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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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2.02.23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나다 가문의 인물들은 평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수많은 창작물에 의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센고쿠시대의 아이돌급 인물들이기 때문이겠죠.

    신슈가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생각은 자주 듭니다. 신겐도 무참히 박살난 것이 여러번이요, 도쿠가와도 신슈 전역을 통치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이에야스는 본인이 마사유키에게 직접 패한 적은 없었는데 왜 마사유키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느꼈던걸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2.23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도 막부의 창시자를 부자이대에 걸쳐 괴롭혔다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나노信濃는 아무래도 남북으로 길며 거기에 산악지방이다 보니 하나의 쿠니国치고는 다양한 세력들이 작게나마 많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생각합니다.
      거기에 시나노라는 지역이 무로마치 시대 때 좀 특수한 지역이었습니다. 쿄우토 무로마치 막부에서 보기에 라이벌인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영향권과 맞다은 곳이다 보니 다른 곳과는 다른 특혜나 명예가 좀 주어졌던 곳이더군요. 아무래도 그러다보니 다른 곳에서 시나노를 차지하는데 더 힘이 든 것 같습니다.

      상기의 일화 등은 에도시대 사나다 가문의 가신인 타케노우치 노리사다[竹内 軌定]가 지은 진무내전(真武内伝)이란 책에 실린 것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조금 의문시됩지요. 이에야스가 실제로 두려움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 대전란에서 도쿠가와 잡는 장면 정말 재밌게봤는데 6편 이후로 번역이 안되니 너무 아쉽습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죽고 나서 100년 뒤,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의 학자 겸 정치가 아리이 하쿠세키[新井 白石]는 야스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役] 이후 소극적이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이에야스[家康]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막정(幕政)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였기에 그런 마사노부와 대립하면 주가(主家)인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그 마음 속을 헤아리며, 
 ‘그 당시의 무장으로서는 특별한 일이었다’
 고 야스마사라는 인물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성실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미카와[三河] 무사로, 같은 나이의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쿠가와 군단의 으뜸가는 맹장(猛將)이었다.

 야스마사는 미카와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에 16살의 나이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때 무공을 세운 덕분에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어 이에야스의 이름글자 중 ‘야스[康]’를 하사 받았다. 이후 이에야스가 출진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직속군[旗本] 선봉을 맡았으며, 1566년에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직속군 선봉부대 부대장[御旗本先手侍大将]'이 되어 토쿠가와 군단을 지휘하여 그 용장()을 전쟁터에 드러내게 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秀吉]와 싸운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 때 야스마사는 적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서 격문(檄文)을 만들어 히데요시에게 욕설을 선사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덕분에 출세한 가신[家臣] 주제에 지금은 그 주군의 아들을 상대로 활을 쏘고 있다. 이야말로 팔역의 죄[각주:2]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도(非道)한 히데요시와 같은 편에 서는 자에게는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군의 아들’이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로, 이에야스는 노부카츠를 맹주로 하여 히데요시와 싸웠던 것이다.
 야스마사의 격문을 본 히데요시는 분노하였다.
 “코헤이타[小平太]를 산 채로 잡아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은상은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
라고 사졸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히데요시의 분노도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이유 중 하나는 이에야스에 대한 야스마사의 충성스런 성격이 히데요시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1586년의 일이다. 코마키-나가쿠테가 끝난 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강화를 맺었다. 히데요시는 토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냈다. 그때 함을 가지고 온 사자로 온 것이 야스마사였다. 히데요시에게 알현하였을 때 히데요시는,
 “여어 야스마사 왔는가. 코마키 전투 때는 자네의 잘린 목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네의 충성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네”
 하고 가볍게 언급하였을 뿐이었으며, 거기에 함을 가지고 온 중요한 사자가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같은 해 11월 9일에 종오위하(従五位下) 시키부노타이후[式部大輔]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날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로 불리는 동료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도 서임되었다. 토쿠가와 가신 서임의 시초였다.

 세키가하라 결전 시에 야스마사는 히데타다[秀忠 – 후에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에 속해 있었다
 히데타다 군은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간 이에야스의 본군과 다른 길을 취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서상(西上)하였다. 야스마사 외에 혼다 마사노부,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 등이 속해있었다. 양군은 미노[美濃]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행군 도중 강적이 나타나 히데타다 군의 서상을 막았다.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부자였다.

 기략을 연발하는 사나다 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히데타다 군은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굉장히 불쾌해 했다. 히데타다가 겨우 오우미[近江] 쿠사츠[草津]에 도착했을 때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3일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히데타다는 안절부절 못했다. 히데타다 진중은 침묵이 지배하였다. 이때 결심한 야스마사가 밤에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야스마사는 우선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사죄한 뒤 이어서 소신을 당당히 말하였다.
 “주군의 분노가 만약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 맞추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라면 주군에게도 잘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자가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물리치고자 했으면 어째서 사자를 보내 빈번히 연락을 취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고 이에야스에게 따지며,
 “언젠가는 천하인(天下人)이 되실 히데타다 공이 무공 부족으로 인하여 부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무시한다면 이는 히데타다 공만의 치욕이 아니라 주군 자신에게도 그 비웃음이 쏟아질 것입니다”
 고 논리 정연히 설득하였다. 야스마사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분노를 풀고 다음 날에는 히데타다와 대면하고 격려하였다.
 히데타다의 한없이 기뻐하였다. 자신의 가문이 있는 한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야스마사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야스마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미담과 같은 이야기 외에 야스마사에게는 이에야스에 대한 반골심을 나타내는 일화도 전해진다.
 1606년 4월, 야스마사의 병이 중하여 이에야스, 히데타다의 병문안 사자로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가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다. 사자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이불 안에서,
 “저도 장(臟)이 썩어 이렇게 추해졌습니다”
 고 빈정대며 말했다. 예전 작전회의에서 혼다 마사노부가 발언하였을 때 마사노부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된장이나 소금이 늘고 주는지만 신경쓰는 장이 썩은 사람이 전투에 관해서 무엇을 안다고 말을 하는가?”
하고 매도한 적이 있었다.
 병상에서의 말은 마사노부 등을 중용하는 이에야스를 비난하는 것이고 하였으며, 평화로운 시대에 들어와 잊혀져 가는 존재인 예전 전쟁터 용사의 자조(自嘲)이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 중 한 명. 1581년 토오토우미[遠江] 타카텐진 성[高天神城]를 공격하였을 때 적의 수급 40을 취했다 한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 – 후에 칸파쿠[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군을 물리쳤다. 1590년 토쿠가와 에야스[徳川 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 10만석에 봉해졌다. 1606년 악성 종양을 앓아 5월에 죽었다. 59세.

  1. 잇코우 종[一向宗 - 정확히는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 반란. 미카와 잇코우잇키[三河一向一揆]는 세금을 내지 않던 미카와의 혼간지 계열의 절에 세금 징수하려 하다가 그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 [본문으로]
  2. '八虐'라고도 쓴다. 율령제 시대에 가장 무거운 죄. 기본 사형이며 감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텐노우[天皇]에 살해에 관한 모반(謀反), 황거나 황릉에 관한 불경인 모대역(謀大逆), 일본 국가에 관한 반란획책인 모반(謀叛), 신사에 관한 불경인 대불경(大不敬), 존속살해인 악역(悪逆), 대량 살인죄인 부도(不道), , 존속살인 이외에 존속에 관한 죄인 불효(不孝), 주군에 관한 배신인 불의(不義)...인 여덟가지 죄. 여담으로 이중 존손에 관한 악역, 부도, 불효의 경우 당시 일본에 유교논리가 없었기에 사법(死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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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1.10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쌍류의 게임에서는 언제나 클론장수(..;)의 안습함에 사실 신장의야망류에서도 전용 전법도 없고 참 어정쩡하다 싶었는데.. 에, 역시 게임은 게임이니까요. 실제론 역시 4천왕 다운 대인배스러움을...

    여담이지만 암이란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수년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아.. 역시 문제는 세키가하라였으려나(..;)

    그나저나 그저께 하마마츠도 지나갔었는데 왜 이에야스가 떠오르지 않았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천왕 중 하나가 클론이란 말입니까!!!
      ...하긴 사천왕 중 No.1격인 사카이는 나이도 나이니 만큼 별개로 치고, 톤보키리라는 전용무기를 장착한 혼다 타다카츠나, 적비대[赤備え]를 둔 나오마사와 비교하면 좀 임팩트가 딸리긴 하는 편인 듯.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니...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개연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타다 군의 실질 No.1 참모 격(경험이나 명성에 더해 동원한 군사도 히데타다 직속군 15000을 제외하곤 토쿠가와 가문에서는 최다인 3000)이었을텐데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없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존경하지만 아산 지날 때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괘의치 마시길...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0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휘관들을 많이 보유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면에서 항우나 유비, 제갈량이 결국 천하를 못 잡은 것은 그런 인재의 폭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요.

    ( 아, 물론 촉나라는 인재가 넘쳐도 국력이 부족해서 졌겠지만 )

    대망팬들에게는 야스마사보다도 고헤이타가 더 익숙하다는 점에서 대망은 획기적 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인재도 인재지만 그것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보급, 행정, 의사결정에 필요한 소통 등등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달리(그러니까 대망이 나왔던 시대) 요즘 소설류는 통칭보다는 이미나[諱]를 주로 쓰는 것 같더군요. 제가 읽은 같잖은 소설만 그렇게 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개인적으로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보다는 시바타 곤로쿠[柴田 権六]가 아직은 더 익숙하더군요. ^^...저도 대망이 첫 일본 소설이거든요.

  3. 골룸 2009.11.10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다다카츠와 더불어 전란의 시기에 용감히 싸운 무사였죠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도도다카토라 처럼 변화무쌍한 사람도 있는데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주석 단 거 다 날라가고, 나름 교정했던 것도 그대로군요... 초벌 올려서 실례했습니다....그럼에도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이에야스 탓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타다카츠나 야스마사가 전쟁터만의 인물로 인식되긴 하지만...

      후년 에스파니아의 돈 로드리고가 오오타키 성의 거대한 모습에 타다카츠의 둘째 아들 타다마사가 왕인 줄 알았다는 것이나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여러 장수들에게 수 많은 편지를 보내며 동군 측으로 끌어 들인 것을 보면 타다카츠의 정치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야스마사도 또한 이에야스가 행한 칸토우 다이묘우 배치의 틀을 제시한 인물인 것을 보면 그 역시도 야전공성만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정치력과 실적있는 인물들에게 아무런 상이나 영지 가증도 없이, 거기에 정치 중추에서 쫓아낸 이에야스를 아무리 주군이라곤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유교의 '충'이란 논리가 도입 이전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 있었을 것 같구요.

    • 골룸 2009.11.12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찌 보면 매정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2대째로 넘어가는데 좀 부담이 될만한 인물들을 사전에 정리 한 것도 같고
      아무튼 그런 와중에도 도쿠가와 가문내에 큰 문제 없이
      혼다나 사카키바라 가문이 계속 됐던 걸 보면
      가문내의 결집이나 충성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뭐 이에야쓰 입장에서야 쓸만큼 다 쓰고 어느 정도 포상도 한거니까요
      계속해서 느끼는거지만 이에야쓰는 참 짠 사람인거 같아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 사극 용의 눈물....인가에서 태종 이방원이 공신들을 내치면서 하는 말이....
      "저들이 기세등등하여 세자를 업신여길 것이 두렵소이다"....비슷하진 않지만 저런 뉘앙스였을 것입니다.

      공신들을 토사구팽하는 제왕들의 맘은 저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련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이에야스는 천하인의 그릇이 아니라며...
      "그는 가신들에게 영지를 아낌없이 나눠줄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를 잡진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짠 사람이긴 했나 봅니다.(...무엇보다 우지사토가 실제로 저런 말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4. 나라 2009.11.11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의 최대의 잘못은 히데타다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야스의 중뿔난 마음도 이해할만 합니다. 결과적으론 세키가하라 결전에 승리했지만, 히데타다군이 제대로 오지 못한 것은 확실히 불안 요인이었으니까요. 히데타다군이 제 시간이 왔으면 완승을 쉽게 보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2 0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다만 잘 나가는 부잣집 도련님, 말 좀 듣게 하기는 엄청 힘들 듯 싶습니다.

      사족으로....세키가하라 때 토쿠가와 가문의 실질적 전투집단은 이에야스 휘하에 있던 토우산도우[東山道] 방면군이 아니라, 히데타다가 이끌던 나카센도우[中仙道] 방면군이라 하더군요. 전투에 적합한 토쿠가와 가문 내의 만석 이상을 가진 무장들은 타다카츠와 나오마사를 제외하곤 히데타다 휘하에 속했다고 합니다.

      만약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히데타다 군이 있던 전쟁터에 있던 상태였다면 후쿠시마 마사노리, 쿠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토쿠가와 군만으로 승부를 결정지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또한 나중에 후쿠시마, 쿠로다 등에게 전공에 따른 막대한 영지를 줄 필요도 없었을 테고요.

  5. 나라 2009.11.12 1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나중에 후쿠시마에겐 제대로 엿을 먹이지 않습니까;;;
    히데타다가 제 시간에 오고 서군이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항상 그게 궁금하더군요. 만약 미츠나리가 이겼으면 가마쿠라 시대의 싯켄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이에키[改易]라는 손이 한번 더 가면 그 만큼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에도가 아닌 자기 영지에 있을 때 카이에키 영이 떨어졌다면 과연 역사처럼 순순히 응했을지는 궁금합니다만...

      뭐 그래서 참근교대라던가 일국일성령이라는 보험이 있었긴 합니다만, 이외로 히데요시 은고 다이묘우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면 서국에 몰려 있었던 만큼 다시 전화의 시대로 돌아갈 확률이 0%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불씨를 세키가하라에서 히데타다가 늦음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이라...개인적으로는 서군이 승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미 서군은 높은 곳을 전부 제압하여 동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포위하고 있었고, 동군은 전부 그 아래 혹은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던 입장인지라...
      (포진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ja/0/05/Sekigahara.png )

      장기전으로 가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군사들이 동군 후방 보급을 끊을 수 있는 반면 서군은 바로 뒤편이 이시다 미츠나라의 영지인지라 보급면에서는 서군이 비교적 자유롭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는 어땠을까요...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나중에 정쟁에 패하여 한때의 인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6. dsfsd 2012.03.23 04: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 - 서군 - 시마즈 모리 - 임진왜란의 주역들일 뿐 아니라 나중에 도쿠가와 막부 전복하고 메이지유신으로 조선을 다시 쳤던 그 뿌리 아닙니까 과거의 일이지만 고소하다는 얘기밖에 안나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

      ...근데 본문글과 리플은 좀 매치가 안 되는군요. 단지 이름이 거론되어서인가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알기 힘들군요. 인과응보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인가요?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611 6 4일 병사(病死) 65

1547 ~ 1611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 성주. 처음엔 타케다 씨[武田氏]를 섬겼지만 타케다 씨 멸망 후 자립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西軍)에 속해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여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괴롭히지만, 서군의 패배로 인하여 항복 개성(開城)하였다. 코우야 산[高野] 자락의 쿠도야마[九度山]에 유폐되었다.










하산(下山)하고 싶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대한 의리를 갚기 위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우에다 성[上田城]에서 농성하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농락하였지만, 서군의 패배 후 아들 노부유키[信之]의 구명 운동으로 목숨을 건진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 노부시게[信繁]] 부자가 시나노 우에다에서 16인의 동반자들과 함께 유배지인 키이[紀伊] 코우야 산으로 향한 것은 1600년 10월 13이었다. 당시 마사유키는 54, 유키무라는 34세였다.


 코우야산에 도착한 마사유키 일행은 사나다지방의 숙방(宿坊[각주:1])인 렌게죠우 원[華定院]에 일년 넘게 체제하였으며 곧이어 쿠도야마에 완성된 사나다 저택으로 옮겼다. 죄인이라고는 해도 유배 생활은 완전 자유로 등산이나 사냥, 수영, 뱃놀이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러한 유배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마사유키의 마음 속에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꿈만을 키워갔다.


 1603년 3월 15신코우 사[信綱寺]로 보낸 편지에, 3년 후의 여름에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이에야스[家康]에게 잘 말하여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또한 몇 년도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편지의 전후로 생각되어지는 가신 쇼우츠 신고로[称津 神五郞]에게 보낸 정월 3일의 편지에도 '새해도 되어 우리들에게 곧 하산의 명령이 내려질 것 같다' 근거 없는 기쁨을 전하며 하산의 명령을 계속 기다렸다.


고향에 돈을 요구.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산의 명령이 내리지 않은 채 세월만이 흘러갔다.

 이에야스조차도 두려워 한[각주:2] 무장의 의지도 차츰 꺾여 갔다. 더욱이 동반자나 하인들을 포함한 유배생활은 대가족이었기에 돈이 많이 들었다. 생활비는 노부유키[信之]가 보내주는 돈과 렌게죠우 원[連華定院]에서 바치는 적은 세금, 거기에 감시역인 와카야마 성[和歌山城]의 성주(城主)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 長晟]에게서 매해 보내지는 50석뿐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대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에게 돈을 요구했다.


 연도는 불명이지만 정월 5일의 편지에 셋째 아들 마사치카[昌親]에게서 40냥 중 20냥을 확실히 받았지만, 빚이 많아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어 힘드니 남은 20냥도 하루속히 보내주길 바라며 빨리 보낼 수만 있다면 5~6냥도 좋다고 할 정도로 마사유키는 빚에 찌들린 힘든 나날들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있었다.

 마사유키의 계속된 돈 요구나 재촉에 노부유키는 그때마다 보내주었고 또한 정월이 되면 돈과 물품을 보냈으며 편지도 왕성히 오고 갔다. 편지의 왕복이야말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약해져 버린 과거의 지장(智將)


 노부유키쪽에서의 편지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면서 마사유키는 차츰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한탄을 내뱉게 되었다.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말년이라고 여겨지는데 첫째 아들 노부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가오는 세월의 파도로 인해 무엇을 해도 끈기가 없어 지쳐만 간다고, 왕년의 지장(智將)이 이제는 완전히 체념한 듯한 약한 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최후의 말년에는 자주 병이 걸려, 1609년 혹은 1610년 즈음으로 추정되는 4 28일자 우에다[上田]의 유우안 호우인[夕庵法印]과 가로(家老) 오오쿠마 호우키노카미[大熊 伯耆守]에게 보낸 편지에, 노부유키의 병이 쾌유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병이 재발했다고 하며 다음에는 발이 빠른 말을 한 마리 보내주길 바란다고 적혀 있다. 말은 병중의 위로로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것도 병으로 인하여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약해진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또는 과거 말을 탄 자신의 용맹했던 모습을 생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11년.

 1611 6 4일.많은 무공(武功)과 무명(武名)을 남겨둔 채,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真田 安房守 昌幸]는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다. 향년 65.

  1.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절의 숙박소. [본문으로]
  2. 여담으로 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기 위해 일으킨 오오사카 공방전에서 마사유키의 아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이에야스는 손을 걸치고 있던 창문이 소리가 날 정도로 떨며 '아비냐 아들이냐?'라고 두번이나 물을 정도로 당황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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