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가 만약 이에야스[家康]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면, 어엿한 센고쿠[戦国]의 영웅으로 한자리를 차지하며 찬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그 핏줄로 인하여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일생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히데야스의 자질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이라는 큰 영지에 봉해졌을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방문해서는,
 “만약 천하에 이변이 일어났을 시에 소인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의 눈으로 보건 동생인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보다 히데야스의 기량이 뛰어나 보였던 듯 하다. 아비 이에야스조차 히데야스를 두려워 했던 듯한 흔적이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결전에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봉쇄하는 임무를 주며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한 것은, 행여 히데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전공이라도 세워 쇼우군 히데타다를 능가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1]. 히데야스라면 이런 혼란을 틈타 천하를 취할법한 실력을 가졌다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생모는 이름을 오만[お万]이라고 하며 미카와[三河] 치리후[池鯉鮒[각주:2]]에 있던 신사에 근무하던 신관[각주:3]의 딸이었다고 한다[각주:4]. 이에야스의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였던 것을 이에야스가 미카와 오카자키 성[岡崎城]의 목욕탕에서 손을 대어 히데야스를 낳게 했다고 한다. 오만이 임신한 것을 알아챈 츠키야마도노는 질투를 증오로 바꾸어 오만의 옷을 모두 벗겨 나무에 매달아 채찍질했다고 한다.[각주:5] [각주:6] [각주:7]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히데야스는 그 용모가
동자개[ギギ – 매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와 닮았다 하여 ‘오기마루[於義丸]’ 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혼다 사쿠사에몬 시게츠구[本多 作左衛門 重次]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꾀를 내어 대면시켜 결국엔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기마루에 대한 이에야스의 애정은 박했다. 그리고 히데야스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お愛の方]에게서 히데타다[秀忠], 타다요시[忠吉]가 태어나자 한층 더 히데야스의 존재감은 엷어져 갔다.

 11살 때, 오기마루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에야스가 바친 인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호탕한 기질을 사랑했다. 이름을 자신의 ‘히데[秀]’와 이에야스의 ‘야스[康]’를 따 ‘히데야스[秀康]’로 지은 것도, 거기에 칸토우[関東]의 명족(名族) 유우키 씨[結城氏[각주:8]]를 계승하게 한 것도 히데요시의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때, 히데야스가 후방에 있어 공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 것을 보고,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가 히데요시에게,
 “역시 토쿠가와 님의 기풍을 물려받으신 듯”
 하고 말하자 히데요시가,
 “그렇지 않네. 히데야스는 이제 내 아들이니 무(武)에 관해서는 이 히데요시를 닮은 것일세”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히데요시가 히데야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었는지를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히데야스가 16살 때의 일이라 하는데, 히데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승마장 관리인이 경주라도 하려는 듯이 히데야스의 옆으로 달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것이다. 히데야스는 그 무례에 분노하며 단칼에 베어 죽여버렸다. 관리인의 죽음에 승마장에 있던 관리인의 동료들이 살기를 띠며 히데요시에게 히데야스를 벌 주라고 간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오히려,
 “내 아들에게 무례를 범한 승마장 관리인이야말로 죽어 당연하다”
 고 말하며 히데야스의 호방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응어리져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 관료들의 알력이 표면화 되었다. 결국 카토우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꾀함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하였고 그 후 목숨을 건지는 대신 사와야마[佐和山]에 은거 당하게 된다. 사와야마로 향하는 미츠나리의 안전을 위해서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에게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와 함께 호위를 맡도록 지시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때 병사[足軽]들에게는 철포의 화승에 불을 붙인 채 경계하면서 행군하도록 하였으며[각주:9], 무사들에게도 갑주를 두르게 하여 완전 무장한 채로 행군하는[각주:10] 등 히데야스는 철저한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데야스는 에치젠[越前] 후쿠이[福井[각주:11]]로 이봉(移封)되어 마츠다이라 성[松平姓]를 칭하였는데[각주:12], 1605년 히데타다가 쇼우군[将軍]이 되자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님이었기에 히데야스의 에치젠 가문은 “제도 밖의 에치젠 가문[制外の越前家]’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남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데야스가 에도[江戸]에 올 일이 있을 때에는 쇼우군 히데타다가 일부러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왔고,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향하는 길에서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아랫자리에 위치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히데야스의 행렬이 에도로 가기 위해서
우스이 고개[碓氷峠]]의 관문소[関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때 에치젠 가문은 철포 10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도 에도로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천하의 법도였다. 당연히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철포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보고 히데야스가 말했다.
 “그것은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3]]에게나 적용되는 법도일 것이다. 내가 에치젠 츄우나곤 히데야스[越前 中納言 秀康]임을 알고 막는 것인가?”
 히데야스가 이렇게 말하자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츄우나곤이건 다이나곤[大納言]이건 법도는 법도올시다. 통과시킬 수는 없소 하며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시팔시팔댔다. 히데야스는 격노했다.
 “관문소의 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욕설들과 츄우나곤 다이나곤하며 운운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 뒤, 부하들을 향해서,
 “저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버려!”
 하고 명령한 것이다.
  에치젠 가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창을 꼬나 쥐고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하급 관리들은 놀라 모두 도망쳤다.
 이것이 에도에 전해지자 히데타다는,
 “관리들이 도망친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도다. 아무리 관리들이 죽더라도 함부로 츄우나곤(히데야스)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
 이라 말하며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히데야스의 마음 속에 배다른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 후시미[伏見]에서 오쿠니[阿国]를 불러 그 춤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오쿠니의 춤을 보면서 히데야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천하에는 수천 만의 여성이 있겠지만 이 오쿠니를 천하 제일의 여인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남자가 될 수 없으니 여자인 오쿠니에게조차 이르질 못하는구나. 이 어찌 분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히데야스는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된지 2년 후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1574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아들. 1584년 코마키-나카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의 강화 교섭 후 인질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고, 1590년 시모우사[下総]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의 양자가 되어 10만 1천석을 상속.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마츠다이라 성[松平姓]으로 복귀하여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에 봉해졌다. 1607년 죽었다.

  1. 우에스기 정벌을 앞두고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되는 오야마 평정[小山の評定] 후 약 1개월 간은 히데타다가 우츠노미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히데타다는 후방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를 정벌하러 떠나고 대신해서 그제서야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 히데야스이다. 그 사이 미노[美濃]의 기후 성[岐阜城]이 너무도 단기간에 함락되어 상황이 변화되자 히데타다는 급히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된다....한줄 요약하면 히데야스가 공 세울 것을 두려워 하여 처음부터 우츠노미야에 남긴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현 치류우 시[知立市]. 당시 연못[池]에 잉어[鯉]와 붕어[鮒]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신사(神社)의 말단 사무를 보는 직책인 샤닌[社人]이었다 한다. [본문으로]
  4. 나가미 시마노카미 요시히데[永見 志摩守 吉英]의 딸. 혹은 셋츠[摂津]의 의사인 무라타 이치쿠[村田 意竹]의 딸(또한 나가미 시마노카미가 나중에 셋츠로 가서 무라타 이치쿠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5. 그렇게 매달린 오만을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가 구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낳게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또는 오만이 매질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갔으며, 한에몬은 시게츠구에게 이런 일을 보고하여 시게츠구가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에치젠 가문의 가전[越前家伝]에 따르면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에야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큰엄마(伯母)에게 와서 도망치겠다고 하자 한에몬의 큰엄마는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오만은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한에몬의 큰엄마는 과거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 시중 들던 여성이라 한다. 한에몬의 큰엄마 다음 날 입성하여 이에야스를 만나 오만에 대해 보고하였지만 이에야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냥 한에몬 큰엄마 집에서 머물다 30일 뒤 쌍둥이를 낳았다 한다. 한 명은 곧바로 죽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히데야스라고 한다....(여담으로 쌍둥이 중 하나가 죽지 않고 나가미 사다치카[永見 貞愛]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당시는 동물이나 한꺼번에 여럿 낳지 사람은 한 명씩만 낳기에 쌍둥이는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의 할머니부터 9대 쇼우군 이에시게[家重]의 생모에 이르기까지 에도 막부의 역대 쇼우군의 생모, 정실, 애첩, 측실 및 유모를 기록함과 동시에 그녀들의 출신 가문들을 기록한 [옥여기(玉輿記)]에 따르면, 유우키 가문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초대 쇼우군[将軍]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셋째 아들인 유우키 토모미츠[結城 朝光]를 시조로 하며 - 공인된 요리토모의 아들은 2대 쇼우군 요리이에[頼家], 3대 쇼우군 사네토모[実朝]로 두 명뿐. - 히데야스의 양아버지가 되는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는 토모미츠의 19대손이라 한다. 참고로 유우키 토모미츠는 그 어미가 요리토모의 씨를 품은 상태로 요리토모가 오가와 토모미츠[小山 朝光]에게 하사하였고 그 후 태어난 것이 유우키 토모미츠라 한다....근데 이걸 믿으면 질 확률이 높다. [본문으로]
  9. 오발의 위험과 화승을 아끼기 위해서 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0. 갑옷과 투구 무게도 무시할 수 없는 터라 행군 시에는 상체 갑옷과 투구를 따로 챙겨서 이동하였다. [본문으로]
  11. 이때까지는 아직 키타노쇼우[北ノ庄]. 후쿠이[福居]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 3대이며 히데야스의 차남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 忠昌] 때. 키타노쇼우[北ノ庄]의 키타[北]가 패배(敗北)와 글자가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에 후쿠이[福井]로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바뀌게 된다. [본문으로]
  12. 위키에 따르면 확실히 마츠다이라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세키가하라 이후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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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2.06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인은 매독이 가장 유력하지요?

    본디 성정이 색을 밝혔는지 혹은 삶에 대한 불만이 그 쪽으로 향했는지 (개인적으로는 후자) 모르겠으나 뛰어난 재능이 센고쿠 시대에 발휘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아, 물론 발휘되면 히데야스의 손에 수많은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질테니 오히려 인류애적 차원에서는 잘된 일인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런데 마쓰다이라 가문은 장남에게 있게 했지만 유키 가문은 4남에게 상속시켰던게 맞는가요? 벌써부터 까먹으면 안되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6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죠....
      히데야스의 얼굴에는 츠키야마의 증오가 서려 있어서 이에야스는 그것을 볼 때마다 꺼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스님(텐카이[天海]라고 하지만 텐카이가 이에야스와 만나는 것은 빨라야 1590년인지라...)에게 그것을 없애는 기도를 부탁하자, 효험이 있었는지 그 증오가 떨어지긴 했지만 대신 얼굴에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정나미가 떨어진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양자(...라 쓰고 '인질'이라 읽는다고 합니다)로 보냈다고 합니다.(1584년)

      상기의 이야기에서는 이에야스가 매독균을 보유하고 있었는 듯 하고 히데야스는 모친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 매독균에 감염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쵸. 난세의 재능이라야 결국 사람 죽이는 것으로 이어지는지라.... 그래도 자질(뭐! 패왕의 자질을 가졌다고!? - by 삼국전투기 4권 장수가 조조를 평하며)과 성망을 갖추었으면서도 결국 반란 일으키지 않은 것만은 평가해야 할 듯.

      다섯째 아들 나오모토[直基]라고 하는데 바로 위에 넷째가 일찍 죽었으니 넷째라 해도 무방할지도...

      전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닌지라 그럴 땐 위키를 자주 이용합죠. ^^

  2. 나라 2009.12.07 1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우키 히데야스가 실제로 기량을 보인 적이 있나요? 기량을 펼친 적이 없다면 있는지 없는지 아는 건 불가능할텐데..
    물론 히데타다에 비한다면야...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8 0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에피소드 3개만 들으면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뭐 머리 짱 좋은 니체니 할 수 있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도 대여섯개 이상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인물의 그릇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3. Asura 2010.01.10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의 씨라고 믿겨지지 않는다'면서 좋아했던 유키 히데야스군요.
    '그' 미츠나리가 좋아했다면.. 분명 재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얼굴이 동자개 닮았든, 고름이 뚝뚝 떨어졌든, 상대가 미츠나리라면 납득이 가네요..(업병(한센병유력)을 앓은 오타니 요시츠구와 친하게지냈던 인물).

    이사람에 대해서는 유곽에 들락날락하다가 스스로 코를 잘랐다는 애기도 있던데.

    저는,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받은 마사무네를 '이시다 마사무네'라 명명하고 평생 아꼈다는 에피소드가 제일 좋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0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쩌면 말씀하신 대로일지도 모릅니다.
      (후세에 전해진 미츠나리에 대한 잘못된 인상이 워낙 많아, 있던 사실도 없애다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코를요? 으~ 끔찍하군요.(전 처음 들어봅니다만... ^^; )

  4. shiroyume 2012.02.13 15: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재밌네요. ^^

  적자 노부야스[信康]의 죽음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가 말년이 되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론할 정도로 슬픈 사건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입으로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카와(三河) 지방의 사람들도,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지"

 라 하며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노부야스를 자해(自害)로 몰아넣은 것은 역사상 유명한 '츠키야마도노 사건[築山殿事件]'에 의해서였다. 진상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1579 7 16. 이 날 이에야스는 가신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를 오우미[近江] 아즈치(安土)성(城)으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좋은 말을 헌상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노부야스의 자해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노부야스가 생모 츠키야마도노와 함께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측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노부야스의 부인이며 노부나가의 딸인 토쿠히메[徳姫]가 은밀히 그에 대한 것을 부친 노부나가에게 일러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시대에 결혼한 부인으로, 그녀는 출신이 이마가와의 일족 세키구치 교우부노쇼우 치카나가[口 刑部少輔 親永]의 딸이었기에 콧대가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어떤 사서에서는 츠키야마도노를 히스테리성의 여성이었다고 하며, 이에야스는 그 엄청난 질투심에 넌더리가 나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로 거성(居城)을 옮겼을 때, 데려가지 않고 노부야스의 오카자키 성[岡崎城]에 남겨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이[甲斐]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내통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쩌다가 츠키야마도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카이[甲斐]에서 온 중국인 의사에게 진찰받던 중 그와 관계를 맺었고, 나중에는 이 의사를 매개로 해서는 타케다 카츠요리와 내통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노부나가-이에야스를 물리칠 방도를 카츠요리와 함께 꾀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신빙성은 거의 없다.

 

 진상은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두려워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노부나가는 노부야스라는 존재가 장래 오다 가문에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느낀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와 자신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를 비교해 보면,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노부야사가 월등했다. 오다 가문은 이 노부야스에게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의 싹은 일찌감치 뽑아 두는 것이 좋다 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는 17살 때 이미 그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1575년 토쿠가와 군이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타케다 카츠요리의 군과 싸웠을 때의 일이다.

 카츠요리의 대군을 피하여 퇴각을 하려고 하였을 때, 노부야스는 나서서 신가리[殿]를 맡았다. 아군 퇴각의 무사안전을 위해 최후미에 위치하며 적의 추격을 막는 임무로, 역전의 무장이라도 극히 어렵다는 큰 임무이다.

 더구나 이때 타케다 군은 10만의 대군이었다[각주:1]. 하지만 노부야스의 말은 기특했다.

 장래에 있을 큰일을 위해서 지금은 연습을 해 두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어린 나이로 타케다의 대군과 대치하며, 적이 오오이가와 강[大井川]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후에 세키가하라[ヶ原] 결전 시, 이에야스는 정말 나이 먹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니. 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피곤할 것도 없었을 텐데하고 용감한 노부야스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부야스는 또한 육친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바로 다음 동생인 오기마루[於義丸-후에 히데야스[秀康]]가 정식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노부야스의 힘이 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오기마루에 대한 애정이 없어 좀처럼 자신의 아들로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노부야스는 직접 오카자키 성[岡崎城]으로 3살 먹은 오기마루를 데려가 여러 노력을 기울여 이에야스와 만나게 하였다. 이에야스도 노부야스의 열의에 져, 오기마루를 자신의 아이라고 승인했던 것이다.

 

 그러한 반면 노부야스에게는 포학한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춤을 좋아하여 자주 그런 무리들을 초대하였는데, 어느 날 옷이 맘에 들지 않고 더구나 춤 실력도 떨어지는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노부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아이를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고 한다.

 매사냥의 결과가 신통찮은 것을 만난 승려 탓으로 하여, 그 승려의 목에 끈을 묶어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각주:2]


 1579 8 29.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우선 츠키야마도노를 토오토우미[遠江] 토미츠카[塚]에서 살해했다.

 이에야스로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곧바로 토쿠가와 가문의 멸망을 의미했다. 자신의 힘은 아직 노부나가에 비해 미약했기에 자기 가문 보전을 위해서는 부인과 적자의 목숨도 뺏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해의 9 15.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하는 이에야스의 사자가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 성[二俣城]에 도착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天方 山城)와 핫토리 한조우(服部 半) 두 사람이었다.

 노부야스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확실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키려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부친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시 가부장 권력의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노부야스는 조용히 핫토리 한조우에게 자신의 카이샤쿠[介錯][각주:3]를 명했다.

 한조우는 흘러 넘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어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로 대신하였다.

 카이샤쿠의 칼이 번뜩이며, 여기에 21살의 생명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 信康)]

1559이에야스[家康]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 모친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지만,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 독립함에 따라,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인질이 된다. 1567년 오카자키[岡崎]로 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결혼하고 오카자키 성주가 되지만, 노부나가에게 자해를 명령 받는다.

이 글은 거의 전체가 사실과 다른 글입니다. 필히 밑에 트랙백과 함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타케다 가문의 동원력은 무리를 해도 3만정도로 10만 가까이 동원하기에는 무리다. [본문으로]
  2. 승려는 불살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에, 승려 주변에 있는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사냥 결과가 신통치 않다며 툴툴대는 노부야스를 부하가 달래려고 말했다가 지나가던 승려가 그 짜증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배를 가르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어야 했기에, 믿을 만한 사람에 더해 단번에 목을 자를 수 있는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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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5 2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조에 대해서는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만.
    다른 말들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시점의 문제이지.
    "...그 잣대는 우리 나라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까?" 라며 비꼼을 당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틀린 말을 쓴 것입니까? 무라시게의 경우는. 이미 노부나가가 엔라쿠지를 불태우고 쇼군을 내?는 폭정을 한 이후가 아닙니까?. 노부나가의 여러가지 폭압적인 태도에 두려움을 느꼈고 사소한 사건으로 배반했다..는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고. 그럴 경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지 관리를 엉망으로한 노부나가의 문제가 아닙니까?

    미츠히데의 반란역시. 쇼군이나 사찰등은 제쳐놓고서라도. 사쿠마, 하야시 같은 후다이 가신들을 별 것 아닌 이유로 내?고, 나이 50이 넘은 미츠히데의 영지를 빼앗아 전봉시키고... 주변에서 보기에도 얼마나 틈이 벌어졌기에 '높으신 분'으로부터의 편지가 왔겠습니까?. 이건 잔인한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행동거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잣대란 비교할 대상이 있기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한국사와 중국사를 비교하여 제 기준의 잣대를 만들었기에. 그 잣대를 일본인에게 비교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비꼼을 당하는군요....
    한정된 공간이기에 많은 예를 들기 뭐합니다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5 2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력과 병권을 잡고도 그저 신하를 자처한 주공단의 예. 춘추,전국 시대에는 상대 임금은 핍팍하는 것이 아니다. 라며 풀어준 예들이 있고. 전한 말의 악인으로 꼽히는 왕망도 선양을 받아서 황제가 되었지. 누구처럼 ?아내어 황제가 된것이 아니며. 후한의 화제는 생모에게도, 의모이자 생모의 원수인 두태후에게도 효행을 하여 미덕으로 남았습니다.
    '유교'가 없었거나. 국가의 기본 방침이 '황로술 =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 후한 대 까지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은 더더욱 예를 찾기가 힘듭니다. 유교가 보급된 이후에는 수양제, 형제를 죽인 이세민 정도를 제외하면 더더욱 찾기 힘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닌의 난 이후 전국시대 기껏해야 백년 정도에. 부하가 주군을 배반하고 죽이는 사건은 그야말로 비일비재 하였으며.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일이나, 아들이 아비를 죽이거나 추방하는 일 역시 드물지 않지 않았습니까? 일족을 죽이는 일은 뭐 수두룩 하고요. 모가미 요시아키, 가이 소운, 다케다 하루노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토 요시타츠 등. 거기에 인질을 희생하는 행동을 한 다이묘들까지 추가 한다면 더욱 범위는 늘어나겠죠.

    전국 역사를 잘 아시는 것은 훌륭하십니다만. 최소한 임진왜란 7년만 공부하셨어도 아실텐데요?.. 화약 한통을 얻기 위해 여성 50명이 노예로 팔려가고, 공을 세우기 위해 민초들의 목과 귀가 잘리고, 사찰과 서고가 불에 타고. 책과 보물과 도공들을 약탈해가는...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설과 생각을 취사 선택하고, 그렇게 해서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전국시대에 대한 정보량이 많으시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실망스럽군요. 이후 블로그 잘 운영하시기 바랍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6 0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략쿠지는 당시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고 엔락쿠지에는 아사이와 아사쿠라 군사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노부나가로서는 당시 정권의 중심지였던 교토를 막을 수 있는 방어망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엔락쿠지는 점거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엔락쿠지 침공하기 전에는 미리 내 편을 들면 포상을 내리겠고 적어도 아사이 아사쿠라 잔당들을 숨겨주지 말 것을 청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무라시게가 쫓겨난 것이랑 쇼군이 쫓겨난 것이랑 제가 알기로는 시간 간격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라시게가 1578년에 배반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1575년에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쇼군이 당시 오다가의 적대 다이묘들에게 궐기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아나요?
    덧붙여서 말하자면 엔하운스 님의 방식대로 줏대를 적용하면 한국사의 경우에는 태종의 경우는 자기를 계속 지지했던 왕후쪽 친척을 몰살시켜버렸고, 이성계나,견훤은 자기 자식에게 쫓겨났으며 중국의 경우에도 한 고조 유방도 항우를 물리치는 데 일익을 하였던 한신이나 팽월을 팽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주원장의 공신 척살은 대대로 유명하죠. 그 잣대는 이 쪽에서는 댓수 없는지요?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이 아비나 자식도 몰라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고 이건 세계 역사상 대대로 벌어졌던 일에 지나지 않는데, 딱히 일본이라서 인성이 낮다고 무시하는 것을 진짜 가소롭기 그지없네요. 그리고 전국시대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경우도 나름 합리적인 이유나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이토 요시타츠는 생모에게 토키씨라는 것을 알자. 도산을 죽일려고 했습니다. 가이 소운의 경우는 주가를 위해서 자식을 죽였다는 것을 볼 때는 중국에서 보는 효와 충의 관점에서 오히려 충에 가깝지 않나요? 오히려 엔하운스님이야말로 취사선택하는 설이네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7 1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이상의 답글은 없고.. 지난 시간은 이틀.
    대충 정황을 보니. 세컨 정도로 짐작가는군요. 욕을 하곤 싶지만, 욕을 먹긴 싫다. 이건가요?
    아니시라해도 상관없으니 말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일단, 반박은 쉽지요. 암만 무식한 자라고 해도. 열마디 말 중 한 마디의 꼬투리를 잡아서 물고 늘어지면 그뿐이니까요.
    중국 역사 5천년과 한국 역사 5천년을 통털어서 일본역사 백년과 비교하고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시군요.

    뿐만아니라. "세컨아뒤에 아나요?, 가소롭기 그지없다." 면서 말을 택함에 언뜻 노기까지 보이시는군요.
    인터넷에서의 시점에 따른 단순한 의견 차이가 발해님에게는 그렇게까지 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만..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7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칼 구스타프 융의 저서 '인격과 전이'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충족되지 못한 명예욕. 자존감을 가진 사람일수록 무의미한 것. 에 몰두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남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채운다고 합니다.

    정말로 아무 의미도 없는 블로그에 이렇게 열중하시고, 남을 가소롭게 여기며 분노하시는 것을 보니
    자신의 망상에 비하여, 세상에게서 받는 대우 자체가 그다지 좋지않으신 분처럼도 보이는군요.

    도경에 이르기를 대인은 스스로 도를 깨우치고, 중인은 들으면 깨우치며. 소인은 가르쳐주어도 깨우치지 못한다. 라고 합니다.
    대인이나 중인으로 보이지는 않으니.. 아마 제 덧글을 보시고 분노하여, 제 글을 지우거나 반박하는 답글을 다실 게 뻔합니다만...

    좌전에 현명한 새는 나무를 가리는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다지 현명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언뜻 고목으로 보였으나 썩어서 속이 텅빈 나무에 앉아서는 안될법이지요. 제가 이 시간부로 확실히 이 블로그에 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답글을 다시더라도 제가 볼 일은 없을 겁니다.
    편지로 보내시거나, 쪽지로 보내시면 스팸메일과 같이 잘 처분하겠습니다.
    역시 무의미한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시면 그쪽의 울분이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7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마디 덧붙이자면. 잘난체 하는 것 같아 문자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만.. 가소롭다기에 얄량한 문자를 조금 덧붙여 보았습니다.
    뭐, 인터넷 검색이면 10초만에 주해본까지 찾을 수 있을 좌전, 도덕경, 융. 공부는 했지만 별로 대단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환절기인데 쓸데없이 스트레스받고 감기걸리지 마시고 몸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블로그따위와 넷질보다야 몸이 재산아니겠습니까? 그럼 안녕히 계시지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27 2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지 자랑에 편협한 시각, 저 혼자 발끈해서는 무식하게 지껄여대는 꼴이라니
    남의 블로그에 와서는 뭔 짓이지? 자기야말로 자존감을 채우는 거? 이거 완전 자위행위
    안 온다면서 답글 확인하러 또 오겠지^^;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8.28 0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하지만, 전 세컨이 아닌데 어떡하시나? -.-;; 단지 발해지랑님 블로그를 애독하는 독자일 뿐인데. 성급하게 세컨아뒤라고 하는 그 성급함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반박을 하면 제대로 해보세요. 괜히 어려워 보이지만 실은 공허하기 그지 없는 문자 쓰지 마시고 그리고 임진왜란도 귀찮아서 반박안했는데, 내전도 아니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입장에서 조선에서 뜯어낼 것 뜯어내는 것이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거 아닌가요? 뭐, 중국이나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는 안 그럴것 같습니까? -.-;;
    오히려 엔하운스님이야 말로 아무 의미도 없이 남을 헐뜯고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상한 문자를 써서 남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자신감을 채우는군요.
    자아비판 하시는거 보니 안스럽군요. Ellis의 REBT 상담이나 받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8.28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E 세컨이래 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 아주 그냥 자폭하는 구나 ㄲㄲㄲㄲㄲㄲㄲㄲ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하우스님//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이중잣대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이렇게까지 장문의 글로 변명을 하시는 분이라면 적어도 저와는 대화가 통할 분이 아닌 것 같군요. 나름 답변 리플은 빼먹지 않으려 합니다만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허공님//저와 동일인물로 되시다니....지못미 허공님...

    박선생님//저도 어렸을 때, 누군가와 언쟁이 붙으면 무시 받지 않으려고 여러 지식을 늘어놓았었죠. ^^;

    본다충승님//저도 잠시 웃을 수 있었습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9.01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괜히 고상한척 하네 ㅋㅋ
    꼭 저런사람들이 별거 없더군요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2 1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더쉽님//그래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신 편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허당님//달아주신 리플을 멋대로 삭제하여 미안합니다만, 그런 말씀은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 왜 남의 댓글 삭제 하고 ㅈㄹ인가요?? 헐. 편들어줘도 ㅈㄹ이네. 하여튼 일빠 새끼들.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빠 들이 영어 써가면서 ㅈㄹ은 ㅋㅋ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4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욕썰 싸지르구선 가만 냅두는 사람은 없단다. 혐한찌질이 레벨 녀석이 편들어 주어도 하나도 안 고맙단다. 하여튼 혐한찌질이 레벨주제에...

  1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4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좆병신 ㅈㄹ하네 일빠새끼가 왠 발해??? 발해도 독도처럼 뺏고 싶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 미친듯

  1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4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극일을 하려면 먼저 지일을 해야 한단다(뭐 이건 일본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건 통용되는 것이지).
    예전에 니 조상중에도 다른 나라 것은 무조건 배척하는 사람이 있었겠지. 그 결과는 알지? 멀리 보면 너는 그렇게 우리나라를 약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지... 역시 너는 혐한찌질이같은 놈이다.

  19.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8 1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님 왠만하면 로그인안한사람은 덧글 못달게 설정을 바꿔놓으시는게..-_-;

  2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9 2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그렇게 해 놓았는데, 근시일 내에 다시 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

  21. 늙은친구 2010.05.17 2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머 워낙 여기서 눈팅 많이 하다가 가는 편이라 여기저기 보곤 햇었는데 몇년이나 지나서 댓글 쓰는 것도 우스워서 몇번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솔직히 까놓고 애기하자면 엔하우스님의 의견에 주관적으로 비꼬아서 블로그 주인장?이신 분이 일을 시작은 한게 맞네요..

    물론 그 이후에 반박이 반박이 아니라 조롱조가 되서 보는 사람들이 욱하는 기분도 알겠고 내용 자체가 적절한 예를 들기보다 현학적으로 빠져서 웃기다는 부분도 있겠지만 남의 의견에 토론조로 부드럽게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자기 의견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 비꼬기 시작한 것은 까칠하신 성격 같으신 엔하우스님만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드네요...

    결론적으로 얘기드리면 부드럽게 상식적인 선에서 얘기햇으면 이렇게까지 안 됬을듯 하네요.그리고 엔하우스님의 반박문은 참 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답답하군요.

    마지막으로 댓글을 안 지워서 몇년후에 이렇게 이상한 인연으로 남기게 해준 블로그 주인장님의 아량도 대단합니다 ㅎㅎ.

    하여간 글 같은 거 써서 먹고사는 부류라 자료나 이야기등등 찾아다니는데 꽤 흥미롭게 봤네요...

    머 마지막으로 흥이 나서 쓰긴 햇는데 누가 볼래나 몰겟군요 ㅋㅋㅋㅋ

六.

 그 다음 해 7월. 미츠나리[三成]가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다. 이에야스의 죄상을 열거하고, 그를 물리쳐 히데요리[秀頼]의 정권을 보전한다 – 는 것이 거병의 명목이었다.
 이 때 이에야스는 칸토우[関東]의
오야마[小山]에 있었다. 히데야스[秀康]의 거성인 유우키[結城]에서 가깝다. 불과 2리[각주:1] 정도일 것이다. 이에야스[家康]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물리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를 정벌하려는 이에야스의 공식적 위치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대로(大老)로서이며, 이 출정은 공공을 위한 싸움이었다. 이 때문에 토요토미 가문의 여러 수 많은 다이묘우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에야스로서는 이들을 가지고 오오사카의 반란 다이묘우 무리들을 물리치면 좋았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도 의향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의향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옛 성터가 있는 이 오야마 언덕에 다이묘우들을 모아 거취를 결정케 하였다. 운명의 선택에 주저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에야스 측에 서는 것을 소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곧이어 모두 그 자리의 분위기에 물들여져,
 - 이의 없사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2]]
와 운명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고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이 이에야스가 생각하던 대로 되었다. 이에야스는 만족했다. 이에야스에게 부여된 이 이후의 모든 운명은, 이 7월 25일 오야마 군의(軍議)의 성공이 기초가 되었다 – 고 말해도 좋았다.

 회의는 곧바로 미츠나리 토벌을 위한 작전회의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 토요토미 계의 다이묘우들로 편성되어 곧바로 서쪽을 향해서 출발했다. 이에야스는 일단 에도[江戸]로 돌아간 후, 토쿠가와 군(軍)을 이끌고 토우카이도우[東海道]로 나아가기로 하였고, 적자(嫡子) 츄우나곤[中納言] 히데타다[秀忠]에게는 토쿠가와 제2군을 이끌게 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이용하게 하였다.

 문제는 히데야스였다.
 전투에는 참가시킬 수 없다 – 는 방침을 이에야스는 세웠다. 이에야스가 보건대 히데야스는 필시 전쟁터에서 용맹할 것이다. 만약 큰 공을 세우기라도 한다면 크게 상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렇게 되면 히데야스의 존재가 커져 적자 히데타다와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히데야스와 함께 야전을 하고 성을 공격하며 고락(苦樂)을 함께 맛보게 될 토쿠가와 휘하의 장졸들은 어느덧 히데야스를 따르게 되어, 온화하기만 한 것이 장점인 히데타다를 능가하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음 대는 히데타다 – 라고 정하고 있던 토쿠가와 가문의 통제가 그로 인해 흔들릴 것이며, 히데야스 자신도 자신감을 팽창시켜 동생의 영화를 시기하고 모반할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야스를 잔류군의 장수로 하였다. 우에스기 군(軍)의 견제로써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하고 칸토우[関東]의 동북변에 머물면서, 먼 에도 성(城)의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 뜻을 히데야스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 알렸다. 사자는 일족인 마츠다이라 겐바노카미 이에키요[松平 玄蕃頭 家清]였다.

 히데야스는 사자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듣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의 기세로,

 “말도 안돼!!”

 하고 성을 내며 소리질렀다. 무문(武門)에서 태어나 이렇게 큰 전투를 앞두고 잔류군을 맡으라니 말이 되느냐? 나는 따르지 않겠다. 오늘 밤에라도 진을 거두고, 선봉이 되어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갈 생각이다, 그렇게 아버님에게 전하도록……

 사자인 이에키요는 새파래져서는 오야마의 이에야스에게로 돌아왔다.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한 후,

 “알았다. 히데야스를 곧바로 여기로 오라고 전하도록”

 라고 말했다. 저런 기세가 센 젊은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이 있다. 이에키요는 그것을 몰랐다. 히데야스가 오야마의 언덕으로 올라왔다. 이에야스는 일부러 일어서서 히데야스를 진영의 현관에서 직접 맞이하여 별실로 안내했다. 마치 높으신 분을 접대라도 하는듯한 정중함이었다. 자리에서 이번 전투의 전략을 설명하며,

 “지금 동쪽의 적인 우에스기 씨(氏)를 남겨 놓은 채 서쪽의 적을 치려고 한다. 토쿠가와 가문이 죽느냐 사느냐다. 만약 서쪽의 미츠나리와 교전 중에 배후의 우에스기가 들고 일어나서 아이즈[会津] 분지에서 뛰쳐나와 칸토우 평야에 난입하여 그 기세를 타 에도를 등뒤에서 공격해 오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가문은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
 심각한 전략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이에야스는 그 문제를 해결해 놓고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에 대해서는 다테 씨[伊達氏]와 모가미 씨[最上氏] 등의 걸림돌을 배치시켜 놓았으며, 또한 우에스기 씨(氏)는 칸토우[関東]를 절대 습격하지 못한다.

 이에야스는 그리 내다보고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 100만석의 병력으로는 아이즈 분지에서의 방위선이 한계이며, 밖으로 싸우러 나갈 정도의 능력은 없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미치지 않는 한, 그들 우에스기 병사가 칸토우 평야로 출격해 오는 일은 우선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우키 히데야스에게는 그렇게 속 편히 말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 사태는 비통한 일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위기를 과장하고, 히데야스가 가진 젊은이의 비장감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에스기 가문은 켄신[謙信] 때 부터 천하를 떨치는 강호(强豪)이다. 카게카츠는 켄신이 남긴 법을 잘 지키고 있으며, 그 가로(家老)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直江 山城守]의 무략은 당대에 비견되는 이 없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인물로는 안되므로 고심 끝에 소장(少将)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맡아주겠는가?”

 하고 말했다. 히데야스는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한 듯 기뻐하며 이 임무를 받아들였다. 이에야스는 거기에 전술상의 조언도 덧붙였다.

 “노림수는 이렇다”

 하고 이에야스는 짐짓 세세하게 말했다. 우에스기 세(勢)가 칸토우에 출격해 온다. 그것을 우츠노미야 성(城)에서 방어하며 싸우려고 생각하지 마라. 성을 버려라.

 “성을 버리는 것입니까?”

 “버리는 것이다”

 우츠노미야 성(城)은 평지에 있는 평성(平城)으로, 농성한다고 하여도 그다지 방어가 되지는 않는다. 그보다 야외에서 결전을 벌여라. 야외에 진을 치고 적이 토네가와 강[利根川]을 다 건너면 멀리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기세를 보여라. 적은 그것을 보고 당황해서는 아이즈[会津]로 돌아갈 것이다. –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전술로써 이 이상 멋진 것은 없을 것이다. 우에스기 씨(氏)가 칸토우[関東]로 나왔을 경우, 그 너무도 장대한 원정이기에 후방에 대한 위험을 계속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약점을 자극하면 반드시 이긴다 – 는 것이었다.

 히데야스는 더욱 더 기뻐했다. 일단 거부했던 것이 얕은 생각이었다고 후회했다. 이번 전란(戰亂)에서 이보다 화려한 전선(戰線)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 토쿠가와 군단 속에서 히데타다, 히데야스, 타다요시[忠吉]라는 이에야스의 세 아들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듯이 비평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이에야스의 직속 신하[旗本] 중 하나인 나가이 나오키요[永井 直清]가 글로 써 남겼다. 이 미츠나리 거병이라는 소식이 오야마 진영에 도착하였을 때,

히데타다 님은 무언가 걱정하는 듯 하셨고, 미카와노카미(=히데야스) 님은 히죽히죽 웃으셨다. 사츠마노카미[薩摩守=타다요시] 님은 흥분하여 명성을 높일 기회라고 기뻐하셨다
라는 것이었다. 히데야스가 히죽히죽 하고 있었던 것은 운만 좋으면 이 난을 틈타 천하를 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적자 히데타다는 모처럼 이에야스에게 물려받을 예정인 천하를 미츠나리의 거병으로 인해 놓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 는 것이었다. 이 비평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히데야스와 히데타다의 성격론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정곡을 꿰뚫고 있었으며, 이에야스도 그런 점을 염려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투는 이에야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아무런 전공도 없었다. 우에스기 씨(氏)는 결국 아이즈[会津]에서 나오지 않았고, 히데야스는 우츠노미야 성(城)에서 머물기만 하면서 단 한발의 총탄을 쏠 기회조차도 없었다. 잉여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젊은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제비만을 항상 뽑는 운명이 부여된 것 같았다.

 덧붙여 말하면 적자인 히데타다는 제2군을 이끌고 나카센도우[中仙道]를 나아가, 미노[美濃]에서 이에야스의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온 제1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시나노[信濃]에서 서군(西軍)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에게 방해 받아 결국 세키가하라의 일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히데타다는 성실했지만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조금 기분 나쁜 것을 표시했을 뿐으로, 싸움이 끝난 후에도 히데타다에게서 세자의 자리를 뺏지 않았다. 그것을 들을 때마다 히데야스는 자신의 패기와 의욕이 덧없었다. 자신에게 나카센도우의 군을 이끌게 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이 일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일개 다이묘우의 위치로 전락하였고 이에야스는 천하를 얻었다. 다이묘우들을 재배치하고, 만들고, 폐하는 것이 행해졌을 때 히데야스를 북국(北国)에 봉했다.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현 후쿠이 시[福井市])를 거성(居城)으로 삼았고 에치젠[越前] 전체와 와카사[若狭], 시나노[信濃]의 일부를 합하여 75만석이라는 거대한 영지(領地)를 히데야스는 얻었다. 하지만 어느 곳이건 겨울에는 눈 때문에 중원으로 나올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눈의 감옥에 갇힌 것 같다”

 고 히데야스는 에도에서 파견되어 온 부속가로[付家老] 하세가와 우네메[長谷川 采女]에게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도에서는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어 토쿠가와 막부(幕府)를 성립시켰으며, 2년 후에 쇼우군 자리를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순푸[駿府]에 은거하였다.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이면서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다. 성(姓)은 토쿠가와 가문의 별성(別姓)인 마츠다이라[松平]로 복귀하였지만, 세간에서는 유우키 소장[結城 少将]이라 통칭되며 조금 음습함을 띠운 존숭(尊崇)을 그에게 보냈다.

 소년일 즈음부터 그의 특징이었던 천부(天賦)의 위엄 – 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너무 예리했던 듯하지만 – 은 나이와 함께 더욱더 농후한 색채를 더했다.
 1604년 7월, 이에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체재하고 있었을 때 히데야스는 자택에서 스모우[相撲] 대회를 열어 부친 이에야스도 초대했다. 자연히 여러 다이묘우나 이에야스의 직속 신하[旗本]들이 따라왔다. 곧이어 동과 서로 나뉜 스모우 꾼들이 14시합을 마친 후, 메인이벤트로 동서(東西)의 오오제키[大関[각주:3]
]인 '아라시옷테[嵐追手]'와 '쥰레이[順礼]' 양 선수가 모래판[土俵]에 오르게 되자 온 마당이 들끓었다.

 ‘아라시옷테’는 에치고[越後] 출신으로 쿄우토[京都]에서 활약하고 있으면서, 어느 상급 귀족[公卿]의 후원을 받으며 당대 천하제일이라 평판이 높았다.

 ‘쥰레이’는 카가[加賀] 출신으로 마에다 가문[前田家]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예전에 쿄우[京]의 키타노텐만[北野天満]에서 모금을 위해 개최된 스모우 대회에 나가 7일간 33번의 시합에서 연승하여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쥰레이[각주:4]’라고 개칭한 인물이었다.

 구경꾼들은 이 시합에 열광하며 다이묘우들도 모두 일어섰고 직속 신하들도 환호성을 질러,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이 때, 히데야스는 모래판 정면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섰을 뿐이었다. 한 마디도 안하고 서서는 천천히 마당을 둘러보았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도 모래판 주위의 모든 건물과 온 마당이 깊은 산속에 있는 양 정적에 휩싸였다.
 이에야스는 몹시 놀라며 감탄했다. 후에,

오늘의 구경, 흥이 있었지만
히데야스의 위엄이 놀랍도다.
  고 주위에 말했다. 이 천부의 위엄은 전쟁터에서 쓰여야 했지만 결국 그 기회가 그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두려워했다. 그를 에치젠 75만석에 봉한 뒤, 비와고 호수[琵琶湖] 동쪽 호숫가에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다시 세워,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겨온 믿을 수 있는 나이토우 씨[内藤氏]에게 지키게 하였다. 만약 오오사카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가 난이라도 일으킨다면, 그의 형뻘인 에치젠의 히데야스가 이에 호응할지도 모른다 – 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오우미[近江]의 나가하마는 에치젠과 쿄우[京] 근방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으로, 히데야스가 오오사카와 합체하기 위해 남하해 왔을 때 나가하마에서 이를 막는다 – 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오사카 성(城)의 히데요리와 에치젠의 히데야스가 한편이 되었을 경우 에도의 토쿠가와 히데타다가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지 어떤지가, 이에야스에게는 의문이었다.

 실제로 소문마저 돌았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히데야스의 저택에 방문하였을 때 술에 취해서는,

 “만약 천하에 큰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소인는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 의미는 오오사카에서 토요토미노 히데요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만약 히데야스가 형제의 정으로 히데요리 편에 선다면, 이 마사노리는 아무 생각할 것 없이 당신과 함께 싸우겠다. 그것을 약속한다 – 는 것으로, 에도 정권이 가장 위험시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위험한 시기도 공허해졌다.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이 소위 겨울-여름의 싸움을 일으키기 이전인 1607년에 히데야스는 병이 들어 자기 영지(領地)에서 죽었다. 34살이었다. 사인은 악성 매독과 이상쇠약이었던 것 같다.

**********************************************************************************

 히데야스는 살아있을 때 무언가를 일으킬 거라 여겨졌다. 그가 에도에 왔을 때, 토쿠가와 가문의 접대 태도는 도를 넘어설 정도로, 쇼우군[将軍] 히데타다는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와,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가는 도중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뒤에 놓으려고 할 정도였다. 히데야스는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두 가마가 나란히 하여 가는 방식이 되었다. 히데타다의 이 과도한 마음씀씀이는 필시 이에야스에게서 나온 지시였을 것이다. 히데야스에 대한 예의를 과도하게 함으로서 그의 웅대한 기상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런 주도면밀한 배려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히데야스가 태어나면서부터 그 생애는 공허하였다. 드라마틱한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그 생애는 아무 드라마틱한 요소도 가지지 못했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또한 일어나지도 않았다.

 무엇 때문에 자신은 태어났는가? –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 성[北ノ庄城]에서 마지막 숨을 들이켰을 때, 문득 그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다.

=====================================================================了==================

  1. 약 7.8km [본문으로]
  2. 이 당시의 이에야스의 관직이 '나이다이진[内大臣]'으로 그 나이다이진을 중국식(唐名)으로 나이후[内府]라 불렀다. [본문으로]
  3. 지금과 달리 최고위는 요코즈나[横綱]가 아닌 오오제키였다. [본문으로]
  4. 성지'순례’의 그 ‘순례’의 일본 발음이 '쥰레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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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cogwtw.tistory.com BlogIcon NOA 2008.07.28 2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는김에 1편부터 차례대로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찾아보니 교보에는 들여와있는 책 같아서 구입해볼까합니다. 가격도 싼것 같고^^;

    4번째 문단에서 "저 온화하기만" 에서 "그"가 빠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9 1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엔화가 쌀 때 사서, 우리 나라 도서보다 싼 가격에 구입했습죠.

    에?? 사투리? 젤나가의 피조물?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9 19: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저의 의미로 사용하신게 아니었나 보군요;; 실례했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7.29 1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9 2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OA님//확실히 NOA님이 하시는 말슴대로 하는 편이 부드럽습니다. 다만 될 수 있으면 아주 어색하지 않는 한 원문을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원문은 [人気があのおだやかなだけが取柄の秀忠をしのぐ・・・]입니다.

    맹꽁이서당님//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9 2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어이 갔군요. (허허..-_-;) 히데야스가 가담한 오사카의 진이라.. 상당히 재밌었을 것도 같습니다. -假定의 문제지만..-나이토 박살내고 남진하는 히데야스에.. 카토도 후쿠시마도 건재할때니 시마즈까지 가담한다면 적어도 큐슈의 도쿠가와 세력은 전멸이었겠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30 1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뒤에 있던 마에다와 아사노까지 오오사카에 섰다면 파괴력은 정말 발군이었겠다고 생각합니다.
    오오사카 전투에서 오오사카 측의 약점은 거물이 없었다는 점도 하나라고 보는데, 히데야스가 있었다면 오오사카 측에 서는 가문도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큐우슈우는 (토쿠가와에게) 조금 위험한 애들 모아 놓은 곳이라, 말씀대로 되었을지도 모르죠.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7.31 0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 하니 이런 인생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인생이니라-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31 2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그럴 수도 있군요. 저러한 인생도 있다는 것...

五.

 이에야스[家康]는 그 흐름을 조종했다. 여기서 신경 쓰이는 것은 히데야스[秀康]의 존재였다.
 - 그 분은 순진하시다. 길을 잘못 들지 않게 잘 보좌하라.
 며 히데야스의 가로(家老)들을 불러 이에야스는 훈계하였다. 히데야스가 순진하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 문제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그 중 어느 한 쪽 진영에 옹립되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이에야스의 숨겨두었던 의도가 무너질 수 가능성이 높았다.

 파벌은 두 개였다.
 이에야스를 정권 찬탈의 의도를 가진 야심가로 규탄하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秀吉)의 정무 보좌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그 무리들로, 그들은 히데요리[秀頼]의 생모 요도도노[淀殿]를 자기 파벌의 보호자로 두고 있었다.
 이 이시다 파벌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 야전파(野戰派)라고 할 수 있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그의 친구들로, 그 파벌의 중심에는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자리잡고 있다.

 두 파벌 다 히데요시가 키운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요토미 정권이 확립되면서부터 이시다파는 문관(文官)으로 정권의 중추에 있었고, 카토우파는 야전 종사자가 되어 중추에서 밀려났다. 카토우 파는 자신들을 일이 있을 때마다 곤경에 빠뜨려온 것이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파였다고 보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 이제는 전하 때문에 조심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시다 놈들을 죽이고 그 고기를 씹어 보자.
 고 울부짖으며 각각 오오사카[大坂)]의 자신들 저택을 무장하고, 공공연히 대립하며, 시가전까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내분(內紛)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때로는 토요토미 가문 필두 대로(大老)로서 두 파벌을 중재하였고, 때로는 은근히 부추겼다. 이에야스가 은밀히 밀고 있었던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와 카토우 키요마사의 파벌이었다. 이에야스는 카토우파에 꼽사리 껴, 이 파벌이 이시다파를 향해서 뿜어대고 있는 증오의 에너지에 풀무질하고 두들겨 단단히 해서 만든 칼로 정권 교체의 쿠데타를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칸토우 군단(関東 軍團)을 가지고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들끼리 내부에서 싸우는 형식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그 격화(激化)의 마지막 단계에 일대 결전을 연출하여, 그제서야 처음으로 쿠데타를 전개한다 – 는 구상이었다. 이 구상대로 이에야스는 착실히 돌을 깔았으며, 그렇게 깐 돌 한수 한수가 재미있을 정도로 성공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냥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해버릴 지 알 수가 없다’
 고 이에야스가 생각한 것은 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히데야스를 자유로이 풀어놓으면 오오사카로 내려가 히데요리를 따르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를 따르게 되면 자연히 이시다파의 진영에 들어갈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식인 히데야스에게도 손을 썼다. 1599년 3월, 이에야스는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를 불러,

 “나를 경호해 주길 바란다”

 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사정을 설명했다. 정세가 악화되어 이시다 측은 이에야스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끊임없이 밀모를 꾸미고 있는 듯하다 – 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며 히데야스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쿄우토[京都] 근방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병사가 소수밖에 없었다. 내 몸 지키기가 힘들구나 –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적자(嫡子)인 히데타다[秀忠]는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칸토우[関東]로 돌아가 에도[江戸]에서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토쿠가와의 군사가 적다. 츄우나곤[中納言=히데타다]을 대신하여 나를 도와주길 바란다”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에야스는 그렇게 부탁함으로써 히데야스의 의협심을 자극시키고자 하였다. 바라던 대로 히데야스는 감격했다. 이 진짜 아비에게 이렇게 부탁 받은 것은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히데야스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눈물이 나오려 했다.

 “불초한 소생이지만 분골쇄신하겠사옵니다”

 고 히데야스는 거의 외치듯이 소리를 질렀으며, 이때 처음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후의 일상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즉 이에야스의 저택, 숙소에 항상 처박혀 있을 뿐이었다. 외출도 못 하였고,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
 ‘한층 맘이 놓이는군’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이렇게 새장 속에만 넣어두면, 다른 야심가의 희생물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599년 윤3월 3일.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에서 중재 세력이었던, 대로 차석(大老 次席)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오오사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죽었다. 카토우 키요마사들은 그로 인해 폭동의 자유를 얻었다. 토시이에가 죽은 그 3일 뒤의 밤, 이시다 미츠나리를 오오사카에서 죽이고자 시가전을 계획하였다. 미츠나리는 사전에 알아차리고, 홀홀 단신으로 후시미[伏見]로 도망쳤다. 카토우들은 그를 쫓았다.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였다.

 미츠나리는 도망갈 곳이 마땅치 않자 대담하게도 후시미의 이에야스 저택으로 도망 와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쓰러뜨려 마땅한 숙적이었으며, 더구나 쫓아오는 일곱 장수들의 숨겨진 보호자였고, 그 장막 건너편의 수괴였다. 물론 그것을 미츠나리는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그 숨겨진 사정을 반대로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죽일 리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보호하고 죽이지 않았다.

 이에야스의 부하들은,
 - 이 기회에 미츠나리를 죽이십시오.
 하고 헌책하는 자도 많았다. 계속 탄핵을 받고 있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일곱 장수의 호의를 얻는 편이 좋다 – 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들을 생각도 안 했다. 단 한 사람, 모신(謀臣)인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만은 이에야스와 같은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를 보호하고 살려두어, 그의 거성(居城)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풀어준다. 후일 그는 반드시 책모(策謀)하고 다이묘우들을 긁어 모아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한 병사를 일으킬 것이다. 그때야말로 쿠데타가 완성될 때이며, 그때까지는 미츠나리를 살려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야스는 후시미까지 쫓아온 일곱 장수를 설득했다.

 “돌아가신 전하가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또한 히데요리 공(公)의 천하는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후시미에서 일을 낸다면 불충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오. 만약 그래도 여전히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하신다면, 이 이에야스가 상대를 하겠는데, 어떠신지?”

 하고 반 공갈을 하였다. 모두 이에야스가 그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그날 밤 미츠나리를 자택에서 머물게 하고, 다음날 아침 그를 보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의 배려는 세심했다.

 “소장(少将=히데야스), 당신이 세타[瀬田]의 다리까지 보내드리시게”

 하고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불러 미츠나리의 경호를 명했다. 히데야스는 알았다고 하며 만약을 위해 질문을 하였다.

 “만약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싸워라”

 하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 한마디가 히데야스를 흥분시켰다. 이렇게까지 뛰어난 기상과 재기(才氣)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히데야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도 종군하였으며, 조선침략에 있어서도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까지 따라는 갔었다. 그러나 야전에 나가지 않았다. 히데야스의 기량은 여태까지 실전에서 시험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안심하고 싸우라고 하였다. 전투가 일어날 리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야스가 경호하고 있는 것이다. 키요마사들이 히데야스의 경호대를 공격하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할 리가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히데야스에게 있어서는 불행하게 도중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미츠나리와 말머리를 함께하며 다이고 가도[醍醐 街道]를 나아가며, 반은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미츠나리를 염려하며 말했다.

 “목숨을 바꿔서라도 공을 지키겠소이다”

 하고 히데야스는 볼에 젊디젊은 피로 붉게 물들이게 하며 말했다. 미츠나리는 이 말을 오해했다.
 ‘역시 이 분은 다르다. 히데요리님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이에야스나 그 외의 사람들과는 별개의 감정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 가지고 있다. 아군이 되어주지는 않을까?’
 하고 자신의 의도에 좋은 쪽으로만 해석했다. 곧이어 세타의 물길에 걸려있는 세타 대교[瀬田 大橋]의 서편까지 왔다. 동쪽으로 이 다리를 건너면
오우미[近江] 평야가 펼쳐져 있다. 북 오우미의 산야는 미츠나리의 영지(領地)였다.

 “그럼 이제는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히데야스가 정중하게 말했다. 미츠나리도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마침 몸에 지니고 있던 마사무네[正宗][각주:1]의 단도(短刀)를 히데야스에게 선물하였다. 이 즈음 미츠나리가 소유하고 있던 이 단도의 명성은 온 천하에 울리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선물했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감사와 호의를 나타내고자 하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단도는 후세, 이시다 마사무네[石田正宗]라 칭해지며 전해 내려오고 있다.

  1. 여기서 ‘마사무네’는 칼 상표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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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13: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생부터 불행하더니 자신의 힘을 펼칠 수도 없고 친부한테는 계속 이용당하네요
    시로유메님 말씀처럼 역시 인생은 운!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0 1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행한 히데야스를, 시바 선생은 더욱 극대화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0 1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화도 재밌게 봤습니다. 여기서 이시다가 유우키 히데야스에게 칼을 주는군요..

    더불어, 무려 나츠코미때(;) 상경하시어 오덕질 할 시간 쪼개시어 기간한청 이시다 마사무네 공개판을 찍어오신 이름 없는 일본분께 박수를(ㅎㄷㄷ)

    どうやら刀の受け傷らしく、ここから「石田切込正宗」の号がついたらしいです。
    切込라게 칼에 난 금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이러한 이명이 있군요. 덕택에 국보는 아니고 중요문화재라지만, 왠지 몇몇 기스가 더 칼로서의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ㅎ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1 0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봐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나츠코니...라는 것이 오덕후와 관계가 있는 것인가 보군요. 정확하게는 어떤 것인가요?
    검색해 보아도, 그냥 참가했다는 글들만 보여서...

    칼은 칼등으로 막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칼 등에 상처난 것 또한 좋더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5 2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름 코믹마켓(만화 동인지등을 파는 큰 시장..이랄까나요)이요. 그걸 줄여서 나츠코미(夏コミ)라고 하는 듯 하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6 1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렇게 줄인 것이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四.

 히데요시[秀吉]도 그렇게 생각한 듯 했다. 실은 이 히데야스가 마장에서 일으킨 사건이 있던 해에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태어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는 그렇게 많이 양자를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히데야스가 가지고 있던 ‘인질’로서의 정치적 효용도 과거의 것이 되고 있었다.
 - 이을만한 명문가가 있다면……
 하고 히데요시는 양자 히데야스를 다른 가문에 보내기로 마음먹기 시작했다. 후년, 같은 양자인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를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낸 것과 같은 것을 –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마장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 칸토우[関東]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에게서 이야기가 왔다. 유우키 씨(氏)라고 하면 카마쿠라 시대 때 부터의 명문가로, 센고쿠[戦国] 때 갑자기 생긴 벼락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다. 현 당주는 하루토모[晴朝]라고 하며, 이 해 – 1590년 히데요시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공격했을 때, 하루토모는 내속(來屬)해서 토요토미 가문의 산하에 들어왔다. 그때 그는 히데요시와의 유대를 강하게 하기 위해,

 “소인에게는 아이가 없어 유우키 가문은 졸자의 죽음과 함께 끊어지게 생겼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가 누군가 정해주시면 그 사람을 상속자로 하겠습니다”

 하고 부탁해 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기특함을 기뻐하며,

 “그러고 보니 알맞은 사람이 있네”

 하며 곧바로 히데야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유우키 가문이라면 카마쿠라 때부터 무문(武門)의 명문가로 일본에서 유명했다.

 이 오다와라의 진(陣)에 이에야스[家康]도 참가하고 있었다. 부르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올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항상 가신으로 대하지 않고 객장(客將)으로 존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성의를 보여 일부러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에는 이런 종류의 용무에 항상 얼굴을 내미는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 ]를 선택해 알선을 맡겼다. 요시타카는 이에야스의 진영으로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귀가(貴家)에 있어서 정말로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고 요시타카는 말했다.
 정말 그러할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이 오다와라 정벌의 종결과 함께 칸토우 250만석 이봉(移封)의 내락을 받고 있었다. 새로 이전할 곳의 수도는 꼭 에도[江戸[각주:1]]
로 하시길 – 이라는 조언까지 히데요시에게 받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낳은 히데야스가 유우키 가문을 상속받아 유우키 성(城)의 성주가 된다고 한다. 유우키 성(城)은 칸토우의 북동에 위치하며, 오우슈우[奥州]에서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요새(要塞)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땅에 히데야스를 둔다는 것은 토쿠가와 가문의 방위에 있어서 이 보다 고마운 일은 없었다.

 “예. 이보다 고마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는 감격하여 졸자에게 있어선 아무런 이의도 없다는 뜻의 대답을 했다.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곧바로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자식이라는 자격으로 칸토우로 내려가, 에도에서 진짜 아비인 이에야스와 대면을 한 후 거기에서 오우슈우 가도(街道)를 거슬러 올라가 유우키 성(城)에 들어갔다. 거기서 처(妻)를 얻었다. 처는 유우키 가문의 당주 하루토모의 손녀로 사쿠코[咲子]라 하였다.
 히데야스는 이때부터 ‘
유우키 히데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석고는 5만석이었다. 전 당주인 하루토모는 은거하였고,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따로 은거료(隱居料)를 하사하였다.

 득을 보았다 – 는 것이 이에야스였다. 인질인 히데야스를 실질적으로 되돌려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더구나 그를 위해서 따로 영지(領地)를 떼어 줄 필요도 없이, 다른 가문의 땅을 상속받아서 돌아온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히데야스는 복을 가져다 주는 자식일 것이다.

 하시바 성[羽柴姓]에서 유우키 성(姓)을 이은 히데야스는 다이묘우(大名)로서의 입장도 바뀌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토쿠가와 가문에 속한 다이묘우였다.
 - 격이 떨어졌다.
 는 감정이 히데야스에게는 있었다. 거기에 조금 맘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동생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보다 끗발이 낮아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이런 노골적인 감정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있을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의중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저 자존심 강한 히데야스의 기상으로 보건대, 이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불운한 환경에 만족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을 히데야스는 참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오만[おまん]의 자식은 굉장히 참을성 있는 사나이로 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런 만큼 장래가 두려웠다.

 가문을 상속한 뒤 히데야스는 그에 대한 보고 겸 인사를 하기 위해서 에도에 왔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크게 환대하라고 시켰고 아예 날을 잡아서는 이 자기 아들과 대면하였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굉장히 정중하게 히데야스를 대했다.
 - 유우키 쇼우쇼우님(結城 少将殿 –
이하 ‘쇼우쇼우[少将]를 ‘소장’으로 씀 – 역자 주).
 이라는 호칭으로 이 아들을 불렀으며, 무언가를 물어볼 때도 항상 미소를 띄웠다. 조심함이 있었다. - 라기보다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히데야스가 태어났을 때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대면을 꺼렸고 그 후 토요토미 가문에 양자로 주고 말았다. 더욱이 토쿠가와 가문의 자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가문을 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고 생각하여, 그렇게 생각하면서 히데야스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이 혈색이 좋고 눈이 큰 젊은이는 이에야스에 대해서도 히데타다에 대해서도 공손하여 조금도 그러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젊은이를 화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하여, 말 그대로 종기가 난 곳을 건드리는 듯이 조심조심하였다.
 - 소장님께 예의를 다할 것.
 이라고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도 머리에 새겨질 정도로 말해두었으며, 특히 세자인 히데타다에 대해서는 그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성격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만 채워 주면 되었다. 만약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히데야스의 자존심에 상처라도 주는 행태를 보인다면 이 젊은이는 필시 이에야스가 죽은 후 히데타다를 멸하고 토쿠가와 가문을 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남이 띄워주면, 지 잘난 줄 아는 병진은 아닌 듯 하구만’
 이라고도 이에야스는 관찰했다. 이 점이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다소 안심이기는 했다.

 그런데 히데야스는 에도에서 이에야스와 만남을 가진 후 자기의 영지(領地)로 되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상경해서는 후시미[伏見]를 떠나지 않았다. 후시미에 있는 히데요시의 의향이었다. 히데요시는 히데야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으며, 어디까지나 후시미의 궁중 안에서 근시(近侍)시키고자 있었다. 히데야스도 히데야스로 칸토우에 있는 것보다 히데요시의 슬하에 있는 쪽이 편했으며 마음도 흥겨운 듯 했다.

 이후, 히데야스는 예전 양아비인 히데요시의 죽을 때까지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1592년의 조선 침략 때는 히데요시를 따라서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의 대본영까지 따라갔으며, 히데요시가 후시미로 돌아오면 그림자와 같이 호종하며 후시미[伏見]로 돌아왔다. 한시도 히데요시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토요토미 가문 양자들 중에서는 가장 충실한 양자였을 것이다. 하기사 히데요시가 놓지 않았다.

 “소장님은 내 곁을 떠나지 마시게”

 하고 히데요시는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끝에 꼭 이 말을 붙였다. 노인이 되어 심약해진 탓인지 아니면 소장 히데야스라는 젊은이가 그렇게나 귀여웠던 것인지 혹은 정치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 필시 이유는 그것들이 전부 섞여 있을 것이다.

 정치상의 이유라는 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적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면서부터 생긴 것이다. 히데야스의 존재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눈에 복잡미묘하게 비쳐져 왔다.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과 토쿠가와 가문을 잇는 가교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 히데요시는 죽는다. 히데요리는 남는다. 천하의 권력은 이에야스의 손에 쥐어질지도 모른다. 히데요리의 앞날은 예전 오다 가문 공자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죽을까, 쫓겨날까, 약소 다이묘우의 위치로 떨어지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때야말로 유우키 히데야스가 일어나 히데요리의 좋은 보호자가 되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기대했다.

 어쨌든 히데야스는 칸토우로 돌아가지 않았다. 유우키 성(城)은 가신에게 맡겨둔 채 그 자신은 오오사카[大坂]와 후시미에 저택을 지어 거기에 상주했다. 매일 후시미 성(城)에 등성하였다. 히데야스의 모습은 항상 궁중의 대기실에서 볼 수 있었으며, 히데요시는 그런 것을 노옹(老翁)의 천진난만함으로 기뻐했다.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히데요시가 기쁘다고 하면, 그리고 그것이 이에야스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히데야스는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말년, 병으로 인해 눕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때때로 히데야스에게 허리를 주무르게 하거나 했다. 어느 때인지,

 “이것이 늙어서의 즐거움이란다”

 하고 히데요시는 누워서 말했다. 젊을 때는 분골쇄신하며 일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몸의 뭉친 곳을 주무르게 한다. 이승에서 이보다 행복한 것은 없다 –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야스의 손바닥이 스쳐가고 있는 히데요시의 몸은 더 이상 육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정도로 말라 삐들어져 있었다. 히데야스는 그것에 슬픔을 느꼈다.

 “오히로(お拾=히데요리)는 너의 동생이다. 오랫동안 잘 돌보아 주렴”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검게 변색된 피부가 이제는 종이와 같아, 생기가 없었다. 그 건조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말을, 히데야스는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동생이다’
 라는 말을 들어도, 솔직히 말해 히데야스에게는 그런 실감이 나지 않았다. 히데요리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천하의
숭경(崇敬)을 모으고 있었으며, 관위는 정사위(正四位) 코노에츄우죠우[近衛中将]였고, 양자이지만 형이라고 하는 히데야스는 아주 멀치감치 떨어져서밖에 배알(拜謁)할 수 없었다.

 동생이라고 하면 한 명 더 있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 히데타다였다. 그는 틀림없이 피가 이어진 동생이었지만, 그러나 이쪽의 동생도 이미 종삼위(従三位) 츄우나곤[中納言]이며, 형인 히데야스는 그 가신 격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히데야스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 동생은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에 비해 형이라고 하는 자신은 현실의 위세가 너무나도 낮았다. 히데야스는 지금도 여전히 유우키 5만석의 영주이며 불과 200명 정도의 무사[侍] 밖에 거느리지 못하였다. 이것이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자신의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자신이 너무 비참했으며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히데요시라는 양아비에 대해서 골육의 정과 같은 마음을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즈음엔 함께 욕실에도 들어갔으며, 욕실뿐만 아니라 히데요시는 불이 붙은 선향(線香)을 들고 손수 히데야스의 피부를 태우며 뜸을 떠준 적도 있다. 그런 기억은 진짜 아비 이에야스와는 한번도 없었다. 이에야스라는 아비의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그 몸과 스친 적은 없었다.

 지금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지금 손에 느껴지는 이 노인 쪽이 훨씬 육친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수년이 지나 히데야스가 28살 때 히데요시가 죽었다. 1598년 8월 18일이었다. 그날 밤 이후 정세는 불안정이 이어져 후시미 성(城) 밑은 밤마다 소란스러웠으며, 유언비어가 날라 다녔고, 3일이 지나지 않아 시민들은 가재를 짊어지고 도망치기 위해 거리를 내달렸다.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의 권위에 의해 억제되어있던 토요토미 가문의 파벌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공공연해졌다. 그들은 무력으로 대항하며 싸우고자 했다. 다이묘우끼리 성 밑에서 싸운다는 소문이 자주 돌았으며 더구나 이는 뜬소문이 아니었다.

 토요토미 정권의 질서가,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질서를 재건할 수 있는 인물은 어린 주군 히데요리가 아닌 이에야스여야만 한다는 자연스런 기대가 그에게 모였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정권하에서 가장 큰 다이묘우이며, 오다 가문 때부터 이어진 그 역사적 명성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가라앉히는데 충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세상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겐키-텐쇼우[元亀-天正][각주:2]의 혼란이 다시올 것이라는 바램이나 견해가 세상의 밑바닥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1. 현 토요쿄우[東京] [본문으로]
  2. 각각 일본의 연호로 1570년~1591년까지를 지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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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13 2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리는 내 동생'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말이었군요.
    사실 유우키 히데야스가 장수했다면.. 뭐 장수라고 할 것도 없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도요토미가는 메이지때까지 이어졌을지 모르지요.

    그나저나 유우키씨가 5만석밖에 안됐었다니 의외군요.. 혁신의 1국 1성개념이 너무 익다보니..;;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5 0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능성은 있었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보는 방식에 따라선) 토쿠가와에서는 조금 무시받는 듯 했기에, 토요토미 측에 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10만석, 10.1만석 이라는 소리는 들어보았습니다. 언제 함 찾아봐야겠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7.15 1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쿠가와 휘하 다이묘가 되었었군요. 전 히데요시가 마사무네와 함께 히데야스를 이에야스를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배치시킨거라고 생각했는데 흠. 이 양반은 확실히 운이 더럽게 없음. 쓰끼야마도노 이후에 정실이 정해져서 양자로 정실의 아들로 봉해져서 세자가 되면 보내질건 사실상 히데다다고 자신은 에도에서 방바닥에 뱃때지 땃땃하게 지낼 2대 쇼군. 그렇지만 결국 몇년의 시간차로 아사히히메의 아들로 정해져 세자가 히데다다로 정해지고 자신은 변방(-_-;;)다이묘. 역시 인생은 운인겁니다. 네네.. 그래서 우린 로또를 사야되는겁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5 2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에야스의 아들을 방비책으로 보내기는 좀 힘들지 않았을까요? ^^
    그렇습니다. 우리는 로또를 해야 합니다. 제가 100억대의 1등이 되고 나면, 흰꿈님의 대박을 꼭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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