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불행은 재능도 없으면서 히데요시(秀吉)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칸파쿠(関白)까지 출세한 것에 있다.
 히데츠구는 오와리(
尾張)의 성()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친이 히데요시의 누나[각주:1]였다. 그런 관계로 출세하기 시작하여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의 양자가 됨에 따라 예가 없을 정도의 승진을 이룬 것이다.

 18살에 종사위하(四位下)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에 임명되었으며, 21살 때는 정삼위(正三位)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하였다. 24살 때,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죽자 칸파쿠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바랄 수 없다고 본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쥬라쿠테이(楽第[각주:2])를 히데츠구에게 주고 히데요시 자신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가 이후 타이코우(太閤[각주:3])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2년 후인 1593년 히데요시에게 오히로이(おい – 후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난 것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에게 칸파쿠를 물려준 것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그런 감정을 히데츠구도 느낄 수 있었다.
  히데츠구가 여기서 깨끗하게 '칸파쿠'라는 직책을 히데요시에게 반환하였다면 비극의 인물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맛본 권력의 맛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때 일본 전국을 5분할하여 그 중 4/5는 히데츠구에게, 1/5을 히데요리로 나누는 계획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장래 히데요리의 부인으로 히데츠구의 딸을 맞이하여 토요토미 가문(
豊臣家)을 잇게 하는 방안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데츠구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오히려 자포자기와 같은 행위를 거듭하게 된다. 히데요시가 칸파쿠의 직책을 거두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강박관념이 그를 난행으로 몰고 갔다.
 철포(
鐵砲) 연습을 핑계로 쿄우토(京都) 교외 키타노(北野) 근방에 가서 밭일을 하던 농부를 표적으로 쏘아 죽였고, 또한 활의 표적으로 지나가던 사람을 멈추게 한 후 맞추어 죽였다. 나중에는 살인에 맛을 들여 밤중 시내에 나가 돌아다니다 마주친 사람을 계속해서 칼로 죽였다. 자신의 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 – 그 손맛이 죽였다. 히데츠구는 이렇게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 수백 명을 죽였다고 한다.

 히데츠구의 난행은 끝이 없었다. 오오기마치 죠우코우(正親町上皇)가 죽었다[각주:4]고 하는데도 사슴사냥을 하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다.

죽은 상황에게 공양하기 위해서 사냥을 하니, 이것을 살생관백이라고 한다
御所のたむけのためのなれば、これをせっしょう関白という[각주:5]
 는 낙서마저 나왔다.

 히데츠구는 그 다음으로 성지(聖地)라 일컬어지는 히에이잔(比叡山)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금녀의 구역인 히에이잔에 여성들까지 함께 데리고 올라가 사슴사냥을 한 것이다. 히에이잔은 물론 살생이 금지된 땅이었다. 스님들이 멈추어달라고 사정을 하자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원숭이, 너구리까지 잡아 그렇게 사냥해 온 것들을 본당() 네모토 중당(根本中堂)으로 가지고 들어와 대놓고 요리해 먹은 것이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승려들이 쓰고 있던 소금이나 식초통에 사냥한 개나 사슴의 시체를 던져 넣었다.[각주:6]

 이런 난폭한 행위들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저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히데요시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 있으니 히데츠구가 조정에 막대한 헌금을 한 행동이었다[각주:7]. 1595년의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것을 모반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판단하였다. 파견된 힐문사(詰問使)에게 히데츠구는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칸파쿠, 사다이진(左大臣)이라는 요직()을 박탈당했다. 히데요시와의 면담도 거부당하여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당한 뒤 그곳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다.

 히데츠구의 가족들에 대한 히데요시의 처치는 잔혹의 극을 달했다. 처첩과 자식들 모두 쿄우토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으로 끌려가 히데츠구의 목 앞에서 사형당했다. 2~3세의 아이까지 모친의 면전에서 살해되었으며 그 모친도 곧바로 목이 베어져 죽음을 당했다.

[도요토미노 히데쓰구]
1568년생. 처음엔 '미요시 야스나가(
三好 康長)'의 양자가 되어[각주:8] '미요시 마고시치로우(三好 孫七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585년 오우미(近江), 야마토(大和)에서 43만석[각주:9]. 1591년 칸파쿠(関白)가 되었다. 1595년 추방당하여 자살. 28세.

  1. 즈이류우인 닛슈우(瑞龍院日秀). [본문으로]
  2. 히데요시가 자신이 세운 정권의 권위와 상징을 위해 쿄우토에 세운 정청(政廳)겸 주거지. [본문으로]
  3. 은퇴한 칸파쿠에게 붙여주는 경칭. [본문으로]
  4. 1593년. 1586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 양위한 상태였다. 여담으로 히데요시는 이 오오기마치가 양위하고 살 집(센토우고쇼(仙洞御所))을 마련한 공로로 칸파쿠(関白)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원어로는 'せつせう'라고 되어 있는 듯... 살생(殺生)과 섭정(摂政)의 발음은 둘 다 셋쇼우(せっしょう). 그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 섭정관백을 살생관백으로 말장난한 것. [본문으로]
  6. 히에이잔 측의 기록에는 없는 말이라고 한다. 야마시타 토키츠네(山科 言経)의 일기인 [토키츠네 경기(言経卿記)]에 따르면 히데츠구는 당일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뭐 이 헤이케모노가타리 듣는 것도 향락에 속하는지라 상황 붕어의 자숙하는 분위기에서 해선 안 될 행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이 뿐만 아니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이른 것에 따르면, 뭔 일이 있을 시에는 관백인 자신(히데츠구)을 따른다는 서약서를 비밀리에 제출하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그전(3살 즈음)에 '미야베 케이쥰(宮部 継潤)의 양자가 된 적이 있다. 양자가 되었을 당시 미야베는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의 유력 무장이었는데, 히데요시는 미야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며 안전보장 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조카를 양자라는 이름의 인질로 보냈다. 아자이 가문이 멸문되자 반환되었다. [본문으로]
  9. 그 후 오와리와 이세 등에 100만석. [본문으로]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모반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하지만 다인(茶人)으로서도 일류인 인물이었다.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챠완(井茶碗)은 '아라키 코우라이(荒木高麗)'라 불리며 명물을 기록한 여러 장부에 실린 천하의 명물이었다. 무라시게에게서 이에야스(家康)의 손으로 옮겨졌고 그 후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川家)[각주:1]에 전해져 지금도 토쿠가와 미술관(川美術館)에 보존되어있다.

 소년시대의 무라시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소년 무라시게는 힘이 대단히 셌다고 한다. 부친 요시무라(義村)를 태운 바둑판의 양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서는 방을 세 바퀴 돌았다고 한다. 겨우 12살 때의 일이다[각주:2].

 처음엔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가신[각주:3]이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幽))와 함께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가 뛰어난 활약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등의 다이묘우(大名)도 무라시게에게 배속되어 있었다.

 무라시게의 모반은 1578년에 뜬금없이 일어났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츄우고쿠(中)의 모우리 씨(毛利氏)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당시 무라시게는 셋츠(津)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무라시게의 뜬금없는 모반에 노부나가는 "무엇이 부족하여 그러는가?"라고 놀랐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하면서 "반역하려는 뜻을 버리고 인질로 모친을 바치도록"하고 설득의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로 보내진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각주:4], 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각주:5],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각주:6]였다. 히데요시도 이타미(伊丹)에 있는 무라시게의 거성(居城)으로 가서 뜻을 거두도록 재촉했다.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가 설득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모반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라키 가문의 가신이 노부나가의 적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 쌀을 밀매한 것[각주:7]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필시 진짜 원인은 노부나가의 잔인하고 폭군적인 성격을 무라시게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모반에 대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부나가에게 가려고 했지만 가노(家老)[각주:8]들이 "잠깐 동안은 용서하시겠지만 의심 많은 분이기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충고를 들은 것도 있어, 무라시게는 더 이상 오다 가문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청자(靑磁)로 된 꽃병(花甁)이 모반의 원인이라고 한다. 노부나가가 꼭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을 무라시게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삐졌다고 한다.

 승산이 있던 모반이 아니었다. 무라시게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무라시게의 휘하인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를 등돌리게 해서는 양도(糧道)를 끊자 무라시게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각주:9]. 이런 사정을 "처자식, 형제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처자식과 일족을 이타미 성(伊丹城)에 남겨둔 채 종자(從者) 5~6명만을 데리고 탈출한 것이다. 일단 아마가사키 성(尼ヶ崎城)으로 피신[각주:10]한 무라시게는 이후 하나쿠마 성(花城)[각주:11]에 갔다가 여기서 빙고(備後)로 가서 모우리 씨에게 보호를 청했다.

 무라시게에 대한 노부나가의 증오는 지독했다.
 그에 대한 보복은 이타미 성에 남겨진 무라시게의 처자에게 향해졌다. 21살의 미녀로 와카(和歌)가 뛰어났다는 무라시게의 부인을 시작으로 여관(女官) 등 122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때의 비명소리는 '하늘에도 소리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또한 여자 하인, 무라시게 부하의 어린 자식(
若党) 등 510여명을 네 채의 작은 집에 가두어서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고 한다.

 후에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친교가 있던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아 다인(茶人)으로 섬기며 일생을 마쳤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셋츠(摂津) 출신.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를 섬기며 셋츠 이타미 성(伊丹城) 성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에 임하고 있었지만 모우리(毛利)-혼간지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 후에 머리를 밀고 뉴우도우 도우훈(入道道糞)이라 자칭하였다. 1586년 죽었다. 52세.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쇼우군(将軍)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만들 수 있는 가문인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단 에도 시대를 통해서 쇼우군을 배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본문으로]
  2. 밥 많이 처먹는 아들에게 아비가 한 마디 하자 "무사는 힘이 쎄야 합니다"라 말하곤 그 증거랍시며로 저렇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정확히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셋츠슈고(摂津守護)인 이케다 카츠마사(池田 勝正)의 가신. [본문으로]
  4. 그의 딸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부인이었다. 참고로 이 부인은 이때 이혼하여 미츠히데의 중신 히데미츠(明智 秀満)와 재혼. [본문으로]
  5. 마츠이 유우칸은 사카이(堺)에서 노부나가의 대리인이었으며 또한 당시 노부나가의 차제구 수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다도에 밝은 무라시게와는 친분이 깊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6. 당시 노부나가 최측근 시동.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노부타다(信忠)에게도 신뢰 받고 있었다. 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포지션을 이어받은 것이 모리 란마루. [본문으로]
  7. 정확히는 무라시게 휘하에 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가신이 그랬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말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이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1년 가까이 버텼지만 무라시게를 궁지로 몰아 넣은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돌아섰기에 성을 버리게 된다. 참고로 상기의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는 이타미 성을 공격하다 전사. [본문으로]
  10. 이 성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거성. 참고로 이때 마지막으로 노부나가는 무라시게에게 아마가사키와 하나쿠마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이때도 싸우기는 하였다. 성을 공략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활약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 쓴 노부나가의 서장에도 언급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듯.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시대에서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 농성전만큼이나 인간성이 극한으로 몰린 것은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대규모 포위작전으로 인해 성은 완전히 아귀지옥으로 떨어져 사람 고기를 먹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은 그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전략)… 벼 베고 남은 그루가 최고의 먹을 것으로 나중에는 이조차 떨어져 말과 소를 먹었으며, 서리와 이슬을 맞고 약한 자는 아사(餓死)…(중략)… 말라 뼈만 남아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남녀가 성의 책(柵)에 달라붙어 포위군을 향해서 살려주소~하고 울어도 그것에 용서 없이 공격군의 철포가 집중되었다. 맞은 자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도 성안의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모여들어 다투어가며 그 살을 떼어 먹었다. 몸에서도 특히 머리가 맛있다고 하여 머리를 서로 뺏어가며 도망 다녔다…(후략)…

 히데요시의 ‘굶겨 죽이기. 칼도 창도 필요 없다’는 장기 포위공성전[兵量攻め]의 전형이 이 톳토리 성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다. 장기 포위공성전의 이점은 아군 병사의 손해 없이 상대의 자멸을 기다리는 것에 있다. 단지 시간이 걸린다. 이 공성전은 1581년 7월에 시작되어 낙성을 보기까지 반년을 요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서 출진한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를 정복한 뒤 산인[山陰] 방면으로 더 진출하여 톳토리 성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진귀한 현상이 일어났다. 성주인 야마나 토요쿠니[山名 豊国]가 단 혼자서 히데요시에게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모우리[毛利] 측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가신들은 원군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에게 청하였다. 그래서 파견된 이가 킷카와 일족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였다. 츠네이에는 성격이 우직하며 남다른 각오로 톳토리 성에 입성한 것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대규모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히데요시는 톳토리 성 멀리 3리(里) 사방부터 포위하였다. 그 포위한 진영은 산과 들의 형태를 바꿀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성밖 타이샤쿠산 산[帝釈山]의 정상을 깎아서 본진을 세웠고, 연장 2리(약 8km)에 이르는 포위선에는 흙으로 된 보루를 쌓고 책(柵)을 둘러 참호를 팠다. 약 1km마다 삼 층짜리 작은 성과 같은 망루(櫓)에 사수 100명씩을 두었고 또한 500m마다 초소를 만들어 사졸 50명씩 두었다. 밤에는 하늘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화톳불을 활활 피워서는 파리가 드나들 틈도 없을 정도로 엄중하게 경계를 섰다. 거기에 더해 히데요시는 이 진영에서 축제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시장을 만들어 여러 지역의 상인을 불러 모았고, 종을 치고 북을 때려 시끌벅적함 속에 유녀(遊女)들까지 불러들였다. 전투라기 보다는 관광유람에 가까웠다.

그러는 한편 히데요시는 이미 주변지역의 쌀과 보리 사재기에 빈틈없는 손을 쓰고 있었다[각주:1]. 시가 이상의 가격으로 쌀과 보리를 사들였기에 톳토리의 농민들은 앞다투어 팔았다[각주:2]. 톳토리 성 주변에서는 차츰 식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킷카와 측이 모우리에 부탁한 식량선도 오는 족족 히데요시의 수군으로 인해 격침되어 버렸다. 히데요시는 성안이 굶어가는 것을 기다릴 뿐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안의 식량난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가 결국에는 기아(飢餓)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 뒤는 지옥이었다. 이 공방전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성안의 사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져 간 것이다. 적은 철포보다도 무서운 배고픔이었다. 이대로 포위가 계속 된다면 전원이 성안에서 굶어 죽을 뿐이었다.

 츠네이에는 결심했다. 히데요시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츠네이에가 배를 갈라 책임을 지겠으니 성병의 목숨만은 살려주길 바랍니다’고 청원한 것이다. 일족인 킷카와 모토하루의 셋째 히로이에[広家]에게 보낸 편지에 ‘오다와 모우리가 싸우는 일본에서 가장 화려한 전쟁터에서 배를 가르는 것, 후대까지 명예라고 생각한다’고 써서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냈고,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듯 훌륭한 최후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킷카와 일족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는 심경을 적어 보냈다. 히데요시는 츠네이에의 담백함에 감동하여 될 수 있으면 목숨을 구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듯, 처음에는 목숨을 바꾼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엔 츠네이에의 바램을 인정하였다. 그 뒤 츠네이에는 성의 병사들과 이별 잔치를 벌이고 싶다며 술과 안주를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술 10상자, 그릇 10상자, 안주 다섯 종류를 보냈다.

 마지막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써 시동(小姓)으로 마지막까지 지켜본 야마가타 나가시게[山県 長茂]의 보고서가 남아있다. 츠네이에는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한 뒤 녹황색의 의상을 입고 주연에 참석하여 껄껄거리며 웃는 등 쾌활하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배를 가를 때가 되었을 때 갑옷상자에 앉아서는 큰 목소리로 “연습 같은 것도 해 본 적 없을 테니 필시 서투를 테지”하고 카이샤쿠닌(介錯人[각주:3])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은 더 세세하다. 와키자시[脇差[각주:4]]를 배에 꽂고는 기합과 함께 휘저었고 한번 칼을 뽑고는 다시 찔러 심장 아래까지 그어 올린 다음 배꼽 밑에까지 밀어 내리고선 와키자시를 배에 꽂은 채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 머리를 내밀었다… 츠네이에가 배를 가를 때 야마나 가문의 중신 몇 명도 뒤를 따라 배를 갈랐다.

 이리하여 성병의 대부분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성병들의 목숨이 사라져 버렸다. 극심한 기아를 겪은 후엔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 기아상태인 사람은 위나 내장이 쪼그라들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이 먹으면 급사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간을 들여 조금씩 먹으라고 지시를 하였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적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모처럼 도움 받은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家)]
이와미[石見]의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분가 출신이다. 본가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元春]가 이은 가문이다. 톳토리 성[鳥取城]에서 자해하였을 때 츠네이에 35세였다.

  1. 이나바의 근린인 와카사[若狭]의 상인들을 시켜서. [본문으로]
  2. 성병들 조차 돈에 눈이 멀어 성 안의 쌀을 팔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베어주는 사람. [본문으로]
  4. 일본 무사들이 차는 칼 두 자루 중 작은 칼을 이름. [본문으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642 11 25일 병사(病死) 76.

 

1569 ~ 1642.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중신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 타치바타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야나가와[柳川] 13만석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카이에키[改易][각주:1] 당했지만 후에 옛 영지(領地)를 회복. 이후는 막부(幕府)에 충성을 다했다.

 

 

 





야나가와-시마바라[島原]의 난

 

 1620 8 7일.

 치쿠고[筑後]의 영주 타나카 타다마사[田中 忠政][각주:2]가 에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36세. 세자가 없었고, 형인 야스마사[康正][각주:3]오우미[近江]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에[각주:4], 치쿠고[筑後] 야나가와가 주인 없는 빈 땅이 되었고, 8 20일에는 나이토우 마사나가[ 政長] 등의 막부(幕府)의 사자(使者)들이 야나가와 성[柳川]을 접수하러 왔었다.

 그 후 후임 다이묘우[大名]가 임명되기까지 치쿠고[筑後]의 행정은  미노[美濃] 부교우[奉行][각주:5] 오카다 젠도우[岡田 善同] 붕고[豊後] 후나이[府内]의 영주인 타케나카 시게요시[竹中 重義]히젠[肥前]시마바라[島原]의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가 위임 받았다.

 

 6개월간의 대관(代官)[각주:6] 지배 시기인 1620년 가을에 연공() 징수가 있었다.

 1655년에 쓰여진 시모츠마 군[下妻郡] 나카지마 촌[中島村]의 쇼우야[庄屋][각주:7] 이치로우베에[兵衛]의 기록에 의하면, 

붕고[豊後]마츠쿠라 붕고노카미 시게마사[松倉 豊後守 重政]은 자신이 담당한 곳 백성들이 (세금 내기가) 힘들다고 하여도, 집에 강제로 들어가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은 뭐든 싹 쓸어갔으며,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노오도리[蓑踊り] – (미노[蓑]란 비를 피하기 위한 짚 같은 것으로 엮은 도롱이이다. '미노오도리'란 사람에게 그 도롱이를 입히고 풀지 못하도록 줄로 묶은 상태에서 불을 붙여 고통으로 날뛰는 것을 춤이라 표현한 것으로 고문의 일종이다. – 역자 주)를 하게 만들었다. 우네메[采女]- 타케나카 우메노카미 시게요시[竹中 采女正 重義] 과 쇼우겐[監]- 오카다 쇼우겐 젠도우[岡田 監 善同]의 담당지역은 별로 심하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지배하고 있던 대관 지역의 연공 징수는 가혹했으며, 미납한 백성에게는 도롱이를 씌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 '미노오도리'를 시켰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주는 1616년부터 1630년까지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재임. 그 후 1638 4 12일까지 아들인 시게츠구[重次]가 이었다.

 그 사이 1637년 가을부터 1638 2 28일까지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天草島原の乱]의 난이 일어났다.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번주(藩主)가 기독교 농민에게 '미노오도리' '모쿠바세메[木馬責め][각주:8]', '꼬챙이 꿰기[さし][각주:9]', '지옥맛보기[地獄責め][각주:10]' 등의 고문이 행해지는 식의 학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난이 발생되기 16년 전에 이미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미노오도리'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가혹한 연공 징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노오도리'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원래는 연공 미납 농민에 대한 처벌 행위였다. 위정자()를 선택할 수 없는 농민들의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마츠쿠라 시게마사, 시게츠구 부자(父子)에 의한 대관 지배가 길어졌다면, 한 때 기독교 농민이 많았던 야나가와 영내(領內)에서 '야나가와-시마바라의 난'이 있어났을 지도 모른다.

 

야나가와 재 부임과 시마바라 출진(出陣)

 

 1620 11 27.

 쇼우군[軍] 히데타다[秀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예전에 그의 영지(領地)였던 야나가와의 영주가 될 것을 명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던 무네시게는 여러 지역을 방랑한 끝에 이에야스[家康]를 섬기었고 그 후 무츠[奥] 타나쿠라[棚倉] 3만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는 20년 만에 가보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제 54세가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가신 106명을 이끌고 타나쿠라를 출발. 에도에 들린 후, 쿄우토[京都]를 거쳐 오오사카에서 배로 세토 내해[瀬戸 内海]를 배로 타고 서행(西行). 코쿠라[小倉]에서 오래만에 치쿠고 로[筑後路]를 남하. 1621 2 28일에 야나가와 성[梁川城]에 입성하였다. 과거 야나가와 성에서 물러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민(領民),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대관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농민들은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부임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시작부터 적자였고, 1636년 시점에서 번의 채무금은 5100 칸메(貫目)에 달하였기에, 같은 해 막부에게 5만 냥(3150 칸메)을 빌렸다. 거기에 다음 해인 1637년에는 시마바라로 출진해야 함에 따라 500 칸메가 더 들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영민에게 '미노오도리'를 시키는 일 없이, 번사(藩士)[각주:11]의 땅을 거두어 들이고 봉급으로 대신하거나, 아리아케[有明] 해안의 간척을 추진하여 재원의 증가를 꾀했다.

 

 같은 해인 1637년 가을.

 아마쿠사,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기독교-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막부에게 출진을 명령받은 아들 타다시게[忠茂][각주:12] 11 16일에 에도를 출발. 12 6일에 야나가와에 도착.

 다음 7일에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배로 시마바라로 출진했다.

 다음 해인 1638 1 1일에 3회째의 하라 성[城] 총공격에서 막부 군()의 총 사령관인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 重昌]가 전사. 막부는 총 사령관으로 노중(老中)[각주:13]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를 파견. 무네시게도 1 13일에 에도를 출발, 2 7일에 시마바라에 도착하였다. 72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참전이었다.

 

 2 28.

 바쿠후 군의 총공격으로 하라 성은 낙성.

 무네시게는 일단 야나가와로 돌아온 뒤 다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해인 1639 4 3.

 가독(家督)을 적자(嫡子)에게 타다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류우사이[斎]'라는 호를 칭했다. ()를 좋아하여, 다인(茶人)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류우사이 공의 말씀 기록[公御咄之]'이라는 29개조의 유훈을 남기고, 1642 11 25일. 시모가야[下谷]의 야나가와 번 저택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76세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삭감. [본문으로]
  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 숨어있던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3. 요시마사의 둘째 아들. 야나가와 번[柳川藩藩)의 지번(支藩) 후쿠시마(福島) 3만석의 번주(藩主). [본문으로]
  4. 이곳 저곳 분산된 곳을 합쳐 2만석. [본문으로]
  5. http://valhae.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EC%97%90%EB%8F%84%20%EC%8B%9C%EB%8C%80%EC%97%90%20%EB%AF%B8%EB%85%B8[%E7%BE%8E%E6%BF%83]%EB%8A%94%20%EC%A0%84%EB%9E%B5%EC%A0%81%20%EC%9A%94%EC%B6%A9%EC%A7%80%EB%A1%9C%20%EC%9D%B8%EC%8B%9D%EB%90%98%EC%96%B4%20%EB%A7%89%EB%B6%80%EC%9D%98%20%EC%A7%81%ED%95%A0%EC%A7%80%EC%9D%B8%20%EC%B2%9C%EB%A0%B9(%E5%A4%A9%E9%A0%98)%EC%9D%B4%20%EB%A7%8E%EC%95%98%EA%B3%A0,%20%EA%B7%B8%EB%9F%B0%20%EC%A7%80%EC%97%AD%EC%9D%98%20%ED%96%89%EC%A0%95%EC%9D%84%20%EB%A7%A1%EC%95%98%EB%8B%A4. [본문으로]
  6. 영주를 대신하여 그 지역의 행정을 맡아 봄. [본문으로]
  7. 마을의 대표자 겸 세금 징수나 행정을 맡는 한편 마을 주민의 요청을 대변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몸통이 삼각형으로 된 다리를 붙인 말 형태의 고문틀에, 양 다리에 돌을 매단 사람을 앉혀서 그 무게가 가랑이 사이에 집중되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법, 현재는 SM플레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투르크의 전쟁 포로들에게 행했다고 하는 그 고문. [본문으로]
  10. 유황이 들어간 뜨거운 물을 몸에 뿌리는 고문. [본문으로]
  11. 번에 소속된 무사.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 [본문으로]
  12. 무네시게의 동생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의 넷째아들. 즉 양자. [본문으로]
  13. '로우쥬우'라고 읽는다. 에도 막부의 수상 격으로 4~5명이 1개월 당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맡았으며, 중요한 일은 전원의 합의에 따라 결과를 도출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