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 사[大徳寺]에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미츠나리의 유골을 조사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골격은 여성과 착각할 정도로 얇았다고 한다. 마치 히로사키 시[弘前市] 스기야마 가문[杉山家][각주:1]에 전해지는 미츠나리 초상화[각주:2]처럼, 섬세하고 여성적인 풍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형의 사람은 고지식하며 비사교적, 유모어가 부족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자연이나 책 등을 사랑하는 지능형으로, 인간에 대해서는 냉담냉혹 한 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시다 미츠나리와 관련된 일화의 대부분에서 그런 특징을 옅볼 수 있다.

 미츠나리는 뛰어난 재치로 인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미츠나리의 출신지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근처에 있는 절에 심부름하는 아이[寺小姓]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는 15~16 즈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로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매사냥을 하던 도중 목이 말라 이 절에 목을 축이러 온 것이다.
 미츠나리가 접대를 맡았다. 곧바로 차를 끓여 히데요시에게 권했다. 첫 번째로 내온  차는 커다란 찻잔에 미지근한 차를 7~80%를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맛있게 전부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뜨거운 차를 찻잔의 반 정도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이것도 다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아주 뜨거운 차를 작은 찻잔에 조금만 담아 내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의 이런 재치가 맘에 들어 절의 주지에게 청하여 미츠나리를 데리고 와 곧바로 시동으로 삼았다. 이렇게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미츠나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재능을 발휘하며 차츰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갔다.[각주:3] [각주:4]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호출하여 지금까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500석을 가증(加增)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500석 대신에 우지[宇治], 요도[淀]의 양 천 기슭에 자라는 백성들이 맘대로 베고 있는 갈대의 예초권(刈草權)을 저에게 주신다면, 1만석에 상당하는 군역(軍役)을 부담하겠습니다”
 하고 청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미츠나리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양 천의 천기슭 수십 리 안에 있는 갈대를 베는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각주:5] 

 미츠나리 의 이러한 이재(理財)의 재능도 히데요시는 맘에 들었다. 더구나 미츠나리의 경우 그런 재능을 사욕이 아닌 히데요시에 대한 멸사봉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언제나 미츠나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은 주인에게서 받은 봉록을 전부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긴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다 써버리고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 단언하였다.

 이에 관한 일화로 용장(勇將)으로 이름 높은 시마 사콘[島 左近]을,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의 절반 가까이를 들여 가신으로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각주:6] 
 미츠나리는 뛰어난 무사에게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있도록 힘썼던 듯 하다. 그것도 히데요시에 대한 봉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츠나리 자신의 주변은 실로 꾸밈이 없고 수수했다. 후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패하여 거성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도 함락되었는데, 공격군의 병사가 성 안을 돌아보자 방은 모두 초벽(初壁)만 한 상태였으며, 바닥은 대부분 판자만 덧댄 채였다. 마당에 정원수(庭園樹)도 없었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도 굉장히 착실하였으며 다방면에 이르렀다. 밤중에 폭풍이 들이쳤을 때에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이미 성의 파손상태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즉 미츠나리는 이런 경우 철야를 해가며 성 안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원래 이런 역할을 해야 할 담당관은 10시 즈음이나 되어서야 보고하러 오는 꼴이었다.

 이상과 같은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는 결코 히데요시에게 아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주 히데요시에게 격한 말투로 간언(諫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츠나리는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에 임명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칭하게 되었을 때, 관백의 제대부(諸大夫) 12명[각주:7] 중 한 사람에 선정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토요토미 정권의 오봉행(五奉行)[각주:8] 중 한 사람으로 행정의 중책을 짊어지지만,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으로 순식간에 No.1 실력자가 된다.

 미츠나리의 치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히데요시가 중요시했던 사카이[堺]의 총독을 1586년부터 1588년까지 맡았으며,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때의 병참, 하카타[博多]의 부흥,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와의 외교절충에 힘 썼으며,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히데요시의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1]에 출진,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서는 침략군의 운송과 병참, 무기 보급 등의 지휘를 취하였으며 감찰[軍監]까지 맡았다. 거기에 관백 히데츠구[秀次] 사건[각주:12],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13]에도 참여하는 등등 히데요시가 행한 중요정책 전반에 미츠나리는 중요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했기에 히데요시도,
 “나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자는 미츠나리뿐”
 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미츠나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히데요시 정권의 No.1 실력자였다.
 코우야 산[高野山]의 모쿠지키 상인[木食 上人]은,
 “미츠나리는 오봉행 중 제일인자인 듯이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고 말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는,
 “태합의 고굉지신으로, 그 위세는 비견할 자가 없다”고 말하였고,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는 가신인 코다마 모토카네[児玉 元兼]가 가지고 있는 명도(名刀)를 미츠나리가 원하였는데, 제출이 늦어져[각주:14] 미츠나리의 기분이 상하면 큰일이라며 빨리 제출해 달라고 코다마 모토카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했기에 미츠나리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츠나리를 극도로 증오하는 무리가 있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등 창 한 자루로 돌격하며 출세한 히데요시의 아이들, 즉 무공파 무장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츠나리는 아무런 무공도 없는 주제에 히데요시의 맘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난체하며 이런저런 지휘를 하는 건방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오대로(五大老)[각주:15]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천하제패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저 무공파 장수들은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이에야스와 손잡고 미츠나리 등 문치파와 격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99년 3월, 문치파의 좌장적 존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자, 무공파 칠장[각주:16]은 미츠나리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미츠나리는 이때 하필이면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 난을 피할 수 있었는데[각주:17], 이런 모습에서 당시의 정치상화 속에서 고립된 미츠나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각주:18]. 이 사건으로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를 강요당해, 천하는 이에야스의 독무대가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은 대단원이었다. 대다수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각주:19]의 다이묘우는 미츠나리가 내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만으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츠나리의 중대한 오산이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패하여 도망치다 잡혔다. 그 뒤에 몇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의복이 더러워져 있었기에 이에야스가 입던 옷을 주었을 때, 그것을 미츠나리에게로 가지고 온 자가,
 “이것은 우에사마[上様]가 하사하신 것”
 이라고 하자,
 “히데요리[秀頼]님 말고 우에사마는 따로 없을 터”
 라고 말하며 그 옷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잡힌 미츠나리를 내려다 보며 욕을 하였을 때,
 “무운 다하여 네 놈을 이러한 처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고 대답했다고 한다.

 10월 1일. 로구죠우 강변[六条河原]의 처형장에 끌려갈 때, 미츠나리는 너무도 목이  말라 경비하는 자에게 따스한 물을 달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장 따스한 물을 구할 수 없어 경비무사는 대신으로 하라며 곶감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곶감이 가래병에 좋지 않다며 거절하였다. 경비무사는 지금 죽으러 가는 주제에 몸에 좋지 않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미츠나리는 말했다.
 “큰 뜻을 품은 자는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목숨을 아껴 어떻게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년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출생.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눈에 띄어 코우가[甲賀] 미나구치[水口] 성주가 되면서부터[각주:20] 출세하여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가 되었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으로 선정된다. 1595년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 19만 4천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참모로 삼아 서군(西軍) 8만을 이끌고 싸우지만 패하여 사형당했다. 41세.

  1. 미츠나리의 둘째 아들 이시다 시게나리[石田 重成]가 히로사키 번[弘前藩]으로 도망간 뒤 시게나리의 아들 요시나리[吉成] 때부터 스기야마 씨[杉山氏]를 칭함. [본문으로]
  2. 위에 있는 초상화. [본문으로]
  3.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 작자미상의 일화 모음집 무장감장기(武将感状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시게이에[重家]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8살 때 히데요시가 히메지[姫路]에서 츄우고쿠[中国] 방면을 담당했을 때부터 섬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후세의 군기물 ‘이시다 군기[石田軍記]에는 히데요시가 미츠나리의 후장을 파려고 시동으로 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갈대는 지붕을 만드는데 쓰이거나, 물건을 가리는 발(簾)을 만드는데 쓰였기에 거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로 미츠나리는 후에 이때 얻은 돈으로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백 기(騎)의 무사를 이끌고 와 히데요시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고금무가성쇄기(古今武家盛衰記)’에 실린 글이라 한다. [본문으로]
  6.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2만석을 떼어 주었다고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8.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1591년 1월의 오오사키-카사이의 난[大崎・葛西の乱]과 9월의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본문으로]
  12. 사실 미츠나리는 히데츠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츠나리는 칸토우[関東] 사타케 령[佐竹領]의 검지(検知)하기 위해 출장간 상태였다. [본문으로]
  13.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14. 살생관백 히데츠구[秀次]도 이 칼을 노리고 있었기에, 모토카네는 어느 쪽을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기에 늦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6.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7.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18. 사실 이 사건은 미츠나리 하나만 노린 사건이 아니라, 봉행파 다수를 노린 사건이었으나 은거를 하며 봉행직에서 물러난 것은 미츠나리 한명 뿐이라, 후세에 미츠나리만 공격받은 양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어 다이묘우가 된 무장들. [본문으로]
  20.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주가 된 적은 없다. 시마 사콘[島 左近]을 등용할 때 미나구치 4만석 중 2만석을 떼어 주었다는 일화 때문에 퍼진 낭설로, 당시(1590) 미나구치의 성주는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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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8.19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음침하고 어두운 이미지의 미쓰나리 인간상이 부각되면서 악당의 이미지였습니다만, 요새는 가장 인기있는 인물 중 하나로 부각되더군요(전국무쌍, 전국바사라를 포함한 응용창작매체 포함). 역사는 돌고 도는 건가봅니다.

    개인적으론 어떤 일화보다도 요시쓰구와의 일화가 미쓰나리라는 인물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는가 싶습니다. 소통하는 능력이 떨어졌던 인간성 좋은 사람 정도랄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1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가 에도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인기가 있었기에, 그런 영웅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대신 짊어질 사람이 필요했고, 그런 인간으로 적합했던 것이 신군(神君) 이에야스에게 끝까지 개긴 미츠나리. 뭐 미츠나리가 진정한 충신이라면 저 세상에서 히데요시의 방패막이가 된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지도 모르겠군요.

      사족으로....
      소슈 님은 제 블로그에 2000번째 리플을 다신 분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08.22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번째 밀레니엄을 달성했다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번째 영예도 제가 안았으면 좋겠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3 1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앞으로도 오래오래 찾아주십시오. ^^

  2. 간스케 2011.08.23 1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를 소인배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거 같더군요.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발해지랑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어보고 싶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그냥 미츠나리가 역사의 패배자이다 보니 이것저것 뒤집어 썼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혹시 그 글을 소개해 주셨음 감사드리겠습니다.

  3. ckyup 2011.08.2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친구 머리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던데.., 보통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시험으로 잣대를 삼았는데 이당시 전국시대엔 어떤 특별한 제도나 시험이 있었나요? 우리가 흔히아는 이당시 특출난 사람들 간베에, 미츠나리, 마사노부 등등..., 전부 알려진 바로는 우연한 인연으로 등용되던데요....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도나 그런 것은 없었고, 일반적으로 무사들이란 한 지역의 지배층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행정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평소에는 자신의 영지 혹은 맡겨진 영지의 행정을 담당(代官)하다가, 특별한 일(전쟁, 토목공사 등)이 생기면 상위의 무장(주군 혹은 요리오야[寄親])에게 담당관[奉行]에 임명되는 식이었습니다.(대충 간략하게는 이렇습니다)

      예를들어 쿠로다 칸베에의 경우 히메지[姫路]를 다스리는 작은 영주였다가, 그 위에 히데요시[秀吉]라는 인물이 오자 그 휘하에 속한 것입죠. 속한 상태에서 하리마[播磨] 지역에 있는 반노부나가 상태의 무사들을 회유 또는 동원령에 따라 히메지의 무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기는 했겠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히데요시의 참모 혹은 군사로 활약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등용문제는 지배구조에 관한 문제라 간단히 쓰기가 어렵군요. (제가 가진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뭐라 잘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

  4. 정동희 2011.08.31 14: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나우누리 신장동 시절에 닉네임으로 쓴 인물이었네요
    센코쿠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고, 격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이에야쓰와 대립한 큰 인물이었습니다
    위의 일화들을 보면 유능했지만 거만했다 라는 느낌인데
    사실 유능한 사람이 거만해지지 않기가 참 힘들죠
    그런 면에서 자신의 성질을 감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능력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클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를 쓰시더니.. 똥싸개 이에야스와 반대편에 서는 인물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유능한 미츠나리의 능력에 열폭한 사람들이 별걸 아닌 일에도 그의 행동을 거만하게 보고 그렇게 기록해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고요.

    • 정동희 2011.09.01 16: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 ㅋㅋ 희대의 두 영웅 밑에서 잘 굴러 먹었고 결국은 천하를 꿀꺽
      상황에 따라서는 마누라나 장남도 가차 없이 죽이고... 후흑술의 대가인데
      아무래도 정이 안가네요

    • 정동희 2011.09.01 1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츠나리 개인이 거만했고 아니고를 떠나서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위치였기 때문에 뭍 사람들의 질시를 받는 건 당연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가 좀 더 사려가 깊었다면 어떻게든 그런 이미지를 불식시키도록 노력을 했어야 했겠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만.... 질투 받는 것은 질투 하는 쪽의 인식이 변하기 전에는 받는 쪽이 아무리 노력해도 변함이 없는 것 같더군요.

  5. 정동희 2011.08.31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쓰나리의 거만함이나 독단이 이른바 무단파와의 갈등을 불러 결과적으로 토요토미를 멸망으로 몰아 넣은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구요
    토요토미 멸망의 가장 주요한 이유는 히데요시의 어처구니 없는 조일7년 전쟁의 휴유증 이라고
    개인적으로 단언합니다
    조일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정유재란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토요토미 정권이 그렇게 쉽게 망하진 않았을 겁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토요토미 정권은 임란 후에도, 세키가하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느 정도 방귀는 뀔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근래엔 이런 주장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토요토미 정권을 끝장낸 이에야스의 능력도 굉장히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1.09.01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시이에가 살았을 때 거병을 했다면,
      마시다 나가모리가 히데요시 직할지 재력만 미츠나리에게 지원 했다면
      뭐 그런 등 등 등의 설이 의미가 있겠습니까만은
      어쨌든 이에야쓰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저도 동감입니다
      특히 여러 다이묘들한테 이러 저러한 도움 주고 편지 보내고 공작하고 하는 건 참
      정말 어지간히 오지랍 넓고 부지런한 노인네였어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래에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인지라 저도 깊숙히는 모릅니다만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힘은 이에야스의 칸토우 정권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했기에 세키가하라 이후 15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토요토미 정권의 힘을 깍으려 한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pray4abyss.egloos.com/ BlogIcon 로날드럭 2011.09.01 16: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은근히 말년 히데요시가 잘못한 일을 미쓰나리가 뒤집어 쓰는 면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
    근데 요즘은 미쓰나리가 이에야스는 물론이고 히데요시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으니(....)

    눈팅은 오래 해왔는데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건 처음이네요.
    앞으로 자주 들리겠습니다(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대로 요즘 서브컬처에서는 미츠나리의 인기가 히데요시를 뛰어넘은 듯 하더군요. 뭐 히데요시야 워낙 오래(2차 대전 이전부터) 빨아대서 진물이 빠졌던 것도 있는 듯 합니다만.

      앞으로도 자주 들려주시고 알려주실 일 있음 많이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

  7. ㅇㅇ 2015.07.03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군 총대장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아닌 세키가하라에서 적극적으로 싸운 우키타 히데이에를 세웠다면 나은 결과가 나왔을 거 같네요.

    모우리 테루모토 정말 못난 놈, 일본판 유선(아두)이군요. 총대장이 오사카 성에 놀고 있다니...

    미츠나리 같은 편협한 놈이 총대장 대리역한다는 것 자체가 패배가 점쳐진거죠. 무공파의 이탈과 시마즈의 야습 진언 각하.
    원숭이 없으면 제 구실 못하는 놈.

  8. 마사무네 2017.03.14 1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확히는 담에 좋지 않아서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목표가 있고 그일을 반드시 이룰려고 하는자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절대로 인생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는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에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뛰어난 무용(武勇)의 장수이지만, 센고쿠[戦国] 무장 특유의 연극적 행동이나 허세가 없어 어렸을 때부터 노련(老鍊)한 느낌을 준다.

 반 단에몬[塙 団右衛門]이라고 하는 요시아키의 가신이 있었다. 그는 소위 호걸형 무사였기에 주종간에 다툼이 많았다. 어느 날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카토우 키요마사가, 저렇게나 유명하고 뛰어난 무사를 어째서 우대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었다고 한다. 보통 자기 부하의 무명(武名)이 높으면 기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를 선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단에몬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한 부대의 지휘관으로 출진했지만, 지휘관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 필마단기로 돌격하여 가장 먼저 적진에 돌입하였으며(一番槍), 적의 목을 베어 오는(一番首) 수훈을 세웠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네 녀석은 지휘관을 맡기엔 부족한 놈이다”
 고 차갑게 질책하여 단에몬을 화나게 하였다. 결국 단에몬은 요시아키에게서 떠났다[각주:2]. 즉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탠드플레이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아키 자신도 떠들썩하게 남의 주목을 끄는 행동을 싫어하였다.

 요시아키가 얼마나 침착했는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요시아키의 부하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장난 삼아 불에 달구어진 불쏘시개를  거꾸로 세워 나중에 온 사람이 그것을 쥐다 뜨거움에 놀라는 것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거기에 요시아키가 지나치게 되었다. 부하들은 만약 요시아키가 불쏘시개를 쥐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말하는 타이밍을 놓쳐 누구 하나 말하지 못하던 중 결국 요시아키가 아무 생각 없이 불쏘시개를 잡았다. 요시아키의 손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태연히 그 불쏘시개로 땅바닥에 한 일(一)자를 그리고 잠시 떠들다 갔다고 한다. 더구나 나중에 어떠한 문책도 없었다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 침략의 본거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여러 장수들이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서 포획한 호랑이를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가던 중 호랑이가 그들을 뿌리치고 날뛰었다. 구경하던 다이묘우[大名]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빴지만, 그런 소동 속에서 요시아키 단 한 사람만이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눈을 뜨며, “뭔 일 있었나?”하고 입을 열었다 한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요시아키 한 사람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가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획책하였고 키요마사, 마사노리 등 무공파가 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행동을 일으켜 일촉즉발의 긴박한 공기가 떠돌 때도 요시아키는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 저택을 방문하여,
 “세상이 소란스러운 듯 합니다만 이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지금까지 곁에 두고 있던 50기(騎) 중 20기를 제 본거지인 이요[伊予]로 돌려보냈습니다. 남은 인원은 이에야스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바칠 생각입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요시아키는 냉정침착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西軍)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동군(東軍)은 앞다투어 가며 도망치는 적을 쫓아갔기에 진형이 흐트러져 각 무장의 본진을 지키는 방비가 부실해졌다. 하지만 요시아키의 부대만큼은 질서정연했다. 요시아키의 지시가 구석구석 잘 전해져 일사불란한 방비태세를 유지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적이 패주하자 요시아키는 출진할 때 몸에 걸치고 있던 화려한 갑주를 재빨리 벗어버리고 평범한 갑주로 갈아입었다. 이는 결사의 각오를 한 적병이 적어도 대장만이라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나중에 이를 전해 들은 이에야스는,
 “사마노스케[左馬助=요시아키]는 정말 빈틈이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초전인 기후 성[岐阜城] 공성전에서 승리하였을 때, 승리를 알리고자 칸토우[関東]의 이에야스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자(使者)를 고르려 했으나 아무도 사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막 결전이 시작되려는 때에 사자가 되어 전쟁터에서 이탈해 버리면 공적 세울 기회를 잃기 때문이었다. 이 때 요시아키는 가신 한 명을 지목하여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칸토우에 사자를 보내는 것은 긴급을 요하는 일이며 이것 역시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부디 가주지 않겠는가?”
 하며 간절히 부탁했다고 한다.

 역시 세키가하라 때의 일이다.
 요시아키 진영에 잠입한 닌쟈[忍者]가 잡혔을 때 요시아키는,
 “이자도 자기 주군의 명령에 죽음을 각오한 용사이다. 지금 여기서 이자를 죽여도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며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적이라 하더라도 용사를 인정하는 도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공적으로 인하여 요시아키는 이요 마츠야마[松山] 20만석에서 아이즈[会津] 40만석의 가증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이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에야스는 요시아키를 위해 50만석을 주려고 하였지만 이에야스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너무 많다며 막았다고 한다. 이를 들은 요시아키는 곧바로 마사노부에게 가서 이유가 뭐냐며 따졌다. 마사노부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많은 은혜를 입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무나도 많은 봉토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게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의 화근거리가 될 수도 있기에 그렇게 처리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리 요시아키라도 이에는 반론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각주:3]

 이에야스는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히데타다[秀忠]를 병상(病床)으로 불러 여러 다이묘우들에 관해 자신이 가진 인물평을 전해 주었는데 요시아키에 대해서는,
 “우직하고 의리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사사로운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불만을 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부분을 잘 판단해서 처리하도록”
 하고 말하였으며 또한,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는 다면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모반을 일으키는 법이다.”
 고 말하며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말을 남겼다 한다.

 카토우 요시아키의 가문은 아들인 아키나리[明成] 때 아이즈 42만석을 몰수당하여 단절을 맛보게 된다.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563년생. 통칭 마고로쿠[孫六], 사마노스케[左馬助].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를 섬기며 시즈카다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의 공으로 3000석을 하사 받았다. 1585년 아와지[淡路] 1만5천석, 조선침략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참전. 1597년에는 거제도에서 조선 수군의 배를 탈취했다[각주:4].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 마츠야마 성[伊予松山城]를 축성. 후에 아이즈 42만석으로 이봉(移封). 1631년 9월 12일 죽었다. 69세.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떠날 때 성문에 ‘결국 시골 좁은 천에 머물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를 높이 나는 갈매기 처럼 유유히 떠난다[野水江南遂に留まらず、高く飛ぶ 天地の一閑鷗]' – 즉 요시아키는 그릇이 작아서 대인배인 나님은 떠나마..라는 뜻일 것임. 아마... - 라는 시를 붙이고 갔기에, 이에 분노한 요시아키는 단에몬이 다른 가문에 취직 못하도록 타 다이묘우에게 편지를 돌렸다(이를 奉公構라고 한다). 그래서 단에몬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 밑에 있었으나 얼마 안가 그곳에 있지 못하고 쿄우토[京都]에 가서 탁발승을 하다가 나중에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 때 오오사카 성에 입성하게 된다. [본문으로]
  3. 전후 처리과정에서 이에야스가 논공행상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대리인과 후견인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키가하라 이후 동군이 영토를 하사 받은 것은 이에야스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닌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본문으로]
  4. 元凶(원균..이라고도 읽는다)의 칠천량 해전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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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01.09 05: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카토우 요시아키의 멸봉당한 아들내미가 제법 비중 큰 보스격으로 나오는 만화도 있던 기억인데요.. 아이즈 40만석을 걸 가치가 있다던가...(내용은 안드로메다였던 기억입니다만;)

    아무튼 담력이 참 멋지군요(..근데 왜 저는 한편으론 뭔가 마초짓은 바보같다고 느껴지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규우 쥬우베이[柳生 十兵衛]가 등장하는 와이쥬우엠 야규우인법첩[Y+M 柳生忍法帖]인 듯 하군요.

      http://ja.wikipedia.org/wiki/Y%E5%8D%81M_%E3%80%9C%E6%9F%B3%E7%94%9F%E5%BF%8D%E6%B3%95%E5%B8%96%E3%80%9C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유일한 딸인 치요히메[千代姫]를 아이즈의 시골 무사가 무시하는 쌍큼한 시작이 짱이었습죠.

      여담으로 호랑이 소동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호랑이와 눈싸움하였고 서로 노려보다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합니다.(...풋~)

      시간과 문화가 다르다 보니 느껴지는 것도 천차만별이라 생각합니다.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0.01.09 1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 중에서 마사노리나 기요마사가 최정상급 스타고, 다케노리나 나가야스가 단역에 그치는 인기를 누린다면, 요시아키나 가쓰모토는 중간급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말많고 탈많은 와키자카는 제외하겠습니다. 이순신 덕에 인기는 제대로 끌었으니)

    그나저나 아이즈는 정말 일본역사에 많은 이들이 오간 장소군요. 아시나, 다테, 우에스기, 가모, 가토 요시아키, 거기에 호시나 번까지 있었으니 .. 막말의 아이즈는 말할 필요도 없군요. 간토와 오슈 사이의 요충지라서 그런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막부가 호시나번을 아이즈에 둔 까닭은 대 다테 방어선의 역할이 맞는지요?

    P.S : 발해지랑님께선 원균 명장론을 믿지 않으시는 듯 하군요 (낄낄) 원균이 용맹하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튀어나오기는 한다만, 6년간의 모아온 전력을 한 번의 전투에서 모두 날려먹은 게 명장의 기준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발해지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1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일본 위키에 따르면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는 나머지 등등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 것을 싫어했다고도 하더군요.

      그러게요. 그래서 아이즈라는 쿠니[国]도 아닌 일개 지역을 따로 태그로 지정하였습죠. 언젠가 함 능력되면 아이즈에 관해서도 함 쓰고 싶습니다.

      ps..에 관해서는...
      승패야 병가지상사다 보니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동료를 참언하여 나락에 빠뜨린다거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사복을 채우고자 돈 받고 병사 제대시키거나, 충무공의 운주당이라는 참모부 건물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여성들을 데려다 하렘을 만든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더군요.

    • 정동희 2010.01.11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즈가 확실히 요지는 요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3. 맹꽁이서당 2010.01.09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엔 센고쿠 히데히사는 없네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쪽도 결국 막부시대에 단절당한 도요토미 가문 출신 인물이었군요.
    새해부터 좋은 지식 얻어갑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0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카다케 전투 당시 히데요시의 배후 중 가장 위험스러웠던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에 대한 방비책으로 시코쿠에 파견나가 있었습니다.

      시바타 카츠이에(...정확히는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측은 히데요시의 배후를 위협하는 의미로 모토치카에게 협력을 요청. 그에 응한 모토치카는 시코쿠의 히데요시 파인 소고우 마사야스[十河 存保]를 공략. 그러자 마사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원군 요청. 그래서 파견된 것이 히데히사였습죠.

      히데히사는 휘하 2000을 거느리고 시코쿠에 도하. 모토치카는 그 소식에 휘하의 카가와 노부카게[香川 信景]에게 5000을 주어 요격을 명령. 그 움직임을 캐치한 히사히데는 복병을 배치하여 카가와의 선봉대는 격파하나 깊숙히 추격하다 후속부대에 패배. 도망쳐 히케타[引田]라는 곳에서 머물다 기세를 타고 야습해 온 카가와의 군세에 대항도 못하고 도주. 도주할 때 부대 깃발까지 빼앗기는 굴욕도 맛보았다고 하는군요.(바로 시즈카다케 전투가 벌어지는 날과 같은 날이었다고 합니다[1583년 4월21일])

      이렇게 쓰면 히데히사가 조금 바보 같지만, 당시 가장 불온한 움직임을 펼치던 모토치카에게 대항하도록 파견한 점. 만약 모토치카의 그릇이 커, 과거 미요시 가문[三好家]이 그러했듯이 사카이[堺]에 상륙하여 쿄우토[京都]를 노리기라도 했으면 히데요시의 정권은 없었을 것이기에, 그런 것을 방비하기 위해 파견한 센고쿠 히데히사는 당시 히데요시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담으로...히케타[引田]에서 패하여 도망친 센고쿠 히데히사는, 본거지 아와지[淡路] 근방 수역을 장악하였다는 공로로, (졌음에도 불구하고) 4개월 뒤에는 아와지[淡路] 스모토[洲本] 5만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패했는데도 영지가 4000석에서 5만석이 늘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사족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은 아즈키자카 고개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을 베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즈가타케 전쟁이 히데요시 vs 카츠이에와 같이 보이는 것도 또한 실상도 그러하지만 그들이 각각 내세운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vs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즉 오다 가문 내부의 싸움입죠)
      오다 가문에는 과거 미카와 아즈키자카 고개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군세를 격파한 적이 있었고, 거기서 대활약한 7명의 용사에게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하니, 히데요시는 자신이 직접 키웠다는[子飼い] 무장 7명에게 저 칭호를 줌으로써, 무장들에게는 더욱 활약할 수 있는 동기부여와 발판을 마련해 줌과 동시에, 오다 가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적 효과를 노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도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정동희 2010.01.11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역시 마지막이 중요한건가요?
      일찌감치 히데요시 막하에서 많은 무공을 세웠고,
      발해지랑님 말씀처럼 사랑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다만 역시
      한 방면의 총책을 맡기에는 신중함이 많이 부족한
      인물이었죠
      돌격대장형 인간이랄까...

      암튼 그 뒤로 큐슈 원정 때, 시마즈씨 낚시걸이에 말려 들어서 대패해 도망치고, 가이에끼

      하지만 오다와라 원정 때, 백의종군(?)해서 다시 복귀

      세끼가하라때도 동국에 속해서 그 뒤로도 계속
      가문을 이었던 것 같네요(요건 좀 불확실)

      전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4.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1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동희님께//
    "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 그렇습니다. 키요마사는 조선침략의 최중요 후방 기지라 할 수 있는 히고를.
    마사노리는 토요토미 씨 발상의 지라고 할 수 있는 오와리를 영유한 것만 보아도 기타 등등과는 확실히 틀린 취급을 받은 것 같습니다.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 확실히 게임 상에서 센고쿠는 절망입죠. ^^

    말씀대로 센고쿠는 선봉대 대장 정도가 한계인 인물인 것 같습니다.

    "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 덕분에 우리는 매력적인 만화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01.14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에서 가정만큼 무의미 한 건 없지만
      히데요시에게 가족이나 인척이 많았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하다 못해 동생 히데나가쪽이라도 좀 번성했으면 어땠을지
      가토나 후쿠시마 등도 싸움에만 능했지 정치, 외교에 약해서 히데나가 사후에는 미쓰나리등 젊은 관리들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았나 싶네요(물론 그래도 다 지 하고 싶은 대로 했지만)

      센코쿠 히데히사 만화책은 저도 읽어 봤는데,
      고증도 잘 되있고, 재미도 있더군요
      센코쿠 같은 전국무장도 정말 드물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도도 다카토라 같은 인물이
      역시 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서 보통 한 번의 패배나 반역,가이에끼
      은거는 거의 그 인물의 종막이 되기 마련인데
      위에 언급한 센코쿠나 도도가 보기 드믄 케이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밖에 또 누가 있을 까요... 앞 선 인물들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다치바나 무네시게 정도...
      찌질거리면서도 오래 버틴걸로 따지면
      롯카쿠 쇼테이 부자도 만만찮죠...

      이런 인물들도 나름 드라마 성은 있을 것 같은데... ㅋ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5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조선이나 일본이나 불행이 더 길어졌겠죠. ...아마. 개인적으로 히데나가가 계속 살았다면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해 있던 기간이 더욱 늘어나지 않았을지...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도 내정면에서 뛰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오래 살았다면 나름 유능한 지방행정관으로 남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센고쿠 천정기라고...센고쿠 시즌2가 현재 일본에선 진행되고 있습죠. 시간 되시면 함 보시길. 신촌 북오프에 센고쿠 천정기가 있더군요...일본어 판이긴 합니다만. 재미있습니다. ^^ 전 지금까지 나온 것 다 가지고 있습죠. 원하시면 만날 때 들고 나가겠습니다. ^^

      아~ 다음에 등장할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입니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롯카쿠가 찌질하시다고 하니 생각나는 것인데, 롯카쿠 가문은 대군이 몰려들었을 당시는 본거지를 버리고 코우가 산중으로 도망쳐 게릴라 활동하는 것이 롯카쿠 가문의 방어 전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 1487년에 롯카쿠 타카요리[六角 高頼]는 아시카가 막부 9대 쇼우군 요시히사[足利 義尚]가 공격해 오자, 나중에 노부나가가 오우미에 진공했을 시 쇼우테이가 그러했듯이 코우가 산중으로 피신하여 게릴라 활동. 지친 막부군은 쇼우군이 진중에서 병으로 죽는 것도 있어 물러감으로써 싸움 종결.

      롯카쿠가 찌질했다기 보다는 노부나가가 너무 강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찌질하면서도 오래 버틴 듯한 인상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가 아닐지... 무려 아비 원수 노부나가 앞에서 공놀이를 할 정도였으니..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이마가와 우지자네로 1년짜리 대하드라마를 만들어도 꽤 이야기 성이 있을 듯... 아비 요시모토에 아비 원수 노부나가, 본거지를 공격해 온 타케다 신겐에, 도망친 처갓댁 호우죠우 우지야스와 그 우지야스가 죽자 눈치 겁나게 주는 처남 우지마사. 도움을 청한 과거 자기네 집에서 더부살이 하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쿄우토에 가서도 당시 귀중한 기록가인 야마시나 토키츠구와도 교류. 말년엔 히데요시와도 교류. 드라마 하면 등장할 인물들이 정말 풍부한 것 같습니다.

  5. 정동희 2010.01.18 13: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코쿠 천정기는 번역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일전쟁의 경과는... 참 예측하기가 어렵네요... 히데나가가 만약 총사령관급으로 왔다면
    조선측이 좀 더 힘들지 않았을까...

    롯카쿠는 본래 그런식의 게릴라전을 했군요... (이거 무슨 이가패도 아니고... 고가패인가...)

    우지자네는 찌질하긴 하지만 분명 얘기꺼리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뭐 나름
    노부토라 앞세워서 미카와 침공도 하고, 호죠에 원군청해서 신겐한테도 좀 버티고
    뭐 아주 싸움질을 안한건 아니더군요

    암튼 능력을 떠나서 운도 없었던 인물로 보입니다...(살아남는 처세술은 대단)

四.

 

 삼 년이 지났다.

 챠챠(茶々)는 20살이 되었다.

 “아자이 님(浅井殿)의 아씨를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하고 어느 날 밤에 히데요시에게 물은 것은 놀랍게도 그의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였다.

 “이미 시집갈 곳은 정하셨겠죠?”

 “아직이다”

 히데요시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아직이요?”

 “그렇다”

 “알고 계십니까? 벌써 스무 살이옵니다”

 말할 것까지도 없사옵니다만 -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거듭 말했다.

 “보통 15살이면 시집을 갑니다. 20살이면 좋은 날이 다 가 정실이 먼저 죽은 곳이라도 찾을 수 밖에 없는 나이라고 할 수 있죠. 소중한 분을 맡고 계시면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하고 그녀가 끈질기게 말한 것은 성안의 소문을 하루 종일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존귀한 핏줄이며 저렇게 미인인데도 – 하고 소문은 말한다. 어디로 갈 것이라는 결혼 소식을 전혀 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하는 뭐랄까 그 거시기 한 마음이 있으신 것은 아닐까? 필시 그럴 것이다 - 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호색은 천하에 유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시대는 남자건 여자건 모이면은 그런 종류의 이야깃거리로 쑤군거렸다. 예를 들어 성안의 소문에 따르면 –

히데요시님은 옛날부터 챠챠 님의 모친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을 짝사랑하고 계셨었다. 아자이 씨(氏) 멸망 후 오이치 마님께서 오다 가문(織田家)으로 돌아오셨을 때도, 제발~제발~하면서 돌아가신 노부나가 님께 매달려서는, 제 부인으로 받아 들이고 싶습니다고 부탁하였지만 정작 오이치 님께선 그 분을 싫어하여 우연히 정실이 돌아가셔 홀몸이셨던 시바타(柴田)님께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시바타 공격은 사랑의 복수이죠. 그 증거로 히데요시님은 좀처럼 적을 죽이시지 않던 분이셨는데 시바타 님만은 용서하지 않고 텐슈각(天守閣)을 아예 재로 만드셨잖아요.

 라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았다. 오이치가 아직 결혼하기 전엔 짝사랑하고자 하여도 아예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또한 오이치가 과부가 되었을 때 히데요시가 그녀를 부인으로 하고 싶다며 울며 매달렸다고 하지만 히데요시에게는 비루한 신분일 때부터 처 네네(寧々) –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엄청난 호색한이었으면서도 이 조강지처를 유난히도 존중하며 둘도 없는 상담 상대로 하였고 겸해서 조심하는데 있어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처를 버리고 오이치를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우선 이 남자에 한해서 있을 수 없었다. 참고로 호쿠리쿠(北陸)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공격하여 죽였을 때는,

 “카츠이에를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하고 몇 번이나 부하들에게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카츠이에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가 안정 되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다 - 고 말하였다. 히데요시에게 놓여진 조건이 카츠이에를 죽여버렸다. 오다 정권의 필두가로를 이 세상에 살려두면 히데요시 정권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 놀음이 아니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원한을 몸 안에 저장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원한, 복수라는 에너지가 이 인물의 성정에서는 절대 끓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소문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처음으로 성숙해진 챠챠를 보았을 때 이렇게 오이치님과 똑 빼 닮을 수 있을까? 하고 틀림없이 피가 끓었다. 오이치를 짝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과거는 없었다고 하여도, 오이치를 이 세상에서 미모가 제일인 사람이라고 마음 속으로 깊이 동경했었던 적은 틀림없이 있었으며 이는 히데요시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오다 가문의 가신들 중에서 수 없이 많이 있었을 터이며 오이치는 그런 존재였다. 오이치는 하늘나라 사람이었다. 히데요시는 거기까지 손을 뻗으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것이 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현실인식 감각이 너무 예리했던 그 당시의 히데요시는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할 정도 별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치젠 이치죠우다니의 단계에서 달랐다.

 ‘이 아이는 내 날개 품 속에 있다’

 라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이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녀와 쏙 빼 닮은 소녀가 하늘나라에서 떨어져 자신의 날개 품에서 보호받는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품어주마 하고 몰래 결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히데요시의 기분을 집요하게 윤색하고 왜곡하면 소문과 같은 이야기처럼 될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 삼 년 챠챠를 조용히 그 생활 속에서 살게 해 두었다.

 - 조용히……

 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챠챠에 대한 방침이며 머지않아 챠챠를 얻는 길이라고도 믿고 있었다. 그것은 공성전과도 닮아있었다.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도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도 히데요시는 결코 무리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장기 포위전 형태를 취하며 적의 보급선을 끊고 수로를 끊어 때로는 수공을 하여, 어쨌든 농성하는 병사들의 전의를 잃게 하는 전술에 주안점을 두어왔다. 그런 감각으로 챠챠라는 존재를 보고 있었다. 무턱대고 챠챠의 침실에 함부로 뛰어드는 식의 어리석음을 이 남자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챠챠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긴 시간이 챠챠가 가지고 있는 옛 상처를 아물게 할 것이다. 그 동안 빈번한… 그러나 담백하고 온정에 넘치는 접촉이 히데요시에 대한 챠챠의 마음을 조금씩 바꾸어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요 삼 년 궁중의례를 위해서 쿄우(京)에 올라와서 전쟁 때문에 몇 번이나 스즈카토우게(鈴鹿峠) 고개를 넘어[각주:1] 동쪽으로 정벌하러 떠나면서, 그렇게 간 곳곳마다 반드시 챠챠에게 진귀한 선물들을 보내며 근황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 자연스레 챠챠도 예의상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챠챠에게 있어서 요 삼 년은 일분일초가 히데요시의 온정 속에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네네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거동을 그렇게 볼 수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시녀들에게서도 여러가지 소문을 듣고 있었다. 편지 왕복 등도 챠챠의 시녀가 남들에게 흘렸기 때문에 네네의 귀까지 들어왔다.

 불길한 생각을 계속 하던 차에 몇 일전 오다 우라쿠(織田 有楽)가 차(茶)의 자리에서,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열심이더군요”

 라는 것을 네네에게 뜬금없이 말한 것이다. 우라쿠는 많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네의 현명함은 그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오우미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주력인 오와리 파벌(尾張衆)에 대항하기 위해 열심일 것이다. 오와리 파벌은 이 네네에게 옹호 받고 있다고 세간에서는 보고 있었다. 오와리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나 무장이 히데요시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하면 반드시 네네에게 울며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 대한 중재를 부탁했다. 네네는 언제나 기분 좋게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네에게 그 이상의 야망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성안의 소문은 달랐다. 오와리 파벌이라는 이 오오사카 성에서 가장 큰 관료, 무신 세력의 중심에 네네가 있다고 보고 있어, 네네의 존재는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선명하게 정치적 자력(磁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네도 시녀의 입으로 그러한 풍문은 듣고 있었다.

 “오우미의 사람들이 자기들도 오와리에 태어나고 싶었다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네네에게 있어서는 이외였다. 오우미 파벌의 대다수는 이 네네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으며 부탁하러도 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극소수의 오우미 사람만이 네네와 접촉하고 있었다. 서 오우미 출신인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나 비와고(琵琶湖) 호수 동쪽 중부 출신인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이 그들로, 그들은 오히려 같은 지역인 오우미 사람들과는 소원하며 오와리 파벌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참고로 오와리 파벌의 대표적 인물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일 것이다. 그 외에 젊은 축으로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다소 나이가 있는 자로는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등이 있으며, 모두 초창기의 히데요시와 함께 전쟁터의 먼지를 뒤집어 쓰며 성장한 역전의 무장들이었다. 오와리 파벌의 특색은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라는 것에 있었다.

 이 점 오우미 파벌은 관리에 뛰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나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는 거의 ‘희대의’라고 붙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경제 관료로, 미츠나리 등은 거대하게 성장한 히데요시의 재산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각종 장부를 발명했다. 천하 재정을 위한 장부부터 부엌의 자잘한 출납장에 이르기까지 장부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하위 관료들을 지휘하였고 관리하였다. 그들 오우미 파벌의 관료가 없으면 히데요시는 병사를 일으킬 수 없었고, 직할지를 다스릴 수 없어 하루라도 편안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미 이 신정권의 중추에는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의 걱정은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만약 결속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라쿠는 네네에게 말로 하지 않았을 뿐, 조심하시길, 만약 그들이 옛 주인격인 아자이 님(浅井殿=챠챠(茶々))을 옹립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라기보다 좀더 대놓고 말하면,

- 그들은 아자이 님께서 측실이 되신다면……

 라고 그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아예 까놓고 말하면 그들 오우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었다.

  1. 교통의 요지로 스즈카 산맥 중 가장 낮은 위치에 있어 이로부터 동쪽을 東国이라 일컬었다. 쿄우토에서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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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이에야스의 말에는 다분히 회상이기에 생기는 허술함이 있었다. 현실의 세키가하라[ヶ原] 전장(戰場)에서 이에야스는 거의 절망적이었던 순간을 몇 번이나 맛보았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의 승패를 사전에 결정짓고자 하였다. 적인 서군에 참가한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 대해서 여러 방법으로 공작하고 회유(懷柔)하여 내응(內應)을 약속시켰다. 서군의 총수(總帥)인 모우리 씨[毛利]에게까지 공작하여 그 부하 장수인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家], 가로(家老)인 후쿠바라 히로토시[福原 俊] 등과 내응 약속을 하여 전장에서 절대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며, 총도 쏘지 않겠다는 밀약까지 맺었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으로 향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 속으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도중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밀사(密使)가 내응을 신청해 왔을 때도,


 애송이 따위의 상대할 필요도 없다

 

 고 말하며 두 번이나 묵살하였을 정도였다.

 

 동과 서의 싸움은 이에야스의 부대가 틀어박혀있던 후시미 성[伏見城]을 서군이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방면 서군 4만의 총대장으로 히데이에[秀家]가 선택되었다.

 관위(官位)가 높은 것도 있으며 병력이 많다는 점에서 당연할 것이다. 예전 아직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쓰던 히데요시[秀吉]가 히데이에의 망부(亡父) 나오이에[直家]의 임종 자리에서 약속했던 것과 같이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는 물론 일본국(日本)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수로 길러내 보이겠습니다'라는 말이 히데요시가 죽은 후 우연이겠지만 실현되었다.

 

 그렇군. 내가 지휘를 하는 것인가?”

 

 하고 히데이에는 순진하게 기뻐했다. 이 복잡한 정세 속에서 이 남자만은 아무런 정치적 고려도 하지 않고, () 타이코우[太閤]의 남겨진 아이를 위해서라는 소년과 같은 정의감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거병의 주모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 동료인 오봉행들 조차 뒤로는 어떻게 움직일지 수상쩍은 시기에 이 비젠 츄우나곤[備前 中納言]만은 신뢰하여,

 

 비젠 츄우나곤만은 안심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즉 정치, 정세(政勢)가 아군에 유리하다는 듯이 착색(着色)하거나, 전쟁이 끝난 후 이익을 약속할 필요도 없이 솔직히 부탁하면 솔직히 받아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구나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은 병사수도 압도적으로 많았고 또한 그 휘하의 비젠 병사들은 용감하였으며, 히데이에는 겁()을 미워하고 용()을 사랑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 17천의 병사 수야 말로 서군의 주력이 될 것이다.

 

 히데이에는 70명의 장수와 4만의 군세를 배치하여 공성전(攻城戰)을 개시해서는 곧바로 후시미 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히데이에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들에게 휴식을 준 후 곧이어 이세[伊勢]를 거쳐 미노[美濃] 오오가키[大垣]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밤의 어둠을 타고 빗속에서 행군을 하여 세키가하라[ヶ原]의 예정 전장에 도착하여, 그 분지의 서쪽에 융기하는 통칭 텐마야마[山] 산의 허리에 진지를 둘 곳을 고른 후 병사를 5단으로 배치하였다. 히데이에의 본진에는 부대 표식[大馬印]으로 '붉은색의 후키누키[赤池吹貫]'가 세워졌고, 산꼭대기에서 산허리에 걸쳐 '흰 바탕에 큰북의 원[太鼓紋]'을 그린 우키타 가문의 깃발이 내걸렸다. 밤이 걷힘과 동시에 포진이 완료되었다.

세키가하라 포진도. 하늘색이 서군(西軍), 붉은 색이 동군(東軍). 노란색은 처음엔 서군이었다가 나중에 동군으로 배신하는 부대이다.(누르면 커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야스가 움직였다.

 이에야스는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를 출발하여 서군의 뒤를 따라서 야간행군을 계속하여 밤이 물러감과 동시에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여 8만의 병사를 전개시켰다.

 하지만 날씨가 개전(開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개가 짙어 적과 아군의 식별이 불가능하여 쌍방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걷히기 시작한 것은 오전 8시를 지나서부터였다. 같은 시각에 최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싸움은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 6천이 서군을 향해 돌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정면으로 받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였다. 곧바로 격전으로 이어졌고 후쿠시마 부대는 선봉이 무너져 궤주(潰走). 결국에는 몇 백 미터 정도 퇴각하게 되었다. 마사노리는 크게 화를 내며 은()으로 된 부대 표식을 세차게 흔들며 몸소 진두로 달려나가 패잔병들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우키타 군의 세찬 공격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동군은 이 패색에 낭패했다. 곧바로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부대, 츠츠이 사다츠구[筒井 定次]의 부대가 달려들어 우키타 부대의 측면을 노리려 했지만 곧바로 반격당하여 후쿠시마 부대와 함께 퇴각했다.

 

 히데이에는 산허리의 높은 곳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서 이 전황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군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아카시 카몬 타케노리[明石 掃部 全登]가 맡았으며, 5단으로 나뉘어져 배치된 부대는 노부하라 토사[延原 土佐], 우키타 타로우자에몬[浮田 太左衛門], 오사후네 키치베이[長船 吉兵衛], 혼다 마사시게[本多 重][각주:1]등이 각각 지휘하였다. 이 용감하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대장의 휘하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용감함으로 싸웠다.

 

 고독한 싸움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왜냐하면 이에야스의 사전 공작에 의해 서군의 7할은 깃발을 움직이지 않았고, 총을 쏘지 않았으며, 진영을 땅바닥에 붙인 채였다. 나머지 3할만이 싸우고 있었다.

 3할의 주력은 우키타 부대이며, 거기에 더해 이시다 미츠나리 부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라는 2부대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7할은 잠이라도 자는 듯이 방관하고 있었다. 이 서군 7할의 방관을 보고 이에야스는 당초 이겼다고 생각했다.

 

 싸우고 있는 적은 어느 깃발과 어느 깃발인가?”

 

 라며 안개 속으로 척후를 보내어 확인해 보자 위와 같았다. 이에야스가 보기에 미츠나리에게는 무략(武略)이 없으며, 히데이에는 애송이가 지나지 않았다.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다소 뛰어나다고는 하여도 영지(領地)가 작았기 때문에 그 지휘하의 병사는 소수였으며, 거기에 요시츠구 자신은 갑옷도 입지 못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황은 이에야스의 낙관론을 차츰 배신하기 시작했다. 서군의 3할이 사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군은 전선(全線)에 걸쳐서 붕괴가 시작되어 이에야스의 지휘조차 거의 전해지지 않았고, 각 부대도 연계가 끊어져 각각 싸우고 있는 형세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 생애에서 자기 지휘하의 아군이 이렇게까지 지리멸렬한 상태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과 창의 한가운데서 병사들을 질타하고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몇 번인가 무너져 후퇴하면서도 그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이길 수 있다

 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대를 마구 무너뜨리고 있는 정면의 우키타 부대가 그 위세에 비해서는 돌격이 계속해서 이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후쿠시마 부대가 4~5백 미터나 퇴각하면 그들은 더 이상 병사들을 돌격시키지 않고 멈추게 하여, 분지의 중앙까지 쫓아가는 것을 두려워해 몇 번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기묘한 적군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마사노리는 알게 되었다. 우키타 부대에는 아군이 없었다. 서군의 여러 장수들은 주변의 산꼭대기, 산허리, 길 옆에 포진하고 있었지만 우키타 부대의 공격에 가세하려고 하지 않았다.

 

 적은 한 겹이다! 후속 부대가 없다! 두려워 마라!”

 

 마사노리가 포효하며 어벙대고 있던 사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이 적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부터였다. 마사노리가 보건대 우키타 부대에 아무리 위세가 있다고 하여도 결국엔 피로해 질 것이며, 결국에는 약해질 때가 올 것이다.

 

 마사노리는 무너져 있던 군사를 재정비해서는 역습에 나섰다. 이 때문에 사방의 진지에서 보고 있으면, 후쿠시마 가문의 산길 모양의 깃발과 우키타 가문의 큰북 깃발이 서로 검은 연기를 피우는 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고 때로는 서로 뒤엉켜, 때로는 한쪽이 쫓고, 때로는 한쪽이 쫓기거나 하여 어느 쪽이 이길지 알 수가 없었다. 오전 11시 즈음에는 이시다 진지 정면의 동군도 격퇴당하였고, 오오타니 진영분지 중앙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밀린 동군은 분지의 중앙부에 뭉쳐서 헛되이 인마(人馬)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오가 되어서 역전되었다.

 마츠오야마[松尾山] 산꼭대기에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반하여, 15천의 병사를 휘몰아 산허리에 진지를 갖추고 있던 서군 오오타니 부대를 치고 길게 늘어진 대형(隊型)의 옆구리를 찔러 그들을 거의 전멸시켰기 때문이었다. 요시츠구는 배를 갈랐다. 이 때문에 우키타 부대는 동군의 대부분에게 포위당하여 고립되었다.

 

 히데이에에게는 이 순간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건 킨고[金吾=히데아키]인가!? 킨고 일리가 없다!”

 

 처음 외친 것은 이 말이었다. 히데이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킨고 히데아키 거동의 수상쩍음에 대해서는 싸움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츠나리 등 서군 지휘부가 계속 의혹을 가지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는 어디까지나 낙관(樂觀)하여,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고 미츠나리에게도 말하였고, 요시츠구에게도 말했었다. 이 남자답게 그 이유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의 양자이다

 

 그 뿐이었다.

 

 그는 타이코우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다. 나도 양자라는 입장에서 킨고의 마음을 추측하건대, 설사 모두가 히데요리[頼]님을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랑 내기해도 좋다니까. 킨고는 절대 배반하지 않을 걸

 

 이라고. 그렇게만 히데이에는 말하였고, 더구나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정말 극단적인 낙관론자이시군

 

 라고 미츠나리는 뒤에서 히데이에를 그렇게 평했으며, 실제로 히데이에와는 거병 이래 그런 쪽의 복잡한 정세에 관한 내용을 거의 상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데이에는 세상의 기괴함을, 지금 이 전쟁터를 급변시키고 있는 이변에서 알게 되었다. 이 히데이에라는 시를 좋아하는 세상이 태평 성대한 때였다면 2류 정도의 시인이 되어 있었을 것 같은 이 인물은 자신의 우둔한 정치 감각을 깨닫는 것보다도 오히려 상대의 부도덕(不道德)에 분노했다.

 

 킨고를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용서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미 아래의 우키타 군세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 이제는 진형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건만, 히데이에의 관심사는 히데아키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으며 오히려 그리하다 죽으려고 결심하였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말을 끌고 와라

 

 라고 명령했다. 지금부터 말을 달려 코바야카와 진영으로 돌격하여 킨고를 찾아서는 그와 서로 찔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용서치 않으리

 

 라고 히데이에는 말하며, 등자에 발을 걸어서는 말 위에 올랐다. 아카시 카몬이 말 끈을 잡았다.

 

 옳지 않습니다

 

 카몬은 패전의 관례로써 주장(主將)인 히데이에를 이 전쟁터에서 도망가게 하고자 하고 있었다. 북동쪽을 보자 이미 미츠나리의 사사오야마[笹尾山] 진지[陣地]도 무너져, 방금 전까지 산꼭대기에서 휘날리고 있던 [大一大万大吉][각주:2]의 깃발이 없어진 것을 보면 미츠나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것을 카몬이 말하자,

 

 지부쇼우[冶部少]는 지부쇼우, 나는 나

 

 라고 이 젊은 시인은 말했다. 히데이에가 말하기를,

 

 지부쇼우는 어쩌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이 일전을 일으켰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의지로 이 장소에 와, 움직이고 있다. 다른 것은 모른다. 단지 고() 타이코우 전하의 유언을 받들어 히데요리님의 세상을 지키고자 있는 힘껏 싸웠다. 그것을 저 부도덕한 킨고 때문에 졌다. 킨고를 이 칼로 죽이는 것 이외에 내 의지를 관철할 길은 없다.”

 

 고 히데이에는 계속 말했지만 카몬은 듣지도 않고 재빨리 깃발을 말게 하고 부대 표식을 꺾고선 히데이에의 친위대들에게 그를 둘러싸고 도망치라고 명령하였다. 히데이에는 인마(人馬)의 흐름에 휩싸이듯이 서쪽으로 도망쳤다.

 

 히데이에는 지고 우키타 가문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가문의 번병(藩屛)으로 세웠던 양자들 중에 이 남자만이 양아비의 희망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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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의 히데이에의 생애는 다른 이야기꺼리가 된다.

 그는 이후 사츠마[薩摩]로 달아나 은밀히 시마즈 씨[島津氏]의 비호(庇護)를 받았다. 후에 시마즈 씨가 막부(幕府)에 항복한 뒤 그 존재가 들어났지만, 시마즈 가문과 거기에 그의 부인의 친정인 마에다 가문[前田家]이 함께 막부에 탄원하여 조명(助命)을 빌었기 때문에 사형은 면하여 일단 스루가[駿河]로 보내져 쿠노우잔[久能山] 산에 유폐되었다. 이에야스에게는,

 죽일 것 까지는 없다

 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후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瓊],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등의 주모자들은 처형당하여, 그 목은 쿄우토[京都]의 강변효수(梟首)되었지만, 히데이에는 원래부터 그들에게 정객(政客)으로 대우받지 않았었고, 단지 의협심과 전투력을 인정받아 참가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세키가하라의 전쟁터에서 저 정도로 활약하여 동군을 몇 번이나 위기로 몰아 넣었건만, 그러나 일이 지나고 보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어서, 그 존재 자체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이에야스는 판단했다.

 

 후에 쿠노우잔에서도 옮겨져, 에도[江戸] 남쪽 120(里)[각주:3] 떨어진 해상에 있는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되었다. 히데이에는 이 섬에서 40년을 살았다. 섬에서는 언제나 궁핍하여, 평소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그것을 먹을 것과 바꿔가며 간신히 덧없는 목숨을 이어갔다. 평소,


 한번이라도 쌀밥을 먹고 죽고 싶다


 가 입버릇처럼 되었다. 그것이 에도[戸]에까지 이야기가 퍼져, 어느 해인가 배편으로 몇 가마니의 쌀이 보내져 왔다. 보낸 사람은 그의 옛 신하로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섰기 때문에 지금은 에도에서 잘나가고 있는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였다. 옛 주인에 대해서 켕기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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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이에는 1655년 겨울. 84세의 고령으로 죽었다. 그 사이 히데요리도 죽고, 이에야스도 죽어 토쿠가와 쇼우군[軍]도 이미 4대째인 이에츠나[家綱]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의 패배자이기는 했지만 승리자의 어느 누구보다도, 이 귀양살이를 한 사람은 오래 살았다.

 

==========================================================宇喜多秀家,======================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수어지교를 맺었다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둘째 아들.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유모의 아들을 죽이고 토쿠가와 가문에서 나와 우키나 가문[宇喜多家]에서 2만석을 하사받고 가로를 하고 있었다. 후에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양자가 되기도 하였으나 나중엔 카가 마에다 가문[加賀 前田家]으로 이적하여 가로(家老)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시다 미츠나리의 부대표식에 쓰여 있던 말.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서,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 같다고 함. [본문으로]
  3. 약 480k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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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27 0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키가하라 서군 참전 무장중 최장수한 친구지요. 카이에키 당하기는 했지만 장수로 보상 받았다고 생각했다면 그걸로도 위안 삼을만은 했을듯?

    (P.S..그렇게 생각하자면..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쿨럭;)

    P.S.2 오타니 요시츠구의 분전은 대단하군요. 당시에 갑옷도 못 입을 정도였을 줄은 몰랐습니다(..그러니 평이 그렇게 좋을 수 밖에)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fined BlogIcon 고어핀드 2008.02.27 18: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집안의 사람들 중 제일 흥미 있는 캐릭터인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좋아하는데, 갑옷을 입지 못할 정도라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분전한 걸 보니 인기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28 0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이야~~~ 쌀밥 한 번 먹고 죽고 싶다고 할 정도면 위안까지는....^^;;

    여담이지만... 세키가하라 서군 측에 섰던 시마 사콘의 인기도 대단하다더군요.
    쿄우토(京都)는 오랜 기간 역사의 중심지였던 만큼 어느 곳이건 역사적인 자취가 있는 곳이라 그걸 일일이 자랑으로 하지 않는다는데, 어느 음식점은 과거 시마 사콘의 쿄우토 저택이 있던 곳을 아직까지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고 하더군요.
    ps;다메엣찌님은 호소카와 타다오키 팬?? ^^

    고어핀드님//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오오타니 요시츠구는....글로는 저렇게 간단히 표현되었겠지만, 실제로는 아마...정말...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눈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인 것 같습니다.
    계획으로는 이거 끝난다음에 만화 "꽃의 케이지"의 원작 "일몽안풍류기"를 하려고 하는데, 그 작품에선 마에다 케이지에게 감동을 주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로 나오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2.29 2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꽃의 케이지 +_+ 일본 전국시대를 처음 알게해준 만화. 중학생때 봤는데 참 충격이었던...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1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어떤 면에서 충격이셨을라나... 쩍쩍 갈라지는 것에서?
    쓸데없는 사족이겠지만...원작에선 조선으로 간답니다. 만화는 한국과의 마찰을 피하기위해서인지 류우큐우(오키나와)로 바꾸었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3.03 1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케이지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지요.
    만화 주인공으로 어울릴만한 인물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3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이 찌질하게 나오더군요 ^^

  8. 2013.09.04 1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번이라도 쌀밥을 먹고 싶은게 소원이라니ㅠㅠ내가 만나면 맛있는 한끼 대접할텐데

  9.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2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각주 3번을 48km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

 양자를 보내는 측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히데아키를 위해서 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였다. 우선 양아버지인 타카카게[隆景]에 대한 답례로써 빈고[備後] 미하라 성[三原城] 3만석을 주었다. 은거소(居所)로써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 끼기 전에 빨리.
 
라는 식으로, 히데요시는 일이 결정된지 3개월째가 되자 히데아키를 타카카게가 머물고 있던 빈고 미하라 성[三原城]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될 수 있는 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부속 가로[付家老]도 군사(軍事)에 뛰어난 다이묘우[大名] 급 부하를 둘 골라 히데아키의 무게감을 더하게 하였다. 히데아키 본인은 단지 남이 깔아 준 궤도에 타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미하라 성에서 당주가 되기 위한 여러 의식, 행사가 끝났다. 타카카게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집안의 어른다운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오래된 가신(家臣)들은 그런 타카카게의 표정에서 씁쓸한 그림자를 찾아내어 남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저 좆병진 때문에!’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하는 자도 있었으며, 성 밑에 있는 쿄우신 사[真寺][각주:1]장노(長老) 기타츠[義達] 등도 히데아키를 배알(拜謁)한 후 몰래 일기에 적었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 가문 멸망의 조짐인가? 슬프도다 슬퍼

 1597 6 12. 
 
타카카게는 66세로 죽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영토는 치쿠젠[筑前]과 그 밖의 것을 포함하여 52 2500석이라는 큰 영지(領地)였다. 그것이 히데아키의 것이 되었다.

 상속한 후 2차 조선 침공[각주:2]이 발령되어 히데아키는 새로운 운명에 태워졌다. 원수(元帥 = 총대장)에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외정군(外征軍)일 경우 순수하게 군사적으로만 따지면, 총사령관은 토요토미 가문필두(筆頭) 다이묘우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등이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위대한 인물을 외정군 총사령관으로 만들면 전쟁터에서 외정군을 장악하여, 인망을 얻고, 명성을 얻어, 그 때문에 개선(凱旋) 후 국내 정치 체재를 변동시킬 위험이 있었다.
 하기는 당초 이에야스라는 안()도 조금은 나왔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찍이,

 졸자가 있는 한 주군(히데요시)에게 갑옷을 입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원정군 사령관의 직책을 맡겠다는…… 이것은 말하자면 이에야스의 아부(阿附)였지만, 그런 척을 하였다. 이번 해외 원정에 관해서 이에야스는 다른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그랬던 것처럼 속으론 반대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적어도 한번 정도 사령관이 되겠다는 물밑 협상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이에야스의 가신 중 하나가 그런 식의 말을 하자, 이에야스는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삐쳐서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바다를 건너면 하코네[箱根[각주:3]]는 누가 지킨단 말이더냐?”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 조금 전, 아이즈[津] 91만 여석의 다이묘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이 조선 출병 계획을 듣고,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 미쳤구나

 라고 측근에게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이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맘속으로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외정은 히데요시가 자신의 명예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것으로, 제후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1차 조선 침공[각주:4]으로 제후들의 영내(領內)는 피폐했다. 지금도 그로 인해 국고(國庫)가 비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기는 이로 인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왕년의 자기자신과는 별개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정세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전쟁터에 가지 않은 제후들에겐 인부와 돈을 염출(捻出)시켜, 후시미[伏見]의 다른 장소에 대규모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축성은 군사상의 이유가 아니라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아직 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頼]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후시미 성[伏見城]에 산다는, 말하자면 팔불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즈음부터의 히데요시는 어떤 것을 생각하건, 모든 것이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는 것이 생각의 출발점이 되어 있었다[각주:5]. 원숭이놈은 미쳤다고 가모우 우지사토가 혀를 찬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여러 불운 중의 하나가, 이러한 정세 속에서 원정군의 사령관이 된 것을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이묘우[大名] 42, 총 인원 16 3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후방인 부산(釜山)에 사령부를 두었다. 보좌역으로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함께 하였다.
 선봉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였으며, 항상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1차때와는 달리 사기가 오르질 않았고, 각 장수들 간에도 연락과 규율이 흐트러져, 위로는 다이묘우[大名] 아래로는 인부에 이르기까지 염전(厭戰) 기운이 팽배하여,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를 하였다.
 이런 전쟁터의 상황은 파견된 감찰(監察官)들에게서 곧바로 후시미[伏見]로 보고되었다. 이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받아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1차 원정 때의 감찰관[메츠케(目付)]은 미츠나리였으며, 그는 그 검단(檢斷)적인 성격을 노골적으로 발휘하여 카토우 키요마사 이하 여러 장수들의 비리(非理)(바늘로 낸 구멍 정도의 규율 위반이었지만) 공격 대상으로 삼아 하나하나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미츠나리는 성격적으로 작은 과오,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터에 나간 여러 장수들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키요마사 등은 봉록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질 정도였다. 이번 제 2차 원정에서 미츠나리는 후시미[伏見]에 있었지만, 보고서는 모두 그의 눈을 거쳐 정리된 후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갔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원정군의 현황이 맘에 들지 않았고, 어느 장수에 대해서건 불만족스러웠다.

 원정 10개월째에 유명한 울산 농성전이 펼쳐졌다. 키요마사는 고군분투하며 성을 지켜 4만의 명나라 군과 싸웠지만 식량이 떨어졌다. 급보를 부산의 총사령부로 날려 구원을 청했다.

 킨고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라며 쿠로다 죠스이는 히데아키의 이름으로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보내었고, 다방면에서 한꺼번에 진격하여 적을 역포위한 뒤 크게 싸워 적의 목을 취하길 13238급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히데아키는 처음 경험한 실전의 재미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명군 4만은 갈팡질팡하기에 바빴고 일본군은 사슴을 쫓는 사냥꾼과 같이 손쉽게 학살하고 다녔다. 히데아키는,
 
내도~’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젊은이의 성격은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제지하려던 막료(幕僚)를 채찍으로 후려갈겨 물리치고 말을 몰아서 적에게 뛰어들었다. 친위대(御馬廻りの)도 히데아키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창에 뛰어나질 못해도 좋았다. 히데아키는 미친 듯이 찔러대 13명의 적을 죽였고 자신도 피를 뒤집어 써 새빨갛게 되어서야 피로를 느끼고 이 놀이를 멈추었다.

 이 소식이 후시미에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울산성을 끝까지 지켜낸 키요마사를 포함한 3명의 장수[각주:6]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구원군인 히데아키 이하 여러 장수의 활약에도 굉장히 만족하여,

 킨고도 나름 하는구나~”

 하고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히데요시는 기뻐하였다. 기분이 좋을 때의 히데요시에게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듯한 그런 인격적 매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몇 일 뒤에 뒤바뀌었다. 이 변화는 20세기인 오늘날에는 오히려 의학(醫學)의 영역일 것이다.

 킨고는 용서할 수 없다.”

 고 갑자기 말했다. 히데아키에 대해서 새로운 떡밥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전과 똑 같은 보고서였지만 그 평가가 조금 바뀌어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바뀌게 된 것은 미츠나리의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는 생각하였다. 이 울산성 구원으로 히데아키의 인기가 오르기라도 하면 장래 히데요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히데아키의 형 뻘인 관백(白) 히데츠구[秀次]가 죽어 히데요리의 해()가 하나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히데아키. 거기에 부하로서는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진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일 것이다.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 미츠나리가 가진 유일무이한 정치적 입장이었으며, 히데요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츠나리를 총애(寵愛)하여 중용(重用)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 이외에도 요도도노[淀殿]와 그 자식에 대해, 풍토(風土)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오우미[近江] 북부 출신이었다. 요도도노는 예전에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한 북부 오우미의 다이묘우 아자이 씨[氏]의 따님으로, 즉 북부 오우미 사람에게는 신성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 중 오우미[近江] 계열은 요도도노를 중심으로 살롱(salon)을 만들었고, 그것이 규벌(閨閥)이 되어,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음과 동시에 이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면에서 주세력이 되었다.

 이에 대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오와리[尾張] 출신들은 같은 오와리 출신의 키타노만도코로[政所]와 어렸을 적부터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를 중심으로 규벌을 만들고 있었으며, 이들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적대하여 무슨 일이건 대립하였다.

 지금 조선에 건너간 장수들 대부분이 키타노만도코로 당()이었다. 이 당이 장래 히데아키를 추대(推戴)하여 히데요리에게 대항할지도 몰랐다.

 킨고님을 너무 띄어주는 것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좋지 않습니다

 미츠나리는 진언(進言)하였다. 항간에서는 칸파쿠 히데츠구의 죽음도 이 미츠나리의 참언(讒言)이었다고 믿겨지고 있었다. 미츠나리가 참언을 했건 하지 않았건 히데츠구의 몰락은 미츠나리의 정치적 견해와 히데요시의 이해(利害)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그의 몰락이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 것도 틀림없었다.

 역시…… 그런가?”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행동에 대해 미츠나리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겼다. 전군 사령관이라는 자가 손수 창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 외에도 성격이 거칠었고 막무가내인 점도 많았다.
 
히데아키에게 벌을 내려야 하나?’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무장으로써의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지 도덕상의 문제이거나 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그로 인해 싸움에 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기가 더 높아져 이겼다. 벌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벌을 내려야만 했다.
 히데아키의 행동을 살펴 보니, 양아버지인 타카카게가 정한 군제(軍制)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여, 그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장병들은 몹시 불쾌해 하고 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이 시대의 명장이었다. 가신들은 타카카게를 존경했으며, 이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병사들은 강했고 군법이 엄정했다. 그러나 히데아키가 거기에 들어간 뒤 의미도 없이 그 군제를 무시하고 있다. 죽은 양아버지를 존경하는 듯한 모습이 전혀 없었으며, 경건(敬虔)함이 전혀 없었다. 히데아키가 그러한 성격이라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고 한다. 놀랄 만큼 멍청하다고 하여도 히데아카의 곁에 나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도 있으면 어떤 막되먹은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히데아키의 존재는 히데요리의 장래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질 않을 것이다.

 역시…… 히데아키에게 치쿠젠[筑前] 52만석은 너무 크지

 히데요시는 말했다. 큰 영지(領地)와 많은 병사를 가진 만큼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려 하겠지만 조그만 땅밖에 없다면 추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아키의 땅을 거두어들이고 에치젠[越前] 15만석 정도로 하자. 거기를 어디로 할 것인지 조사해 두어라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에게 그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1. 지금은 소우코우 사[宗光寺] [본문으로]
  2.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3. 하코네[箱根 – 맵의 한 가운데 箱根山이라 쓰여져 있는 곳. 확대나 축소해 보면 대충 위치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함]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충지로 오오사카[大坂] 쪽에서 칸토우[関東]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있는 곳으로, 험한 곳이 많은 천연의 요해(要害)이다. 따라서 의미적으로 ‘칸사이[関西]의 세력에게서 칸토우를 지킨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이름. [본문으로]
  5. 역사상으론 히데요시가 성을 새로 지은 것은 지진으로 인해 그때까지 살던 성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아이를 성주로 삼는 것은, 일찍부터 아이에게 직신(直臣)을 만들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흔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2살 때 나고야 성[那古野城]의 성주가 된 것과 같이. [본문으로]
  6. 나머지 둘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오오타 카즈요시[太田 一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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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31 19: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허허.. 치쿠젠 52만이 에치젠 15만석이 됐더라면야.. 세키가하라에서의 그 참혹한 꼴도 없었겠군요;

    킨고 녀석에게도 미츠나리에게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품을 만도 했겠는데요..(그런데도 뭘 믿고 미츠나리는 킨고 녀석이 서군에 남을거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는지-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1 1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곳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칸파쿠 + 카미카타(上方)에 1개국 추가... 로 꼬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이 글에선 히데아키의 소령이 52만석이라고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후 얻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옛 영토 55만(혹은 50만석...) 카미카타에 가까워 졌다곤 하지만, 전투를 결정지은 것에 비하면 적을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말하듯이 이 때는 33만 여석 근처가 아니었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어도 일본 위키를 보면 52만석...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군요.(ㅁㅎㅎ)

    徳川家康 (関東に256万石)
    前田利家 (加賀など83万石)
    宇喜多秀家(吉備東半57万石)
    毛利輝元 (吉備西半・安芸など120万石)
    小早川隆景(筑前33万石)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なお小早川隆景死後、上杉景勝(会津120万石)が大老となり、前田利家死後、嫡子の利長がその地位を継い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바야카와 석고가 의외로 적었군요. 뭐, 많은편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모리 종가에 비하면..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8.01.03 02: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히데아키의 그릇이야 그렇다지만 다른 소설속에서의 미츠나리는 음모에 능하고 째째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 같기도..
    반면 요즈음 評도 그렇고 葵徳川3代였던가? 드라마에서는 忠義者로 나오던데...긍정적으로 보는 면도 많은 것 같아요^.^
    만약関ヶ原에서 미츠나리가 이겼다면..이라던지...
    어쨌든 미츠나리는 고지식한 점으로 자신을 파멸시켰지만 센스만점에 교양도 겸비한.. 같은 취미의 사람들이 놓고 봤을 때 흥미만점 인물인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그 봉토라는 것이 저한텐 복잡 미묘하더군요.
    종가인 모우리 가에 비하면 (같은 오대로급이지만) 적다고 할 수 있지만, 모우리 가문이 츄우고쿠 국인 연합체 중 맹주 격인 역사를 가졌다 보니, 히데요시가 이 만큼 다 니 땅~ 이라고 인정을 하여도, 동급의 다른 도자마(국인)들에겐 어쩔 수 없이 자치권을 허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직할령은 어느 정도가 되었을지...
    그에 비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아예 본거지를 벗어나 치쿠젠에 새로 영지를 하사받은 만큼, 데리고 있던 국인들을 직신화 & 영지의 직할령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52만석의 근거는 후에 기어 들어 온 쿠로다 가문이 신고한 영지가 약 50만석 근처다 보니 그리 되지 않았을지...)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깃쨩님//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방문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이시다 미츠나리는 굉장히 유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시한 히데요시의 소위 문치파 관료 조직이 조금만 덜 유능했다면,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꺼라 생각합니다.(후방 행정 보급 지원 없이 십만 단위가 넘는 인원을 움직일 순 없을테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시다 미츠나리는 패장이기에 모든 것을 뒤집어 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가모우 우지사토의 유능한 전투 집단이 그대로 미츠나리의 품에 안긴 것이나, 참언했다고 알려진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부하들도 세키가하라 때는 미츠나라 측에서 목숨을 던진 것을 보면, 현재 알려진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나 세키가하라 때와 임진왜란 전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한 것이 그다지 문제가 없는데(제가 과문한 탓일지도...), 갑자기 임진왜란 때와 세키가하라 사이에 두고 이시다에 대한 안 좋은 것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혼자 음모론 놀이 하기에도 재미있더군요.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업데이트는 일요일 즈음이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부분은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든 부분이군요.

    일단 히데아키의 봉토는 치쿠젠일국, 치쿠고와 히젠의 일부분 도합 35만7천석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긴 합니다.

    그런데, 치쿠젠은 영제국상으로는 상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일개국 만으로도 30만석强에 해당하지요. 그러면 치쿠고와 히젠을 더하지 않고도 표고 35만석에 달해버리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히데아키 이후에 입봉한 쿠로다 나가마사의 경우에는 히데아키와는 달리 치쿠고, 히젠을 제외한 치쿠젠국 1개국 만으로도 50만석 이상(52만석인가 53만석인가)의 석고거든요.

    이것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안드로메다 고무줄 석고가 되겠습니다만,

    이건 역시 태합검지라는 실시의 과도기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할 부분 같습니다.

    이 전제하에서 생각해 보면, 히데아키가 치쿠젠에 재봉하던 당시, 表高는 35만석이라 해도, 實高는 50만석 이상(60만석 까지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이후 쿠로다씨가 치쿠젠 일국에 입봉되었을 때는 검지결과가 반영되어 표고가 실고에 맞게 상향조정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니까 위 내용에서 히데요시의 독백인 "치쿠젠 52만석은 너무 많다."라는 말은 치쿠젠 검지가 끝났으나, 아직 실제 표고 상향조정은 되지 않았던 시기에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가 중에는 그래도 고증을 잘 해주는 시바 선생이 실수한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
    그런데, 제가 큐슈쪽 검지 완료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좀 뻘쭘하네요.
    단순히 쿠로다 나가마사의 후쿠시마번 52만석과 착각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시바선생의 면목을 봐서라도 검지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6 2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흐르는 돌입니다 ^^(流石)
    저는 그 쪽으론 생각도 못하고, 혹시 쿠라이리치(蔵入地)를 코바야카와 가문이 담당하기에 그런건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를 본 것 같은데 찾질 못해서(어느 책인가에 있었는데...) 생각나는데로 적었는데... 이야~ 역시 함부로 말해선 안 되겠군요. ^^ 앞으로도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6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제 리플은 거의 추리(...) 수준이어서 신빙성은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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