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켄신의 그림이 야마가타(山県)() 요네자와()()우에스기 신사(上杉神社)에 있는데, 거기에 그려진 켄신은 오히려 온화한 인상이다[각주:1]. 그 귀신과 같이 가열찬 무장의 모습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증언이 전해 내려온다. 켄신과 실제로 만났던 승려가,

 [날카로운 눈빛과 억센 표정을 하여 보는 이를 두렵게 하였다], 카와다 부젠(河田 豊前)이라는 사무라이와 닮았다 - 고 그 용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한 에치고(越後)에서 켄신과 대면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의 사자 사사키 사다츠네(木 定)는 독경(讀經)을 끝내고 나온 켄신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타치(太刀)를 꽉 쥐고 서 있는 그 모습은 오오미네(大峰)의 고키(五鬼)[각주:2], 카츠라기타카마(葛城高天)의 대천구(大天狗)[각주:3]의 화신인가 싶어, 온 몸의 털이 전부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켄신은 풍모뿐만 아니라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진언밀교(眞言密敎)의 엄격한 계율을 지키고 여성은 절대 가까이 하는 일 없이 일생 불범(不犯)”이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켄신은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관음대사(觀音大士[각주:4])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생모 토라고젠(虎御前)의 영향이기도 하였으며, 어렸을 때 부친의 거성(居城)카스가야마(春日山)성(城) 밑에 있는 린센(林泉)()에 맡겨져 명승(名僧) 텐시츠코우이쿠(天室光育)를 스승으로 삼아 엄격한 계율의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중이 되어 소우신(宗心)이라는 호()를 칭하며[각주:5], 카스가야마 성() 내에 비사문(毘沙門), 스와(諏訪), 고마(護摩) 등 세 채의 당()을 지었다.

 

 가혹하고 격렬한 전쟁터에서도 대일여래(大日如來)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목상 등을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전쟁터에 악업, 번뇌퇴산(煩惱退散)의 상징인 [()]의 군기를 휘날렸다. 어디까지나 우에스기의 군세는 [항마(降魔)의 군]이라고 켄신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정신주의(精神主義)의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정의와 질서가 그의 행동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배신, 배반 등이 일상다반사인 센고쿠의 시대에서는 희소가치가 있는 무장이었다. 그런 면에서 인간다운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는 대조적이다.

 1564. 켄신이 에치고(越後) 이치노미야[각주:6](宮) 히코 (弥彦神社)에 봉납한 [타케다 하루노부의 악행에 대해서(武田晴信)]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원문이 확실히 그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거기서는 자신의 싸움은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후, [친아비인 타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를 추방해서는 길에서 걸식(乞食)하게 만들어 효()를 버렸다. 이것은 신불(神佛)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써서 신겐의 악행을 비판하였다.

 

 황실에 대한 존경과 숭배도 두터웠다.

 당시 텐노우(天皇) 가문은 빈곤의 극에 달하여 즉위식 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1553년 당시의 고나라(後奈良) 텐노우(天皇)를 알현했을 때,

 가문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행복. 성은이 하해와 같다

 고까지 말하며 감격하였다.

 

 여성을 싫어하는 도덕가라고 하면 히틀러와 같은 비인간성을 상상해버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지금도 태어난 지방인 에치고는 물론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적측인 카이(甲斐)에서까지 인기가 높다. 그 중에서도 숙적 타케다 신겐에게 소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568년 신겐이 스루가(駿河)에 침입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이때 스루가의 이마가와 지자네(今川氏)와 사가미(相模)호우죠우 우지야스( 氏康)가 동맹하여 카이(甲斐)로 들어가는 소금을 국경에서 막아버린 것이다. 켄신에게도 에치고의 소금을 들여보내지 말라는 요청이 왔다.

 하지만 켄신은 신겐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겐)과 싸울 때는 활과 화살이지, 쌀과 소금으로 싸우겠는가?]

 라고 말하며 시나노로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보증할 수 없지만, 토우쿄우(東京) 국립박물관에는 신겐이 소금을 보내준 답례로써 보냈다고 하는 타치(太刀)가 전시[각주:7]되어 있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사서는 전해주고 있다.

 1573. 켄신 생애의 라이벌인 타케다 신겐이 죽었을 때의 일이다. 켄신은 본거지인 카스가야마 성()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뜨스운 물에 밥 말아먹고 있던 중이었지만, 갑자기 젓가락을 놓더니 입 안에 있던 것을 뱉어내고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명장이 죽었구나. 영웅인걸이라는 것은 신겐이야말로 어울리는 것. 칸토우() 무사의 기둥이 쓰러졌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가중(家中)에 명하여 3일간 상()을 치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혹은 이때 켄신은 - 이것은 신겐을 존경하는 의미가 아닌, 어디까지나 [무사의 신에 대한 예의로써 하는 것이다]라 말했다는 기록한 책도 있다.

 

 신겐의 죽음은 우에스기에게 있어서 타케다 공략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일거에 시나노로 쳐들어 가 타케다의 군세를 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노신(老臣)들은 그렇게 켄신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켄신은,

 젊은 카츠요리()가 이제 막 대를 이었는데 그걸 노리다니,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고 말하며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켄신은 여인을 가까이하지는 않았지만 술은 사랑한 무장이었다. 지금도 우에스기 신사에 애용했던 큰 술잔이 있다. 술안주로는 매실장아찌(우메보시=梅干)를 좋아했다고 한다.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화근이 되어 뇌일혈(腦溢血)로 죽었다.

 

 켄신의 생애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숙적 신겐과의 일기토였다.

 1561 9 9일 한밤 중. 우에스기 군은 은밀히 대군을 움직여 치쿠마가와(千曲川) 강을 건너고 있었다. 사이죠산(妻女山)에 진을 치고 있던 켄신을 기습하고자 한 신겐의 작전을 간파한 켄신은, 타케다 군의 허를 찔러 산을 내려온 것이었다. 산정에는 여전히 지금도 야영하고 있다는 듯이 화톳불을 활활 태워두었다.

 

 우에스기 군이 도하작전을 끝내고 카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전투 태세에 들어간 것은 다음 10일 새벽이었다. 짙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서서히 안개가 겉혔다.

 카와나카지마의 중앙 하치만바라(八幡原) 들판에 진을 치고 있던 타케다의 본진에서는, 사이죠산 기습의 소식이 언제 도착하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안개 건너편에서 갑자기 우에스기의 대군이 나타난 것이다.

 켄신은 특기인 [쿠루마가카리(車懸) 전법]으로 노도와 같이 타케다 진영을 덮쳤다. 타케다의 군세는 필사적으로 방어하였지만 차츰 밀리게 되어 신겐의 본진도 위험해 졌다.

 마침내 우에스기 군은 신겐이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켄신은 돌격하였다. 십 수기와 함께 신겐의 본진을 목표로 질주한 것이다. 감색의 갑옷에, 금색의 투구를 색의 명주로 감싼 모습이었다. 신겐은 칼을 뽑을 틈도 없었다. 걸상에 앉아 있는 신겐에게 마상에 있던 켄신이 칼을 내리쳤다. 그것을 신겐은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다. 켄신의 칼은 계속 신겐을 노렸다. 그때 마침 신겐의 근시(近侍)인 하라 오오스미노카미(原 大隅守)가 달려들어 켄신을 향해서 창을 찔렀지만 빗나가 말의 엉덩이를 맞추었다. 놀란 말을 켄신을 태운 채로 질주하여 신겐은 위험에서 목숨을 건졌다.

 이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타케다 측의 사상자 17000, 우에스기 측은 9000이라는 격전이었다고 한다.

 

 신겐 사후에 켄신의 전투로 유명한 것은 나나오(七尾)성(城) 공략일 것이다. 나나오 성()은 해발 300미터 높이의 험준한 곳에 있는 성이었다. 이를 켄신은 실로 40여 일을 소비하여 겨우 함락시킨 것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켄신은 카가(加賀) 테토리가와(手取川) 천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5만 대군을 물리쳤다.

 [우에스기와 만나서는 오다도 명성에 먹칠하는 강, 달려드는 켄신에 날라 튀는 노부나가]

 (上杉に逢うては織田も名取川( 手取川 역자 ), はねる謙信逃るとぶ長( 信長 역자 ))

 라고 후세에 쿄우카(狂歌)가 만들어질 정도로, 오다의 군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에스기 켄신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켄신의 죽음은 불시에 찾아왔다.

 1578 3 9.

 칸토우 출진 준비가 모두 끝나있었다. 노토(能登), 엣츄우(越中), 카가(加賀)를 평정한 지금, 남은 화근은 칸토우 뿐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켄신은 갑자기 기절하여, 인사불성인 채로 4일간을 보낸 후 생애를 마쳤다. 49세였다.

 

 사세구()로는,

한 때의 영화는 한 잔의 술, 49년은 한 번 취한 것.

삶 모르고 죽음 또한 모른다. 달을 희롱하는 이 또한 꿈과 같도다

一期ノハ一盃ノ酒、四十九年ハ一ノ間、

生知ラズ死又知ラズ、月是又夢中ノ如シ

 라는 한시(漢詩)가 남아 있다.[각주:8]

 

[우에스기 겐신(上杉 謙信)]

1530 1 12. 에치고(越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의 아들로 태어났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후에 마사토라(政虎)[각주:9], 테루토라(輝虎)[각주:10]로 바꾸었다. 형 하루카게(晴景)나 일족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각주:11])와 싸웠지만,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의 중재로 슈고다이를 이어받고 에치고 카스가야마 성주가 되었다. 1552년 망명해 온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서 우에스기(上杉)’라는 성()과 칸토우칸레이(管領)의 역직(役職)을 물려받았다. 타케다 신겐과의 카와나카지마 결전은 다섯 번에 이르렀다. 엣츄우(越中)를 평정하고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진공해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대결하여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578년 병으로 쓰러졌다.

  1. 글 머리에 있는 그림. [본문으로]
  2. 오오미네(大峰)산(山)은 도를 닦는 슈겐도우(修験道)의 도를 닦는 곳으로 유명한 곳으로, 그런 사람들을 수호하는 신으로 고키(五鬼)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다른 이름으로는 ‘카츠라기타카마보우(葛城高天坊)’라고도 한다. 일본 귀신인 천구(텐구=天狗) 중에서도 더욱 강력한 천구 한다. [본문으로]
  4. 대사(大士)는 보살(菩薩)의 존칭. 즉 관음보살(觀音普薩)을 말한다. [본문으로]
  5. 소우신이란 호를 칭하기 시작한 것은 1553년 켄신 나이 23살 때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텟슈우소우쿠(徹岫宗九)에게 사사받은 후에 쓴 법호이다. [본문으로]
  6. 그 지역(国)에서 가장 격이 높은 신사를 말함. [본문으로]
  7. ‘塩どめの太刀(소금막기의 칼)’이라는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죽기 한달 전에 만든 시라고 한다. [본문으로]
  9. 1560년에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의 직책과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의 가독을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 물려받을 때 노리마사에게 '마사(政)'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0. 1561년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테루(輝)'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1. 켄신의 후계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아비이며 켄신에게는 누나(仙桃院)의 남편 즉 매형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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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0 0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향년 49세라면 노부나가와 같군요. 그러고보니 일부 게임에서 여성화 된 우에스기 캐릭터는 피규어까지 나왔다죠... --a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0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장실 - 기절이라면 역시 뇌졸중 이겠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0 1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맹꽁서당님//란스에 나오는 켄신 양은 귀엽더군요~

    고사천사님//뇌내출혈(뇌일혈)과 뇌졸증은 다른 것인가요? 어느 쪽이건 전 의학 쪽은 '닥터 K'이후로는 관심을 끊은 상태라...^^;
    사족으로... 어떤 사람은 알콜 중독에 이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카게카츠의 암살설, 노부나가의 암살설 등등... 이 양반도 좀 죽음에 여러 설이 있더군요.
    어느 것이나 공통점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 후 4일간 한번도 깨어나지 않은 뒤 죽었다.. 정도인것 같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1 1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로 뇌출혈이 일어난 환자를 한번 옮겨봤는데 증세가 정말 순식간에 나빠지더군요, 변기에 머리를 대고 쓰러져 있었는데, 처음에 부를땐 반응을 하던데 구급차에서 의식 잃고, 단카에서 베드로 옮긴 뒤 보호자 기다리는 동안 의사가 부르더니 '지금 돌아가시기 직전인데 보호자 아직 안오는가요?' ..래더군요;

    그래도 4일 간게 켄신의 정신력 덕분 아니었을까..도 싶습니다마는..(아.. 이건 켄신빠로서의 생각이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yat2004 BlogIcon 개구쟁이 2008.06.21 15: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곡된 국사, 세계사를 바로 알리는 카페


    우리 인류는 오래전부터 역사를 기록하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수십, 아니 수백 수천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역사 자료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중에는 사실과 거짓이 들어있다.


    역사에는 기본원칙이 4가지정도 있다.

    1.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며,
    2. 역사는 역사가의 양심에 달렸으며,
    3. 역사는 주관적인 생각이자 입장, 느낌이고,
    4. 역사는 정확한 역사 기록이 아닌, 소문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역사가 또한 3종류로 분류된다.

    1. 거짓말하는 사람
    2. 잘못 알고 있는 사람
    3. 알지 못하는 사람


    우리 역사에는 수 없이 많은 날조, 과장, 왜곡이 되어있다.
    국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세계사 지식조차 거짓으로 꽉 차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국사 왜곡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정보화 시대이므로 세상을 넓게 바라보아야 한다. 포털 사이트 중에는 왜곡된 국사를 밝히는 카페는 수 없이 많다. 물론 그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만,
    우리 카페는 국사, 세계사 둘다 동시에 왜곡, 날조된 역사를 재평가 재조사하는 곳이다.

    노예해방자라고 알려져 있는 링컨, 비폭력 평화주의라고 알려진 간디,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 바스티유 감옥, 히틀러, 루즈벨트, 카이사르의 명언, 우리가 자주 보는 세계지도... 등등 수 없이 많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해 숨겨진 진실을 말하며, 알리려 한다.

    http://cafe.naver.com/nazzis - 승전국이기 때문에 파묻히고 날조, 왜곡 과장된 역사를 전 세계에 바로 알리는 카페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1 1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생과 사의 순간을 많이 접하셨겠군요. 안타까운 장면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근데 그런(켄신빠) 말씀하시면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섭해할 것 같습니다만..^^; )

    개구쟁이님//방문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하시는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22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이 자기 죽을 때는 아는 모양입니다 미리 사세구를 지어놓은 것을 보면말이죠
    아님 평소에 지어놓는게 그 시절엔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언제 죽을지모르는... 생과 사가 항상 함께한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3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세구로 지은 것이 아니라...
    그냥 만든 시인듯 합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사세구라고 그냥 붙인 듯 하고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16 18: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16: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에도() 시대에 스즈키 시게히데(鈴木 重秀)라는 사람이 호우죠우 가문의 역대 당주들을 평가하면서 우지야스에 대해서, '문무겸비의 무장으로 생애에 걸쳐 몇 번이나 전투에 나섰지만 패한 적이 없다. 거기에 인덕도 있었다. 이 시대에 관팔주(八州 = 칸토우())의 병란을 평정하여 크게 가명을 높였다. 고금의 명장이다'고 절찬하였다.

 우지야스는 칸토우의 태반을 자신의 산하에 두어, 조부인 소우운(早雲)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우지야스가 다스리던 오다와라(小田原)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51 4. 하코네(箱根) 유모토(湯本)소우운(早雲)사(寺)에 참배하고 오다와라에 들린 쿄우토(京都) 난젠()사(寺)261대 토우레이치오우(東嶺智旺)가 직접 보고 쓴 것이다.

 [유모토의 소우운 사()에서 1(4km). 수도인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거리는 작은 길만 수만 개. 땅에는 먼지 하나도 없다. 동남쪽은 바다이다. 바닷물이 오다와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의 성()은 거목 울창한 곳에 있으며 크고 아름답다. 삼면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의 물은 가득 차 있어 깊고 낮음을 잴 수 없다. 백조나 물새들이 날개를 쉬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는 겉으로는 문(), 속으로는 무()의 인물로 형벌(刑罰=정치)이 깨끗하여 원근(遠近)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시대 천하 무쌍의 패왕이다.]

 이렇게 전성기의 호우죠우 씨()의 오다와라를 굉장히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불패의 용장이라 일컬어지며 16살의 첫 출진(初陣)을 경험한 이후 병으로 죽을 때까지 36번의 전투에 출격하여 한번도 적에게 아게마키([각주:1])를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군의 선두에 서서 적과 부딪쳐 몸에는 도창(刀槍)의 상처가 7군데 있었고, 얼굴에도 2군데의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몸 정면에 있는 상처를 [우지야스상처(氏康傷)]라고 부르며 존중 받았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의 사람됨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12살 때였다. 철포는 아직 드물었던 시기로 어느 날 우지야스는 철포의 사격 연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우지야스는 일순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우지야스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확 빨개져서는 곧바로 작은 칼을 꺼내어 자해(自害)하려고 하였다. 근시(近侍)의 무사가 당황하여 이것을 막았다. 우지야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우지야스를 부속 가로(家老)인 시미즈()라는 자가 옛날부터 용기 있는 무사일수록 잘 놀란다고 합니다. 뛰어난 말도 성격이 예민하여 잘 놀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참았다고 한다.[각주:2]


 우지야스의 무명(武名)을 천하에 널리 알리게 한 것은 일본 3대 기습전[각주:3] 중에 하나로 꼽히는 카와고에(河越) 전투이다.

 1545 8.

 호우죠우 가문의 영국(領国)과 국경을 접하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 上杉 憲政)는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토모사다(扇谷 上杉 朝定)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와 손을 잡고 우지야스를 일거에 괴멸시키고자 하였다.

 요시모토는 우지야스 측의 스루가(駿河) 나가쿠보(長久保)성(城)을 포위하였고,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역시 공격해 왔다. 한편 노리마사는 토모사다와 함께 호우죠우 츠나시게( 綱成)가 지키는 카와고에(河越)() 탈환을 꾀했다. 카와고에 성() 1537년에 츠나시게에게 빼앗긴 토모사다의 거성(居城)이었다. 츠나시게는 원래 쿠시마(福島)라는 성()이었지만 호우죠우 씨()의 보호를 받으며 우지야스의 동생 격의 신분이 되어 있던 인물이었다[각주:4].

 더욱이 이 카와고에 공성(攻城)에는 우지야스의 매제(妹弟)인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도 가담하고 있었다. 노리마사의 꼬임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카와고에 성()은 노리마사, 토모사다, 하루우지 8만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다. 그리고 반년에 걸친 공격을 받아 언제 낙성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1546 4.

 우지야스는 카와고에 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8천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병력의 차이는 10 1이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우지야스에게 승산이 없었다.

 우지야스는 거기서 사자(使者)를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 보내어 카와고에에서 농성(籠城)하고 있는 병사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그래 주신다면 카와고에의 성과 영지(領地)를 쿠보우(公方)님에게 바치겠습니다하고 몇 번에 걸쳐 애원한 것이다. 하루우지는 듣기는커녕 비웃으면서 네놈들이 바치지 않아도 당장 내일 즈음은 성이 떨어질 것이다. 성 안의 병사들은 전부 죽이고 또한 우지야스도 잡아 죽일 테다고 잘난 척 했다.

 우지야스는 또한 우에스기의 부장(副將) 오다(小田)()의 부하인 스게노야(菅谷)라는 자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어떻게든 성의 츠나시게를 도와줄 방법은 없겠습니까? 도와만 준다면 카와고에 성()은 당신에게 받치겠습니다. 만약 전투라도 일어난다면 우리 쪽은 병사 수가 적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고 전했다. 우에스기 측은 우지야스의 이러한 애원에 [호우죠우 측은 겁쟁이 병이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 소문은 우에스기 연합군 전체로 퍼져, 이제는 다 이기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지야스의 노림수였다. 우지야스는 시노비([각주:5])를 써서 적측의 정세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4 20일 밤.

 우지야스는 경장(輕裝)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돌격대를 편성해서는 적진 깊이 잠입시켜 놓고서는 불을 밝혀 성안에 있던 병사들과 호응하여 기습을 하였다. 어두운 밤 중의 습격에 우에스기 연합군은 단지 당황하여 허둥댈 뿐으로, 결국 도망을 치다 오우기가야츠 토모사다는 전사하였고 노리마사, 하루우지는 간신히 도망쳤다(카와고에 전투:위키 한글판).


 1554.

 그때까지 적이었던 타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삼국동맹(同盟)을 맺었다. 우지야스의 장남 우지마사(氏政)와 신겐의 딸을 결혼시키고, 우지야스의 딸을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에게 시집 보내어 상호간에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스루가(駿河)젠토쿠()사(寺)에서 모여 맺었기에 세상에서는 이를 [젠토쿠 사의 회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동맹도 요시모토가 죽은 다음에는 깨어진다.


 우지야스는 민정가(民政家)로서도 뛰어나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보다 먼저 본격적인 검지( 전답의 석고를 정하는 것)와 세제(稅制) 개혁을 행하였고, 전마(傳馬 수송용의 말)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통화를 명나라의 영락전(楽銭)으로 통일하여 상공업자를 보호하는 등 경제 정책에도 능하였다. 또한 아시카가 학교(足利[각주:6])를 원조하거나, 와카(和歌)를 산죠우니시 사네타카(西 )에게 배우는 등 문화인(文化人)적인 측면도 겸비하고 있었다.


[호조 우지야스( 氏康)]

1515년 우지츠나(氏綱)의 아들로 태어나다. 소우운(早雲)에서부터 3대째이다. 1541년 부친 우지츠나가 죽은 뒤 27살의 나이로 가독을 이었다. 카와고에의 야전(夜戰)에서 승리하여 무사시()의 태반을 영유(領有)하였고, 1551년에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히라이(平井)성(城)을 공략하여, 칸토우()를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과도 싸웠다. 1571년 죽었다.

  1. 갑옷의 등 뒤에 묶은 끈을 지칭. 링크타고 가시면 이미지를 볼 수 있습죠. [본문으로]
  2. 우지야스 12살이면 1527~8년경. 많이 알려진 타네가시마(種子島) 섬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 이지만, 위의 우지야스 일화가 실린 [호우죠우 오대기(北条五代記)]에 따르면 1510년에 외국에서 일본 사카이(堺)로 전래되었고 1528년 즈음에 오다와라에 있던 늙은 중(山伏)이 사카이에 갔다가 신기하여 한 정 사서는 우지츠나(氏綱 – 우지야스의 부친)에게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나머지는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 [본문으로]
  4. 둘 다 1515년 태생으로 동갑이긴 하다 [본문으로]
  5. 닌쟈(忍者)를 말한다. [본문으로]
  6.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 후에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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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02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기 쉽게 정리가 참 잘 되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2 1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칭찬 고맙습니다~
    (참...月山殿의 이야기 건필을 기원하겠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02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月山朝鮮守殿의 전기문도 구상중입니다.
    攝津浪人의 자제로 태어나 云云하는 스토리로요. ㅋㅋ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5.02 1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사람도 보면 전국사를 통틀어도 빠지지 않은 명장인데 주위에 너무 괴물(다케다씨, 우에스기씨)들이 많아서 묻히는 경향이 있죠. 마치 우리나라가 지금 위치에서는 미국, 일본 이런 애들 땜에 새우로 보이지만 유럽 한복판에 갖다놓으면 한따까리하는것과 비슷하달까 -_-;;
    이 사람이 3할인가 4할을 세금으로 거둔다고 하던가? 지금 현대의 기준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은 세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도쿠가와가가 들어왔을 때 잇키가 좀 일어났다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2 15: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다(小田) 씨의 가신 菅谷씨는 스게노야씨입니다.

    가와고에 싸움은 호조측이 잘 한 건지 간토 바쿠후(?)가 삽질한 건지…

  6.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5.02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풍림화산>에서 카와고에의 야전을 본 것 같은데 정말 대담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3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그 셋츠도 정말..센스 짱이십니다~

    흰꿈님//전 주변에 맞게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 아마 쪼그만 애들이 모인 격전구에서는 거기에 알맞게만 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잇키까지 일어났나요? 불만은 있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거기까지는 모르겠군요. 함 검색해봐야 겠습니다.

    신사본론님//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얼릉 고쳐야겠군요 ^^)
    뭐... 강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강하다는 말에 따르면 호우죠우 측이 잘 한 것이겠죠.

    턴오버님//그...그런가요!! (..라고 말할 때는 항상 보고 싶더니 막상 시간나면 딴 거 보기만 하다 보니...^^)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kirkeis BlogIcon 키르케 2008.05.03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전부 오빠가 번역하는거에요? 오앙. 멋지당.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3 1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새삼스럽게...*-_-*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04 12: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상화는 뽀샵 덕택에 피부에 잡티하나 없이 깨끗하군요(-_-..칼빵은 어디 숨기고;)
    한니발 초상화 같은 것도 아닌지라 각도로 숨길만한 상처가 아닌듯 싶은데(;;...)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군상 등에 실린 그림과 미묘~하게 다르더군요. ^^
    뭐 다테 마사무네같은 경우도 초상화에 양쪽 눈 그려달라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거 보면 모델의 희망이 아니었을지...^^ 뭐 저 그림 자체가 언제 그려졌는지 모르다보니(아...제가 말입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군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5.27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분명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守의 인장은 대세 판단미스가 아니었나 싶군요.. 다케다 오다가 천하포무를 실현시켜가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7 2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보면 오다 가문의 영토 확장 속도가 그만큼 빨랐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20년 사이에 일본의 1/3을 차지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누구도 그렇게 빨리 확장할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일본판 北条早雲

  소우운은 센고쿠 다이묘우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들 한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낭인에서 칸토우[東]를 제패하는 거대 다이묘우까지 성장한 것이었다.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 아사쿠라 토시카게[朝倉 敏景]의 아들]는 소우운을 평하며,

 창고에 바늘을 모으는 듯이 인색하게 모으면서막상 싸울 일이 있으면 귀중한 보석이라도 깨부숴 사용하는 듯 하였다
 고 말하였다.

 

 소우운은 '소우운님 이십개조[早雲寺殿二十箇]'라는 가훈(家訓)을 남기며, 여기에서 '밤에는 저녁 8시에 취침하고 아침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몸가짐을 가다듬도록……'이라고 일상의 세세한 점까지 배려하고 있다. 소우운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노력가로 늙어서도 여전히 눈과 귀가 건강하였고, 이빨도 빠지지 않아 장년기(壯年期)와 변함없는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45살까지의 전반생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가
시나노[信濃]의 오가사와라 사다모토[小笠原 定基]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오가사와라의 가신 세키 우마노죠우[ 右馬允]가 자신과 같은 이세[伊勢] 출신으로 동족(同族)이라 말하였다. 처음에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는 이름을 썼던 소우운의 출신에 대해서 이것이 가장 유력한 근거라 평해지고 있다.

 

 또 하나 유력한 것이 쿄우토[京都] 출신이라는 것이 있다.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요직(要職)을 역임하는 쿄우토[京都] 이세 씨[伊勢氏]의 사다후지[貞藤]의 아들이라고 하며, 사다후지는 쇼우군[軍] 요시마사[義政]의 분노를 사서 낭인이 되었으며 '오우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세[伊勢]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빗츄우[備中]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빗츄우에서 쿄우토[京都]로 갔고 이어서 스루가[駿河]로 내려갔다고 한다.

 사서에 따르면 빗츄우[備中] 시츠키 군[後月郡] 에바라[江原]타카고에야마[高越山] 성주(城主) 이세 스루가노카미 사다미치[伊勢 駿河守 貞通]의 양자(養子)가 소우운으로, 키비츠 다이묘우진[吉備津 大明神]의 계시를 받아 주변 명가(名家)의 자제들과 함께 큰 꿈을 품고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현지에는 이에 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시카가 바쿠후의 기록 중에는 빗츄우 출신의 이세 카몬노스케 모리요리[伊勢 掃部助 盛頼]의 이름도 보인다.

 

 어찌되었든 출신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우운은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 義忠][각주:1]의 측실이 된 여동생의 신세를 지기 위해서 스루가로 왔다고 한다. 이 때 행동을 함께 한 6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소우운을 포함한 7명의 사무라이는 함께 칸토우[東]로 무사(武者) 수행을 하러 갔는데, 그 출발에 앞서 신수(神水)를 나누어 마신 후, “ 7명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싸우지 않겠으며, 이 중 한 명이 다이묘우[大名]라도 된다면 나머지 6명은 그의 부하가 되어 돕자는 약속을 맺었다고 한다.

  6명은 후에 '소우운님 초창기의 가로중[(早雲)寺殿草創御家老衆]'으로, 호우죠우 일족에 준하는 '어유서가(御由)'라 불리며 존중 받았다.

 

 소우운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이마가와 가문의 내분(內紛)이었다.

 1476 2.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쇼우군[軍] 요시히사[尚]의 명령으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시바 씨[斯波氏]의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서 출진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시바 씨의 잔당에게 습격 받아 죽음을 당했다. 남아 있는 아들 타츠오우[龍王=후에 우지치카[氏親][각주:2]]가 아직 어려 가신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타츠오우는 난을 피하여 모친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타츠오우는 소우운의 여동생 키타가와도노[北川殿]의 아들로 소우운의 조카였다.

 

 내란 진압을 위해서 호리고에 쿠보우[堀越公方]인 마사토모[政知]에게서 우에스기 마사노리[上杉 政憲], 오오기가야츠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에게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이 파견되었고, 소우운은 이 둘에게 중재안을 제안했다.

 이마가와의 가신들이 둘로 나뉘어 싸워서는 가문 멸망뿐 아니라 주변으로 전쟁이 확대될 뿐이다. 우선 오시카 노리미츠[小鹿 範満][각주:3]가 당주가 되고, 후에 타츠오우가 성인식을 치렀을 때 가독을 물려받게 해 달라

 도우칸도 마사노리도 이치에 맞는 이 제안에 찬성하여 중재는 성공되었다.[각주:4]

 소우운은 이 공로로 인하여 후지[富士郡] 시모카타[下方] 장원의 13고을을 하사 받아 코우코쿠지 성[城]의 성주가 되었던 것이다.

 

 소우운은 민심을 잡는데 뛰어났다.

 코우코쿠지 성주가 되자 곧바로 영내(領內)의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에게 이 영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받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존경 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소우운은 제2의 찬스를 맞이하게 된다.

 1491년에 일어난 호리고에 쿠보우의 내란이었다.

 당주 마사토모가 죽어 챠챠마루[丸]가 뒤를 이었지만, 배다른 동생인 쥰도우지[潤童子][각주:5]와 그 모친을 한꺼번에 죽인 것이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즈[伊豆] 혼란에 빠졌다.

 

 호시탐탐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우운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스루가[駿河]의 무사들을 이끌고 질풍과 같이 이즈를 침공하여 챠챠마루를 죽이고 순식간에 이즈를 점령해 버렸다.

 침공에 앞서 소우운다운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병(病)을 가장하여 이즈[伊豆] 쥬센 사[修善寺] 온천에 머물면서 나무꾼들을 불러 소문을 청취하고, 이즈[伊豆]의 지리나 무사들의 재정 상태 등 모든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것이 이즈 공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점령 후의 행정에도 소우운의 탁월한 수완이 발휘되었다.

 난을 피해 산 속으로 도망친 무사나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던 것을 그대로 허용한다고 하는 한편 만약 이렇게 해주는데도 나오지 않으면 논과 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집도 불태운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또한 소우운은 과감한 선정을 펼쳤다. 연공(年貢)을 사공육민(四公六民)으로 해서, 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받고 나머지 60%는 백성이 가지게 한 것이다. 당시의 세율로는 오공오민(五公五民)이라도 대단히 기뻐들 하였기에 얼마나 이즈[伊豆]의 백성들이 기뻐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우리 지역도 신쿠로우 님의 지역이 되었으면……”하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즈를 수중에 넣은 소우운의 다음 표적은 칸토우[東]였다.

 소우운의 칸토우 제패의 야망을 알려주는 일화로써 미시마 묘우진[三島 明神]에게 참배를 가 꾼 영몽(靈夢)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 2일의 새해 첫 꿈이었다.

 넓은 들판에 두 그루의 큰 삼(杉)나무가 치솟아 있었다. 어디선가 쥐새끼 한 마리가 조르르 달려 나와 큰 삼나무의 뿌리를 갉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쥐새끼가 점점 커져 커다란 호랑이로 변했다. 그때 꿈에서 깼다

 소우운은 이 꿈을,
 “
두 그루의 큰 삼()나무는 칸토우[
東]를 지배하는 두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6]을 뜻할 것이다. 나는 쥐띠니까 두 그루의 삼나무를 갉은 쥐는 나 자신이다. 이것은 소우운의 자손이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멸하고 칸토우[東]의 지배자가 된다는 굉장히 경사스러운 꿈이다
 
하고 점쳤던 것이다. 이것은 소우운이 꿈을 빌어 가신들에게 말한 장대한 포부였던 것이다.

 

 칸토우 진출의 시작은 오다와라[小田原] 공략이었다.

 이 작전에 앞서 소우운은 교묘한 계략을 생각해 내었다. 오다와라 성의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 藤頼]에게,
 “
우리 영지(領地)에 있는 산에서 사슴 사냥을 하였더니, 사슴들이 모두
하코네[箱根] 을 넘어 도망간 듯 합니다. 그래서 몰이꾼을 오오모리 님의 영내(領內)로 들여보내어 이즈[伊豆] 쪽으로 사슴을 몰고 싶습니다만……”

 하고 몰이꾼을 오다와라 영내(領內)로 들여보내는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사실 이 몰이꾼들은 젊고 건장한 젊은 무사들이었다. 소우운은 수백 명을 몰이꾼으로 변장시키고, 거기에 또 수백 명을 개 몰이꾼으로 보이게 하여 은밀히 죽창 등의 무기를 가져가게 하였다.

 

 1495 2.

 심야가 되어 어둠이 짙어지자 오다와라 성 밑이 내려다 보이는 이시가키야마 산[石垣山][각주:7] 하코네야마 산이 한 순간에 밝아졌다. 불이었다. 그 불이 순식간에 오다와라 성 밑까지 다가왔다. 마치 불의 파도가 덮치는 듯 했다. 이는 소우운 측이 횃불을 달아 풀어놓은 소()들이었다. 그 뒤 몰이꾼으로 변장한 무사들이 계속해서 공격하였다. 이 기습 전법으로 오다와라는 눈깜짝할 사이에 함락되었다.

 

 소우운은 오다와라를 손에 넣자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사가미[相模]를 시작으로 칸토우[東] 각지를 차츰 제압해 갔던 것이다.[각주:8]

 

[호우죠우 소우운( 早雲)]

1432년에 태어났다. 처음엔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 칭하였고, 후에 불문에 들어가 소우운안소우즈이[早雲庵宗瑞]라는 호를 칭하게 된다. 1519년 이즈[伊豆] 니라야마[韮山]에서 죽었다. 88.

  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죽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할아버지 [본문으로]
  2. 요시모토의 아비. [본문으로]
  3. 요시타다와는 사촌지간. [본문으로]
  4. 결국 타츠오우가 15살이 되어 우지치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성인식을 치렀음에도, 가독을 물려받지 못했기에 소우운은 병사를 모아 노리미츠를 죽이고 우지치카를 이마가와 당주로 세웠다 [본문으로]
  5. 이 쥰도우지가 2대 호리고에 쿠보우로 결정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야마노우치[山内]와 오오기가야츠[扇谷]의 우에스기 가문. [본문으로]
  7. 당시는 카사카케야마(笠懸山)라 하였다.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 이 산에 하루밤만에 이 산에 성을 쌓을 때 이시가키[石垣]를 가진 성을 쌓았다고 해서 이시가키야마[石垣山]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문으로]
  8. 거성은 니라야마 성[韮山城]이었다. 오다와라로 본거지가 옮겨진 것은 아들 우지츠나(氏綱) 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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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12 1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마가와 요시타다가 1473년생인데(제 기억이 맞다면), 소운의 여동생이 낳았으니, 1456년 소운 탄생설은 좀 빡빡하군요.. 흠냐..

    그나저나 혁신에소 소운 전용기술로 화우계가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요(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3 13: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즈음은 여동생이 아니라 누나라고 하는 것 같더군요(예전 여동생이라고 할 때도 배다른 여동생이라 나이가 그 만큼 벌어졌다고...) 오히려 1456년 쪽이 힘을 얻는 것 같지만, 여전히 대기만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아마래도 이 쪽이 더 드라마틱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화우소는.... 일본엔 그 전에도 예가 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라고... 쿠라카라 계곡의 전투(倶利伽羅峠の戦い)에서 역시 화우계를 이용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선 산 전체를 가득할 정도의 소를 짧은 시간에 구하기도 힘들 것이며, 소가 귀해 말로 밭을 갈던 나라이니 만큼(그 만큼 쿠교우(公卿)들은 신분의 상징으로 우마차를 끌고 다닌 것을 보면), 중국에 있던 고사를 가져다 쓴 것이 아닐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3.14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쨌든 장군님>이신 키소 요시나카 이야기군요. ㅎㅎ
    헤에케 모노가타리 읽을 때 나오긴 했습니다만, 토모에고젠에만 관심이 가서 요시나카는 듣보잡 취급이었죠. ㅎ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5 08: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사히 쇼우군]과 [어쨌든 장군님]은 묘하게 어울리네요 ^^
    확실히... 요시나카보다는 토모에고젠이 더 인지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코에이의 원평합전(源平合戦)이라는 게임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요상하게 무력이 높아서 인상적이었습죠)


 오오타 도우칸은 에도성을 축성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원래 에도성은 주가(主家)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의 거성인 카와고에 성[川越城]의 지성(支城)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후년의 에도성(지금의 황거(皇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소규모 성이었지만 자성(子城), 가운데 성(中城), 외성(外城)이라는 삼중으로 되어있고 주위에는 깊은 해자(垓子)가 둘러쳐 있었다고 한다.

 도우칸은 이곳을 30년간 거성으로 했지만 한 번도 공격 당한 적은 없었다. 성내의 저택을 죠우쇼우켄[勝軒]이라 이름 지어 여기서 자주 와카(和歌)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도우칸은 문무겸비의 명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젊었을 적에는 무()에만 열중했었다고 한다.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그 유명한 [황매화 마을(山吹)]의 고사이다.

 

 사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도우칸이 한 민가(民家)에 가서 도롱이[각주:1]를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소녀가 황매화 한 송이를 내민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우칸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 꽃을 받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노신 중에 한 명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황매화는 열매[각주:2]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에 있는 카네아키라 친왕[兼明 親王],

일곱 겹 여덟 겹 꽃이 피지만 황매화는, 열매가 하나도 없으니 슬프구나

七重八重花けども山吹みのつだになきぞしき

라는 옛 시를 이용하여 소녀는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한 것이었다. 도우칸은 이 때 소녀의 풍부한 문학적 소양에 놀라고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각주:3]. [각주:4] [각주:5]

 이로부터 도우칸은 문학의 길에도 힘을 써 ()도 발전했던 것이다. 역사서, 와카선집(和歌選集), 기록, 의서(醫書), 병서(兵書) 등 수천 권을 에도성 죠우쇼우켄에 모았다.

 

 전투에서도 와카로 인해 크게 덕을 보았다.

 1483 10.

 바야흐로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의 군세가 한밤 중에 해안에 이르러 절벽아랫길을 지날 때였다. 그러나 밀물인지 썰물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적의 복병을 두려워하여 누구도 알아보려 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도우칸이 가보지 않고 맞춘 것이다.

 옛 시에,

멀리서건 가까이서건 우는 바다의 물떼새의 노래 소리에 물이 차고 빠진 것을 안다

遠くなり近くなるみの浜千鳥、潮の干をにてぞ知る

 가 참고가 되었던 것이다. 물떼새(浜千鳥)의 울음이 멀리서 들렸기에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거슬러, 당시 칸토우[]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칸토우 쿠보우[東公方 칸토우()를 지배하는 아시카가 씨[足利氏]를 지칭][각주:6]코가[古河][각주:7]호리고에[堀越][각주:8] [각주:9]로 나뉘어져 대립하였고, 코가 쿠보우[古河公方]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와 칸레이[管領 쿠보우의 보좌][각주:10] 가문인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11]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内上杉][각주:12]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각주:13]의 두 가문]이 계속 싸우고 있었다. 칸레이 가문의 실권은 가재(家宰[각주:14])의 손에 있어 야마노우치는 나가오 카게노부[長尾 景信], 카게하루[景春] 부자(父子), 오오기가야츠는 오오타 스케키요[太田 資清], 스케나가[資長]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 스케나가가 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칸[道灌]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 것이다.

 

 1476.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 나가오 카게하루가 주가(主家)에 반기를 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더구나 이를 공격한 우에스기가 패배를 당한 것이다. 여기서 도우칸은 두 우에스기 가문[각주:15]을 도와 나가오 가문[長尾家]와 싸우게 되었다. 도우칸은 많은 전투를 경험하지만 한 번도 지는 일이 없었다. 도우칸의 가신들은,

 우리 주군은 제갈 공명의 환생이다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무패의 전력을 자랑하는 도우칸에게도 검은 음모의 그림자가 다가오게 된다.

 잠재되어 있던 야마노우치-오오기가야츠 양 우에스기 가문의 대립이 깊어지던 중, 도우칸의 주군인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가 도우칸의 명성을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 上杉]의 당주 아키사다[]에게서 모략의 손길이 뻗쳐왔다. 아키사다는 사다마사에게 밀사(密使)를 보내어 도우칸을 없애면 손을 잡아도 좋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도우칸이 주군 사다마사에게 암살당한 곳은 사가미[相模]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에서였다. 초대되어 목욕을 하던 중에 자객에게 습격 당한 것이다. 칼질을 당했을 때 도우칸은,

 당가(當家 - 오오기가야츠 가()) 멸망!”

 이라 외치고 쓰러졌다고 한다.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

 1432년 태생. 첫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후에 모치스케[持資]로 바꾸었다. 24살에 정오위하(正五位下) 빗츄우노카미[備中守]에 서임.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로 에도성의 축성자. 암살당한 것은 1486 7 26. 55.

  1. 일본 발음으로 ‘미노[みの(蓑)]’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일본어 발음으로 ‘미[み(実)]’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열매[実]와 미노[みの]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했다는 말. [본문으로]
  4. 이 이야기는 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우칸은 어렸을 때부터 ‘카마쿠라 오산[鎌倉五山 – 유명한 절 다섯 개]’에서 수행을 한 천재로, 특히 도우칸의 아버지 또한 굉장히 시에 관심을 갖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를 맺었기에 그런 환경에서 자란 도우칸에게 문학적 소양이 없을 리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노사어록(老士語録)]이라는 책에 와카가 뛰어난 늙은 여자와 도우칸 과의 이야기가 있어, 이것을 후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자신의 저서 [상산기담(常山紀談)]에서 재미있게 각색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将軍)은 종가(宗家), 카마쿠라 쿠보우는 분가(分家)가 되겠다.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의 셋째 모토우지[基氏]의 자손이 대대로 카마쿠라 쿠보우를 이어받았다. 독립지향이 강하여 자주 종가인 쇼우군 가문에게 개겼고, 이것이 후에 칸토우 분란의 원인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리지날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즉 칸토우쿠보우[関東公方]. 대대로 카마쿠라에 거점을 두었다. 카마쿠라 쿠보우의 보좌역인 칸토우 칸레이(関東 管領)가 쇼우군 가문 편을 들었기에 카마쿠라 쿠보우와는 자주 다투었다. 이러다가 5대 쿠보우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당시의 칸토우 칸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 憲忠, 야마노우치 가문 출신]를 죽인 것을 발단으로 쿄우토쿠의 난[享徳の乱]이 일어나고,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측은 시게우지의 부당함을 막부에 일러, 이에 바쿠후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칸토우 평정을 명하자 노리타다는 카마쿠라로 침공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다른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카마쿠라를 비워 두었던 시게우지는 카마쿠라를 탈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시모우사[下総]의 코가[古河]를 본거지로 삼아 이때부터 [코가 쿠보우]를 칭하게 된다. [본문으로]
  8. 카마쿠라에서 카마쿠라 쿠보우(즉 칸토우 쿠보우)를 쫓아낸 바쿠후 쇼우군(당시 아시가 요시마사[足利 義政]는, 그 자리에 개김성이 강해진 먼 친척보다 자신의 동생을 임명하고자, 승려였던 마사토모[政知]를 환속시켜 정식으로 칸토우 쿠보우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강성한 시게우지 세력과 그 시게우지와 싸웠던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가문 내에서조차 마사토모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異論) 등으로 인해서 카마쿠라까지 가지 못하고, 이즈[伊豆]의 호리고에[堀越]에 머물렀다. [본문으로]
  9. 이로 인해 이 당시는 칸토우 쿠보우가 둘이 생기는 결과가 되었다. 빽으로 바쿠후가 있는 호리고에 쿠보우, 여전히 칸토우에서 끗발이 날리는 코가 쿠보우. 둘 다 칸토우 쿠보우를 자칭했기에 구별을 위해서 ‘코가 쿠보우’, ‘호리고에 쿠보우’라 지칭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10. 카마쿠라 쿠보우를 보좌하기 위해서 바쿠후에 칸레이[管領]가 있듯이, 칸토우[関東]에도 칸레이[管領]가 두어져, 이를 칸토우 칸레이[関東管領]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우에스기 씨는 무로마치 바쿠후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 尊氏]의 외가. 초대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인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 憲顕]는 타카우지와 외사촌지간. [본문으로]
  12. 거처가 카마쿠라의 야마노우치[山内]라는 곳에 있었기에 야마노우치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초기를 제외하곤 대대로 칸토우 칸레이 직을 세습하였다. [본문으로]
  13.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먼 친척. 그래서 부하. 거처가 카마쿠라의 오오기가야츠[扇谷]라는 곳에 있었기에 오오기가야츠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우에스기 젠슈우의 난[上杉禅秀の乱]’ 때를 제외하곤 야마노우치 가문의 부하였으나, 오오타 도우칸의 활약으로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된다. [본문으로]
  14. 그 가문의 필두 중신. [본문으로]
  15.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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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3.07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지막 한마디는 좀 광오하기까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만도 한 인물이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7 2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하가 주군보다 뛰어난데 중용하는 능력이 있는 주군은 흔치 않죠. 뭐 결국 범용한 레벨의 주군이었던 듯. 호죠 소운의 반에 반만 닮았어도..쩝-_-;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kjw791 2008.03.08 0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많은 능력을 지고 있으면 견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네요. 특히 전국시대(초기지만) 부하의 모반, 배반을 보고 있으면 주군이라면.... 약간의 의심이 생기는게...쩝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8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이번에 이 글을 쓰려고 좀 찾다보니 원래 좀 난체 하는 부분이 있는 사람이더군요 ^^

    다메엣찌님//명문가에서 태어나 떠받들리면서 살아온 사람에게 수하의 명성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kjw791님//말씀하시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역심을 품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먼저번에 번역한 말년글에 따르면, 죽을 때 "당가 멸망"이라는 말을 외친 것은 평소부터 주군을 의심한 것 아니냐는 말이 있던데 그런 면에서 오오타 도우칸도 너무 무방비 했던 것 같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3.08 1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결점을(호색이나 술에 빠진다던가) 보여주는 꾀를 내었더라면... 오히려 자신에 대한 강한 자심감이 주군에게 위험을 느끼게 한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8 17: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 말씀대로 만약 그리했다면 먼저 자기 부하들에게 버림받았을 지도 모르죠. ^^
    (또한 당시는 그것이 무능 혹은 야망이 없음을 나타내는 대명사도 아니었을 것 같구요)

    그래서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키가와 가즈마스(川 一)

1586 9 9 병사 62.

1525 ~ 1586.

오우미(近江) 코우가(甲賀)영주(小領主)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중신(重臣)으로 출세. 이세(伊勢) 평정, 타케다(武田) 공략, 칸토우() 공략에서 전공을세워 칸토우 칸레이(管領)에 임명받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는 삽질을 연속. 히데요시(秀吉)에게 항복하여 실의(失意)속에서 방랑하다 병으로 죽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에서>







오다 군단의 군단장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를 평정했을 즈음부터 노부나가를 섬겨 오대군단장(五大軍團長)[각주:1]의 한 사람으로까지 승진했다. 철포와 군략에 뛰어나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함께 [정치는 이 네 사람의 손 안에 있다[각주:2]]고 평해졌으며, 뛰어난 지휘로 [나아가는 것도 타키가와 물러날 때도 타키가와]라 했을 정도였다.하지만 노부나가가 1582년 쿄우토(京都)의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죽음을 당한 후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코우즈케(上野)에 있었던 것도 있어 시도한 것이 전부 실패. 노부나가의 후계자 싸움에서도 라이벌인 히데요시에게 뒤쳐져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


 코우가(甲賀) 닌쟈(忍者)의 마을 -오우미(近江) 코우가 군() 오오하라(大原) ()의 호족으로 타키()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오우미 겐지(源氏) 사사키() 롯카쿠 가문(六角)과도 친하였고 노부나가의 유모의 아들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와는 사촌지간[각주:3]. 와다 코레마사(和田 惟政)와는 고향의 친구 사이였다.


 1558 34세의 봄.

 사사로운 일로 숙부를 말다툼 끝에 죽이고 방랑을 떠났다.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하지만 사카이()에서 신병기인 철포를 배웠고 각지에서 축성 공사에 참가. 군략(軍略)도 배웠다고 한다.몇 년이 흘러 츠네오키나 시바타 카츠이에의 추천으로 노부나가를 섬기면서부터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1567년.

 44살에는 노부나가군의 이세(伊勢) 평정의 선봉을 맡아 오와리(尾張)의 카니에(蟹江) 성주에 임명되었다.

 나가시마(長島) 문도(門徒) 토벌시에는 코우가 닌쟈(忍者)와 시마(志摩)의 수군을 이용하여 방화, 살육을 감행. 특유의 조략공작(調略工作)으로 북() 이세의 강력한 호족 48개 가문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노부나가 군단에 편입시켰다.

 세 살 연상인 카츠이에에게 [철포의 달인]이라 상찬() 받았으며, 아홉 살 연하인 노부나가에게 신뢰받았다. 특히 3년에 걸친 이세 평정에서는 호소노 후지아츠(細野 藤敦)의 아노우즈(安濃津),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 具敎)의 오가와치(大河內)성 공략에서 공을 세웠다.

 공격뿐만 아니라 북부 이세의 칸베(神戶)씨에 노부나가의 삼남 노부타카(信孝)를, 중부 이세의 쿠도우 나가노(工藤 長野)씨에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信包), 또한 남부 이세의 키타바타케씨에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를 각각 양자로 들여 보내는 교섭을 성공시켰고, 그들에게 가문을 상속시켜 각 가문의 정예 가신단을 단번에 노부나가 군단에 편입시키는 뛰어난 공적을 거두었다.


 1582 3월.

 노부나가의 코우슈우(甲州) 원정의 선봉을 맡아, 코우슈우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킨 후 [칸토우 칸레이(管領)]에 임명받아 코우즈케(上野)()시나노(信濃)의 2()을 받아 마야바시(厩橋)성에 본진을 두었다.

 당시 58.

 늙었으며 더구나 중앙에서 먼 칸토우에서의 생활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비겁자가 되어 버린 후반생과 말로


 노부나가의 죽으면서 카즈마스의 운도 끝이 난다. 말년은 반대로 좌절과 패배의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게된다.

 히데요시가 츄우고쿠(中国)에서 대군을 이끌고 [대반전]을 하여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토벌한 즈음에 코우즈케(上野)에서 [노부나가 죽다]라는 소식에 난폭해진 칸토우의 호족들과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北条) 세력, 카이의 타케다 잔당,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上杉) 세력에 둘러 쌓여 사면초가.

 소수의 부하로 혈로를 뚫고 겨우 오와리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노부나가의 후계를 정하는 키요스(淸州) 회의가 전부 히데요시의 바램대로 끝나 형님 격인 카츠이에도 에치젠(越前) 키타노쇼(北ノ庄)로 돌아갔었다.


 카즈마스는 지금 가진 자신의 실력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카츠이에에게 호응하여 1583 이세 나가시마성에서 히데요시 토벌의 병사를 일으키지만 병사가 모이지 않아 분루를 삼키며 항복했다. 카츠이에도 북 오우미(近江)의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히데요시에게 패하여 거성 키타노쇼(北ノ庄)성에서 자살하였다.


 다음 해인 1584.

 이번에는 히데요시에게 속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합전에 참전하여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을 공격하게 되는데 여기서 추태를 부리게 된다.

 한 때 자신의 성이기도 했던 오와리 카니에성에서 농성하는 마에다 타네토시(前田 種利)를 설득하여 아군으로 끌어들인 후 입성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에야스에게 타네토시를 받쳐 할복시키고 자신은 목숨을 건졌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제 목숨만 귀한 추태]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후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받아 출가하여 깨평[각주:4]으로 에치젠 오오노(大野)에 은거료를 받지만, 이미 늙은 몸에 [공적이 없음을 창피해 하며] 반환하고 다시 방랑의 길로 떠났다. 몇 개의기록에는 [에치젠에 작은 암자를 지었다]고 하지만 정확히 어느 곳인가는 불명. 단지 오오노(大野)시의 호우쿄우(宝慶)()에 고문서가 내려져 와 1586년 9월 9 병사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치는 않다.

  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를 이름 [본문으로]
  2. 政道四人の手にあり[老人雑話] [본문으로]
  3. 부친끼리 형제이나 츠네오키의 성이 다른 이유는 츠네오키의 부친 츠네토시(恒利)가 이케타 가문의 딸(노부나가의 유모인 요우토쿠인(養徳院))과 결혼하면서 데릴사위가 되어 이케다 성을 계승했기 때문. [본문으로]
  4. 보통 捨扶持..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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