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姫=토미코[富子]]와 결혼하였다. 둘 다 재혼이었다. 테루마사의 첫 번째 부인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전사한 셋츠[摂津] 이바라키 성[茨城城] 성주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딸이었다.

 토쿠히메의 전 남편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였으나,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후 몰락하여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돌아와 있었다. 결혼은 히데요시[秀吉]가 선 중매였지만, 이에야스의 사위라는 조건이 테루마사의 출세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전쟁터에서 공명을 다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이렇게 빈정댄 적이 있었다.
 “산사에몬[산사에몬[三左衛門=테루마사]이 지금은 거대한 영지의 영주로 출세했지만 그건 오로지 그의 ‘거시기’ 덕분이다. 창 한 자루로 이렇게 출세한 나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테루마사는,
 “확실히 나는 ‘거시기’로 이렇게 출세했지. 만약 창까지 사용했다면 천하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창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하고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인이 이에야스의 딸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신경 썼었던 듯 하다.
 토쿠히메를 따라서 이케다 가문[池田家]에 온 늙은 시녀[老女]가 어느 날 테루마사 부부 앞에서,
 “우리 가문이 이렇게 번영한 것도 토쿠히메 님 덕분이옵죠”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얼굴색을 확 바꾸며,
 “내가 공적을 세웠기에 부인도 우리 가문에 시집온 것이며 영지도 더 하사 받은 것이다.”
 고 말하며 평소와는 달리 엄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는 테루마사가 연극한 것이다. 그 후 은밀히 그 늙은 시녀를 불러서는,
 “사실 말하자면 우리 가문의 영달은 자네 말마따나 토쿠히메 덕분이지. 그러나 그걸 대놓고 말하면 부인이 기어오를지도 몰라. 앞으로도 부인 앞에서는 그러한 말은 자제해 주기 바라네”
 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날 제후가 열석한 주연(酒宴)에서 테루마사는 왜소한 키에 대해서 비웃음 당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내 왜무(矮舞)라고 새로 만든 춤과 노래가 있으니 한번 들어보시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박수를 치며,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아와지[淡路][각주:1]라는 세 지역[国]의 주인이기에 키 따위 바라지도 않으니…”
 하고 부채를 펼치고, 몸과 손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둘째 아들로 키요스 성[清洲城]에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저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 츠네오키의 전력(戰歷)은 혁혁한 것이었다.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세운 공적으로 한 부대의 부대장[侍大将]가 되었고, 계속해서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정벌[朝倉征伐], 오우미[近江]의 오다니 성[小谷城] 공략,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등에 출진하였다.

 테루마사의 데뷔전은 1580년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공략이었다. 16세인 테루마사는 부친이나 형과 함께 셋츠 하나쿠마 성[花隈城]을 공성하였는데 이케다 부자(父子)의 활약은 눈부셔, 공략이 끝난 후 노부나가는 츠네오키에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영지를[각주:2], 장남 모토스케[元助]에게 이타미 성[伊丹城], 테루마사에게는 아마가사키 성[尼崎城][각주:3]을 하사하였다. 노부나가가 츠네오키에게 내린 표창장에서 테루마사에 대해 언급하길,

나이 16살에 불과하면서도 적진에 돌격하여 큰 무용을 자랑하니, 이는 정말 이케다 키이노카미[池田 紀伊守=츠네오키] 자네의 아들 답네. 내가 눈 여겨본 것이 틀리지 않아 기쁘며, 세운 공적 또한 비할 대 없도다
 고까지 말하며 격찬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이케다 부자는 히데요시 편에 서지만, 부친과 형은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와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전사하였다. 히데요시는 특별히 테루마사의 조모 요우토쿠인[養徳院][각주:4]에게 편지를 보내어, 츠네오키와 모토스케의 죽음을 위로하며 남겨진 테루마사를 포함한 아들들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사위로 토쿠가와 진영에 접근하였고 곧바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테루마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격렬한 공적 다툼을 벌인다. 이해의 7월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5]에 나섰던 이에야스는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거병소식을 듣고 급거 철군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선택된 것이 테루마사와 마사노리였다.

 우선 목표로 한 것은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노부나가의 손자]가 지키는 기후 성[岐阜城]이었다. 주공의 대장은 마사노리, 조공은 테루마사로 정해졌다.
 8월24일. 전투가 시작되어 기소가와 강[木曽川]을 도하한 테루마사 휘하 7천의 병사는 성 밖 엔마 당[閻魔堂]에 포진한 오다의 군세를 습격하여 수급 700을 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주공인 후쿠시마의 군세는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테루마사의 공적이 한발 앞서나가자 마사노리는 화가 났다. 왜냐면 공격은 동시에 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마사노리의 분노를 느낀 다른 장수들이 테루마사를 설득하여 다음 날 공성전에서는 마사노리가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테루마사는 그 약속을 어기고 앞서나가려 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내며 결국 테루마사가 나아가려는 길에 불을 질러 진로를 막았다. 이 양자의 공적 다툼은 낙성된 뒤에도 이어져 어느 쪽이 먼저 성에 진입하였는가에 대해서 서로 자기네가 먼저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아, 마사노리는 테루마사를 죽인다고 까지 말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당신은 이에야스의 사위잖소’라며 독전관[軍監]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말에 테루마사는 깨끗이 공을 마사노리에게 양보했다고도 하며, 양자가 동시에 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했다는 말도 있다.[각주:6]

 테루마사는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에서는 그다지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이 기후 성 공성에서 세운 공적으로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에서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 52만석이라는 대봉(大封)을 하사 받아, 이곳에 후세까지 명성이 자자한 히메지 성[姫路城] 축성을 개시하였다.
히메지 성은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등 서국(西国]의 토자마다이묘우[外様大名] 감시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위압하기 위해 무엇보다 웅대하게 만들어졌다.

재능있는 낭인(浪人)을 고용하여 자가(自家)의 강군(强軍)을 꾀했지만 그로 인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각주:7]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를 고용하여 그의 옛 주가인 쿠로다 가문[黒田家]은 물론 막부(幕府)에서도 클레임이 왔지만 테루마사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565년 생. 1584년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 성주[각주:8]. 1590년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으로 옮겼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메지[姫路]를 하사받았다. 1613년 1월 27일 죽었다. 49세.

  1. 이상 테루마사의 영지. [본문으로]
  2. 거성은 아리오카 성[有岡城]. [본문으로]
  3. 그냥 표창장[感状]만 받았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노부나가의 유모(乳母). 고귀한 집안은 젖물리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아기 때의 노부나가는 다른 유모의 젖꼭지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테루마사의 조모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의 젖꼭지는 물어 뜯는 일 없이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요우토쿠인은 후에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의 측실이 된다. [본문으로]
  5.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6. 테루마사는 5년간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였다. 때문에 마사노리 보다는 성 공격이 수월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대신 그만큼 절약하여 부인 토쿠히메[督姫]가 놀이개를 갖는 것도 금지했으며, 아이들에게도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1585년엔 기후 성[岐阜城] 성주. [본문으로]

 천하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직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인 칸파쿠(白) 다이죠우다이진(太政大臣)까지 되었지만 그 출신이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의 성(姓)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렸을 적에 도적 하치스카 고로쿠(蜂須賀 小六)의 밑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유명하지만 스루가(駿河) 이마가와 가문(今川)에 속해있던 마츠시타 카헤이(松下 嘉兵衛)를 섬겼을 때의 이야기도 소년시대의 히데요시의 풍모를 전해주고 있어 흥미롭다.
 마츠시타 카헤에가 하마마츠(浜松)의 마을 밖의 히쿠마가와(曳馬川) 강 근처에서 얼굴이 특이한 아이를 주웠다.
 [원숭이인가? 하면 사람. 사람인가? 하면 원숭이]
 어느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는데 그것이 히데요시였다. 이때 카헤이는 하마마츠의 영주 이이오 부젠(飯尾 豊前)을 방문하여 "특이하게 생긴 꼬마를 주웠다네"하며 이 히데요시를 구경거리로 데리고 간 것이다. 이이오 부젠의 부인이나 딸들이 신기해하며 밤을 던져주자 히데요시는 마치 원숭이처럼 입으로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녀들은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후세에 만들어진 위의 이야기처럼 사서로 전해지는 것에서도 히데요시의 용모는 원숭이와 닮았던 듯 하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원숭이(猿=사루)'라고 불렀던 것은 너무도 유명한데[각주:1] 히데요시를 보았던 모우리(毛利)의 신하 타마키 요시야스(玉木 吉保)는 [붉은 수염을 기르고 원숭이 눈과 같이 정신 없이 움직인다.[각주:2]]하고 쓰여 있으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
)도 조선 침공 계획을 듣고 "원숭이놈 죽을 자리를 못 찾아서 미쳤나?"라 욕하고 있다.

 이쯤에서 히데요시가 출세할 수 있었던 비결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본다.
 우선 돈을 쓰는 방법이 절묘했다.
 전투를 할 때도 공을 세운 병사에게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상금을 주었다. 톳토리 성(鳥取城) 공략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가 성을 정찰하러 갔다가 적을 만나 물리치고서는 보고를 하였는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곧바로 황금 한 웅큼과 100석을 가증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
츄우고쿠(中
)에서 급히 아케치(明智)를 물리치기 위해 쿄우토(京都)로 향했을 때 돈을 뿌린 방식이 굉장했다. 히메지 성(路城)에 있던 금은과 쌀을 하나도 남김없이 부하들에게 준 것이다. 즉 이때 히데요시는 무일푼이 되었던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로 히데요시는 천하를 얻은 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돈이라고 하면 천하를 얻은 후 쥬라쿠테이(聚
第) 문 밖에서 돈을 나누어 준 것은 고금에 예를 볼 수 없었던 쇼였다. 금은 합계 36만 5천냥을 친족부터 시작해서 고급 귀족(公卿)이나 다이묘우(大名)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분배하였다.

 또 하나 히데요시 출세의 비결은 어떤 일이건 철저히 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철저히 봉사를 함으로써 주군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았다. 짚신을 따스하게 덥혔다는 에피소드에서 상징되듯이 오로지 주군만을 생각하였으며 자그마한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어떠한 공을 세우더라도 영지(領地)에 대한 야심은 병아리 눈곱만큼도 보이질 않았다. 츄우고쿠 정벌 때 노부나가가 하리마(播磨)를 준다고 하였지만 사퇴하면서 그보다도 조선(朝鮮)을 공략하게 되면 그 나라를 받겠습니다 – 라며 꿈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열석해 있던 다른 무장들은 코웃음 쳤지만 노부나가는 그 무욕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581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오우미(近江),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 등 70여만석이라는 영지(領地)를 하사 받았는데 이 때 고마움을 나타내고자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냈다. 타치(太刀) 한 자루, 은자(銀子) 6000매, 옷(小袖) 백 벌, 가죽 200매, 종이 200다발, 말린 도미 1000마리, 그 외에 도자기 등이 끝없는 행렬을 만들며 아즈치 성(安土城)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도 히데요시는 뛰어났다.
 천성적으로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인정미가 넘쳤고 미천한 신분 시대에 얻은 거짓말 안하기, 남을 속이지 않기가 다른 사람의 신용을 얻는 것이라는 '생활의 지혜'가 그 기본이 되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을 섬겼으며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시모츠케(下野)에 3만석을 하사 받은 사노 후사츠나(佐野 房綱)는 "신겐공이나 켄신공을 만날 때는 분위기가 엄격하여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히데요시공은 '여어~ 텐토쿠지(天
寺=후사츠네의 호). 잘 오셨네'며 굉장히 친근하면서도 정중한 말투를 쓰셨기에 감개무량하였다"고 히데요시의 거드름 피우지 않는 성격을 전해주고 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도,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등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산하의 다이묘우(大名)가 인질을 받쳐 충성을 맹세하고자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그럴 필요 없소"하며 인질을 받지 않았다.

 또한 히데요시는 남을 직접 돌봐줄 때도 마치 자기 친형제에게 하는 듯이 애정 넘쳤다. 나가쿠테 전투(長久手合)에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모토스케(助)가 전사하였을 때, 츠네오키의 부인을 위로하고 남겨진 차남 테루마사(輝政)를 친자식처럼 키웠으며, 비젠(備前)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노부나가에게 미움 받았을 때는 노부나가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감쌌다.
 속이지 않으며 약속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저 나오이에에게 약속한대로 아들인 히데이에를 후에 오대로(
五大老)의 한 명으로 만들 정도로 크게 중용하였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경우 그의 주인 요시카게(義景)를 배반한 요시아키라의 행위에 노부나가는 혐오하며 용서치 않으려고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끝까지 노부나가를 설득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다.

 조선의 기록에 파격적인 히데요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있다.
 1590년 11월 조선의 사자(使者)를 접견했을 때였다. 술을 내어 접대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는 잠깐 나갔다가 갓난아이(장남 츠루마츠(鶴松))를 안고 들어왔다. 안고서 실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조선의 악사(樂師)들에게 연주를 시키게 하던 중 그 갓난아이가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히데요시의 옷도 다 젖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웃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고 한다. 조선의 사신은 이를 '방약무인'이라고 평하였다.[각주:3]

 무엇이든 스케일이 다른 히데요시는 호색도 남달라 수 많은 측실을 데리고 있었지만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에 대한 배려만은 허술히 하지 않았으며 세세했다. [신신당부하네만 대변이 나올 수 있게 쓰셨으면 하는 마음에…]하고 설사약에 대한 것까지 편지에 적고 있다.
 후계자를 낳은 요도도노(
淀殿)에 대한 애정은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20일 즈음에 반드시 네게로 가 도련님(츠루마츠)을 안고 싶구나. 밤에는 너와 함께 자고 싶다…]고 쪽팔리지도 않은 듯이 편지를 쓰고 있다. 한편으론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진영에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어서는 '당신 말고는 요도가 맘에 들더군' 라는 등 서열을 확실히 정하여 그녀의 우월감을 만족시켰다. 또한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에 대한 효심도 깊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이던 1592년에 오오만도코로가 죽자 히데요시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기절했다고 한다.

 센고쿠(戦国) 시대는 사람 좋은 것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다. 히데요시도 또한 센고쿠 무장이다. 천하인(天下人)이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무장이 아니면 안 된다. 히데요시가 천재적인 무략가라는 예를 들어보자.
 1582년 6월. 히데요시 46살 때였다. 빗츄우(
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수공(水攻)하고 있던 6월 3일 한밤중의 히데요시 본진에 혼노우(本能)사()의 변보가 전해졌다.
 이 순간부터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일개 부장에서 천하인으로의 길을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군을 질타하여 폭풍우 속의 타카마츠를 출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였다. 히메지(
)까지 100km를 불과 하루 만에 돌파라는 엄청난 스피드였다. 이것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순식간에 물리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후 시즈가타케()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격파한 것도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오로지 히데요리()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져 더 이상 천하를 취한 영웅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는 그냥 평범한 노인으로 변모하였다. 3살의 히데요리에게 보낸 편지에 '곧 너를 보러 갈 테니 그 때까지 엄마의 젖을 많이 빨고 있으렴' 등을 쓰며 요도도노의 모유 상태까지 걱정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히데요리의 장래가 걱정되었는지 죽음이 가까운 1598년 8월 5일 병상에서 이에야스(家康)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등 오대로(五大老)에게 '히데요리가 다 클 때까지…'하고 불안하다는 듯이 유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13일 뒤인 18일 미명. 63세의 나이로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년 오와리(尾張)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다 가문(織田家)의 아시가루() 키노시타 야에몽(木下 弥右衛門). 최초의 이름은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1574년에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가 되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멸망시켰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후 화해. 1585년 49살 때 칸파쿠()가 된다. 다음 해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되어 성을 토요토미(豊臣)로 바꾸었다. 1587년 쥬라쿠테이() 완성. 1598년 8월 제2차 조선역(朝鮮役)[각주:4]이 한창이던 중에 죽었다.

2007/03/23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1. 노부나가가 그를 '원숭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노부나가는 그를 대머리생쥐(禿げ鼠)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것도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만 보이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2. 원문의 猿まなこをぎょろつかせ・・・猿まなこ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낸다는 뜻이지 원숭이와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즉 이 책의 저자는 예시를 잘못 들은 듯. [본문으로]
  3. 有頃, 秀吉 入內, 在席者不動。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小兒遺溺衣上, 秀吉 笑呼侍者, 一女 倭 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3번째 기사. [본문으로]
  4. 정유재란을 말한다. [본문으로]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613 1 25일 병사 50

1564 ~ 1613.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형제(乳兄弟)[각주:1]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아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부친이 죽는 바람에 오오가키[大垣]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하리마[播磨] 하사받아, 히메지 성[姫路城]를 쌓았다. 후에 '서국 쇼우군[西 ][각주:2] 이라는 이명(異名)을 얻었다.









히메지 백만석


 이케다 테루마사의 할머니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이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乳母)였던 연()도 있어 테루마사는 어려서부터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섬겼다. 노부나가가 죽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중용(重用)받아 히데요시는 테루마사를 양자(養子)로 삼는다는 약속도 하였다[각주:3]. 그러나 나가쿠테의 전투에서 부친 츠네오키와 형인 요시스케[之助]가 전사한 후에는 이케다 가[池田]를 상속하여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 2천 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94 8월.
 테루마사는 히데요시의 중매로 토쿠가와 이에야[
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姬][각주:4]를 후처로 맞이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이에야스 편에 섰고, 공을 세워 하리마 52 1천 석이라는 큰 영토를 하사받아 히메지성에 입성했다. 입국한 다음 해인 1601년부터 성을 개축(改築)하기 시작하여, 1609년에 한 층 더 호화장대(豪華壯大)한 성곽이 완성되었다.


 가정면에서도 토쿠히메와의 사이에 5명의 남자아이가 탄생. 전처(前妻)의 아들인 장남 토시타카[利隆]는 둘째 치더라도 2남 타다츠구[継]는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인 이에야스에게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28 6천 석을 하사 받았을 뿐만 아니라, 3남 이하에게도 아와지[淡路], 하리마 안에 각각 영토를 하사받았기에 그런 영지들을 합쳐서 '히메지 백만석', '서국 쇼우군' 등으로 불렸다. 너무 과한 대우에 이에야스의 적남(嫡男) 히데타다[秀忠]가 질투하여,
 “
아예 테루마사에게 천하를 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라고 삐쳤을 정도였다.


 사위와 장인이 되어서부터 급속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관계가 깊어진 테루마사이지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은혜를 잊는 일 없이 어린 히데요리에 대한 배려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누나가 칸파쿠[白] 히데츠구[秀次]의 정부인이라는 것도 있어 토요토미 가문과는 깊은 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히데요리가 니죠우 성[
二条城]에서 이에야스와 만났을 때도 옛 토요토미 가의 무장들과 함께 히데요리를 경호(警護)했으며, 1602년 정월 궁궐에 신년인사를 할 때도 테루마사는 히데요리를 대리해서 입궐하였다.


성내에 이변(異變)이 일어나다.


 1609 5월.

 천수각(天守閣)을 완성했을 때부터 히메지 성 안에서 이변이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
천수각의 한 방에서 17~8살 정도의 시녀가 12히토에[単][각주:5]를 입고 홀로 촛불을 들고는 혼자서 앉아있었다. 젊은 사무라이가 이상히 여겨 가까이 다가가자 빗을 건내 주었다. 그 빗은 천수각의 갑옷 상자 안[각주:6]에 있던 것이었다.'


 '심야(深夜). 맹인(盲人)이 나타나서 들고 있던 비파의 통을 열어보라고 하였다. 젊은 사무라이가 열어보려고 하자 맹인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귀신으로 변신해서나는 이 성의 주인이다라고 위협했다'


 같은 해 12 13일. 한 통의 이상한 편지가 성에서 발견되었다.
 보낸이는 '하리마의 주인인 대천신(大天神) 토우센보우()' '수도(首都) 니죠우[二条]의 센마츠'이며, 받은이는 테루마사와 토쿠히메 부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50~60장에 이르는 협박문이었다. 내용은,

토오토우미[遠江]의 요린보우라는 대천신(大天神)이 큐우린보우라는 천신(天神)을 꼬셔서 테루마사 부부를 저주하여 죽이려고 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 안에 8층탑을 세우고 호마(護摩)의 비법을 익혀 기도하라.
 
또한 팔층탑안에 넣을 두루마기와 그림은 천축에서 이 나라에 전해진 두통 중 하나를 넣을 것. 한 통은 하리마 동쪽에 사는 유명한 목수인 히하라[
日原]가 몰래 가지고 있다. 호마는 온타케산[御嶽山] 산에 있는 시미즈 사[清水寺], 후나코시산[船越山] 산에 있는 루리 사[瑠璃寺] 등의 고명한 중을 스승으로 삶아 수련할 것.

등의 지시가 쓰여져 있었다. 테루마사는 몸집이 작은 사내였지만 용맹과감하고 침착한 사나이였기에 협박장을 무시했다.


 그러나 1611 12월.
 그는 갑자기 중풍에 걸렸다. 발병 당일. 테루마사는 가신의 집에 방문했다가 갑자기 쓰러져 가마로 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 많은 까마귀들이 날아와 가마에 부딪혔다. 성에서 이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테루마사라도 어쩔 수 없었다.


 타카 군[多可郡] 엔만 사[円満寺]의 묘우카쿠() 아사리에게 악마 퇴치, 국가 수호의 기도를 부탁했다. 37일간 성안에서 술법을 행한 묘우카쿠의 진언(進言)에 따라, 천수의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북동쪽에 팔층탑을 세우는 동시에 오사카베 신사[刑部神社]를 건립하였다. 오사카베 신사는 원래 히메야마[姫山] 산에서 지방신(地方神)을 모시던 신사의 건물을 히데요시가 히메야마 산에 성을 세울 때 산 아래로 옮겼기 때문에 신의 분노를 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테루마사의 중풍은 일시 회복했다. 성 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다음 해 1월에 재발하여 테루마사는 피를 토했다. 이 때도 수 많은 까마귀가 날아와서 창호지에 부딪혔다. 마당에 죽은 솔개가 두 마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아타고[愛宕][각주:7] 신자인 테루마사는 이 일울 흉한 일이 있을 징조라 생각하여 더욱 병이 깊어졌다. 이에야스가 중풍의 묘약을 보내왔지만 테루마사는 25일 오후. 숨을 거두었다.


 이에야스는,

 "그런가…… 죽었는가. 뭐든지 아타고에게 의존한다고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천하를 노리고 있던 테루마사의 마음 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같은 여인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고 하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칸토우[関東]의 토쿠가와 쇼우군[德川 将軍]만큼 권세와 힘이 있다는 뜻에서. [본문으로]
  3. 실제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것은 테루마사의 동생 이케다 나가요시[池田 長吉]. [본문으로]
  4.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 부인이었으나 우지나오의 죽음으로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본문으로]
  5. 귀족 여성의 정복. [본문으로]
  6. 평시에는 열지 못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본문으로]
  7. 일본의 종교인 신도(神道)에서는 불을 막는 신이지만, 신불습합 사상에 따라 불교의 승군지장[勝軍地蔵 – 지장보살의 군신(軍神)일 때의 이름]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혼다 다다카쓰[本多 忠勝]

1610 10 18 병사 63.

1548 ~ 1610.

통칭 헤이하치로[平八郞].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다. [삼걸(三傑)[각주:1]]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공이 많으며, 이가 도피행[伊賀越え[각주:2]]에도 따랐다.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각주:3]], 나가시노[長篠[각주:4]], 세키가하라[関ヶ原] 50여 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한번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무장


 혼다 가문[本多]은 사카이[酒井]나 오오쿠보[大久保]처럼 마츠다이라 씨[松平氏[각주:5]] 창업 때부터 함께 한 후다이(譜代)의 명문가이다. 그런 혼다 가문을 대표하는 것이 [천하 무쌍의 용장]이라는 헤이하치로 타다카츠이다.


 1548년에 태어난 타다카츠는 이에야스보다 6살 연하이다. 13살에 이에야스의 옆에서 처음으로 전쟁을 경험. 이후 50여 번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미카타가하라의 전투, 나가시노의 전투 그리고 혼노우 사의 변에서는 적합한 정세 판단으로 이가를 통과하여 미카와[三河]로 귀국을 진언했던 것[각주:6],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각주:7]에서 행한 대담한 용병술[각주:8]이나 세키가하라[関ヶ原] 등에서는 보여준 활약은 특필할 만한 것이다.

 더욱이 쌍벽을 이룰 정도로 토쿠가와 가문을 대표하는 맹장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각주:9]. 3.9미터에 이르는 [톤보기리(蜻蛉切[각주:10]]라는 명창을 가볍게 휘두르며 항상 앞장서 달려나가 용명을 날렸지만 죽을 때까지도 공적을 자랑하는 일은 없었다.


 이러한 타다카츠의 존재는 당시의 천하인에게도 알려져 오다 노부나가 [화실겸비의 무사(花實兼備의 武士)],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일본제일 고금독보의 용사(日本第一 古今獨步之勇士)]라 절찬했다. 또한 미카타가하라 후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으니 중국산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각주:11]'라며 타케다 무사들은 타다카츠를 칭송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의 전투까지는 힘으로 영토를 얻는 시대였기에 타다카츠는 그야말로 이에야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


 이이 나오마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와 함께 토쿠가와 가문 [삼걸(三傑)]로 칭해지던 타다카츠는 1590년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칸토우[関東]로 이봉되었을 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10만석에 봉해 이이 나오마사 다음[각주:12]으로, 동갑인 야스마사와 더불어 후다이에서 두 번째로 큰영지를 받았다. 무공파(武功派) 신하로써의 역할을 높게 평가받은 결과이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는 나오마사와 함께 동군 선봉군의 군감(軍監[각주:13])으로 참가하여 일시 열세가 된 동군을 질타 격려하여 진용을 바로 세워 승리로 이끄는 활약을 했다. 이 때 당시 53세였다.


 다음 해인 1601년 정월.

 타다카츠는 이세[伊勢] 쿠와나[桑名] 10만석으로 전봉(転封)하게 되었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14])의 유력 다이묘우가 많았던 서일본에서 에도[江戸]가 있는 동일본으로 이르는 길을 방비하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 입구의 요충지가 맡겨졌다는 것은, 토우산도우[東山道] 입구의 요충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城]에 배치된 나오마사와 같은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이에야스가 무공파 유력 후다이[譜代] 다이묘우에게 기대한 것은 바쿠후 정치의 중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서일본을 방비함과 동시에 막부(幕府)측의 선봉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에야스는 이때 타다카츠의 둘째 아들 타다토모[忠朝]에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5만석을 주었다. 타다카츠의 가문은 5만석 가증된 것을 의미한다. 그 점에 대해당초 타다카츠에게 5만석 가증의 이야기가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를 통해서 전해졌다고 하지만 사퇴했기 때문에 행해진 처리라는 이야기가 타다카츠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는 한편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공으로 한 지역[]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가신들에게 줄 영지 배분안까지 만들었지만 결국 아무런 연락도 없어 이에야스의 사자가 왔을 때에 배분안을 불 속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필시 후다이 No.1 중신이며 지금까지의 공적을 있기에 타다카츠는 적어도 나오마사의 사와야마 18만석 이상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예측하고 있었겠지만 김치국만 마시게 된 꼴이 혼다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결과 앞과 같은 이설을 낳았을 것이다. 타다카츠라 하여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가문의 번영을 비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무공파의 면목 잃지 않다.


 세키가하라의 전투 이후. 토쿠가와 가의 중추 세력이 무공파에서 혼다 마사노부 등의 문치파(文治派)로 옮겨지고 있던 상황을 민감히 깨달은 타다카츠는 구와나 성으로 옮기자 동시에 막정(幕政)의 중추에서 물러나 남은 10년을 번정(藩政) 확립에 주력한다.


 그 즈음의 이야기로써 타다토모와 함께 성 주변에 물을 채워 둘러 친 해자에 배를 띄어 타던 중 손에 든 노로 풀 밭을 헤치자 낫으로 벤 듯이 잘렸다는 이야기나 앞서 말한 [톤보키리]의 창을 약 90센티 정도 잘라 사용했다는 이야기(그래도 3미터 정도는 되었다)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가신 중 하나가 하리마[播磨] 히메지[嬉路] 52만석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의 가신과 싸움이 일어났을 때, 끊질기게 관계자 처형을 바라는 테루마사의 사자를 향해서 "이 이상 귀찮게 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늙어서도 여전한 맹장의 면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1610 10 18일.

 쿠와나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3. 화장을 한 후에 죠우토 사[浄土]에 묻혔다.

  1.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지칭.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3.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의 전투. 패주하던 이에야스가 바지에 똥을 지린 것으로 유명. [본문으로]
  4.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의 전투. 보통 3단철포 떡밥으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5. 토쿠가와 씨[徳川氏]의 원래 성. [본문으로]
  6. 노부나가의 죽음을 들은 이에야스는 자기도 죽겠다며 배를 가르려 했지만 타다카츠가 말렸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히데요시와 싸운 전쟁.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와 동맹을 맺고 오다 가문을 제 것으로 만들어 가던 히데요시와 싸웠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히데요시의 직할군 3만8000을 500의 병사로 가로 막았다고 한다. 그 사이에 강이 있어 타다카츠는 그 강에서 말을 목욕시켰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병사들이 철포로 쏘아 죽이려 하자 히데요시는 "저런 용사는 살려 두어야 한단다. 언젠가 내 편이 되었을 때 쓸모가 많을테니"라면서 쏘지 못하게 했다 한다. [본문으로]
  9. 이이 나오마사가 중장갑인데 비해 타다카츠는 움직임을 중시한 경장갑을 선호했다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10. 너무도 날카로워 세워놓은 창에 잠자리[蜻蛉 – 톤보]가 앉았다 미끄러져 반으로 잘렸다는 이야기에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함. [본문으로]
  11. 家康に過ぎたるものは二つあり、唐のかしらに本多平八. 중국산 투구[唐のかしら]란 티벳 지방의 소인 야크(Yak)의 털로 장식한 투구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미카와 무사 10의 7~8은 이 투쿠로 썼다고 한다. [본문으로]
  12. 나오마사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12만석. [본문으로]
  13. 전투 독려, 참모, 감시, 논공행상을 위한 공적 조사 등을 행함. [본문으로]
  14.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무장을 이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