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서

☞ 링크 중 한문에 링크가 걸린 것은 위키피디아 일본판으로 점프합니다.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에 관한 이야기는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편찬사료들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부의 공식기록이라는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를 위시한 여러 사료들뿐만 아니라 ‘유영부녀전계[柳営婦女伝系]’, ‘옥녀기[玉輿記]’와 같이 토쿠가와 가문에 시집온 여인들에 대한 기록서에서 볼 수 있는 키요야스의 부인 케요우인[華陽院] 항목에서도 키요야스가 죽게 되는 모리야마의 변을 텐분[天文] 4년 즉 1535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와 개정 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따르면 키요야스의 미카와 군세는 당시 오와리[尾張]의 키요스[각주:1]에 있는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키요스가 노부히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1535년 당시 키요스는 노부히데의 영향력 밖에 있었기 때문입죠.

키요스

키요스는 당시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오다 야마토노카미 타츠카츠[織田 大和守 達勝]의 거성이었습니다.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텐분 원년(1532년)까지 키요스의 서쪽 쇼우바타[勝幡]에 있던 부하격인 단죠우츄우 노부히데[弾正忠 信秀]와 전쟁을 벌일 정도였습죠.

이후에는 소강상태가 이어집니다만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틈만나면 노부히데를 노렸으며 결국 오와리 제일의 실력자라는 노부히데가 1551년에 죽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사이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좋을 리가 없었겠죠. 당시는 하극상의 시대. 야마토노카미 가문에서 보기에 치고 올라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예전 가신을 좋게 볼 리는 없을 터이며, 단죠우츄우 가문 쪽 역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으니까요. 노부히데의 입장에서는 미카와의 키요야스가 키요스를 공략해 준다면 그 틈에 떨어진 떡고물을 취하려 할 지언정 도우러 갈 이유는 희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쇼바타 성[勝幡城]과 키요스 성[清洲城],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위치

어쨌든 이 키요스가 단죠우츄우 가문[弾正忠家]의 영지가 되는 것은 1555년 노부나가와 노부나가의 숙부이자 노부히데의 동생인 노부미츠가 손을 잡고 모략으로 키요스를 손에 넣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각주:2]

그렇다면 모리야마는?

자 그럼 모리야마는 누구의 영지였을까요?
위에 언급한 에도 막부의 기록들에는 노부히데의 동생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성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이 모리야마도 노부미츠의 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영지냐 하면, 바로 키요야스와 사이가 나뻤던 숙부 마츠다이라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의 영지였던 듯 합니다.

적어도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기 9년 전인 1526년에 렌가사[連歌師] 소우쵸우[宗長]의 일기에 모리야마에 있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저택에서 렌가회가 열려 거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또한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는 1535년까지도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각주:3]

이 모리야마가 언제부터 노부미츠의 영지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노부히데가 모리야마의 근방 나고야[那古野]를 손에 넣고 그곳에 있는 텐노우보우[天王坊][각주:4]라는 절의 토지 영유를 인정한 1538년 이후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난 1535년 당시에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였지 노부미츠의 거성이 아니었단 말입죠.

썰렁한 결말

즉 이 모리야마의 변에서 오다 가문이 낄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마츠다이라 종가[松平宗家]의 키요야스[清康]와 그 종가에 개기는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 간의 싸움이었습죠. 미카와∙마츠다이라 일족[三河∙松平一族]라는 책을 쓴 히라노 아키오[平野 明夫]라는 분은 마츠다이라 가문 종가와 분가의 다툼에 더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와 아시카가 요시츠나[足利義維] 다툼과도 관련이 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마츠다이라 가문 내부의 싸움이었을 뿐입니다.

또 하나 수상한 점.

◀왼편에 있는 그림은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 기록된 모리야마 변에 관해 기록된 곳입니다. 모리야마에 진을 친 키요야스에게 나이젠 노부사다가 노부히데와 내통하여 키요야스의 거성을 노리고 종가를 빼앗으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키요야스가 군사를 되돌리려 할 때 사카이[酒井], 오오쿠보[大久保]의 말에 따라 우선 군사를 되돌리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라고만 나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에 관해선 토쿠가와실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오른편의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그들이 누구인지 나와 있습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 가문의 면면들이 보이는군요.

사카이 사에몬노죠우 타다츠구[酒井 左衛門尉 忠次]와 오오쿠보 가문의 유명인인 오오쿠보 시치로우에몬 타다요[大久保 七郎右衛門 忠世], 오오쿠보 지에몬 타다스케[大久保 治右衛門 忠佐] 등이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이상한가 하면...

사카이 타다츠구 1527년생. 오오쿠보 타다요 1532년생 오오쿠보 타다스케 1537년생입죠. 그리고 모리야마 변이 일어난 해는 1535년.

그러니까 모리야마 변이 일어날 당시, 사카이 타다츠구는 9살. 오오쿠보 타다요는 4살, 타다스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입죠. 여담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개정미카와후풍토기의 저본인 미카와후풍토기에는 이시카와 카즈마사까지 등장한다고 합니다. 역시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모리야마의 변 당시 3살이옵죠.

이런 이유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영무자설[徳川家康の影武者説]을 발표하며 모리야마의 변이 1535년 키요야스 때의 일이 아니고 1561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키요스에 있던 것은 노부나가이며, 뒤에서 획책했던 것은 나이젠 노부사다가 아니라 당시엔 이에야스와 적대적이었던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水野 信元]라고 합니다.

1561년 이에야스가 죽어 영무자가 교체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기를 바꾸려다 보니 노부나가가 아닌 노부나가의 아비 노부히데가 된 것이며, 역시 미즈노 노부모토가 아닌 나이젠 노부사다가 된 것이라고요. 그리고 죽은 이는 키요야스가 아닌 이에야스였으며 이때 세라타 지로우사부로우[世良田 二郎三郎]라는 이가 역사상의 이에야스로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무라오카의 주장대로 1561년이라면 위에 사카이나 오오쿠보의 나이도 해결이 됩지요. 사카이 타다츠구 35세. 오오쿠보 타다요는 30세. 타다스케는 25세. 확실히 이정도 나이라면 옆에서 진언할 나이는 되겠지요.

뭐 저도 무라오카 씨의 주장에는 납득을 못합니다만 그가 이에야스 영무자설을 주장하기 위해 언급한 몇몇 것에는 흥미로운 점이 몇 군데가 있긴 합죠...뭐 이건 언젠가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기로 합죠.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의 이후

의심도 받았고 또한 자기 아들이 주군까지 살해하였다.
보통 이랬다면 바로 사형이고 실제로 현지 분위기도 그러했으며 아베 오오쿠라 자신도 대역무도의 죄를 지었다며 죽으려 했으나, 야시치로우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전편에서 언급했던 결백서가 발견되었고, 거기에 키요야스의 아들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용서를 얻어 이후 그에게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이후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가 종가의 히로타다를 죽이려고 할 때도 히로타다를 탈출시켰고 히로타다의 복귀를 의해서 힘을 써 실현. 히로타다가 죽은 이후 히로타다의 아들인 이에야스[家康]가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보호를 받을 때는 마츠다이라 가문을 대신해서 오카자키 행정관[岡崎奉行人] 중 한명으로 오카자키 주변을 다스리다 죽습니다(생몰년 불명[각주:5]).

아베 오오쿠라는 주군을 죽인 대역무도의 핏줄이라며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그의 측실이 아베 오오쿠라의 씨를 임신한 채로 시나노[信濃]에서 미카와에 와 있던 이노우에 키요무네[井上 清宗]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후에 이노우에 키요히데[井上 清秀]라는 사람이 되며, 키요히데의 자식들은 대대로 에도 막부의 요직에 취하여 후다이[普代] 명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는 清洲,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는 清須 [본문으로]
  2.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 織田喜六郎殿御生害の事. [본문으로]
  3.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오와리∙오다 일족[尾張∙織田一族]”(新人物往来社),p82 [본문으로]
  4. 사족으로 이곳은 노부나가가 어렸을 적에 공부한 절이라고 함. [본문으로]
  5. 위키에는 1549년 죽었다고 하나 1553년에도 오카자키 행정관 중 하나인 사카이 키요히데[酒井 清秀]와 함께 미카와 절들에 대한 문서가 남아있기에 1549년 사망설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ckyup 2011.03.07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흥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이정도 사건이면 아무리 용서를 받더라도 자결을 했을것 같은데요 - 조금 아이러니 하네요. 좀처럼 찾아볼수 없는 글을 올려주셔서 항상 갑사합니다.

 1535년 12월 초순.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

 13살에 가독을 이은 뒤 파죽지세로 마츠다이라 종가[松平 宗家]의 세력을 넓히고, 종가에 개기던 서가(庶家)를 가신단으로 편입시켰으며, 후다이 가신단[譜代家臣団]을 조직화하고, 직할지 농민 지배기구의 정비, 성 밑 마을[城下町]을 만드는 등 착착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길을 걷던 미카와[三河]의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각주:1]는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각주:2]를 공격하기 위해 오와리의 모리야마[守山/森山][각주:3]란 곳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분열된 마츠다이라 종가와 서가와의 사이를 이간질해 미카와에 진출하려는 오다 가문[織田家]을 정벌하기 위해서 였습죠. 그렇습니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종가와 서가간에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어련하면 ‘열 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라고 할 정도로 많은 그리고 독립적인 서가가 있었으며 그런 서가 중 실력자로 나이젠 노부사다(wike_jp)[松平 内膳 信定]가 있었습니다. 족보 상으로는 키요야스 아비의 동생 즉 키요야스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됩죠.

 노부사다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척들을 구성하는 외교에도 뛰어나, 자신의 부인은 오다 노부히데의 여동생이었으며, 노부사다의 딸들은 오와리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성주인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부인을 시작으로 카리야[刈谷]의 미즈노[水野], 마츠다이라 서가인 오오규우[大給], 나가사와[長沢] 가문에도 시집을 보내어 거대세력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 노부사다에게 종가라고는 하나 날뛰는 25살의 애송이 조카 녀석이 꼴보기 싫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오와리 원정에는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려서 못 나갑니다~ 하고 꾀병을 부렸습죠. 키요야스가 이끄는 미카와 군세가 이겨보았자 그 공은 전부 키요야스가 차지하게 되고 또한 그렇게 키요야스는 더 커질테니까요. 그래서 원정 참가를 하지 않는 대신 방해를 합니다. 내부의 적은 항상 있는 법입죠.

 키요야스를 지탱하는 유력한 가로 중에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각주:4]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내정 수완을 보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키요야스가 저렇게 매년 전쟁을 하는 것도 다 자기가 후방에서 지원을 잘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노부사다는 저 아베 오오쿠라와 키요야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여러 소문을 퍼뜨립니다. 아베가 오다 가문과 내통하고 있다건가, 아베가 잘난 척을 많이 한다던가 하는…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키요야스도 평소부터 아베에게 거리낌이 있었는지 그 소문을 곧바로 믿고 아베 오오쿠라와 자주 다투게 됩니다.

 그런 소문과 키요야스의 행동 때문에 상처 입은 아베 오오쿠라는 모리야마의 본진에서 아들 아베 야시치로우[阿部 弥七郎]에게 말합니다.
 “만약 뜬소문 때문에 내가 죄를 받으면 후대까지 오명을 입게 된다.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내 무죄를 신께 맹세하는 기청문(起請文)을 쓰니 니가 가지고 있으렴”
 아비의 투덜거림과 기청문을 받은 야시치로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뜬소문만 믿고 공이 많은 자신의 아비를 핍박하는 주군 키요야스가 너무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12월 4일.
 키요야스의 본진을 둔 절에서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나 말이 놀라 날뛰는 헤프닝이 일어났습니다.
 말이 도망가지 못하게 병사들이 소리질렀습니다.
 “도망 못 가게 해~ 문을 어서 닫아~”

 이 ‘도망 못 가게 해, 문을 닫아’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야시치로우는 하필 아비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있었기에 병사들의 저 외침은 날뛰는 말이 아니라 아비를 지칭한다고 오해하였습니다. 아비를 도망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취했습니다. 아비를 구하러 찾아다니다가 시간낭비를 하느니, 어디에 있는지 뻔한 키요야스를 찾아 죽이는 것입니다. 말잡이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지휘를 하고 있던 키요야스 곁에는 부하들도 말 잡으러 갔기에 혼란스러웠고 사람도 적었습니다. 아무 제지 없이 키요야스의 뒤로 다가간 야시치로우는 칼을 뽑아 “도망치게 하지 마라”고 외치는 키요야스의 등 오른 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베었습니다. 키요야스는 그 자리에서 사망. 아베 야시치로우도 키요야스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검의 명수 우에무라 데와노카미[植村 出羽守]에게 죽습니다.

 이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서 무명을 떨치던 키요야스가 죽어, 그의 아들이며 이에야스의 아비인 히로타다는 불과 10살의 나이에 가독을 이엇고, 종가를 쓰러뜨리려는 나이젠 노부사다에게 미카와에서 쫓겨나 이세[伊勢], 스루가[駿河]를 전전하게 됩니다.

 이상이 모리야마의 변에 대한 통설입니다.

 ...하지만 말입죠.

미야시타 히데키[宮下 英樹]의 오케하자마 전기 2권. 나카무라 촌[中村村]의 킨스케[均介]

제가 나카무라 촌[中村村]의 킨스케[均介]처럼 현장에 직접 가서 의문을 느끼진 못 했지만, 알려진 통설에는 의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죠.

계속~ (두둥~)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할애비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애비 [본문으로]
  3. 오다 측 기록에선 守山, 토쿠가와 측 기록에선 森山. 둘다 발음은 동일. [본문으로]
  4. 위키에는 아베 사다요시[阿部 定吉]라는 휘(諱)가 있으나, 당시 기록은 그냥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라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정동희 2010.12.13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글이 기대가 되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12.13 18: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법학도 그렇지만 사실 통설은 별로 재미가 없죠...(아닛!) 아무래도 뭐든 그렇듯 판례에 입각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 보다는 좀 더 신선한 설을 바라는것이 인간의 심리가 아닌 것이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오덥니다(ㄷㄷ...)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2.16 0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고 있다보니까 신선미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렇게 이해하기 쉬운 구성이다 보니 기억하기 좋은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역전이 흥미롭고 다이나믹하긴 하지만(역전재판!!) 개인적으로 판결은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ckyup 2010.12.13 2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이거정말 눈물나게 감사합니다. 단편도 아닌, 미니시리즈로 올려주시다니..., 한 2년 동안 계속 블로그를 방문해온 보람이 있는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아베가문은 멸문을 당했을것 같군요. 다음편 왕 기댐니다.

  4. shiroyume 2010.12.20 1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그래도 제 블로그에 이름 찍힌거 보고 들어왔더니 활동하고 계시네요 ^^

    그 생각나네요. 노부나가의 야망 창천록에서 기요야스로 플레이하면 도중에 암살당해서 무능력쟁이 히로다다로 플레이해야 되서 뒷골땡기던 기억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2.31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이 바쁘기도 하고, 집에 가면 역시 잠자기 바뻐서 거의 활동정지 중입죠.

      천도PK-노부나가 탄생 시나리오 편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로 플레이하면 모리야마의 변 이벤트 덕분에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공짜로 얻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5. Favicon of http://panzerbear.blogspot.com BlogIcon 길 잃은 어린양 2011.02.17 2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다음주 토요일(26일)에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들께 책도 나눠드리고 간단한 술자리도 마련할 까 하는데 시간이 어찌 되시는지 궁금해서 댓글을 남깁니다.

    작년에는 평일에 바쁘신데도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다음주에는 일정이 어찌 되시는지요? 바쁘지 않으시다면 한 번 뵙고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2.18 1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참석하겠습니다.

      양대인같은 분 만나는 자리를 어찌 마다할 수 있겠사옵니까.
      더구나 이 무명소졸에게 친히 왕림하시어 불러주시는데야 애인과의 약속이 있다해도 취소하고 가야합죠.

  6.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11.02.22 1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뵙습니다 ^^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겨 놀러왔네요.
    그동안 못 본 글들을 천천히 여유있게 읽어야겠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8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유가 생기신 것 같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도 요 몇년 간 블로그를 좀 버려둔 것 같아서 이제부터 조금이나마 부지런히 포스팅하려 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연도를 제외하고 날짜는 전부 일본의 구력(舊曆 ) 기준입니다.(신력 찾기 귀찮아서요…)
한글에 링크된 부분은 다음 백과사전.
한문에 링크된 부분은 위키 일본판 해당 사항으로 링크된 것입니다.

신관제의정서가 만들어지기까지

 1867년. 그러니까 일본에선 케이오우(慶応) 2년 6월.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던 야마우치 요우도우(山内 容堂)는 도막(倒幕)으로 치닫는 삿쵸우(薩長)에게서 토쿠가와 가문을 지키기 위한 방도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사카모토 료우마(坂本 龍馬)가  등장하여 선중팔책(船中八策[각주:1])을 건의합니다. 
 이것을 토사번(土佐藩)의 고토우 쇼우지로우(後藤 象二郎)에게서 전 번주(藩主)인 야마우치 요우도우에게로 그리고 야마우치는 바쿠후(幕府) 노중(老中)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 勝静)에게 역시 건의하여 1867년 10월 14일 당시 쇼우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는 조정에 정권을 반환하게 됩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여기서 잠깐~
 사카모토 료우마는 토쿠가와 바쿠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에도 시대 때도 다른 번(藩)에 비해 유별나게 차별 받던 토사의 고우시(郷士) 출신이었기에 그 토사 번을 성립시키고 유지시키는 바쿠후를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일본 전체를 위해서 원한 깊었던 토사 번을 이용하기로 하였으며 [각주:2], 또한 삿쵸우가 하자는 대로 무력도막으로 발전할 경우 발생할 전란과 거기에 파고들려는 서구열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카모토는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거부할 시 아예 요시노부를 살해하려고 까지 합니다. 요시노부는 3년 전인 1863~1864년에 존재했던 유력 다이묘우 출신자들의 연합정권인 참여회의(参預会議)때만 하더라도 바쿠후의 권위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어렵게 성립된 참여회의를 무너뜨린 경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건백을 반드시 성공시키고 실패시에는 고토우에게 배를 가르라며[각주:3],

난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있었으니까 만약 건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종묘사직을 위해서 카이엔타이(海援隊)를 이끌고 입궐하려는 쇼우군을 죽일 생각입니다. 그리 되었을 시는 저 세상에서 선생(고토우)와 만나겠습니다
万一行ハれざれば固より必死の御覚悟故、御下城無之時ハ、海援隊一手を以て大樹参内の道路ニ待受、社稷の為、不倶戴天の讐を報じ、事の成否ニ論なく、先生地下ニ御面会仕候
- 1867년 10월 13일에 고토우 쇼우지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때 고토우에게서 성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그 권력과 권위에 집착하던 요시노부가 일본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따라 준 것을 기뻐하며,
쇼우군 가문의 지금 심정을 이해합니다. 훌륭한 결단을 내려주셨군요. 훌륭한 결단을 내려주셨군요. 맹세하오니 저는 공(즉 요시노부)을 위해서 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将軍家の今日の心中さこそ察し申す。よくも断じ給えるものかな。よくも断じ給えるものかな。余は誓ってこの公のために一命を捨てん
-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 栄一)의 [徳川慶喜公伝]에서[각주:4]
 라며 정권을 조정에 반환하여도 다시 정치에 참여할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신관제의정서(新官制疑定書)입니다.(요시노부가 받아들인 배경에는 정치체계만 바꾸어 대정봉환 후에도 계속 토쿠가와 가문이 권력을 좌우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꿍꿍이도 있었습니다)

각각의 면면들 

 사카모토 료우마는 산죠우 가문(三条家)의 케닌(家人[각주:5])인 토다 우타(戸田 雅楽)와 협의하여 대정봉환 후의 관료를 정하게 됩니다. 산죠우 가문 사람과 협의한 만큼 일본 황실의 친왕들보다 낮은 기껏해야 세이가케(清華家[각주:6])인 산죠우 사네토미가 무려 칸파쿠에 임명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칸파쿠(関白)

산죠우 사네토미(三条 実美) - 8월18일의 정변(八月十八日の政変)으로 쿄우토(京都)에서 쫓겨난 존왕양이(尊皇攘夷)파 쿠교우(公卿)들 즉 소위 칠경낙향(七卿落ち) 중 가장 가문의 격식이 높았던 것과 토다 우타 덕분에 칸파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귀족)

나이다이진(内大臣)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최후의 쇼우군(将軍). (바쿠후(幕府))

기소우(議奏)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 熾仁 親王) – 쵸우슈우(長州)와 끈이 강했던 친왕. 14대 쇼우군(将軍) 이에모치(家茂)의 부인(카즈노미야(和宮))은 원래 이 사람과 약혼한 사이였기에 정혼자를 빼앗아 간 바쿠후에 원한을 갖고 있었습죠.(왕가(宮家))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친왕(山階宮 晃 親王)  - 후시미노미야 가문(伏見宮家[각주:7]) 출신. 친왕이면서 무려 개국론을 주장할 정도로 깨인 인물. 1863년 조정(朝廷)내에 설치된 정무 의론 기관 [国事掛]의 수장 격인 [국사어용담당(国事御用掛)]에 있을 정도로 친왕 출신 치고 뛰어난 정치력을 소유. (왕가)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친왕(仁和寺宮 嘉彰 親王) – 대정봉환 전까지만 해도 닌나 사(仁和寺)에 있었기에 활약은 없었습니다. 아마 닌나지노미야가 토다 우타의 친가인 오자키(尾崎) 가문의 주인댁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왕가)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忠義) – 당시 사츠마 번(薩摩藩)의 번주 (사츠마 번)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 – 기록에 따라 그의 양아들인 모우리 사다히로(毛利 定広)가 그의 이름대신 들어가 있기도 함.(쵸우슈우 번)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 春嶽) – 그야말로 막정을 좌지우지하던 사람. 후쿠이 번(福井藩)의 번주. 당시 나름 똑똑했다는 네 명의 번주를 이르는 사현후(四賢侯) 중 한 명.(후쿠이 번)

야마우치 요우도우(山内 容堂) – 토사 번(土佐藩)의 전 번주. 당시 나름 똑똑했다는 네 명의 번주를 이르는 사현후(四賢侯) 중 한 명.(토사 번)

나베시마 칸소우(鍋島 閑叟) – 번주가 가는 길에 상인들이 빚 갚으라며 막아서던 막장 사가 번(佐賀藩)을 일본에서 가장 하이테크한 번으로 만든 인물.(사가 번)

토쿠가와 요시카츠(徳川 慶勝) –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오와리 번(尾張藩)의 전 번주(오와리 번)

다테 무네나리(伊達 宗城) – 우와지마 번(宇和島藩)의 전 번주. 당시 나름 똑똑했다는 네 명의 번주를 이르는 사현후(四賢侯) 중 한 명.(우와지마 번)

오오기마치산죠우 사네나루(正親町三条 実愛) – 사츠마 번(薩摩藩)과 끈이 강했던 귀족. (귀족)

나카야마 타다야스(中山 忠能) – 메이지 텐노우(明治天皇)의 외조부.(귀족)

나카미카도 츠네유키(中御門 経之) – 양이(攘夷)파 귀족.(귀족)

산기(参議)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 당시 조정에서 가장 정치력이 높았던 귀족. 출세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인물.(귀족)

히가시쿠제 미치토미(東久世 通禧) – 칠경낙향 멤버 중 한 명.(귀족)

오오하라 시게토미(大原 重徳) – 국사어용담당(国事御用掛). 친막파 귀족이나 친왕과 자주 대립(귀족)

나가오카 요시노스케(長岡 良之助) – 호소카와 쿠마모토 번(細川熊本藩) 번주의 자식.(히고 번)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 – 유신삼걸(維新三傑) 중 한 명.(사츠마 번)

코마츠 타테와키(小松 帯刀) – 사츠마 번의 실질적인 수상. 솔직히 이 사람 없었음 유신도 없었다고 생각함. (사츠마 번)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 利通) – 유신삼걸 중 한 명.(사츠마 번)

키도 타카요시(木戸 孝允) – 유신삼걸 중 한 명.(쵸우슈우 번)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 真臣) – 왕정복고의 공신에게 조정이 내린 식읍(永世禄)을 쵸우슈우에서 받은 번사(藩士)는 키도(木戸)와 히로사와 뿐.(쵸우슈우 번)

요코이 쇼우난(横井 小楠) – 사카모토 료우마는 이 사람의 심부름꾼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카모토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히고 번[각주:8])

유리 키마마사(由利 公正) – 후쿠이 번의 재정을 재건하여 막말기에 후쿠이 번이 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함.(후쿠이 번)

고토우 쇼우지로우(後藤 象二郎) – 뛰어난 정략가. 토사 근왕당(土佐勤王党)을 탄압하는 바람에 당시 정세에 뒤쳐져 있던 토사를 단번에 유신의 주역 중 하나로 만들었습죠.(토사 번)

후쿠오카 타카치카(福岡 孝弟) – 대정봉환과 삿쵸우와 토사의 동맹에 조력(토사 번)

 후에 삿쵸우도비(薩長土肥)의 출신자들만 득세한 메이지 정부에 비하면 실로 다양한 출신들이 이름을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료우마가 직접 만난 이들이 대부분(친왕이나 귀족계층의 일부는 토다 우타(戸田 雅楽))의 의견이 반영된 듯)인지라 료우마의 발이 얼마나 넓은지도 알 수 있습니다.

 발 넓은 료우마가 직접 만나 상대방의 그릇을 재가며 선택한 인물 중에 그의 스승이라는 카츠 카이슈우(勝 海舟)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시는 바대로 사카모토도 카츠를 높게 평가하긴 하였습니다.

원래 인간의 일생은 처음부터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지요. 운이 나쁜 사람은 목욕탕에서 뒤로 자빠졌는데도 불알이 깨져 죽는 법도 있으니까요.
그에 비해 저는 운이 강한지 죽을지도 모른다고 곳에 가서도 죽지 않으며, 스스로 죽으려고 생각하더라도 아직 더 살면서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지금은 일본 제일의 인물 카츠 린타로우(勝 憐太郎)라는 사람의 제자가 되어 매일매일 여러 아이디어를 짜느라 노력하고 있습니다
扨も扨も人間の一世ハがてんの行ぬハ元よりの事、うんのわるいものハふろよりいでんとして、きんたまをつめわりて死ぬるものもあり。
夫とくらべてハ私などハ、うんがつよくなにほど死ぬるバへででもしなれず、じぶんでしのふと思ふても又いきねバならん事ニなり、今にてハ日本第一の人物勝憐太郎殿という人にでしになり、日々兼而思付所をせいといたしおり申候
1863년 3월 20일에 누나인 오토메(乙女)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잠시 같이 행동하긴 하지만 그 후엔 카츠를 쌩깝니다. 시기 상으로는 대략 칠경낙향(七卿落ち)에 이은 금문의 변(禁門の変)에서 사츠마 군의 지휘관으로서 대활약을 한 사이고우 타카모리에게 만나보려고 하니 카츠 카이슈우에게 소개장을 써달라고 한 즈음부터입니다. 1864년 여름 즈음입죠.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카츠 카이슈우의 개차반[각주:9]같은 성격으로 인해서 신정부라는 밭에 생길 불화의 싹을 미리 제거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더 이야기를 이어갑시다.(…다 쓰고 나서야 이 글의 목적인 료우마가 구상한 신정부의 관료에 카츠 카이슈우(勝 海舟)의 이름이 없다는 것만 쓰면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기에…)

 저 이름들 속에는 토다 우타의 강력한 추천으로 사카모토 료우마의 이름도 산기(参議)에 있었지만 몇 일 후 사이고우 타카모리에게 보여주었을 때는 료우마가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빼고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사이고우는 저 면면들을 보고 정말 균형 잡힌 인선이라고 하며 사카모토의 이름이 없는 것을 말하자…

“나는 공무원이 싫어.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서 정해진 시간에 집에 돌아오는 것은 나하고 안 맞아”

“그럼 무엇을 할 생각인가요?” 라고 묻는 사이고우에게

“음… 세계의 카이엔타이(海援隊)라도 만들까?”

이 말을 옆에서 듣고 무츠 무네미츠(陸奥 宗光)는,

“료우마와 비교하면 작금의 삿쵸우 인간들은 쭉정이지. 유신이 되기 전 신정부의 관료를 정할 때 료우마는 세계의 카이엔타이를~하고 말했어. 그때 료우마는 사이고우보다 한 층 더 거대해 보였지”
龍馬あらば、今の薩長人などは青菜に塩だね。維新前、新政府の役割を定めたる際、龍馬は世界の海援隊云々と言えり。この時龍馬は西郷より一層大人物のように思われき”

고 후일 말했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료우마의 이름이 있었던 듯 합니다.[각주:10]

신관제의정서(新官制擬定書)에서는 산기(参議)에 이름이 있던 사카모토 료우마

 이 신관제의정서(新官制擬定書)는 오자키 사부로우(尾崎 三良)가 쓴 기록 등에서 나옵니다. 참고로 오자키 사부로우란 사카모토 료우마와 함께 신관제의정서를 만든 토다 우타(戸田 雅楽)가 유신 후 친가의 성(姓)으로 돌아가면서 칭한 이름입니다.

오자키 사부로우의 기록은 이하와 같습니다.

[오자키 사부로우 자서전(尾崎三良自叙略伝)],
[역사 담화 속기록, 79편, 오자키 사부로우 담화(史談会速記禄, 79輯、尾崎三良談話)]
[‘사카모토 료우마 관련 문서’ 1권에 수록 된 ‘오자키 사부로우 비망록’(坂本龍馬関係文書1巻, 尾崎三良手控)]
[‘사카모토 료우마, 카이엔타이의 알파와 오메가 3’에 인용 된 ‘오자키 사부로우 비망록’(坂本龍馬海援隊始末 3, 尾崎三良手控)]
[유신 토사 근왕사(維新土佐勤王史)]

 저 다섯 개의 기록 중 상기 3개(붉은색)와 하기 2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기 2개 즉 [‘사카모토 료우마’ 관련 문서]와 [유신 토사 근왕사]는 오자키 사부로우의 기록을 근거로 ‘사카자키 시란(坂崎 紫瀾)’이라는 인물이 쓴 글입니다. 즉 원 소스에 있었던 [산기(参議) 사카모토 료우마]를 없앤 것이죠. 이 사카자키 시란이란 사람은 어째서 있었던 이름을 지운 것일까요?

사카자키 시란(坂崎 紫瀾)이란 인물.

 사카자키 시란은 토사 번 출신입니다.
 유신 후 메이지 정부에서 마츠모토(松本)란 곳의 재판소 판사를 했지만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다 정쟁에 패하여 사직 & 낙향. 후에 고향인 토사에서 도요우 신문(土陽新聞 – 현 코우치 신문(高知新聞))에 사카모토 료우마를 주인공으로 한 [한혈천리마(汗血千里駒)]를 썼는데 이것이 인기폭발. 현 일본에서 역사상 좋아하는 인물 1,2위를 다투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각주:11].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오는 료우마 관련 소설들은 이 [한혈천리마]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많이 차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소설이라고 합니다.
 당시 일본 정계와 군부는 삿쵸우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항하여 정부의 중추에서 밀려난 토사 출신자들은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을 벌이며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총리인 자유당(自由党)을 결성하였습니다. 사카자키 시란은 이 자유당의 일원으로 자기 고장의 인물 사카모토 료우마의 전기소설인 [한혈천리마]를 써 료우마를 자유민권의 선구자로서 자유당 이념의 화신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실은 소설과 다른 경우가 많습죠.

 그런 료우마가 권세를 휘두르는 관료라니? 자유민권의 이념과 반했던 것이죠. 그래서 소설에서는 그런 부분을 뺀 것입니다.

 료우마가 등장하는 소설, 드라마, 영화에는 항상 나오는 “세계의 카이엔타이(海援隊)라도 할까”라는 부분은 일본을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것을 내세워 권세를 휘두르는 일 없이 시선을 전세계로 향했던 료우마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호 료우마.
 사람 죽이지 않았던 료우마.
 해군 사관학교의 생도 대표인 료우마
 인물이라는 카츠 카이슈우와의 멋진 사제지간
 삿쵸우 동맹을 생각해낸 사람
 대정봉환을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 등등의 잘못 알려진 많은 료우마 전설.

 실제로 료우마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지금처럼 여전히 인기가 있을까요? 궁금해질 때도 있습니다.

ps1;쓰기 시작한 것은 “그냥 보충”에서 댓글로 쓴다고 한 날부터… 근데 여태까지 남의 지식을 번역만 했지 직접 글을 쓴 적이 없기에 이렇게 오래 되어 버렸네요. 늦어져서 죄송.
ps2;역시 직접 쓴 적이 없기에 적당히 끊어야 하지만 아직 경험 미숙으로 읽기 힘든 난잡한 글이 되고 말았네요. 그 점도 죄송.
ps3;다음 일본사 칼럼은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은 정말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만이 될 수 있었을까?” 혹은 “쿄우토와 조정을 지켰다고? - 중세의 조폭 엔랴쿠지(延暦寺)” 아니면 “웅대한 꿈과 그에 비례한 찌질한 행태 – 카츠 카이슈우(勝 海舟)”편 입니다. 북극해의 얼음이 다 없어지기 전까지는 쓰겠습니다.

  1. 사카모토가 나가사키(長崎)에서 쿄우토(京都)로 향하는 중 배 안에서 토사번의 참정(参政 - 산세이) 고토우 쇼우지로우에게 제시한 것 [본문으로]
  2. 이때 토사 번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다그치는 누이(坂本 乙女)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 이것저것 생각해주셔서 간신배에게 속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러지 마시길. 나 혼자서 500명이나 700명을 이끌고 천하를 위하는 것보다 24만석을 가지고 천하국가를 위하는 것이 훨씬 나으니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이런 것에 누님이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かれこれの所御かんがへ被成、姦物役人にだまされ候事と御笑被下まじく候。私一人ニて五百人や七百人の人のお引て、天下の御為するより廿四万石を引て、天下国家のの御為致すが甚よろしく、おそれながらこれらの所ニハ、乙様の御心ニハ少し心がおよぶまいかと存候。 1867년 6월 24일 [본문으로]
  3. 료우마는 신분이 너무 미천했기에 직접 나설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4. 동시대에는 없었던 말로 이 말은 저 책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본문으로]
  5. 상급귀족 가문에 속한 가신. [본문으로]
  6. 일본 귀족(公家)의 가문 격식 중 두 번째. 칸파쿠는 원래 셋케(摂家)만이 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7. 미야 가문(宮家)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 [본문으로]
  8. 이지만 실질적으로 활약한 곳은 후쿠이 번(福井藩). [본문으로]
  9. 뭐 이에 대해서 핼리혜성이 다시 지구에 돌아오기 전에 또 포스팅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10. 즉 무네미츠도 모르지만, 없다는 이야기가 워낙 퍼져있기에, 무츠 자신이 인기인 료우마랑 친했다는 식으로 자랑했다는 말입죠. [본문으로]
  11. 이후로 러일전쟁 때 츠시마 해전(對馬海戰)을 앞두고 료우마가 메이지 텐노우의 황후인 쇼우켄 황후(昭憲皇太后)의 꿈에 나타나 일본 함대를 지키겠다던가,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의 소설 [료우마가 간다(竜馬がゆく)]의 히트로 이어지며 결정적인 것이 되었습죠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Bolivar 2009.07.02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기라는 점을 제하고 보면 평가는 상당히 변하겠지요. 그래도 유신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람인건 틀림없는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막말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강경일변도로 끝장까지 가는 항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궁금해 하는데 료마는 그 방향을 바꾸는데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2 0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요한 사람입죠. 낭인주제에 무려 삿쵸우의 동맹에 보증을 설 정도이다 보니.

      혹자는 신센구미의 이케다야 사건으로 유신이 몇 년정도 늦추어졌다고 하던데(개인적으로는 몇 년정도 빠르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료우마의 왕성한 활동력이 오히려 유신을 일찍 불러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 그 사상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것(오오쿠보 이치오우(大久保一翁)나 요코이 쇼우난(横井小楠), 나카오카 신타로우(中岡慎太郎))이지만 직접 실행한 료우마가 없었다면 전부 공염불이 되고 말 것들인지라

      근데 저것이 실행되기 전에 료우마가 암살되어 신관제의정서는 쓰레기 통으로 향한지라...(이어진 것은 토다 우타의 삼직제도 - 총재, 의정, 참여 각각 칸파쿠, 나이다이진(총재), 기소우(의정), 산기(참여) - 라는 시스템 말고는 없네요)

      때문에 요시노부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후쿠이 번의 마츠다이라 슌가쿠를 통해서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직 그것을 이어주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더구나 료우마는 후쿠이 번에게 설명하길 요시노부를 무려 칸파쿠로 만든다고 한 것인지라 어떻게 되었을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규피4세 2009.07.02 16: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이런 사정이.. 뭐 무츠야 콩밥도 먹어봤고 폐병도 앓아봤고 회고록도 써봤고 하니 역시 인생의 단맛 쓴맛을 아는 사람답게 멋진 일화를 만들어 줬군요(;)


    개인적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과대포장이 별로 마음에 안드는지라, 낭인인 사카모토가 대단하다고 보진 않습니다만 저렇게 일화로 까주면 왠지 즐겁더랩지요(@.@) 생각해보면 불의의 칼빵 안맞았으면 유신의 최후의 승자는 당연히 문관 주제에 사가의난 진압까지 맡았더랩던 오쿠보 도시미치 아닙니까?(@:@)

    안타깝구만유 아무튼 이른 죽음이란.. 신관제의정서도 쓰레기통으로 가버렸으니..라고 생각해보니, 뭐 그 덕에 삼직제도 끝트머리에나마 10대 애송이였던 사이온지 긴모치 이름이 올라오게 됐으니 세상일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랄까나(이와나미 신쇼 내용을 떠올려보는거라 확실친 않습니다만)요

    애시당초 고셋케만이 칸파쿠가 될 수 있었던게 아니었나..하고 보니 역시 이런 특수한 상황이 있었군요@.@ 흑, 그나저나 오와리번 결국 기소에나마 이름을 올리게 되는군요@.@

    이런 엄청난 포스팅을 준비하시느라 그간 포스팅이 뜸하셨군요@.@ 아.. 조공까지 받을만큼 대단한 인재가 못됩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쭉쟁이죠. 적당히 오래 버틴 B급 블로거랄까나요(;) 아무튼, 감사히 받았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3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토시미치? 이토우 히로부미가 아니었단 말입니까!?....솔직히... 유신 이후엔 히지카타 토시조우(土方 歳三)의 행적이나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 관한 책 본 것 말고는 관심을 끊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에도 시대 내내 No.1인 위치이면서 키슈우(紀州)파벌에 밀린 원한이 결국 바쿠후를 배신하게 만들었을지도...이야기가 좀 샙니다만 동생인 아이즈 번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쿠와나 번주인 마츠다이라 사다아키와 적으로 갈렸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시간이 걸린 것은 요즘 집중력 결여가 큽니다. 한 단어 쓰고는 딴 짓을 합죠. 요즘 잡생각이 너무 많이 드네요.

  3. 123456789 2009.07.02 2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됩니다.

맹꽁이서당님께 바치는 조공.

내 이야기 2009.04.05 03:15 Posted by 渤海之狼

많이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악마의 사이트에 홀리는 바람에….

제 분수도 모르고 감히 추천을 한다는 것이  이 분들께 죄송스럽기도 합니다만…
저한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시는 분들입니다.
(댓글 하나 안 단 곳이 대부분입니다만… ^^) 
 

Mr술탄-샤™.

갑옷이라면 이 곳.

 

Periskop

2차대전사라면 바로 이 분.
이 분이 주인장으로 계신 포럼은 2차대전에 관한 한 국내 최고.


 耿君(경군)

 일본사의 이것저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고어핀드님.

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곰PD님.

각양각색의 전쟁에 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길 잃은 어린 양님.

2차대전과 해방 전후사에 관해서 피가 되고 뼈가 되는 포스팅을 많이 하십니다.

 

번동아제님.

한반도와 주변 군사사라면 이 블로그.

 

볼리바르

글을 많이 쓰지 않는 다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분. 
이 분이 위키와 소설을 결합하셔서 쓰신 글은 꼭 한 번 보시길.
지금보다 앞이 더욱 기대가 되는 분.

 

슈타인호프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

 

아케치님.

일본 센고쿠 시대에 관심이 있다면 피할 수 없는 분.
또한 근래 관련 포스팅을 안 하신다는 점이 많이 아쉬운 분.

 

이준님.

솔직히… 이준..까지가 성함이신지 ‘이준님’이 풀네임이신지 항상 궁금하지만…
방송, 소설, 기서, 양서, 근현대사에 관해서 재미있게 글을 쓰십니다.

 

파파울프

해전사에 관해서 재미있게 쓰십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기발한 역사 관련 포스트도 좋습죠.

 

초록불

환독을 몰아내기 위한 필수 블로그(물론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한 때 환빠였던지라 치유하는데 많은 덕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

유럽의 큼지막한 전사를 배울 수 있는 곳입죠. 거기다 꾸준하고 부지런하시다는 점이 또한 좋습죠.

'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운대 보고 왔습죠.  (8) 2009.08.26
요즘 산 책...  (2) 2009.04.12
맹꽁이서당님께 바치는 조공.  (2) 2009.04.05
2009년 3월 1일에 산 책.  (4) 2009.03.06
서울역 북오프에 갔다 옴  (6) 2009.02.12
2009년 2월 2일에 산 책.  (0) 2009.02.07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4.05 2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이름이 포스팅 전면에 있어서 놀랬습니다...
    오른쪽 아래 공유항목을 타고 알게 된 곳도 있지만 처음 소개받은 곳이 더 많네요.
    모두들 당장 즐겨찾기에 추가해 놓아야 겠습니다. ^^

    저는 지난 몇년간 미소녀 피규어 덕질에 푹 빠졌었고, 네이버 블로그도 덕질의 산물입니다만
    최근 역사 관련 블로그를 많이 알게되면서 저도 새로 하나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아는 것도 없고, 귀찮기도 해서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

    저도 고3때는 열렬한 환빠였답니다. 국사 문제집에 환빠 관련 가상 지도를 끄적대는게 일종의 취미였죠.
    하여튼 자세한 소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6 19: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오~ 기대가 됩니다.
      저도 뭐 아는 거 많지 않아서 남의 것 불법 번역이나 하고 있는데요 뭐...^^; 뭐든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니 우선 해 주시고 좌표 찍어 주세요~~~~

      자세한 것은 아닌 것 같군요...
      제가 생각한 특징만 짧게 표현하다 보니, 그 외의 많은 것들을 표현하지 못한 거 같아 저 분들에게 죄송한 것도 있습니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