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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음력으로 9월 15일[각주:1]이 되면 카고시마 현[鹿児島県] 히오키 군[日置郡] 이쥬우인 정[伊集院町]이 시간여행의 무대라도 된 듯 센고쿠 시대처럼 갑주를 몸에 걸친 무사들이 오며 “체스토! 세키가하키라”를 외치면서 행진한다.
 ‘체스토[チェスト]’라는 것은 카고시마 방언으로 ‘
치쿠쇼우[畜生]’라는 의미이며 화 났을 때나 분노했을 때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 행사를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라고 하며, 9월 15일에 행해지는 것은 1600년 9월 15일[각주:2]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의 패전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묘우엔 사[妙円寺]는 시마즈 군[島津軍]의 대장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위패를 안치한 절이다.[각주:3]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

  시마즈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의 패장이다. 그러나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 보여준 모습에 패자의 비참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러기는커녕 당시 요시히로의 후퇴는 ‘시마즈의 전진철수[島津の背進]’라 칭송 받으며 무명(武名)을 높였다. 요시히로의 무명(武名)은 시마즈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때부터 유명했지만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조선에서의 활약과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우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상대방인 명나라 측에 ‘석만자(石曼子)’로 계속 기억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8년 가을. 요시히로는 사천(泗川)의 성에 7천의 병사를 이끌고 농성하고 있었다. 사천성(泗川城)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가 지키는 울산성(蔚山城),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지키는 순천성(順川城)과 함께 명나라 군이 ‘왜의 세 소굴(倭之三窟)’이라 부르며 최대의 공격목표로 삼은 곳이었다.

 10월 1일, 명나라 군 20만[각주:4]은 사천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요시히로는 명나라 군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를 충분히 끌어들이는 작전이었다. 명나라 군은 의심 없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알맞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요시히로는 총공격을 명했다. 시마즈 군의 철포가 굉음을 내며 일제히 불을 뿜었다. 더구나 미리 숨겨놓았던 화약통을 저격하여 대폭발 시킨 것이다.[각주:5] 명나라 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런 명나라 군에 시마즈 군이 돌격하였다.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던 명나라의 피해는 굉장히 컸다. 기록에는 시마즈 군이 이 일전에서 벤 목은 3만8천7백여[각주:6]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각주:7]
 
요시히로 스스로도 “명예를 중국, 일본에 드높였다”고 할 정도로 이 사천의 대승리를 자랑스러워 하였다. 더구나 이 승리의 영향은 커 울산, 순천의 두 성을 포위하고 있던 명나라 군도 사천에서의 패전소식을 듣고 철퇴한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요시히로는 벤 적의 목들 대신 코를 베어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공적의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몸보신하라며 호랑이의 머리, 고기, 내장 등을 소금에 절여 보내거나 하였다.

 어쨌든 요시히로가 특출한 장수의 그릇이며 또한 개인적으로도 무예, 무용이 뛰어났다는 것은, 이 조선에서의 전쟁에서 “스스로도 칼로 공적을 세웠다” – 즉 스스로도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는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요시히로도 또한 조부 짓신사이 타타요시[日新斎 忠良][각주:8] 이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전통에 따라 아군, 적군 구별 없이 전사자의 공양에 힘썼다는 것에 있다. 현재 와카야마 현[和歌山県]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조선진공양비(朝鮮陣供養碑)”가 그것이다.

 참고로 요시히로의 조부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시마즈 가문의 중흥의 시조로 유교, 불교, 신도(神道)에 밝은 학자이며 실천자였다. 1583년 사츠마[薩摩] 카세다 성[加世田城]을 공략한 타다요시는 당시 경험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해 전사자는 모두 부처라 깨닫고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극진히 공양하였고, 이 전통은 아들인 타카히사[貴久][각주:9] 그리고 타카히사의 아들인 요시히사[義久], 요시히로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1600년 9월 15일 –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의 일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300기(騎), 총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부대의 오른 편에 진을 쳤다.[각주:10] 그 시마즈의 우측에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본진이 있었다.
 오전 8시[각주:11].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군 중에서 주력으로 싸운 것은 이시다, 코니시, 우키타의 부대였다. 요시히로는 어째서인지 병사 한 명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시다 측의 사자[각주:12]가 싸워달라고 부탁하여도, 말투가 싸가지 없다
[각주:13] 쫓아내는 식이었다.[각주:14] 결국 미츠나리 자신이 직접 움직여달라고 요청하러 왔다. 그러자 요시히로[각주:15]는,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 라고 하며 더 이상 대화도 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요시히로는 당초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뜻을 같이하고,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 때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를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거병하자 농성군 주장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가 요시히로의 입성을 거부한 것이다.[각주:16] 요시히로는 미츠나리의 세력범위의 한 가운데 남겨진 꼴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서군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각주:17]

 정오가 조금 지났을 즈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황 [각주:18] [각주:19]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이 급격히 무너졌다. 요시히로는 그래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군이 붕괴하자 동군은 요시히로의 진영으로 밀물처럼 다가왔다.

 이때가 되자 요시히로는 처음으로 싸우려 결심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이제 싸우다 죽는 것 외에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대장이 싸우다 적의 손에 죽는 것은 예부터 사츠마 군[薩摩軍]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요시히로 주종은 사력을 다하여 전쟁터에서 탈출을 꾀하려 하였다. 퇴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동군의 후방에 있는 ‘이세로[伊勢路]’뿐이었다. 요시히로 이하 300기(騎)는 기치(旗幟)를 버리고, 부대표식[馬標]을 부러뜨린 뒤 전군 일환이 되어 고함을 지르며 동군의 한가운데로 돌진하였다.

 동군은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부대가 시마즈 군을 포위하면서 공격해 왔다. 요시히로의 조카 토요히사[豊久][각주:20]가 요시히로의 진바오리[陣羽織][각주:21]를 입고 요시히로의 영무자가 되어 전사, 이어서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이 “내가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다”고 외치며 동군의 주의를 끌다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그들 외의 다른 병사들도 길 위에 각각 앉아 총을 쏘는 “좌선진(座禪陣)”이라는 진형을 취해 추격해오는 동군을 저지하였다. (대충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 듯(링크))

 이러한 휘하의 용감한 싸움 덕분에 요시히로는 구사일생하여 이세로[伊勢路]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때 당초 300기였던 무사는 80기로 줄어있었다.[각주:22]
 
이 요시히로 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탈출 전투는 장렬히 싸운 모습으로 인해 패주라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고 반대로 크게 무명을 드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 후, 종전처리는 형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가 중심이 되어 뻐팅김과 끈질긴 외교를 전개하여 2년 뒤, 요시히로의 무죄와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안도를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요시히로는 은거의 몸이 된다.
 이때부터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을 이은 아들 타다츠네[忠恒=이에히사[家久]][각주:23]에게 치세의 마음가짐 등을 가르쳤다. 화려함과 문약(文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말년에 저술한 한문체의 자서전에 그러한 정치철학을 담았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무시하고 단지 일신의 능력만을 믿고 세상을 살아가려는 자는 곧 멸망해 버리지만, 우리 시마즈 가문은 대대로 신불(神佛)을 우러르며, 선조를 공경하였다. 학문을 갈고 닦으며 번영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 가문을 잇는 자는 더욱 이 전통을 지켜나가야만 한다”
 라는 것이었다. 또한 나중에는 “쿄우[京]의 말투를 쓰거나 다른 지역[国]을 따라 한다면 사츠마는 멸망한다”고까지 말했다.

 요시히로는 굉장히 건강했다. 세키가하라에서 장거리 도피행에 이어 귀국했을 때가 66세였다. 그리고 1607년 이때 나이 73세였다. 이해에 전 관백[前関白]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가 보내온 편지에,
 “귀공은 여전히 천하에 그 무명을 떨치고 있으면서도, 여기까지 들려오는 바에 따르면 지금도 여자들에게 하자고 조른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스스로 무명을 깎아 내리는 일이 아니오?”
 라고 놀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요시히로도 차츰 쇠약해져 곧이어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늙어갔다. 그래도 이 노웅(老雄)에게 식사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밥상을 준비하고는 측근들이 큰 소리로 전쟁터의 함성을 지르며 “적이 다가왔습니다. 어서 식사를 하시고는 적에 대비하십시오”라고 말하면, 그 순간만은 요시히로도 정신이 돌아와 혼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85년의 생애에서 수많은 격전을 쌓아 온 무인의 면목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535년생. 형 요시히사[義久], 동생 토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와 함께 ‘시마즈 사형제[島津四兄弟]’[각주:24]로 용명을 떨쳤다.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25]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시마즈의 본령(本領) 중 오오스미를 히데요시에게 영유를 인정받았다.[각주:26]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해 용명을 떨쳐, 그 공적으로 총 69만9천석이 된다[각주:27]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하지만, 패장인 채 그대로 영지를 인정받은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1619년 죽었다. 85세.

  1. 지금은 참가하기 쉽게 10월 넷째 주 일요일 날 행해진다고 함. [본문으로]
  2. 서력으로는 10월 21일. [본문으로]
  3. 그러나 지금은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망하고 들어선 메이지 정부[明治政府] 초기 불교탄압과 신도 일원화를 위한 폐불훼석(廃仏毀釈) 때 사라진 묘우엔 사[妙円寺]가 있던 자리에 대신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받드는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가 세워진 후에는 "「토쿠시게 ‘신사’」에서 「묘우엔 ‘사’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조선측 기록에서는 약 3만 9천. [본문으로]
  5. 선조실록[선조 105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0월 8일(경신) 7번째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에 따르면 모국기의 진영에서 취급주의로 인하여 폭발이 있었던 듯. [본문으로]
  6. 「시마즈가문 문서[島津家文書]」의 주장. [본문으로]
  7. 사족으로 일본 측에서 전쟁 중이나 후에 가증을 받은 가문은 없지만 시마즈 가문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요시히로의 아들 타다츠네[忠恒]가 종사위하(従四位下) 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로 임관됨과 동시에 5만석의 가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8. 짓신사이[日新斎]는 33살에 은거 후 불문에 들어가면서 칭한 호칭. [본문으로]
  9. 요시히로의 아비. [본문으로]
  10. 근래의 주장으로는, 이 자리 즉 미츠나리 진영의 우측에는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있었으며, 요시히로는 미츠나리 진영 후방에 있었다는 듯. [본문으로]
  11. 오전 10시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야소지마 스케사에몬[八十島 助左衛門]. 임진왜란 때부터 미츠나리가 시마즈 측에 자주 사자로 보내던 인물이었기에 시마즈 측의 면면들과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미츠나리의 사자가 되어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린 것도 이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이었다. [본문으로]
  13. 말투라기 보다는 야소지마가 급하다며 말 위에서 출격을 부탁한 것이 당시 예의나 군법에 어긋났기에, 사츠마의 병사들이 욕하며 죽인다고 난리를 쳤다. 오히려 야소지마와 안면이 있었던 상급지휘관들이 말리는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사족으로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은 이에 대한 일건을 미츠나리에게 보고한 뒤 본진을 빠져나와 전쟁터에서 도망쳤다. 세키가하라 후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에게 취직하여 500석, 후에 타카토라에게 인정받아 타카토라의 문서담당관[右筆]이 되어 1000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15. 요시히로가 아닌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와의 대화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이에야스[家康]는 상경을 거부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행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처벌하기 위해 아이즈[会津]로 향하면서 요시히로에게 후시미 성[伏見城]에 입성하여 지켜줄 것을 명령하였으나, 구두로만 전했을 뿐 문서로 남기지 않았기에 모토타다는 요시히로를 믿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당시 후시미 성을 지키던 군세는 전부 이에야스 휘하의 군세였던 만큼 이질적인 사츠마의 군세가 들어왔을 시 명령계통과 통일적인 움직임에 균열이 생길까 하여 모토타다가 거부하였을 수도 있다 [본문으로]
  17. 요시히로의 사츠마 군세가 이런 것을 포함하여 여러 이유로 세키가하라 때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현재도 주류이지만, 카고시마[鹿児島] 출신으로 사츠마[薩摩] 관련 전문가인 키리노 사쿠진[桐野 作人]씨는 이때 사츠마의 군세가 방관이나 눈치보기를 했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야소지마의 일건과 이시다 미츠나리의 내방 사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일어나 서군이 무너지는 시점이었기에, 미츠나리의 요청으로 군을 움직인다고 하여도 사츠마 1500명의 군세로는 전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츠마 측 참전인물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오히려 전투 초반 요시히로는 활발히 미츠나리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수고한다고 격려하면서 작전계획을 면밀히 짜는 한편 응원이 필요한 곳에 철포 부대를 파견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시간흐름과 전황은 일본군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세키가하라역[日本戦史・関ヶ原役]」에 따른 것인데, 문제는 일본군 참모본부는 센고쿠 관련 연구를 당시의 일차사료가 아닌 에도시대에 나온 군기물(軍記物)에 주로 의존하여 정리하였기에 80년대 중반부터 관련연구가들로부터 자주 까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 [본문으로]
  19. 참고로 사츠마 참전 병사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군세는 2시간도 버티지 못하였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듯이 서군의 분전은 없었다는 인식인 듯. 뭐 전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쓰여진 회고록인지라 아군의 붕괴에 일어났던 일보다 과장된 감정과 지식을 가질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해선 감안해서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0. 시마즈 4형제 중 막내 이에히사[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21. 갑옷 위에 덧입는 조끼처럼 생긴 전포(戰袍) [본문으로]
  22. 요시히로와 함께 탈출한 이는 50명 정도인 듯, 밤 10시 즈음 오와리 코마노 고개[駒野峠] 앞마을 주민들에게 밥 좀 달라고 할 때 50명 정도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3.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고, 시마즈 가문 당주의 통자 ‘히사[久]’를 결합하여 타다츠네에서 이에히사로 바꿈. [본문으로]
  24. 사족으로, 본문에도 나오는 시마즈사형제의 할애비인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사형제의 인물됨을 평하며, "요시히사[義久]는 삼주(=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총대장이 될 덕목을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었으며, 요시히로[義弘]는 영웅의 무략을 갖추어 이에 따를 자 없으며, 토시히사[歳久]는 사건처리의 일부시종의 이로움과 해를 깨닫는 지략에는 견줄 이 없으며, 이에히사[家久]는 군법전술의 묘를 터득했다"고 평하였다. - 덕분에 듣보잡인 토시히사는 신장의 야망이 버전업 할 때마다 지략이 상향조정되어 등장한다. [본문으로]
  25.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6. 그러나 사츠마에 태합검지(太閤検地)가 끝난 1596년에는 히데요시 측의 의중으로, 요시히로가 사츠마[薩摩]를,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의 영지였던 오오스미[大隅]로 영지가 바뀌게 된다. 당시는 본거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였던 때인지라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있는 사츠마를 영유하게 된 요시히로가 시마즈 가문을 대표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사족으로 요시히로는 형 요시히사를 의식하여 사츠마에는 자신의 자식이며 요시히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후계자 취급을 받던 타다츠네[忠恒]를 입성시키고, 자신은 오오스미와 사츠마의 국경에 있는 쵸우사[帖佐]라는 곳에 머문다. [본문으로]
  27. 실제로는 61만 9430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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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2.01.14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견인지 모르겠지만 미나미큐슈사람들은 (제가 본 주변에 한해서지만) 시마즈가의 영향이련지 꽤 운동부계열의 기질의 애들이 많더군요. 하긴 활동하기 좋은 따스한 동네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보니 전 관백 부분에서 혁신같은 게임을 플레이할적엔 코노에 마에히사라고 그냥 읽고 다녔는데 요미가 달랐었군요(..아 부끄럽네요) 이쪽방면으로는 정말 익혀도 익혀도 이래저래 끝이없는 것 같습니다(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1.16 0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카고시마 쪽 사람들은 아예 본 적이 없어서.. 일본사 속에서도 사츠마하야토[薩摩隼人]라고 하여 날랜 이민족의 있었다 하니 조금이나마 그런 형질의 피가 흐를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자주 헷갈리더군요. 특히 야마시나 토키츠기[山科 言継], 토키츠네[言経]의 경우 항상 코토츠기, 코토츠네...로 읽습지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koviet2 BlogIcon 꼬비에뚜 2012.01.18 1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웹에 이렇게 성의있는 번역물을 올리는 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너무 늦게 알게 되서 ...
    네이버에 안 계시니 소통은 좀 더딜 듯합니다만 자주 찾아와서 뵙겠습니다.

  3. dsfsd 2012.03.23 0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귀석만자 귀신 석만자라는 소문은 무슨 실록인가? 보니까 그런 얘기 들은 적이 없다 라고 조선관료가 그랬다는데 사실인지..??? 그리고........ 생각해보니........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명장을 귀신이라고 붙이질 않잖아요 ...ㅋㅋㅋ ...........오직 동아시아에서 일본에서 鬼자 붙이잖아요 ㅋㅋㅋ 귀의중 귀진벽 귀신 도청흥 적귀 아카이 나오마사 청귀 인정교업 오니 도세츠 오니 시바타 오니 미노 오니 토라..... 개나소나 귀신이라잖아요 ㅋㅋㅋㅋㅋ 그 때 한번 제대로 이기긴했는데. 귀신 시마즈라고 소문났대 라고 시마즈 진영에서 뻥튀기한 거 같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뇌내망상의 사츠마"라 지칭하고 있습죠. ...뭐 근데 자기 공적이나 조상들 공적 뻥튀기하는 거야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으니..

  4. Favicon of http://megathinking.tistory.com BlogIcon ijaeho 2012.08.25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쓰마 관련 배경지식을 찾다가 들어와서 보고 글 남깁니다. 도장에서 지겐류 이야기를 들을때 전율했던 기억이 납니다. 괜히 =_= 지겐류가 강했던게 아니었군요.

  5.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6: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인물열전 100화를 처음부터 감사히 잘보고있습니다. 요시히로 말년에 밥먹이는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네요.

.

 

 이 날을 계기로 미야[]의 신상에 변화가 일어나려 하였다.

 그날 저녁. 미야가 있는 카쥬우지 가문[修寺家]에 우다이진[右大臣] 이마데가와(키쿠테이) 하루스에[今出川(菊亭) 晴季]가 부산을 떨며 방문해 온 것이다. 하루스에는 후지와라[藤原] 상급귀족[公卿]의 가문 중에서는 최상급의 명사(名士)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와 친교가 있었기에, 지금은 히데요시의 궁정정치를 위한 개인 고문과 같은 역할을 하며 큰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카쥬우지 가문에서는 당주인 하루토요[晴豊]가 응접했다. 미야의 외숙부이다.

 

 로쿠노미야()에 관해서요

 

 하고 하루스에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쿠노미야라는 것은 미야의 통칭이었다[각주:1].

 

 칸파쿠[=히데요시] 전하가 바라시길, 미야를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양자로 들이고 싶어 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야는 황족이 아닌가? 신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혈통도 수상한 히데요시 같은 놈에게……’

 그리 생각하여 침묵을 지켰다 참고로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미야의 생모 신죠우토우몬인 하루코[新上東門院 晴子]의 친동생이며, 또한 미야의 메노토[傅人]를 겸하고 있었다. 메노토는 신하이면서 부친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 이 양자에 대한 건은 이미 텐노우[天皇]의 내락을 얻은 상태다. 단지 카쥬우지 가문의 의향을 듣게 - 라는 말씀이외다, 라고 하였다.

 

 “……”

 

 하루토요는 생각했다. 세간이 모두 아는 것처럼 히데요시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 때문에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들인다는 소문도 하루토요는 들었었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의 성격이 경솔한 것 때문에 히데요시는 주저하고 있다고도 들었다. 그것은 그걸로 좋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 내의 사정이며,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일로 치부하고 있었다.

 

 우선 들어보시길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히데요시 공()은 이번에 칙명에 따라 토요토미 씨[豊臣]를 창설하였다. 그렇다면 토요토미 씨는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각주:2]라는 사성(四姓)과 더불어 일본 가문의 명문가가 되어 앞으로도 번영할 것이다. 그 명성을 이을만한 자는 히데요시 공에게 자식이 없는 이상 역시 존귀한 피를 가진 인물이 바람직하다. 그렇기에 로쿠노미야야말로 최적이오. 장래 천하의 권세는 이 로쿠노미야가 물려받게 되실 것이외다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하는 것이었다.

 

 어떠하시오?”

 

 잠시만!”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당황했다. 잠시…… 이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생각해 보자. 로쿠노미야는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며, 친왕(親王)에 임명 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버젓한 황족이다. 더구나 미야는 부친인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 , 형인 이치노미야[(카네히토(周仁)][각주:3]에 이은 세번째 황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어, 상기의 두 분에게 만약의 일이라도 있을 시에는 텐노우[天皇]가 되실 분이다. 그런 분께서 씨()도 없고 혈통도 수상한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에서 밭 메던 백성의 자식을 부친으로 받드시고, 그의 양자가 되어도 괜찮을 것일까? 그러한 예가 일본이 만들어진 이후 있었던 적이 없다. 귀족이란 피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생명인 것이다.

 

 전례(典例), 고사(故事)가 없습니다

 

 고 하루토요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였고, 거기에 그것을 말하려고 하자,

 

 알고 있소이다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앞질러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시대이다. 전례 같은 것을 지금과 같은 시기에 말하여도 소용이 없다. 실제로 현재 토요토미 씨()라는 성()이 창립되었다. 칙명에 따라 성씨가 창립된 것은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가 시작된 이래 천 년간 없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전부 신례(新例)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을 미래의 옛 것으로 만든다. 전례 같은 것보다 그것을 잘 생각하시길 하고 하루스에는 말했다.

 

 어떠하신지? 저는 그리 생각하오만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반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안 하시는 것인지?”

 

 이 남자에게는 못 당하겠군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생각했다. 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히데요시가 쿄우토(京都)를 제압한 이래, 그를 위해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관위승진은 모두 이 하루스에가 알선해 왔다는 것을 하루토요도 알고 있었다. 막대기와 같이 가는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굉장한 책사(策士)였다.

 

 그 시기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히데요시는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를 필요로 했다. 히데요시에게는 약점이 있어 그 약점이란 당연하게도 출신의 비천함이었다. 히데요시는 처음에 막부(幕府)를 열고자 하였다. 바쿠후를 열기 위해서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代軍]이 아니면 안 되었다. 하지만 겐지[源氏]가 아니면 세이이타이쇼우군에 임명 받지 못하였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朝]는 겐지의 종손이며,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도 그러했다. 이것이 궁정의 고사(故事)이며, 고사는 궁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법률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겐지가 아니었다.[각주:4]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겐지의 성()을 얻고자 하여, 아키[安芸]유우(流寓)하고 있던 전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게 청하여 그 양자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겐지의 종손인 요시아키는 혈통이 비천한 피로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아 받아들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당혹했다. 그 히데요시를 구하여 준 것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였다.

 - 쇼우군[軍]이 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칸파쿠[白]가 되시길.

 하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칸파쿠는 신하 중 최고의 직책이며, 그 자격으로 천하의 권세를 쥐면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어 바쿠후를 열 필요가 없었다. 칸파쿠로 충분하다, 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단지 칸파쿠는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것이 천 년의 고사(故事)이며, 다른 성() – 미나모토[源]도 타이라[平]도 타치바나[橘]도 칸파쿠가 되지 못하였고, 된 예도 없었다.

 더구나 씨()도 성()도 가지지 못한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는 옛 주인 노부나가[信長]를 흉내 내어 지금까지 헤이시[氏]라고 사칭한 적은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그것에 임명 받을 자격이 없었다.

 - 아니오이다. 간단한 일이외다. 코노에 가문[近衛家]의 양자가 되시길. 그걸로 이제 자네는 후지와라 씨[藤原氏]일세.

 하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하루스에는 후지와라 씨의 장손인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승낙을 처음부터 얻고 있었다. 그것을 말하자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여 바로 그날로 코노에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그날 중으로 하루스에를 통하여,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 秀吉]

 라는 이름으로 칸파쿠에 임명 받을 수 있도록 주청하였다. 현 텐노우[天皇]인 오오기마치[正親町]는 역시 난색을 표했다.

 히데요시가 후지와라 씨가 아님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속이 뻔히 보이는 속임수는 바람직하지 않다 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가진 현재의 실력이 조정의 뜻을 눌러 결국 주청대로 칸파쿠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 후에 후지와라 씨의 적()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성()인 토요토미 씨를 공칭했다. 상기는 작년 1585 9 13일이다. 히데요시가 귀족이 되는 단계도, 궁정이었기에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상급귀족[公卿]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내막을 물론 들어 알고 있었다. 모두 남일이라 생각하여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과 관련이 되었다. 이로운 일은 무엇이고 해로운 일은 무엇일까?

 로쿠노미야를 양자로 하고 싶다는 일건. 필시 히데요시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가 불어넣은 생각일 것이다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하루스에를 노려보았다. 이 하루스에는 히데요시를 칸파쿠로 만든 공으로 작년 종일위(從一位) 우다이진[右大臣]까지 승진해있었다.

 

 자네도 출세에 신경을 쓰시게

 

 라는 의미의 말을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로쿠노미야가 토요토미 가문에 들어가 장래 천하의 지배자가 된다면 조정에서 당신의 출세는 뜻대로이며, 카쥬우지 가문의 명예를 크게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책모가는 말하는 것이었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일단 방을 벗어나, 미야[宮]의 모친인 하루코[晴子]와도 상담했다. 하루코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카쥬우지 가문에게 있어 바라 마지않던 일이 아니옵니까?”

 

 하고 즉좌에서 말했다. 하루토요는 그로 인해 결심을 굳히고, 의관을 정갈히 한 후 다시 객관(書院)에 입실했다.

  

 이미

 

 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주상께서 그런 의향이 있다고 하시는 이상, 메노토[傅人]로서 올릴 말씀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야[]에게 있어서도 행복한 일로 축하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고 하루토요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칸파쿠 전하는 로쿠노미야를 아시고는 계십니까?

 

 이런~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 없소

 

 하고 하루스에는 손을 흔들었다.

 

 이미 오늘 대면이 있었소이다

 

 하고 약간 득의만만하게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이도 이 책사가 차려놓은 밥상 같았다. 오늘 히데요시는 코고쇼(小御所)황금다실을 가져왔었다. 그때 텐노우[天皇]가 코고쇼로 발길을 옮겼는데 수행한 사람 중에 하나로, 아이의 헤어스타일(童形)인 채로 로쿠노미야가 함께 했었다.

 

 칸파쿠 전하는 미야를 보시고 후에 굉장히 기쁘신 것 같았소

 

 이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일이군요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끄덕였다. 히데요시의 만족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로쿠노미야의 수려한 용모는 궁정에서도 비할 데 없었다. 거기에 자질에 보통이 아니어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 등은 주제넘은 말입니다만 신동(神童)이십니다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미야는 한학(漢學)보다 일본학(和學)을 좋아하여, 이미 열살 때 옛 시집(古今集) 전부를 읽었으며, 또한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를 해석하고 비평할 정도의 영역에 달해있었다. 하루토요가 생각하기에, 히데요시가 어디서 무엇을 해서 찾더라도 이 정도로 존귀하고 이 정도로 풍부한 자질을 가진 양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1. 하치죠우노미야가 황자 중 여섯(六)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일본역사 속에서 번영했던 네 개의 씨(氏). 각각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3. 다음 대의 텐노우[天皇]인 고요우제이(後陽成]. [본문으로]
  4. 겐지[源氏]만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헤이시[平氏]를 칭하던 노부나가의 경우 조정에서 칸파쿠[関白],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중 아무 거나 하나 되라는 말을 들었다.(三職推任問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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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9.05 06: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인물의 인생은 또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5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일찍일찍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울러 너무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07 1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유우사이가 빈말할 사람은 아니니... (뭐 직전신장전에서는 시류에 영합하는 인물 비슷하게 그려놨습니다마는-_-;) 상당히 실력이 있는 사람이겠군요.

    마침 후지와라씨가 나와서 생각난 말인데, 고셋케 밑의 세이가케(淸華家)의 하나인 사이온지가의 긴모치씨의 증손에 대해 어제 가쿠슈인 담당자와 얘기하다가 알게 됐다죠. 자신이 가쿠슈인 다닐때 1년 선배였다면서 이래저래 알게 된걸 얘기하던데 왠지 역사의 흔적과 간접적이나마 맞닿는 느낌이었던지라 느낌이 참..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12 0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우사이는 당시 그 계통의 짱이라고들 하니... 여담이지만 만능의 무장 우지사토도 유우사이에게 핀잔을 먹고 오히려 나중에 그 핀잔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유우사이를 한 층 더 존경하여 풍류의 세계를 배웠다고 하더군요.

    과연... 근데 학습원에 유학가시는 것입니까!? 나중에 잘 되시면 저 알죠? 데헤~ ^^

    제가 만난 역사적 인물 자손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은... 다테 마사무네의 후손...이 가장 높군요. 18대 당주를 자칭하였는데...이게 또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정식으로 인정을 못 받는 것이라 뭐라고 말할 수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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