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자체가 장난꾸러기’라고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사서(史書)에 쓰여있듯이, 마에다 케이지로우 토시타카[前田 慶次郎 利太=토시오키[利大], 토시마스[利益]라고도 전해진다 [각주:1]]는 기행(奇行)으로 유명하다.


 카가[加賀] 100만석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조카이다. 그러나 조카이긴 하지만 피가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휘하였던 오와리[尾張] 아라코 성[荒子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히사[前田 利久]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기에, 토시히사는 자기 마누라의 오빠인 타키가와 기다이유우 마스시게[滝川 義太夫 益重][각주:2]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각주:3] 마에다  가문[前田家]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이 양자로 들어온 인물이 바로 케이지로우[慶次郎]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토시히사의 셋째 동생인 토시이에를 가문 당주로 앉혀버린 것이다.[각주:4] 그리고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의 가신으로 편입된다.


 무용(武勇)도 뛰어났지만 가무음곡(歌舞音曲)도 좋아하였다. 그런 케이지로우를 토시이에는 ‘세상을 얕보는 녀석’이라며 엄히 질책하였다. 케이지로우는 그런 잔소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자리였을 지도 모를 당주자리에 앉아있는 삼촌이 맘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이거 떠나야 겠구먼”
 이렇게 맘을 정했지만, 그냥 나가기에는 재미가 없었다. 케이지로우는 궁리하였다.


 어느 날인가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에게 다도(茶道)의 자리에 초대하고 싶으니 부디 참석해 주시기를 바란다며 요청하였다. 토시이에는 ‘허허~ 이제 케이지로우도 맘을 고쳐 잡았나 보군’이라며 기쁜 마음으로 케이지로우의 저택으로 갔다. 케이지로우는 겨울이니 우선 뜨거운 물로 목욕부터 하라고 토시이에에게 권했다. 추위에 떨던 토시이에는 케이지의 마음씀씀이가 더 맘에 들었다.      
 하지만 케이지로우는 한 번 맛 좀 보라는 심산이었다. 욕조에는 냉수로 채우고 욕실에는 누가 보아도 물이 뜨거운 듯이 보이기 위해서 김이 나오도록 욕실 주변에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을 여러 개 두었다. 그렇게 김이 가득 차 있기에 속은 토시이에는 욕조로 풍덩하고 몸을 던진 것이다. 찬물에 정신이 번쩍 든 토시이에는,
 “네 이놈 케이지로우!!”
 하고 화냈지만, 그런 토시이에를 무시한 채 뒷문에 메어두었던 명마 마츠카제[松風]에 올라타자 마자 곧바로 말달려 떠난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였다. 하지만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로 지장(智將)으로 이름 높은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우정을 맺은 뒤[각주:5]에는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기게 된다. 이때 케이지로우는 코쿠조우인 횻토사이[穀蔵院 ひょっと斎]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기묘한 옷을 입고 카게카츠를 알현했다고 한다. 기인(奇人)으로 이미 유명했기에 우에스기 가문에서는 2000석[각주:6]을 하사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케이지로우는 나오에 카네츠구를 따라 데와[出羽]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공략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당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루가 붉은 색인 창을 들고 ‘대 후헨모노[大ふへん物]’라 쓰여진 큰 깃발을 등에 지고 전투에 나선 것이다. 우에스기 가문은 유명한 무사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이들은 케이지로우의 이 등깃발[旗指物]을 보고 화를 냈다.
“신참주제에 대무변자[大武辺者=다이부헨모노[だいぶへんもの]]라는 것을 메다니 무슨 생각이냐”
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케이지로우는 낄낄대더니,
“이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하는군요. 여러분들은 시골뜨기다 보니 글자의 촉음(濁音)도 모르나 보네요. 이는 ‘대 불편자[大不便物=다이후헨모노[だいふへんもの]]’라 읽는 것입니다. 제가 오랜 낭인생활을 하여 가난하기에 이리 썼을 뿐이외다”
고 놀렸다고 한다.

굉장히 궁핍하여 불편하게 산다[だいふへんもの]고 쓰인 등깃발

 이때 입은 옷들도 눈에 띄었다. 검은 갑옷에 새빨간 전포[羽織], 황금색 염주를 목에 걸고, 금칠을 한 표주박을 옷깃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자신과 타는 말에는 자신과 똑같은 두건[頭巾]을 씌었다고 한다.


 나중에 주군 카게카츠[景勝]를 수행하며 에도[江戸]에 갔을 때, 또다시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 훈도시의 옆에 작은 칼[脇差]를 차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을 보고 같이 입장하려던 사람들도 따라서 작은 칼을 찬 채 들어갔다. 케이지로우는 욕탕에 들어갔다 나온 뒤 차고 있던 작은 칼을 꺼내어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작은 칼은 사실 대나무로 된 때주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작은 칼을 차고 온 사람들은 칼자루도 젖고 쇠에 습기가 차 고생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쟁 뒤 우에스기 가문은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 되었기에 가신들 중에는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우에스기 가문의 기풍을 사랑했던 케이지로우는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마에다 게이지로[前田 慶次郎]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는 엣츄우[越中] 아오 성[阿尾城]에 있었지만[각주:7], 1590년[각주:8] 아이즈[会津]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겼고, 말년에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강의하거나 하였다. 카게카츠[景勝]의 아들 사다카츠[定勝] 때 요네자와[米沢]에서 죽었다.[각주:9]

  1.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따라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는 주로 토시사다[利貞]라는 이름을 썼던 듯. 이 ‘토시사다’를 새긴 표주박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함 [본문으로]
  2. 마스우지[益氏]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또는 마스시게의 부인으로 이미 마스시게의 자식을 임신했던 여성을, 토시히사가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 여성과 결혼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1569년의 일. 사족으로 아라코의 마에다 토시히사는 후년 노부나가에게 과거 반항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당하는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에 노부나가에게 개기는 히데사다의 의향에 따라 자주 노부나가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기에, 그런 반항적인 토시히사를 경질하여 노부나가의 측근인 토시이에[前田利家]를 마에다 가문의 당주로 앉혔을 가능성도 크다. 단 이는 역자인 내 개인적인 생각이며 일본에선 아직까지 이런 주장을 하는 이는 없으니 주의요망. [본문으로]
  5. 대략 1597년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라는 승려의 소개로 묘우신 사[妙心寺]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단 현재 남아있는 사료(慶長五年会津御在城分限帳=1600년 아이즈에 거주하는 가신 명부) 에는 외인부대[組外衆]의 필두 1000석이라 함. [본문으로]
  7. 이 당시 아오 성의 성대[城代]로 약 6000석의 지행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에 카네츠구와 만난 것이 1597년이라 하니 1598년이 맞을 듯. [본문으로]
  9. 생몰년에 대해서 마에다 가문의 자료에 따르면 생년은 1533년이고 야마토[大和]에서 1605년에 73세로 죽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 사료에 생년은 1541년이며 요네자와[米沢]에서 1612년에 70세로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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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군 2012.04.26 2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이건 소싯적 해적판 만화 비룡문(;;;) 으로 먼저 알게되었던 꽃의 케이지 아닙니까 ㅎ 즐겁게 잘 보았습니다~^^;

  2. 루리루리 2012.04.30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 짤에서 최훈의 삼국전투기가 생각나서 빵 터졌습니다~ ^^

 1578년 3월.
 천하에 용명이 자자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켄신은 평생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기에 친자식이 없어 자연스레 후계 다툼은 켄신의 양자 중 둘로 압축되었다.
 한 사람은 동족[각주:1]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와 켄신의 누나 센토우인[仙桃院]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게카츠[景勝], 또 한 사람은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의 성주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아들 카게토라[景虎]였다.

 카게카츠는 부친 마사카게가 켄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뒤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 定満]에게 살해[각주:2]당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친과 함께 켄신 아래서 자랐는데, 켄신과는 친척인 것도 있어 켄신에게 귀여움 받으면서 자랐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위해서 손수 습자첩(習字帖)을 만들어 주었으며, 켄신이 에치고를 통일했을 때 받은 ‘단죠우쇼우히츠[弾正少弼][각주:3]’의 관직명을 카게카츠에게 물려주었다. 그런 점 때문에 켄신은 카게카츠를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라 여겨졌다[각주:4].

 하지만 켄신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유언도 남겨지질 않아 카게토라에게도 충분히 후계자의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켄신의 장례식도 치러지지 않은 채 카게카츠와 카케토라 사이에 상속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 에치고를 둘로 나누는 쟁란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이라고 한다.
 다음 해인 1578년 3월 카게카츠는 오타테의 난의 승자가 되었다. 이때 카게카츠의 나이 25세였다.

 카게카츠는 과감한 무장이었다.
 오타테의 난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1582년 3월.
카이[甲斐]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멸문시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명령하여 우에스기 공략을 시작[각주:5]한 것이다. 카게카츠는 각오를 정했다. 칸토우[関東]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에게 그런 결의를 담아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활과 화살을 들고 에치고 하나만으로 일본 전토 60여주와 싸우려고 합니다. 일전을 치러 멸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명예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운 좋게 살아 남는다면 일본에 비할 바 없는 영웅으로 이름을 남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면목을 세우는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사옵니다.[각주:6]

 또한 시대는 나중이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의 도화선이 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생트집[각주:7][각주:8]이 있었을 때, 카게카츠는 휘하의 장수들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모반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냥 나이후[内府=
이에야스]에게 굴복하는 것도 내 뜻과 다르다. 이제는 결심했다. 싸우게 되면 우리 가문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지금 떠나도록”
 카게카츠가 실제로 저렇게 말했는지는 둘째치고 시국에 정면으로 맞서려 한 카게카츠다운 일화이다.

 카게카츠의 직속부하들은 카게카츠를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정말 추상같은 위엄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카게카츠는 직속부하들에게 단 한번도 따스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미소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카게카츠는 한 마리의 원숭이를 길렀다. 어느 날 이 원숭이가 카게카츠의 두건을 쓰고 카게카츠의 자리에 앉아 깍지를 끼고서는, 잘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명령을 내리는 흉내를 내었다. 아마 카게카츠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카게카츠는 웃었는데, 이 웃음은 카게카츠가 근신들에게 보인 생애 유일한 웃음이었다고 한다.

 또한 어느 때인가 후지가와[富士川] 강을 건널 때, 한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가라앉으려 하였다. 카게카츠는 노기 서린 얼굴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배에 있던 부하들은 일제히 강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어 카게카츠가 쿄우토[京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 이하 수백 명의 행렬은 너무도 조용하여 기침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고 오로지 사람과 말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는 막부군에 속하여 오오사카 시기노[鴨野]에 포진하였다. 그곳을 니와 나가시게[丹羽 長重][각주:9]가 방문하였는데, 그때 카게카츠는 몸에 갑주도 걸치지 않고 청죽(靑竹)으로 지팡이 삼아 걸상에 앉아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좌우에는 장병 300여명 모두가 창을 세우고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카게카츠와 함께 오오사카 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깃발은 켄신 때부터 이어져오는 감색 바탕에 히노마루[日の丸]의 부대표식[馬標]과 [毘]의 깃발을 치켜세운 진중은 너무나도 숙연하였다.
 나가시게는 군기가 너무도 빠릿빠릿한 그 모습에 뻑이 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시대를 앞으로 되돌려 1582년 4월부터 시작된 오다 군[織田軍]의 우에스기 공략은 6월 3일 엣츄우[越中]에 있는 우에스기의 속성(屬城) 우오즈 성[魚津城]이 함락되어 카게카츠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바로 이 전날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는 바람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건을 알게 된 오다 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카게카츠는
히데요시[秀吉]를 차세대 패자(覇者)로 보고 접근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오대로(五大老)[각주:10]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아이즈[会津] 120만석[각주:11]으로 당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에 이은 제3위이란 거대한 영지를 하사 받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카케카츠의 인생은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계속 보내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바뀌게 된다.

 천하를 향한 이에야스의 야망이 명확해지자,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지를 다스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1599년 고굉지신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함께 아이즈로 귀국하여, 이후 이에야스의 상경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내(領內)에 있는 성곽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이미 이에야스와의 전쟁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미리 손잡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카게카츠는 이에야스가 물러간 다음에도 병사들을 이에야스의 본거지 에도[江戸]가 있는 남쪽으로 보내지 않고, 배후에 있는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영지 야마가타[山形]를 공격하기 위해 나오에 카네츠구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카네츠구는 야마가타 성[山形城] 근방까지 진격했지만, 그때 이미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서군(西軍)이 패한 뒤였다. 카게카츠는 결국 항복의 길을 택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555년생. 처음엔 키헤이지[喜平次]. 가독(家督)을 이은 얼마 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항복하여 이후 충성을 다했다. 1586년 에치고[越後]를 중심으로 55만석을 영유했으며, 후에 토요토미[豊臣]의 성(姓)과 하시바[羽柴]의 씨(氏)를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임진왜란에도 참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의 패전으로 아이즈 [会津]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되어 이봉되었다. 1623년 죽었다. 69세.

  1. 켄신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가독을 물려받기 전의 성이 나가오[長尾] [본문으로]
  2. 보통 둘이 배타고 연못에서 놀았는데 술에 취해 둘이서 수영하다 익사하였다고 하며, 켄신에게 반항적인 마사카게를 여명 얼마 안 남은 사다미츠(76세)가 살해함으로써 주군 켄신을 편하게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군기물 北越軍談 이야기라고 한다. [본문으로]
  3. 관리를 감찰하는 기관 '단죠우다이[弾正台]'의 차관. 억지로 우리나라의 기관과 비교한다면 감사원 공직감찰본부장 쯤? [본문으로]
  4. 근래에 들어선 에치고의 영주에는 카게카츠,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는 카게토라에게 물려주려 한다는 시각이 대세인 듯. [본문으로]
  5. 엣츄우[越中] 방면에선 시바타 카츠이에, 시나노[信濃] 측에선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코우즈케[上野]에선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각각 카게카츠의 에치고[越後]를 노렸다. [본문으로]
  6. 사실 이때는 정세가 이렇게 사면초가가 되고 나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고,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노부나가와 화해하려고 노력했었다. [본문으로]
  7. 一. 영지 경영하지 말고 빨리 상경해라, 一. 어쩌면 조선을 다시 공격할 수도 있으니 그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 一. 에치고[越後]의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가 말하길 카게카츠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 一. 어째서 무기 사들이고, 길이나 다리를 고치며, 성을 새로 쌓고 있나? 등 [본문으로]
  8. 그러나 사실 우에스기 가문이 정비한 길이나 새로 만든 성 등은 모가미 영토로 침입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카게카츠에게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났을 때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영토로 침입하여 탈취하려 했던 것 같다. 또한 성을 새로 짓는 행위는 히데요시가 엄히 금했던 것이었던 만큼, 이에야스가 괜한 생트집을 잡는다고는 할 수 없다. [본문으로]
  9.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의 아들. 이 당시 히타치[常陸] 훗토 번[古渡] 1만석의 번주. [본문으로]
  10.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1. 아이즈[会津] 92만석, 사도[佐渡] 14만석, 쇼우나이[庄内] 14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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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5.27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게가쓰와 가게토라의 '분업'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군요. 매우 일리있어 보입니다. 나가오의 핏줄은 에치고를 포함한 호쿠리쿠를 유지하되, 호조의 핏줄을 내세워 간토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의도로 보이는군요. 해석이 제멋대로는 아닌지 모르겠네요.

    도해 전국무장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부분을 봤는데 사례가 제시되지 않아 발해지랑님께 여쭙겠습니다. 여기 보니 슈도에 관한 대목 중 적장에게 반해 사로잡고자한다는 설명이 있는데 혹시 사례를 아시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27 2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슈님이 말씀하시는 의도가 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켄신이 너무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사이가 나뻤던 우에다 나가오 가문[上田長尾家]과 코시 나가오가문[古志長尾家]을 축으로 갈리는 바람에 오타테의 난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집에 내일 들어가기에 그 부분을 좀 봐야겠군요. 다만 과문하여 그런 케이스는 첨 듣는군요.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5.28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가오 가문의 대립에 대해선 불초하여 잘 모릅니다만 간략히 서술해 주실 수 있는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02 14: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음... 이건 따로 포스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2. 맹꽁이서당 2011.06.01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에스기 가문도 모리나 시마즈 가문처럼 막부 말기에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한을 풀려고 일어날만 했겠네요. 지역이 외진 곳이라 못 일어났을까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아이즈'라는 국명이 등장하던데, 아이즈 = 에치고 국인가요? 일본 66국 지도를 보면 노토반도 동쪽에서 동해안을 따라 엣츄, 에치고가 있고 그 북동쪽에 데와국이 있더라구요. 처음에 55만석을 받았다는 '에치고'에서 120만석 '아이즈'로 이동되었는지, 아니면 에치고 = 아이즈라서 그냥 영토가 확장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02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네자와 번[米沢藩]은 3대 츠나카츠[上杉綱勝] 때 츠나카츠가 급사하여 대가 끊어질 뻔 합니다만, 당시 막부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아이즈 번[会津藩]의 호시나 마사유키[保科 正之(아버지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도움으로, 츠나카츠의 여동생과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 츄우신구라[忠臣蔵]에서 유명한 악역] 사이에서 낳은 츠나노리[上杉綱憲]를 양자로 받아서 번을 유지할 수 있어(대신 30만석에서 15만석으로 감봉), 그 은혜를 막말까지 잊지 않고 있었기에 아이즈 번과 같은 길을 택하게 됩니다.
      (아이즈 번이야 쵸우슈우 지사들이 薩賊会奸[도적의 사츠마, 간신배의 아이즈]라고 하며 신발 바닥에 쓸 정도로 좌막파의 기수).

      아이즈[会津]는 무츠[陸奥] 남부에 있는 군(郡)의 이름입니다. 일본지도를 보시면 토우호쿠[東北] 지방에 후쿠시마 현[福島県]의 한 가운데 이나와시로 호수[猪苗代湖]가 있고, 그 옆에 분지가 있는데, 대충 그 부근입니다.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동된 것입니다. 우에스기 가문이 떠난 에치고의 자리엔 만화 센고쿠에도 등장하는 호리 히데마사[堀秀政=센고쿠에는 호리 규타로]의 아들 호리 히데하루[堀秀治]가 30만석으로 입국합니다(그 외 5~6만석급 가문이 몇개 더).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은 아이즈로 떠나면서 연공을 싸그리 가져가는 바람에, 호리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은 사이가 엄청 안 좋아지고, 그것이 주석 7번에 언급된 호리 가문이 우에스기 반란 운운하는 계기로 이어집니다.

    • 맹꽁이서당 2011.06.02 1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그럼 간토8주로 이봉된 이에야스처럼, 가게카쓰도 히데요시에 의해 더 많은 영지를 얻은 대신 더 먼 곳으로 이봉된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세키가하라 패전으로 이봉한 요네자와는 더 북쪽?)

      요세 '센고쿠' 2부가 번역되지 않아서 참 아쉽더라구요. 언제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아이즈라는 자리가 워낙 요충지다 보니 뭐 영전이라면 영전이라고 할 수 있습죠. 다만 그 시대는 워낙 자신들 본거지에 목을 메던 시대(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도 오와리를 내 놓고 이에야스가 다스리던 자리로 가라니까 거부했듯이)라 우에스키 가중은 조금 떨떠름해 하지 않았을지...

      그렇습죠. 요네자와는 아이즈보다 쪼금 북쪽으로 볼 수 있습죠.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6.02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게카츠가 켄신 죽고 카게토라보다 빨리 일을 착착 진행한걸 보면 어느 정도 준비는 하고 있었던거 같군요. 생전에 얘기를 안해뒀으니 생각 하고 있었던게 당연한 걸수도 있겠고...

    원군도 없고 교섭도 안먹히고 결국 자결한 카게토라도 카게토라지만
    카게토라 쪽에 붙었다 죽어버린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왠지 더 억울해 보이기도...
    애초에 왜 카게토라한테 붙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호죠라면 무지하게 싫을법도 한데...혹시 알고 계시면 가르침을 구해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착착 진행이라기 보다는, 운 좋게 켄신이 죽을 당시 친카게카츠 파들이 그 주위에 있어서, 카게토라 등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로 일을 진행시킨 듯 합니다.

      카게카츠파와 카게토라파가 처음 맞부딪힐 초기만 하더라도 에치고를 둘러싼 다이묘우들은 대개 카게토라를 응원했다고 하더군요. 카게카츠파의 공작이 그만큼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왜 붙었는지는 궁금하더군요. 다만 켄신이 죽고 카게카츠파가 우에스기 가문의 가독과 그에 딸린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의 직까지 계승한다고 선언하자, 노리마사가 '딴 건 몰라도 우에스기 가문 가독과 칸토우칸레이 만은 내 결제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말은 하였지만, 카게카츠파는 '이미 켄신이 정한 일이다'고 우겼다는 말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쪽에서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을지...

      어쩌면 그냥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 대항할 만한 곳이 노리마사 거관이었던 오타테[御館]였기에, 카게토라파가 그곳을 점령하다보니 휩쓸린 것이 아닐지...
      (...라고 예전엔 생각했습니다. 지금 오타테의 난을 다룬 책을 하나 기다리는 것이 있으니, 책 도착하여 특별한 것이 있으면 따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6.18 18: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제라...그럴수 있겠군요.
      개인적으론 결제로 맘 상하는거보다 자기 쫒아낸 집 자식인게 더 큰일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아비는 아비고 자식은 자식이었을런지;;;;

      적당히 물어본 질문에도 언제나 장문으로 답변을 써주셔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왠지 죄송하기도 하고...^^;; 그래도 신경써서 답변 달아주시니 매번 감사합니다.

  4. 본다충승 2011.06.03 14: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키헤이지 당신은 요로쿠를 멀리 했어야 했습니다. 갠적으로 우에스기 몰락(?ㅋ)의 주범을 야마시로노카미로 보기에... ㅎ 참으로 오랜간 만에 들어 왔습니다. (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카네츠구가 없었음 아예 그런 기회조차 없었을 것 같군요. 카네츠구는 알려진 만큼 뛰어난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데와[出羽] 전역에서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군세와 싸운 하세도우 전투[長谷堂合戦]를 그린 '하세도우 전투 병풍[長谷堂合戦図屛風]에 그려져 있는 요시아키[義光]

 야마가타[山形] 성주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이웃나라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모친 요시히메[義姫]의 오빠이다. 혈통 자체가 우월한 몸매에 뛰어난 용모를 가졌던 듯 하다.[각주:1] 후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의 용색에 반하여 오우슈우[奥州] 원정 때 쿄우토[京都]로 데려가 측실로 삼았다.

 각설하고, 요시아키의 활약은 16살 때 강도퇴치의 일화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부친 요시모리[
義守]와 타카유[高湯] 온천[각주:2]에 휴식을 취하려 갔는데, 그날 밤 강도가 습격해 온 것이다. 이때 요시미츠는 '형형한 눈빛을 하고 마치 화살이 쏘아지듯이 뛰쳐나가 날카로운 칼질로' 단번에 강도 2명을 베어 부상을 입혔고, 이어서 그 중 가장 거대한 사나이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려 제압한 후 두 번 찔러 상대가 힘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목을 베어 칼끝에 꿰어서 높이 쳐들고는 우렁차게 함성을 질렀다 한다.

 부친 요시모리는 옆 나라 다테[伊達]의 비호(庇護) 하에 있었기에 젊은 날의 요시아키가 너무나 뛰어나고 용맹한 것에 불안을 느껴 요시아키의 폐적(廢嫡)하기로 결심하고 유폐시킨다. 물론 이는 다테 가문[伊達家]의 의사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모가미 가문의 자립을 목표로 하는 요시아키를 위험하다 여겨 부친인 요시모리에게 아들 요시아키 살해를 명령한 것이다. 유폐 중의 요시아키는 이런 다테 가문에서 독립을 기원하며 주변에 있던 절 릿샤쿠 사[立石寺]에서 소원성취를 빌었다. 요시아키 23~25살 즈음의 시기였다. 요시아키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부친 요시모리를 강제로 은거시킨 후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공격하여 자살하도록 만들었다[각주:3]. 이어서 1577년에는 다테 측에 붙어있던 텐도우 성[天童城]의 텐도우 요리사다[天童 頼貞]를 공격하였다[각주:4]. 다음 해에는 남쪽으로 공세의 방향을 돌려 카미노야마[] 성을 낙성시켰으며, 또다시 북쪽의 신죠우[新庄]로 향해 마무로[] 성을 점령하여 마침내 모가미 군[最上郡] 전체를 판도에 넣었다. 1582년에는 숙원이던 쇼우나이[]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다다음 해인 1584년, 요시아키는 야치 성[谷地城]의 성주 시라토리 나가히사[白鳥 長久]를 모략을 이용해 야마가타 성으로 불러서는 살해하였다. 모략이야말로 요시아키의 진면목으로, 그는 힘으로 몰아 붙이는 타입의 무장이 아니었다.

 1587년,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하는데 이로 인해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와 험악한 관계에 빠진다. 마사무네가 쇼우나이 지방의 무토우 씨[武藤氏]의 부탁을 받아 중재(仲裁)에 나서자, 겉으로는 마사무네의 중재를 받는 척하며 방심시킨 후 불시에 대군을 이끌고 쇼우나이 지방으로 침공한 것이다.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에게 있어서는 모친 요시히메의 오빠이기에 외삼촌이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이 배신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체면이 깎였다. 이 원한을 붓으로 다 적기도 힘들다'고 말하며 마사무네는 격노하였다. 모가미와 다테 사이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사태로 번졌다. 그때 요시히메가 양국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곳에 가마를 타고 들어가 80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결국 양자의 충돌을 회피시켰다고 한다. 이때의 반감은 나중에까지 이어져, 후에 요시아키와 요시히메는 손을 잡고 마사무네 독살 미수사건으로 이어진다(다테 마사무네 항 참조)

한편 쇼우나이 지방은 강적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세력이 손을 뻗쳐왔다. 1587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전국에 영()을 내려 다이묘우[大名]들간의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였기에[각주:5], 다음 해 5월에는 모가미-우에스기 간의 항쟁을 멈추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에 우에스기 측의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가 이를 무시하고 쇼우나이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하 역자 가필================================================

 1587년. 다테 가문의 종속하에 있던 오오사키 가문[大崎家]에서 내분이 일어나, 친 다테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던 오오사키 가문의 가신 우지이에 요시츠구[氏家 吉継]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구원을 요청. 마침 다테 가문에게서 독립을 바라고 있던 오오사키 요시타카[大崎 義隆]는 분가 격[각주:6]인 모가미 가문의 요시아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비슷한 시기 요시아키는 쇼우나이를 지배하고 있던 무토우 씨[武藤氏][각주:7]의 당주인 무토우 요시우지[武藤 義氏]를 모략으로 요시우지의 부하를 이용해서 살해. 요시우지의 뒤를 이은 요시오키[武藤 義興]는 우에스기 가문의 맹장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의 아들인 요시카츠[武藤 義勝]를 양자로 받아 들임과 동시에 혼죠우와 그의 주군인 우에스기 가문의 힘을 빌어 영내를 안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쇼우나이 지방의 친 모가미 파의 호족들의 불안을 부채질하여 호족들은 일제히 봉기한다. 이를 호기로 본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 요시오키를 살해하고 요시카츠를 에치고[越後]로 쫓아 보내어 일단 쇼우나이 지방을 손에 넣는다. 이때 오오사키 가문의 구원 요청이 도착한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오사키 령으로 진격하나, 마사무네는 나카니이다 성[中新田城]를 공격 중 대패하여 중신 이즈미다 시게미츠[泉田 重光]를 인질로 바치고 겨우 궁지를 벗어나지만, 오오사키 령에 원군으로 온 모가미 요시아키의 군세와 나카야마[中山]란 곳에서 대치하게 된다. 또한 이 패배는 오우슈우 전역에 소문이 퍼져 반 마사무네 파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일제히 마사무네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위기에 빠진다.

 한편 오오사키 령에 도착하여 마사무네의 군세와 대치하고 있던 요시아키에게도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에치고로 도망쳤던 무토우 요시카츠가 지 애비인 혼죠우 시게나가와 함께, 요시아키가 마사무네와 싸우는 틈을 타 쇼우나이로 진격. 쇼우나이의 모가미 측 호족들을 물리치고 쇼우나이를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모가미 령으로 침공한다.

 서로 적들에게 침공 당하였지만 대치하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던 마사무네와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모친이며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이 대치하는 곳에 가마를 타고 와 화해를 종용. 서로 다방면에 적들을 두고 있던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된다.

======================================이상 역자 가필====================================================

 요시아키는 분노하여 히데요시에게 호소하였으나[각주:8],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는 이미 히데요시와 면식을 튼 사이였으며 더구나 히데요시 측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도 친한 사이였다. 소송은 우에스기 측이 월등히 유리했다. 요시아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통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소송에 졌다[각주:9]. 이후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서 이에야스를 통해 매[] 등을 헌상했지만, 히데요시의 태도는 냉담하여 요시아키가 쿄우토로 인사를 올리러 간다고 하여도 '그럴 필요는 없소'하며 거부하였다.

 요시아키는 더욱더 이에야스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요시아키는, 히데요시가 "조금 더 늦었다면 여기가 위험했을 것이야"라고 하며 목을 툭툭 친 다테 마사무네보다도 더 늦게 오다와라에 당도하였지만[각주:10], 이때도 이에야스가 중간에서 잘 주선해 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어 이에야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크게 갖게 되었다.

 이후 요시아키는 자기 가문의 안전을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였다.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측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에게 편지를 보내, "히데요시님을 섬기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습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였고, 오다와라 정벌을 끝낸 후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온 히데요시의 처소에 처자식을 몽땅 데리고 출사하여 히데요시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1591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 15만의 대군이 난부[南部]의 쿠노헤 마사자네[ ]를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奥州]로 왔을 때도 요시아키는 중앙의 실력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이에야스에게는 둘째 이에치카[家親][각주:11]를 가신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일종의 인질제공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다이묘우[大名]의 자식을 가신으로 한 최초의 사례였기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히데츠구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에게 눈독을 들인 것도 이때이다. 쿠노헤 정벌을 마치고 쿄우토로 돌아가던 도중 야마가타 성에 들린 히데츠구를 요시아키는 성대히 영접하며, 그 시중으로 아직 12살인 딸 코마히메를 내보냈다. 히데츠구는 그녀의 미모에 빠져 요시아키에게 청하여 쿄우토로 데려가 시첩으로 만든 것이다. 마사무네의 숙부 다테 시게자네[伊達 ]는 이를 '만천하의 비웃음거리'라고 자신의 일기에서 비난하였다.

 히데츠구의 측실이 된 코마히메는 이름도 '오이마노츠보네[お]'로 불리게 되지만, 히데츠구의 실각사건 때 산죠우 강변[河原]에서 참수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더구나 요시아키에게도 히데츠구 모반사건의 불똥이 튀어 한때는 쥬라쿠테이[楽第]에 감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히데요시 사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당연히 이에야스 측에 서 야마가타로 진군하는 우에스기의 지장(智將)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의 군세와 싸웠다. 정강을 자랑하는 나오에 군단이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지만,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전보가 전해져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너무나도 자기 가문 안전을 위해 머리를 굴린 결과가 반대의 결과로 나온다.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어있던 둘째 이에치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장남 요시야스[義康]를 살해하게 되는데, 요시아키가 죽은 뒤 이로인해 가문이 흔들려 이에치카의 아들 요시토시[義俊]의 대[각주:12]에 모가미 가문의 야마가타 번은 소멸하게 된다[각주:13].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546년생. 데와[
出羽] 야마가타[山形] 성주. 아시카가 씨[足利氏]의 일족 시바 카네요리[斯波 兼頼][각주:14]의 후손으로 요시아키는 11대째. 임진왜란 때는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이에야스[家康]와 함께 주둔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야마가타 57만석이 된다. 1614년 1월 18일 죽었다. 69세.

  1. 요시히메도 한 미모로 유명했다 한다. [본문으로]
  2. 현재는 자오우 온천[蔵王温泉]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동시대의 군기물 혹은 다테 가문의 기록에도 요시아키의 동생 요시토키의 기록이 없기에(요시토키의 이름이 처음으로 거론되는 것은 18세기 들어서라고 한다) 요시아키가 동생을 공격하여 자살하게 만든 것은 의문시 되고 있다. [본문으로]
  4. 점령은 못하고 요리사다의 딸을 요시아키의 측실로 삼는 것으로 화해. 그러나 1582년 요시아키의 삼남 이에치카[清水 義親 - 모가미 씨의 일족 시미즈[清水] 가문을 상속]를 낳고 죽어 텐도우 가문과의 동맹이 끊기게 된다. [본문으로]
  5. 이 전인 1585년에 큐우슈우[九州]지방을, 1587년에는 칸토우[関東]와 오우슈우[奥州]에 각각 선포하였다. 이것을 선포함으로써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본문으로]
  6. 오오사키와 모가미 가문의 선조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오우슈우 칸레이[奥州管領] 시바 이에카네[斯波 家兼]이다. 이에카네의 큰아들인 타다모치[大崎 直持]가 오오사키[大崎] 지방을 영유하며 '오우슈우 탄다이[奥州探題]'가 되었으며, 둘째아들인 카네요리[最上 兼頼]를 데와[出羽] 모가미 군[最上郡]에 파견하여 '우슈우 탄다이[羽州探題]'로 만들었다. [본문으로]
  7. 코에이[光栄]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다이호우지 씨[大宝寺氏]로 표현된다. [본문으로]
  8. 히데요시의 사투금지령은 1587년 12월. 혼죠우 시게나가가 침공한 것은 1588년에 들어서이기에. [본문으로]
  9.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이때 얻은 쇼우나이 지방과 나중에 이봉된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가문의 영지로 인해 분단된 상황이었기에, 세키가하라 전쟁 때 모가미 영토를 침공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그에 따른 실패로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줄어들게 된다. [본문으로]
  10. 부친 요시모리[最上 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당시 이에치카의 나이 10살로, 성인식 후 이에야스[家康]의 이름글자 중 뒷글자 '야스[康]'가 아닌 앞글자 '이에[家]'를 받은 것을 보면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았던 듯. 후에 2대 야마가타[山形] 번주가 되지만 3년만에 죽어 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본문으로]
  12. 요시아키의 넷째 아들 야마노베 요시타다[山野辺 義忠]와의 다툼 끝에. 요시토시의 그릇이나 능력에 의문을 품은 가로들이 야마노베 요시타다 옹립을 꾀하였다. [본문으로]
  13. 그후 모가미 가문은 오우미[近江]에 1만석으로 멸봉 당하나 9년 뒤 요시토시가 병으로 죽자 남겨진 아이(요시토모[義智])가 너무 어려(당시 2살) 영지는 반인 5000석으로 줄어,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다이묘우 급 직신[交代寄合]이 된다. 사족으로 에도 시대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일족을 제외하곤 최대급(57만석)의 삭탈관직[改易]. [본문으로]
  14. 모가미 카네요리[最上 兼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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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05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마히메가 히데츠구 첩인건 알았지만 이에치카를 가신으로 바쳤던건 처음알았던 사실. 자신이 행했던 업보는 결국은 자신에게나 친한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교훈을 주는 인물...... 정말 이런꼴 보고 있으면 조선이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어요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치카와 비슷한 케이스로,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바쳐졌던 구마모토 호소카와[熊本細川藩]의 2대 번주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 忠利]도 비슷한 케이스입죠. 세째이면서도 이에야스와 안면을 튼 덕분에 둘째 오키아키[興秋]를 제쳐두고 번주가 될 수 있었습죠(장남인 타다타카[忠隆]는 세키가하라 때 부인이 시어머니(가라샤)를 버리고 튄 것 땜시 폐세자)

      조선도 뭐 왕자의 난이나 영조-사도세자를 보면 비슷하지 않나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건 흑역사는 있습니다.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05 1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도를 때려잡는걸 보면 깡 있어 보이는데 반대로 가문 보전 때문에 열심히 뛰어다녔군요;;;

    뻘플로....혁신에서 요시아키 나오기전 모가미로 플레이하면 카키자키 이상으로 빡세던 기억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6척짜리 철로된 봉을 들고 다녔다고 하네요.
      위에 있는 그림 전체 화면(신역사군상17. '나오에 카네츠구' 실려있습죠)을 보면 저런 표정으로 도망치는 어떤 놈을 그 6척짜리 철봉으로 떼리고 있는 장면입죠.

      혁신에서 카키자키도 다이묘우로 등장하던가요?..라고 한자 변환하고 있으니 홋카이도우[北海道]의 그 분이셨군요. ^^

  3. 나라 2009.10.05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 친구는 정말 인생무상이더군요..(멍)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런데 시게자네가 마사무네의 숙부였나요? 사촌으로 알고 있었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리 오랫동안 비워서 죄송했습니다. ^^

      깊이 들어가면 워낙 사람 좋던 요시아키가 이놈저놈에게 땅도 많이 떼어준 것이 화근이 된 듯하더군요. 그렇게 기득권이 된 세력이 강성한 탓에 어린 주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듯 합니다.

      다테 시게자네는 마사무네 할아버지 타네무네[稙宗]의 자식 사네모토[実元]의 아들이기에 우리나라로 하면 5촌 당숙이 됩죠.

  4. 이거참 2009.10.05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이런거 보면 일본인들이 참 독종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조상들이 이런 시대를 살아와 이렇게 잔인하고 독한 인종들만 살아남는 시대가 있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의 일본인들이니 말입니다. 지금도 무의식 한켠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안 가린다는 의식이 그들의 역사적 체험과 기억으로 남아있을거라 생각하니 소름끼치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렇지도 않기는요. 부하들의 주도권 다툼에 아들 잃었다고 슬퍼했다고 하더군요.
      이 글은 요약입니다. 한 인물에 관한 것을 쓰는데 천 몇 백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덧붙여..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가히 좋지 않은 시각이십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자기 오줌으로 갈증을 풀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데도 결국 죽였던 영조가 있는 우리는 역시 그렇게 잔인한 족속인가요?

      국가존망의 위기 때 자신의 영달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충무공을 모함하고 충무공의 참모부 건물을 하렘으로 만든 원균과 같은 민족인 우리는 역시 수단방법 안 가리는 막장인가요?

      편견과 우월감은 백해무익한 감정입니다. 부디 그런 감정에서 헤어나오셨으면 하는 마음에 건방진 소리를 하였습니다. 기분 나쁘셨겠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그네 2012.11.10 0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래전 포스트의 댓글이지만 몇가지 주제넘은 첨언을 해봅니다.
      영조의 경우도 비교적 최근인 몇년전에 비밀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죠.
      몰래 음식물의 반입도 지시하였으나 모두 차단되고 심지어는 건강상태의 보고도 거짓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죽고난뒤 무척 애통해하며 힘없는 자신을 원망했다는데..
      편지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실제 역사적 사건은 인과관계가 명확치않은 복잡한 사연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벌어지는것이므로 영조 자신의 의지만이었다고 보긴 어렵겠죠.
      일본의 경우 전쟁 + 인접한 여러 쿠니와의 혈연,정치적관계가 워낙 복잡한데 가신들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도 무시못하니.. 다테의 경우도 그렇고 그런 비극이 많을 수 밖에 없겠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은 어느나라나 비슷할것같습니다. ^ ^

      발해님 포스트 즐겁게 읽고 갑니다. 'ㅇ'¥

  5. 나라 2009.10.06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전국시대의 일본들인은 조선인들보다 잔인하기야 하겠습니다만. 에도 막부 시절이 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돈이 없어 칼을 팔고 타케미츠를 들고 다니는 30석 사무라이 모습을 그린 야마다 쇼지 감독 영화가 생각나네요.
    권력투쟁에 있어 잔인하게 끝나지 않은 예가 얼마나 될까요? 일본인들이 특별나게 잔인한 게 아니라, 그런 예가 드물 것 같은 걸요. 조선시대 당파 싸움도 끔찍한 결과를 낳았었습니다. 몽고나 중세 유럽, 혹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의 잔인함은요? 남아공의 샤카, 아메리카 제국끼리의 전쟁, 심지어 뉴기니나 에스키모인들은 규범에 맞지 않으면 그냥 죽여버리는 걸요. 굳이 오래 내려가지 않더라도 한국전쟁 시기의 한국인들은 아귀인가요? 일본을 구석기 시대로 돌릴 뻔한 미국은요? 영국과 독일의 2차 대전은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가시는 것 자체가 그렇게 싫어하시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악독한 일본인의 모습을 닮아가시는 것 같네요.

  6. 맹꽁이서당 2009.10.06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몰랐던 다이묘 한 명 또 알고 갑니다. ^^ 57만석이라는 거대한 번이 소멸한 것이 안타깝네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우에스기와 싸웠던 가문이었군요. 저는 아직도 세키가하라 전투의 방아쇠를 당겼으면서도 도쿠가와 가문과 한판 제대로 붙지 않은 우에스기 가케카쓰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에서는 모가미나 다테 가의 배후 습격이 두려웠다... 고 했는데, 그럴거면 아예 시작하지를 말던지.. --a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늦었지만 추석 잘 쇠셨길 바랍니다 ^^ 그러고보니 2016 올림픽은 리오데자네이루가 되었더군요. 남미 첫번째라는 상징성이 있으니 명분에서는 네 도시 중 가장 컸지만, 실제로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a

    아, 새 블로그는 무기한 연기하고 있습니다. 번역이란게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세키가하라 때의 우에스기 군의 행태는...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결전이 하루만에 끝난 것이 아니고 더 길어질 것이라 예상한 것이라고.

      모가미 가문으로 인해 분단된 영토를 하루 속히 연결하여 다시 침공해 올 이에야스에 대한 대비하던지,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졌다면 그 길로 칸토우로 침공했을 때를 위한 후방 안전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몰라도 불온한 시기에 쇼우나이[庄内]와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영토로 분단되어 있는 우에스기는 필연적으로 모가미 령을 침공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 다테 마사무네도 장기간 펼쳐질 것을 대비하여 오우슈우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같은 동군 계열인 난부 가문에 반란(와카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이용. 후에 이에야스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 한 마사무네가 암살)을 일으키기도 했습죠.

      조금 씩이라도 미리 해 놓는 편이 오히려 빨라지더군요.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

  7. ulanfu 2012.11.10 0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모술수와 암살,이간으로 점철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간악하고 비정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실제 가독을 물려받았을땐 무력을 사용할수도 없는 처지였고(친다테파들이 워낙 많은 상태여서)
    본인이 전쟁에 의한 피해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저런 간악한 인물에게 내통하거나 자기 주군을 배신하는 행동을 하진 못할겁니다 여하튼 배신이건,이간책이건 자기위하의 가신들에겐 굉장히 후한 군주여서 일개 항장에게도
    몇만석씩 녹봉을 줄정도로 관대한 군주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결과 지나치게 새력이 큰 가신들의
    모반으로 개역당하게 됩니다만... 실제 야마가타현은 현재에도 일본제일의 곡창지대고
    전국시대때도 사카이와 비견할정도로 사카다 지방의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가미직속 50만석포함 가신들의 녹봉을 다 합치면 50만석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요시아키가 죽기전엔 모가미계 무사들의 녹봉은 총 100만석을 넘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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