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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07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5- (4)

五.


 얼마 안가 츠루마츠[鶴松]가 죽었기에, 히데요시는 그 비탄(悲歎) 속에서 외정(外征)의 지령을 내렸다.

 -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서 미쳤나!?

 토자마[様][각주:1]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등은 어떠한 필연성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대규모 외정에 대해 뒤에서 그렇게 욕을 퍼부었다.

 대다수 다이묘우[大名]의 마음 속도 비슷했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뿐만 아닌 거의 대부분의 다이묘우는 봉토(封土)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영민(領民)과는 아직 친숙하지 않았고, 또한 전란(戰亂)이나 검지(地)[각주:2]로 인해 받은 상처에서 백성들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막대한 외정의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라는 것인가?

 '봉행(奉行) 녀석들이 부추기고 있다.'

 라는 소문이 네네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봉행들이 히데요시라는 노망난 독재자에게 슬픔을 외정으로 달래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 네네는 생각했지만,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라는 곳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은 미츠나리, 나가모리[長盛], 마사이에[正家]라는 오우미[近江] 사투리를 사용하는 재간꾼들이 히데요시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 그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 내의 대소사, 인사, 천하의 형법(刑法)과 같은 것들을 집행하고 있었다. 이 현상을 네네 주위에 있는 여관(女官)들의 여자의 눈으로 보면,

 - 요도도노[淀殿]는 요즘 권세(權勢)가 있으시다.

 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근래 토요토미 가문은 오우미[近江] 사람들에게 독차지 당해 있었다. 네네가 돌봐주고 있는 오와리[尾張] 계열의 다이묘우들은 중앙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질 못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政所]가 아닌 요도도노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이 가문 내에서 자주 화제(話題)가 되었다. 매일 네네가 듣는 화제는 모두 이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우미 파벌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여러 다이묘우,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 거기에 측실이나 여관들까지도 네네에게 와서는 울분이나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은 네네에게 매달리는 것 이외에 기댈 만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도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 측실의 험담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네네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도도노는 그 특출한 미모를 제외하면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자질을 가진 여성이며, 단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권세욕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나서서 정치 세력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만약 나쁘다고 한다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옛 아자이 가문[浅井家]에서 온 늙은 시녀들이었다. 이 무리들이 요도도노가 츠루마츠의 [생모]가 된 것을 기회로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대항하고자 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시작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봉행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미츠나리 등도 요도도노를 추대함으로써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토요토미 가문의 중추에 계속 자리잡고자 하고 있었다. 그런 소위 주변 인물들이 요도도노를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가고자 함에 틀림이 없었다. 네네는 그렇게 보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나쁜 것은 그들이었다.

 

 네네는 마음속 깊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무리들은 히데요시님이 돌아가신 다음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츠루마츠와 요도도노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미츠나리 이하 오우미 파벌의 다이묘우를 측근으로 거느린다.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는 후퇴하고 그녀를 의지하고 있던 창업(創業)의 공신들은 힘을 잃어 갈 수밖에 없다. 네네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오와리 출신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꿈에서도 신음 소리를 낼만한 미래상일 것이다. 물론 일이 일인만큼 모두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 누구도 이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1592 4.

 외정군은 조선에 상륙하였다.

 제1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2군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선봉으로 하여 각지의 성을 함락, 앞을 다투며 북상하였다.

 당초는 파죽지세라 할만 했지만, ()나라의 대군이 정면의 적이 됨에 따라 진공(進攻)은 정체되고 각지에서 부대가 고립되어 때로는 고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유키나가와 키요마사는 사이가 나빠 서로 돕기는커녕 무엇이건 서로 으르렁거렸기에,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거기에 파고들어서는 반격하였고, 이 때문에 아군의 작전에도 자주 차질을 빚었다.

 

 이런 종류의 사태를 조절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관으로 히데요시는 군감(軍監)이라는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 直高], 오오타 카즈요시[大田 一吉] 등 작은 영지(領地)의 다이묘우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오우미 파벌이었으며, 그런 군감의 총책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미츠나리는 조선에 상주(常駐)하지는 않고 전선을 시찰하고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곁에서 현지의 군감들이 보내오는 보고서를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이런 군감단(軍監)의 면면들은 이시다 당()이었기 때문에 유키나가에게는 좋고 키요마사에게는 냉엄했다. 때로는 키요마사의 언동을 무뇌아처럼 보고하였다.

 예를 들면 평화 교섭 단계에 들어갔을 때, 키요마사는 토요토미의 성()을 하사 받지 않았음에도 명나라 사자에게 보낸 공문서에 '토요토미노 키요마사[豊臣 ]'라고 서명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또한 명나라 사자에게

 

 "당신들 대명인(大明人)은 코니시 유키나가라는 자를 일본국의 무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저것은 무사의 무자도 모르는 사카이[堺]의 상인(商人)이다. 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키요마사의 언동이 조선에 있는 군사들을 혼란 시키며,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히데요시는 준공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받았다.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키요마사라면 그럴 것이다, 곧바로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급사(急使)가 조선으로 건너가 키요마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다.

 키요마사는 자신의 군단을 전선에 남겨두고 장교 50, 일반 병사 300명이라는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서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세토 내해[瀬戸海]를 거쳐 오오사카[大坂]에 직행한 후 후시미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라도 내알(內謁)할까 생각하였지만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몸이기에 그것도 불가능하였다. 키요마사는 여장(旅裝)도 풀지 않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사람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저택을 방문하여 성안의 사정을 듣고자 하였다.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놈이 꾸민 참언(讒言), 덫일 것이다. 필시 그럼에 틀림이 없다

 

 고 키요마사는 굉장히 화가 났는지, 나가모리가 한마디의 설명을 하기도 전부터 고개를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군감(軍監)의 면면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후쿠하라 나오타카는 미츠나리의 친척[각주:3]이며, 오오타 카즈요시, 쿠마가이 나오모리[能谷 直盛], 카키미 카즈나오[垣見 一直] 등은 모두 미츠나리에게 알랑거린 덕분에 출세해 온 오우미[近江] 파벌 사람들로 당연 자신들의 파벌인 유키나가를 옹호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지부쇼우놈의 목을 뽑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가모리는 서둘러 진정시킨 후,

 

 지금에 와서는 지부쇼우의 권세에 견줄 만한 자가 없네. 그러한데 무슨 말을 하시는 겐가? 그와 화해를 하시게. 하지 않으시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일세. 우선 그 화를 가라앉히게. 졸자가 자리를 주선할 테니 내일이라도 지부쇼우와 만나시게

 

 라고 말하자, 키요마사는 무가의 신이시여!! 라고 갑자기 방바닥을 치며 노성(怒聲)을 터뜨리고는,

 

 신불(神佛)도 굽어살피소서.

 그자와는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졸자는 조선팔도에 쳐들어가 수십 번 싸워 대명(大明)도 물리치고 추위와 더위를 참았으며, 때로는 굶주림도 겪었소이다. 그에 비해 지부쇼우놈은 편안하게 성안에 있으면서 더구나 히데요시 전하의 총애를 내세워 우리처럼 전쟁터에서 일하는 자들을 멸하려 한다. 그렇게 좆 같은 녀석들하고 우리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소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모처럼 둘의 사이를 좋게 하고자 했던 나가모리도 발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가 1596 1월이었다. 그대로 아무런 추가조사도 없이 키요마사는 근신을 명령 받아 후시미[伏見]의 자택에 유폐 당했다. 이후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이보다 1년 반 전에 요도도노의 배에서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 때문에 이때까지 토요토미 가문 후계자였던 히데츠구[秀次]의 영향력은 저하되었다. 히데츠구는 앞날에 불안을 느끼고 난행(亂行)을 계속 저질렀기에 토요토미 가문은 그 정권이 성립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미 왕년의 똑똑한 인물이 아니어서 사람이 변한 듯 노망이 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히데요리의 앞날에 대한 것뿐이었고, 그 설계를 미츠나리 등에게 연구시켰으며, 미츠나리 등도 이 토요토미의 천하가 무사히 히데요리에게 상속되는 것만을 연구하여 히데요시에게 헌책하였다. 곧이어 히데츠구는 죽음에 이르지만, 이 키요마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히데츠구는 살아 있었다.

 

 사실 미츠나리는 키요마사에 관한 놀랄만한 풍문이 조선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군감(軍監)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 쪽에서 키요마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그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593 5.

 키요마사가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장군 유정(劉綎)을 통하여 키요마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때 유정이 보낸 사자(使者)의 입으로,

 

 "히데요시가 지금 일본 60여주를 다스리고는 있지만, 영걸(英傑)이라고 하여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죽은 후 일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그는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고 말하게 한 후, 유정의 자필 편지를 키요마사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신은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지만 일개 지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때가 되어 우리에게 온다면, 나는 맹세코 대명 황제 폐하에게 말씀을 올려 당신이 대관(大官)에 봉해지도록 보증을 서겠다. 어째서 이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가?
 라고 되어 있었으며, 또다시 사자의 입으로 넌지시 명나라와 힘을 합쳐 히데요시에게 반격을 하자고 암시하였다. 단 키요마사는 종군승에게 글을 쓰게 하여 이것을 거부하였다. 그 편지 속에서,

물론 당신이 말하고 있는 대로 나는 한가한 무리들에게 무고를 받고 있다[각주:4]. 그러나 나는 태합(太閤=히데요시)의 충신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덧붙여 보냈다.

 

 어쨌든 이렇게 명나라와 키요마사가 주고받은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츠나리의 손에 들어와 있어,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리 미츠나리라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것을 주저케 하여 자신의 선에서 뭉갰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다른 측면에서 이것을 처리하였다. 키요마사가 이 이상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은 다음 세대인 히데요리에게 있어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외정(外征)을 하러 나간 장군이 무훈(武勳)을 세워 거기서 강대한 세력을 얻을 경우, 반대로 그 무력이 중앙 정권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멀리 당()나라의 현종(玄宗) 황제를 배신한 안록산(安祿山)의 예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가까이에 히데요시라는 예가 있었다.

 

 오다 가문[織田家]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었던 히데요시가 거기서 노부나가[信長]의 급사를 듣고 병사를 되돌려 미츠히데[光秀]를 물리치고는, 그 무력으로 오다 가문의 남겨진 자식들을 압도하여 토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키요마사에게 그 정도의 야심이나 정치력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무훈을 더욱 키워줄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 전쟁터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네네는 거기까지 이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네네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미츠나리는 네네를 보호자로 하는 오와리[尾張] 파벌의 무장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네네의 날개를 꺾어 요도도노 모자(母子)의 권세를 강화해 가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다

 네네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키요마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시간만 보내었다. 키요마사는 반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 여기서는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거나 군문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를 지칭.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양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불만이 많았다. [본문으로]
  3. 미츠나리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 예기(禮記)의 태학(大學)에 이르길 ‘소인은 한가하면(할 일이 없으면) 좋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한다(小人間居爲不善)’는 부문에서 따 온 것 같다…. 아마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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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08 12: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침묵'에서도 나와있는 내용이더군요.. 기가막힌 천재지변이 구해주지 않았다면야(-_-...좀 네타려나..,)

    아무튼 키요마사는 상당히 인물은 인물이었던듯.. 이모저모에서 두려워했던걸 보면.. 혁신에서는 좀 과소평가된 느낌이 없잖아 들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8 1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센구미(新撰組)의 콘도우 이사미(近藤 勇)도 가장 좋아했던 인물이라니까요.
    코에이의 게임에서라면... 확실히 내정치가 너무 낮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내정에 관한 것은 더 주어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3. 이노센스 2010.02.13 23: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요마사가 외친 신의 이름은 다시 원문을 확인해봐야하지만 무가의 수호신인 '하치방 대보살'일 겁니다. 시바 료타로의 다른 소설 [세키가하라]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가마쿠라 이래의 무사들은 궁시의 신인 하치방 대보살에게 승전을 기원하거나 맹세를 걸고는 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비사몬텐'이나 '마리지텐'일 수도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은
      "神仏も照覧あれ"...로 시작합지요.

      글쎄요... 어느 신에게 빌었을지... 소설에서 나오는 글 가지고 너무 단정지어서 말씀하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키요마사는 법화종의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이라 쓰인 깃발을 애용했다고 합니다. 만약 하치만대보살이나 비사문천, 마리지천을 믿었다면 그 쪽 깃발을 애용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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