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불행은 재능도 없으면서 히데요시(秀吉)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칸파쿠(関白)까지 출세한 것에 있다.
 히데츠구는 오와리(
尾張)의 성()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친이 히데요시의 누나[각주:1]였다. 그런 관계로 출세하기 시작하여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의 양자가 됨에 따라 예가 없을 정도의 승진을 이룬 것이다.

 18살에 종사위하(四位下)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에 임명되었으며, 21살 때는 정삼위(正三位)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하였다. 24살 때,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죽자 칸파쿠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바랄 수 없다고 본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쥬라쿠테이(楽第[각주:2])를 히데츠구에게 주고 히데요시 자신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가 이후 타이코우(太閤[각주:3])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2년 후인 1593년 히데요시에게 오히로이(おい – 후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난 것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에게 칸파쿠를 물려준 것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그런 감정을 히데츠구도 느낄 수 있었다.
  히데츠구가 여기서 깨끗하게 '칸파쿠'라는 직책을 히데요시에게 반환하였다면 비극의 인물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맛본 권력의 맛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때 일본 전국을 5분할하여 그 중 4/5는 히데츠구에게, 1/5을 히데요리로 나누는 계획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장래 히데요리의 부인으로 히데츠구의 딸을 맞이하여 토요토미 가문(
豊臣家)을 잇게 하는 방안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데츠구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오히려 자포자기와 같은 행위를 거듭하게 된다. 히데요시가 칸파쿠의 직책을 거두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강박관념이 그를 난행으로 몰고 갔다.
 철포(
鐵砲) 연습을 핑계로 쿄우토(京都) 교외 키타노(北野) 근방에 가서 밭일을 하던 농부를 표적으로 쏘아 죽였고, 또한 활의 표적으로 지나가던 사람을 멈추게 한 후 맞추어 죽였다. 나중에는 살인에 맛을 들여 밤중 시내에 나가 돌아다니다 마주친 사람을 계속해서 칼로 죽였다. 자신의 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 – 그 손맛이 죽였다. 히데츠구는 이렇게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 수백 명을 죽였다고 한다.

 히데츠구의 난행은 끝이 없었다. 오오기마치 죠우코우(正親町上皇)가 죽었다[각주:4]고 하는데도 사슴사냥을 하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다.

죽은 상황에게 공양하기 위해서 사냥을 하니, 이것을 살생관백이라고 한다
御所のたむけのためのなれば、これをせっしょう関白という[각주:5]
 는 낙서마저 나왔다.

 히데츠구는 그 다음으로 성지(聖地)라 일컬어지는 히에이잔(比叡山)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금녀의 구역인 히에이잔에 여성들까지 함께 데리고 올라가 사슴사냥을 한 것이다. 히에이잔은 물론 살생이 금지된 땅이었다. 스님들이 멈추어달라고 사정을 하자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원숭이, 너구리까지 잡아 그렇게 사냥해 온 것들을 본당() 네모토 중당(根本中堂)으로 가지고 들어와 대놓고 요리해 먹은 것이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승려들이 쓰고 있던 소금이나 식초통에 사냥한 개나 사슴의 시체를 던져 넣었다.[각주:6]

 이런 난폭한 행위들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저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히데요시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 있으니 히데츠구가 조정에 막대한 헌금을 한 행동이었다[각주:7]. 1595년의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것을 모반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판단하였다. 파견된 힐문사(詰問使)에게 히데츠구는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칸파쿠, 사다이진(左大臣)이라는 요직()을 박탈당했다. 히데요시와의 면담도 거부당하여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당한 뒤 그곳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다.

 히데츠구의 가족들에 대한 히데요시의 처치는 잔혹의 극을 달했다. 처첩과 자식들 모두 쿄우토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으로 끌려가 히데츠구의 목 앞에서 사형당했다. 2~3세의 아이까지 모친의 면전에서 살해되었으며 그 모친도 곧바로 목이 베어져 죽음을 당했다.

[도요토미노 히데쓰구]
1568년생. 처음엔 '미요시 야스나가(
三好 康長)'의 양자가 되어[각주:8] '미요시 마고시치로우(三好 孫七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585년 오우미(近江), 야마토(大和)에서 43만석[각주:9]. 1591년 칸파쿠(関白)가 되었다. 1595년 추방당하여 자살. 28세.

  1. 즈이류우인 닛슈우(瑞龍院日秀). [본문으로]
  2. 히데요시가 자신이 세운 정권의 권위와 상징을 위해 쿄우토에 세운 정청(政廳)겸 주거지. [본문으로]
  3. 은퇴한 칸파쿠에게 붙여주는 경칭. [본문으로]
  4. 1593년. 1586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 양위한 상태였다. 여담으로 히데요시는 이 오오기마치가 양위하고 살 집(센토우고쇼(仙洞御所))을 마련한 공로로 칸파쿠(関白)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원어로는 'せつせう'라고 되어 있는 듯... 살생(殺生)과 섭정(摂政)의 발음은 둘 다 셋쇼우(せっしょう). 그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 섭정관백을 살생관백으로 말장난한 것. [본문으로]
  6. 히에이잔 측의 기록에는 없는 말이라고 한다. 야마시타 토키츠네(山科 言経)의 일기인 [토키츠네 경기(言経卿記)]에 따르면 히데츠구는 당일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뭐 이 헤이케모노가타리 듣는 것도 향락에 속하는지라 상황 붕어의 자숙하는 분위기에서 해선 안 될 행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이 뿐만 아니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이른 것에 따르면, 뭔 일이 있을 시에는 관백인 자신(히데츠구)을 따른다는 서약서를 비밀리에 제출하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그전(3살 즈음)에 '미야베 케이쥰(宮部 継潤)의 양자가 된 적이 있다. 양자가 되었을 당시 미야베는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의 유력 무장이었는데, 히데요시는 미야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며 안전보장 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조카를 양자라는 이름의 인질로 보냈다. 아자이 가문이 멸문되자 반환되었다. [본문으로]
  9. 그 후 오와리와 이세 등에 100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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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08.01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저 히데츠구의 고뇌라는것도 납득이 갈만도 합니다. 칸파쿠직을 다시 내어준들, 잠재적 경쟁자일 조카를 갓난아기인 친자식이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둘리도 없잖겠습니까..랄까, 애시당초 신뢰로 형성된 관계라면 모를까 저 센고쿠에 그런관계따위 있을리가 없죠.

    히데요시가 1592년 전에 죽었다면 어땠을까 싶긴 하군요. 뭐 느슨한 연합체이긴 하겠지만 도요토미 정권 비슷한게 에도바쿠후를 대신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2 1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군상 56, 센고쿠 무심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항목을 쓴 오오노 노부나가(大野信長)씨는 마지막에 흥미로운 해석을 해 놓았더군요.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이며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인인 고우히메(豪姫)를 히데요시가 평하며 한 말인...
      "남자였다면 칸파쿠를 물려줄 텐데..."라는 것을 들어, 히데요시는 가장 사랑하고 평가하는 인물에게 주는 칭호였다고(...문제는 저는 아직 히데요시가 고우히메에게 한 저 '칸파쿠 운운'하면서 천하를 준다는 말을은 고우히메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했는지 본 적이 없어서...뭐..임진왜란에서 대성공해서 히데요시가 중화황제가 되었을 시 일본 칸파쿠(즉 일본총독)으로 임명할 생각을 가졌다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은 있지만요)

      흥미롭군요. 1592년 히데요시 사망이라...
      아마... 히데츠구의 정권이 주욱 이어졌다고 쳤을 때... 히데츠구 인생의 유일한 패전이었다는 코마키-나가쿠테는 아마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처럼 말타고 달려드는 이에야스와 젊은 나이지만 중후한 히데츠구가 그것을 맞받아 치는 이야기도 생겼을 것이고...

      히데요시의 갖은 성공 뒤에는 어린 나이의 천재 군략가 히데츠구가 활약했다고 나온다던가..

      이에야스의 신격화가 진행되지 않았을 테니 이에야스를 똥싸개로 만든 타케다 신겐도 그냥 지방군벌 찌질이 레벨, 그에 이은 우에스기 켄신도 신경질 졸 부리는 약탈방화범...정도로 인식될지도요.

      (저런 것으로 IF전기를 써도 재미있겠군요 ^^ )

  2. 나라 2009.08.02 2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는 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3 0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운이 없는 편이라 생각합니다.

      코마키-나가쿠테에서 본전만 찾았더라도 이에야스는 코너로 몰렸겠고, 그랬다면 히데요시의 위상도 더 높아짐과 동시에 동국의 방파제로서의 히데츠구의 가치도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츠루마츠의 죽음도 어쩌면 운이 없다고 볼 수 있죠. 츠루마츠가 살았다면 적당한 위치에서 적당한 보호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겠지만, 츠루마츠의 죽음으로 준비도 없이 단번에 No.2 이후는 뭐...

      가장 운에서 버려진 것은 역시 히데요리의 탄생. 속 좁아져 자기 아들밖에 안 보이는 권력자의 눈에 No.2는 단순한 방해물밖에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뭐 머든 결과론이지만 말입죠.

  3. 나라 2009.08.03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는 히데요리가 탄생했을 때에 관백을 반납하고 머리를 낮췄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아니면 오슈의 제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_-;;)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들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그것땜시 나중의 비극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우선 절대로 없었을 것 같군요.
      오우슈우에서 조선까지 가는 동안(즉 일본 내에서의 이동 만으로) 어마어마하게 드는 쌀과 돈을 생각하면...
      거기다가 오우슈우의 무장들은 카사이-오오사키의 난, 쿠노헤의 난에서 이미 병역을 치루었기에 임진왜란 때는 면제가 된 것 같더군요. 굳이 갈 필요 없는데 간 다테 마사무네가 특이하다면 특이 케이스....하긴 임진년 초기에는 우에스기 패거리들도 건너가서는 금방 돌아온 애들이고.

  4.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8.03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게 다 히데요시 때문이다 랄까(...)
    물론 살생관백이라 불려질만큼 히데츠구가 저지른 일은 옹호할수 없지만... 히데요리에 정신이 팔려서 마무리가 흐지부지한것이...
    그냥 조용히 불러서 히데츠구 너님 다음 칸파쿠로 히데요리는 어떻냐 나중에 물려주면 안되겠냐 하고 좋게좋게 협상해서 끝났으면 나중에 이에야스 러쉬가 와도 토요토미씨 멸망까진 안갔을텐데 싶네요.

    그나저나 구레나룻이 뭔가 인상적이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살생관백으로 유명한 여러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소스를 시작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려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의 [태합님 군기에 대해서(太閤さま軍記のうち)]...것도 '그랬다!'가 아닌...'~라고 하더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며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이럴 때마다 느끼는 비애.. 원본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죠. '누가 그러더군요'는 식으로 쓸 수 밖에 없어 안타깝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히데츠구가 악행을 저질렀을지 어땠을지...개인적으로 청개구리파인지라 남들이 대세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비틀어 보는 경향이 있는지라 전 히데츠구 무실설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 히데요리도 히데츠구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눈치는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히데츠구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구렛나루 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도 한 구렛나루 합죠.... 그러고 보니 우지사토는 엄청 미남이라고 하며 히데츠구도 잘 생겼다는 이야기도 보이더군요...그렇담 센고쿠 미남의 조건 중 하나는 구렛나루?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는지요 ^^

    여기 오면서 <역사군상>이란 책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어떤 책인가 싶으면서도 머릿 속에 대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제가 생각했던게 그거였네요. 꼭 사고 싶지만 일본어와 비용의 압박이 심하군요 -ㅅ-;;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 잘 지내시죠? 전 덕분에 (돈 없는 거, 애인 없는 거, 집 나간 고양이 생각하는 거 빼 놓고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진 편입죠. 예전엔 고문을 그대로 쓰고 해석도 안 해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요즘엔 그래도 해석도 써 주고 루비(한자 위에 발음 써 주는 거)도 달려서 읽기는 많이 편해졌습니다....만 그 대신이랄지.. 가끔 황당한 주장을 실어서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황당한 주장이라면 학설같은건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6: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제가 또 말을 실수했네요. 그냥 잊어주시길. ^^; 료우마에 관한 것에서 료우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었다는 글이 워낙 인상에 남아서 실수를 저질렀네요.

  6. shiroyume 2009.08.08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양반... 전에는 히데요시한테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대망의 영향인지...)

    역시 생각해봐도 설사 히데요리가 안태어나도 붙잡혀 죽었을 듯. 어째 우리의 고려의 막장군주 충혜왕과 겹쳐지는건 -_-;

    그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양자가 되었을라나.

    저는 팩트를 중요시하는편이라 시바료타로를 재밌게 읽긴 하지만 링크걸어놓은걸 보니 확실히 뭐라고 해야하나...가독성은 떨어지는군요. 한국에서 인기가 없었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일본은 문화적성향상 디테일도 중요시 여기지만 한국은 가독성이 있고 흐름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최악의 사서로 평가받는 이문열 삼국지가 잘 읽히는건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주 무능하거나 알려진대로 좆병진이었다면 내버려 두어도 인심은 알아서 떠날 것이며 또한 자멸할 터이니 죽일 필요까진 없었겠죠. 아주 뛰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능력과 인덕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자신이 일군 업적을 빼앗길까 두려워 한 것이고 그렇게 참혹히 관련된 사람들을 죽인 거 아닐까요?

      츠루마츠 죽은 시점에서라면 히데아키처럼 처의 친족보다는 히데츠구의 친동생이며 역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히데카츠(秀勝)가 되었을지도...무엇보다 히데요시의 친아들 히데카츠의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이니까요.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야 제가 번역해서 그런 거고요. ^^;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역사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제대로 번역작업하시는 분이 하셨다면 정말 좋은 글이 나왔을 듯.

  7. 1 2009.08.10 0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료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라는 글 굉장히 구미가 땅기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블로그에 소개해주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그런 글을 올렸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분들이 있을까봐 피하고 싶군요.

      우리나라에 들어온 료우마의 인식이야 시바 선생의 '료마가 간다' 정도일텐데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유포시킬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불가능합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덧붙이자면 음모론은 거의 대부분이 구라입니다. 있는 사실을 빼놓고 주장하고픈 사실들만 나열해서는 독자를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료우마의 프리메이슨 꼬붕설은 그런 류의 하나입니다.

      일본어 아신다면 '신 역사군상 시리즈④ - 유신창세 사카모토 료우마' 150~152페이지를 참조해 주십시오.(몇 일전 들린 교보문고에 저 책은 아직 몇 권 더 있더군요)

  8. agger 2009.10.08 0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츠구의 여타 능력은 솔직히 잘 모르겠으나 정치적인 식견이 없었기에 죽음을 자초한것이라고 생각..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졌을때 알아서 기었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드는군요
    아니면 아예 요도도노에게 굽신굽신 하면서 히데요리의 후견인 비슷하게 가겠다는 정치적 움직임을 보여주거나..하튼 히데요시에게 안심을 주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어야 했는데..그런 부분이 안타까움..

    개인적으로는 히데요시를 참 좋아하고 그런 모습을 닮고 싶은데(말년빼구요 ㅋㅋ) 히데츠구가 죽은 시점이 도요토미가의 몰락?을 예견한 분수령이 된거같아서 아쉽게 느껴지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8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히데츠구에게는 히데요시를 안심케 할 만한 뭔가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런 일을 했는데도 히데요시가 부족했다고 느겼을 수도 있고요)

      히데요시가 히데츠구에게 붙여준 가신단의 면면들을 보면 확실히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단지 역시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이 토요토미 가문 그리고 히데츠구에게는 마이너스였던 것 같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모반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하지만 다인(茶人)으로서도 일류인 인물이었다.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챠완(井茶碗)은 '아라키 코우라이(荒木高麗)'라 불리며 명물을 기록한 여러 장부에 실린 천하의 명물이었다. 무라시게에게서 이에야스(家康)의 손으로 옮겨졌고 그 후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川家)[각주:1]에 전해져 지금도 토쿠가와 미술관(川美術館)에 보존되어있다.

 소년시대의 무라시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소년 무라시게는 힘이 대단히 셌다고 한다. 부친 요시무라(義村)를 태운 바둑판의 양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서는 방을 세 바퀴 돌았다고 한다. 겨우 12살 때의 일이다[각주:2].

 처음엔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가신[각주:3]이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幽))와 함께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가 뛰어난 활약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등의 다이묘우(大名)도 무라시게에게 배속되어 있었다.

 무라시게의 모반은 1578년에 뜬금없이 일어났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츄우고쿠(中)의 모우리 씨(毛利氏)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당시 무라시게는 셋츠(津)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무라시게의 뜬금없는 모반에 노부나가는 "무엇이 부족하여 그러는가?"라고 놀랐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하면서 "반역하려는 뜻을 버리고 인질로 모친을 바치도록"하고 설득의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로 보내진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각주:4], 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각주:5],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각주:6]였다. 히데요시도 이타미(伊丹)에 있는 무라시게의 거성(居城)으로 가서 뜻을 거두도록 재촉했다.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가 설득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모반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라키 가문의 가신이 노부나가의 적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 쌀을 밀매한 것[각주:7]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필시 진짜 원인은 노부나가의 잔인하고 폭군적인 성격을 무라시게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모반에 대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부나가에게 가려고 했지만 가노(家老)[각주:8]들이 "잠깐 동안은 용서하시겠지만 의심 많은 분이기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충고를 들은 것도 있어, 무라시게는 더 이상 오다 가문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청자(靑磁)로 된 꽃병(花甁)이 모반의 원인이라고 한다. 노부나가가 꼭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을 무라시게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삐졌다고 한다.

 승산이 있던 모반이 아니었다. 무라시게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무라시게의 휘하인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를 등돌리게 해서는 양도(糧道)를 끊자 무라시게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각주:9]. 이런 사정을 "처자식, 형제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처자식과 일족을 이타미 성(伊丹城)에 남겨둔 채 종자(從者) 5~6명만을 데리고 탈출한 것이다. 일단 아마가사키 성(尼ヶ崎城)으로 피신[각주:10]한 무라시게는 이후 하나쿠마 성(花城)[각주:11]에 갔다가 여기서 빙고(備後)로 가서 모우리 씨에게 보호를 청했다.

 무라시게에 대한 노부나가의 증오는 지독했다.
 그에 대한 보복은 이타미 성에 남겨진 무라시게의 처자에게 향해졌다. 21살의 미녀로 와카(和歌)가 뛰어났다는 무라시게의 부인을 시작으로 여관(女官) 등 122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때의 비명소리는 '하늘에도 소리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또한 여자 하인, 무라시게 부하의 어린 자식(
若党) 등 510여명을 네 채의 작은 집에 가두어서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고 한다.

 후에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친교가 있던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아 다인(茶人)으로 섬기며 일생을 마쳤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셋츠(摂津) 출신.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를 섬기며 셋츠 이타미 성(伊丹城) 성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에 임하고 있었지만 모우리(毛利)-혼간지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 후에 머리를 밀고 뉴우도우 도우훈(入道道糞)이라 자칭하였다. 1586년 죽었다. 52세.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쇼우군(将軍)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만들 수 있는 가문인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단 에도 시대를 통해서 쇼우군을 배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본문으로]
  2. 밥 많이 처먹는 아들에게 아비가 한 마디 하자 "무사는 힘이 쎄야 합니다"라 말하곤 그 증거랍시며로 저렇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정확히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셋츠슈고(摂津守護)인 이케다 카츠마사(池田 勝正)의 가신. [본문으로]
  4. 그의 딸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부인이었다. 참고로 이 부인은 이때 이혼하여 미츠히데의 중신 히데미츠(明智 秀満)와 재혼. [본문으로]
  5. 마츠이 유우칸은 사카이(堺)에서 노부나가의 대리인이었으며 또한 당시 노부나가의 차제구 수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다도에 밝은 무라시게와는 친분이 깊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6. 당시 노부나가 최측근 시동.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노부타다(信忠)에게도 신뢰 받고 있었다. 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포지션을 이어받은 것이 모리 란마루. [본문으로]
  7. 정확히는 무라시게 휘하에 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가신이 그랬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말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이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1년 가까이 버텼지만 무라시게를 궁지로 몰아 넣은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돌아섰기에 성을 버리게 된다. 참고로 상기의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는 이타미 성을 공격하다 전사. [본문으로]
  10. 이 성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거성. 참고로 이때 마지막으로 노부나가는 무라시게에게 아마가사키와 하나쿠마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이때도 싸우기는 하였다. 성을 공략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활약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 쓴 노부나가의 서장에도 언급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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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8 0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콘은 지가 용서비는걸 말려놓고 반란일으키니까 나중에 배신때리네요...

  2. 맹꽁이서당 2009.03.29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턴오버 님 말씀대로 우콘 황당하군요. 근데 노부나가 성격을 생각해보면 맞긴 맞는 말 같습니다.
    최소한 처자들에 대한 안전판은 마련해 놓고 거사를 일으킬 것이지.. 딸 뻘 (역산해보니 무라시게는 반란시 44세군요) 미녀 아내도 버리고 갈 정도면 알수없는 속사정이 급했나 보네요.

    이름은 모릅니다만, 노부나가 말년에 배신한 중신들이 몇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노부나가의 '광기'가 모두의 눈에 비쳤나 보네요. --a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9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나가의 성격은 결과론...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라시게의 배반은 노부나가에게 가신들에 대한 불신감 생성 버튼을 누르는 결과가 아니었나 하고도 생각하고요. 우콘이 도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저런 말을 했는지 아직까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모친을 인질로 받치고..."..를 보면 당시까지는 노부나나가 무라시게의 인질을 받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자마인 인물에게 셋츠를 맡기면서도 당시로는 당연시 되던 '인질'을 받지 않았던 것만 해도 노부나가가 무라시게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옅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만큼 충격도 컸겠고요. 일본에는...可愛さ余ってにくさ百倍...라는 말이 있습죠. 사랑했던 만큼 미움도 크다는 말인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이타미 성에서의 도주는....
      이런 설도 있습니다.
      이타미 성은 주변 강들과 절벽의 천연의 요새에, 성 안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総構え(호우죠우 오다와라 성의 유명한 구조...이지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総構え는 이 이타미 성이라고 합니다)...로 인해서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합니다. 따라서 도망이라기 보다는 아들 무라츠구의 아마가사키 성으로 가서 육지로는 오다 가문에게 포위된 것을 피해 배편(간척된 지금과는 달리 당시는 바다에 면한 성이었다고 하네요)으로 모우리(毛利)나 혼간지(本願寺)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다고도 합니다. 이타미 성이 워낙 튼실하니 자기가 없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노부나가를 배신한 중신은 미츠히데가 유일하지 않나요?

      전 아직까지는 이 무라시게의 배신부터 노부나가가 가신들에게 불심감을 품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3.29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다른 글에서 어느 중신이 (미츠히데 이전에)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야기를 봤었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다 보니 그가 바로 '아라이 마사시게'인줄 몰랐네요. 중복으로 생각한 셈이지요. --a 도자마 가신들에게는 인질이 당연시 되었군요. 덕분에 새로운 사실 하나 알아갑니다. ^^

    그러고보니 센고쿠 15권 말미에서 '외부 적들'과 '내부 적들'을 따로 작성하여 X를 긋는 노부나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군요. (물론 창작이겠습니다만...) 그땐 1574년이라 아라이의 반란 이전인 셈이네요.

    PS. 요새 이 블로그의 외부 링크를 타고 다른 블로거 분들의 역사 관련 포스팅을 훝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혹시 역사 쪽으로 추천해 주실만한 곳은 없으신지요? ^^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시대에서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 농성전만큼이나 인간성이 극한으로 몰린 것은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대규모 포위작전으로 인해 성은 완전히 아귀지옥으로 떨어져 사람 고기를 먹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은 그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전략)… 벼 베고 남은 그루가 최고의 먹을 것으로 나중에는 이조차 떨어져 말과 소를 먹었으며, 서리와 이슬을 맞고 약한 자는 아사(餓死)…(중략)… 말라 뼈만 남아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남녀가 성의 책(柵)에 달라붙어 포위군을 향해서 살려주소~하고 울어도 그것에 용서 없이 공격군의 철포가 집중되었다. 맞은 자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도 성안의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모여들어 다투어가며 그 살을 떼어 먹었다. 몸에서도 특히 머리가 맛있다고 하여 머리를 서로 뺏어가며 도망 다녔다…(후략)…

 히데요시의 ‘굶겨 죽이기. 칼도 창도 필요 없다’는 장기 포위공성전[兵量攻め]의 전형이 이 톳토리 성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다. 장기 포위공성전의 이점은 아군 병사의 손해 없이 상대의 자멸을 기다리는 것에 있다. 단지 시간이 걸린다. 이 공성전은 1581년 7월에 시작되어 낙성을 보기까지 반년을 요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서 출진한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를 정복한 뒤 산인[山陰] 방면으로 더 진출하여 톳토리 성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진귀한 현상이 일어났다. 성주인 야마나 토요쿠니[山名 豊国]가 단 혼자서 히데요시에게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모우리[毛利] 측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가신들은 원군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에게 청하였다. 그래서 파견된 이가 킷카와 일족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였다. 츠네이에는 성격이 우직하며 남다른 각오로 톳토리 성에 입성한 것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대규모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히데요시는 톳토리 성 멀리 3리(里) 사방부터 포위하였다. 그 포위한 진영은 산과 들의 형태를 바꿀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성밖 타이샤쿠산 산[帝釈山]의 정상을 깎아서 본진을 세웠고, 연장 2리(약 8km)에 이르는 포위선에는 흙으로 된 보루를 쌓고 책(柵)을 둘러 참호를 팠다. 약 1km마다 삼 층짜리 작은 성과 같은 망루(櫓)에 사수 100명씩을 두었고 또한 500m마다 초소를 만들어 사졸 50명씩 두었다. 밤에는 하늘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화톳불을 활활 피워서는 파리가 드나들 틈도 없을 정도로 엄중하게 경계를 섰다. 거기에 더해 히데요시는 이 진영에서 축제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시장을 만들어 여러 지역의 상인을 불러 모았고, 종을 치고 북을 때려 시끌벅적함 속에 유녀(遊女)들까지 불러들였다. 전투라기 보다는 관광유람에 가까웠다.

그러는 한편 히데요시는 이미 주변지역의 쌀과 보리 사재기에 빈틈없는 손을 쓰고 있었다[각주:1]. 시가 이상의 가격으로 쌀과 보리를 사들였기에 톳토리의 농민들은 앞다투어 팔았다[각주:2]. 톳토리 성 주변에서는 차츰 식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킷카와 측이 모우리에 부탁한 식량선도 오는 족족 히데요시의 수군으로 인해 격침되어 버렸다. 히데요시는 성안이 굶어가는 것을 기다릴 뿐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안의 식량난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가 결국에는 기아(飢餓)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 뒤는 지옥이었다. 이 공방전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성안의 사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져 간 것이다. 적은 철포보다도 무서운 배고픔이었다. 이대로 포위가 계속 된다면 전원이 성안에서 굶어 죽을 뿐이었다.

 츠네이에는 결심했다. 히데요시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츠네이에가 배를 갈라 책임을 지겠으니 성병의 목숨만은 살려주길 바랍니다’고 청원한 것이다. 일족인 킷카와 모토하루의 셋째 히로이에[広家]에게 보낸 편지에 ‘오다와 모우리가 싸우는 일본에서 가장 화려한 전쟁터에서 배를 가르는 것, 후대까지 명예라고 생각한다’고 써서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냈고,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듯 훌륭한 최후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킷카와 일족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는 심경을 적어 보냈다. 히데요시는 츠네이에의 담백함에 감동하여 될 수 있으면 목숨을 구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듯, 처음에는 목숨을 바꾼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엔 츠네이에의 바램을 인정하였다. 그 뒤 츠네이에는 성의 병사들과 이별 잔치를 벌이고 싶다며 술과 안주를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술 10상자, 그릇 10상자, 안주 다섯 종류를 보냈다.

 마지막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써 시동(小姓)으로 마지막까지 지켜본 야마가타 나가시게[山県 長茂]의 보고서가 남아있다. 츠네이에는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한 뒤 녹황색의 의상을 입고 주연에 참석하여 껄껄거리며 웃는 등 쾌활하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배를 가를 때가 되었을 때 갑옷상자에 앉아서는 큰 목소리로 “연습 같은 것도 해 본 적 없을 테니 필시 서투를 테지”하고 카이샤쿠닌(介錯人[각주:3])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은 더 세세하다. 와키자시[脇差[각주:4]]를 배에 꽂고는 기합과 함께 휘저었고 한번 칼을 뽑고는 다시 찔러 심장 아래까지 그어 올린 다음 배꼽 밑에까지 밀어 내리고선 와키자시를 배에 꽂은 채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 머리를 내밀었다… 츠네이에가 배를 가를 때 야마나 가문의 중신 몇 명도 뒤를 따라 배를 갈랐다.

 이리하여 성병의 대부분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성병들의 목숨이 사라져 버렸다. 극심한 기아를 겪은 후엔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 기아상태인 사람은 위나 내장이 쪼그라들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이 먹으면 급사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간을 들여 조금씩 먹으라고 지시를 하였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적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모처럼 도움 받은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家)]
이와미[石見]의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분가 출신이다. 본가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元春]가 이은 가문이다. 톳토리 성[鳥取城]에서 자해하였을 때 츠네이에 35세였다.

  1. 이나바의 근린인 와카사[若狭]의 상인들을 시켜서. [본문으로]
  2. 성병들 조차 돈에 눈이 멀어 성 안의 쌀을 팔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베어주는 사람. [본문으로]
  4. 일본 무사들이 차는 칼 두 자루 중 작은 칼을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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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증 2009.09.21 1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사람도 있었군요.. 전 시미즈 무네하루만 알고 있었는데...
    더군다나 할복장면은 시바타 가쓰이에보다 더한 '무사의 귀감'으로 평가받을만한 장면인듯도 하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9.22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리마[播磨] 진격을 주장하는 산요우[山陽] 방면 담당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역시 산인[山陰] 방면 담당인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주도권 싸움에 새우등 터진 듯한 인상이 있더군요.
      그래도 당시 일본에선 짱센 오다 가문과 싸우는 것이니 힘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할텐데, 이미 모우리 가문 자체가 산요우 진격으로 정한 것 같던데, 모토하루가 개인플레이 한 것 같더군요.

七.

 이 즈음, 쥬라쿠테이(聚楽第)를 방문하는 다이묘우(大名)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같은 자는 예전 가장 친한 척하며 한때는 10일에 한번 정도 방문했던 인물이었지만 발길을 끊었으며, 히데츠구에게 황금 100매를 빌렸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는 그로 인해 서로 사이가 좋다는 의심을 사는 것이 두려워 그 돈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결국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돈을 빌려 히데츠구에게 갚았다. 이에야스는 그 후 에도(江戸)로 돌아갈 일이 있었는데,쿄우(京)를 떠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쿄우(京)에 있던 세자(世子) 히데타다(秀忠)에게,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와 칸파쿠(関白=히데츠구)가 싸우게 되면 무조건 타이코우에게 붙어라. 타이코우가 만에 하나라도 죽는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오오사카(大坂)에 가서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각주:1])를 호위해라”

 는 말을 남겼다.
 이미 세상이 그렇게까지 과열되기 시작한 이상 히데츠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쿠마가이(熊谷)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정에 3000매의 백은(白銀)을
진납(進納)하였다. 장래 일의 경과에 따라 히데요시를 쓰러트렸을 경우 신정권을 곧바로 승인 받고자 위함이었다. 1595년 7월 3일이었다. 바로 그날로 이 비밀이 후시미(伏見)로 새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하여 다섯 명의 힐문사(詰問使)를 파견하였다.
 미야베 젠쇼우보우(宮部 善祥坊),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토미타 토모노부(富田 知信)였다.
 히데츠구는
인견(引見)하여, [모반이라니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모반할 생각은 없다]라는 뜻의 서약서를 써 건넸다. 백은을 진납한지 이틀째였다.

 다섯 명은 후시미(伏見)로 돌아와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그로부터 3일째 되던 날 다른 사자들이 쥬라쿠테이(聚楽第)로 파견되었다. 예전에 히데츠구의 숙로(宿老)였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 거기에 먼젓번의 미야베, 마에다 겡이를 포함한 다섯명이었다.

 “그런 뜬소문이 떠돌아 서로 의심이 생긴 것은 요컨대 서로 직접 이야기를 나누실 기회가 없어서일 것입니다. 후시미(伏見)까지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를 죽음의 사자라고 생각한 히데츠구는 끝까지 거부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그들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시미(伏見)에서 다른 이가 와서 별실에서
내알(內謁)을 청했다.
 비구니인 코우조우스(孝蔵主)라는 노녀(老女)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여관(女官)으로 히데츠구는 어릴 때부터 이 비구니와는 친했다.

 “이 비구니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세요”

 라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타이코우님은 기분 좋으십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하를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계시지는 않사옵니다. 아무 염려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숙로인 다이묘우(大名)들은 경계하였지만 이 비구니에게는 낚였다. 히데요시의 계략은 성공했다. 뒷문으로 들어온 이 비구니 쪽이 실은 죽음의 사자였다.

 “그런가? 그럼 가보세”

 라고 하며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측근인 쿠마가이들이 막을 틈도 없이 히데츠구는 비구니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히데요시에겐 손자뻘인 세 명의 아기들을 앞세우고 호위는 백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오후 조금 지나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출발하여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하였고 오후 3시 즈음에는 후시미에 도착했다. 후시미의 거리에서는 소란이 일어나 가재도구를 들고서 도망치는 이들도 많았다. 떠도는 소문에 히데츠구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온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생각치도 못했던 이런 반응에 놀랐다.
 ‘내가…… 내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인가?”

 “우선 오시는 길에서 맞은 먼지를 떨구시길”

 이라며 휴식소로 지정되었다는 키노시타 요시타카(木下 吉隆)의 저택으로 안내 받았다. 그러나 문에 들어서자 마자 은밀하고 재빨리 모든 문이 닫혔다. 이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곧이어 사자가 성(城)에서 와, 만날 필요 없다며 그대로 코우야(高野)산(山)에 가라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밤 승복(僧服)으로 갈아입고 후시미를 출발하여 이틀 후 코우야산(山)에 올라가 세이쥬쿠 사(青宿寺)에 도착하였다. 다섯 날째에 산기슭에서 타이코우 히데요시의 사자들이 각각 부하들을 이끌고 올라왔다. 정사(正使)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라 한다.

 “틀림없이 마사노리인가?”

 히데츠구는 확인을 위해서 물어보았다.

 “틀림없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달았다. 마사노리와는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안 좋은 채로 살아왔다. 그 마사노리가 이런 때 사자로 선정된 것을 보면 말로 듣지 않아도 명료했다. 죽음이다.

 역시 죽음을 언도 받았다.
 이 순간부터 히데츠구는 지금까지의 이 남자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죽음의 명령을 받았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문서담당관인 승려 사이도우(西堂)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의 이겨갈 때 즈음 마사노리의 명령을 받은 히데츠구의 측근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雀部 淡路守)가 와서는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히데츠구에게 보고했다. 히데츠구는 바둑판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겼다”

 고 뜬금없는 말을 하였다. 바둑이었다.

 “모두들 나중에 증거로 봐 두라고. 내가 이겼다”

 과연 주위가 그것을 보자 히데츠구가 이긴 바둑이었다. 이것 자체가 기묘했다. 여태까지 히데츠구가 사이도우에게 바둑으로 이겨본 적이 없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날 이때가 되어서야 이긴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기뻤는지 짝사랑을 앞에 둔 소년과 같이 볼을 붉히며,

 “지금부터 나는 배를 가르러 가지만 이 바둑판은 흩뜨려놓지 말게. 조심히 방으로 옮겨라. 모두 나중에 돌을 놓은 것을 잘들 살펴보게”

 라고 말하곤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를 향해,

 “유서를 쓰고 싶군. 허락되는지를 알아봐 주게”

 라 말하였다. 그것이 허용되었다.

 히데츠구는 자신의 친아비와 정실, 시첩(侍妾) 일동들에게 간결한 유서 한 통씩 세 통을 썼다. 붓놀림이 경쾌했다. 다 쓰고 난 후 붓을 던졌다. 던지고 난 후 승려 사이도우를 향해서,

 “내 일생은 타이코우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죽음도 또한 그렇다.”

 고 말했다. 자신의 생애가 하나하나 타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묘함을, 이 남자는 마음속 깊이 되돌아 본 것일 것이다.

 “이제 나는 죽는다. 이것도 타이코우의 뜻이다. 그렇지만 내가 내 배를 가르는 칼은 내 손안에 있다.”

 요컨대 배만은 자신이 가른다, 그것만은 자기자신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사이도우에게,

 “자네는 중일세. 죽을 필요는 없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이도우는,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제 맘대로 함께하겠습니다”

 라며 자신도 배를 가를 준비를 하였다. 사이도우는 참고로 코우조우스(孝蔵主)의 조카이다. 숙모의 거짓말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내심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 후, 곧이어 할복의 자리에 앉았다.
 착각을 했는지 이 남자는 동쪽을 향했다. 불법에 이르기를 부처는
서방십만억토(西方十萬億土)에 계시다고 한다. 서쪽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작법(作法)에 어긋납니다. 서쪽을 향하십시오”

 라고 사이도우가 충고를 하자 히데츠구는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다시 한번 충고를 하니,

 “부처님은 시방(十方)에 계시다고도 한다. 방위에 연연하진 않겠네”

 라고 말하였다. 적어도 생애의 마지막 정도는 자기 맘대로 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카이샤쿠(介錯)의 칼이 번쩍이며 시체는 작법이 틀린 채로 동쪽을 향해서 쓰러졌다.
 사이도우는 그것을 보고,

 “전하는…… 방향을…… 잘못 아시고 계시다. 이것이 묘하다. 전하의 생애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라고 말하였다.
 사이도우는 서쪽을 향했고 서쪽을 향해서 목이 떨어졌다. 자연히 시체는 히데츠구와는 반대 방향이 되었다. 사이도우가 마지막에 중얼거린 위에 말이 히데츠구의 생애를 상징한 말인 듯이 항간에 전해졌다.
 사실, 히데츠구는 태어난 연(縁)이 잘못된 것이다.

*********************************************************************************************************

 히데츠구가 죽은 뒤 그 처첩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는 성별의 구분 없이 전부 사형당했다.
 
형장(刑場)은 쿄우(京)의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이었다.
 60 평방미터 사방에
(濠)를 파고 거기에 울타리를 둘러쳤고 형을 집행하는 천인(賤人)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활과 화살을 들려주었다.

 집행된 것은 8월 2일.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남문(南門)부터 백색의
수의(壽衣)를 입은 그녀들을 몰아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천인들이 물건이라도 던지듯이 그들을 수레에 집어넣었고 한 대에 2~3명씩 태워서는 산죠우 강변으로 옮겼다.
 형장의 남쪽 구석에
토단(土壇)이 세워져 머리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히데츠구의 머리이었다.

 “저걸 봐라~! 저걸 보라구~!”

 라고 천인들은 소리 질렀고 지르면서 그녀들을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었다.
 울타리가 닫히고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녀들을 천인들이 쫓아가서 찌르고 잡아서는 베었다. 천인이 2~3살 먹은 어린 귀족을 잡아서는 모친의 눈 앞에서 강아지라도 죽이듯이 죽였고 그것을 보고 기절한 모친을 다른 천인이 안아 세워서는 목을 쳤다.

 이치노다이(一ノ台)도 그 딸인 미야노카타(宮ノ方)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녀는 사세구(辭世句)를 준비해 놓았다. 딸의 사세구는 이렇다.

 모녀의 헤어짐을 듣고 우울했지만, 같은 길을 가니 기쁘구나
 憂きはただ親子の別れと聞きしかど同じ道にし行くぞうれしき
 형은 공개로 행해졌다.
 수만의 구경꾼들이 형장을 에워쌌고 특히 장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죠우 다리에는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이 사형이 무엇 때문에 행해졌고,천하에 대해서 어떤 효과를 기대하며 공개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곧이어 처형은 종료되었고 원래부터 강변 한 켠에 파여져 있던 구덩이 속에 그들의 시체와 히데츠구의 머리가 함께 던져졌다. 흙이 덮이고, 그 무덤 위에 석탑이 세워졌다.
 악역을 저지른 히데츠구의 무덤[秀次悪逆塚]
 이라고 그 비석에는 새겨져 있다.

************************************************************************************************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의 친아비인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는 영지(領地)와 위관(位官)을 몰수당해 원래의 신분인 평민으로 떨어져 사누키(讃岐)로 유배당했다.

 “뭔 일이래……”

 이 야스케는 사누키(讃岐)의 유배지에서 자신이 먹을 땅을 괭이질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뭔 일인지... 이 친아비도 또한 자기 일생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殺生関白,了====================

  1. 히데요시의 정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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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요시 카즈미치야 뭐.. 본래의 운명으로 돌아갔으니 담담했을듯, 히데츠구도 마지막되니 제법 용자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는군요...

    그나저나 히데요시 친 누님은 어떻게 되었을련지.. 측근인 쿠마가이 녀석 운명도 궁금하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쪼록 수고하셨습니다. 대조해가며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할듯..(정말 소설은 읽으려니 ㅎㄷㄷ라..)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9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대조는 하지 말아주세요... 시바 선생의 필력을 살릴 수 없어서 여러 번 고생한 끝에 제멋대로 갔다붙인 곳이 많아서리..^^;

    참고로... 히데요시의 친누나이자 히데츠구의 어미인 즈이류우인 닛슈(瑞龍院 日秀)는 히데츠구가 죽은 후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 즈이류우인(瑞龍)원(院)을 세워 비구니 호인 닛슈(日秀)를 칭하며, 히데요시의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죽은 다음 해인 1625년 93살의 나이로 죽었다고 합니다... 친누나이니까 살려 주었나 보네요.

    쿠마가이 역시 연좌되어 할복을 명령받아 니손(二尊)원(院)에서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원서는 읽을 엄두도 안나서..(ㅎㅎ..)

    키타노만도코로보다 장수했다니..(히데요시보다 10여세 연하로 알고있는데..) 어지간한 장수군요...

    다시 읽어보니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소심함이 한층 엿보이는군요.. (어이, 아들내미한테는 한때는 이에야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며?ㅋㅋ..)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0 14: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이야기는 조금 의심이 가는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나)
    몇 몇 책에서는 히데츠구가 죽은 이후의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별일 아니었는데 히데요시 측에서 땡깡을 부렸다는 말도 있고, 또한 이에야스한테 돈을 빌렸다는 것도 조금... 왜냐면 그의 장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경우 돈을 잘 빌려주기로 유명했거든요.(뭐 하필이면 그 때 토시이에에게 돈이 없었다면 그 뿐이지만 말입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10 1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 돈 잘빌려주는 건 유명하지요(이아저씨는 꽃의 케이지에서의 주판영감이미지가 자꾸 떠올라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P.S. 타다오키 처 가라샤는 아케치 미쓰히데 딸내미로 알고 있는데.. 혈연이 참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습니다. (에휴...어려워서 원;)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0 2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로 힘이 있는 가문끼리 만세에 걸쳐 좋은 게 좋은 것지~ 라면서 겹사돈 맺는 거야 어느 시대 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가라샤...하면 전 타다오키의 의처증이 우선 생각나더군요... ^^ 쪼잔한 녀석~ 하면서..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7.12.11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살생관백 다음 챕터 대머리쥐의 일족 얘기도 있는지 궁금하군요. 고맙습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1 13: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위에서 다섯번째 리플... 타다오키의 장인 마에다 토시이에라 했는데, 사돈이군요... ^^; 이 실수는 자주 하는군요...--;

    깃쨩님//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은...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gt;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다룬 단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gt; 히데요시의 정실 '오네'를 다룬 단편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 -&gt;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를 다룬 단편
    스루가고젠(駿河御前) -&gt; 히데요시의 막내 여동생을 다룬 단편.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gt;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인물
    하치죠우노미야(八&amp;#26465;宮) -&gt; 황족으로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된 인물
    요도도노(淀殿)와 그 아들 -&gt;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와 히데요리(秀&amp;#38972;)의 이야기......

    가 남아 있으며... 매주 일요일 업데이트 할 예정(이라고 쓰고 '어긋나기 위해 계획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석된다....)입니다.

  10.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7: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처형장면이 너무나 비참하군요. 처자들이 뭔 죄가 있다고 죽여도 곱게 죽이지 어찌 저리 잔인하게 죽인건지... 이 때 이미 히데요시 정권은 끝난것 같습니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그들의 명복을 빕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642 11 25일 병사(病死) 76.

 

1569 ~ 1642.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중신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 타치바타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야나가와[柳川] 13만석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카이에키[改易][각주:1] 당했지만 후에 옛 영지(領地)를 회복. 이후는 막부(幕府)에 충성을 다했다.

 

 

 





야나가와-시마바라[島原]의 난

 

 1620 8 7일.

 치쿠고[筑後]의 영주 타나카 타다마사[田中 忠政][각주:2]가 에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36세. 세자가 없었고, 형인 야스마사[康正][각주:3]오우미[近江]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에[각주:4], 치쿠고[筑後] 야나가와가 주인 없는 빈 땅이 되었고, 8 20일에는 나이토우 마사나가[ 政長] 등의 막부(幕府)의 사자(使者)들이 야나가와 성[柳川]을 접수하러 왔었다.

 그 후 후임 다이묘우[大名]가 임명되기까지 치쿠고[筑後]의 행정은  미노[美濃] 부교우[奉行][각주:5] 오카다 젠도우[岡田 善同] 붕고[豊後] 후나이[府内]의 영주인 타케나카 시게요시[竹中 重義]히젠[肥前]시마바라[島原]의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가 위임 받았다.

 

 6개월간의 대관(代官)[각주:6] 지배 시기인 1620년 가을에 연공() 징수가 있었다.

 1655년에 쓰여진 시모츠마 군[下妻郡] 나카지마 촌[中島村]의 쇼우야[庄屋][각주:7] 이치로우베에[兵衛]의 기록에 의하면, 

붕고[豊後]마츠쿠라 붕고노카미 시게마사[松倉 豊後守 重政]은 자신이 담당한 곳 백성들이 (세금 내기가) 힘들다고 하여도, 집에 강제로 들어가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은 뭐든 싹 쓸어갔으며,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노오도리[蓑踊り] – (미노[蓑]란 비를 피하기 위한 짚 같은 것으로 엮은 도롱이이다. '미노오도리'란 사람에게 그 도롱이를 입히고 풀지 못하도록 줄로 묶은 상태에서 불을 붙여 고통으로 날뛰는 것을 춤이라 표현한 것으로 고문의 일종이다. – 역자 주)를 하게 만들었다. 우네메[采女]- 타케나카 우메노카미 시게요시[竹中 采女正 重義] 과 쇼우겐[監]- 오카다 쇼우겐 젠도우[岡田 監 善同]의 담당지역은 별로 심하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지배하고 있던 대관 지역의 연공 징수는 가혹했으며, 미납한 백성에게는 도롱이를 씌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 '미노오도리'를 시켰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주는 1616년부터 1630년까지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재임. 그 후 1638 4 12일까지 아들인 시게츠구[重次]가 이었다.

 그 사이 1637년 가을부터 1638 2 28일까지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天草島原の乱]의 난이 일어났다.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번주(藩主)가 기독교 농민에게 '미노오도리' '모쿠바세메[木馬責め][각주:8]', '꼬챙이 꿰기[さし][각주:9]', '지옥맛보기[地獄責め][각주:10]' 등의 고문이 행해지는 식의 학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난이 발생되기 16년 전에 이미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미노오도리'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가혹한 연공 징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노오도리'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원래는 연공 미납 농민에 대한 처벌 행위였다. 위정자()를 선택할 수 없는 농민들의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마츠쿠라 시게마사, 시게츠구 부자(父子)에 의한 대관 지배가 길어졌다면, 한 때 기독교 농민이 많았던 야나가와 영내(領內)에서 '야나가와-시마바라의 난'이 있어났을 지도 모른다.

 

야나가와 재 부임과 시마바라 출진(出陣)

 

 1620 11 27.

 쇼우군[軍] 히데타다[秀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예전에 그의 영지(領地)였던 야나가와의 영주가 될 것을 명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던 무네시게는 여러 지역을 방랑한 끝에 이에야스[家康]를 섬기었고 그 후 무츠[奥] 타나쿠라[棚倉] 3만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는 20년 만에 가보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제 54세가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가신 106명을 이끌고 타나쿠라를 출발. 에도에 들린 후, 쿄우토[京都]를 거쳐 오오사카에서 배로 세토 내해[瀬戸 内海]를 배로 타고 서행(西行). 코쿠라[小倉]에서 오래만에 치쿠고 로[筑後路]를 남하. 1621 2 28일에 야나가와 성[梁川城]에 입성하였다. 과거 야나가와 성에서 물러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민(領民),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대관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농민들은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부임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시작부터 적자였고, 1636년 시점에서 번의 채무금은 5100 칸메(貫目)에 달하였기에, 같은 해 막부에게 5만 냥(3150 칸메)을 빌렸다. 거기에 다음 해인 1637년에는 시마바라로 출진해야 함에 따라 500 칸메가 더 들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영민에게 '미노오도리'를 시키는 일 없이, 번사(藩士)[각주:11]의 땅을 거두어 들이고 봉급으로 대신하거나, 아리아케[有明] 해안의 간척을 추진하여 재원의 증가를 꾀했다.

 

 같은 해인 1637년 가을.

 아마쿠사,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기독교-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막부에게 출진을 명령받은 아들 타다시게[忠茂][각주:12] 11 16일에 에도를 출발. 12 6일에 야나가와에 도착.

 다음 7일에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배로 시마바라로 출진했다.

 다음 해인 1638 1 1일에 3회째의 하라 성[城] 총공격에서 막부 군()의 총 사령관인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 重昌]가 전사. 막부는 총 사령관으로 노중(老中)[각주:13]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를 파견. 무네시게도 1 13일에 에도를 출발, 2 7일에 시마바라에 도착하였다. 72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참전이었다.

 

 2 28.

 바쿠후 군의 총공격으로 하라 성은 낙성.

 무네시게는 일단 야나가와로 돌아온 뒤 다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해인 1639 4 3.

 가독(家督)을 적자(嫡子)에게 타다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류우사이[斎]'라는 호를 칭했다. ()를 좋아하여, 다인(茶人)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류우사이 공의 말씀 기록[公御咄之]'이라는 29개조의 유훈을 남기고, 1642 11 25일. 시모가야[下谷]의 야나가와 번 저택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76세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삭감. [본문으로]
  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 숨어있던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3. 요시마사의 둘째 아들. 야나가와 번[柳川藩藩)의 지번(支藩) 후쿠시마(福島) 3만석의 번주(藩主). [본문으로]
  4. 이곳 저곳 분산된 곳을 합쳐 2만석. [본문으로]
  5. http://valhae.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EC%97%90%EB%8F%84%20%EC%8B%9C%EB%8C%80%EC%97%90%20%EB%AF%B8%EB%85%B8[%E7%BE%8E%E6%BF%83]%EB%8A%94%20%EC%A0%84%EB%9E%B5%EC%A0%81%20%EC%9A%94%EC%B6%A9%EC%A7%80%EB%A1%9C%20%EC%9D%B8%EC%8B%9D%EB%90%98%EC%96%B4%20%EB%A7%89%EB%B6%80%EC%9D%98%20%EC%A7%81%ED%95%A0%EC%A7%80%EC%9D%B8%20%EC%B2%9C%EB%A0%B9(%E5%A4%A9%E9%A0%98)%EC%9D%B4%20%EB%A7%8E%EC%95%98%EA%B3%A0,%20%EA%B7%B8%EB%9F%B0%20%EC%A7%80%EC%97%AD%EC%9D%98%20%ED%96%89%EC%A0%95%EC%9D%84%20%EB%A7%A1%EC%95%98%EB%8B%A4. [본문으로]
  6. 영주를 대신하여 그 지역의 행정을 맡아 봄. [본문으로]
  7. 마을의 대표자 겸 세금 징수나 행정을 맡는 한편 마을 주민의 요청을 대변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몸통이 삼각형으로 된 다리를 붙인 말 형태의 고문틀에, 양 다리에 돌을 매단 사람을 앉혀서 그 무게가 가랑이 사이에 집중되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법, 현재는 SM플레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투르크의 전쟁 포로들에게 행했다고 하는 그 고문. [본문으로]
  10. 유황이 들어간 뜨거운 물을 몸에 뿌리는 고문. [본문으로]
  11. 번에 소속된 무사.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 [본문으로]
  12. 무네시게의 동생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의 넷째아들. 즉 양자. [본문으로]
  13. '로우쥬우'라고 읽는다. 에도 막부의 수상 격으로 4~5명이 1개월 당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맡았으며, 중요한 일은 전원의 합의에 따라 결과를 도출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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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26 04: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이에키 당했는데도 영지를 다시 받았군요.
    중국만 하겠습니까만 고문들이 어째 무시무시하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26 0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쵸... 하타모토(旗本)로 가문을 남긴 쪽은 좀 있다고 합니다만, 다이묘우(大名)로 된 것은 무네시게가 유일하다고 하더군요. 인품이 굉장히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이여송을 물리치 것으로 대표되는 무략이, 그를 부활하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하더군요.

    고문이야 세계 어디든 잔인하겠지요.
    여담이지만 &quot;장군의 새디즘&quot;이라는 일본의 옛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의 에피소드 2개 중 첫번째가 당시의 일을 그린 것이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26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치바나..ㅎㄷㄷ 무려 도우세츠의 양자이름값을 하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26 2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우세츠는 무네시게를 양자로 입적할 때, 하나의 테스트를 했는데...
    죄인을 가신에게 머리를 베라고 하고, 그를 피가 튀기는 위치에서 지켜보게 하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동맥의 맥박도 평상시와 다름 없었기에 무네시게의 대담함에 만족했다고 하더군요.

    도우세츠는 무네시게를 양자로 입적한 뒤에, 스파르타 교육을 시켰다고 하던데, 그 중에 하나로...
    밥을 먹다가 생선 가시를 입 안에서 고르고 있던 무네시게에게 소리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quot;생선의 뼈를 입 안에서 고르다니!! 그게 타치바나 가문을 이을 남자가 할 짓이란 말이더냐! 생선을 머리부터 먹어라, 이빨로 전부 부셔서 먹으란 말이다! 타치바나 가문을 이어야만 하는 남자가 생선 뻐도 먹지 못해서는 앞 길이 막막하구나!&quot;.. 라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26 2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정한 스파르타 교육이네요;;
    아, 이여송을 이 사람이 물리쳤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27 0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자세히는 대다수가 한성에서 농성하자는 와중에 유격하자는 무장이 둘이었는데 하나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타치바나 무네시게 였다고 하더군요.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선봉부대의 선봉부대였다고 하더군요. 가장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사족으로... 타치바나 가문의 벽제관 전투 기록에서, 물리친 명군과 조선 연합군의 수는 15만명이라고 하더군요.(당시 조선에 와 있던 명군 총 병사는 약 4만 3천명). 불릴대로 불렸더군요.
    조선 측의 기록(어느 것인지 기억이 안나네요..--;)에는 위력 정찰에 나섰던 명군 4000 정도의 기병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기습으로 혼란된 상태에다가, 눈이 녹아 진흙창이 된 논에서 기병의 특징을 살리지 못한 끝의 패전이었다고 하네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27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청나게 뻥튀기를 했네요^^;
    그래도 (실속은 없지만) 대국인 명의 부대를 공격해서 이겼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29 0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씀하신 대로, 당시 중화 사상에 근거한 천하의 슈퍼 파워를 이겼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7.11.08 2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관없는 소린데, 구루지마 가도 서군 편에 섰지만 에도 시대에 다이묘로 복귀했다네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09 08: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지식 고맙습니다. 찾아보니 정말 그러네요. 장인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노력으로 복귀했더군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2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와 나가시게(丹羽 長重 -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도 서군 측 -&gt; 가이에키 후 다이묘우군요...역시 함부로 단정지으면 안 되나 봅니다. 제가 모르는 또 누군가가 있을테니... 흑.. 쪽팔리네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ttl00013 BlogIcon 라빈스텐 2008.08.31 09: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네시게 불멸의 이순신에 노량해전에 나올뻔햇지만 아쉽게도 캐스팅 않되서 않나왓더군요..
    대사에 보면 무네시게의 대사 부분이 잇??인죠..
    어?w든 요놈도 이순신에게 호되게 당한인물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네시게가 이순신 장군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혹시 출전을 알 수 있을까요?

  14. 손님 2011.04.13 09: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네시게가 노량해전에서 고니시를 구출했기 때문에 나올 가능성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니시는 노량해전에서 따일뻔 했죠. 육전파트도 다뤘었다면 아마 백퍼 나왔을겁니다.
    울산왜성 전투에서 가토를 구한것도 무네시게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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