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쿠(四) 전역을 정복한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이지만 시작은 토사(土佐) 오코우(岡豊) 3000관의 호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군소호족이 한때는 츄우고쿠(中)의 모우리(毛利),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島津)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일본 삼대세력 중 하나로 커졌는데 그 원동력이 된 것은 토사(土佐)의 독특한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 불리는 민병조직에 있었다.

 [이치료우구소쿠]는 평소엔 농업에 종사하는 지역 무사(士)의 무리들이다. 그들은 밭이나 논으로 나갈 때 창 끄트머리에 짚신이나 갑옷, 식량을 매달고 나가 그것을 한 켠에 놓았다가 전투 참가의 군령을 받으면 낫이나 괭이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서 창을 메고 모여들었다. 즉 갑옷(具足) 한 벌(一領), 말 한 마리로 집합했기에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6000~9000평의 토지를 소유한 묘우슈(名主 – 부유한 농민) 계급으로 몇 명 정도 부하를 데리고 있었다. 이것이 우수한 쵸우소카베 군단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쵸우소카베 씨의 선조는 시나노(信濃)의 하타 씨(秦氏)로 백제에서 온 도래인(渡[각주:1])이었다. 처음엔 '소카베(宗我部)'라고 하였지만 토사에 또 다른 소카베 씨가 있었기에 앞에 '쵸우(長)'를 붙였다고 한다.[각주:2]
처음엔 시코쿠 탄다이(
探題)인 '호소카와 씨(細川氏)'의 중신이었다. 그 호소카와 씨가 미요시(三好) 일족에게 멸망 당하자 차츰 자력으로 세력을 키웠지만, 1508년 당주 카네츠구(兼序)가 모토야마 씨(本山氏)등에게 공격받아 살해당하자 아직 꼬꼬마였던 센유우마루(千雄丸[각주:3])는 토사(土佐)의 코쿠시([각주:4]) 이치죠우 후사이에( 房家)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센유우마루'가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이다. 쿠니치카는 후사이에의 보호 속에 오코우 성(岡豊城)으로 돌아오자 옛 영지(領地)를 회복하여 토사 제패를 목표로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야기를 바꾸어 보자. 어렸을 적 쵸우소카베 모토치카의 외모를 전해주는 사료에 따르면, [키가 크고 흰 피부에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가신들은 '어린 아씨(若子)'라 부르며 뒤따마를 깠다]고 한다. 후년 시코쿠의 패왕이라는 이미지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내성적인 청년이 데뷔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모토치카의 데뷔전은 1560년 5월 22살 때였다.
 쿠니치카 부친(즉 모토치카의 할아버지)의 원수인 모토야마 시게토키(
本山 茂辰)와의 전투에서 모토야마의 거성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점령한 후 도망친 시게토키를 우라토 성(), 아사쿠라 성(朝倉城)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가 한창 행해지던 도중 부친 쿠니치카가 급사하는 바람[각주:5]에 가독을 이은 22살 모토치카의 양 어깨에 쵸우소카베 가문의 운명을 달리게 된 것이다. 평소 가신에게 경시 받던 선이 가는 젊은이가 이 순간부터 당당한 무장으로 변신을 이루게 된다.

 쿠니치카의 죽음이 알려지자 역시 모토야마 세력은 역습으로 나섰다. 2천여의 대군이었다. 쵸우소카베는 500여[각주:6]. 중과부적으로 무너지려는 찰나에 모토치카가 용감히 나서,
 "물러서지 마라!"
 라며 창을 직접 휘둘러 곧바로 적 두 명을 죽였다. 그 모습에 쵸우소카베의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해서 기세에 탄 쵸우소카베는 단번에 모토야마의 군사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전투에서의 모습으로 모토치카의 평가가 180도 변한다.
 [지모용(
智謀勇) 겸비]
 라며 가신들의 신뢰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 후 상승기류를 탄 모토치카는 각지를 전전하여 1570년 즈음에는 이치죠우 가문(
)의 하타(幡多), 타카오카(高岡) 2 군()을 제외한 토사 전역을 손에 넣었다.

 이치죠우 가문은 선조에 칸파쿠() 노리후사([각주:7])가 있을 정도인 토사 제일의 명문가였다. 더군다나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는 이치죠우 가문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쵸우소카베 가문에게 있어 큰 은인인 가문이었다. 모토치카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였지만 그러던 중 평소 소행에 문제가 많던 당주 카네사다(兼定)가 가중에서 가장 인망 높던 가로(家老)[각주:8]를 직접 베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토치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이치죠우 가문의 가신들을 소집하여 카네사다를 은거시키고 적자에게 당주자리를 물려주도록 꾀하였다. 라기보다 그 자리에 드센 가신들을 대기시켜두었기에 오히려 쿠데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토치카는 이렇게 카네사다를 이요(伊予)로 추방하고 카네사다의 적자 킷포우시(吉房子)[각주:9]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이치죠우 가문의 당주로 앉혔다. 이로써 토사 전역은 모토치카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각주:10]

 다음 목표는 시코쿠() 전역의 정복이었다. 이 즈음 모토치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교류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가신 사이토우 토시미츠( 利三)의 딸이 모토치카의 부인이었던 것이다.[각주:11]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 우호관계도 무너진다. 모토치카가 아와(
阿波)를 시작으로 차츰 지배영역을 넓혀가자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에게 있어 방해물이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라는 이대 거물이 죽어 후방이 안정되자 곧이어 노부나가는 시코쿠 정벌을 진행시키려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원정군이 배를 타고 떠나려 하는 때[각주:12]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각주:13]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모토치카는 지금이야말로 시코쿠 제패의 호기라 보고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아와를 침공한 사누키()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각주:14])를 공격하여 쇼우즈이 성(勝瑞城)을 함락하고 이와쿠라 성(岩倉城)을 손에 넣어 아와를 통일한 후 사누키의 소고우 성(十河城)까지 하락하였다. 도망칠 곳을 잃은 소고우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로 도망쳐 원조를 청했다.

 당시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쳐 주군 노부나가의 원한을 갚았고 시즈가타케 전쟁(い)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쳐 천하인(天下人)으로 향하는 길을 파죽지세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과 싸우고 있던 중이라 소고우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 틈에 모토츠카는 시코쿠 전역을 자신의 세력하에 둔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군이 출진한 것은 1585년 6월이었다. 이에야스, 노부카츠와 평화협정을 맺고 키이(紀伊)를 평정한 지금 그 여력을 몰아 시코쿠로 달려든 것이다. 총 12만 3천이라는 대군이었다.
 아무리 모토치카라도 이런 대군에는 개길 수 없어 인질로 셋째 아들인 치카타다(
親忠)를 바치고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 아와(阿波), 사누키(), 이요(伊予)의 반환을 명령 받았지만 토사(土佐)만은 안도받았다. 히데요시는 반항했던 모토치카에게 관대했다. 모토치카가 본령 안도의 인사를 올리러 상경하자 큰 환대와 함께 비젠나가미츠(備前長光)의 이름난 칼, 황금 100매, 말 한 마리, 화려한 장식의 안장과 일본식 등자()를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 다음 해.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종군하여 붕고(豊後) 방면의 적을 – 예전에는 적이었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와 함께 공격하였다. 시코쿠의 군세는 이요의 이마바리(今治)를 출발하여 붕고에 상륙하자마자 시마즈(島津)의 성들을 계속해서 낙성시켜 나가다가 헤츠키가와 강(戸次川)에서 시마즈 군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파견지휘관(
軍目付)인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는 막무가내였다. 곧바로 결전을 벌이자고 나댔다. 그러나 모토치카와 나가야스는 신중했다. 시마즈가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치카는 주력군을 기다린 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지만 센고쿠 히사히데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2월 12일 결전을 벌인다. 시마즈 군은 일부러 지는 척하고 퇴각하였다. 센고쿠 히사히데는 여기에 낚였다. 참담한 패배였다. 소고우 나가야스는 전사하였으며, 모토치카의 적자 노부치카(信親)도 죽었다.

 노부치카는 당시 22살로 한번에 여덟 명을 상대하여 더구나 그들을 이길 정도로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모토치카는 이 노부치카의 죽음에 너무 낙담한 나머지 자신도 적진에 돌격하여 죽으려 하였지만 말리는 가신들과 애마 '나이키구로()'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쵸우소카베 가문은 7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 전사자의 위패는 지금도 코우치 시(
高知市)의 하다 신사(秦神社)에 모셔져 있다.

 이 패전이 모토치카의 말년을 꼬이게 만들어 둘째 치카카즈(親和), 셋째 치카타다(親忠)를 제쳐두고 넷째 모리치카(盛親)를 세자로 정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가신과 친족들까지 죽이고 병으로 누워있는 둘째 치카카즈의 병간호도 하지 못하게 한 채 유폐시켜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후에 모리치카는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에 섰기에 영지(領地)를 몰수당하였고 낭인이 된 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이 끝난 후에 잡혀 죽었다. 명문 쵸우소카베 가문의 멸망이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
1538년생. 1560년에 가독을 이어 토사(
土佐)의 여러 호족들을 거느리고 1583년에 시코쿠() 전역을 평정하지만 히데요시(秀吉)의 시코쿠 정벌군에 항복하여 토사만 허락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였고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 1599년 5월 19일 죽었다. 60세.

  1. (일본으로 바다) 건너(渡) 온(来) 사람(人)이란 뜻. 보통 중국계나 한국계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나가오카 군('長'岡郡)에 있었기에 쵸우(長)를 붙였으며, 또 다른 소카베 씨는 카미 군('香'美郡)에 있었기에 코우소카베 씨('香'宗我部氏)가 되었다. 후에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치카야스(親泰)를 양자로 들여보내 가문을 탈취. 치카야스는 형인 모토치카의 시코쿠 제패를 도왔다. [본문으로]
  3. '치오우마루'라고도 읽는 듯 하다. [본문으로]
  4. 조정의 관직. 그 지역(国)의 행정과 사법 등 모든 것을 관장. 보통 '***노카미'라 불리는 직책. [본문으로]
  5. 실은 전투가 끝난 후에 사망. 전투는 1560년 5월 28일. 쿠니치카의 사망은 6월 15일. [본문으로]
  6. 1000이라고도 2500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닌의 난(應仁の亂) 때 토사로 피신하였다. [본문으로]
  8. 도이 소우산(土居 宗珊)을 말한다. 사족으로 신장의 야망-혁신 PK의 튜더리얼에서 나오는 그분이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만치요(万千代)'라고 한다.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 [본문으로]
  10. 사족으로 [신장공기]나 [타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 따르면 수도권 근방(上方)에서 보는 모토치카의 인식은 이치죠우 정권(大津御所 - 킷포우시 즉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가 있던 곳 '오오츠'를 따서)의 보좌역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실제로 모토치카가 노부나가와 연락을 할 때는 자신이 부하가 아닌 이치죠우 가문의 부하 '카쿠미 이나바노카미(加久見 因幡守)'를 통해서 였을 정도였다. [본문으로]
  11. 토시미츠의 형이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친위군사조직인 호우코우슈우(奉公衆) 멤버인 이시가이 미츠마사(石谷 光政)씨의 사위로 들어갔고(이시가이 요리토키(石谷 頼辰)), 그 이시가이 미츠마사에게 또 딸이 하나 있어 그녀가 모토치카의 부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토시미츠와 피가 이어져 있지는 않다. [본문으로]
  12. 예정은 6월 3일. [본문으로]
  13. 6월 2일. [본문으로]
  14. 이 즈음은 미요시 나가야스로 불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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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7.18 0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모토치카가 2년만 더 살았다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들더군요. 아니, 1년 반만 더 살았더라도 어떻게든 세키가하라 전후처리때 능숙히 토사 정도는 안도받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아.. 그렇다면 료마는 없게 되는거려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동군쪽으로 서긴 했을 것 같긴 합니다.

      그쵸 아마 료우마라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은 나오지 않았겠죠. 토사 향사의 차별도 없었을 테니 돈 많은 집 도련님으로 탱자탱자 지냈을 것이고 또한 인물이기에 토사 계급사회의 시스템을 극복하려 했던 타케치 한페이타(武市 半平太)나, 그 타케치를 통해서 만난 료우마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지는 삿쵸우 동맹의 고안자 중 한 명인 나카오카 신타로우(長岡 慎太郎)도 만나지 못했을테니요.

  2. 나라 2009.07.18 1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사람 인생도 정말...ㅠ_ㅠ 때를 잘못 타고 나면 망한다는 전형 같습니다그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욕심이 과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노부나가가 힘들 때 인심 넉넉한 말(시코쿠 땅 중 니가 점령한 거는 다 니꺼) 좀 했다고 그걸 내세워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는데도(노부나가는 모우리 가문 공략 시 시코쿠 방면에서 압박을 줄 카드로 사용할 생각을 처음에 가졌다고 하더군요) 그런 시세도 못 읽었고, 노부나가가 제시한 토사 1국과 아와 반국의 카드를 지 손으로 내쳐 한때 멸문의 위기까지 빠지게 됩죠(노부나가 삼남 노부타카의 시코쿠 정벌). 운 좋게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숨을 돌리지만 또 히데요시에게 개기다가 토사 일국으로 삭감.

      때를 잘못 타고 난 것은 노부나가랑 동시대에 태어난 모든 군웅들에게 적용될 것 같습니다. 몇 백년 이어져 오던 전란의 시대(개인적으로 무로마치 바쿠후도 평온한 시기가 적었던 듯 해서요)를 불과 십 수년 만에 통일정권 수립 일보 직전까지 가져갔으니까요.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7.18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치카가 저 때 죽었군요.
    위키를 찾아 읽어보니 모토치카 아들들은 죄다 원치않게 죽은듯...(줄을 잘못 선것도 있겠지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케다 가문의 예(카츠요리勝頼)에서 볼 수 있듯이 타가문 후계자로 보낸 이를 다시 종가집에서 받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 같더군요.

      모토치카도 타케다 신겐과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호족의 연합정권이라는 불안한 내부구조와 더불어 후계자로 키워왔던 장남이 없어짐으로 인해서 급히 자신의 권력을 이을 후계자를 만들려다 보니 무리가 많이 따랐던 듯 합니다.

  4. 나라 2009.07.19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전국시대는 군웅할거지만 고만고만한 애들이 여기저기 부딪힌 기분... 입니다.
    천하인 3인을 제외하면 그닥 뛰어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5: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그런가요? ^^

      뛰어나다 아니다는 것은 동시대 동지역에 있던 사람들끼리의 비교우위문제 인지라...
      가령 노부나가가 오우슈우 끄트머리에 있었음 우리가 아는 노부나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노부나가도 좇병진이었겠고 그 노부나가가 끌어 올려준 히데요시도 병진이 채였을 것이고 그 노부나가를 평생 따라다니고 그가 죽자 히데요시의 안색 살피다 히데요시 삽질 & 죽음 덕분에 천하인이 된 이에야스도 별 볼일 없었겠죠.

      뭐...천지인...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천시와 지리와 인사를 다 잡아야만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요.

  5. 맹꽁이서당 2009.07.19 22: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서쪽에 치우친 지리적 요건이 오히려 이점이 되었다던데, 이 동네는 또 경우가 달랐군요. 하긴 동서남북 다 트인 광활한 대륙과 길쭉한 섬나라가 같을 리가 없겠지만요.

    센고쿠 히데히사 녀석 삽질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는 점이 안타깝네요. 과연 만화에서는 그 장면이 어떻게 진행 될지... (요새 센고쿠 천정기 원서라도 사 볼까 생각중인데, 높은 환율이 발목을 잡습니다 --a)

    아참, 지난번에 가르쳐주신 [규슈 영지 랭킹]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생각보다 규슈 석고가 많았더군요(TOP 5가 235만석이니 전체는 300만 쯤 되려나?) 혹시 일본 다른 지역, 혹은 전역을 대상으로 한 순위는 없을까요? 참고할만한 사이트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쿄우토만 제압하면 일본을 지배할 수 있는 빠르고 편한 길이 있었는지라... 오와리(尾張)라는 가장 적당한 위치에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사보고 싶은데...환율이 역시...서울역 북오프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죠.
      참~ 원서 가능하시면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 강추입니다!

      그렇잖아도 자료 정리도 할 겸 구글 문서도구 스프레드쉬트로 만드려고 했었는데 말씀하시길레...
      '아이 참~ 생각났을 때 만들어 두었음 이럴 때 떡 하니 내놓으면 참 멋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드네요... --;

      어디선가 석고 정리해 둔 사이트를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이버 낭풍까페가서 겨우 찾았습니다.

      http://homepage3.nifty.com/ksatake/fkunu1.html

      이곳 함 가보시길.

  6. ckyup 2009.07.20 22: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하나의 재미있는글 감사합니다. 몰랐던 것을 또 알게되었네요.

    지금 막 대망 한번 끝네고, 두번째 연달아 읽고 있는데요, 역시 방대한 분량이라서 그런지 기억이 새롭네요.... 오늘 아침에 신겐이 피리소리 듣다가 총맞고 가버렸습니다.

    근데 읽으면서 궁금한점은, 소설 앞부분에 나오는 인물들의 나중 얘기가 전혀나오지 않는데요, 예를들어 이에야스 큰딸이라던지, 이에야스 큰며느리인 노부나가 딸이라던지...., 그리고 뭐 다른 중신들의 세키카하라 이후의 얘기라던지... 등등 (특히 소설초반의 재미를 톡톡히 해주는 헤이하치로와 사쿠자에몬).

    암튼 좋은 정보 감사드리고요, 연재물 번역, 뼈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점 알아두시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1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똥싸개 이에야스 사건 다음인 피리 소리가 들리는 노다성...부근이군요. 총 맞아 온 몸에 마비가 와 침 질질 흘리면서도 (제 딴에는 정신으로) 근습들을 질타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에...그러니까 제 블로그에 이에야스의 큰 딸이나 노부나가 딸, 혹은 이에야스 부하들의 말년...이 안 나온다는 말씀? 아니면 소설 상에서?

      헉~ 혀...협박이 것입니까? 직접 제 앞에서 협박하신다면 무릎꿇고 용서를 빌겠습니다만, 온라인 상에서 전 그래도 강직한 편에 속합니다. 그런 위협으로는 fss를 그리는 나가노 마모루, GM이나 삼국전투기를 그리시는 최훈 님의 연재속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하는 절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7.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쪽도 줄 잘못 섰다가 가문이 박살났군요.

    아, 전부터 질문해야지 하면서도 잊고 있다가 신장의 야망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났는데요.
    시마즈 타카히사의 4남이 이에히사 맞죠? 능력치도 그렇고 열전에도 보니 꽤나 용맹한 장수였던 것 같은데,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에 나섰을 때 히데요시-시마즈 회견 후 급사했다고 열전에 나와있더군요. 병으로 죽은건지, 아니면 시마즈 세력을 두려워한 히데요시 측에서 뭔가 손을 쓴건지 그게 궁금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4: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통 암살설이 흘러나오면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이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는데...

      어쨌든 시마즈 가문의 기록(島津国史)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가 독살했다는 듯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만 주변 정황을 보아선 토요토미 측이 독살해서 득을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마즈 가문의 당주 요시히사와 둘째 동생 요시히로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마즈를 분열시키려면 땅을 각 형제나 중신들에게 나누어 다이묘우로(그러니까 시마즈 가문의 신하에서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로 만들어) 버리면 될 것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으니까요(또한 이에히사 역시 그리 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에히사는 젊었을 적에 쿄우토에 올라가 노부나가의 힘(즉 천하인의 힘)을 보았던 인물에, 뛰어난 전술가인 만큼 직접 싸워서 패한 만큼 상대의 힘을 인정하는 무장이었다 생각합니다.

      너무도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서 암살설이 흘러 나오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인가요...

      신장의 야망 - 혁신을 하다보면 '신겐신의 야망'이라 불릴 정도로 나가오, 다케다 두 가문이 제일 쉽지만, 시마즈 가문도 클리어하기가 수월하더군요. 확실한 철포 기술이 있는데다 유능한 일문이 많으니까요 ㅎㅎ

      그 일문들을 이용해서 큐슈만 통일을 하면 오오토모 소린, 다치바나 도세츠, 나베시마 나오시게 같은 좋은 장수들을 부하로 삼을 수 있으니 군단 만들어서 돌리면 알아서 천하가 손안에 들어오네요 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거기서 시작하면 편할 듯. 무엇보다 나갈 쪽이 정해진대다 거기에 주변은 약한 놈들 뿐. 그 약한 놈들만 처리하면 정말 오오토모나 류우조우지 녀석들을 쉽게 먹을 수 있겠군요. 더구나 오오토모 놈은 제 기억 상으론 무작정 무기들만 키우는 녀석들인지라.

.

 

 이야기를 이 원고의 중간 즈음의 시기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히데요시가 텐노우[天皇]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설을 유포시키며 칸파쿠[白]가 될 사전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을 시기이다. - 이러는 동안 전회에 언급한 바대로 키이[紀伊]를 다스리는 코이치로우[小一郎]의 실적이 한창 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히데요시 정권은 일본 열도 전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손에 넣은 곳은 킨키[近畿]를 중심으로 토우카이[東海] 일부에 호쿠리쿠[北陸], 츄우고쿠[国]였으며, 오우슈우[州], 칸토우[東], 시코쿠[国], 큐우슈우[九州]는 아직 다른 세력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선 히데요시는 시코쿠를 공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코쿠는 토사[土佐]에서 발흥한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가 거의 전토를 정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 토사 일국()만은 소유하게 하겠다. 다른 삼국()은 포기하고 항복할 것.

 이라고 히데요시는 모토치카에게 전하였지만 모토치카는 따르지 않고 토우카이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동맹을 맺어 동서에서 서로 호응하며 히데요시를 적대하였다.

 

 히데요시는 정벌을 결심했다.

 동쪽에 이에야스라는 적이 있는 이상, 될 수 있는 한 단기간에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이를 위한 전략으로써 적이 감히 대적할 생각을 못할 정도의 대규모 군단을 투입하기로 하였다. 히데요시는 동원 계획을 끝마치자 코이치로우를 불러,

 

 니가 총대장이 되어라

 

 라고 명했다. 코이치로우는 얼굴을 들어 고개를 갸웃거린 후 곧이어 통통하게 살이 붙은 흰 볼에 피를 통하게 하였다. 형을 섬긴 이래 20. 많은 전쟁터를 경험해 왔지만 총대장이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다를 건너 시코쿠[国]로 가는 병사는 공칭 8만이었다. 코이치로우는 우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 후쿠라 항[福良港]을 전진기지로 하여 군선 900척을 모았다.

 

 나루토() 소용돌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하고 수군(水軍)에 밝은 어떤 무장이 그렇게 말하자, 코이치로우는 평소와는 달리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어찌 하냐고 물어도 나루토의 소용돌이를 내가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와 용()이 있으면 건널 수 있다. 조수의 적당한 시기에 맞추어 서로 떠내려가지 않게 배를 엮고 노()를 맞추어 한 일자로 건너면 되지 않겠느냐"

큰 지도에서 나루토 해협(鳴門 海峽) 보기


 라고 말했다. 거친 말투가 평소 온화한 이 남자와는 달랐다.

 곧이어 그 말대로 하여 단번에 건너서는 아와[阿波]토사도마리 항[土佐泊港]에 상륙하여 거기에 임시로 성을 쌓아 교두보로 삼았고, 계속해서 병사들을 파견하여 점령지를 넓혀갔다. 동시에 별동대인 모우리 군[毛利軍]이요[伊予] 침공하였고, 또 하나의 별동대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군은 사누키[岐]로 침공하여, 하루에 성 하나씩 점령하는 기세로 진격하였다.

 

 코이치로우는 주력군을 이끌고 아와[阿波]에 있는 쵸우소카베 최대의 요새인 이치노미야 성[一宮城]을 포위하였지만, 성을 지키는 타니 츄우베에 타다즈미[谷 忠兵衛 忠澄]라는 자가 제법 방어하여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당초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코이치로우도 이 이치노미야 성에는 애를 먹을 것이라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큰 지도에서 이치노미야(一宮) 성터 보기

 

 그러나 킨키[近畿]에 있던 히데요시는 동방의 토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위협을 종시 느끼고 있었던 만큼 장기전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이 코이치로우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코이치로우는 저러니까 안 된다. 언제나 꽃구경이라도 하는 듯이 느긋하다니까

 

 현실은 별로 느긋한 것이 아니고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갔다고 하여도 이 정도 교착 상태는 물리적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코이치로우였던 만큼 히데요시도 불만을 말하기 쉬워 표현이 어느덧 과장되기도 하였다.

 

 내가 간다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친정한다는 것이었다. 말뿐만이 아닌 - 이 시기까지의 히데요시는 행동이 재빨랐다. 곧바로 사카이[]까지 내려가 거기서 대기하면서, 우선 사자를 보내어 아와 이치노미야의 진영에 있는 코이치로우에게 알렸다.

 

 그렇게 말씀하셨나?”

 

 코이치로우는 사자(使者)로 온 이시다 사키치[石田 佐吉=미츠나리[三成]]를 앞에 두고, 그렇게만 말하고 잠시 침묵하였다.

 참을 수 없다!’

 고 생각하였다. 형의 조연에 지나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에서 이제서야 겨우 날개를 펼친 것이다. 코이치로우가 그것에 흥분해 하고 있는 바로 지금, 또다시 형이 온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평소의 그라면 온화하게 형의 말에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만은…… 코이치로우는 작은 저항을 시도해 보았다.

 오지마!’

 하고 화내며 말하지는 못하고, 단어를 될 수 있으한 고분고분히 하여 [오신다는 것에 대해서 잠시 유예(猶豫)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으로 유우히츠(祐筆)에게 상소문을 쓰게 하였다.

히데나가,
삼가 아뢰옵니다.
무릇 이번 시코쿠 정벌[四国征伐]에 있어 저는 형님의 대리를 명 받아 도해(渡海)하여 아와[阿波], 사누키[讃岐]에 군사들을 보내어 빠르게 적의 성들을 처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천하에 면목을 세움에 있어,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잔당(殘黨)이 여전히 남아있긴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곳으로 오시겠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건 히데나가의 무(武)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몹시 놀랐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출진하신다는 것은 저를 이곳에 파견한 형님의 안목이 부족하다는 뜻이 되어 형님의 위광을 스스로 줄이게 되는 것이며, 또한 모처럼 형님의 대리를 명 받은 저의 치욕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지금 조금 시일이 걸리고는 있지만 형님께서 바라는 바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옵니다.
바라건대 이번 출진을 중지해 주십시오. 그래 주신다면 이 얼마나 히데나가의 행복이겠습니까?
부디 이 히데나가에게 온 힘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전공을 세울 수 있게 해주신다면, 일생일대의 큰 은혜로 받들겠습니다.

부디 그것을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겨주시길 바라옵니다
 코이치로우는 이 상소문을 비토우 토모사다(尾藤 知定)에게 주어서 사카이로 출발시킴과 동시에 전력을 다해 총공격을 개시하여 결국 하루 만에 성의 외곽(外廓)을 점령하고 물길을 끊어다. 성안을 말라 죽일 태세를 취한 상태에서 수비하는 타니 츄우베에에게 항복을 권했다. 츄우베에는 아와의 하쿠치 성[白地城]에 있는 자신의 주군 모토치카에게로 가서, 히데나가의 군세에게는 대항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하여 결국 모토치카에게 항복을 결의시켰다.

 

 시코쿠()는 히데요시 정권의 산하로 들어왔다. 개전한지 50여 일만이었다. 이런 신속함은 전례가 드물 정도였다. 이후 히데요시는 바라 마지않던 칸파쿠[白]에 임명 받았고, 이어서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각주:1]의 사성(四姓) 외에 새로이 토요토미[豊臣]의 성()을 창설하여 그것을 조정에게 하사 받는 방식을 취했다. 자연히 코이치로우도 이후 하시바[羽柴]라는 성(苗字)을 버리고, 토요토미노 히데나가라고 칭하게 된다.[각주:2]

 

 시코쿠[国]에서 개선한 뒤 코이치로우의 영지(領地)가 더해졌다. 키이[紀伊]에 더해 야마토[大和]가 추가된 것이다. 야마토도 키이와 마찬가지로 사정이 복잡한 곳으로, 지역의 대부분이 코우후쿠 사[興福寺][각주:3]카스가묘우진[春日 明神][각주:4]의 종교령(宗敎領)으로, 더구나 센고쿠[戦国] 백 년 동안 츠츠이 씨[筒井氏], 마츠나가 씨[松永氏] 등에게 땅을 강탈당해 왔기에, 히데요시 정권 성립 후에도 토지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소송이나 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더구나 그런 것들이 쿄우토[京都] 공가(公家)와 엮어져 있었던 만큼 어떤 의미에선 키이보다 통치하기가 더 어려웠다.

 코이치로우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고 히데요시는 이 동생의 그러한 점을 기대하여 야마토를 맡겼다. 그 봉지(封地)는 야마토뿐만 아니라 이가[伊賀]와 그 외 여러 곳을 합하여 100만석으로 하였고 거성(居城)야마토 코오리야마[大和郡山]로 하였다.

 

 관작(官爵)도 시코쿠 정벌 다음해에 종삼위(從三位) 산기[議]가 되어 상급귀족(公卿)이 되어 궁궐에 입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뒤 종이위(從二位)에 서임되어 다이나곤[大納言]에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를,

 [야마토 다이나곤[大和大納言]][각주:5]

 이라고 불렀다. 히데요시도 이제는 이 치쿠아미[竹阿弥]의 자식을 코이치로우라고 부르지 않고,

 [다이난고[なんご]]

 라 높여 불렀다. ‘다이나곤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난고쪽이 왠지 발음하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코이치로우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문안 인사를 올리려 왔을 때 히데요시는,

 

 그 신국()은 어떤가?”

 

 하고 물었다. 신국이라는 것은 - 야마토[大和]에 신사령(神社領)과 사원령(寺院領)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존중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특히 히데요시의 경우 어느 정도는 야유를 담아서 정공법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라는 속내를 담고 있었다. 동시에 히데요시에게 그런 어려운 지역을 맡게 된 코이치로우에 대해서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소는.”

 

 하고 코이치로우는 짧게 답했다. 사실 코이치로우도 애먹고 있었다. 매일같이 다이죠우인 몬제키[院 門跡][각주:6]이치죠우인 몬제키[院 門跡][각주:7], 카스가 신사[春日神社] 등에서 진정(陳情), 소송이 코이치로우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어느 것이나 어려운 문제들로 대부분은,

- 토지를 돌려줘

 라는 것이었다. 코이치로우가 자신의 부하에게 나누어준 땅에 대해서,

 

 저 마을을 멋대로 그렇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백 년 전에는 우리 절의 영지(領地), 물증이라고 하시면 여기에 증거도 있습니다. 꼭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식이었다. 하나하나 전부 들어주면 야마토에 있어서의 코이치로우의 영지(領地)는 한뼘도 안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것을 법적으로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코이치로우는 다른 다이묘우[大名]들과는 달리 이런 점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센고쿠 백 년 동안에 일본 60여주()의 사원령이나 신사령, 황실령, 귀족령(公卿領) 등은 각 지역에 있는 센고쿠 다이묘우들이 강탈하였고, 그 강탈한 땅 위에 센고쿠 다이묘우의 경제는 성립해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 센고쿠를 종식시키고 통일하였다.

 - 그러니까 원래대로 돌려놔라

 고 야마토의 여러 절과 여러 신사들은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의 영토권 등은 시간도 흐르고 권리도 썩어 무효가 되었다고 말해도 좋았다. 그 억지를 토요토미 정권에 부리는 것은 대상이 잘못된 것으로, 부리려고 한다면 센고쿠 시대에 야마토에서 자기들 맘대로 강탈해 갔던 옛 영웅호걸들의 묘 앞으로 가져가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의 야마토 담당자인 코이치로우는 될 수 있는 한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토지도 돌려주거나 하였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 온정을 베풀면 베풀수록 그를 만만하다 보고서는 계속 와서 투정 부렸다.

 그것을 무시하고 튕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여러 절들은 다른 지역의 경우와는 달리 몬제키[門跡] 사원이었다. 몬제키라는 것은 황족이나 상급 귀족의 핏줄들이 앉아있는 절로, 말하자면 쿄우토[京都]의 궁정과 하나의 세계였기에 그들을 거부하는 것은 궁정을 거부하는 것이며, 궁정을 머리에 이는 것으로 성립된 토요토미 정권의 일원으로서 그것이 불가능했다.

 

 정말 귀찮겠구나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 옛날은 옛날, 지금은 지금이었다. 과거의 권리는 백 년간의 혼란기에서 일단 없어진 것으로 보고, 토요토미 정권이 되었으니 새로 이 정권에서 토지를 기부한다. 과거와는 관계없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시는 궁정에 황실령을 헌상하고 상급 귀족들에게 영지를 새로 하사하였다. 그 옛날 선조들의 화려함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요 몇 십 년 동안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살아왔기에 지금은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奈良]의 몬제키들은 역사적 권리에 강하게 집착했다.

 

 이건 농담입니다만

 

 하고 코이치로우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예 겐지[源氏]를 칭하여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셔서 막부(幕府)를 열고 순수한 무가정치(武家政治)를 여는 편이 좋았다는 것이었다. 토요토미 정권은 이런 점에서 어중간했다. 히데요시는 칸파쿠가 되었고, 그 일족도 히데츠구[秀次]나 자신을 시작으로 모두 상급귀족이 되었다. 귀족이라는 신분으로 여러 다이묘우들을 휘하에 두고 60여주를 통치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은 그런 귀족의 신분이었기에 나라의 몬제키들과 동일한 사회에 있었다. 동일 사회인 이상 동일 원리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기에,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약하게 된다 고 코이치로우는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만 말해라

 

 히데요시는 그렇게 말하였지만 그래도 놀라웠던 것은 코이치로우가 가진 행정이론가로써의 날카로움이었다. 어느새 이런 풍부한 사고 능력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일까?

 

 그건 알았으니까 됐고, 실제로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입니다

 

 하고 코이치로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토지 대신해서 황금을 준다. 그러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효과를 발휘하여 소송인이 얌전해 지는 것이었다. 황금이라고 하면 근래에 사도[佐渡]를 시작으로 전국의 금광에서 솟아나듯이 나오고 있었다.[각주:8] 일본에서 이 금속을 정식 유통화폐로 채용한 것은 히데요시가 처음이었는데, 코이치로우는 이미 그 쓸모를 나라의 몬제키들을 상대로 경험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웃으며 그 처리에 만족하였다.

 

 코이치로우는 나라[奈良}의 난제(難題)들 뿐만 아니라 다이묘우들간의 불평이나 알력을 잘 조정하였다.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멀어지게 된 다이묘우들은 모두 키타노만도코로[政所]나 코이치로우에게 가서 부탁하였다. 또한 히데요시의 측근 관료들에게 미움 받아 곤혹해 하고 있는 다이묘우들도 코이치로우에게 그 조정을 부탁했다. 코이치로우는 직접 관료들의 사무실로 가 진실을 가려서는 측근 관료가 잘못했을 경우에는 호되게 질책했다. 이 때문에 다이묘우나 쿠교우들 사이에서는,

 - 토요토미 가문은 야마토 다이나곤이 지탱하고 있다

 고까지 말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 정권의 행복한 시간도 길지는 않았다.

 요 이십 수년, 히데요시의 온갖 작전에 참가했던 코이치로우는 1590년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만은 결국 참가하지 못했다.

 이 시기. 쿄우토[京都]에 머물던 중 병을 얻어 중태에 빠졌다. 모친인 오나카[仲]는 이 즈음 종일위(從一位)가 되어 오오사카 성에 살며 78세가 되어 있었는데, 이 아들이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신사, 절에 토지를 기부하여 낫기를 기원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로 떠나기 앞서 가마를 돌려 코이치로우의 쿄우토 저택으로 향했고 특별히 방까지 들어가 병문안을 하였다.

 이 경우도 코이치로우는 형에 대하는 예를 버리는 일 없이, 병상을 치우고 의복을 새로이 하고는 기다렸다.

 

 이제는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느냐?”

 

 히데요시는 예전에 비해 반으로 줄어든 코이치로우의 몸을 걱정스럽게 보면서 말하였고, 이 동생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이제 힘든 것은 넘긴 듯 합니다

 

 하고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눈에도 히데요시를 걱정시킬 수 없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히데요시도 그것을 느꼈다.

 

 오늘 출진한다면 길하다고 하더구나……”

 

 라고 말하면서 조심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는 불길해집니다

 

 고 코이치로우 쪽이 당황하여 곧바로 요시다 신사[吉田神社]의 신관을 불러 형의 운수를 고치고자 액막이[い]를 시켰다.

 히데요시가 저택을 떠날 때, 코이치로우는 시중드는 소년의 어깨를 빌려서 문 앞까지 나와 배웅하였다.

 정말 날 위해서 많이 애써주는구나

 히데요시는 가마에서 코이치로우의 생애를 떠올리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 뒤 코이치로우의 상태가 다소 좋아졌다. 히데요시도 오다와라의 진중에서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모친인 오오만도코로(大政所)에게 편지로,

다이난고.
나아졌다고 하니
정말로 정말로 기쁘옵니다.
고 써서 보냈다.

 쿄우토에서 조금 나아졌기에 코이치로우는 거성인 야마토 코오리야마[郡山]로 돌아와 거기서 정양(靜養)하였다.

 

 오다와라 정벌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90 10월부터 코이치로우의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 히데요시는 오오만도코로와 함께 여러 신사와 절에 쾌유의 기도를 시켰지만 눈에 띌 정도의 효험은 없어, 이 때문에 오히려 오오만도코로 쪽이 마음의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울 정도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모친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대규모 기도(祈禱)그 자신, 이런 종류의 것을 믿고 있지는 않았지만 하기로 하여, 조정(朝廷)에 부탁해서는 신사와 절에 쾌유기도의 칙사를 보내게 하였다. 신불(神佛)도 칙사가 오면 다소 긴장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칙사는 9명이 선택되었다. 그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궁궐을 출발하여 두 개의 카모[賀茂][각주:9]를 시작으로 아타고[愛宕], 쿠라마[鞍馬], 타가[多賀], 리큐우하치만 궁[離宮八幡宮], 이와시미즈[水] 등 각각의 신을 모시는 곳에 가서 코이치로우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하지만 병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이 해도 끝날 무렵, 히데요시는 차림을 가벼이 하고 코오리야마로 내려가 코이치로우를 병문안 하였다. 히데요시가 방까지 들어왔지만 코이치로우에게는 이미 머리를 들 수 있을 정도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얼굴을 꿈틀대고 있을 뿐이었다. 형을 위해서 인사의 미소라도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무릎으로 다가가,

 

 어서 나으렴. 니가 없으면 토요토미 가문은 어찌하란 말이냐

 

 하고 격려하였다. 이 말이 코치이로우의 얼굴을 무참할 정도로 적셨다. 눈물이 끊임없이 넘쳐 흘렀다. 코이치로우에게 있어서는 히데요시의 이 말 한마디로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형님은…”

 

 라고 듣기 힘들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듣기 위해서 입술로 귀를 가져갔다.

 

 새끼줄에다 발을 걸치고 오셨죠

 

 코이치로우는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히데요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래, 라고 말해 주었다.

 그 의미가 아무래도 30년 전의 옛날에 히데요시가 키요스[清洲]에서 고향 나카무라[中村]에 처음으로 출세했다고 뻐기러 돌아왔을 때의 것을 - 코이치로우는 말하였던 것이구나 하고, 히데요시가 알아차린 것은 그 다음 달 23, 코이치로우가 죽은 다음이었다. 그 날. 코이치로우의 뇌리에는 고향의 그 드푸른 하늘이 걸쳐져 있었을 것이다.

 

 5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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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코우후쿠 사[興福寺] 등 나라의 절간에 있던 자들은,

 - 신불의 땅을 돌려주지 않았기에 벌이 내려진 것이다

 고 열심히 욕을 했다. 역시 나라[奈良]의 종교 귀족의 한 사람으로, [타몬인 일기[多聞院日記]]를 쓴 에이슌[英俊] 1 23일 항에,

다이나곤 히데나가 경이 죽었다.
금은을 조사해 보니, 황금은 56천매()가 넘었으며, 은은 4*4미터 크기의 방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아놓아 그 수는 셀 수 없다. 그 어마어마한 재산과 보물도 저 세상에는 가져가지 못했다. 정말로 목숨이 아쉬웠을 것이다.
천하디 천한 것.
이라고 썼다. 코이치로우는 탐욕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편이었다. 천한 것은 오히려 그가 살아있던 때, 갖은 이유를 다해서는 그에게서 금곡(金穀)을 계속 빼앗아 갔던 그들 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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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식은 그로부터 6일 뒤. 코오리야마에서 행해졌다.

 상급귀족이나 여러 다이묘우들이 수없이 모였고, 죽음을 듣고 떼지어 모인 서민들의 머릿수만으로도 20만 명이라 한다. 참가했던 다이묘우 중 누구나가 이 다이나곤의 죽음으로 인해 토요토미 가문에 계속 내리쬐고 있던 햇살이 사라져 갑자기 싸늘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날부터 9년 후. 세키가하라[ヶ原]로 이 가문이 분열했을 때,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늙은이들은,

 -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하고 거의 넋두리처럼 서로들 소곤거렸다.

 

================================================================大和大納言、了=============================

  1. 텐노우[天皇]가 하사한 본성(本姓) 중 유명한 성 네 개이다. 각각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를 말함. [본문으로]
  2.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토요토미는 본성(本姓)이기에, 하시바라는 성(苗字)은 그대로였다는 사람도 있다. [본문으로]
  3. 남도북령(南都北嶺 - 북령은 히에이잔[比叡山], 남도는 코우후쿠 사[興福寺])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불교 사원이다. 공가(公家)의 중심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우지데라(氏寺)이다. [본문으로]
  4. 카스가 대사[春日大社]라고도 한다.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수호신(守護神)을 모신 신사(神社). [본문으로]
  5. 그래서 대화대납언(大和大納言). [본문으로]
  6. 다이죠우인은 셋케[摂家] 중 쿠죠우 가문[九条家]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이치죠우인은 셋케[摂家] 중 코노에 가문[近衞家]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사족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환속하기 전까지 있었던 곳이다. [본문으로]
  8.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사도 금광이 개발되지 않았다. 사도 금광은 히데요시가 죽은 1601년에 금맥이 발견되었다. [본문으로]
  9. 카미가모[上賀茂], 시모가모[下鴨]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싸잡아 카모 신사[賀茂神社]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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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12 1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이야기에 비해 화수가 적어서 아쉽습니다만 대신 이번 화는 길군요. 잘 읽었습니다. ^^
    (히데나가가 살아있었으면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망상을 제어할 수 있었을지... --a)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2 1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엔 중간에서 끊을까 하다가 끊지 못하고 그만...

    음...어땠을까요... 오히려 조선 정벌군의 총사령관이 되어서 코니시나 카토우같이 분열시키는 일 없이 더 조선을 고생시켰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결국 승리의 조선이 되겠지만 말이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2 2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쉽군요. 적어도 히데나가가 살아있었더라면 도요토미가는 반석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을 건데.
    쵸소카베 모토치카도 억울하긴 했을 것 같습니다. 기껏해서 시코쿠를 평정하기 일보직전에 있었는데, 토사만 가지라니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5.13 0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루토는 세계에서 조류가 빠르기로 3번 째라... 소용돌이... NARUTO의 우즈마키 나루토란 이름이 어떻게 붙여진 건지 이제야 알았네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3 0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저는 히데츠구와 권력 암투를 벌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요 ^^
    모토치카에 대해선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었겠죠...정말...

    박선생님//우즈마키 나루토라...그야말로 걸맞는 이름이군요.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5.13 1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히데나가가 죽으면서 도요토미 가문이 정권을 수립한 가문에 걸맞는 혈족을 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히데나가가 타계한 후에 추진된 조선침략등도 히데나가가 '없어서' 제멋대로 굴러간 것 같은 인상을 보여주죠(물론 자기주장 내세우지 않고 침공군 사령관이 되었을것도 같습니다만).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13 14: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아서는 도요토미 정권의 주석이 되어 주었지만.. 죽고 난 빈자리가 워낙 커서인지 히데요시가 엇나간 측면이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괜히 혁신에서 어정쩡한 능력치로 전용 특기를 준게 아닐거라는 생각이..(아마 코에이에서도 시바센세 매냐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_-ㅎ)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3 1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확실히 히데요리라는 후계자가 생기면서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히데츠구를 견제할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형을 잘 보좌해서는 조선침략도 더 잘 보강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메엣찌님//그쵸...빈자리가 너무 컸죠. 히데나가는 그 게임 상의 얼굴이 너무 선해서...
    (근데 코에이에 시바 선생 매니아가 있었다면 카즈토요를 그렇게까지 낮추진 않았겠지 말입니다~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taebong0721 BlogIcon 태봉이 2008.05.15 13: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악하악..형.. 나의 히데나가는 그렇지 않다능...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15 2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대의 기운 혹은 흐름이란 사람의 이성을 흐뜨리는 법. 결국 조선침략을 하였든 아니면 아시카가 타다요시(足利直義)처럼 권력 다툼을 벌였을 지도 모르지.

조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 元親)

1599 5 19일 병사(病死) 61.

1539 ~ 1599.

토사(土佐) 오코우(岡豊)성주(城主). 부친인 쿠니치카()의 뒤를 이었다. 반농반병(半農半兵)의 무사인[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를 활용하여 시코쿠()를 통일하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토사(土佐) 일국()를 안도(安堵[각주:1])받았다. 후에 히데요시를 도와 임진왜란에도 출병하였다.








후계자 문제


 [시코쿠()의 패자(覇者)]가 된 쵸우소카베 모토치카이지만 곧이어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침공을 받고 항복하여 결국 토사(土佐) 일국()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어 버린다. 그 후에 모토치카는 [모토치카 백개조(元親百箇)]에서도, “히데요시님에게서 내려오는 명령은 어떤 일이건 따를 것이라 규정하는 등 히데요시를 위해서 헌신적이라고 할 정도로 따랐다.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큐우슈우(九州) 출병이 한창이던 1586 12 14일.

 붕고(豊後) 베츠기가와(次川) 강에서 벌어진 시마즈 씨(島津)와의 전투에서 모토치카는 가장 사랑하던 첫째 아들 노부치카(信親) 700여명의 장병(將兵)과 함께 잃게 되었다. 모토치카의 낙담은 상상 이상으로 히데요시는 오오스미()()을 하사하여 위로하려 했지만 모토치카는 이를 사양하였다.

 노부치카는 가신들의 신뢰도 두터웠으며 또한 모토치카도 노부치카에게 굉장히 기대하였다. 그 때문에 후계자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모토치카만의 문제가 아니고 가신들 끼리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있었던 듯하다.


 모토치카는 넷째 아들인 모리치카(盛親)를 귀여워하고 있었기에 모리치카에게 가독(家督)을 잇게 하려 하였다. 이러한 가중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서 모토치카는 반대파를 숙청했다. 의견을 낸 일족의 키라 치카자네(吉良 親[각주:2])나 히에야마 치카오키(比江山 親興[각주:3])에게는 할복을 명령하는 등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모토치카는 결국 둘째인 카가와 고로우지로우 치카카즈(香川 五 親和), 셋째인 츠노 마고지로우 치카타다(津野 孫次 親忠)가 아닌 넷째 센쿠마마루(千熊丸 후에 모리치카)를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사자(使者)를 상경시켜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각주:4])에보시오야(烏帽子親[각주:5])로 삼아 센쿠마마루의 성인식(元服)을 치르게 하여 우에몬타로우 모리치카(右衛門太郎 盛親)라 이름을 갖게 해서 후계자로 결정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치카카즈는 스스로 단식(斷食)하여 굶어 죽었다고 한다. 후계자는 노부치카의 전사 후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겨우 정해졌다.


모토치카의 말년.


 어쨌든 후계문제를 해결한 모토치카는 영내(領內)에 토지조사인 검지([각주:6])를 실행하여 영국(領國) 지배를 확립함과 동시에 오고우(岡豊)에서 이전했던 오오타카사카 성(大高坂)에서 한번 더 해상 교통의 거점인 우라도 성()으로 거성(居城)을 옮겼으며 1597년에는 [쵸우소카베 모토치카 백개조(長宗我部元親百箇条)]를 제정하여 법령을 정비하였다. 그와 더불어 히데요시의 요청에 따라 오다와라(小田原) 출병이나 조선 출병 등에 종군(從軍)하여 싸움터에서도 공을 세웠다.

 모토치카는 모리치카를 제 앞가림은 하는 무장으로 키우고자 싸움터는 물론 여러 곳을 데리고 다니거나 했기에 여생을 즐길 여유 같은 것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1596 8월에 에스파냐 선적인 '산 펠리페' 호가 우라토에 표착하는 사건도 일어났다[각주:7]


모토치카의 최후


 그러던 중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1598 8 18일에 병으로 죽었다. 히데요시를 존경하고 따르던 모토치카는 충격을 받은 듯 하다.


 1599 3월.

 모토치카는 셋째 아들인 츠노 치카타다를 유폐하였다. 조선 출병에 종군하여 전공도 세운 치카타다는 동생 모리치카가 후계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처분은 가신 히사타케 쿠라노스케(久武 内蔵[각주:8])의 책모에 위한 것이라 여겨지지만, 모토치카 자신도 사려가 결여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동시에 육체적으로도 쇠약(衰弱)해 있었던 듯 하다.


 병이 조금 나아 소강상태가 된 4 23.

 모토치카는 모리치카와 함께 상경하여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를 알현하였다. 그러나 모토치카의 몸은 결코 좋은 편은 아니어서 오오사카(大坂)나 쿄우토(京都)의 명의(名醫)들이 달려들었지만 결국 5 19일 모토치카는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


 죽기 9일 전인 5 10일에 모리치카를 머리맡으로 불러 싸움터에서의 마음 가짐 등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유해(遺骸)는 텐류우 사()에서 화장(火葬)하였고, 유골은 토사(土佐)로 보내져, 나가하마(長浜)의 텐보(天甫)()에 묻혔다.


 말년의 모토치카는 자기 주장을 굳히지 않는 고집쟁이가 되었던 듯하다. 1600 9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모리치카는 서군(西軍)에 속하여 모토치카가 목숨 걸며 지켜왔던 토사를 빼앗겨 버린다.

텐보산(天甫山)에 있는 모토치카의 묘[코우치(高知)시(市)]

  1. 원래 가지고 있던 영지를 계속해서 영유할 수 있도록 인정 받음. [본문으로]
  2. 모토치카의 조카가 된다. [본문으로]
  3. 모토치카와는 사촌형제. [본문으로]
  4. 오봉행(五奉行) 중의 한 명. [본문으로]
  5. 성인식(元服) 때 에보시를 씌어 주며,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성인식을 치루는 에보시고(烏帽子子)에게 붙여주는 사람. [본문으로]
  6.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7. 당시 선교사 추방령(1587년)이 내려져 있었지만, 무역의 이익때문에 히데요시는 철저한 단속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리핀을 떠나 멕시코로 향하던 에스파냐 국적의 산 펠리페 호가 태풍을 만나 파손되어 수리를 받기 위해 우라토에 입항. 히데요시는 조사관으로 마시타 나가모리를 파견하였는데 항해사 중 하나가 ‘에스파냐가 광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포교와 선교사들의 활약 덕분이다’라는 말을 듣고, 기독교의 목적은 자국의 식민지화라는 것이라 깨달은 히데요시는 이후 기독교 금지를 철저히 하기에 이른다. [본문으로]
  8. 치카나오(親直)를 말한다. 형인 히사타케 치카노부(久武 親信)가 지 동생 쓰면 가문멸망할 것이니 쓰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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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9.25 0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사의 원래 주인인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에게 항복 후 그에게 전력을 다 했다가 아들대에 와서 영지를 뺏기고, 다음 주인인 야마우치 카즈토요는 이에야스 밑으로 들어간 후 유신 때까지 그 자손들이 바쿠후에 충성을 다 바쳤네요.
    같은 지역의 전 주인과 다음 주인의 운명이 확연하게 갈라졌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9.25 14: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에게 왜그렇게 기었는지 모르겠습니다..(-_-) 아무래도 그놈 출병땜시 시코쿠의 패권도 잃고 장남도 잃었건만(-_-..)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5 1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턴오버님// 모리치카도 원래는 동군에 붙으려 했지만, 이시다 파의 획책으로 서군에 붙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모리치카의 군사적 재능은 상당한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히사타케의 말을 듣고 셋째 형을 죽인 것이 영토를 빼앗기는 원인이 되었지만요.

    다메엣찌님//시바타와 싸운 시즈가타케 합전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울 때도 언제나 히데요시의 반대편에 서서 히데요시 세력의 후방을 불안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거지인 토사만은 남겨 준 것에 감사함을 느끼지 않았을 까요? 당시 일본인이 고향에 대한 집착과, 나중 일이지만 호우죠우 씨가 영토를 전부 잃게 되는 것(이건 다른 지역에 쿠니(囯) 하나를 얻을 수 잇었다는 말도 있지만요)과 비교하면 말이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9.25 2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리치카는 오사카의 진에서 마지막으로 불태우고 죽으니.. 뭐 개역후 자진하는 여타 다이묘들에 비하면 나쁜 종말은 아닌듯(..이라 말해봐도 실패작 인생이긴 해도;;)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5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담이지만... 잡혔을 때 생명 구걸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죽을 때는 깨끗하게 죽었다고 하더군요. 살아남았다면 생각외로 거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9.26 0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친이 히데요시에게 기다시피 받아놓은 토사1국을 잃었으니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구걸도 그런 이유에서..ㅎㅎ..(그러니까 우리식으로 따지만 조상선산 다 팔아먹은 종손이 눈을 못 감는거랑 같은 이치랄까..)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1.18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리가 아니라 히데요시인 듯 합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0 12: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가 많네요. ^^; 지적 고맙습니다. 얼른 고쳤습니다.

  9. 보통사람 2009.11.26 1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치카가 죽은 뒤에 얼마안되서 아내가 병사하죠.
    따로 첩을 두지 않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었던 사람인데...

    한꺼번에 사랑하는 사람 둘이나 세상을 떠나니
    제정신인게 더 이상할 정도...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14: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치카 사망 1587년.
      모토치카의 부인(노부치카 엄마) 사망 1583년....이군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측실도 두 명 있었군요....

      제가 몰라서 그러니 아시면 좀 알려주셨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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