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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쥬우지하루토요'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9.21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6- (9)
  2. 2008.09.12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5- (4)
  3. 2008.09.05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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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8. 미야[] 12살이 되었다.

 이 해의 봄, 히데요시[秀吉]는 이 나라의 궁정이 생긴 이래 가장 성대한 유흥을 기획하였다.

 흔히 말하는 쥬라쿠테이 행행[第 行幸]이다. 히데요시의 쿄우토[京都] 저택인 쥬라쿠테이에 텐노우[天皇] 이하 궁정사람들을 초대하여 무신(武臣)들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었다.


 미야도 당연히 초대를 받았다. 미야는 히데요시의 쥬라쿠테이[第]를 예전부터 보고 싶어하였기 때문에, 이 기획을 들은 날부터 당일까지가 너무 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 쥬라쿠테이[第]라는 성곽과 저택을 겸한 장대하고 아름다운 건조물은 작년 가을에 쿄우[京]의 우치노[野]에 준공하여, 큐우슈우[九州] 정복을 끝낸 히데요시는 개선 후에 거기서 살며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 장대하고 아름다움은 수도 안에 또 하나의 수도가 생긴 것과 같았으며, 어떤 화가(畵家)의 붓으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4 14일이 그 당일이었다.

 그날 아침. 히데요시는 직접 텐노우를 마중하러 나왔다. 텐노우[天皇]시신덴[紫宸殿]에서 출어(出御)하여 봉련(鳳輦)까지 걸어가는 동안 히데요시는 그 배후로 돌아가 텐노우의 옷 끝자락을 들고 모셨다.

 어소(御所)에서 쥬라쿠테이[第]까지 약 1636미터이다. 1636미터의 길을 경비하던 무사들의 수는 육 천명이었으며, 그 사이를 화려한 행렬이 지나갔다. 미야[]도 겉을 옻칠한 상자와 같은 가마(塗輿)에 타고 텐노우[天皇]의 뒤를 따랐다.

 

 건물 주위에 둘러친 해자(垓子)에 붉은색 다리가 세워져 있어 다리를 건너 쥬라쿠테이[第]의 성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미야는 별천지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 웅대하고 화려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기품 속에 화려함이 있어, 지금까지 대건축물의 상징인 사원(寺院)들과 같은 축축함이 없었고, 어디까지나 현세(現世)를 한 없이 즐기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마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것이 실속 없는 아름다움으로 격하될 지도 모르는 것을, 히데요시의 다도취향(茶道趣向)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서는 실속 없는 아름다움을 억눌러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 호우칸파쿠[=히데요시]이니 할 수 있는.

 이라고 미야는 후년까지 이때의 감동을 잊지 못했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불도를 닦는 승이 그림으로 자신의 기개(氣槪)와 품격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과 같이 히데요시는 건축으로 그것을 하고자 하려는 것 같았다.

 

 텐노우[天皇]가 준비된 자리에 들어섰다. 히데요시가 나아가 착석의 의식을 치렀고 곧이어 주연(酒宴)이 시작되었다.

 연회가 행해지는 자리의 서쪽은 활짝 개방되어 있어 그 앞에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은 온통 새싹들의 향연이었다. 거기에 철 늦은 벚꽃, 일찍 핀 진달래, 제철인 황매화, 제비붓꽃 등이 색을 더해, 그 근방에서 피어오르는 꽃내음 속에서 연회가 진행되었다. 연회 중간에 히데요시가 수많은 헌상품을 받쳤다. 밤의 연회는 음악이 중심이었다. 텐노우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는지 직접 소우[]라는 악기를 옆에 누이고 멋지게 연주하였다.

 

 연회는 3일간 이어졌다. 3일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텐노우[天皇]는 더 즐기고 싶었는지이틀 더 있고 싶다고 말하였다. 유사이례 예가 없었던 일로 군신들은 놀랐다.

 미카도[帝]도 히데요시가 좋으신 것이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와 좋아하는 점이 일치했다는 것에 날뛰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뻤다. 미야는 이 텐노우[天皇]필시 역사상 어느 텐노우[天皇]보다도 교양이 높았을 이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를 평생 존경하였다. 텐노우는 미야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중국 시학(詩學)의 재미를 가르쳐 준 것도 이 텐노우였으며, 백씨문집[白氏文集]의 기초를 쌓아 준 것도 이 고요우제이[後陽成]였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미야는 신경이 쓰였지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이 연기(延期)를 가장 기뻐한 이는 당연히 히데요시 자신이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을 텐노우[天皇] 앞에 모이게 하였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다. 소집된 자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 삼위[三位][각주:1] 이상의 계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였다. 이들보다 위계가 낮은 자들은 별실에 모여있었다.

 

 히데요시는 앞으로 나아가,

 -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훈계를 하였다. 그 훈계의 주된 내용은,

 

 지금 이처럼 우리들 같이 무신(武臣)같은 것들에게 텐노우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허용해주신 이번 행행(行幸)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의 영광이다. 이 기쁨에 우리들은 몸 둘 바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들 자손은 어떨까? 성은을 잊거나 혹은 무()를 내세워 텐노우에 대해 무례를 꾀하는 자가 나타날지 두렵다. 그러니 서약서를 제출하여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텐노우에 대해 배신하는 일 없도록 맹세하도록

 

 라는 것이었다.

 모두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미야는 그 자리의 처음과 끝을 그 눈으로 보았다. 보면서 위복(位服) 속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히데요시의 행동에 감격하였다. 미야의 조부(祖父)에 해당하는 선대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가 나이 어렸을 시기, 무가(武家)는 황실 같은 것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어소는 평소 수라(水剌)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빈곤하였는데 그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 히데요시와 같이 황실을 생각해 주는 인물이 나타난 것 자체가 기적이지 않은가?

 

 물론 히데요시는 히데요시대로의 꿍꿍이가 있었다. 히데요시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예전 그 자신과 동격이거나 아니면 오다 노부카츠,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그 자신보다도 상격(上格)에 있던 자들이 많았지만, 앞으로도 토요토미 가문이 그런 그들을 통제하는 한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계속 이어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텐노우[天皇]의 신성함을 빌려, 그 신성함을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철저하게 주입시켜서는 그로 인해 신하 중 제일인 칸파쿠 가문이 얼마나 중한가를 교육하여, 텐노우[天皇]를 따르는 것과 같이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을 따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그렇듯 심술궂게 이 현상을 관찰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았으며 거기에 무엇보다도 미야는 히데요시 빠돌이였기에 히데요시의 순수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미야는 토쿠가와 다이나곤[大納言] 이에야스라는 인물을 보았다. 이에야스는 극히 최근까지 히데요시와 싸우고 있던 토우카이[東海]의 패자(覇者), 히데요시도 이 인물에게는 조심하여 휘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빈객(賓客)을 대하는 것과 같이 응대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었다. 목이 두꺼운 인물이었다.

 구레나룻이 엷고 볼통통한 얼굴이었으며 동작에 지장을 줄 정도로 뚱뚱하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히데요시의 군사를 물리쳤다는 무인의 거만함 없이 공손하고 정중하여 그 행동거지나 풍모는 아무리 보아도 은거한 거상(巨商)과 같았다. 이에야스도 서약서를 써 제출하였다.

 

 시를 읊는 시회(詩會)의 행사도 행해졌다.

 참석자는 상급귀족(公卿) 측에서 24, 무가 측은 히데요시를 포함한 4명으로 합계 28명이었다. 자리순은 히데요시가 최상석으로 이어서 미야[], 말석에서 두 번째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각각의 무릎 앞에는 직접 지은 시를 필사하기 위한 벼루와 종이가 놓여졌다. 시회의 진행에 필요한 역할도 정해졌다. 시회 진행자[御歌奉行], 주제를 선정하는 사람[다이샤(題者)], 시가 쓰인 종이를 정리하여 낭독자[코우시(講師)]에게 전해주는 사람[도쿠시()], 낭독자 뒤에서 가락을 넣는 사람[핫세이(発声)] 등의 역할이다. 텐노우의 시가 적힌 종이를 옮기는 것[師]은 히데요시가 직접 하였다.

 텐노우[天皇]의 시는 정말 군자(君子)답다는 그의 인격에 어울리는 가락의 산뜻함이 갖추어진 것이었다.

그리도 오늘까지 기다린 보람이 있으니 소나무 가지에

온 세상의 언약을 매달아 보면서

わきて今日待つ甲斐あれや松が枝の

の契りをかけてみせつつ

 미야가 그것에 화답시를 만들었고, 거기에 히데요시도 그것의 화답시를 지었다. 히데요시의 그것은,

만대에 걸쳐 임금이 놀러 오시는 것을 익숙한 풍경으로 한다.

나무가 높은 건물에 쓰이는 것과 같이

よろづ代の君がみゆき(行幸)になれなれむ

みどり木高玉松 


 ‘이에야스는 어떨까?’

 하고 미야는 말석에 가까운 이에야스를 보았다. 미야는 이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영웅이라는 소문을 예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었다.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의 말에 의하면, 히데요시와 같은 예술적 취미를 일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화려한 의상을 좋아하지 않고 화려한 건축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 거성(居城)하마마츠 성[浜松城]도 극히 실용적이며 소박한 건조물에 지나지 않아, 성안에는 다실(茶室)도 없다고 한다. ()를 이에야스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으며, 와카[和歌] 등도 일체 읊는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사나이가 시회에 섞여 있었다. 읊었을 턱이 없는 와카를 저 뚱뚱한 사나이는 어떻게 읊을 것일까?

 

 미야는 계속 관심을 가졌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것을 한자한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옮겨 적다니!’

 하고 미야는 놀랐다. 필시 대작(代作)일 것이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임에 틀림이 없다고 미야는 생각했다. 왜냐면 이 이에야스가 재작년 10,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어 그 휘하에 들어오기 위한 의식을 치르러 오오사카[大坂]에 왔을 때, 그 회견석의 접대역을 예식(禮式)에 밝은 유우사이가 맡았다. 그것을 미야는 유우사이에게 직접 들었었다. 그 이래 유우사이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두터이 하고 있다고 한다. 대작을 했다고 하면 필시 유우사이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조금 남의 눈을 피하면서 베껴 적으면 좋을 것을 이에야스는 당당히 종이쪽지를 펼쳐 거리낌없이 베껴 적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야는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취했던 공손한 태도와는 대략 다른 뻔뻔스러움이 있어, 과장되게 말하면 텐노우[天皇]의 앞에 있다는 경외감(敬畏感)같은 것을 조금도 가지지 않은 듯 했다. 곧이어 읽는이[講師]가 그 이에야스의 시를 읽었다.

녹색 창연한 소나무 잎마다 임금의

천 년을 언약으로 본다.

たつ松の葉ごとにこの君の

を契りてぞ見る 

 라는 것이었다. 소나무의 잎은 수없이 많다. 그 수많은 소나무 잎마다 텐노우[天皇] 천 년의 번영을 빌었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시가 만약 지은이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야스도 또한 이 시에 따라 궁정의 번영을 보증했다 - 는 것이 될 듯했다.

 

 1590년이 되었다.

 미야는 이제 성인식을 치러 '토모히토 친왕[智仁 親王][각주:2]'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이 14세였다.

 그 전해에 토요토미 가문에 친자식이 태어났다. 츠루마츠[鶴松]였다.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칙사를 오오사카[大坂]로 내려 보내어 축하선물로 큰 칼[太刀]을 하사하였다. 이후 화제는 자연스럽게 미야를 토요토미 가문 유자(猶子)라는 신분에서 풀어놓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논으로 이어졌다. 히데요시에게 친자식이 생겼고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이 기회에 미야를 원래의 순수한 궁정인으로 되돌려놔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한때 자신의 유자였던 이 미야를 위해서 어떤 보답이건 해 주고 싶었다. 생각 끝에 독립된 궁가(宮家)를 창설시키자는 것으로 생각이 미쳤다. 궁가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영지(領地)와 저택이 필요했다. 우선 영지(領地) 3000석을 주었고, 이 새로운 가문의 명칭을 [하치죠우노미야 가문[]]으로 하였으며, 그 저택을 하치죠우[条] 강변[河原]에 마련해 주었다.

 

 이해의 정월.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3] 준비로 매우 바빴지만, 틈을 보아 입궐해서는 미야를 저택공사지로 데려갔다.

 

 미야의 저택 건물배치는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여전히 건축을 좋아했다. 히데요시는 미야를 저택의 예정지로 데리고 가서는 현장에 토목(普請), 건축(作事) 담당관리(奉行)와 장인(匠人)들을 불러 우선 기본방침을 세웠다.

 

 굉장히 어렵게들 생각하는군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친왕의 주거지이기에 어소(御所) 풍의 - 즉 토노모 형식[主殿造り][각주:4]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쾌함이 결여된다. 채광(採光)도 나빴고 무엇보다 너무 고풍스러웠다. 거기에 신흥(新興)의 스키야 형식[奇屋造 다실(茶室) 풍의 건축]도 가미하라 - 는 것이 히데요시의 주문이었다.

 

 미야도 무언가 말씀하시길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지만, 미야는 아직 건축에 대해 잘 몰라,

 

 모두 공(公)에게 맡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히데요시는 장인에게 도면을 그리게 하여 오오사카[大坂]에 돌아가서 그것을 받아보고서는 직접 붉은 먹을 먹인 붓으로 수정을 한 뒤,

 - 미야께도 보여드려라

 고 명했다. 미야는 그 도면을 보았다. 히데요시의 것은 너무 다도(茶道)의 취향이 드러나 있는 듯 했다. 미야는 그 점에 대해 그다지 불만이 있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말하자면 위로 매달아 열어 햇빛이나 비를 막는 시토미[蔀] 등을 사용한 왕조(王朝) 풍의 요소도 다소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 즈음 형인 텐노우[天皇]와 함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고찰에 몰두하고 있던 미야로서는 그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공간이 하나 있었으면 했을 것이다. 그 의견이 히데요시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지당하신 말씀이다

 

 라며 마지막 붉은 선을 그려 넣고서는 오다와라 정벌을 향해 출발하였다. 하지만 오다와라의 진영에서도 건축 진행 상태를 신경 써 하나하나 보고시켰다.

 미야도 자주 건축현장에 가서는 장인들 틈에 섞여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 미야가 차츰 건물과 건축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이 하치죠우[条] 저택의 건축부터일 것이다.

 

 연말에 건물이 거의 완성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에서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맹장지에 그려지는 그림()만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후원하던 화가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에게 재촉했다. 그 해의 마지막 날 전에 그것이 완성되어 저택에 설치되었다.

 그림의 주제는 노송나무였다.

 큰 화면 가득 짙은 묵의 선을 달리게 하여 노송나무를 그렸고 거기에 농후한 색채의 물, 하늘, 바위를 곁들인 그야말로 히데요시가 좋아하는 - 말하자면 쥬라쿠테이[第] 풍의 호화장려(豪華壯麗)한 구도로 히데요시가 만들어 낸 이 시대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듯 했다.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의 그림. 현재는 병풍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참고로 화가인 카노우 에이토쿠는 그 해의 10월(1590년 10월)에 사망하였기에, 완성을 한 것은 아마 제자일 것이라고 한다.

  새해가 되자, 미야는 이 새로운 저택으로 옮겼다. 이어 9월에 히데요시는 동방에서 개선한 뒤에 이 저택에 들렸다.

 

 잘 만들어진 것 같군요

 

 히데요시는 저택 안을 확인해 보면서 몇 번이나 말하였는데, 단지 정원만이 맘에 들지 않은 듯 직접 지휘를 해서는 바위를 이곳 저곳으로 옮겼다.

 

  1591년은 토요토미 가문에 불행이 이어졌다. 정월에 히데요시의 동생인 야마토다이나곤[大和大納言] 히데나가[秀長] 죽었으며, 8월에는 츠루마츠가 죽었다.

 토요토미 가문은 다시 후계자를 잃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을 하여, 이 해의 11월 조카인 히데츠구[秀次] 받아들여 자로 삼고, 그 다음 달에 칸파쿠 직책을 이 양자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조선 침략이 시작되었지만 히데요시는 이 즈음부터 몸의 심이 부러졌는지 갑자기 노쇠하기 시작했다.

  1. 이 삼위(三位)가 되면 당상가라 하여 궁궐에 입궐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공경(公卿)라 하여 상급귀족이 되었다. - 사족으로 정사위(正四位) 산기[参議]에 임명된 자는 사위(四位)임에도 특별히 공경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위키에는 ‘토시히토’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 호우죠우 씨[北条氏]와의 전쟁. [본문으로]
  4. 그 건물 안에 여러 행사나 침식 등을 모두 행할 수 있는 다목적 슈덴(主殿)이라는 건축물이 저택의 중심에 있는 저택형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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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9.21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는 인물이라,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 나갈지 궁금해집니다.
    이번편도 잘 읽었습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옛시가 많다는 이유로 질질 끌어왔던 이 '하치죠우노미야'편도 다음이 마지막입니다....(근데 그러고 보니 시는 몇 편 없었네요 ^^;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9.22 0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조선이고 일본이고 시는 어렵군요. ^^; 재밌게 읽었습니다.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2 1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읽고 관심이 생겨, 카노우 에이토쿠에 대해 찾아보니 의외로 요절했더군요. 위키에서는 과로사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적혀있었지만서도...

    문화인은 대체로 장수하는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조금 의외였습니다(~~;)

    이에야스 경우엔 참.. 뚱뚱이 외관을 잘 묘사했더군요~~; 뭐, 취미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르겠습니다만서도 그래도 대놓고 컨닝은 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2 1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참고로 시의 해석은 엉터리입니다. 고어는 자신도 없고,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보니 그냥 단어 뜻의 나열(겸 대충 때려 맞춘 것)입니다. 그래서 밑에 원어를 적어 넣었습니다. 잘 아시는 분이 보시면 알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 이건 넓은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다메엣찌님//그런 방면에 일이 많던 시기에, 그 분야에서 No.1급의 인물이다보니 이곳저곳 많이 불려다녀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근데 정말 저렇게 뚱뚱하였을지... 제 이미지로는 그냥 북두의 권의 작가가 그린 "꽃의 케이지"에 나오는 정도입죠...(그것이 동작에 지장을 줄 정도로 뚱뚱함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이에야스니까 조금 당당하고 거만하게 비춰지는 것이겠죠... 하지만 찌찔이급이 그랬다면 어떤 이야기가 되었을지 궁금하군요.(무엇보다 저렇게 베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늦지 의문이지만요. 처음 들어 보는 일이다 보니... 함 찾아봐야 겠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22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단지 베껴썼다고 싫어하게된건가 싶었는데 위키를 보니 좀더 큰 일이 있었군요;;
    다음 화에 나오려나요...? 기대해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2 2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다음이 마지막 편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9.23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곱게 자라 풍파없이 곱게 황실로 돌아간...
    과연 마지막 편에는 무슨 일이 있으려나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3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떠한 고민도 가져다 주는 일 없이 잘 먹여주고, 잘 대접해주고, 집까지 지어주고....
    저래주었는데도 빠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하치죠우노미야가 천하의 개*놈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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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는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되었다.

 유자라는 것은 [또한() 아들()과 같다()]는 말에서 유래하고 있다. 양자(養子)와의 차이는 거의 없으며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구별되기도 한다. 양자인 경우는 그 양갓집에 살며 양갓집의 성()을 쓰는 것이 원칙인 듯싶지만, 유자의 경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양자인 미야[宮]는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修寺家]에서 살며, 텐노우[天皇]의 일족으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그 환경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달이 저물었다. 2월에 들어서자 따스한 날들이 많아져, 그 달의 중순 즈음에는 궁궐(御所)에 심어져 있는 꽃의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 올해는 꽃구경 연회(宴會)가 일찍 열릴 것이다.

 하고 궁정에서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25일이 지나 따스한 비가 내렸고, 다음 날 궁궐의 이누이고몬[乾御門] 부근에 있는 벚꽃이 별안간 60%정도 꽃피었다. 텐노우[天皇]는 놀라 예정되었던 연회를 서둘러 28일로 정하였다.

 

 당일 미야도 이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라고는 하여도 텐노우의 말하자면 사적인 놀이이기에, 출석자도 친왕(親王)과 그 일족이나 미야몬제키[宮門跡][각주:1], 측근인 상급귀족[公卿] , 말하자면 궁궐 내의 사람들로 한해져 있었다.

 자연히 히데요시는 초대받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초대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현재 토우카이[東海]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외교적 절충에 바빴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오오사카[大坂]에 있을 터인 히데요시가 갑자기 가벼운 차림을 한 병사들을 이끌고 쿄우토[京都]궁궐에 입궐한 것이다. 다른 용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쿄우토에 온 김에 텐노우에게 문후(問候)드린다 는 것만이었다.

 어쩌다 이날 궁궐의 정원에서 벚꽃구경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 즐거운 기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고 하여 텐노우에게 알리지 않고, 궁궐 정원의 구석에 몸을 숨기고 선 채로 꽃을 구경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출하였다. 그것을 나중에 텐노우가 알게 되었고, 굉장히 흥겨워하였다. 이런 종류의 정취만큼 궁정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호우 칸파쿠[ 白]에게

 

 하고 직접 쓴 시 한 편을 무가담당(武家)의 귀족에게 맡겼다.

나무 숲에 색향이 남은 활짝 핀 꽃

떨어지면 궁궐의 봄도 지날 지어다.

木立より色香もる花ざかり

散らで雲井の春やいぬらむ

 히데요시는 그것을 받자마자 곧바로 답례의 시를 만들어 받쳤다.
안개 속에 숨어서 바라보건만

있는 것을 들킨 꽃나무 아래

忍びつつ霞みとともに眺めしも

けりなのもと

 라는 것이었다. 이 주종간에 시를 주고받은 아름다운 광경은 순식간에 궁정의 좋은 화제(話題)가 되었고, 미야도 당연히 그것을 들었다. 시를 보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황송한 일이지만 텐노우의 시보다도 히데요시의 즉흥 쪽이 몇 배나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우 칸파쿠[白]는 시에 관한 소질도 있으시군요

 

 하고 미야는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에게 말했다. 하루토요는 이 즈음 곤다이나곤[大納言]으로 승진하여 무가담당(武家)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텐노우의 시를 히데요시에게 전한 것은 그였으며, 답례의 시를 가지고 온 것도 그였다.

 

 그러하옵니다

 

 하고 하루토요는 무탈하게 답했다. 하루토요도 히데요시에게 시의 소질이 있는 듯 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멋진 답례시는 히데요시의 작품이 아니라 아무래도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첨삭(添削)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미야에게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미야는 평생 이 시를 히데요시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믿을 만큼의 근거가 후년의 미야 마음속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해, 1598 3 15일에 다이고[醍醐] 꽃구경이 개최되었을 때, 히데요시는 미야의 앞에서 미야와 노는 재미를 즉흥적으로 시로 만들었다. 시는 극히 자연스러운 가락으로,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미야는 자신의 생애에서 히데요시의 시를 많이 보았고, 그 중 몇 수는 수작(秀作)으로 기억하였다. 미야에게 있어서 히데요시라면, 그가 가진 재능 중에 가장 서툴렀을 터인 시가(詩歌)조차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미야가 히데요시의 유자가 된 1586년에 미야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7 24, 친부 사네히토(誠仁)친왕이 갑자기 와병(臥病)하여, 그 날 중으로 죽은 것이다. 사네히토 친왕은 텐노우인 오오기마치[正親町]의 세자였기에, 이 급사(急死)는 궁정에 있어서도 정말 큰일이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 있어,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쿄우토[京都]에 올라왔지만 임종의 시간에는 맞추지 못했다. 나중에 황위계승이라는 문제가 남았다. 당연 미야의 형인 카네히토 친왕[周仁親王]이 계승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다.

 

 이 해의 9.

 새로운 황태자인 카네히토 친왕이 성인식(元服)을 치렀다. 에보시오야[烏帽子親]의 역할은 궁정에서 가장 높은 신하인 히데요시가 맡았다. 이어서 오오기마치 텐노우가 예전부터 희망하던 대로 상황(上皇)가 되었고, 11 25일 카네히토 친왕이 황위를 물려받아 시신덴[紫宸殿]에서 즉위하였다. 이 새로운 텐노우가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이다.

 

 미야의 친형인 새 텐노우[天皇]는 아직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아직 황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미야가 황족으로서는 필두의 위치에 앉게 되었다. 이 텐노우[天皇]에게 만약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미야가 텐노우[天皇]로 즉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토요토미 가문의 유자였다.

 - 그래서는 곤란하다.

 라는 감정이 상급귀족[公卿]들에게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족보에서 지워둘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한층 더 강하게 가졌다. 자신이 외척으로 있는 그 황자가 토요토미 가문을 이어받는 것보다 텐노우[天皇]가 되어 주는 편이 훨씬 고마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토요도 말을 꺼내기 어려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새로운 텐노우[天皇]의 죽음을 바라는 듯 하여 온당치 않았다.

 

 정작 미야는 그러한 사태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에 살며 일본문학에 정진하고 있었다. 특히 요즈음은 쿠죠우 타네미치[ 稙道]에게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강석(講釋)을 듣기 시작하고 있었다.

 양아비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다음해의 봄,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 정벌을 위해서 오오사카 성을 출발하였을 때, 미야는 수많은 상급귀족[公卿], 상급승려[門跡] 등과 함께 히데요시의 출진을 배웅하기 위하여 오오사카로 내려갔다. 히데요시가 말을 탄 채 성문을 나설 때,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칙사가 도착하였다. 사람이 달려 그것을 말 위의 히데요시에게 알렸다.

 

 그때부터가 상식을 벗어났다. 히데요시는 일순 공황(恐惶)하여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땅에 앉아 서둘러 투구를 벗고 배례(拜禮)하였다.

 도열해 있던 다이묘우[大名], 쇼우묘우[小名]들은 히데요시의 정중함에 놀라 그들도 또한 땅에 굴러 떨어져서는 엎드려 절을 하였다.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도 이 생각지 못했던 광경에 눈을 크게 떴고, 또한 넋을 빼앗겼다. 히데요시야말로 이 지상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지배자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히데요시가 낭패하여 엎드려 절을 할 수 밖에 없는 텐노우[天皇]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란 말인가?

 미야는 그 눈으로 이 광경을 보고, 미야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頼朝]카마쿠라[鎌倉]에 막부(幕府)를 연 이래, 정권(政權)은 무가(武家)로 옮겨졌다. 지금까지 무가의 우두머리(棟梁) 중에 이 히데요시만큼이나 텐노우[天皇]를 존숭(尊崇)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때의 광경을 미야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 해. 히데요시는 여름 중순까지 큐우슈우[九州]에 있었다. 미야는 이해 나카노인 미치카츠[中院 通勝]에게 신고금(新古今)[각주:2]에 대해서 강석을 받았다. 양부인 히데요시는 매우 바빴지만, 미야는 그렇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1. 황족이 불문에 들어간 것 또는 주지로 있는 절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시집 여덟 편의 모음 하치다이슈우[八代集]의 마지막 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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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12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확실히 유우사이가 첨삭해줬다면야..(-_-;) 당대 최고의 강사가 첨삭해준 본고사 문제지 제출하는 느낌이겠군요(-_-;)

    생각해보면 히데요시또한 당대의 관습을 많이 깨어버린 사람이 아닐가 싶습니다. 저렇게 존숭하는 면도 있긴 하지만.. 우다이진까지 오른 노부나가야 그렇다 쳐도 고셋케의 전유물인 칸파쿠에 오른건 참..

    그런데 그런것 치고는 반발이 적군요. (역시 천하인의 포스라는건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16 0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화도 잘봤습니다. (NOA입니다^^;)
    히데요시가 데리고 가지는 않았군요. 어쨌든 가족이 되긴했지만 뭐랄까...
    시기가 시기인만큼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지금의 입양은 가슴으로 낳는다라는 말로 당시를 생각해보면 왠지 오묘한 느낌이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늦어져 죄송합니다.

    다메엣찌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칸파쿠에 오른 것은 당시로써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었을지...

    그쵸~ 천하인의 포스!!
    (뭐 자기만 칸파쿠 되었다가 다시 되돌려 준다고 해 놓고서는 토요토미 가문을 창설하여 자기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행동을 하였기에, 코노에 가문은 다른 가문들에게 속아서 빼앗겼다고 욕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말이죠)

    zardizm님//아이디가 티스토리의 주소와 같군요. ^^
    일본사에도 유사한 예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유자의 경우.... 관위승진을 빨리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들 하더군요.
    (사족으로... 저는 입양이라고 하면, 과거 여배우 최진실씨의 초창기 작품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작품이 먼저 생각이나서 왠지 슬픈 느낌이 듭니다)

  4.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9 09: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가 천황께 답장한 저 시 참 좋네요 언젠가 써먹고자 메모해둡니다

.

 

 이 날을 계기로 미야[]의 신상에 변화가 일어나려 하였다.

 그날 저녁. 미야가 있는 카쥬우지 가문[修寺家]에 우다이진[右大臣] 이마데가와(키쿠테이) 하루스에[今出川(菊亭) 晴季]가 부산을 떨며 방문해 온 것이다. 하루스에는 후지와라[藤原] 상급귀족[公卿]의 가문 중에서는 최상급의 명사(名士)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와 친교가 있었기에, 지금은 히데요시의 궁정정치를 위한 개인 고문과 같은 역할을 하며 큰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카쥬우지 가문에서는 당주인 하루토요[晴豊]가 응접했다. 미야의 외숙부이다.

 

 로쿠노미야()에 관해서요

 

 하고 하루스에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쿠노미야라는 것은 미야의 통칭이었다[각주:1].

 

 칸파쿠[=히데요시] 전하가 바라시길, 미야를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양자로 들이고 싶어 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야는 황족이 아닌가? 신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혈통도 수상한 히데요시 같은 놈에게……’

 그리 생각하여 침묵을 지켰다 참고로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미야의 생모 신죠우토우몬인 하루코[新上東門院 晴子]의 친동생이며, 또한 미야의 메노토[傅人]를 겸하고 있었다. 메노토는 신하이면서 부친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 이 양자에 대한 건은 이미 텐노우[天皇]의 내락을 얻은 상태다. 단지 카쥬우지 가문의 의향을 듣게 - 라는 말씀이외다, 라고 하였다.

 

 “……”

 

 하루토요는 생각했다. 세간이 모두 아는 것처럼 히데요시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 때문에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들인다는 소문도 하루토요는 들었었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의 성격이 경솔한 것 때문에 히데요시는 주저하고 있다고도 들었다. 그것은 그걸로 좋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 내의 사정이며,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일로 치부하고 있었다.

 

 우선 들어보시길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히데요시 공()은 이번에 칙명에 따라 토요토미 씨[豊臣]를 창설하였다. 그렇다면 토요토미 씨는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각주:2]라는 사성(四姓)과 더불어 일본 가문의 명문가가 되어 앞으로도 번영할 것이다. 그 명성을 이을만한 자는 히데요시 공에게 자식이 없는 이상 역시 존귀한 피를 가진 인물이 바람직하다. 그렇기에 로쿠노미야야말로 최적이오. 장래 천하의 권세는 이 로쿠노미야가 물려받게 되실 것이외다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하는 것이었다.

 

 어떠하시오?”

 

 잠시만!”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당황했다. 잠시…… 이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생각해 보자. 로쿠노미야는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며, 친왕(親王)에 임명 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버젓한 황족이다. 더구나 미야는 부친인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 , 형인 이치노미야[(카네히토(周仁)][각주:3]에 이은 세번째 황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어, 상기의 두 분에게 만약의 일이라도 있을 시에는 텐노우[天皇]가 되실 분이다. 그런 분께서 씨()도 없고 혈통도 수상한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에서 밭 메던 백성의 자식을 부친으로 받드시고, 그의 양자가 되어도 괜찮을 것일까? 그러한 예가 일본이 만들어진 이후 있었던 적이 없다. 귀족이란 피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생명인 것이다.

 

 전례(典例), 고사(故事)가 없습니다

 

 고 하루토요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였고, 거기에 그것을 말하려고 하자,

 

 알고 있소이다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앞질러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시대이다. 전례 같은 것을 지금과 같은 시기에 말하여도 소용이 없다. 실제로 현재 토요토미 씨()라는 성()이 창립되었다. 칙명에 따라 성씨가 창립된 것은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가 시작된 이래 천 년간 없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전부 신례(新例)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을 미래의 옛 것으로 만든다. 전례 같은 것보다 그것을 잘 생각하시길 하고 하루스에는 말했다.

 

 어떠하신지? 저는 그리 생각하오만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반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안 하시는 것인지?”

 

 이 남자에게는 못 당하겠군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생각했다. 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히데요시가 쿄우토(京都)를 제압한 이래, 그를 위해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관위승진은 모두 이 하루스에가 알선해 왔다는 것을 하루토요도 알고 있었다. 막대기와 같이 가는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굉장한 책사(策士)였다.

 

 그 시기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히데요시는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를 필요로 했다. 히데요시에게는 약점이 있어 그 약점이란 당연하게도 출신의 비천함이었다. 히데요시는 처음에 막부(幕府)를 열고자 하였다. 바쿠후를 열기 위해서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代軍]이 아니면 안 되었다. 하지만 겐지[源氏]가 아니면 세이이타이쇼우군에 임명 받지 못하였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朝]는 겐지의 종손이며,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도 그러했다. 이것이 궁정의 고사(故事)이며, 고사는 궁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법률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겐지가 아니었다.[각주:4]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겐지의 성()을 얻고자 하여, 아키[安芸]유우(流寓)하고 있던 전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게 청하여 그 양자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겐지의 종손인 요시아키는 혈통이 비천한 피로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아 받아들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당혹했다. 그 히데요시를 구하여 준 것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였다.

 - 쇼우군[軍]이 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칸파쿠[白]가 되시길.

 하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칸파쿠는 신하 중 최고의 직책이며, 그 자격으로 천하의 권세를 쥐면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어 바쿠후를 열 필요가 없었다. 칸파쿠로 충분하다, 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단지 칸파쿠는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것이 천 년의 고사(故事)이며, 다른 성() – 미나모토[源]도 타이라[平]도 타치바나[橘]도 칸파쿠가 되지 못하였고, 된 예도 없었다.

 더구나 씨()도 성()도 가지지 못한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는 옛 주인 노부나가[信長]를 흉내 내어 지금까지 헤이시[氏]라고 사칭한 적은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그것에 임명 받을 자격이 없었다.

 - 아니오이다. 간단한 일이외다. 코노에 가문[近衛家]의 양자가 되시길. 그걸로 이제 자네는 후지와라 씨[藤原氏]일세.

 하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하루스에는 후지와라 씨의 장손인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승낙을 처음부터 얻고 있었다. 그것을 말하자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여 바로 그날로 코노에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그날 중으로 하루스에를 통하여,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 秀吉]

 라는 이름으로 칸파쿠에 임명 받을 수 있도록 주청하였다. 현 텐노우[天皇]인 오오기마치[正親町]는 역시 난색을 표했다.

 히데요시가 후지와라 씨가 아님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속이 뻔히 보이는 속임수는 바람직하지 않다 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가진 현재의 실력이 조정의 뜻을 눌러 결국 주청대로 칸파쿠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 후에 후지와라 씨의 적()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성()인 토요토미 씨를 공칭했다. 상기는 작년 1585 9 13일이다. 히데요시가 귀족이 되는 단계도, 궁정이었기에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상급귀족[公卿]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내막을 물론 들어 알고 있었다. 모두 남일이라 생각하여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과 관련이 되었다. 이로운 일은 무엇이고 해로운 일은 무엇일까?

 로쿠노미야를 양자로 하고 싶다는 일건. 필시 히데요시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가 불어넣은 생각일 것이다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하루스에를 노려보았다. 이 하루스에는 히데요시를 칸파쿠로 만든 공으로 작년 종일위(從一位) 우다이진[右大臣]까지 승진해있었다.

 

 자네도 출세에 신경을 쓰시게

 

 라는 의미의 말을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로쿠노미야가 토요토미 가문에 들어가 장래 천하의 지배자가 된다면 조정에서 당신의 출세는 뜻대로이며, 카쥬우지 가문의 명예를 크게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책모가는 말하는 것이었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일단 방을 벗어나, 미야[宮]의 모친인 하루코[晴子]와도 상담했다. 하루코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카쥬우지 가문에게 있어 바라 마지않던 일이 아니옵니까?”

 

 하고 즉좌에서 말했다. 하루토요는 그로 인해 결심을 굳히고, 의관을 정갈히 한 후 다시 객관(書院)에 입실했다.

  

 이미

 

 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주상께서 그런 의향이 있다고 하시는 이상, 메노토[傅人]로서 올릴 말씀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야[]에게 있어서도 행복한 일로 축하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고 하루토요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칸파쿠 전하는 로쿠노미야를 아시고는 계십니까?

 

 이런~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 없소

 

 하고 하루스에는 손을 흔들었다.

 

 이미 오늘 대면이 있었소이다

 

 하고 약간 득의만만하게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이도 이 책사가 차려놓은 밥상 같았다. 오늘 히데요시는 코고쇼(小御所)황금다실을 가져왔었다. 그때 텐노우[天皇]가 코고쇼로 발길을 옮겼는데 수행한 사람 중에 하나로, 아이의 헤어스타일(童形)인 채로 로쿠노미야가 함께 했었다.

 

 칸파쿠 전하는 미야를 보시고 후에 굉장히 기쁘신 것 같았소

 

 이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일이군요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끄덕였다. 히데요시의 만족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로쿠노미야의 수려한 용모는 궁정에서도 비할 데 없었다. 거기에 자질에 보통이 아니어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 등은 주제넘은 말입니다만 신동(神童)이십니다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미야는 한학(漢學)보다 일본학(和學)을 좋아하여, 이미 열살 때 옛 시집(古今集) 전부를 읽었으며, 또한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를 해석하고 비평할 정도의 영역에 달해있었다. 하루토요가 생각하기에, 히데요시가 어디서 무엇을 해서 찾더라도 이 정도로 존귀하고 이 정도로 풍부한 자질을 가진 양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1. 하치죠우노미야가 황자 중 여섯(六)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일본역사 속에서 번영했던 네 개의 씨(氏). 각각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3. 다음 대의 텐노우[天皇]인 고요우제이(後陽成]. [본문으로]
  4. 겐지[源氏]만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헤이시[平氏]를 칭하던 노부나가의 경우 조정에서 칸파쿠[関白],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중 아무 거나 하나 되라는 말을 들었다.(三職推任問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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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9.05 06: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인물의 인생은 또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5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일찍일찍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울러 너무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07 1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유우사이가 빈말할 사람은 아니니... (뭐 직전신장전에서는 시류에 영합하는 인물 비슷하게 그려놨습니다마는-_-;) 상당히 실력이 있는 사람이겠군요.

    마침 후지와라씨가 나와서 생각난 말인데, 고셋케 밑의 세이가케(淸華家)의 하나인 사이온지가의 긴모치씨의 증손에 대해 어제 가쿠슈인 담당자와 얘기하다가 알게 됐다죠. 자신이 가쿠슈인 다닐때 1년 선배였다면서 이래저래 알게 된걸 얘기하던데 왠지 역사의 흔적과 간접적이나마 맞닿는 느낌이었던지라 느낌이 참..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12 0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우사이는 당시 그 계통의 짱이라고들 하니... 여담이지만 만능의 무장 우지사토도 유우사이에게 핀잔을 먹고 오히려 나중에 그 핀잔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유우사이를 한 층 더 존경하여 풍류의 세계를 배웠다고 하더군요.

    과연... 근데 학습원에 유학가시는 것입니까!? 나중에 잘 되시면 저 알죠? 데헤~ ^^

    제가 만난 역사적 인물 자손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은... 다테 마사무네의 후손...이 가장 높군요. 18대 당주를 자칭하였는데...이게 또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정식으로 인정을 못 받는 것이라 뭐라고 말할 수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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