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2/e2009121318055597490.htm
에 실린 글을 보면서….

☞ 한문에 링크 걸린 곳은 일본어 위키로 점프합니다.
☞ 노란 칸안에 굵은 글씨는 본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주신구라(忠臣藏).' 연말연시면 으레 일본의 TV에 등장하는 특집극 소재다. 내용은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 47인의 복수극.

적어도 신문처럼 영향력이 있으면 표기법을 따라주었으면 좋겠습니다[각주:1]. 국립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법에 따라 ‘ちゅうしんぐら’이니 ‘주신구라’로 해야 하지요.
풀네임을 따지자면 ‘충신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忠臣 大石 内助]’이니 [충신 쿠라]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듯도 싶으나, 역시 문학 작품의 고유 명사이니 [주신구라]인 편도 좋을 듯.

시골의 다이묘(영주) 아사노가 수도인 에도에서 다른 다이묘인 기라에게 상처를 입혔다.' 아사노가 분개한 이유는 술수에 빠져 격식과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돼 위신을 잃었다고 판단했기 때문. 아사노는 술책을 꾸민 기라의 얼굴에 칼자국을 남겨 무사로서 위신을 세웠으나 '할복' 명령을 받았다. 쇼군 앞에서 칼을 뽑았다는 이유에서다.

1701년에 반슈우[각주:2] 아코우 번[播州 赤穂藩] 5만석의 영주 아사노 타쿠미노카미[浅野 内匠頭][각주:3]가 키라 코우즈케노스케[吉良 上野介]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맞습니다만, 키라는 다이묘우[大名]가 아닙니다.

키라는 막부 직신 즉 하타모토[旗本]로 그의 영지는 다이묘우의 기준인 1만석에 미치지 못합니다. 가문 대대로 미카와[三河] 키라[吉良]라는 곳에 4200석, 그에 더하여 직책이 코우케키모이리[高家肝煎][각주:4]였기에 봉급으로 2000석을 더하여 총 6200석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한마디로 다이묘우가 아니었단 말입죠.

참고로 코우케[高家]란 막부(幕府]의 예식(禮式) 담당으로, 쇼우군[将軍]의 대리인이 되어 쿄우토[京都] 조정에 사자로 파견되거나, 반대로 쿄우토 조정에서 칙사가 왔을 시에는 칙사를 접대하는 향응역의 지휘와 지도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 지휘와 지도 아래서 조정의 칙사들을 접대하는 직책으로 향응역[饗応役]이 있었습니다. 향응역에는 보통 5만석 전후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5]가 임명되었습니다.

지도를 하는 키라 코우즈케노스케[吉良 上野介]와 그 지도를 받는 아코우 번주 아사노 타쿠미노카미[浅野 内匠頭]는 서로 반목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키라가 원했던 아코우 번의 염전기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던가, 당시 코우케가 향응역을 지도하면 사례금을 받는 것이 통례였지만 아사노가 키라에게 준 사례금이 겁나게 적었다거나, 성질 급하고 한번 폭발하면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병을 가진 아사노의 성질이 더러워서라던가…. 어쨌든 먼저 아사노의 뒷따마를 깐 것은 키라라고 합니다.[각주:6]

이야기나 연극의 세계에서는 저 불화로 키라가 아사노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칙사를 맞이하는 방의 병풍을 화려한 것으로 하면 안 된다고 키라가 말했기에 아코우 번은 수묵화로 된 병풍을 준비했더니 나중에는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쪽을 준다거나, 예복으로 다이몬[大紋]이라는 복장을 해야 하는데 키라는 나가카미시모[長裃]를 입고 나오라고 해서 쪽을 준다거나, 준비해야 할 요리도 반대로 알려주고, 타타미[畳]도 교체해야 하는데 알려주지 않았다던가…하는 이야기들이 나와 그럴 때마다 아코우 번사들이 임기응변으로 그런 난관을 헤쳐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만… 실제로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와 아코우 번은 이 일이 일어나기 18년 전인 1682년에 조선통신사 향응역에 임명된 적이 있었으며, 이번 칙사 향응역에 앞서서도 5년 전 칙사 향응역이었던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마누라의 친정 미요시 번[三次藩]의 기록도 조사했으며, 바로 전년 향응역이었던 시바타 번[新発田藩]의 기록도 살폈다 하기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에서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겠지요.

서울경제의 편집위원께서는 쇼우군[将軍] 앞에서 칼을 뽑았다고 하는데, 물론 아닙니다. 칼을 뽑은 장소는 외측 복도로 벽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고 해서 ‘마츠노오오로우카[松の大廊下]’라 불리는 복도에서 입니다. 성안에서 칼을 뽑는 것도 물론 금지입니다.

소나무가 그려진 복도[松の大廊下](모형). 사건은 쇼우군 앞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도에서 일어나죠.

어쨌든, 키라는 이 복도에서 막부 루스이[留守居][각주:7]들을 총괄하는 오오루스이[大留守居] 카지카와 요소베에[梶川 与惣兵衛]와 이야기 하던 중, 아사노 타쿠미노카미가 키라의 등뒤로 다가와 “여태까지의 원한 잊지 않았겠지!”라며 차고 있던 예식용 칼[殿中差]로 한 번 휘두르지만 헛스윙, 그 외치는 소리에 뒤돌아 본 키라의 이마 한가운데에 약 11cm, 그 상처에 놀라 도망가는 키라의 등 오른쪽 견갑골에 18cm 정도의 상처를 남기고, 곁에 있던 카지카와 요소베에에게 제압당합니다.

사건을 일으킨 당시만 해도 무사의 위신 세웠다기 보다는 ‘미친놈 별지랄 다하는구나’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사노가 칼 들고 설치며 자기를 공격하는데도 성안이라는 장소를 분별한 키라는 무죄석방 되었습니다. 싸움을 하면 양쪽이 다 벌을 받던 무가의 관습법 ‘다툼 시 쌍방 처벌[喧嘩両成敗]’에 어긋났기에 약간의 동요가 있었습니다만, 조사 결과, 때와 장소를 분별치 못하고 원한이 있었기에 칼질 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젊은 영주 아사노와 장소 분별한 늙은 키라와의 차이는 그 후의 처분에서도 나타납니다. 아사노는 당일 할복 & 번 폐쇄, 키라는 무죄석방.

아사노가 죽자 로닌(浪人·떠돌이 무사)이 될 처지인 가신 300여명이 모였다. 우두머리 격인 오이시는 '당장 기라를 치자'는 사무라이들을 만류하고 은거에 들어갔다. 적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끝까지 함께 갈 동지를 가려내기 위해서다.

저 300명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군요....This is Akou!?
에도[江戸]에서의 급변이 아코우 성[赤穂城]에 전해지자, 필두 가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内蔵助]는 아코우 영내에 있던 번사(藩士) 200여명을 성안에 모이게 하여 농성을 할 것인지, 개성을 할 것인지를 협의하게 됩니다. 막부가 번 폐쇄를 명했으니 따르는 것이 순리였지만, 아코우 번사들에게는 자신들의 주군이 할복하고 번까지 폐쇄 당했는데도, 키라는 무죄 석방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다툼 시 쌍방 처벌[喧嘩両成敗]’였으니까요. 관습법으로요.

막부 역시 행여라도 아코우 번이 개길까 싶어[각주:8] 수성사[収城使]의 정사로 5만3000석의 타츠노 번[竜野藩]의 번주 와키사카 아와지노카미[脇坂 淡路守], 부사로 2만 3000석의 아시모리 번[足守藩]의 번주 키노시타 히고노카미[木下 肥後守]의 병사 4500여명이 아코우 성을 향하였고, 주변 오카야마 번[岡山藩]은 600명을 번경에 배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히메지[姫路], 톳토리[鳥取], 바다 건너 시코쿠[四国]의 마루가메[丸亀], 토쿠시마[徳島] 번도 만일을 대비하여 경계 병력을 준비시켰습니다.

당연 비둘기파와 매파가 생겼습니다.
비둘기파는 성을 넘기고 막부의 명에 순순히 따르자는 파였고, 매파는 이대로 물러나서는 너무 억울하니 농성하며 키라의 처벌도 상소하고자 했습니다. 5만석 영주의 성으로는 너무도 방어력이 뛰어나고 훌륭한 편이었던 아코우 성[赤穂城]을 내세워 농성하자는 것이었죠.

그리고 어느 시대건 비둘기파는 비겁한 놈들이 되고 매파는 지조와 절개의 사나이가 되는 법.
비둘기파의 수장이던 차석 가로 겸 번 재정담당 오오노 쿠로베에[大野 九郎兵衛]는 매파의 협박과 욕설에 견디지 못하고 밤중에 튀게 됩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손녀를 놓고 도망갈 정도였습죠.

매파도 둘로 나뉘는데 매파 중 강경파는 아시가루 부대장[足軽頭] 하라 소우에몬[原 惣右衛門][각주:9]  등 다수로 그들은 농성하다 죽자고 주장. 매파 중에서도 온건파는 필두 가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를 중심으로 우선 성은 내주더라도 막부에게 할복한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동생 아사노 다이가쿠[浅野 大学]를 새로운 번주로 삼아 가문을 재흥과 동시에 키라에게도 벌을 내려달라는 청원을 하자는 쪽이었죠.

…이야기가 길어지니 어쨌든 성을 내주게 됩니다. 오오이시는 끝까지 농성하자던 강경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후일을 위한 혈판 서약서를 쓰게 하였습니다. 그 혈판 서약서를 쓰며 아사노 가문 재흥을 맹세했던 자들 중 끈이 있는 자들은 그런 끈을 의지하여 흩어지고, 능력 있는 자들은 능력을 살려 제 갈 길들을 갑니다. 능력 없고 빽이 없어 남겨진 쭉정이들은[각주:10], 번주를 죽게 만들고 자기는 살아남은 키라를 당장 죽이자는 파와 막부의 최종판결을 기다리자는 파로 나뉘게 됩니다. 오오이시는 막부에게 청원했던 아사노 다이가쿠의 번주 취임과 아코우 아사노 가문 재흥을 기다립니다만…. 막부의 최종판결은 아사노 다이가쿠의 영구 칩거였습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키라에 대한 복수뿐이었습니다.

오이시가 고른 47명은 '주군과 의리를 저버린 자'라는 수모 속에서 시간을 기다렸다. 군자금을 마련하려 행상에 나서고 가족을 버렸다. 어떤 로닌은 여동생을 원수인 기라에게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 

47이란 숫자는 키라 저택에 쳐들어 간 숫자로 쳐들어 가기 전만 해도 몇 명이 더 있었습니다[각주:11]. 가령 ‘여동생을 원수인 기라에게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는 낭인은 가장 마지막에 탈맹한 모우리 코헤이타[毛利 小平太]를 말하는 것으로, 그가 여동생을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는 것은 후세의 창작입니다[각주:12]. 모우리 코헤이타가 키라의 저택에 직접 들어가 하인으로 일하며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져다 주었기에 후세의 작가가 그런 식으로 창작을 하였나 봅니다.[각주:13]

복수에 성공한 로닌들은 쇼균의 할복 명령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영원히 살아 있다.

이 복수극에 성공한 로우시[浪士]들은 막부에 자수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처분을 두고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요시[徳川 綱吉]는 고민하게 됩니다.
시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살려주자는 막부의 평정소[각주:14], 그러나 평정소의 보고를 받은 노중[老中][각주:15]들의 결론은 조직폭력배같은 놈들이니[각주:16] 참수를 하자고 주장[각주:17], 이 상반된 의견에 곤혹해진 츠나요시의 최측근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 吉保]는 자신의 브레인 오규우 소라이[荻生 徂徠]에게 의견을 묻자, 그들의 명분을 인정해주는 명예로운 할복[각주:18].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는 오규우 소라이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기고 쇼우군 츠나요시에게 여쭙니다.
 츠나요시는 그럼에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다음 해 2월 1일 신년 인사를 하러 온 우에노[上野] 칸에이 사[寛永寺]의 코우벤 법친왕[公弁法親王]에게 의견을 묻자, 그들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며 충신인 그들은 목숨을 살려주더라도 다른 주군을 모시지 못할 것. 그러니 지금 그들에게 명예 있는 죽음을 언도하면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다 – 고 츠나요시에게 말하여 할복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법친왕의 말대로 그들은 이후 충성의 대명사로 일본인에게 영원히 남습죠. 또한 연말연시가 되면 어느 방송국 중 하나는 반드시 저 츄우신쿠라[忠臣蔵]에 관한 드라마를 방영하지요.

호전적 일본과 집요하게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일본기업에도 '주신구라'라는 공통의 인자가 담겨 있다.

이 말은 사족인 것 같습니다. 저도 사족을 달아보자면, 전투국가 한국은 집요하게 기술 개발과 시장 개척을 안 한답니까? 그럼 우리 기업에도 ‘주신구라’의 인자가 있나요?

  1. 저처럼 표기법을 전혀 따르지 않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전 듣보잡 블로거고 신문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본문으로]
  2. 하리마[播磨]를 말합니다. [본문으로]
  3.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가신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현손. 즉 손자의 손자. [본문으로]
  4. 코우케를 통솔하는 직책 [본문으로]
  5.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6. 키라 저택에 침입한 47명 중 한 명인 호리베 야헤에[堀部 弥兵衛]가 쓴 '堀部弥兵衛金丸私記'에는, "칙사가 머무는 저택에서 키라 코우즈케노스케님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욕을 하셨지만, 맡은 임무가 막중한 것을 알기에 아사노 타쿠미노카미님은 계속 참으셨다" [본문으로]
  7. 에도성 안채[大奥]를 감찰, 성 출입증서 관리, 쇼우군이 에도성에서 외출했을 때 에도성 수비의 임무를 가진 직책. [본문으로]
  8. 사실 이런 사태에 병력 파견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아코우 번도 7년전인 1694년 빗츄우[備中] 마츠야마 번[松山藩] 미즈타니 가문[水谷家]에 후계가 끊겨 번 폐쇄가 되었을 때 3500명을 이끌고 가서 성을 접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9. 여담으로 2000년도 작 영화 '기묘한 이야기 – 사무라이의 휴대폰편'에서 자주 오오이시에게 보고하며 귀찮게 하던 동글동글한 아저씨가 바로 하라 소우에몬입니다. [본문으로]
  10. 큰일을 벌이고 명성을 높여 다른 가문에 취직하고자 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낭인들은 4가문에 각각 나뉘어 유폐 당했는데, 그 중 쿠마모토 호소카와 번[熊本細川藩]의 번주 호소카와 츠나토시[細川 綱利]는, 거사를 벌인 충성이 기특하다며 나중에 잘 되면 자기네 번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말을 하여, 낭인들을 희망에 부풀게 만듭니다. [본문으로]
  11. 최종적으로 맹약서를 서명한 사람은 1702년 음력 7월~8월 사이에 55명이었고, 그 수가 점점 줄어 사건이 벌어진 1702년 음력 12월 14일에는 8명이 빠진 47명이 되지요. [본문으로]
  12. 쿠니에다 칸지[邦枝 完二]의 여첩자[女間者]. [본문으로]
  13. 참고로 모우리 코헤이타는 거사가 일어나기 3일전인 12월 11일에 탈맹합니다. 이 모우리 코헤이타가 빠지면 그렇잖아도 소심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가 마음을 돌릴까 두려워, 호리베 야스베에[堀部 安兵衛]는 비밀로 하고 정문 침입조에 배치한 계획서를 오오이시에게 제출할 정도였습니다. 오오이시도 그가 있는 줄 알고 나중에 모우리 코헤이타를 포함시켜 보고할 정도였습죠. [본문으로]
  14. 막부의 최고사법기관. 막부의 최고 직책들이 모여 회의. 단 이때 노중(老中)는 없었음. [본문으로]
  15. 막부의 수상들 [본문으로]
  16. 특히 밤 중에 무리지어 활까지 쏘며 공격한 것은 불한당이라며. [본문으로]
  17. 당시 무사에게 참수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18. 할복은 무사다운 죽음이었다 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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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2.24 23: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신문사에 직접 츳코미 넣을 수 있는 메일주소같은거 없던가요. 이런 글은 역시 그쪽에 직접 날려줘야 할듯한데@.@

    역시 쭉정이들보다 깊이있는 블로거들이 많이 있는 세상이니 기사란것도 함부로 쓸게 못되지요. 그런고로 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에헷;;)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4 2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소심하고 소중하기에 그런 일은 못합니다. 듣보잡 블로거의 특권입죠. 신문 기사를 까는 것은.

      딴 것은 제가 무지한지라 잘 모르겠지만, 일본 역사나 사회에 관한 기사를 볼 때면 - 아 정말 기자 아무나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죠.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참고로 저는 지금 야근하고 있습죠. 커허허헝~ T.T

  2. shiroyume 2009.12.25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된 기사를 읽어봤는데 말입니다. ...........저 기사 도대체 왜 쓴건지? 그럼 만약에 일본 기업의 경우 자기들 기술 빼내가면 조폭이라도 시켜서 스파이 파견한 회사 뒤집어 엎겠다는건지 아니면 마감에 쫓겨 아무거나 쓴건가?정말 안쓰니 못한 기사.

    그런데 말입니다. 저거 바쿠후가 당시에 오이시의 음모를 충분히 알았음에도 모른척하고 일저지르게 방조했다는 가설도 있던데 사실입니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5 1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지막 글만 없었어도 뭐 그냥저냥 이었을 터인데 말이죠.

      막부 유도설은 들어본 적이야 있습죠.
      정황증거로 나오는 것이...

      키라의 저택이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에게 칼침 맞은 뒤 옮겨졌기에, 막부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알고 키라의 저택을 에도 시내에서 외곽으로 옮겨, 사건 일으킬 거면 밖에서 하라고 막부가 유도 했다는 말도 있고,

      아코우 낭인들이 수많은 밀회를 가졌지만 한 번도 방해 받은 적이 없으며,

      오오이시 쿠라노스케가 아코우에 있는 번주의 묘가 있는 절인 카가쿠 사[花岳寺]의 주지스님에게 보낸 편지에, "막부의 노중들은 우리들이 모이는 것을 아는 듯 한데, 아무 말도 없다. 우리들이 잘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는 듯 하다"

      ...는 식의 정황증거가 있습니다만,

      첫째 저택의 이사는, 칼 맞은 키라는 소동을 일으킨 책임을 지고(지휘, 지도 담당하는 코우케[高家]였으니까요) 코우케키모이리[高家肝煎]를 사퇴하게 됩니다. 사퇴하게 되니, 에도 성에 자주 갈 필요도 없고, 그러니 시내에 있던 집을 막부에 반환하고 시외로 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당시는 그렇게 직책이 없어지면 시내에 있던 집을 반상하고 외각으로 빠져주는 것이 예의였다고 합니다.

      둘째... 걸린 적이 없다고 하는데...이건 아코우 낭인들이 워낙 조심해서 그렇다고 보면 될 것이고,

      세째... 오오이시 쿠라노스케의 말은 워낙 소심한 인물이다 보니, 너무도 일이 잘 진행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저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막부가 유도했다면 그 후의 처분도 일사천리로 이어졌어야 했겠지만, 3개월 가까이 처분에 고심한 것을 보면, 막부가 유도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줄요약: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 朴先生 2010.01.05 0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야베 미유키의 '흔들리는 바위'에서는 몇몇 기록들을 들어 아사노가 병으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고 가신들도 이미 알고있는 상태였으며 굳이 복수는 하고싶지 않았지만 사회분위기가 그렇게 몰아가서(아시다시피 군대에서도 몸이 힘들지 않으면 똥군기만 생기는 것 마냥 전쟁이 없는 겐로쿠 시대에도 무사도, 봉건질서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줬음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듯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거사를 행했다고 추리하고 있더군요
    막부의 방조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
    뭐 기록들을 근거로 추리했다지만 추리는 추리일 뿐이니 그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링크된 기사는 어떻게 해서 저런 결론이 내려질 수 있는건지 어이가 없어지네요. 정말 안 쓰니만 못한 기사란 말에 동감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5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경성 흉부 통증이 있었나 보더군요.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츄우신쿠라를 주제로 한 1999년도 NHK대하드라마 '원록료란(元禄繚乱)'을 전후로 쏟아져 나온 관련 책들은 전부 그런 식으로 몰아가더군요. 사회가 나뻤어요!! 사회가 우릴 그렇게 만들었어요.. 식으로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막부나 세간의 평가가 키라에 관해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키라 살해 후에 아코우[赤穂] 번사들을 너무 띄어 주는 것 같더군요. 거기에 짜맞추어 막부도 실은 키라에게 벌을 주려했다는 식으로 몰고 가기에 저는 막부 방조설을 그다지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어쨌든 일본을 까야하다 보니 저렇게 억지 전개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4. 朴先生 2010.01.05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교 윤리가 자리잡은 그 시대에 忠이란 가치를 지켜낸 것은 장한 일이나
    막부의 결정에 불복한 것은 막부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기에
    에도 막부는 처벌에 있어서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3개월 가까이 처분에 고심한 점을 봤을 때 저도 방조한 것은 아니란 점에 동의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가 출세하는데 있어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었다는 것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나가마사의 부인 오야야[おやや]가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ねね=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와 배다른 자매[각주:1]였기에 나가마사와 히데요시는 동서지간이 된다. 친족이 적었던 히데요시가 나가마사를 중용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군사에 관해서도 담당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외교나 민정가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민정가로서의 나가마사를 나타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후에 이 아사노 나가마사의 후손으로 겐로쿠[元
1688~1703] 시대 소위 '아코우 사건([赤事件][각주:2]'을 일으켜 당시 세상에 충격을 준 하리마[播磨] 아코우[赤穂] 5만석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나가노리[匠頭 長矩[각주:3]]가 있는데, 이 사건 최대의 주역이 되는 가로(家老)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内蔵[각주:4]]가 영내(領內) 순시를 위해 아보시[網干]라는 곳에 들렸을 때이다. 이 마을 중심가의 한 곳만 공터가 되어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궁금히 여겨 마을사람에게 물어보자,
 "이곳은 아사노 단죠우[
=나가마사]님이 히메지[路]에 계실 적에 그분의 저택이 있던 자리옵니다.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기에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곳은 풀 한 포기 손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고 답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휘하가 된 나가마사는 히데요시가 1573년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옛 영토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12만석을 하사 받자 히데요시에게서 120석을 받았고, 다음 해인 1574년 히데요시가 거성을 나가하마 성[長浜城]으로 옮긴 후 노부나가와 함께 전쟁터를 전전하였기에 히데요시가 부재인 동안 이 성을 다스릴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거기에 하리마[播磨], 츄우고쿠[国] 공략에서는 히데요시와 행동을 함께하며 전선부대장으로서 용전분투하였고 또한 히데요시의 거성 히메지 성[路城]의 보충 공사를 담당하거나 하였다.

 1586년은 아사노 가문의 장래를 보았을 때 기념할만한 해가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접촉하여 절친해지는 계기가 되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화해(和解)를 꾀하며 아비 다른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각주:5]를 이에야스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교섭성립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녀 이 1586년의 결혼을 성립시켰는데, 이때 성실히 임하는 모습을 이에야스에게도 인정받아 나가마사는 한층 더 명성을 높이게 된다.

 임진왜란 때 나가마사는 본진에서 근무하며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이때 세운 망루()가 후에 카라츠 성[唐津城]으로 옮겨졌는데 나가마사의 관도명(官途名)인 단죠우쇼우히츠[正少弼]의 이름을 따 단죠우망루[正櫓]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나고야에 있을 때 나가마사는 히데요시를 화나게 하여 자칫하면 죽을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서전의 파죽지세에 콧대가 높아진 히데요시는 작전회의 자리에서,

 "일본은 이에야스에게 맡기고선 나는 30만 군세를 이끌고 조선에 건너가 곧바로 명의 수도에 진격하여 황제가 될 생각이다"
 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야스가 그런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벅차다고 하자,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나가마사가 이에야스에게,
 "지금 칸파쿠 전하의 말씀은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필시 뭔가에 씌어 미치신 것 같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히데요시의 얼굴이 급변했다.
 "네 이놈 나가마사! 내 직접 네놈을 죽이겠다!"
 고 외치며 손에 칼을 쥐고 일어섰다. 동석해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
前田 利家]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鄕]가 열심히 말렸다. 그래도 나가마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절 죽여서 국가가 안정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근년 조선과의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은 궁핍해 있습니다. 거기에 전하가 바다를 건너시면 국내 치안은 흔들릴 것입니다. 바다 건너는 것도 중지하시고 파견군도 전부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히데요시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나가마사는 숙소에서 벌을 기다리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히고[
肥後]에서 반란[각주:6]이 일어나 나가마사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죄를 용서받았다. 그 후 진압되어 어수선한 히고[肥後]를 진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각주:7]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네 명의 대로(大老)[각주:8]와 다섯 행정관(五奉行)[각주:9]이 이에야스의 전횡에 분노하여 이에야스 타도를 꾀하였지만, 토시이에가 죽은 뒤 나가마사는 다른 행정관들과는 다른 행동을 취하며 이에야스와 기맥을 통하였다. 또한 1599년 무공파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제거하고자 했을 때도 나가마사는 아들 요시나가[幸長]를 무공파에 참가시켰다. 이제 나가사마는 확실히 이에야스 편에 섰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 즈음의 정치정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갑자기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인 카이[甲斐]로 내려갔다. 자세한 사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설에 따르면 9월 9일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頼]를 방문하고자 하였을 때, 행정관 중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등이,
 "마에다 토시나가[
前田 利長][각주:10]에게 모반의 낌새가 있습니다. 아사노 나가마사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히지카타 카츠히사[土方 勝久],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冶長]를 부추겨 암살을 꾀하려 하고 있습니다"
 고 이에야스에게 밀고하여 그 때문에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에 칩거를 명령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나가모리들의 참언을 믿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가마사는 카이[
甲斐]로 내려가자마자 에도[]에 가서 이에야스의 후계자 히데타다[秀忠]를 만나 그에게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가마사는 얼마 지나지 않은 1600년 1월에 셋째 아들 나가시게[長重]를 히데타다에게 출사시켰으며, 세키가하라 결전[原の戦い] 결전에서 나가마사는 히데타다를 따라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올라갔고 적남인 요시나가는 이에야스의 선봉으로 출진한 것이다.

 말년의 나가마사는 이에야스의 바둑상대로 자주 초대받았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천하의 정치정세에 대해 나가마사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나가마사가 죽자 이에야스도 바둑을 관두었다고 한다.

 아사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쟁 후 키이[紀伊] 37만4000석이 요시나가에게 주어졌고, 나가아키라[長晟]의 대[각주:11]가 되어 아키[安芸] 42만6000석에 봉해져 이후 아사노 가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이어진다.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1544년생. 야스이 시게츠구[
安井 継]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사노 나가카츠[浅野 長勝]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2]. 첫 이름은 나가요시[長吉]. 1587년 와카사[狭] 오바마[小浜] 성주.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에 건너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등과 함께 진주성 공격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카이[甲斐] 후츄우[府中] 22만5천석.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에는 적자 요시나가[幸長]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 1611년 4월 7일 죽었다. 68세.

  1. 키타노만도코로 즉 네네는 양녀(나가마사의 양부 아사노 나가카츠의 부인의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 성에서 바쿠후 의전 담당인 코우케[高家] 필두 키라 코우즈노스케[吉良 上野介]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당시는 싸움 당사자간에 누구에게 죄가 있건 양쪽 다 처벌을 받았으나[喧嘩両成敗], 토자마[外様]의 약소번(5만석)의 다이묘우[大名]인 아사노 나가노리는 할복 & 번 폐쇄라는 엄벌이 처해졌지만 막부의 요직에 있는 키라에게는 아무 벌도 없었다. 그에 대한 복수로 번 폐쇄로 직장을 잃은 아코우 낭인들의 키라를 살해한 사건. 보통 '츄우신구라[忠臣蔵]'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3. 나가마사의 현손(玄孫). 즉 나가마사의 손자인 아코우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나오[浅野 長直]의 손자 [본문으로]
  4.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코우 번 필두 가로로 아코우 사건의 주모자였다. 복수극에 성공한 이후 충성스런 신하 & 진정한 무사의 대명사가 된다. [본문으로]
  5.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선생이 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스루가고젠[駿河御前]. [본문으로]
  6.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가신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 国兼]가 일으킨 우메키타 반란[梅北一揆]를 말함. [본문으로]
  7.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18세기 중반의 유학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쓴 상산기담(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책에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를 제외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9.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10.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아들. [본문으로]
  11.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건너왔던 형 요시나가에게는 딸밖에 없어서 동생인 나가아키라가 후계를 이었다. [본문으로]
  12. 나가마사의 모친이 아사노 나가카츠의 누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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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05.23 1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히데요리 정권은 과연 아사노 나가마사, 기타노만도코로 등과 같은 히데요시의 가깝고 먼 친척들에게 '비정통적'인 정권이었을까. 히데요시에게 진절 머리가 난 걸까? 혹은 대세를 따른걸까? 아니면 히데요리가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을 정군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압적 성격이긴 하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가의 수호자로 비춰진걸까. 아님 히데요리는 천하통치의 능력이 없으니 사슴(천하의 패권)은 이에야스에게 안겨줘야 된다고 생각했을까. 히데요시의 친척들이 자의반 혹은 타의반 거의 히데요리를 떠나간 걸 보면 히데요시도 어지간히 사람관리는 안한 듯 합니다. 이래서 어찌보면 전통적인 가신과 귀족적 태생이 중요한걸지도? 저야 꼬시지만 말입니다 케케. 잘 읽고 갑니다.

  2. 朴先生 2009.05.26 0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가 있는 듯...
    '어수순한 히고를 진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된다' -> '어수선한 히고를'이 아닌가요?

  3. 나라 2009.05.28 0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 글을 읽다보면 가끔 바치다를 받히다 라고 쓰시는 경우가 있더군요. 죄송하지만 잘못 아시는 것 같아 적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8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제 고질병이옵죠. T.T

      그런 것을 발견하면 꼭 좀 지적해 주셨으면 하고...지적해 주시면 좋지 않냐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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