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

1600 10 1일 참수 41

1560~1600.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秀吉]를 가까이서 섬겼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는 오봉행(五奉行)중의 한 사람으로 문리파(文吏派) 다이묘우[大名]의 리더로 인식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꾀하여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결전을 벌이지만 패배.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 河原]에서 참수당했다.









태합(太閤)의 넘버 원 총신(寵臣)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일했던[각주:1] 이시다 미츠나리가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은, 태합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아래서 봉행에 임명되어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19 4천석(쿠라이리치[入地[각주:2]]를 포함하면 약 30만석)을 영유하면서 부터이다.

 히데요시는 말년에 정권 집행을 미츠나리에게 맡겼으며, 이런 미츠나리에게는 아무리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라도 미츠나리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권세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598 8 18 히데요시가 죽으면서부터이다.
[이타자카 보쿠사이 비망록(板坂)]에 따르면, 오대로(五大老)[각주:3]와 오봉행(五奉行)[각주:4] 제도는 이 해(1598) 7 13일에 정해졌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예감하여 자신의 유언을 법규로 삼아 자신의 사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히데요시의 뇌리에는 토요토미 가의 존속(存續밖에 없었다. 정권을 히데요리[秀頼]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이에야스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보좌를 맡은 코이데 히데마사[小出 秀政][각주:5]와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각주:6]에게는,

내 가문을 끊기게 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이에야스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이에야스를 섬겨 히데요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우리 가문이 끊어지는 일은 없다.

 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총애하는 신하인 이시다 미츠나리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정권을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에게 맡기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히데요리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꾀하라고 히데마사와 카타모토와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타도 이에야스


 미츠나리는 융통성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려고 하였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막역한 친구였기에 히데요시의 유언을 잘 지켰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야망은 천하를 잡는데 있었다. 곧바로 토오토미 가문을 멸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츠나리는 그런 이에야스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암살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거기에 더 귀찮은 일이 생겼는데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武功派)와 알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1599년 윤3 3 히데요리의 후견인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으로 죽는 것과 동시에 미츠나리를 습격했다. 이것을 중재한 것이 이에야스였다. 대신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 칩거 당하게 되었다.


 대로, 봉행 제도를 무시한 이에야스 독재 정치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던 같은 대로(大老직급인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치기 위한 아이즈 원정[津遠征]에 아무도 반대의 뜻을 표하지 않고 이에야스를 따라간 것도 이에야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정 뒤에는 미츠나리의 거병(擧兵)을 유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곶감을 거절하다.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틈을 노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

 맹우(盟友)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무모하다고 반대하였지만, 태합 히데요시에 대한 보은(報恩)이라는 말에 동의하였다. 이에야스의 유언 위반을 지탄하는 격문(檄文)을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날리며 선전포고하였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에야스였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7])의 토자마 다이묘우[外大名[각주:8]]를 거느리고 미츠나리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말머리를 서쪽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만전의 태세로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 포진하여 동군(東軍)을 유격하려 하였다.


 1600 9 15일 이른 아침. 천하를 가름하는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군을 표방한 많은 무장들이 싸우지 않는 와중에서도 선전하였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등 다섯 무장[각주:9]이 싸움 중에 서군을 배신하고서는 공격해 왔다. 무방비의 등 뒤를 총에 맞은 것과 같이 충격과 혼란 속에서 서군은 완패하였다.


 미츠나리에게는 이에야스 타도의 대의(大義)가 있었다.

 울분을 삼키고 이부키[伊吹]산 속으로 도망쳤지만, 패배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정은 종이보다 얇은 법. 밀고에 의해 숨어있던 곳이 밝혀져 이에야스 앞에 잡혀왔다. 미츠나리의 행위를 문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 편에 선 무장 중에도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잡힌 몸이면서도 비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직했다. 창피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안색조차 띄우지 않았다.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河原]의 형장으로 향할 때, 갈증을 느낀 미츠나리가 따스한 물을 원하자 경호하던 무사가 따스한 물은 없으니까 대신하라며 곶감을 권했다. 이에 미츠나리는 곶감은 담()에 나쁘다고 거절했다. 경호하던 무사들은 비웃었지만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생명을 아끼는 법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미츠나리가 포진했던 사사오 산[笹尾山](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

  1. 당시엔 입을 줄이기 위해서 아이를 절에 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히데요시도 어렸을 땐 절에 맡겨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직할령을 말하며, 미츠나리는 이 직할령의 대관(代官 – 주인을 대신하여 관리함)을 맡았다.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5. 히데마사의 부인은 히데요시의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동생. 즉 히데요시의 이모부. [본문으로]
  6.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 중 한 명. [본문으로]
  7.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가지고 있거나 직접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들 [본문으로]
  8. 직속 부하가 아닌 동맹격인 다이묘우 [본문으로]
  9. 이 중 넷은 히데아키의 배신을 대비하여 요시츠구가 배치한 무장들이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만' 명장 취급을 받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있었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구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
1591년 9월 20일 처형 56세.

이곳에 가면 쿠노헤 마사자네가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링크)

1536~1591.
무츠
[陸奧] 쿠노헤[九戶]성주. 쿠노헤씨는 난부[南部]씨의 분가. 종가(宗家)의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에 대항하여 거병, 농성하지만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아사노 나가마사[淺野 長政] 등이 이끄는 토요토미 씨[豊臣氏]의 오우슈우 평정군[奧州仕置軍]에 진압되어 일족 전원이 처형 당했다.

봉기결단의 배경

 1591년. 쿠노헤 성주 마사자네는 종가(宗家)의 난부 씨 26대 당주인 노부나오에게 모반을 일으킨다. 당시 마사자네는 56세의 노장이었다. 따라서 봉기는 최후의 도전이었으며, 모든 것을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던 것이다.
'나야말로 난부의 정통후계자이다'라고 공언하며, '노부나오는 듣보잡'[각주:1]이라 말하며 마사자네는 오랫 동안 쌓아 온 주변의 여러 호족들과의 우호, 동맹관계에 더하여 일족의 두령으로서의 신망을 바탕으로 그 동안 종가에게 쌓인 반목과 불화를 총결산하는 결단이었다.

 암군(暗君)이라고 평가받던 난부 가문 24대 하루마사[晴政]가 1582년 1월에 죽자, 하루마사 첩의 아들인 하루츠구[晴継]가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잇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츠구는 당주의 자리를 이은 지 20여일만에 급사한다. 부친의 장례 종료 후 눈바람이 심한 밤에 산노헤[三戶]성으로 귀성 중에 자객에게 습격받았기 때문이다. 한 편으론 독살의 소문도 돌았다.

 이 사건을 꾸민 것은 평소의 거동으로 보았을 때 쿠노헤 일족임에 틀림이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가문은 둘로 나뉘어지기에 이르렀다. 후계자로서 마사자네의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마사자네는 동생인 쿠노헤 사네치카[実親]를 추천한다. 사네치카가 하루마사의 둘째 딸과 결혼한 것과 쿠노헤 일족이 난부가 19지족(支族)중에 필두임을 이유로 들었다.

 한편 키타 노부치카[北 信愛]등은 23대 야스노부[安信]의 동생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 - 츠가루 지방 당담관(津軽 郡代)]의 아들인 노부나오[信直]를 추천하였다. 노부나오의 부인은 하루마사의 첫째 딸이었다. 한 때 하루마사의 양자가 되어 후계자 자리에 있었지만, 첩에게서 하루츠구가 태어났기 때문에 차츰 하루마사와 사이가 벌어졌고, 거기에 처도 죽는 바람에 후계자의 지위를 반납하고 있었다.

 초대 미츠유키[光行]부터 시작되는 난부 분가 중 명문가의 리더[각주:2]이고 또한 쿠노헤, 니노헤[二戶]의 양 군(郡)을 소유하면서 주변 여러 호족을 휘하로 두고 있던 마사자네조차 "노부나오는 예전 하루마사 공에게 미움 받기는 했지만 일시나마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또한 장녀는 죽었다고는 해도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던 사람"이라 말하며 물러났지만 맘속으로는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봉기군 각지에서 우세.

 모반을 일으킨 마사자네가 처음부터 농성전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노부나오가 자신의 적자 토시나오[利直]를 히데요시[秀吉]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히데요시는 마사자네가 사투금지령(私闘禁止令)을 위반했다고 판단. 휘하 장병과 오우우(奥羽) 다이묘우의 세력을 규합하여 10만의 오우 평정군([奥羽仕置軍]을 파견했기 때문에 농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사건을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과시하기 위한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후세에 [쿠노헤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이 반란은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기 전 1월에서 8월말까지 난부령 각지에서 종가 군과 쿠노헤 군과의 사이에서 격전이 펼쳐졌다. 전체적으로 봐서 종가군은 패색이 짙었고, 형세에 따라서는 - 하면서 방관하고 있던 여러 호족들도 전부 쿠노헤군에 가담하여 총세 약 5천으로 증가했다. 그에 비해 종가군은 3천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예전에 멸망시킨 시와[志波]의 시바 씨[斯波氏]의 잔당들까지도 봉기를 해서 노부나오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9월 1일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였다.

모략에 당하다.

 아무리 무용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쿠노헤 일족이라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이끄는 대군과 야전에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천연의 요해인 쿠노헤성에서 농성하며 무문(武門)의 의지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평정군 진영에는 츠가루 타메노부[津軽 為信]의 군 3천이 있었다. 타메노부는 마사자네의 지원을 받으며 츠가루의 영주가 될 수 있었다. 마사자네는 자신도 권모술수을 잘 부려왔던 사람이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평정군 진영에 있던 노부나오는 어처구니 없었다. 노부나오의 부친 타카노부는 바로 타메노부의 기습을 받아 자결했기 때문이다. 불구대천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마사자네를 물리쳐야 했다.

 쿠노헤 일족은 용감히 싸웠고, 시골의 작은 성이라며 무시한 평정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공성군은 하나의 계책을 세우게 된다. 모략은 전투에 항상 있는 것이다. 쿠노헤 가문의 묘소가 있는 쵸우코우 사[長興寺]의 사츠텐[薩天] 화상이 모략인 줄도 모르고 권항사(勸降使)가 되었다.

 무장들 중에는 사네치카[각주:3] 한 명만이 끝까지 투항에 반대했다. 후세에 [쿠노헤의 학살(=九戸のなで斬り)]이라 칭해지는 살육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네치카는 성밖으로 달려 나가 싸우다 죽었다. 그리하여 평정군의 공성전은 9월 1일에 시작해서 4일에 끝났다.

 속임수에 빠진 항장(降將) 마사자네 등 8명은 9월 20일 다테[伊達] 영내에 있는 히데츠구의 본영 이와가사키[岩ヶ崎]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다테의 영지에서 처형한 것은 마사자네와 사이가 좋으며 야심가인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에 대한 본보기 이기도 했다.

 동장군(冬將軍)이 가까이 왔는데도 화해를 선택한 마사자네의 생각이 어리석었다고 힐난하는 역사가도 있다. 마사자네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오천의 장병을 구하기 위해서 천하인의 도량을 재어 본 것이다. 무참한 결과만을 보고 정치적인 동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단지 아쉬운 것은 마사자네가 전국의 무대로 올라가는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1. 노부나오는 난부 가문의 분가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서장자이다. [본문으로]
  2. 쿠노헤 씨는 미츠유키의 여섯째 아들 유키츠라[行連]부터 시작된다. [본문으로]
  3. 난부가의 후계로 추대되었던 마사자네의 동생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