 인기인들이다 보니 불화설 또한 자주 퍼지던 중 야마구치가 잠깐 수영복 입은 방송이 나와 화제가 되었고(나이에 걸맞지 않은 몸매로), 다른 방송일로 기자들에 둘러쌓인 카라사와에게 그런 것이 화제가 된다고 하자, 카라사와 왈 "아 그래요? 전 매일 밤 그 보다 더 굉장한 것을 보아서요"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카라사와 보면 얼마나 웃기고 재미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ex; smapxsmap에서 비스트로 스마프에서 멤버들과 개그대결 펼치는 거 보면 정말 웃깁니다).

      .....만 이렇게 말하는 저는 아직 그가 배우로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네요. '토시이에와 마츠'도 안 보았고 '하얍 거탑'도 안 보아서..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가 출세하는데 있어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었다는 것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나가마사의 부인 오야야[おやや]가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ねね=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와 배다른 자매[각주:1]였기에 나가마사와 히데요시는 동서지간이 된다. 친족이 적었던 히데요시가 나가마사를 중용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군사에 관해서도 담당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외교나 민정가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민정가로서의 나가마사를 나타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후에 이 아사노 나가마사의 후손으로 겐로쿠[元
1688~1703] 시대 소위 '아코우 사건([赤事件][각주:2]'을 일으켜 당시 세상에 충격을 준 하리마[播磨] 아코우[赤穂] 5만석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나가노리[匠頭 長矩[각주:3]]가 있는데, 이 사건 최대의 주역이 되는 가로(家老)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内蔵[각주:4]]가 영내(領內) 순시를 위해 아보시[網干]라는 곳에 들렸을 때이다. 이 마을 중심가의 한 곳만 공터가 되어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궁금히 여겨 마을사람에게 물어보자,
 "이곳은 아사노 단죠우[
=나가마사]님이 히메지[路]에 계실 적에 그분의 저택이 있던 자리옵니다.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기에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곳은 풀 한 포기 손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고 답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휘하가 된 나가마사는 히데요시가 1573년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옛 영토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12만석을 하사 받자 히데요시에게서 120석을 받았고, 다음 해인 1574년 히데요시가 거성을 나가하마 성[長浜城]으로 옮긴 후 노부나가와 함께 전쟁터를 전전하였기에 히데요시가 부재인 동안 이 성을 다스릴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거기에 하리마[播磨], 츄우고쿠[国] 공략에서는 히데요시와 행동을 함께하며 전선부대장으로서 용전분투하였고 또한 히데요시의 거성 히메지 성[路城]의 보충 공사를 담당하거나 하였다.

 1586년은 아사노 가문의 장래를 보았을 때 기념할만한 해가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접촉하여 절친해지는 계기가 되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화해(和解)를 꾀하며 아비 다른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각주:5]를 이에야스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교섭성립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녀 이 1586년의 결혼을 성립시켰는데, 이때 성실히 임하는 모습을 이에야스에게도 인정받아 나가마사는 한층 더 명성을 높이게 된다.

 임진왜란 때 나가마사는 본진에서 근무하며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이때 세운 망루()가 후에 카라츠 성[唐津城]으로 옮겨졌는데 나가마사의 관도명(官途名)인 단죠우쇼우히츠[正少弼]의 이름을 따 단죠우망루[正櫓]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나고야에 있을 때 나가마사는 히데요시를 화나게 하여 자칫하면 죽을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서전의 파죽지세에 콧대가 높아진 히데요시는 작전회의 자리에서,

 "일본은 이에야스에게 맡기고선 나는 30만 군세를 이끌고 조선에 건너가 곧바로 명의 수도에 진격하여 황제가 될 생각이다"
 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야스가 그런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벅차다고 하자,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나가마사가 이에야스에게,
 "지금 칸파쿠 전하의 말씀은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필시 뭔가에 씌어 미치신 것 같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히데요시의 얼굴이 급변했다.
 "네 이놈 나가마사! 내 직접 네놈을 죽이겠다!"
 고 외치며 손에 칼을 쥐고 일어섰다. 동석해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
前田 利家]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鄕]가 열심히 말렸다. 그래도 나가마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절 죽여서 국가가 안정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근년 조선과의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은 궁핍해 있습니다. 거기에 전하가 바다를 건너시면 국내 치안은 흔들릴 것입니다. 바다 건너는 것도 중지하시고 파견군도 전부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히데요시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나가마사는 숙소에서 벌을 기다리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히고[
肥後]에서 반란[각주:6]이 일어나 나가마사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죄를 용서받았다. 그 후 진압되어 어수선한 히고[肥後]를 진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각주:7]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네 명의 대로(大老)[각주:8]와 다섯 행정관(五奉行)[각주:9]이 이에야스의 전횡에 분노하여 이에야스 타도를 꾀하였지만, 토시이에가 죽은 뒤 나가마사는 다른 행정관들과는 다른 행동을 취하며 이에야스와 기맥을 통하였다. 또한 1599년 무공파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제거하고자 했을 때도 나가마사는 아들 요시나가[幸長]를 무공파에 참가시켰다. 이제 나가사마는 확실히 이에야스 편에 섰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 즈음의 정치정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갑자기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인 카이[甲斐]로 내려갔다. 자세한 사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설에 따르면 9월 9일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頼]를 방문하고자 하였을 때, 행정관 중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등이,
 "마에다 토시나가[
前田 利長][각주:10]에게 모반의 낌새가 있습니다. 아사노 나가마사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히지카타 카츠히사[土方 勝久],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冶長]를 부추겨 암살을 꾀하려 하고 있습니다"
 고 이에야스에게 밀고하여 그 때문에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에 칩거를 명령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나가모리들의 참언을 믿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가마사는 카이[
甲斐]로 내려가자마자 에도[]에 가서 이에야스의 후계자 히데타다[秀忠]를 만나 그에게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가마사는 얼마 지나지 않은 1600년 1월에 셋째 아들 나가시게[長重]를 히데타다에게 출사시켰으며, 세키가하라 결전[原の戦い] 결전에서 나가마사는 히데타다를 따라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올라갔고 적남인 요시나가는 이에야스의 선봉으로 출진한 것이다.

 말년의 나가마사는 이에야스의 바둑상대로 자주 초대받았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천하의 정치정세에 대해 나가마사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나가마사가 죽자 이에야스도 바둑을 관두었다고 한다.

 아사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쟁 후 키이[紀伊] 37만4000석이 요시나가에게 주어졌고, 나가아키라[長晟]의 대[각주:11]가 되어 아키[安芸] 42만6000석에 봉해져 이후 아사노 가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이어진다.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1544년생. 야스이 시게츠구[
安井 継]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사노 나가카츠[浅野 長勝]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2]. 첫 이름은 나가요시[長吉]. 1587년 와카사[狭] 오바마[小浜] 성주.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에 건너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등과 함께 진주성 공격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카이[甲斐] 후츄우[府中] 22만5천석.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에는 적자 요시나가[幸長]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 1611년 4월 7일 죽었다. 68세.

  1. 키타노만도코로 즉 네네는 양녀(나가마사의 양부 아사노 나가카츠의 부인의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 성에서 바쿠후 의전 담당인 코우케[高家] 필두 키라 코우즈노스케[吉良 上野介]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당시는 싸움 당사자간에 누구에게 죄가 있건 양쪽 다 처벌을 받았으나[喧嘩両成敗], 토자마[外様]의 약소번(5만석)의 다이묘우[大名]인 아사노 나가노리는 할복 & 번 폐쇄라는 엄벌이 처해졌지만 막부의 요직에 있는 키라에게는 아무 벌도 없었다. 그에 대한 복수로 번 폐쇄로 직장을 잃은 아코우 낭인들의 키라를 살해한 사건. 보통 '츄우신구라[忠臣蔵]'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3. 나가마사의 현손(玄孫). 즉 나가마사의 손자인 아코우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나오[浅野 長直]의 손자 [본문으로]
  4.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코우 번 필두 가로로 아코우 사건의 주모자였다. 복수극에 성공한 이후 충성스런 신하 & 진정한 무사의 대명사가 된다. [본문으로]
  5.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선생이 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스루가고젠[駿河御前]. [본문으로]
  6.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가신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 国兼]가 일으킨 우메키타 반란[梅北一揆]를 말함. [본문으로]
  7.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18세기 중반의 유학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쓴 상산기담(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책에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를 제외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9.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10.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아들. [본문으로]
  11.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건너왔던 형 요시나가에게는 딸밖에 없어서 동생인 나가아키라가 후계를 이었다. [본문으로]
  12. 나가마사의 모친이 아사노 나가카츠의 누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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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05.23 1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히데요리 정권은 과연 아사노 나가마사, 기타노만도코로 등과 같은 히데요시의 가깝고 먼 친척들에게 '비정통적'인 정권이었을까. 히데요시에게 진절 머리가 난 걸까? 혹은 대세를 따른걸까? 아니면 히데요리가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을 정군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압적 성격이긴 하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가의 수호자로 비춰진걸까. 아님 히데요리는 천하통치의 능력이 없으니 사슴(천하의 패권)은 이에야스에게 안겨줘야 된다고 생각했을까. 히데요시의 친척들이 자의반 혹은 타의반 거의 히데요리를 떠나간 걸 보면 히데요시도 어지간히 사람관리는 안한 듯 합니다. 이래서 어찌보면 전통적인 가신과 귀족적 태생이 중요한걸지도? 저야 꼬시지만 말입니다 케케. 잘 읽고 갑니다.

  2. 朴先生 2009.05.26 0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가 있는 듯...
    '어수순한 히고를 진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된다' -> '어수선한 히고를'이 아닌가요?

  3. 나라 2009.05.28 0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 글을 읽다보면 가끔 바치다를 받히다 라고 쓰시는 경우가 있더군요. 죄송하지만 잘못 아시는 것 같아 적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8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제 고질병이옵죠. T.T

      그런 것을 발견하면 꼭 좀 지적해 주셨으면 하고...지적해 주시면 좋지 않냐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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