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켄신의 그림이 야마가타(山県)() 요네자와()()우에스기 신사(上杉神社)에 있는데, 거기에 그려진 켄신은 오히려 온화한 인상이다[각주:1]. 그 귀신과 같이 가열찬 무장의 모습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증언이 전해 내려온다. 켄신과 실제로 만났던 승려가,

 [날카로운 눈빛과 억센 표정을 하여 보는 이를 두렵게 하였다], 카와다 부젠(河田 豊前)이라는 사무라이와 닮았다 - 고 그 용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한 에치고(越後)에서 켄신과 대면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의 사자 사사키 사다츠네(木 定)는 독경(讀經)을 끝내고 나온 켄신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타치(太刀)를 꽉 쥐고 서 있는 그 모습은 오오미네(大峰)의 고키(五鬼)[각주:2], 카츠라기타카마(葛城高天)의 대천구(大天狗)[각주:3]의 화신인가 싶어, 온 몸의 털이 전부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켄신은 풍모뿐만 아니라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진언밀교(眞言密敎)의 엄격한 계율을 지키고 여성은 절대 가까이 하는 일 없이 일생 불범(不犯)”이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켄신은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관음대사(觀音大士[각주:4])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생모 토라고젠(虎御前)의 영향이기도 하였으며, 어렸을 때 부친의 거성(居城)카스가야마(春日山)성(城) 밑에 있는 린센(林泉)()에 맡겨져 명승(名僧) 텐시츠코우이쿠(天室光育)를 스승으로 삼아 엄격한 계율의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중이 되어 소우신(宗心)이라는 호()를 칭하며[각주:5], 카스가야마 성() 내에 비사문(毘沙門), 스와(諏訪), 고마(護摩) 등 세 채의 당()을 지었다.

 

 가혹하고 격렬한 전쟁터에서도 대일여래(大日如來)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목상 등을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전쟁터에 악업, 번뇌퇴산(煩惱退散)의 상징인 [()]의 군기를 휘날렸다. 어디까지나 우에스기의 군세는 [항마(降魔)의 군]이라고 켄신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정신주의(精神主義)의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정의와 질서가 그의 행동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배신, 배반 등이 일상다반사인 센고쿠의 시대에서는 희소가치가 있는 무장이었다. 그런 면에서 인간다운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는 대조적이다.

 1564. 켄신이 에치고(越後) 이치노미야[각주:6](宮) 히코 (弥彦神社)에 봉납한 [타케다 하루노부의 악행에 대해서(武田晴信)]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원문이 확실히 그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거기서는 자신의 싸움은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후, [친아비인 타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를 추방해서는 길에서 걸식(乞食)하게 만들어 효()를 버렸다. 이것은 신불(神佛)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써서 신겐의 악행을 비판하였다.

 

 황실에 대한 존경과 숭배도 두터웠다.

 당시 텐노우(天皇) 가문은 빈곤의 극에 달하여 즉위식 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1553년 당시의 고나라(後奈良) 텐노우(天皇)를 알현했을 때,

 가문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행복. 성은이 하해와 같다

 고까지 말하며 감격하였다.

 

 여성을 싫어하는 도덕가라고 하면 히틀러와 같은 비인간성을 상상해버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지금도 태어난 지방인 에치고는 물론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적측인 카이(甲斐)에서까지 인기가 높다. 그 중에서도 숙적 타케다 신겐에게 소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568년 신겐이 스루가(駿河)에 침입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이때 스루가의 이마가와 지자네(今川氏)와 사가미(相模)호우죠우 우지야스( 氏康)가 동맹하여 카이(甲斐)로 들어가는 소금을 국경에서 막아버린 것이다. 켄신에게도 에치고의 소금을 들여보내지 말라는 요청이 왔다.

 하지만 켄신은 신겐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겐)과 싸울 때는 활과 화살이지, 쌀과 소금으로 싸우겠는가?]

 라고 말하며 시나노로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보증할 수 없지만, 토우쿄우(東京) 국립박물관에는 신겐이 소금을 보내준 답례로써 보냈다고 하는 타치(太刀)가 전시[각주:7]되어 있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사서는 전해주고 있다.

 1573. 켄신 생애의 라이벌인 타케다 신겐이 죽었을 때의 일이다. 켄신은 본거지인 카스가야마 성()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뜨스운 물에 밥 말아먹고 있던 중이었지만, 갑자기 젓가락을 놓더니 입 안에 있던 것을 뱉어내고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명장이 죽었구나. 영웅인걸이라는 것은 신겐이야말로 어울리는 것. 칸토우() 무사의 기둥이 쓰러졌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가중(家中)에 명하여 3일간 상()을 치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혹은 이때 켄신은 - 이것은 신겐을 존경하는 의미가 아닌, 어디까지나 [무사의 신에 대한 예의로써 하는 것이다]라 말했다는 기록한 책도 있다.

 

 신겐의 죽음은 우에스기에게 있어서 타케다 공략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일거에 시나노로 쳐들어 가 타케다의 군세를 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노신(老臣)들은 그렇게 켄신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켄신은,

 젊은 카츠요리()가 이제 막 대를 이었는데 그걸 노리다니,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고 말하며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켄신은 여인을 가까이하지는 않았지만 술은 사랑한 무장이었다. 지금도 우에스기 신사에 애용했던 큰 술잔이 있다. 술안주로는 매실장아찌(우메보시=梅干)를 좋아했다고 한다.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화근이 되어 뇌일혈(腦溢血)로 죽었다.

 

 켄신의 생애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숙적 신겐과의 일기토였다.

 1561 9 9일 한밤 중. 우에스기 군은 은밀히 대군을 움직여 치쿠마가와(千曲川) 강을 건너고 있었다. 사이죠산(妻女山)에 진을 치고 있던 켄신을 기습하고자 한 신겐의 작전을 간파한 켄신은, 타케다 군의 허를 찔러 산을 내려온 것이었다. 산정에는 여전히 지금도 야영하고 있다는 듯이 화톳불을 활활 태워두었다.

 

 우에스기 군이 도하작전을 끝내고 카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전투 태세에 들어간 것은 다음 10일 새벽이었다. 짙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서서히 안개가 겉혔다.

 카와나카지마의 중앙 하치만바라(八幡原) 들판에 진을 치고 있던 타케다의 본진에서는, 사이죠산 기습의 소식이 언제 도착하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안개 건너편에서 갑자기 우에스기의 대군이 나타난 것이다.

 켄신은 특기인 [쿠루마가카리(車懸) 전법]으로 노도와 같이 타케다 진영을 덮쳤다. 타케다의 군세는 필사적으로 방어하였지만 차츰 밀리게 되어 신겐의 본진도 위험해 졌다.

 마침내 우에스기 군은 신겐이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켄신은 돌격하였다. 십 수기와 함께 신겐의 본진을 목표로 질주한 것이다. 감색의 갑옷에, 금색의 투구를 색의 명주로 감싼 모습이었다. 신겐은 칼을 뽑을 틈도 없었다. 걸상에 앉아 있는 신겐에게 마상에 있던 켄신이 칼을 내리쳤다. 그것을 신겐은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다. 켄신의 칼은 계속 신겐을 노렸다. 그때 마침 신겐의 근시(近侍)인 하라 오오스미노카미(原 大隅守)가 달려들어 켄신을 향해서 창을 찔렀지만 빗나가 말의 엉덩이를 맞추었다. 놀란 말을 켄신을 태운 채로 질주하여 신겐은 위험에서 목숨을 건졌다.

 이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타케다 측의 사상자 17000, 우에스기 측은 9000이라는 격전이었다고 한다.

 

 신겐 사후에 켄신의 전투로 유명한 것은 나나오(七尾)성(城) 공략일 것이다. 나나오 성()은 해발 300미터 높이의 험준한 곳에 있는 성이었다. 이를 켄신은 실로 40여 일을 소비하여 겨우 함락시킨 것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켄신은 카가(加賀) 테토리가와(手取川) 천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5만 대군을 물리쳤다.

 [우에스기와 만나서는 오다도 명성에 먹칠하는 강, 달려드는 켄신에 날라 튀는 노부나가]

 (上杉に逢うては織田も名取川( 手取川 역자 ), はねる謙信逃るとぶ長( 信長 역자 ))

 라고 후세에 쿄우카(狂歌)가 만들어질 정도로, 오다의 군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에스기 켄신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켄신의 죽음은 불시에 찾아왔다.

 1578 3 9.

 칸토우 출진 준비가 모두 끝나있었다. 노토(能登), 엣츄우(越中), 카가(加賀)를 평정한 지금, 남은 화근은 칸토우 뿐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켄신은 갑자기 기절하여, 인사불성인 채로 4일간을 보낸 후 생애를 마쳤다. 49세였다.

 

 사세구()로는,

한 때의 영화는 한 잔의 술, 49년은 한 번 취한 것.

삶 모르고 죽음 또한 모른다. 달을 희롱하는 이 또한 꿈과 같도다

一期ノハ一盃ノ酒、四十九年ハ一ノ間、

生知ラズ死又知ラズ、月是又夢中ノ如シ

 라는 한시(漢詩)가 남아 있다.[각주:8]

 

[우에스기 겐신(上杉 謙信)]

1530 1 12. 에치고(越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의 아들로 태어났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후에 마사토라(政虎)[각주:9], 테루토라(輝虎)[각주:10]로 바꾸었다. 형 하루카게(晴景)나 일족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각주:11])와 싸웠지만,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의 중재로 슈고다이를 이어받고 에치고 카스가야마 성주가 되었다. 1552년 망명해 온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서 우에스기(上杉)’라는 성()과 칸토우칸레이(管領)의 역직(役職)을 물려받았다. 타케다 신겐과의 카와나카지마 결전은 다섯 번에 이르렀다. 엣츄우(越中)를 평정하고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진공해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대결하여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578년 병으로 쓰러졌다.

  1. 글 머리에 있는 그림. [본문으로]
  2. 오오미네(大峰)산(山)은 도를 닦는 슈겐도우(修験道)의 도를 닦는 곳으로 유명한 곳으로, 그런 사람들을 수호하는 신으로 고키(五鬼)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다른 이름으로는 ‘카츠라기타카마보우(葛城高天坊)’라고도 한다. 일본 귀신인 천구(텐구=天狗) 중에서도 더욱 강력한 천구 한다. [본문으로]
  4. 대사(大士)는 보살(菩薩)의 존칭. 즉 관음보살(觀音普薩)을 말한다. [본문으로]
  5. 소우신이란 호를 칭하기 시작한 것은 1553년 켄신 나이 23살 때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텟슈우소우쿠(徹岫宗九)에게 사사받은 후에 쓴 법호이다. [본문으로]
  6. 그 지역(国)에서 가장 격이 높은 신사를 말함. [본문으로]
  7. ‘塩どめの太刀(소금막기의 칼)’이라는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죽기 한달 전에 만든 시라고 한다. [본문으로]
  9. 1560년에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의 직책과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의 가독을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 물려받을 때 노리마사에게 '마사(政)'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0. 1561년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테루(輝)'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1. 켄신의 후계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아비이며 켄신에게는 누나(仙桃院)의 남편 즉 매형이 된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0 0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향년 49세라면 노부나가와 같군요. 그러고보니 일부 게임에서 여성화 된 우에스기 캐릭터는 피규어까지 나왔다죠... --a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0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장실 - 기절이라면 역시 뇌졸중 이겠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0 1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맹꽁서당님//란스에 나오는 켄신 양은 귀엽더군요~

    고사천사님//뇌내출혈(뇌일혈)과 뇌졸증은 다른 것인가요? 어느 쪽이건 전 의학 쪽은 '닥터 K'이후로는 관심을 끊은 상태라...^^;
    사족으로... 어떤 사람은 알콜 중독에 이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카게카츠의 암살설, 노부나가의 암살설 등등... 이 양반도 좀 죽음에 여러 설이 있더군요.
    어느 것이나 공통점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 후 4일간 한번도 깨어나지 않은 뒤 죽었다.. 정도인것 같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21 1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로 뇌출혈이 일어난 환자를 한번 옮겨봤는데 증세가 정말 순식간에 나빠지더군요, 변기에 머리를 대고 쓰러져 있었는데, 처음에 부를땐 반응을 하던데 구급차에서 의식 잃고, 단카에서 베드로 옮긴 뒤 보호자 기다리는 동안 의사가 부르더니 '지금 돌아가시기 직전인데 보호자 아직 안오는가요?' ..래더군요;

    그래도 4일 간게 켄신의 정신력 덕분 아니었을까..도 싶습니다마는..(아.. 이건 켄신빠로서의 생각이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yat2004 BlogIcon 개구쟁이 2008.06.21 15: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곡된 국사, 세계사를 바로 알리는 카페


    우리 인류는 오래전부터 역사를 기록하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수십, 아니 수백 수천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역사 자료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중에는 사실과 거짓이 들어있다.


    역사에는 기본원칙이 4가지정도 있다.

    1.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며,
    2. 역사는 역사가의 양심에 달렸으며,
    3. 역사는 주관적인 생각이자 입장, 느낌이고,
    4. 역사는 정확한 역사 기록이 아닌, 소문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역사가 또한 3종류로 분류된다.

    1. 거짓말하는 사람
    2. 잘못 알고 있는 사람
    3. 알지 못하는 사람


    우리 역사에는 수 없이 많은 날조, 과장, 왜곡이 되어있다.
    국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세계사 지식조차 거짓으로 꽉 차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국사 왜곡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정보화 시대이므로 세상을 넓게 바라보아야 한다. 포털 사이트 중에는 왜곡된 국사를 밝히는 카페는 수 없이 많다. 물론 그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만,
    우리 카페는 국사, 세계사 둘다 동시에 왜곡, 날조된 역사를 재평가 재조사하는 곳이다.

    노예해방자라고 알려져 있는 링컨, 비폭력 평화주의라고 알려진 간디,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 바스티유 감옥, 히틀러, 루즈벨트, 카이사르의 명언, 우리가 자주 보는 세계지도... 등등 수 없이 많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해 숨겨진 진실을 말하며, 알리려 한다.

    http://cafe.naver.com/nazzis - 승전국이기 때문에 파묻히고 날조, 왜곡 과장된 역사를 전 세계에 바로 알리는 카페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1 1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생과 사의 순간을 많이 접하셨겠군요. 안타까운 장면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근데 그런(켄신빠) 말씀하시면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섭해할 것 같습니다만..^^; )

    개구쟁이님//방문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하시는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22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이 자기 죽을 때는 아는 모양입니다 미리 사세구를 지어놓은 것을 보면말이죠
    아님 평소에 지어놓는게 그 시절엔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언제 죽을지모르는... 생과 사가 항상 함께한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3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세구로 지은 것이 아니라...
    그냥 만든 시인듯 합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사세구라고 그냥 붙인 듯 하고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16 18: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16: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야마모토 칸스케는 이노우에 야스시[井上 靖]의 명작 '풍림화산(風林火山)[각주:1]'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실존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이 인물을 가공의 무장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가(史家)도 적지 않았다.

 그가 일반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갑양군감(甲陽軍鑑)'이 처음이었으며, 이 갑양군감 외에 사료성이 높은 고문서류에는 칸스케의 이름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갑양군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카츠요리[頼] 2대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나 코우슈우[甲州]군의 군법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에도 시대 초기의 병법학자 오바타 카게노리[小幡 景憲]가 썼다고 한다. 굉장히 창작성이 짙은 책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근년[각주:2]이 되어 갑자기 칸스케의 실존성이 강해졌다. 그것을 증명한다고 보여지는 고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홋카이도우[北海道] 쿠시로 시[釧路市]의 이치카와 가문[市川家]에서 타케다 신겐의 서장(書狀)이 발견된 것이다. 이치카와 가문의 선조는 나가노 현[長野県] 시모타카이 군[下高井郡]에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부터 토착했던 호족으로, 키소 요시나카[ 義仲][각주:3]부터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이르기까지 고문서 150여 점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타케다 신겐의 서장은 신겐이 시나노[信濃] 노자와[沢]의 이치카와 후지와카[市川 藤若]라는 호족에게 보낸 것으로, 이 문서의 말미에 '야마모토 칸스케(菅助)의 입으로 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칸스케[菅助]가 정확하게 칸스케[勘介]라면[각주:4], 칸스케는 이 때 근습(近習)의 한 사람으로써 신겐의 명령으로 중요한 사자(使者)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덕분에 '갑양군감(甲陽軍鑑)'의 사료적 가치도 최근 역사 사료로써 재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갑양군감'에 따르면 - 칸스케의 출신은 미카와[三河]우시쿠보[牛窪], 축성술과 군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았으며 또한 무예도 뛰어났다고 한다.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섬기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칸스케는 추남에 외눈으로 거기다 손가락도 열 개가 안 되며 절름발이였기에,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는 그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대로 타케다 신겐의 흥미를 끌었다. 신겐은 피부도 검고 그렇게 추남이면서도 명성이 높은 것은 정말로 능력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라면서 타케다 가문에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신겐다운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신겐의 부하 장수인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形]가 천거하였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칸스케는 200관의 봉록이 주어졌다. 신겐 23세로 칸스케는 이미 중년을 넘긴 나이였다고 한다.

 

 그 생애의 정점에 달한 전투는 1561년 가을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い]였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타케다의 본진으로 돌격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는 것으로 유명한 격전이었다.

 이 전투는 13천의 병사를 이끌고 시나노[信濃]로 쳐들어 온 켄신이 타케다의 전선기지 카이즈 성[海津城]과 지근거리인 사이죠산 산[妻女山]에 진을 치면서 시작되었다.

 곧바로 타케다 군도 카이에서 원군을 이끌고 카이즈 성에 입성하였다.

 쌍방은 대치한 채 시간이 흘러, 9 9일에 이르자 신겐은 회의를 열어 타개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숙련된 장수인 오부 효우부 토라마사[飯富 兵部 虎昌]가 정면승부를 하여 자웅을 겨루자고 주장하자, 바바 민부 노부후사[馬場 民部 信房]도 쌍수를 들어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상대는 지금이야 말로 자웅을 겨루자고 침공해 온 군신(軍神) 우에스기 켄신이었다. 그래서 야마모토 칸스케의 계략의 채택되었던 것이다.

 칸스케의 작전은,

 타케다 군 2만의 군세를 둘로 나누어, 12천의 별동대로 내일 새벽 6시를 기하여 사이죠산를 기습한다. 그러면 우에스기 군은 놀라 치쿠마가와 강[千曲川] 건너편 평원인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퇴각할 것이다. 거기에 미리 카와나카지마에 숨겨놓은 8천의 본대가 급습하여 앞뒤에서 협격하면 적은 혼란에 빠져 우리 군은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는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딱따구리 전법[啄木鳥]'이라고 한다. 딱따구리는 나무의 벌레를 잡기 위해서 구멍 반대쪽을 쪼아 벌레를 놀라게 하여 구멍으로 나왔을 때 잡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칸스케의 지략도 군신 켄신의 혜안에는 미치지 못했다.

 

 9일 저녁.

 눈 아래 보이는 카이즈 성에서 피어 오르는 무수한 밥짓는 연기를 보고 카이[甲斐] 군의 작전을 간파한 것이다.

 켄신은 전군을 이끌고 밤중에 은밀히 사이죠산을 내려와 다음날 10일 새벽, 카와나카지마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카이 군 본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우에스기 군세는 질풍과 같이 타케다 본영을 맹공격하여 한때는 신겐도 위기에 처했지만, 오후가 되어 나타난 산에 올라갔던 타케다의 별동대 출현으로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 때, 이미 칸스케는 작전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여 적진으로 돌격하여 전사한 상태였다.

 그 목은 수하의 병사가 난전 속에서 다시 탈취하였지만 몸통은 치쿠마가와 강을 떠내려가 하류의 강변에 쌓여있었다. 그 적과 아군의 구별이 가지 않는 수 많은 시체더미에서 부하들은 결국 찾아내어 묻었다고 한다.

 현재 카와나카지마 테라오[寺尾]라는 곳에 도우아이하시[胴合橋]라는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이곳이 그 장소라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에 쓰여진 어떤 책에는 - 명군사인 그도 미관말직의 일개 검객으로 등장하며, 타케다 가문의 부장()인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부하였다고 한다.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단순한 척후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어쩌다 마사카게에게 보고하고 있는 모습이 신겐의 눈에 띄어, “저 자는 뭐 하는 녀석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뿐이라고 한다.

 

 어쨌든 아직 평가가 분명하지 않은 수수께끼의 무장이다.

 

[야마모토 칸스케(山本 勘介)]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이름을 하루유키[晴幸]라고 하며, 출가 후 뉴우도우 도우키[入道 道鬼]’. 신겐은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등에게 명하여 칸스케에게 군법을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1561년 카와나카지마에서 전사했을 때는 69세였다고 한다.

  1. 2007년도 NHK 대하드라마의 원작. [본문으로]
  2. 이 '전국무장 100화[戦国武将100話]'는 1978년도에 출판.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노토 요리토모[源 義朝]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시나노[信濃] 키소[木曽]에 있다가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이후 요리토모의 토벌군에 패해 전사. [본문으로]
  4.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동일.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24 1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노우에씨의 원작소설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요.
    엔에이치케이에서 드라마로 방영할 때 몇 편 보기는 했는데, 기대했던 것 만큼 재미가 없어서 좀 실망했습니다만. ㅎㅎ
    저도 칸스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는데, 정말 수수께끼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오케하자마전투에 대한 정리가 끝나면 칸스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싶은데,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지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4 1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에피소드로.... 야마모토 칸스케 역을 하신 분에게 캐스팅 이야기가 오자...
    "제가 그 역을 맡기에는 너무 잘 생기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역시 갹트님께서...^^;
    저는 아직 그 드라마도 못 보고, 원작소설도 읽지를 못했습니다.
    원작소설은 shotokanfist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꼭 읽어보고 싶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24 1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고판으로도 나와서 값이 아주 쌉니다. (단, 요새 엔고 현상으로 좀 올랐을 듯...)
    저는 교보에 주문해서 봤습니다. (국내재고 가격이 일본주문가격보다 비싸길래, 일본것을 주문했는데, 저렴한 일본 가격으로 국내 재고품을 보내줘서 좋더군요.)
    아마, 지금도 교보에 재고가 있을 듯 하네요.

    건 그렇고, 지난번 홍백가합전에서 각트가 신겐 분장하고 나와서 부른 노래 좋았지요. 역시 각트랄까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0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홍백가합전은 사진으로만 보아서...^^
    화장한 미중년(실제로 몇 살인지 아무도 모른다지만요 ^^)은 굉장히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5.27 1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스케 역을 맡았던 배우 이름이 우치노 마사아키였던가요. 아무튼 간스케 역을 맡기에는 잘생긴게 분명합니다 ㅎㅎ

    그리고 작년 홍백가합전에서 갹트가 드라마 그대로 우에스기 켄신 분장하고 노래불렀죠. 노래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하나의 이벤트로는 괜찮았습니다. 갹트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아시가루들도 많이 있더군요. 방송국 무대 위의 다이묘와 아시가루? ㅋㅋ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7 2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생기긴 했죠 ^^

    홍백가합전은 재미있었나 보군요. 당시 술 마시느라 밖에 있어서 보질 못했습죠. 멋있었을 것 같은데 함 찾아봐야 겠군요.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판 >

 천하를 제패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조차 타케다 신겐의 군사적 능력에는 위협을 느껴, 양녀(養女)[각주:1] 를 신겐의 아들 카츠요리[頼]에게 시집 보내는 등 신겐의 마음을 잡고자 하였다. 신겐이 이끄는 코우슈우[甲州][각주:2] 군단의 무위(武威)는 당시 천하를 진동시켰다.

 

 1920년대 즈음 군사평론가로써 저명했던 사쿠라이 타다요시[櫻井 忠温][각주:3]는 신겐을 나폴레옹에 필적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겐은 태어났을 때 머리가 크고 눈이 코를 감출 정도로 컸었다고 한다. 그 울음은 귀를 쥐어뜯을 정도라 짜증을 잘 내는 부친 노부토라[信虎]가 귀를 막았다고 한다. 평범한 아기가 아니었다.

 

 내향적인 성격의 소년이었지만 기질은 강했다.

 9살 때. 절의 높은 어른에게 반항하여 연못으로 던져졌지만 울먹이는 일 없이 물 속에 뻣뻣이 서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신겐은 또한 애벌레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중신인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가 이것을 고치고자 일부러 애벌레를 보여주고서는 겁먹는 신겐을 비웃었다. 그러자 신겐은 눈빛이 변하여 갑자기 그 애벌레를 손으로 쥐어 찌부러트렸다. 그 때문에 손가락 색이 곧바로 변색되어 버렸다고 한다.

 

 첫 출진은 1536 11월 운노구치[海ノ口] 전투였다. 신겐 16살 때였다. 부친 노부토라는 8천의 병사를 이끌고 사쿠[佐久]운노구치 성(城)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성주는 무명(武名)으로 이름 높던 히라가 겐신뉴도우[平賀 玄信入道]였다. 3~4일간 계속 공격하였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12월이 다 지나갈 즈음 되었고 거기에 눈도 내렸다. 이 이상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회의를 거쳐 철퇴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때 16살의 신겐이 부친 노부토라에게 철퇴의 후미(後尾)를 맡고 싶다고 나섰다. 거절하는 부친을 몇 번이고 졸라 결국 이 큰 임무를 맡게 되었다

 신겐은 부친의 군세가 카이[甲斐]를 향해서 철수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수하 300을 이끌고 운노구치 성()에 야습을 감행했다.

 성안에는 병사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 무사들은 카이[甲斐] 군세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모두 자기네 지역으로 돌아갔다. 성에 있었던 것은 성주 히라가 겐신 이하 7~80. 그것도 승리의 축하주로 취해 있었다. 성은 싱겁게 점령되었다.

 

 부친 노부토라와 신겐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노부토라는 자신과 많이 닮아 성미가 괄괄한 신겐보다 온순한 둘째 노부시게[信繁]를 편애했던 듯 하다. 신년 축하연에서도 신겐을 건너뛰고는 노부시게에게만 술잔을 내렸다고 한다. 거기에 노부토라는 용맹하기는 했지만 성격이 잔인하여 부하도 영민도 그에게 심복하고 있지 않았다.

 

 신겐은 어떤 계획을 세워 그 실행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1541 6 16일이었다. 부친 노부토라는 사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방문려고 스루가[駿河]로 향했다.

 신겐은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루가로 통하는 길을 카이 국경에서 차단해 버리고, 부친과 함께 떠난 가신들의 가족도 인질로 잡아놓았다. 이 때문에 함께 갔던 가신들은 노부토라를 혼자 스루가에 남겨놓고 카이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카이에서 추방된 노부토라는 이후 이마가와 씨()의 식객이 되어 25년을 보내게 되는데, 82세의 고령으로 죽을 때까지 고향 카이의 땅을 밟지 못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자간 갈등극은 또 한번 되풀이 된다.

 신겐의 후계자인 장남 요시노부[義信]가 부친 신겐에게 모반을 꾀한 것이다. 요시노부의 부인은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의 여동생이다. 요시노부는 이마가와 가문을 멸하려는 부친에 반발하여 암살을 획책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자살하게 된다.

 

 신겐의 정실[각주:4]은 나중에 사다이진[左大臣]이 되는 산죠우 킨요리[]의 딸로, 셋케[家]의 다음가는 명문(和家역자 주) 출신이었다. 부인의 언니는 당시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실력자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에게 시집갔으며, 여동생은 혼간지 켄뇨[本願寺 如]의 부인이 되었다. 켄뇨는 후에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에 웅거하며 잇코우잇키[一向一揆]의 총대장이 되어 오다 노부나가를 괴롭힌 인물이다.

 

 신겐에게는 몇 명의 측실이 있었는데, 비극의 히로인으로 유명한 것이 유우히메[由布姫]이다. 시나노[信濃]의 명문 스와 씨[諏訪氏]의 딸로, 부친 요리시게[重]는 신겐에게 속아 배를 가르고 죽었다. 히메는 24살에 죽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이 타케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카츠요리[頼]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정인 스와 씨()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슬퍼하여 아들의 이름에 스와 씨() 대대로 붙는 요리[]’라는 글자를 붙여 카츠요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각주:5]

 

 신겐은 군사적으로만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다. 뛰어난 민정가로써도 업적을 남기고 있다.

 저명한 것으로 '코우슈우 법도 55개조[甲州法度五十五箇]'가 있다. 당시로써는 드물게 구체적으로 현대의 법학자도 '신겐이 정한 것이 형법상의 가장 적합하다'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법도의 4조와 5조에 다른 지역() 사람과 결혼, 주종계약 혹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는 항목이 보인다. 또한 3조에는 상기의 금지 항목도 자기 지역 내에 있는 자가 모략의 필요상 행하는 것이라면 용인한다고 쓰여있다. 센고쿠[戦国]이기에 있을 수 있는 세세한 배려다.

 

 일본에서 최초로 금화(金貨)를 발행한 것도 신겐이었다. 영내(領內)에 금광을 개발하여 '코우킨[甲金]'이라 명명해서 유통시켰다. 품질이 굉장히 좋았다. 이에야스가 코우후[甲府]에 입성했을 때 징발한 액수는 30만 냥이었다고 한다. 신겐이 숨겨놓은 금은 상당한 액수라고 하여 여전히 매장금 전설이 남아있다.

 

 현재 야마나시 현[山梨県] 류우오우 정[町][각주:6]에 가면 신겐이 쌓게 만든 '신겐둑[信玄堤]'이라 부르는 카마나시 천[釜無川]의 제방이 남아닜다. 이 지역은 언제나 홍수로 넘쳤기에 심혈을 기울여 치수에 힘써 U자형(雁行) 제방을 쌓은 것이다.

 

 정강(精强)을 자랑하는 코우슈우 군단의 전법은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는 대조적이었다. 켄신은 기발한 전법을 사용했지만 신겐은 어디까지나 정공법이었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들판을 가로지르 듯 조직적인이고 위압적인 행동을 취했다.

 예를 들면 코우슈우류[甲州流]의 창술은 그때까지의 11이 아닌 2~30명이 전열을 짜고 돌진하는 것이었다. 1번대, 2번대, 3번대를 큰 북의 소리로 조종하였고, 붉은 갑옷과 검은 갑옷으로 구별하여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우에스기 켄신과의 최대의 격전이라 일컬어지는 1561 9 10일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い]에서는 적장 우에스기 켄신이 본진으로 질주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 신겐은 순간적으로 일어나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그 부채에는 8곳의 칼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신겐 최후의 대작전은 1572년부터 시작되었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를 호령코자 하였던 것이다. 신겐 52세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 밖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 들판에서 토쿠가와 군과의 싸움이 최대의 격전이었다.

 

 이에 앞서 타케다 군은 토쿠가와의 성들을 계속해서 함락시킨 후 미카타가하라에 포진한 후 개전한 것은 12 22일 오후 4시였다. 눈보라 치는 찬 바람 속에서 양군은 격돌하였다. 토쿠가와의 기세도 강하여 오야마다[小山田] 부대, 야마가타[山県] 부대가 무너졌다. 하지만 그 때 나이토우 마사토요[ 昌豊] 부대가 토쿠가와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곧바로 토쿠가와 군세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무너져 내려 패주하였다.

 

 전투는 신겐의 압승이었지만 이때 이미 신겐의 운명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신겐의 천하 제패라는 웅대한 꿈은 결국 폐결핵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병상이 악화되어 귀국하던 도중 53세의 생애를 마쳤다. 유언에 따라 죽음은 비밀로 되어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3년 뒤였다.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1521년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의 적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하루노부[晴信]. 법호를 호우쇼우인 신겐[法性院 信玄]이라고 하였다. 타케다 씨[武田氏]는 카이[甲斐]슈고[守護]이며 코우후[甲府]에 저택을 두고 있었다. 1541년 부친 노부토라를 스루가[駿河]로 추방하고 자립해서는 시나노[信濃]로 진격하여 스와[諏訪], 무라카미[村上], 오가사와라[小笠原] 등 여러 호족들을 쓰러뜨리고 시나노[信濃] 일원을 손에 넣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의 카와나카지마의 격전[川中島の戦い]은 유명하다. 1568년에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親]를 물리쳤다. 코우즈케[上野],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일부를 합친 5개국을 지배했다. 1573 4 12일 시나노[信濃] 코만바[駒場]에서 죽었다.

  1.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카이[甲斐]의 다른 이름. [본문으로]
  3. 청일전쟁의 여순전투에서 전신 8발의 총상과 수 많은 도상(刀傷) 등으로 기절, 시체로 분류되어 화장터에 옮겨지다가 생환. 여순전투에 대한 '육탄(肉彈)'이라는 작품을 남겨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함, 후에 일본 육군성 신문부장을 역임. [본문으로]
  4. 정확하게는 두 번째인 후실(後室). [본문으로]
  5. 당시 무장의 이름은 여러 정치적인 고려와 배려가 섞여 지어지는 것이기에 여성이 지을 수는 없었다. [본문으로]
  6. 현 카이 시[甲斐市].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15 2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0만냥이라...

    한냥당 금 4돈인 것으로 보면 엄청난 금액이네요.
    그냥 금값으로만 계산해도 대충 1200억...

    다 못쓰고 쌓아놓고 죽은 타케다 부자가 불쌍하군요. ㅎㅎ

  2. Favicon of http://doctorguy.tistory.com BlogIcon Jishaq 2008.05.16 0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이의 호랑이. 전국시대 최강 겐신과 호각을 이뤘던 유명한 무장이죠. 전국시대 모 게임하면서 알게됐는데 기마대 작살.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6 14: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전 숫자에 워낙 약하다보니 어느 정도인지 상상도 안 가더군요.
    (써 있는대로 쓰기는 했지만 말입죠)
    후에 신푸(新府)성을 축성하는 카츠요리가 돈이 모자라 국인중들에게 돈 좀 내라고 했다가 반발을 샀다는 이야기와 지금도 그곳에 전설로 남고 그로 인해 여전히 매장금 사냥꾼들이 모인다는 것을 보면 정작 카츠요리는 보지도 못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근데 이에야스는 어떻게 30만냥이나... --; )

    Jishaq님//혁신에서의 우에스기와 기마 기술 다툼은 운명을 나눌 정도더군요.
    우에스기 군단과 호각을 이룬 것 치고는 정작 제대로 둘이서 싸운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만...
    (가장 치열했다던 4차 카와나카지마 합전도 실체가 워낙 불분명해서 말입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16 2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의 초상화는 호머심슨같이 생겼군요(-_-;)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17 0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학생때 '대망'을 읽고서는 신겐이 정말로 총맞아 죽은 줄 알고 있었더랬습니다. --a
    그러고보니 스와 씨 측실이 애절하게 그려졌던 '야먕패자'도 오랜만에 생각나는군요.

    근데, 카츠요리가 멸망한 후 다케다 가문은 아예 멸족되었나요? 꼭 다이묘가 아니더라도
    항복하여 (이마가와 家처럼) 가문을 이은 인물이 한둘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7 1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역시 신겐은 그 중후한 그림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노토 하타케야마 씨의 그림이라고 하지만요 ^^)

    맹꼬서당님//물론 아닙니다. 요시노부(장남)의 동생이고 카츠요리(4남) 형이 되는 신겐의 둘째 류우호우(&amp;#31452;芳)는 맹인이기에 출가하여 난을 피하고 그 자손이 이후 타케다의 종가집이 됩니다.
    여담으로 메이지 유신시대에 화족으로 자작의 작위를 받자(타케다는 막부의 여러 예식을 관장하는 高家), 요네자와 15만석 우에스기 켄신의 가문이 백작이니 자기네도 백작을 달라고 떼섰다고 하더군요. (물론 실패)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5.17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년 NHK 대하드라마 &lt;풍림화산&gt; 재밌게 봤습니다.
    노부토라가 슨푸로 쫓겨날 때 슬프게 그려졌더군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8 1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그거 봐야 할텐데...본다 본다 하면서 아직까지 안 보고 있네요...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5.20 1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34화까지 신나게 보다가 그 이후로 안 보고 있어요.
    &lt;공명의 갈림길&gt;도 30화쯤까지 보다가 안 보구요.
    이거 시리즈가 너무 길어서 보다가 지치네요 -ㅅ-;;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0 1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게 한번 멈추기 시작하여 밀리면 다시 보기가 꺼려지더군요. ^^;
    아츠히메 열심히 보고 있다가(...라고 해도 4회까지였지만요 ^^; ) 지금 다시 보려니까...웬지..쫌...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16 18: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16: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1578 3 13 병사 49

1530~1578.

에치고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의 아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이어서 마사토라(政虎), 테루토라(輝虎)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불문에 귀의한 후 켄신(謙信).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온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를 보호하여, 우에스기의 성()과 칸토우칸레이의 역직(役職[각주:1])을 물려받았다.








다섯 번에 걸친 카와나카지마(川中島)합전


 1553 4월.

 북부 시나노(北信濃) 카츠라오(葛尾)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쫓겨 와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된 카와나카지마 전투.

 이유도 없이 타국을 침략하는 신겐의 무법자적인 행동에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겠다고 일어선 우에스기 켄신(이 때는 아직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이 이후 12년간에 걸쳐 다섯 번 싸운 것이[카와나카지마 전투]이다.


 1차는 이 해인 1553 8월. 우에스기 군()은 젠코우지(善光寺)분지로 진출하지만 신겐은 시오타(塩田)성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켄신의 전력을 관찰하는 듯이 후세(布施)와 오미(麻績)에서 자그마한 전투를 하는 정도로 끝났다. 이후 2차는 1555 7, 3차는 1557 8월에 행해졌지만 두 번 다 작은 전투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1561 9월. 역사상 유명한 제 4차를 맞이한다. 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하치만바라(八幡原)에서의 전투가 유일한 격전이었다.

  5차는 1564 8월에 이루어졌는데 사실상 카와나카지마의 네 개 군(郡)을 지배하고 있던 신겐은 자웅을 겨루려는 켄신의 시도를 무시하며 한달 가량 대치만 한 후 9월 중순 서로 물러난 뒤, 다시 카와나카지마에서 대결하는 일은 없었다.


정의를 위하여 동분서주


 제1차 카와나카지마 합전이 일어나기 전년인 1552년.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보호를 청하며 에치고로 온 것을 계기로 켄신은 1552 8월에 처음으로 산코쿠토우게(三国峠) 고개를 넘어 칸토우에 출진하여 누마다(沼田)성으로 입성했다. 이후 주가(主家)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14번이나 칸토우로 출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1560년부터 1571년에 걸친 12년간은 8번이나 칸토우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새해를 칸토우에서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켄신이 에치고로 돌아가면 우지야스가 농성을 풀고 칸토우로 출진하여 시모츠케(下野)의 사노 마사츠나(佐野 昌綱)나 오야마 히데츠나(小山 秀綱), 히다치(常陸)의 오다 우지하루(小田 氏治), 무사시(武蔵)의 나리타 우지야스(成田 長泰)들이 호우죠우 측으로 돌아 섰고, 켄신이 오오타 스케마사(大田 資正),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 사타케 요시아키(佐竹 義昭), 사타케 요시시게(佐竹 義重)들의 요청을 받아서 칸토우로 출진하면 우지야스는 또다시 물러나 농성을 했고 배반했던 호족들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어 진전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나 빙고(備後)() 토모()로 물러나 있던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를 협격(挾擊)하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노부나가로 돌아선 노토(能登) 하타케야마(畠山) 씨의 중신(重臣) 쵸우 츠나츠라(長 綱連)가 농성하는 나나오(七尾)성을 공략하였고, 오다의 구원군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군을 카가(加賀)의 테토리가와(手取川) 강에서 물리친 기세로 쿄우()로 진격하려 했지만,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 제패를 노리고 있다며 출진 요청을 해왔기에 우선 귀국하여 칸토우를 진정시킨 뒤 상경(上京)하기로 하였다.


최후의 대동원령


 하지만 카스가야마(春日山)성으로 돌아온 켄신에게 호우죠우 우지마사로부터 평화롭게 지내자는 요청서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를 통하여 도착했기에, 켄신은 칸토우로의 출진을 상경 원정으로 전환하여 휘하 장수의 명부를 작성하였다. [上杉謙信自筆将士書上]이라 불리는 것으로, 우에스기 군단 39명의 무장에 코우즈케(上野), 엣츄우(越中), 노토, 카가의 여러 장수를 합친 81명의 무장의 이름이쓰여 있다. 마지막에 [天正五年(1577년)十二月二十三日法印大和謙信]이라 서명되어있기에, 이것은 명백히 우에스기 군단 동원 명부라 할 수 있다. 켄신은 다음해 1 19일. 명부에 기재된 여러 장수들에게 대동원령을 내리며 눈이 녹는 3 15일을 출진하는 날로 정했다.


 그러나 출진의 날이 다가 온 3 9일 켄신은 돌연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뇌졸중이라 한다. 의원들이 열심히 고치려 했지만 보람도 없이 켄신은 혼수 상태인 채로 13일 죽었다. 향년 49. 장의는 출진의 날로 정해졌던 15일 행해졌다.

  1. 무로마치 바쿠후의 관직.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lsndmsrud BlogIcon 키르엘린 2007.07.30 1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데려가겠습니다//ㅅ/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7.30 1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프리이니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xkore BlogIcon 포증 2008.04.28 04: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 그의 죽음은 대략 어이가 없지만 마지막 대동원령은 비장미까지 감도는군요.
    필자의 문장력이 좋은 것인지 발해지랑님의 해석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제가 너무 겐신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ㅎㅎ
    그런데... 요즘에는 마지막 대동원령이 상경이 목표라기보다는 간토가 목표였다는 시각이 중론이라는데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상경이 목표라는 주장은 당연히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들어 가쓰이에를 격파하는 등 서진했기 때문이라는걸테지만 간토가 목표라는 주장은 아직 근거를 못본지라...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30 0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증님의 켄신을 좋아하셔서 일 것입니다. ^^

    본문에 언급된 호우죠우 우지마사의 편지를 인정하느냐 인정 못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칸토우는 칸토우칸레이라는 역직에 있고 또한 그런 면에서 보수적인 켄신에게는 칸토우의 무장들이 요청이라도 해 오면 될 수 있는한 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즈음해서 사타케, 유우키 등의 출진 요청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쪽에 무게를 실리는 것인가 봅니다....
    켄신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이것도 조금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kumkang1471 BlogIcon 지족자부 2008.08.17 1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의 임종전의 멋찐 시 한수가 생각하네요. ㅎㅎ &quot;영원토록 영번하는 한잔의 술, 생을 모르고 죽음또한 모르니 세월또한 꿈과 같구가&quot; 무장다운 시 라고 볼수 잇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18 2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기 한 달 전 쯤에 그냥 만든 시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저도 멋진 시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

1573 1 1 병사(病死) 73

1501 ~ 1573.

시나노(信濃) 카츠라오(葛尾)성주(城主). 맹장으로 이름 높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싸워 토이시(戶石)성 합전(合戰)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부 시나노(信農), 에치고(越後)로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후에 신겐에게 패해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도망. 이후 객장(客將)이 되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합전 등에 참가하였다.

(그림은 태합입지전V에서)






신겐(信玄)에게 두 번 패배를 안기다.


 전성기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는 대단히 강했다.

 부와 북부 시나노(信濃)일대의 장병을 이끌고 사카키(坂城)의 카츠라오(葛尾) 성을 본거지로 삼아 타케다 하루노부(武田 晴信 = 信玄)와 승부를 벌였다.

 1548 2월 우에다하라(上田原)의 전투에서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方) 등을 패사(敗死)시켰을 뿐 만 아니라 신겐에게도 심한 부상을 입힐 정도로 대승하였으며, 1550년의 토이시(戶石)성 합전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신겐에게 [토이시 붕괴(戶石崩れ)]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따라 붙게 할 정도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 온 요시키요의 무운(武運)도 여기까지였다. 신겐의 사키카타슈우(先方衆) 사나다 유키타카(真田 幸隆)에게 토이시성을 빼앗기자 유력한 휘하의 무장들이 계속해서 신겐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본거지인 카츠라오 성의 방어 체제가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되자 시나노(信濃)의 용장 요시키요도 어쩔 수 없이 1553년 4월 9 카츠라오성을 버리고 8살의 외아들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 =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도망가게 된다.


에치고(越後)의 객장


 요시키요가 에치고로 망명한 목적은 켄신(謙信)의 원조를 받아 옛 영토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이것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의 원인이 되었는데, 카츠라오 성을 뒤로한지 14일 후인 4 23일에는 켄신의 원군을 얻어 카츠라오성을 탈취하였고 치이사가타(小県)()의 시오다(塩田)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주변은 이미 확고한 신겐의 영지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에치고(越後)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후 요시키요는 옛 영토회복의 꿈을 계속 가슴에 품으며 도합 5회에 이르는 카와나카지마 전투에 4번 참가하였다. 1561 9월의 네 번째가 되는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사투[각주:1]에서는 시나노(信濃)의 병사 2000여기()를 이끌고 처음 전쟁터에 나서는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선봉으로써 용감히 싸웠는데 이때 요시키요의 나이는 이미 61세의 나이였다.


 고향 사카키(坂城)로의 복귀도 반쯤 포기하고 있던 1562년.

 신겐의 친족중(親族衆)인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사자라고 하는 승() 쿠우안(空庵)이 길보(吉報)를 카스가야마(春日山)성에 가지고 왔다.

 신겐이 적자(嫡子) 요시노부(義信)를 폐하고 서자 카츠요리(勝頼)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니 만약 켄신이 요시노부를 양자로 삼는다면 바이세츠도 켄신을 따르겠으며 곧바로 시나노(信濃)는 켄신(謙信)의 것이 되고 요시키요도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요시키요는 맘 속으로 크게 기대하였으나 쿠우안(空庵)의 이야기를 들은 켄신은 크게 화를 내며 쫓아버렸다고 한다.[名将言行錄]


 1564 5회째가 되는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합전에 63세라는 고령으로 참전하지 못하였고 대신해서 아들인 쿠니키요(国淸)가 출진하였다. 이 즈음의 일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上杉将士書上]에는 요시키요를 지칭해 [우에스기(上杉)()에서 그렇게 뛰어난 활약도 하지 못한다]며 호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요시키요는 켄신에게 객장(客將)으로써 계속 대우받았다.


 소령(所領)은 칸바라(蒲原)군(郡)의 야마우라(山浦)와 우오누마(魚沼)() 내에 가지고 있었으며 켄신이 만들어 준 나오에츠(直江津)의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켄신은 다음해인 1565 3월 그다지 활약도 하지 않는 요시키요를 네치(根知)성주로 앉히고, 쿠니키요(国淸)를 토쿠아이(德合) 성주로 발탁하였다. 네치(根知)성은 엣츄우(越中)와 시나노(信濃)의 국경 사이에 있는 성으로, 그 성의 관할로 마츠모토(松本)가도(街道)라던가, 치쿠니(千国)가도가 있어 옛날부터 소금의 운송로이면서 또한 군사상의 요지이기도 했다. 켄신이 65세라는 말년의 요시키요에게 네치성을 맡긴 것도 카와나카지마 전투 후 신겐에 대한 대비와 함께 세이와겐지(淸和 源氏) 무라카미(村上)씨의 후예이며 시나노 명문족(名門族)인 무라카미의 명예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켄신은 요시키요에게 네치(根知)의 경비를 엄중히 할 것을 명령하며 어류나 소금을 네치를 통해 시나노로 운송시켰다. 요시키요는 이런 중요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1568 68세가 되자 스스로 노령을 이유로 켄신에게 가증(加增)받은 야마우라(山浦)와 오야마(飯山)의 소령(所領)을 쿠니키요(淸国)에게 물려준 후 다음 해인 1569년에 중이 되었고 70세에는 은거. 1572년에는 병으로 쓰러져 다음해인 1573년 정월 두 번 다시 고향의 땅을 밟아 보는 일 없이 네치 성에서 죽었다. 73세였다. 원수인 신겐(信玄)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아들 쿠니키요의 그 후


 요시키요가 남긴 야마우라 4만관() 등은 1573 12 쿠니키요에게 안도(安堵)되었다.

 쿠니키요도 켄신과 그 후계자인 카게카츠(景勝)에게 중용되어 카게카츠가 시나노의 북부를 진압한 1583 8 카이즈(海津)성의 성주 대리(城代)가 되었다. 여덟 살에 부친 요시키요의 손에 이끌려 에치고로 도망 친 후 3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제 4차를 말하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cipio324 BlogIcon scipio324 2006.04.15 2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능력치가 이 게임에선 터무니 없이 낮던데, 저렇게 낮은 능력치로 어떻게 신겐을 두번이나 막았지 싶을 정도로.. 나중에 코에이에서 신겐의 가이와 시나노 쓰루가 평정을 한 것이나 우에쓰기 겐신과의 가와나까지마 전투를 좀더 자세히 진행하는 방식의 게임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이미 있는지 모르겠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6.04.16 1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중이 없는 캐릭터로서는 나름대로 높은 편 아닌가요? 70대 후반으로 기억하는데..기병적성치도 A나 S이고. 코에이에서 처음으로 발매한 게임이 &quot;카와나카지마합전&quot;이었다고 하는군요. 어떤 게임인진 모르겠지만, 지금보면 OTL이겠죠. 그리고... &quot;쇼군 토탈 워&quot;와 &quot;TAKEDA&quot;라고 미국에서 만든 게임이 있다고 하던데...영어를 몰라서 접해 보진 못했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yangkki87 BlogIcon 한베에 2008.04.21 1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합 시리즈는 대개 능력치가 짠 편입니다. 특히 이름이 조금 없는 무장이다 싶으면 아주 능력치가 말도 못할 정도로 낮게 나오죠 ㅎㄷㄷ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1 13: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인지 타케다 씨의 가신들은 과대 평가가 많더군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xkore BlogIcon 포증 2008.09.08 0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태합5 에서는 능력치가 굉장히 낮습니다. 통솔과 무력이 70대 중반이었나.. 그런데 '신장의야망12 혁신'에서는 통솔이 90대, 무력도 80대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통솔은 다케다 4명신보다 높았고, 무력도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제외하고는 3명보다 높았던걸로...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xkore BlogIcon 포증 2008.09.08 0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다케다'가 미국에서 만든 게임인가요? 처음알았군요. 어쩐지 스샷보면 영문판은 있는데 일어판이 왜 없나했더니...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xkore BlogIcon 포증 2008.09.08 0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세가 도대체 뭔지...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경우에도 다케다가와의 최초의 충돌은 언제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향에서 쫓겨나고 결국 영원히 못돌아오고... 단지 기록으로 대하는 옛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과 교감을 하려고 노력을 하다보면 애처롭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고 혹은 불쌍한 경우도 있어서 이런 경우에 그 사람들을 평가한다는것 자체가 좀 몹쓸 일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저 책으로만 보고 글을 쓰는것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는게... 사치?랄까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12 0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겐을 그렇게 물리칠 정도의 인물이라면 타당한 숫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TAKEDA는 찾아보니 캐나다의 'Magitech'라는 곳에서 만들어졌군요.
    또한 쇼군토탈워는 영국의 'Creative Assembly'라는 회사군요. 잘못된 정보를 아무 생각없이 말하여 죄송합니다.

    힘이 모든 것을 우선시 하던 시대는 힘없는 것이 곧 죄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설사 옳았더라도 얼마든지 나쁜 놈으로 왜곡시킬 경우도 또한 있으니까요.
    포증님의 마지막 말씀은 확실히 그러하지만 왠지 그렇게 사치를 부리게 되더군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