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음력으로 9월 15일[각주:1]이 되면 카고시마 현[鹿児島県] 히오키 군[日置郡] 이쥬우인 정[伊集院町]이 시간여행의 무대라도 된 듯 센고쿠 시대처럼 갑주를 몸에 걸친 무사들이 오며 “체스토! 세키가하키라”를 외치면서 행진한다.
 ‘체스토[チェスト]’라는 것은 카고시마 방언으로 ‘
치쿠쇼우[畜生]’라는 의미이며 화 났을 때나 분노했을 때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 행사를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라고 하며, 9월 15일에 행해지는 것은 1600년 9월 15일[각주:2]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의 패전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묘우엔 사[妙円寺]는 시마즈 군[島津軍]의 대장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위패를 안치한 절이다.[각주:3]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

  시마즈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의 패장이다. 그러나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 보여준 모습에 패자의 비참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러기는커녕 당시 요시히로의 후퇴는 ‘시마즈의 전진철수[島津の背進]’라 칭송 받으며 무명(武名)을 높였다. 요시히로의 무명(武名)은 시마즈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때부터 유명했지만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조선에서의 활약과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우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상대방인 명나라 측에 ‘석만자(石曼子)’로 계속 기억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8년 가을. 요시히로는 사천(泗川)의 성에 7천의 병사를 이끌고 농성하고 있었다. 사천성(泗川城)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가 지키는 울산성(蔚山城),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지키는 순천성(順川城)과 함께 명나라 군이 ‘왜의 세 소굴(倭之三窟)’이라 부르며 최대의 공격목표로 삼은 곳이었다.

 10월 1일, 명나라 군 20만[각주:4]은 사천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요시히로는 명나라 군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를 충분히 끌어들이는 작전이었다. 명나라 군은 의심 없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알맞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요시히로는 총공격을 명했다. 시마즈 군의 철포가 굉음을 내며 일제히 불을 뿜었다. 더구나 미리 숨겨놓았던 화약통을 저격하여 대폭발 시킨 것이다.[각주:5] 명나라 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런 명나라 군에 시마즈 군이 돌격하였다.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던 명나라의 피해는 굉장히 컸다. 기록에는 시마즈 군이 이 일전에서 벤 목은 3만8천7백여[각주:6]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각주:7]
 
요시히로 스스로도 “명예를 중국, 일본에 드높였다”고 할 정도로 이 사천의 대승리를 자랑스러워 하였다. 더구나 이 승리의 영향은 커 울산, 순천의 두 성을 포위하고 있던 명나라 군도 사천에서의 패전소식을 듣고 철퇴한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요시히로는 벤 적의 목들 대신 코를 베어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공적의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몸보신하라며 호랑이의 머리, 고기, 내장 등을 소금에 절여 보내거나 하였다.

 어쨌든 요시히로가 특출한 장수의 그릇이며 또한 개인적으로도 무예, 무용이 뛰어났다는 것은, 이 조선에서의 전쟁에서 “스스로도 칼로 공적을 세웠다” – 즉 스스로도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는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요시히로도 또한 조부 짓신사이 타타요시[日新斎 忠良][각주:8] 이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전통에 따라 아군, 적군 구별 없이 전사자의 공양에 힘썼다는 것에 있다. 현재 와카야마 현[和歌山県]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조선진공양비(朝鮮陣供養碑)”가 그것이다.

 참고로 요시히로의 조부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시마즈 가문의 중흥의 시조로 유교, 불교, 신도(神道)에 밝은 학자이며 실천자였다. 1583년 사츠마[薩摩] 카세다 성[加世田城]을 공략한 타다요시는 당시 경험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해 전사자는 모두 부처라 깨닫고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극진히 공양하였고, 이 전통은 아들인 타카히사[貴久][각주:9] 그리고 타카히사의 아들인 요시히사[義久], 요시히로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1600년 9월 15일 –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의 일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300기(騎), 총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부대의 오른 편에 진을 쳤다.[각주:10] 그 시마즈의 우측에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본진이 있었다.
 오전 8시[각주:11].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군 중에서 주력으로 싸운 것은 이시다, 코니시, 우키타의 부대였다. 요시히로는 어째서인지 병사 한 명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시다 측의 사자[각주:12]가 싸워달라고 부탁하여도, 말투가 싸가지 없다
[각주:13] 쫓아내는 식이었다.[각주:14] 결국 미츠나리 자신이 직접 움직여달라고 요청하러 왔다. 그러자 요시히로[각주:15]는,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 라고 하며 더 이상 대화도 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요시히로는 당초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뜻을 같이하고,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 때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를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거병하자 농성군 주장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가 요시히로의 입성을 거부한 것이다.[각주:16] 요시히로는 미츠나리의 세력범위의 한 가운데 남겨진 꼴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서군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각주:17]

 정오가 조금 지났을 즈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황 [각주:18] [각주:19]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이 급격히 무너졌다. 요시히로는 그래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군이 붕괴하자 동군은 요시히로의 진영으로 밀물처럼 다가왔다.

 이때가 되자 요시히로는 처음으로 싸우려 결심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이제 싸우다 죽는 것 외에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대장이 싸우다 적의 손에 죽는 것은 예부터 사츠마 군[薩摩軍]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요시히로 주종은 사력을 다하여 전쟁터에서 탈출을 꾀하려 하였다. 퇴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동군의 후방에 있는 ‘이세로[伊勢路]’뿐이었다. 요시히로 이하 300기(騎)는 기치(旗幟)를 버리고, 부대표식[馬標]을 부러뜨린 뒤 전군 일환이 되어 고함을 지르며 동군의 한가운데로 돌진하였다.

 동군은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부대가 시마즈 군을 포위하면서 공격해 왔다. 요시히로의 조카 토요히사[豊久][각주:20]가 요시히로의 진바오리[陣羽織][각주:21]를 입고 요시히로의 영무자가 되어 전사, 이어서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이 “내가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다”고 외치며 동군의 주의를 끌다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그들 외의 다른 병사들도 길 위에 각각 앉아 총을 쏘는 “좌선진(座禪陣)”이라는 진형을 취해 추격해오는 동군을 저지하였다. (대충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 듯(링크))

 이러한 휘하의 용감한 싸움 덕분에 요시히로는 구사일생하여 이세로[伊勢路]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때 당초 300기였던 무사는 80기로 줄어있었다.[각주:22]
 
이 요시히로 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탈출 전투는 장렬히 싸운 모습으로 인해 패주라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고 반대로 크게 무명을 드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 후, 종전처리는 형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가 중심이 되어 뻐팅김과 끈질긴 외교를 전개하여 2년 뒤, 요시히로의 무죄와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안도를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요시히로는 은거의 몸이 된다.
 이때부터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을 이은 아들 타다츠네[忠恒=이에히사[家久]][각주:23]에게 치세의 마음가짐 등을 가르쳤다. 화려함과 문약(文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말년에 저술한 한문체의 자서전에 그러한 정치철학을 담았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무시하고 단지 일신의 능력만을 믿고 세상을 살아가려는 자는 곧 멸망해 버리지만, 우리 시마즈 가문은 대대로 신불(神佛)을 우러르며, 선조를 공경하였다. 학문을 갈고 닦으며 번영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 가문을 잇는 자는 더욱 이 전통을 지켜나가야만 한다”
 라는 것이었다. 또한 나중에는 “쿄우[京]의 말투를 쓰거나 다른 지역[国]을 따라 한다면 사츠마는 멸망한다”고까지 말했다.

 요시히로는 굉장히 건강했다. 세키가하라에서 장거리 도피행에 이어 귀국했을 때가 66세였다. 그리고 1607년 이때 나이 73세였다. 이해에 전 관백[前関白]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가 보내온 편지에,
 “귀공은 여전히 천하에 그 무명을 떨치고 있으면서도, 여기까지 들려오는 바에 따르면 지금도 여자들에게 하자고 조른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스스로 무명을 깎아 내리는 일이 아니오?”
 라고 놀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요시히로도 차츰 쇠약해져 곧이어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늙어갔다. 그래도 이 노웅(老雄)에게 식사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밥상을 준비하고는 측근들이 큰 소리로 전쟁터의 함성을 지르며 “적이 다가왔습니다. 어서 식사를 하시고는 적에 대비하십시오”라고 말하면, 그 순간만은 요시히로도 정신이 돌아와 혼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85년의 생애에서 수많은 격전을 쌓아 온 무인의 면목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535년생. 형 요시히사[義久], 동생 토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와 함께 ‘시마즈 사형제[島津四兄弟]’[각주:24]로 용명을 떨쳤다.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25]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시마즈의 본령(本領) 중 오오스미를 히데요시에게 영유를 인정받았다.[각주:26]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해 용명을 떨쳐, 그 공적으로 총 69만9천석이 된다[각주:27]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하지만, 패장인 채 그대로 영지를 인정받은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1619년 죽었다. 85세.

  1. 지금은 참가하기 쉽게 10월 넷째 주 일요일 날 행해진다고 함. [본문으로]
  2. 서력으로는 10월 21일. [본문으로]
  3. 그러나 지금은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망하고 들어선 메이지 정부[明治政府] 초기 불교탄압과 신도 일원화를 위한 폐불훼석(廃仏毀釈) 때 사라진 묘우엔 사[妙円寺]가 있던 자리에 대신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받드는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가 세워진 후에는 "「토쿠시게 ‘신사’」에서 「묘우엔 ‘사’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조선측 기록에서는 약 3만 9천. [본문으로]
  5. 선조실록[선조 105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0월 8일(경신) 7번째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에 따르면 모국기의 진영에서 취급주의로 인하여 폭발이 있었던 듯. [본문으로]
  6. 「시마즈가문 문서[島津家文書]」의 주장. [본문으로]
  7. 사족으로 일본 측에서 전쟁 중이나 후에 가증을 받은 가문은 없지만 시마즈 가문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요시히로의 아들 타다츠네[忠恒]가 종사위하(従四位下) 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로 임관됨과 동시에 5만석의 가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8. 짓신사이[日新斎]는 33살에 은거 후 불문에 들어가면서 칭한 호칭. [본문으로]
  9. 요시히로의 아비. [본문으로]
  10. 근래의 주장으로는, 이 자리 즉 미츠나리 진영의 우측에는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있었으며, 요시히로는 미츠나리 진영 후방에 있었다는 듯. [본문으로]
  11. 오전 10시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야소지마 스케사에몬[八十島 助左衛門]. 임진왜란 때부터 미츠나리가 시마즈 측에 자주 사자로 보내던 인물이었기에 시마즈 측의 면면들과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미츠나리의 사자가 되어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린 것도 이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이었다. [본문으로]
  13. 말투라기 보다는 야소지마가 급하다며 말 위에서 출격을 부탁한 것이 당시 예의나 군법에 어긋났기에, 사츠마의 병사들이 욕하며 죽인다고 난리를 쳤다. 오히려 야소지마와 안면이 있었던 상급지휘관들이 말리는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사족으로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은 이에 대한 일건을 미츠나리에게 보고한 뒤 본진을 빠져나와 전쟁터에서 도망쳤다. 세키가하라 후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에게 취직하여 500석, 후에 타카토라에게 인정받아 타카토라의 문서담당관[右筆]이 되어 1000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15. 요시히로가 아닌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와의 대화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이에야스[家康]는 상경을 거부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행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처벌하기 위해 아이즈[会津]로 향하면서 요시히로에게 후시미 성[伏見城]에 입성하여 지켜줄 것을 명령하였으나, 구두로만 전했을 뿐 문서로 남기지 않았기에 모토타다는 요시히로를 믿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당시 후시미 성을 지키던 군세는 전부 이에야스 휘하의 군세였던 만큼 이질적인 사츠마의 군세가 들어왔을 시 명령계통과 통일적인 움직임에 균열이 생길까 하여 모토타다가 거부하였을 수도 있다 [본문으로]
  17. 요시히로의 사츠마 군세가 이런 것을 포함하여 여러 이유로 세키가하라 때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현재도 주류이지만, 카고시마[鹿児島] 출신으로 사츠마[薩摩] 관련 전문가인 키리노 사쿠진[桐野 作人]씨는 이때 사츠마의 군세가 방관이나 눈치보기를 했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야소지마의 일건과 이시다 미츠나리의 내방 사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일어나 서군이 무너지는 시점이었기에, 미츠나리의 요청으로 군을 움직인다고 하여도 사츠마 1500명의 군세로는 전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츠마 측 참전인물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오히려 전투 초반 요시히로는 활발히 미츠나리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수고한다고 격려하면서 작전계획을 면밀히 짜는 한편 응원이 필요한 곳에 철포 부대를 파견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시간흐름과 전황은 일본군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세키가하라역[日本戦史・関ヶ原役]」에 따른 것인데, 문제는 일본군 참모본부는 센고쿠 관련 연구를 당시의 일차사료가 아닌 에도시대에 나온 군기물(軍記物)에 주로 의존하여 정리하였기에 80년대 중반부터 관련연구가들로부터 자주 까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 [본문으로]
  19. 참고로 사츠마 참전 병사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군세는 2시간도 버티지 못하였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듯이 서군의 분전은 없었다는 인식인 듯. 뭐 전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쓰여진 회고록인지라 아군의 붕괴에 일어났던 일보다 과장된 감정과 지식을 가질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해선 감안해서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0. 시마즈 4형제 중 막내 이에히사[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21. 갑옷 위에 덧입는 조끼처럼 생긴 전포(戰袍) [본문으로]
  22. 요시히로와 함께 탈출한 이는 50명 정도인 듯, 밤 10시 즈음 오와리 코마노 고개[駒野峠] 앞마을 주민들에게 밥 좀 달라고 할 때 50명 정도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3.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고, 시마즈 가문 당주의 통자 ‘히사[久]’를 결합하여 타다츠네에서 이에히사로 바꿈. [본문으로]
  24. 사족으로, 본문에도 나오는 시마즈사형제의 할애비인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사형제의 인물됨을 평하며, "요시히사[義久]는 삼주(=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총대장이 될 덕목을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었으며, 요시히로[義弘]는 영웅의 무략을 갖추어 이에 따를 자 없으며, 토시히사[歳久]는 사건처리의 일부시종의 이로움과 해를 깨닫는 지략에는 견줄 이 없으며, 이에히사[家久]는 군법전술의 묘를 터득했다"고 평하였다. - 덕분에 듣보잡인 토시히사는 신장의 야망이 버전업 할 때마다 지략이 상향조정되어 등장한다. [본문으로]
  25.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6. 그러나 사츠마에 태합검지(太閤検地)가 끝난 1596년에는 히데요시 측의 의중으로, 요시히로가 사츠마[薩摩]를,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의 영지였던 오오스미[大隅]로 영지가 바뀌게 된다. 당시는 본거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였던 때인지라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있는 사츠마를 영유하게 된 요시히로가 시마즈 가문을 대표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사족으로 요시히로는 형 요시히사를 의식하여 사츠마에는 자신의 자식이며 요시히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후계자 취급을 받던 타다츠네[忠恒]를 입성시키고, 자신은 오오스미와 사츠마의 국경에 있는 쵸우사[帖佐]라는 곳에 머문다. [본문으로]
  27. 실제로는 61만 9430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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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2.01.14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견인지 모르겠지만 미나미큐슈사람들은 (제가 본 주변에 한해서지만) 시마즈가의 영향이련지 꽤 운동부계열의 기질의 애들이 많더군요. 하긴 활동하기 좋은 따스한 동네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보니 전 관백 부분에서 혁신같은 게임을 플레이할적엔 코노에 마에히사라고 그냥 읽고 다녔는데 요미가 달랐었군요(..아 부끄럽네요) 이쪽방면으로는 정말 익혀도 익혀도 이래저래 끝이없는 것 같습니다(_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1.16 0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카고시마 쪽 사람들은 아예 본 적이 없어서.. 일본사 속에서도 사츠마하야토[薩摩隼人]라고 하여 날랜 이민족의 있었다 하니 조금이나마 그런 형질의 피가 흐를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자주 헷갈리더군요. 특히 야마시나 토키츠기[山科 言継], 토키츠네[言経]의 경우 항상 코토츠기, 코토츠네...로 읽습지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koviet2 BlogIcon 꼬비에뚜 2012.01.18 1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웹에 이렇게 성의있는 번역물을 올리는 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너무 늦게 알게 되서 ...
    네이버에 안 계시니 소통은 좀 더딜 듯합니다만 자주 찾아와서 뵙겠습니다.

  3. dsfsd 2012.03.23 0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귀석만자 귀신 석만자라는 소문은 무슨 실록인가? 보니까 그런 얘기 들은 적이 없다 라고 조선관료가 그랬다는데 사실인지..??? 그리고........ 생각해보니........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명장을 귀신이라고 붙이질 않잖아요 ...ㅋㅋㅋ ...........오직 동아시아에서 일본에서 鬼자 붙이잖아요 ㅋㅋㅋ 귀의중 귀진벽 귀신 도청흥 적귀 아카이 나오마사 청귀 인정교업 오니 도세츠 오니 시바타 오니 미노 오니 토라..... 개나소나 귀신이라잖아요 ㅋㅋㅋㅋㅋ 그 때 한번 제대로 이기긴했는데. 귀신 시마즈라고 소문났대 라고 시마즈 진영에서 뻥튀기한 거 같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뇌내망상의 사츠마"라 지칭하고 있습죠. ...뭐 근데 자기 공적이나 조상들 공적 뻥튀기하는 거야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으니..

  4. Favicon of http://megathinking.tistory.com BlogIcon ijaeho 2012.08.25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쓰마 관련 배경지식을 찾다가 들어와서 보고 글 남깁니다. 도장에서 지겐류 이야기를 들을때 전율했던 기억이 납니다. 괜히 =_= 지겐류가 강했던게 아니었군요.

  5. primeseals 2014.03.21 0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자료네요. 뒤늦게 이 블로그를 알게됬지만 정말 잘보고 갑니다^^ 하시는 일 잘 풀리시길..

  6.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6: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인물열전 100화를 처음부터 감사히 잘보고있습니다. 요시히로 말년에 밥먹이는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네요.

번역 중인 센고쿠 무장 100에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이 다 등장했군요.
그걸 기념하여, macho를 그리라면 동양권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힐 것 같은 북두의 권 작가 하라 테츠오(wiki_jp)[原 哲夫]의 센고쿠 바이올렌스 만화 '꽃의 케이지(wiki_jp)[花の慶次]'에 등장하는 토쿠가와 사천왕입죠.


왼쪽부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순 입니다.

장면 설명을 좀 하자면 '혼노우 지의 변[本能寺の変]' 후 이에야스 일행이 '이가 도피행[伊賀越え]' 중 지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찌질대면서 배를 가르려 하자 안타까워 하는 사천왕 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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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otokan 2009.11.25 14: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꽃의 케이지... 해적판으로 봤던 기억이 있네요.

    말 그대로 마초심을 관통한 작품이었죠. ㅎㅎ



    아마 일몽암풍류기라는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습니다. 혹, 이 소설이 원작일지도 모르겠군요.(확실치는 않습니다)

    만화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만, 조선과 관계된 내용이 담겨있어서 읽으면서 기분이 나빠져서 책을 놓아버렸습니다. 여주인공이 가야히메였던가... 가라히메였던가 뭐 그랬던 것 같은데요.

    가격에 비해서 볼륨이 두터운 문고본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0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화에서도 원작이 타카 케이이치로우[隆 慶一郎]라고 하니 맞는 것 같습니다.

      만화는 확실히 북두의 권 켄시로우가 장난기를 장착하고 센고쿠로 이동한 듯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읽어 본지 오래 되어서 저도 기억이 잘 안나지만..
      만화는 그런 부분 때문에 조선으로 가는 부분을 제외하고 오키나와로 가는 것으로 떼웠다고 하는군요.

      伽姫...라고 나오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かひめ??

      언제 샀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있는 것은
      세금 제외하고 667엔.
      교보 가격으로 9190원 주고 샀습니다...
      무려 560페이지.... 확실히 가격에 비해 말씀대로 볼륨감이 있습니다.

      만화는 문고판으로 4권까지 가지고 있습죠. 이것도 있을 때마다 모으고 있는데...옛날 책이어서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1.25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클론 장수 넷이 죄다 말리려 들진않고 X마려운 표정으로 그냥 보고만 있군요(오오오..-_-..)

    그래도 여기에서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제일 쳐지는(무려 뒷줄)건 코에이 겜이나 별 다를바 없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0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실제론 저들이 토쿠가와 사천왕이라고 나오진 않습니다. ^^;

      무엇보다... 꽃의 케이지 자체에서 토쿠가와 사천왕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다보니...

      단지 이가 도피행에 토쿠가와 사천왕 모두 참여했다고 하며, 우연찮게 만화에서 저렇게 네 명이 한꺼번에 그려져 있길레 제가 그냥 토쿠가와 사천왕이라고 우기는 것 입니다.

      그래도 실제 초상화와 제일 닮은 것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인 듯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f/Sakakibara_Yasumasa.jpg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9.11.27 14: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엇 제 모습이 있군요 ㄲㄹㄲㄹ

 

 에도 시대[江戸時代], 오우미[近江] 히코네 번[彦根藩] 이이 가문[井伊家]은 대대로 대로(大老[각주:1])를 배출하는 후다이 다이묘우[譜代大名[각주:2]] 필두의 가격(家格)으로 유명했다. 막말(幕末) 즈음,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각주:3]]과 사쿠라다 문밖의 변[桜田門外の変[각주:4]]으로 잘 알려진 이이 카몬노카미 나오스케[井伊 掃部頭 直弼]가 이 가문 출신이다.

 센고쿠[戦国] 시대, 이이 가문은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라는 호칭으로 용명을 떨친 용맹무쌍한 전투집단이었다.  이이 가문의 깃발, 표식, 장병의 갑주는 물론 마갑(馬甲)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 그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무리가 전쟁터를 질주한 것이다. 이 집단을 처음으로 이이 가문에 도입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였다.

 적비대는 원래 타케다 가문[武田家]의 것으로 나오마사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즉 1582년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죽은 뒤, 이에야스[家康]는 타케다의 유신(遺臣)들을 나오마사의 가신단에 편입시켰다. 나오마사는 새로 타케다의 유신들을 포함한 가신단을 편성하면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군단이 적비대였다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그간의 사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코우슈우 군[甲州[각주:5]軍]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었다. 누구나가 이 타케다의 유신들을 원했다. 그런 타케다의 유신들이 이이 가문에 배속되게 된 데에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가, “젊고 신참인 나오마사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그의 휘하로 배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 정도는 자신에게 배속해 달라고 부탁하며, 만약 들어주지 않을 경우엔 나오마사와 결투를 벌이겠다고까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타다츠구는 가당치 않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다.
 “원래 주군께서 나에게 배속시켜 주신다는 것을 내 멋대로 나오마사에게 배속시킨 것이다. 만약 자꾸 네놈이 툴툴거리면 네놈 일족을 모두 꼬챙이에 꿰어버릴 테다”
 이 완고한 타다츠구의 태도로 인해 타케다 유신단은 이이 가문 배속이 결정된 것이다.

 나오마사는 토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인 무공파(武功派)이지만 사천왕의 다른 멤버들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들 처럼 조상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것이 아니라 나오마사의 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토쿠가와를 섬긴 신참이었다.
 이에야스를 섬기기 전까지 이이 가문은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이이노야[井伊谷]라는 곳에서 살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속해 있었지만, 부친 히고노카미 나오치카[肥後守 直親]가 누명을 쓰고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에게 살해당하자 나오마사는 도망쳐 친족의 손에 키워지던 중 이에야스가 나오마사를 발견하여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이 이례적인 발탁과 그 후 이에야스의 지나친 총애로 인하여 나오마사는 이에야스 남색(男色) 상대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신참이었지만 나오마사에 대한 이에야스의 신뢰는 두터워 토쿠가와 가문에서의 지위를 높여 갔으며, 나오마사도 또한 충실한 가신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며 자신 스스로도 후다이[譜代[각주:6]]라 여기고 있었다.

 후년 히데요시[秀吉]와 만나러 이에야스가 상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7]]를 이에야스의 성에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야스가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오오만도코로의 인질 역할은 끝나 그녀를 반환하게 되었다. 이때 나오마사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아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히데요시는 나오마사의 빈틈없는 호위에 기뻐하며 공을 치하. 다음 날 나오마사를 위한 향응의 자리를 만들어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에게, “자네는 요전까지만 해도 나오마사와 동료였으니 함께 참석하게”라며 동석시켰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의 고굉지신이었지만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인물이었다. 카즈마사를 본 나오마사는 참석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 카즈마사는 우리 주군인 토쿠가와를 조상 대대로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군을 배신하고 전하(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겁쟁이이기에 졸자는 동석하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나오마사의 후다이[譜代] 의식을 강조한 일화이다.

 이어서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の役[각주:8]] 때의 일이다. 장기전으로 인해 장병들의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이 없도록,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나 사카이[堺]의 상인들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여 장병들이 술잔치나 춤, 노래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활발한 진중 위안을 행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까지 쿄우토에서 불러들였고, 여러 다이묘우에게도 그들의 처첩을 부르도록 권했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축제와 같은 떠들썩함이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오마사는 한 가지 꾀함이 있었다. 빠질대로 빠진 히데요시는 불과 14~15명의 호위만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나오마사는 슬며시 이에야스에게로 가서,
 “주군.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히데요시의 목을 취하기는 아주 쉽사옵니다”
 야심만만한 나오마사의 헌책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천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으켜선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에 따라야 한다. 이것을 명심하도록”
 하고 엄격하게 나오마사를 꾸짖으며, 어떤 일이건 성취될 때에는 때의 추세라는 것이 있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나오마사는 동군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9월 15일 결전 당일 새벽. 나오마사는 흰 갑옷을 입고 짙은 안개 속에 말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정찰을 나가 낌새를 엿보다 전투가 시작되자, 말 재갈을 쥐고 있던 부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싸우다 전사하면 운명일 뿐”
 이라며 적진으로 돌입했다고 한다.
 또한 아군인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하 장수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가 막아 서자[각주:9], 정찰을 나간다고 속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고도 한다.

 이 결전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배반케 한 동군이 서군을 총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그때 패잔병 500여기를 이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동군 진영을 스치며 쏜살같이 질주하여 퇴각하였다.
 나오마사의 이이 군은 곧바로 이를 추격, 시마즈의 후군[殿]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를 전사시켰지만, 난전 속에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던 나오마사는 시마즈 군의 저격에 오른 팔을 맞아 부상 당해 낙마하였다.[각주:10] [각주:11] [각주:12]

 이때의 상처로 나오마사의 오른 팔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세키가하라 전쟁 다다음 해인 1602년 7월 나오마사는 거성(居城)인 사와야마[佐和山]에서 죽었다.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561년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만치요[万千代]. 이에야스[家康]를 섬겼으며 1582년 이에야스코우슈우[甲州] 경영에 공적을 세웠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에 종군. 1588년 텐노우[天皇]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때 히데요시[秀吉]의 알선으로 종오위하(従五位下) 지쥬우[侍従]가 되었다[각주:13]. 배신(陪臣[각주:14])으로서는 파격의 대우였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으로 인해 코우즈케[上野] 미노와 성[箕輪城] 12만석에 봉해졌고, 후에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8만석으로 가증되었다. 1602년 42세에 죽었다.

  1. 중요 정책 결정을 할 때, 혹은 다대한 공이 있는 원로 대신을 위한 비상임 막부 최고위직...여담으로 채널 J에서 방영 중인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篤姫]에서는 '특별 정무대신'으로 번역되어 나온다. [본문으로]
  2.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부터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를 섬겼던 가문이나, 쇼우군[将軍]이 새로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 준 가문. 막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안세이[安政]는 당시 일본의 연호. 1858(안세이 5년[安政五年])~1860년 나오스케가 살해당할 때 까지 일어난 옥사. 당시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쿄우토[京都]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무단 조인하고, 나오스케 주도로 14대 쇼우군[将軍]이 키슈우[紀州]의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로 결정되자,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압한 사건. 덕분에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적들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 [본문으로]
  4. 안세이의 대옥에서 나오스케의 정적 중 중심적 존재인 미토 번은 번주의 은거, 전 번주의 장기 칩거, 가로들의 할복 등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에 불만을 품은 미토 번사 17인과 사츠마 번사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 次左衛門]이 에도 성[江戸城] 사쿠라다 문[桜田門] 앞에서 등성 중이던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여 살해한 사건. 여담으로 나오스케의 목을 자른 것은 주도한 미토 번사가 아니라 사츠마에서 혼자서 참가한 아리무라였다 . [본문으로]
  5. 카이[甲斐]를 달리 이리 부른다. [본문으로]
  6. 주가(主家)를 조상대대로 섬기는 가문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애미 [본문으로]
  8. 히데요시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9. 선봉은 무가의 명예였기에 함부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0. 시마즈 요시히로의 전투기인 [유신공관원합전기(惟新公関原御合戦記)]에는 이리 쓰여 있다 한다. [본문으로]
  11.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시마즈 가문의 병사 쵸우사 히코사에몬[帖佐 彦左衛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나오마사는 서군이 패주한 후 아직 움직이기 전의 시마즈 군에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큰소리로, “무엇들을 하고 있나? 요시히로를 죽여라!”라고 외쳤을 때 카와카미 타다에[川上 忠兄] 휘하의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앞으로 나아가 철포를 쏘아 나오마사를 맞추자 나오마사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맞은 것에 놀라 동요하는 동안 시마즈 군은 퇴각을 시작했다고 한다.[旧記雑録後編 三] [본문으로]
  12. 덧붙여 이이 가문의 사료 [井伊家慶長記]에 따르면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쏜 총탄은 갑옷 오른 쪽 옆구리에 맞았지만 갑옷이 튼튼했기에 튕겨서 오른 팔에 맞았다고 한다. 나오마사는 이 충격에 창을 떨군 후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효우부쇼우유우[兵部少輔] 겸임. 이때 혼다 타다카츠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무가(武家)가 관직을 얻었다는 의미인 쇼다이부[諸大夫]인데 비해, 나오마사는 지쥬우[侍従]가 되어 쿠게[公家]가 되었다. 이는 당시부터 나오마사가 토쿠가와 가문 필두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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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11.18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아닌지..^^;

    나오마사가 신참이라니. 꽤 놀라운 걸요?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쿠게가 되는 기준이 뭔가요? 아무리 살펴봐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8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고쳤습니다. 꼼꼼히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참치고는 후세의 영향이 막강 & 유명한 것 같습니다.

      당상가(堂上家)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쥬우[侍従]라는 관직이 종오위하(従五位下) 임에도 불구하고 궁정[内裏]에 입궐이 가능하였으며, 그런 궁정 입궐 가능한 자격을 당상(堂上)이라 하였고, 궁궐 입궐 자격이 없던 사람이 생긴 것을 쿠게나리[公家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12시부터 티스토리가 점검 들어간다고 급하게 쓰는군요. 내일 다시 정리하여 쓰겠습니다.

  2. 나라 2009.11.19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뭘요! 좋은 글 올려주시는 발해지랑님께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발해지랑님께서 자주 틀리는 맞춤법을 지적해서 올릴까 생각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저는 일본어 실력이 바닥이라, 듣는 것과 말하는 건 그럭저럭 하는데 그외엔 전혀.

    당상가가 된다는 듯이었군요.. 종오위하 관직 중 시중이 입궐 가능한진 몰랐습니다.
    승전 가능한 지위는 어느 정도인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웃!! 미리미리 말씀해주세요~ 있었음. ^^;

      원칙적으로는 종삼위[従三位]이상은 입궐이 가능했던 듯 싶습니다.(산기[参議]의 경우 사위[四位]라도 의정관이라는 위치 상 입궐이 가능했다 합니다).

      나중에 원정(院政)가 확립되면서 좀 복잡해 진 것 같습니다....이런 쪽은 아직 제 안에서 정리되지 않아서 뭐라 말씀 드릴 수 없군요.

      지쥬우[侍従]는 역할 자체가 텐노우 곁에서 시중드는 것이다 보니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일본은 환관이 없다보니 그런 조선이나 중국의 환관들이 하는 일 중 일부를 지쥬우가 했던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9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이 나오마사가 당대에 손꼽힐만한 미남이었던 건 사실인 듯 하나, 당대에 손꼽힐만한 잔인성을 지녔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야스의 명령을 너무 '외골수'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낯부끄럽지만 (?) 나오마사가 너구리의 남색 상대라는 말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듯 합니다. 워낙 초고속 승진을 한데다가 요지 중의 요지인 히코네에 둘 정도였으면 나오마사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듯 합니다. ( 에헴 ) 원래 사랑하는 사이일 수록 더 믿음이 돈독해지는 법이니깐 말입니다 ㅎㅎ

    다만, 나오마사나 사위인 다다요시가 세키가하라 이후 너무 급하게 죽은 감이 없지 않네요. 이 쪽 관련 음모론은 없으려나요?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쵸... 이이 가문 휘하에 있던 사람들은 아침에 나올 때 미리 조상들에게 인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신참에게 그렇게까지 우대를 한 이유를 댄다면 굉장히 유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후장파기는... 다만 다른 예가 없다는 것이 저에게는 쪼금 이해가 안가긴 합니다.

      이이 가문은 쿄우토 슈고[京都守護]였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래서 이이 가문 하급 가신이라도 말을 키워야 했었다 합니다. 쿄우토에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시는 즉시 이동할 수 있도록...그러나 사쿠라다 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살해 당하면서 막의 눈 밖에 나, 그 대신해서 설치된 것이 신선조의 상위 조직으로 유명한 쿄우토 슈고쇼쿠[京都守護職]라고 합니다.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타다요시와 나오마사는 친번(親藩)과 후다이[譜代]에서 각각 워낙 막중한 임무를 띈 중요 인물들이라 오히려 그들이 죽은 것이 막부에게 큰 손해였다고 생각합니다.

  4. shiroyume 2009.11.19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손이 그 유명한 막말의 이이 나오스케지요. 어찌보면 어울리는 최후. 거기다 이 이이 가문은 메이지 정부 이후에도 시장까지 하는 인물이 나오죠. 역시 중간보스 가문?
    말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자기는 죽도록 싸워봐야 20만석 가량이었는데 철부지 어린애들한테 자기 아들이라고 50만석 얹어줬는걸 보면 화가 끌어오르지 않았을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년엔 젊었을 때의 날카로움이 빠져 뭐든 허허~ 하고 미소짓는 중년이었다고 합니다.

      말년의 에피소드로, 자기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코쇼우[小姓]가 나오마사의 과자를 몰래 집어 먹었는데, 그걸 문 틈으로 보면서도 "어찌할고~어찌할고~"하면서 웃었다고 하더군요.

      어떤 기분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오와리 번[尾張藩] 자체가 나오마사의 사위 타다요시[松平 忠吉]가 죽으면서 생긴 중요한 빈 공간을 급격히 메워야 했기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1.20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뻘플이지만....
    천도에서 토라마사, 마사카게, 나오마사만 적비를 갖고 있던가... 암튼 맞으면 무섭더군요;;;

  6. 맹꽁이서당 2009.11.20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이 인물이 어디서 공을 많이 세웠길래 도쿠가와가 가신 중 거의 으뜸 자리를 차지했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대망에서도 그렇고 이 글 요약에서도 사실상의 첫 출전은 코마키-나가쿠테 전쟁 같은데, 그 이후 세키가하라까지 도쿠가와 가문이 전력으로 응한 전쟁은 거의 없지 않나요? 호죠가 정벌도 전투 보다는 병력 수로 압도한 경우라고 생각하구요.

    대망에서는 나오마사 첫 등장 씬에서 이에야스 첫사랑 여인의 친척 아이라고 묘사했던데, 남색설은 별로 반기지 않기에 차라리 그런 소설적 구성을 믿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4 0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노부나가 사후 공백지가 된 시나노[信濃], 카이[甲斐]를 두고 호우죠우 가문[北条家]과 싸울 때 전권대사가 되어 휴전 & 동맹을 성립시킨 공이 무지 큰 듯 합니다. 요다 노부시게[依田 信蕃]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의 후방 교란이 있었다 하나 총체적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호우죠우와의 교섭에서 이에야스가 바라던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공이 큰 듯 합니다.

      첫 출진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토오토우미[遠江] 시바하라[芝原]에서 일어난 전투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 패하여 이에야스와 몇 명들과 도망치던 중 허술한 식사를 하던 중 혼자서 먹지 않는 나오마사를 반찬투정 부린다고 생각한 이에야스가, '니도 먹어라'...라고 하자, 나오마사는 '남들이 식사하는 동안 보초를 서겠습니다. 행여 적이 오면 모두 도망가는 동안 목숨을 바쳐 모두 피할 시간을 벌겠습니다'...라고 하여 이에야스를 감동시켰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에야스-나오마사 그렇고 그런 관계는 좀 믿기 힘들더군요. ^^

  7. 보통사람 2009.11.26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시마즈가문이 역전의 용사들을 많이 잡았네요...

    오오토모 소린 - 규슈전체의 60%를 영유하던 군웅.
    시마즈가문의 침공을 받은 이토가문을 구원하러 8만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계략에 빠져 대패하고 겨우 도망침. 많은 인재들이 전사했고 패배가 알려지자
    오오토모가문의 많은 가신들이 류조지, 아키츠키 등과 내통하며 반란을 꾀하는등
    적지않은 후유증...

    류조지 타카노부 - 히젠의 곰이라 불린 군웅. 아리마 가문을 치기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아리마 가문을 구원하러 온 시마즈군의 계략에 걸려 대패하고 전사.
    류조지가문의 많은 맹장들이 타카노부를 지키다 같이 전사.

    다카하시 쇼운 - 오오토모의 가신으로 5만의 시마즈군에 7백명은 군사를 이끌고 농성 끝에 전사

    초소카베 노부치카 - 아버지 모토치카, 소고 가문과 함께 규슈정벌에 참여했다가 대패. 아버지를
    먼저 후퇴시킨뒤 후위를 막다가 전사.

    이순신 - 노량에서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하던 중 시마즈군의 철포사격에 전사.

    이이 나오마사 - 세키가하라에서 후퇴하는 시마즈군을 추격하다가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토모 이하의 사람들은 노부나가가 살해 당하지 않았음 그냥저냥 살았을지도...(노부치카는 미묘)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중재로 오오토모-시마즈 간에 화평이 성립되었다고 하더군요.

      임진왜란 같은 노부나가의 조선 침략이 있었겠지만...역사의 if가 어떻게 흘러갈지...

  8. 2009.12.01 0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2009.12.02 0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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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다. 이에야스[家康]에게 측실은 다수 있었지만, 정실이었던 츠키야마도노[築山殿] 5년 전의 어느 안 좋은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한 후 아무도 정실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츠키야마도노와의 부부싸움에 질려있었던 만큼 홀아비 생활의 자유로움을 즐기는 듯한 상태이기도 하였다. 요약하면 독신이기는 했다.

 나이는 44. 신부가 되는 아사히히메는 43세이며, 원래부터 미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밭에서 일하였기에 피부가 쭈글쭈글했고, 햇볕에 탄 잔주름이 깊어 화장으로는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거기에 출신의 미천함은 유명했으며, 지금까지 관위도 없는 무사의 마누라였다. 그런 여성을 이에야스가 받아들일지 어떨지……

 

-가부가 어떻든, 우선 지금은 해보자.

 그 중매를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서는 형식으로 하여, 사자(使者)로 노부카츠의 중신으로 지금은 하시바 가문[羽柴家]의 직속 신하[参]가 되어 있는 히지카타 칸베에[土方 勘兵衛], 토미타 사콘[富田 左近]들을 하마마츠[浜松]로 내려 보냈다. 히지카타 칸베에는 언변이 뛰어난 남자였다. 이에야스 앞에서 천하와 양 가문의 안태(安泰)를 위해서 이토록 경사스런 일은 없다 고 열변을 토했다. 이에야스는 단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침묵을 지켰다. 마지막에 입을 열어,

 

 하룻밤 생각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자네들의 면목을 잃게 하지는 않겠다

 

 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가 중신들을 모아 상의를 하고자 할 즈음에는 이미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중신들 대부분이 안색을 바뀌고 혐오감을 드러내며 반대하였다. 주가(主家)에 어디의 개뼈다귀인지도 모르는 미천한 피를 섞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종삼위(從三位) 곤다이나곤[大納言]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닥쳐라

 

 이에야스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감정론을 백날 밤 들어보았자 아무 소용없었다. 실제로 그 미천한 출신의 43세 노파와 살을 맞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이 이에야스 자신이며 좋고 싫다는 감정을 먼저 내세운다고 하면 자기부터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 점을 꾹 참고 일은 어디까지나 정치 문제로써 결론을 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신랑 후보자는 굉장한 참을성을 갖추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이웃나라의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이마가와 일족에서 연상의 여성을 부인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부인인 츠키야마도노를 이십 수 년 뒤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강요로 인해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와 함께 죽였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 산하에 있던 토쿠가와 가문은 하루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며, 모든 것은 상기(上記)와 같이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 히데요시의 여동생이라는 막 이혼한 초로(初老)의 노파와 결혼하는 것도, 자신의 감정으로만 이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하시바 가문은 그 출신이 어떻든, 예전 이마가와 씨나 오다 씨[織田] 이상의 권세와 위세를 가지고 있고 또한 커져가는 중이었다. 정세가 그러한 이상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게

 

 이에야스는 다른 이유를 대서 가신들에게, 토쿠가와 가문 가신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워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사히히메는 그럴듯한 인질이라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히데요시는 천하의 반 이상을 손에 넣었지만 그러나 먼저 자기 쪽을 낮추어 여동생을 토우카이에 있는 자신에게 인질로 바치려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한번은 가신에게 시집 보냈던 사람을 되돌려 받아서까지 이런 일을 한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괴로움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정세를 보건대 - 하고 이에야스는 말을 이었다. 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시바 가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하(隸下)에 속할 수 밖에 없다. 이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안 이상, 될 수 있는 한 좋은 형태로 속하는 것을 생각하는 편이 득이다. 이 정도의 일로 그와 다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 정도의 일 이라는 것은 아사히히메와의 결혼문제였다.

 이에야스는 승낙하여, 그 뜻을 사자에게 전하는 한편, 가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에게 함을 들게 하여서는(納幣) 서둘러 오오사카[大坂]로 향하게 하였다.

 

 성공했구나~ 이런 경사스런 일이~”

 

 히데요시는 손뼉을 치며 굉장히 기쁜듯한 모습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내심 이 건을 이리도 쉽게 받아들인 이에야스라는 남자에게, 여태까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두려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재빠른 응답의 경쾌함도 저 뚱뚱한 사나이의 무략(武略)일 것이다.

 

 일이 진행되어 결혼 행사는 성대히 행해졌다. 아사히히메는 단지 몸을 그 진행에 맡기고 맡긴 채 멍하니 있는 것 외에는 없었다.

 몸이 오오사카 성[大坂城] 안에 있는 건물에서 가마에 태워졌다. 곧이어 텐마[満]에서 배에 옮겨졌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 쿄우[京]의 쥬라쿠테이[第]로 들여보내졌다. 이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이 그녀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다. 그녀는 식사를 하고 볼일을 보는 것 이외에는 단지 숨만 쉬고 있을 뿐으로, 모든 것이 알아서 진행되었다.

 

 결혼 성립 후 석 달이 지난 초여름.
 
그녀의 몸은 가마 위에 태워져 쿄우[]를 출발하였다. 그 결혼 행사의 담당관은 일족인 아사노 단죠우쇼우히츠 나가마사[
正少弼 長政], 오다 가문 일족인 츠다 하야토노쇼우 노부카츠[津田 隼人正 信勝], 타키가와 기다유우[ 儀太夫] 등으로 그들이 1000기 정도를 이끌고 앞뒤를 경호, 아사히히메 직속의 시녀와 호종의 무사 만으로 150여명, 부인용의 가마가 11, 끈으로 어깨에 매는 가마가 15채라는 마치 화려한 그림 속에 있는 듯한 행렬이 이어졌다.

 

 5 15일 하마마츠에 도착.

 그 날 곧바로 성 안에서 혼례가 치러졌고 끝나자마자 이 경사스런 행사가 무사히 마쳤음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토쿠가와 가문의 노신(老臣)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가 하마마츠를 출발했다.

 이에야스는 그날 밤, 당연하게도 아사히히메와 같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이에야스는 총애하는 측실이 많았다. 니시고오리노츠보네[西郡局][각주:1], 오만노카타[方][각주:2], 오아이노카타[方][각주:3], 오츠마노카타[都摩方][각주:4], 오차아노카타[茶阿方][각주:5], 오카메노카타[方][각주:6], 오카지노카타[お梶の方][각주:7] , 그 후궁들은 하나하나가 눈부신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기에, 이제 와서 이 노파 같은 아줌마와 같은 이불 속에서 즐기는 것에 색다른 맛을 추구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 인물의 놀라운 점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열심히 남들만큼이긴 했지만 첫날밤을 보낸 것이었다. 신부와 접하는 방식도 상냥하여, 피곤에 쩔어 있을 그 정신을 편안하게 하고자 필요한 위로의 말을 부족함 없이 사용하였다.

 아사히는 그에 대해 때때로 조그맣게 끄덕일 뿐으로 여전히 둔한 반응밖에 나타내지 않았지만 그러나 내심 신선한 충격에 놀라고 있었다.

 이에야스라고 하면 토우카이 제일의 무사[東海一弓取り]로 노부나가님조차 조심했다고 하는 대장(大將)이라 듣고 있었는데, 이 상냥함이란……  첫 남편인 소작농도, 다음 남편인 오와리[尾張]의 작은 호족 출신인 진베에[甚兵衛], 이만큼의 상냥함으로 아사히를 다뤄준 적이 없었다.

 그 감동이 아사히의 시선에 어리기 시작했을 때, 이에야스는 그것을 재빨리 눈치채고 이 다소 어려웠던 작업이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아 가벼운 안도감을 느꼈다.

 

 이에야스로서는 아사히를 상냥히 다루어야만 했다. 그 이불에 들어갈 때도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되었고, 오히려 총애하는 측실들과 접할 때 이상으로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사히에게 붙어 온 노녀(老女)가 다음날 아사히에게 그것을 들을 것이다. 들으면 곧바로 장문의 편지를 히데요시의 밑에 있는 노녀에게 보낼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아사히히메를 대하는 태도를 알고 싶어하여, 그 편지가 언제 오나 하고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이에야스에게 있어 이처럼 이불을 함께 덮는 것은 정치였으며, 아사히의 탄력 잃은 몸을 애무하는 것이 다소 인내를 필요로 했지만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있어 히데요시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중요한 기대는 이 결혼에 의해 이에야스가 상락(上洛)해 올 것이라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아사히를 그 집에 담아두기만 하고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으며, 토우카이의 경영에 열중하며 히데요시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식의 행동을 계속 견지했다.

 히데요시의 초조함이 커졌다. 이렇게 된 이상 이 혼례 이상의 희생을 치른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에야스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중요한 결심을 히데요시에게 하게 만들었다. 모친을 인질로 하마마츠로 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이에야스 상락에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보장을 하고자 하였다. 상락을 하여도 이에야스를 죽이는 일은 없다, 그 보증으로써 내 모친을 그 쪽으로 보낸다는 것이었으며, 이에야스에게 만에 하나라도 있을 시에는 이 모친을 죽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기도 했다.

 

 코이치로우, 그것을 어머니에게 말해봐 

 

 고 히데요시는 동생에게 명령하였다. 코이치로우 히데나가[小一 秀長]는 놀랐다. 칸파쿠[白] 히데요시라고 하면 이미 천하의 주인이다. 그런 분이 기껏해야 토우카이 수개 국의 지방 다이묘우[大名]를 상락시키기 위해서 여동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친을 인질로 받치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무문의 치욕이 아닌가? 하고 히데나가는 반대하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하마마츠님(이에야스)에게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상락을 재촉하고 따르지 않으면 싸워서 멸하면 될 뿐입니다.”

 

 고 말했다. 이것이 정론일 것이다. 필시 죽은 오다 노부나가라면 그렇게 했을 터이다. 이미 히데요시는 칸파쿠의 자리에 올라 그 판도에는 키슈우[紀州], 시코쿠[国]가 더해져 있었다. 이에야스를 복종시키기에 아무리 보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요시의 감각으로서는, 그러니까 무문의 치욕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의 강자(强者)가 시골의 약소한 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겸손이라는 것이지 치욕은 아니며, 세상도 당연히 그렇게 느껴 오히려 아름다운 일로 볼 것이다. 내 통일 방침은 쉽게 가는 것을 방침으로 하여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아끼고, 무력을 피하며,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한다. 방침은 그것 하나뿐이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현재 큐우슈우[九州] 정벌을 이미 휘하의 군단에게 명령을 내려, 스스로도 원정군을 이끌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동방의 위협을 없애고 천하를 안정시켜 두고 싶다. 히데요시는 계속 말했다. – 하마마츠님은 돌아가신 노부나가님의 동맹자이며, 그 위세와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하마마츠에서 달려 나와 내 막하에 들어온다고 하면, 그 순간 천하의 인심은 안정되고, 토요토미의 천하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목적은 거기에 있다. 얻는 것은 이에야스를 공격하여 멸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는 것이었다.

 

 모친인 오나카[仲]는 작년, 히데요시가 칸파쿠에 취임됨과 동시에 오오만도코로[大政所]라는 호칭을 궁정과 세간에서 얻고 있었다.

 - 알겠다.

 고 이 오오만도코로는 이외로 순순히 승낙하였다. 히데나가가 이 늙은 어미에게 정치 정세로 설득한다고 하여도 그녀를 당혹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기 때문에,

 

 어떻겠습니까? 오래간만에 아사히를 만나러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라는 것만을 그녀에게 말했을 뿐이다. 오나카에게 불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세간에도 그것을 이유로 공표하였다. 오오만도코로가 아사히히메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내려가신다 - 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의 이 제의에는 굴복하여 상락한다는 뜻을 전하고 그 준비를 하였다.

 곧이어 오오만도코로는 오오사카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이에야스는 오카자키[岡崎]까지 나와 마중하여, 손수 하마마츠에 안내할 예정을 세워두고 있었지만, 막료 중 한 사람이 굉장히 촌스러운 의견을 올렸다.

 

 가짜일지도 모릅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억측이었다. 그가 말하길, 저렇게 늙은 여자는 쿄우[]의 궁궐에 있는 여관(女官) 중에 넘칠 정도로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속이기 위해 어딘가에서 끌고 온 늙은이를 오오만도코로라고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 그건 그렇겠군.

 하고 이에야스도 수긍하여, 이미 그는 오카자키 성에 도착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계책을 짜 예정을 바꾸었다. 서둘러 하마마츠에서 아사히히메를 불러들였다. 그 꿍꿍이는 아사히히메가 오오만도코로와 대면하였을 때의 모습이나 행동을 가지고 판단하고자 한 것으로, 이에야스와 막료들은 전부 이 꿍꿍이를 맘 속에 숨겼다.

 하지만 저 부인은 기색을 확실히 읽을 수 없기에, 잘 될지…’

 라는 걱정도 있었다. 반사가 둔했고, 무표정이기에 마음 속을 알기 힘들었다.

 

 아사히히메가 예정 변경으로 인하여 황망히 하마마츠를 출발한 것은 10 17일이었다. 오카자키로는 이틀간의 여정이다. 그녀의 행렬이 오카자키의 성 밑 마을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인 18일 저녁 즈음이었다.

 그때 마침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오오만도코로의 행렬이 서쪽에서 오카자키로 들어와, 두 행렬이 성의 대문 앞에 있는 사거리에서 마주쳤다.

 

 저건 오오만도코로의 행렬이 아닌가?”

 

 아사히히메는 가마의 창문을 오려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녀로서는 신기하게도 빠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오만도코로도 눈치챘다. 서로가 동물 같은 후각과 반응이었다. 오오만도코로도 가마를 멈추게 하여 창문을 올렸다. 회색 머리를 가진 목이 창에서 나왔다.

 

 ~!”

 

 하고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른 것은 아사히히메 쪽이었다. 가마에서 굴러 나와 치마를 밟으며 내달렸고 그 때문에 넘어졌다. 아사히히메가 일어나는 것과 오오만도코로가 서둘러 가마에서 굴러 나온 것이 동시였다. 그 기세로 모녀가 길 위에서 서로 부둥켜 안았다. 아사히히메는 치마를 흙투성이로 만들면서 꼬꼬마 여자애와 같이 몸부림치며 울었다.

 - 틀림 없군.

 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실험실의 늙은 학자와 같이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은 이에야스의 막료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였다. 현명한 실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반면에 있는 잔인함은 나중에까지 이어지는 토쿠가와 가문 특유의 가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에 안심하여, 다다음날 쿄우[京]를 향해 출발했다.
 
이에야스 상락 중인 25일간, 오오만도코로와 아사히히메는 오카자키 성안에 있는 건물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그러는 동안 토쿠가와 가문의 장수들인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와 상기의 혼다 시게츠구가 수하들을 이끌고 그 건물을 감시했다. 혼다 시게츠구는 오오만도코로의 건물 주변에 산과 같이 마른 풀과 장작을 쌓아놓고 사졸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켜보게 하며, 쿄우[]에서 이에야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불을 붙여 모녀 함께 태워 죽인다는 자세를 보였다.

 - 너는 이런 집에 시집을 온 것이냐?

 하고 오오만도코로도 놀라, 이 막내딸의 불행을 지옥에서라도 발견한 듯한 생각이 들어 25일간 모녀가 함께 울며 보냈다. 이 오카자키에서 8[각주:8] 서쪽에, 그녀들이 나고 자라며 생활했던 오와리 나카무라[中村]가 있다. 그 땅에서 가난한 소작농일 즈음 지냈던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웠던 가를 번갈아 가며 질리지도 않은 듯 말을 서로 주고 받았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무사히 상락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오오만도코로는 오카자키를 떠났다. 이 직후, 이에야스는 그 거성(居城)을 하마마츠에서 순푸[駿府]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아사히도 그에 따라 이후 순푸 [駿府城]에서 살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스루가 고젠[駿河御前]

 

 이라 불렸다. 하지만 그 기간도 오래는 못 갔다.

 3년 후인 1589 7. 쿄우[]에 있던 오오만도코로가 병들었을 때, 병간호를 위해서 상락하였고, 다행스럽게도 오오만도코로는 완쾌하였지만 아사히히메는 정신이 병들어 그대로 쿄우에서 요양을 하였다. 실상은 순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정신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차츰 쇠약해져, 다음 해인 1590 1 14. 쥬라쿠테이[第]에서 죽었다.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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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는 그녀의 유골을, 그녀의 정신에 병이 들 정도로 계속 가기 꺼려했던 토쿠가와 가문에 보내지 않고, 쿄우[]의 교외 토바[鳥羽] 가도 옆에 있는 토우후쿠 사[東福寺]에 안장하여, [남명원전광실총욱자(南明院殿光室旭姉)]이라는 시호를 주고, 곧이어 칸토우[東]의 호우죠우 정벌[条征伐]을 위해 출발하였다.

 그 동정(東征)의 도중 순푸를 지날 때, 아사히히메가 생전에 아베 군[安倍郡] 즈이류우 사[竜寺]에 자주 참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박복함에 애처로움을 느껴 명복을 빌기 위해 절 안에 공양탑 한 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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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히메의 기묘함은 이 세상에 한 편의 와카[和歌] 조차 남기지 않은 것에 있다. 와카뿐만 아니다.

 이 시대, 토요토미와 토쿠가와 내외에는 다수의 기록자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기록을 후세에 남겼지만, 그녀의 말이라는 것을 어떤 기록도 전해주질 않는다. 굉장히 말이 없었던 것인지아니면 사람과 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인지

 어쨌든 역사 속에서 영원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駿河御前==================
  1.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의 부인 토쿠히메[督姫]의 모친. [본문으로]
  2.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의 모친. [본문으로]
  3. 보통 '사이고우노츠보네[西郷局]'로 알려져 있다,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모친. [본문으로]
  4. 이에야스 5남 타케다 노부요시[武田 信吉]의 모친. [본문으로]
  5. 이에야스 6남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 忠輝]의 모친 [본문으로]
  6. 후에 어삼가(御三家) 필두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 義直]를 낳지만, 사실 이 당시는 아직 이에야스와 만나기 전. [본문으로]
  7. 이 당시 8살. 13살에 이에야스와 만났다고 하니 아직 측실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8. 1리는 약 4km(3927.2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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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12 2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은 유우키 히데야스군요. 기대가 되네요.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그에 상응하니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귀무자에서도 나오는 유우키 히데야스군요. 많이 기대되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6.12 2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아사히 히메는 참 불쌍하네요. 그리고 이에야스의 자식들이 모두 모친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갑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2 2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그러니까~~~ 기대하지 마시라니까요!! ^^; (헤에~ 그렇군요. 귀무자 씨리즈는 일편 말고는 본 적이 없어서...)

    본다충승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그리고 이에야스의 자식 모친이 전부 다른 것은 아닙니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와 세키가하라 전투의 시작을 알린 철포 사격을 한 4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의 모친은 같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일본판 위키 토쿠가와 이에야스 항목의 하단 부분을 참조해 주시길...
    http://ja.wikipedia.org/wiki/%E5%BE%B3%E5%B7%9D%E5%AE%B6%E5%BA%B7#.E7.B3.BB.E8.AD.9C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14 0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의 이부제들은 전부 고생만 하다 가는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6.14 2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여성의 운명이란...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들 고생하거나 정략의 도구로 이용되네요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도 줄을 잘 서야(일평생의 줄)된다는 걸 새삼느끼고 갑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16 1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아들 빼앗기고 남편 귀양 간 친누나도 뭐... 그리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박선생님//힘이 모든 것을 우선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은 힘의 유무에 관계 없이...남녀에 관계없이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오마사[井伊 直政)]

1602 2 1 전상사(戰傷死[각주:1]) 42

1560 ~ 1602.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쫓겨나 방랑의 몸이 되나 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며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각주:2]]를 이끌고 용명을 떨쳤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도주하는 시마즈[島津] 군세를 추격하지만 이 때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이이의 적비대


 에도 시대[江戸時代],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将軍]후다이[譜代] 다이묘우[大名] 필두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이이 가문[井伊]의 '오우미[近江] 히코네[彦根] 30만석'이었는데, 이이 문이 당시엔 신참의 가문이었다는 것은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지위는 전적으로 초대 나오마사[直政]가 발군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이 가문은 토오토우미[遠江] 이이노야[井伊谷]의 호족으로 대대로 이마가와 씨[今川)]를 섬겼다. 그러나 1562년에 부친 나오치카(直親)가 이마가와 씨에게 살해 당하자, 2살인 나오마사는 이이노야에서 도망쳐 각지를 전전한다.


 1575년.

 15살에 이에야스[家康]을 섬기며 이이노야의 옛 영지를 되찾게 된다. 이후 나오마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타모토(旗本[각주:3])의 측근으로 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혼노우 사[本能]의 변 직후 이에야스 최대 위기인 이가도피행[伊賀越え[각주:4]] 때도 함께 했으며, 그 후 코우슈우[甲州] 공략에도 참가[각주:5], 그 공적으로 타케다 가문[武田]에서도 용맹함을 자랑하던 츠치야 중[土屋], 야마가타 중[山県], 오바타 당[小幡] 등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타케다 가의 적비대[赤備]를 모방하여, 갑옷부터 깃발[], 등에 꽂는 작은 깃발[指物], 갑옷 위에 입는 덧옷[陣羽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했다. 나오마사는 이 적비대를 이끌고 선봉을 다투었고,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인하여, '붉은 귀신[赤鬼]'라는 이명으로 두려움을 얻게되었다. 이후 이에야스가 가는 곳엔 항상 선봉을 맡아 돌진하는 나오마사와 적비대가 있었다.


 그 결과 이에야스를 섬긴 지 10년 만에 미카와 후다이[譜代]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의 삼걸(三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로 이봉 되었을 때에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 후에 타카사키(高崎)로 옮김) 12만석을 받았다.

 12살 연상인 타다카츠, 야스마사를 뛰어넘어 불과 15년 만에 토쿠가와 가신단 중 최고의 영지를 영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야스가 가문이나 문벌에 구애 받지 않고 능력만을 평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이이 가문의 후다이[譜代] 필두라는 지위는 에도 시대를 통해서도 변함이 없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무단 돌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나오마사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동군(東軍) 선봉의 군감(軍監[각주:6])으로 참가했다. 이 때 40세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토요토미[豊臣]계 유력 무장을 중심으로 한 동군에서, 히데타다[秀忠]가 거느린 토쿠가와 본대(本隊)가 도착하지 않은 당시, 토쿠가와 가문의 주력은 사실상 나오마사와 그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넷째 아들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휘하 약 6천의 병력이었다.


 향후의 천하를 판가름하는 결전이라 생각한 나오마사는 토요토미계 다이묘우[大名]에게 선봉의 공을 빼앗꼈다간,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더라도 후환이 남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야스와 타다카츠에게 설명하고 일부러 무단 돌진을 감행하기로 한다.


 15일 이른 아침. 휘하의 적비대[赤備え]에서 추리고 추린 30()를 이끌고, 이번 전투가 데뷔전인 타다요시와 함께 한 나오마사는 선봉인 후쿠시마의 선두 부대장인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의 제지를 물리치고[각주:7] 빠져나가 맨 앞까지 진출하여 서군(西軍)에게 철포를 쏘았다. 이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나오마사와 타다요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특히 전대미문의 적중돌파(敵中突破)를 시도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추격하여, 그의 조카인 토요히사(豊久)를 죽이기 까지 했다. 이 때 시마즈 대()의 결사적인 반격에 타다요시가 부상을 당했고, 나오마사도 투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 거기에 오른 팔과 타고 있던 말에 총격을 받아 낙마하여 한때는 실신했다고 한다. 본진으로 돌아온 둘을 맞이한 이에야스는 직접 나오마사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오늘 싸움에 있어서 제일 큰 공을 세웠다며 극찬하였다.


 전후 처리로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본거지였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공략, 서군의 총대장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항복의 알선, 토사[土佐]의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에 대한 대응 등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교, 통치 등의 면에서도 큰 공적을 올렸다.


너무도 이른 죽음


 세키가하라 전쟁 후의 논공행상으로, 1601 2 이에야스는 나오마사에게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이었던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 새로이 6만석을 더해 합계 18만석을 하사했다. 그리고 서국 다이묘우[大名] 감시와 쿄우토[京都]의 조정 수호라는 특별임무를 부여했다. 10월에 나오마사는 타카사키[高崎]에서 새로 보수한 사와야마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오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치를 존중하여 민정의 안정을 꾀하는 한 편, 신영주 이이 의 거성 만들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의 겨울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얻은 오른 손 엄지의 총상이 차츰 악화되어 다음 해인 1602년 2월 1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화장(火葬)을 한 후 유골은 히코네[彦根]의 세이료우 사[淸凉]에 묻혔다.


 비노니. 아들의 아들의 아들까지 마지막까지 지켜다오 대지의 신들이여
 
るぞよ 子のすへの 末までも まもれあふみの 国津神
 라는 시를 남겼는데,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맹장도 13살의 어린 장남 나오카츠[直勝][각주:8] 등의 장래와 이이 가문의 존속을 대지의 신들에게 빌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토쿠가와 바쿠후[幕府]를 세우는 도중에 쓰러진 나오마사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나오마사 부인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이에야스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가신단(家臣團)도 또한 확실히 그의 뜻에 응하였다.

  1.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로 인한 죽음 [본문으로]
  2. 무구 일체를 전부 붉은 색으로 통일한 부대. [본문으로]
  3. 직속 부하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5.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1582년 당시 카이[甲斐] 등 옛 타케다 가문의 영지를 막 손에 넣었던 터라, 오다 가문[織田家]의 영주들은 거의 적의 땅이나 다름 없던 옛 타케다의 영지에서 도망쳐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간 터라 빈집이나 다름 없었다. [본문으로]
  6. 부대가 싸우는 모습이나 배반하는 지를 감시하는 역할. [본문으로]
  7. 이 때 나오마사는 처음 전장에 나서는 타다요시에게 전장의 분위기를 익히게 하기 위해서 구경하고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마사의 장남이나 병약했기에 후에 가독과 히코네 번을 배 다른 동생 나오타카[直孝]에게 양보하고 안나카 번[安中藩] 3만석에 봉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약했다지만 나오카츠는 72살까지 산 반면 나오타카는 69살에 죽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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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yangkki87 BlogIcon 한베에 2008.04.06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송평충길은 어찌 됐는지 궁금하네요 -ㅁ-;;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6 2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키가하라 때의 활약으로 오와리(尾張) 52만석에 봉해지지만, 역시 세키가하라 때 얻은 부상으로 인해서 7년 뒤인 1607년에 28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아마 살아 있었다면, 2대 쇼우군 히데타다와 모친이 같았던 만큼 꽤 권세를 얻었을 것 같습니다만 후손이 없었다고 하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6 0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生死の事大、無常は迅速なり。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6 2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군요.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9 2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대충.. 생사의 소중함은 무상함과같이 빠르게 지나간다.. 정도로..^^;;;;;;;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9 2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과연... 좋은 지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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