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세상이 된 다음의 일이다. 
 어느 날,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거성 치쿠젠[筑前] 후쿠오카 성[福岡城]에서 무사들이 모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무사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시마 사콘[島 左近]은 정말 무서웠지. 지금도 눈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니까”고 몸서리치며 말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도 그러하다며 수긍하였다. 
 그러나 그 시마 사콘이 당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기억들이 달라 서로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침 쿠로다 가문에 있던 미츠나리의 옛 가신(家臣)이었던 사람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그 가신의 말에 따르면 투구의 앞장식[立物]은 삼 척(尺)[각주:1] 정도 되는 텐츠키[天衝]를 붙이고, 갑옷은 옻칠을 한 가죽 몸통갑옷[溜塗り桶革胴], 연황색 목면의 전포[陣羽織]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링크:당시 시마 사콘이 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갑옷 - 위에서 두 번째 것이 시마 사콘의 갑옷
 이것을 듣고 모여있던 쿠로다 가문의 무사들은, “보통 그렇게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잊지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우리 쿠로다 가문은 이시다 가문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잖아. 정말 그렇게 가까이서 사콘을 보았으면서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우리는 정말 당황했었나 보군, 정말 쪽 팔린 일이로세”하고 개탄하였다. 그래도 그 중 하나가, “아니지. 그렇게 온몸의 털이 다 설 정도로 공포에 떨었으며, 자칫하면 우리들 목도 사콘의 창에 꿰였을 수도 있을 터인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마 사콘 –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개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의 성[佐和山城]’이라 일컬었을 정도의 무장이지만, 그의 이력은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엔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의 성주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를 섬기었으며, 쥰케이의 가신 마츠쿠라 우콘[松倉 右近]과 쌍벽을 이루며 ‘우콘-사콘’이라 칭해진 전술가(戰術家)였다. 후에 낭인이 되어 오우미[近江] 타카미야[高宮]에 은거하고 있을 때, 사콘의 장재(將材)를 높이 산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듭된 부탁에 꺾여 미츠나리를 섬겼다. 그때 미츠나리는 4만석의 소령(所領) 중 반분 가까운 1만5천석을 사콘에게 주었다고 한다.[각주: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이런 사콘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빠지자, 검술사범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를 사콘에게 파견하여 사콘의 뱃속을 살피게 하였다. 무네노리와 사콘은 동향 출신이었으며, 또한 무네노리 역시 츠츠이 가문[筒井家]을 섬긴 적이 있어 사콘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각주:3] 
 잠시 잡담을 나눈 후 무네노리는 사콘에게 천하의 향방이 어찌될 것 같은지에 대해 물었다. 사콘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처럼 지모와 결단력 있는 인물이 없기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주군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모는 있어도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사실 사콘은 몇 번이나 미츠나리에게 중대한 결단을 촉구했으며, 그럴 때마다 각하 당했다.

 미츠나리가 무공파 칠장[각주:4]에게 공격받아 이에야스의 중재로 사와야마에 은퇴하게 되었을 때, 사콘은 일전불사를 주장하며 이런 작전을 세웠다. “사와야마를 1천의 병사로 수비하고, 2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시미[伏見]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이에야스를 죽여버립시다.”고 진언하였다. 미츠나리는 때가 아니라며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또한 이 이후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에 향하던 도중 오우미[近江] 미나구치[水口]에 머문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도 사콘은 야습을 진언했지만 미츠나리는, “그에 대해서는 미나구치 성주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맡겨두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0년 9월 14일 세키가하라 결전의 하루 전. 아이즈 정벌군을 회군한 동군(東軍)의 총수 이에야스가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에 도착하자, 오오가키[大垣]에 있던 서군(西軍)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때 사콘은 아군의 사기를 여기서 높이지 않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이라 보고, 500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오오가키와 아카사카 사이에 흐르는 쿠이세 강[杭瀬川]까지 진출하여 동군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아리마 토요우지[有馬 豊氏]의 군을 유인해서는 쳐부수어 서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어서 그날 밤 작전회의에서 야습을 진언했지만 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콘은 자신의 진소(陣所)에 돌아가서는 가신들을 모아, 가신들의 목숨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전했다 한다.

시마 사콘[島 左近]
이름은 키요오키[清興]. 일반적으로 카츠타케[勝猛]가 유명하다. 츠츠이 가문[筒井家] 다음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의 아들[각주:5] 히데야스[秀保]도 섬긴 적이 있다고 한다.

  1. 약 91cm. [본문으로]
  2.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이러했다고는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거기에 더해 사콘의 딸은 무네노리의 조카이며 후에 오와리 야규우[尾張柳生]의 시조인 야규우 토시토시[柳生 利厳]의 부인이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5. 양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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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2.02.19 2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머리에 시마사콘이 밟고있는 꼬리를 보니 여우인지 모를 사이클롭스(..)는 뭘까 궁금하네요. 시마사콘의 오니 퇴치 전설같은거라도 따로 있는거려나요.

    그러고보면 시마 사콘이 진언한 야습내지 기습을 족족 각하시켰다는건 이시다 미츠나리로서는 정공법으로 승부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라고 해석할수 있는 여지가 있으려나요. 만약 그랬다면 요즘 신나게 주가를 띄우고있는 캡콤겜이라거나 코에이겜에서의 미츠나리도 좀 평가절하되야겠습니다만(허헣;)

    사족이지만 올려주신 링크페이지를 내려 구족들 훑어보니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수리부분에 빗자루를 달아놓은듯한 투구와 예의 그 쿠로다 나가마사 태양전지판 투구(..)가 굉장히 눈에 띄는군요. 그밑으로도 토도 타카토라는 무슨 프로펠러같은걸 투구에 붙여놓은거라더가(;;)

    타치바나 무네시게도 꽤 기이한 투구를 쓴듯 싶은데 이거 전국무쌍3에서의 성기사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터라 실제로 이런걸 보면 갭이 크군요. (어이쿠;;)


    아 로또당첨 축하드립니다. 저는 왕회장님과 영광스럽게도 악수하는 꿈을꾸고 한장인가 사봤는데 5등(..)나왔던게 제일 잘나온것이더군요. 도대체 누구와 만나야 1등을 받을수 있는걸련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0 1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글로 써진 부분에 그런 것이라도 있나? 해서 읽어보아도 그런 것은 없더군요.

      근데 그 야습설이라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미츠나리 까기 위해서 쓰인 글들이라...예를들어, 시마즈 요시히로나 토요히사가 야습을 진언했을 때 물리친 것은 시마 사콘인데, 이때 사콘은 "내일 작전대로 정면 승부한다면 필시 이에야스의 갑옷 뒷모습을 보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토요히사가 "당신은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기는 한가?"라고 하자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을 때 미카타가하라에서 도망치는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소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죠.(여담으로 이 일화를 가지고 사콘이 신겐의 부하였던 적이 있네 없네 하죠..--; ). 기본적으로 야습이란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필연적으로 소인수 밖에 움직일 수 없으니 성공한다고 쳐도 그 성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상대도 병신이 아니니 대비가 되어있을테니까요.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기본적으로 야습을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국지연의 등의 소설이 유포된 뒤에 군담작가들이 생각해 낸 것이 각종 야습설이라 생각합니다.

      타카토라 투구의 저것은 중국 관리들이 쓰는 모자(冠帽)를 흉내낸 것인데..좀 大袈裟인듯요.

      고맙습니다. ^^ 당첨금으로 담배나 좀 쟁여놔야 겠습니다.

  2. ㅇㅇ 2015.07.05 07: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 3병법이라는 명성에 비해 나오에랑 활약이 적군요. 아니면 모셨던 주군들이 변변치 못했다던지.

 눈치보기의 대명사 '호라가토우게 고개[洞ヶ峠]'라는 에피소드[각주:1]로 유명한 쥰케이[順慶]는 원래 불문(佛門) 출신이다. 유식론(唯識論 – 법상종(法相宗)의 중요한 경전))에 정통하고 와카[和歌]나 다도(茶道)에도 능한 문화인이었다.

 언제나 성성이의 가죽을 테두리로 한 두건을 쓰고, 금으로 수를 놓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적주머니를 비스듬히 어깨에 걸치고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야마토[大和]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대장을 맡아온 호족이었다. 야마토에는 츠츠이 가문 외에도 오치[越智], 토이치[十市], 와카오[若尾] 등의 승병대장이 있어 츠츠이를 포함하여 '사인방(四人衆)'이라 일컬어졌는데 츠츠이의 세력이 가장 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비호아래 야마토[大和]를 지배하게 된다.

 '호라가토우게 고개'라는 에피소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야마자키[山崎]에서 싸웠을 때 생긴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포된 이야기에는 이때 츠츠이 쥰케이가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올라가 아케치와 하시바의 싸움을 방관하다가 하시바 측이 명백히 유리해진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제서야 아케치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진상은 이것과 꽤나 다르다.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오른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 쪽이었던 것이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은 1582년 6월 2일이었다.
 노부나가에게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
国] 공략에 원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의 거병이었다. 이 당시 쥰케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등과 함께 미츠히데 휘하 다이묘우[大名]로 츄우고쿠로 출진하기 위해 거성(居城) 야마토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출진하여 쿄우토[京都]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도중 혼노우사의 변보를 접한 것이다.

 쥰케이의 입장은 미묘했다. 단순한 아케치 휘하 다이묘우가 아니었다. 친족관계였던 것이다. 미츠히데의 넷째 아들은 쥰케이의 양자로 들어와 있었다[각주:2]. 거기에 미츠히데는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은인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빼앗겼던 야마토의 츠츠이 가문 영지(領地)를, 노부나가가 마츠나가를 정벌한 후에 미츠히데가 잘 말해주어서 영지(領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각주:3]

 그런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쥰케이는 당초 미츠히데가 모반을 일으키자 미츠히데 측에 붙어있었다.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 노부나가의 셋째]의 출병요청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 성주 이도 요시히로[井戸 良弘][각주:4]와 함께 병사의 일부를 떼내어 아케치의 오우미[近江] 평정에 참가시켰다. 그러나 쥰케이 자신은 코오리야마 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쥰케이의 행동은 미묘하게 변해간다. 미츠히데의 요청을 받고 카와치[河内]에 출진할 예정이었던 것을 취소시키고 더구나 성 안에 식량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벌하기 위해서 산요우
[山陽]를 맹렬히 올라오고 있다 – '
 쥰케이에게는 이미 이 정보가 들어간 듯 했다.

 6월 10일.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상경한 히데요시의 군세는 이제 쿄우토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효우고
[兵庫][각주:5]까지 와 있었다. 미츠히데는 이 너무도 빠른 움직임에 앙천했다. 이제 인기가 떨어진 아케치 세력은 1만 수천밖에 없었다. 쥰케이의 가세가 절실했다.

 미츠히데는 쿄우토를 나와 야마자키 하치만[山崎八幡]에 있는 구릉의 일각인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진을 쳤다. 이 고개는 눈 아래로 쿄우토-오오사카[大坂] 간의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요충지였다. 야마토 코오리야마까지는 약 20여km. 미츠히데는 "가세하지 않으면 코오리야마를 공격하겠다"고까지 말하여 쥰케이에게 엄포를 놓았지만 쥰케이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미츠히데는 계속 기다렸지만 이때 쥰케이는 이미 히데요시와 서약서를 교환한 상태였던 것이다. 쥰케이의 조심스러움은 그래도 여전히 눈치를 보는 태도를 유지하게 만들어 14일이 되어 그제서야 코오리야마 성을 나온 것이다. 이때 미츠히데는 이미 오구루스[
小栗栖] 마을에서 그곳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쥰케이는 1천의 병사를 이끌고 타이고[醍醐]에 있는 히데요시의 진영으로 가서 승리를 축하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눈치를 본 태도를 책망하였지만 그대로 용서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이때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츠츠이즈츠[筒井筒]라는 이름 높은 고려차완(高麗茶碗)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9년 생. 대대로 코우후쿠 사[
興福寺]의 중도(衆徒)로, 환속한 후에 후지시로우 후지마사[藤四郎 藤政]라는 이름을 칭했다. 1559년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츠츠이 성[筒井城]에서 쫓겨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도움으로 영지(領地)를 회복하고 야마토[大和]를 영유하게 된다. 1584년 죽었다. 36세.

  1. 관용어로 "洞ヶ峠を決め込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기회를 엿보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하나[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 결국 실현까진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야마토[大和]는 무로마치 시대에도 막부가 슈고[守護]를 두지 않았던 유일한 곳으로, 이곳은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왕국이라고 할 정도로 코우후쿠 사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한 곳이었다. 노부나가도 처음엔 자신이 키웠다고 할 인재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던 반 나오마사[塙 直政]에게 야마토를 지배하게 하나, 나오마사가 전사하자, 야마토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기던 코우후쿠 사의 승병 출신인 쥰케이를 야마토의 지배자로 임명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의 판단이었지 결코 미츠히데 덕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4. 그는 부인은 쥰케이의 딸이다. [본문으로]
  5. 코우베[神戸]의 옛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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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1.31 1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 살아남으려 애썼건만 아버지처럼 암으로 요절했고 아들대엔 카이에키 당했으니 뭐..-_-; 인생무상이라지만 참 덧없는 일인가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1 1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짧지만 굵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격전지 킨키에서 그 눈 높다는 노부나가의 신임으로 나라 하나 소유했을 정도면 뭐... 그럭저럭 괜찮았던 듯 싶습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82 6 13일 패사(敗死) 55?

1528? ~ 1582.

미노(美濃)의 명족(名族) 토키(土岐)()의 후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동반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긴다. 후에 노부나가와 사이가틀어져, 혼노우(本能)()의 변()을 일으키지만, 직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 중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어긋난 시나리오


 1582 6 13일 밤.

 아케치 미츠히데는 쇼우류우지(勝龍寺)() 안에 있었다.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전이라며 싸움을 걸어온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맞서 싸워 이김으로 쿄우토(京都) 지배의 토대를 다져놓을 수 있었던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지금 막 도망쳐 온 것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토우 쿠라노스케(内蔵(=토시미츠(利三))의 말을 들어, 오늘의 전투를 피하여 사카모토(坂本)에서 농성(籠城)을 하였다면……]

 [평소 모아두었던 군세를 (나누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면……] (太閤記)

 라는 등의 제 3자의 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적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성을 나가 본거지인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에서 진용을 재구축해야 하겠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급격히 불리해진 국면(局面)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우(本能)()에서 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궁정에 들어가 전승(戰勝)을 보고했던 것이 불과 10일전의 일은 아니었는가? [아케치의 삼일천하[각주:1]]라고 후대에 걸쳐 비웃음을 받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도 예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큰 것에 당혹하여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일까?

 직접적인 패인(敗因)은 히데요시가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츄우고쿠 대반전(大返し)]을 감행한 것과 더불어 동원한 병력이 총 4[太閤記]이라는 이 또한 예상외의 대군(大軍)으로 이 대군에는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라이벌 히데요시가 그렇게 대군을 모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인척[각주:2]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타다오키(忠興) 부자의 협력 거부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죽인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문제인 것은 누구보다도 미츠히데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호소카와 부자에 재고(再考)를 촉구한 9일자 편지의 말미에도 이번 쿠데타의 의도는 타다오키, 오키모토(興元[각주:3]) 등을 위한 것으로, 따라서 쿄우토(京都) 주변을 평정한 후에는 곧바로 타다오키 등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소카와 부자는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당초 미츠히데에게 가세(加勢)했었던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9일에는 태도를 바꾸고 곧이어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모반(謀反)]


 확실히 미츠히데의 반역의 배후에는 바쿠후(幕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와 기맥상통(氣脈相通)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세 사다오키(伊勢 貞興), 스와 히다노카미(諏訪 飛), 미마키 카게시게(御牧 景重) 등 쇼우군()의 부하들이 아케치 측에서 전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체제의 재건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나름대로 대의명분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미츠히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오다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거절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9일자 편지에서 혼노우(本能)()에서의 일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不慮)”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세울 정도의 대의명분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반격의 준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 성()으로 귀환을 하려 하였고 미조오 시게토모(溝尾 茂朝) 등 근신(近臣) 수 명과 함께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쇼우류우지(勝龍寺)()을 탈출했다. 그러나 후시미(伏見) 방면에서 야마시나(山科)에 이르렀을 때 잇키(一揆)에 습격 당하여 샛길로 피했지만 여기서 살해당하고 백성이 목을 주웠다[아사노 가문 문서(野家文書)].
 
일설에는 야마시나의 오구루수(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풀 숲에 숨어있던
노부시(野武士)의 창에 찔려 약 330m쯤 간 곳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 있던 신하가 목을 베어, 그 목이나 몸통을 덤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豊鑑].


 이 말로에 대해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학려(學侶)인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등은, “노부나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출세를 하였으면서도, 그 큰 은혜를 잊고 괘씸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단정지었다.

  1. 노부나가를 죽인 후 쿄우토(京都)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다오키의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 [본문으로]
  3. 후지타카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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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1.30 0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위야 어찌되었건 무로마치 바쿠후 멸망에 일조하게 된 미츠히데로서는 바쿠후 재건의 임무는 온당치 않았던 걸까요.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 330 mol/L는 아니겠지요??? (mol/L를 줄여서 M이라고 쓰기에…)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0 0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히데의 목적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설과 배후설이 워낙 많은 관계로.... 모르겠습니다. ^^;
    바쿠후 설도 그 중에 하나이겠지만... 확실히 신사본론님 말씀대로 일조한 녀석이 다시 재건한다고 하여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특히나 호소카와 유우사이같은 경우는 쇼우군 가문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설이 있는데도 바쿠후 재흥이라는 것에 별 흥미를 못 느낀 것을 보면 어쩌면 바쿠후 배후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전국자위대'라는 소설에서는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외치더군요
    '적은 묘심사에 있다!!')

    원문에선 '3町'로 되어있는데, 1町는 109.9미터라고 하더군요.... 길이는 소문자로 써야 하나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1.30 1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m는 길이의 단위고, M는 - 좀 황당하시겠지만 - 농도의 단위입니다. 굳이 해석하자면 6.023×10^23개/L…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0 1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그랬군요.. 좋은 거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태까지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30 1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다오키에게 오다노부나가는 거의 '영웅'급의 인물이었는데.. 협력 할리가 있겠습니까..

    P.S. 그래도 가라샤 안 죽인게 용합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0 1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글에서인가... 노부나가의 와키자시(脇差)의 칼자루에 있던 구요(九曜)를 보고 맘에 들어, 다음에 구요가 찍힌 옷을 입고 나갔다가 노부나가에게 멋진 문양이라며 칭찬을 듣고 자신의 가문(家紋)으로 해달라고 했다가 인정받았을 때는 얼마나 기뻐했을지 눈에 선하더군요.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sagaman1981 BlogIcon 나그네 2008.02.03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번째문단 5번째줄에 '타다오키의 딸은 미츠히데의 딸' 이라고 되어 있는데 타다오키의 부인이 아닌지? 발해지랑님의 글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04 0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문 & 언제나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얼렁 바꾸었습니다. --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09 2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지광수.. 자기보다 37살이나 어린 란마루에게 부채로 맞았다는 소리가 있던데;;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0 2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도 시대에 한 백년 지난 다음에 나온 군기물에는 그리 쓰여 있다고 합니다만, 노부나가가 그리 막 되먹은 인물은 아닌지라 저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여담으로...노부나가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질 않아서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는 술 쳐먹고 행패 부리는 모습이 그려지더군요)

  11. Favicon of http://doctorguy.tistory.com BlogIcon Jishaq 2008.05.16 17: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지광수.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운 인물이죠.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 미츠히데는 비웃음을 받고 있지만 그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요. 궁금하네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6 1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덕분에 일본의 조선 침략은 10년 정도 늦추어진 것 같긴 합니다만...^^
    과거의 인물이라 문서상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밖에 추측할 수 없으니 정확한 실제 모습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마음 속에 그려진 인물상이 그것이 될 수 있겠지요.
    제가 생각하는 아케치 미츠히데는 빈틈없는 완벽주의자... 인 것 같습니다. '무엇'을 시키건 '반드시' 완수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16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16: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15. 써니데이 2009.12.08 0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요즘에 철지난 공명의 갈림길을 열심히 보다보니까..
    한참전에 봤던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미츠히데가 굉장히 무뚝뚝,철저하고 냉혈한같이 그려지는데 반해서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인간미 넘치고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고뇌를 많이 하는 인간적으로 좋은 인물로 그려지더군요.
    솔직히 미츠히데를 나쁘게 생각하는 편은 아닌지라 공명의 갈림길에서의 미츠히데가 실제 존재했던 미츠히데였으면..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8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땠을까요...^^

      당시 유럽의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가(...그러니까 정치적인 호불호를 제외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 미츠히데를 평하길...

      - 배신이나 밀회를 좋아한다 -> 이는 상대방을 계략으로 빼내오는데 능숙...하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 형벌을 집행할 때는 잔혹 -> 미츠히데도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참혹한 짓을 좀 한 듯.
      - 인내력이 강하다.
      - 계략과 책략의 달인

      라고 하더군요.

      성격은.... 뭐 동시대에 직접 만나고 + 만난 사람의 주관적 시선에 따라 변하는 법일테니까요.

      가령 제 친구들은 저에 대해...
      싸가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말을 돌리지 않고 직접 말하는 편이라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놈이라고도 하더군요.

      만약 제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친구가 기록가로서 후세에 글을 남긴다면...
      역사상 제 개인적 평은...
      싸가지 없는 인물....
      이 되겠죠. ^^

      과거의 역사적 인물 성격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16. 써니데이 2009.12.08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사를 관심있게 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전국시대를 논함에 있어서 프로이스가 자주 언급되더군요.
    프로이스에 관한 책중에 국내 시중에 나와있는 추천 해주실만한 책 소개 부탁드립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9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내에서 루이스 프로이스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제가 알기로 이 책 밖에 없을 듯..

      http://valhae.tistory.com/493

      에 나오는 '임진란의 기록'이란 책입니다. 분량도 많지 않기에 두세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습죠.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한 '일본사'에서 임진왜란 부분만 발췌한 글입니다....글은 나쁘지 않지만 주석 달아 놓은 부분이 좀 그렇더군요.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8 8 11일 병사 35

1549~1584.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성주. 부친인 쥰쇼우[順昭]가 죽자 2살에 가독을 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대립하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도와 마츠나가를 멸망시켜 야마토를 영유(領有). 야마자키 전투[山崎 合戦]에서는 미츠히데를 버리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 섰다.







승의(僧衣)의 무장


 츠츠이 쥰케이의 부친인 쥰쇼우는 나라[奈良]의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이었다. 쥰쇼우는 소에시모 군[添下郡]의 츠츠이 성[筒井城]을 본거지로 삼고, 야마토 지역에서 최강인 무사단을 이끌고 야마토 전역을 거의 평정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551년, 아직 쥰케이가 2살일 때 쥰쇼우가 병으로 죽었다.


 주변 가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여 18세에 코우후쿠 사[興福寺] 세이신 원[成身院]에서 득도(得度)하여 '요우슌보우 쥰케이[陽舜坊 順慶]'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승의의 무장이 된 쥰케이는 쇼우죠우히[猩[각주:1]]로 물들인 두건을 쓰고 금색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출진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시기산 성[信貴山城]에 웅거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여러 번 압박 받던 중 아케치 미츠히데의 주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히사히데보다 쥰케이를 신뢰하여 야마토를 맡긴 것이다.[각주:2] 이에 불만을 품은 히사히데는 돌연 시기산 성에서 모반을 일으켜 자멸하였다.


 1580년.

 쥰케이는 성을 야마토[大和]의 코오리야마[郡山]에 축성한다. 미츠히데가 성의 건물 배치를 맡았다고 하니 둘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각주:3].


갑자기 찾아온 복통(腹痛)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츠히데가 싸운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출진 요청에도 불구하고 '호라가토우게 고개[洞峠]'에서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실제로는 출병하지 않고 코오리야마 성()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곧바로 히데요시의 진()으로 달려가 천하의 명기(名器)인 이토 차완[井戸茶碗]을 헌상하고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내어 야마토 일국(一国)의 영유를 허락받았다.


 1548 1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히데요시에게 신년인사를 한 후 후나바[船場]의 자택에서 체재하고 있던 2월 중순. 쥰케이는 갑자기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수반하는 복통을 일으켰다. 소강상태를 지나 3 2일에 코오리야마 성()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출진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이 전쟁은 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이라 불리게 되는 전쟁이 된다.


 히데요시에게 충심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로 본 쥰케이는 병든 몸을 이끌고 3월에 오우미[近江]로 출진하였고, 거기서 이세[伊勢] 마츠가시마[松島]에서 싸운 후 쉴 틈도 없이 6월에 미노[美濃]의 타케노하나[竹鼻]로 이동하였다. 양군이 대치한 상태가 된 7월이 되자, 복통은 더욱 심해져 제대로 먹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에 더해 한 여름의 더위까지 겹쳐 몸은 갈수록 말라 갔다.


명의(名醫)의 치료도 보람없이


 코우후쿠 사()의 중도(衆徒)로서는 제일 높은 자리인 호우인 소우토[法印 僧都]가 되어 있던 쥰케이의 병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코우후쿠 사(),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는 여러 가지 기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효과는 없어 결국엔 쿄우토[京都]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쿄우토에는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의 병을 고친 명의(名醫)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우산의 치료에도 진전이 없어 격통이 멈추지는 않았다. 쥰케이의 병은 요즘으로 말하면 악성 위궤양 혹은 위암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코오리야마 성()으로 돌아왔다.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쥰케이의 묘.

 흔들리는 가마에 타고 오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오는 도중 우치[宇治]나 나라[奈良]에서 정양(靜養)해 가면서 귀성한 것은 8 7일이었다. 그 동안에도 쥰케이는 계속 고통을 느꼈다. 또 다시 코우후쿠 사()나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 기도가 행해졌지만 역시 효험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쥰케이도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10일에는 머리맡에 일족들과 중신들을 불러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모친 오오이카타 토노[大方殿] 등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5.


 쥰케이는 츠츠이 가문의 앞날을 걱정하였지만 뒤를 이은 사다츠구[定次][각주:4], 죠우케이[定慶][각주:5] 둘 다 뛰어나지는 못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카이에키[改易][각주:6], 단절(斷絶)[각주:7] 당하게 된다.

 사다츠구는 이가[伊賀] 우에노[上野]로 영지가 옮겨져 20만석을 영유하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쪽에 속했으나 후에 카이에키가 되어 이요[伊予]로 유배당한다.

 또한 그 다음 대인 죠우케이[定慶]에게는 코오리야마 성() 1만석이 주어졌지만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에서 오오사카 측에 너무도 간단히 성을 빼앗긴 일로 무가(武家)로써 어울리지 않다하여 가문이 끊겼다.

 

 
  1. 파란 빛을 띤 진홍색을 말함. [본문으로]
  2. 이전까지만 해도 히사히데가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휘하였기에, 히사히데의 적인 쥰케이는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은 노부나가의 군세에 공격받아 위기에 빠지나, 1571년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뜬금없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노부나가를 거역하더니 쇼우군 요시아키 휘하 장수들의 영지를 공격. 이에 요시아키는 히사히데의 적이었던 쥰케이를 옹호하게 된다(자연스레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있던 노부나가도 쥰케이를 옹호). 이후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사이가 벌어지자 히사히데는 요시아키 측에 붙고, 쥰케이는 히사히데에게 대항하기 위해 노부나가에게 붙는다. 덧붙여 요시아키를 쫓아낸 후 히사히데와 쥰케이의 상위에 자신의 측근 반 나오마사[塙 直政]를 두었으나 전사. 이후에 비로서 야마토를 지배하게 된다. 본문의 글처럼 미츠히데의 힘이라기 보다는 이전부터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긴 쥰케이 노력의 결과라 봐야 할 듯. [본문으로]
  3. 성 안의 건물 배치는 극비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맡기질 않았다. [본문으로]
  4. 쥰케이에게는 사촌이며, 외조카(모친이 쥰케이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확실하진 않으나 쥰케이와는 이종사촌지간인 듯. [본문으로]
  6. 무사의 신분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강등 됨. [본문으로]
  7. 가문이 끊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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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0 2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쓰이 조케이는 오사카 싸움에서 패전한 뒤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자결했다고 합니다만, 맞습니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1 0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결했다는 말들이 대세인데, 일설으로는 자결을 가장해서는 본가(후쿠즈미(福住), 혹은 후쿠스미(福須美))로 돌아가 살았다는 말도 있더군요.

    근데...신사본론님의 이번 댓글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신사본론님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찾아 보실 수 있으실텐데...
    혹시라도 글이 부정확하다고 하시려고 한다면, 이 글은 쥰케이에 대한 글이어서 그 이후에 대한 글은 그냥 첨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찾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서 저는 일본식 발음과 일본식 한자를 쓰고 있습니다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1 0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쇼우죠우히.. 파란색을 띤 진홍색이란 어떤 색일까해서 눌러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
    그래도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실제로 봐야할 듯합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1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 글을 읽고 나니까, 혹시 조케이의 자결에 혹시 외압이 가해진 것이 아닌가 궁금증이 들어서 그렇게 댓글을 썼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1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쇼우죠우히.. 오호, 이것은 유머감각이 드러나는 링크군요.

    어쩐지 너무 빨리 죽는다 싶었는데.. 하긴 뭐 2살때 가독을 이어서 30여년 했으니 일한 평균치는 다른 다이묘처럼 어느정도 맞은듯?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2 05: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선생님//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 행여라도 이렇게 해두면 다음부터는 저렇게 링크건거 보시는 분들이 생길까봐서..(물론 다른 링크는 저런 것은 없습니다...아마...솔직히 자신이 없군요..^^; 박선생님께서 언급하시기 전까지 저런 링크를 달아 놓았다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까요)
    참고로
    http://ja.wikipedia.org/wiki/%E7%8C%A9%E3%80%85%E7%B7%8B
    에 있는 색이 쇼우죠우히..라고 합니다.
    정확히 보실려면 뽀샵에서 저 수치를 찾아보시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브라우져는 이용하시는 것에 따라 색이 다르다고 하더군요.(색에 관해서는 애플의 '사파리'가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하네요)

    신사본론님//이번에 다신 댓글이 저에게는 너무 함축적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번거러우시더라도 조금 정확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현실에서는 제법 눈치 빠르다는 소리를 듣습니다만, 아무래도 넷상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봅니다.)

    워낙 마이너한 인물이다 보니 제가 가진 정보라고는 넷상에서 얻을 수 밖에 없는 정도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숨어 살았다는 일화와 싸우다 죽었다는 상반되는 말이 있다보니 죽기 싫어했던 것을 주위 부하들이 강제로 배를 가르게 하지는 않았나 싶습니다. 이 이상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메엣찌님//아이 참~ 또 그렇게 말하시면 궁금해서 클릭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 너무도 이른 가독 상속에 대해서...
    [ 元の木阿弥 ]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말로 번역할 때 저는 '도로아미타불'이라고 하는데, 그 말의 어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건 직접 찾아보심을 권합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2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정확한 댓글을 달아서 헷갈리게 한 점 죄송합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2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닙니다 ^^ 담부턴 그렇게 좀 부탁드립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3 2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놀란 건 아니구요 의도하신게 아니었네요^^; 발해지랑님 센스가 넘치시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ㅋ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4 19: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S. 元の木阿弥에 대해 한번 찾아봤습니다. 오호...

    P.S.2. 생각해보니 마나세 도우산은 센고쿠의 화타급인듯(-_-ㅋㅋㅋ)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4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선생님//칭찬이신거죠? 데헤헤~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처럼 등으로 말하며)

    다메엣찌님//태합입지전에서는 플레이어 캐릭터를 가리키시는 존재일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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