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분수령이 대전투의 승패를 배반이라는 행위로 결정짓게 한 인물 – 때문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사상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秀吉]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각주:1]로 태어났지만, 히데요시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가 되어 키타노만도코로의 손에 키워졌다. 이 즈음에는 히데토시[秀俊]라는 이름을 썼다.

 1588년. 히데요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의 행행(行幸)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는데, 7살의 히데아키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 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淀殿]가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이 첫 아들에게 츠루마츠[鶴松]라는 이름이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불과 3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 사망이라는 충격을 잊으려는 듯 조선 침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도 또한 히데요시의 총애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침략이 한창이던 1593년, 요도도노는 또다시 남자아이(히데요리[秀頼])를 낳았기에 히데요시의 히데요리에 대한 눈먼 사랑이 시작되어, 우선 관백(関白)인 히데츠구[秀次]를 실각시켰다. 히데아키의 신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헤아려,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각주:3]

 정유재란 때 히데아키는 일군의 대장으로 출진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의 농성으로 유명한 울산성(蔚山城)에 대규모 구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도망치는 명나라 군사를 쫓아 총대장인 히데아키가 직접 창을 꼬나 쥐고 휘두르며 짐승을 쫓는 사냥꾼처럼 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 해인 1598년. 돌연 히데아키는 귀국 명령을 받았다. 히데아키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히데요시에게 출두하였다. 필시 조선에서의 활약에 대한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아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은 의외로 조선에서의 경거망동을 질타하는 히데요시의 노호였다. 히데요시는 “네 녀석과 같은 놈을 대장으로 삼다니 내 눈이 삐었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큐우슈우[九州] 33만 6천 석을 삭감하여, 에치젠[越前] 15만석의 이봉이라는 가혹한 결정까지 내렸다.
 히데아키는 이 사태가 모두 군감(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온화한 얼굴로 히데아키의 불평을 들어주고서는, 히데요시에게도 가 히데요시의 분노가 풀리도록 노력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에야스의 조처로 감봉에 따른 이봉을 피한 히데아키의 처우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쥐고자 계획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이러한 히데아키에게 은혜를 입힌 형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아키가 배반한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결전 당일,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히데아키는 시간이 흘러도 어느 편인지 확실히 나타내지를 않고 지켜만 보았다. 애간장이 탄 이에야스는 철포대에게 명령하여 히데아키의 배반을 재촉하는 철포를 쏘게 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서 히데아키는 병사들을 움직여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것이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갈랐다.[각주:4]

세키가하라 포진도. 왼쪽 중간 마츠오 산[松尾山]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후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을 배반한 공적으로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1만석을 하사 받아 오카야마 성[岡山城]의 성주가 되었지만, 2년 뒤인 160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계속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아 정신이 병들었다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괴롭힘을 받아 미쳤다는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의 괴제백선상(魁題百撰相)에 나오는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에게 원령(怨霊)이 되어 나타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년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 밑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의 양자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출진. 이때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로 관직은 쇼우쇼우[少将]였다. 이어서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 산기[参議]
[각주:6] 겸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이례적인 스피드로 승직하였다. 1594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1.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본문으로]
  2. 이때 다른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는 텐노우[天皇] 나아가서는 텐노우의 대리인인 히데요시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는데, 다이묘우들이 서약한 대상이 히데아키였다. [본문으로]
  3. 히데츠구의 실각이 나중(1595년)이며, 히데아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간 것은 1594년의 일. [본문으로]
  4. 지금까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때 히데아키가 서군이었다는 시각이었으나(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 히데아키가 동군이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군의 총대장이었던 것도 있어), 근래에 들어서는 동군으로 참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정황증거로 마츠오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 이토우 모리마사[伊藤 盛正]를 쫓아내고 차지한 점, 이후 행해진 서군 군의(軍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 말단인 시마즈의 사츠마 병사들 역시 히데아키를 동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런 동군으로 참가한 히데아키가 참전을 주저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내건 당근인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関白)직과 킨키[近畿] 근방에 2개국 가증에 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1590~92년 사이의 관직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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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11.08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금오중납언에서는 시바료타로선생이 따로 언급하진 않았었던듯 하지만 그래도 82년 출생설이 정설인가보네요. 82년생이라면 정유재란때 활동했을시 나이가 너무..라고 생각해보니 아사노가 도련님은 오다와라전역때 15살이었던걸 생각하면 꼭 그런것도 아닌것같고(...)

    거 그렇다곤 쳐도 21세에 사망이라 이래저래 설이 많긴 많나봅니다. 딱히 지병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괴설이 나돌만도 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8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당시는 15살이면 일반적으로 데뷔전[初陣] 치를 나이인 것 같더군요.

      매사냥에 갔다 돌아 온 뒤 '기분이 안 좋아'라는 말 한 마디 뒤 자빠져 계속 자다가 한번 깨곤 사망... 당시도 이해하기 힘든 죽음 방식이었는지 농부에게 불알 채여서 죽었다는 소리까지 나왔나 봅니다.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2 0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밖엔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도요토미가의 황태자였으나 결국엔 도요토미가의 멸망을 이끄는 단초를 마련해준 인물이니 말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을테니 히데아키를 두고 도요토미를 배신했다는 비난은 안 주어졌을테니 그것 역시 극적인 요소군요.

    어쩌면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가타쿠라에 대한 상사병이 아닐런ㅈ..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2 1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말씀대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히데아키는.

      카타쿠라라.. ^^
      하지만 카타쿠라의 몸도 마음도 이미 마사무네의 것... 애송이 히데아키가 오우슈우의 독안룡에게 情人을 빼앗기는 여러모로 힘들겠군요. 으익~ 상상만해도.. ㅋㅋ

    •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1.17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잉? 마사무네와 시게나가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7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사카 공성전 때 시게나가에게 선봉을 명하면서 "너 말고 누구한테 시키겠니~♡"라면서 볼에 뽀뽀했다고 하더군요.

      카타쿠라 가문의 기록[片倉代々記]에 마사무네와 시게나가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하네요.

  3. 2011.11.26 1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가신들을 이끌고 말에 올라 에도[江戸]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히고[肥後] 54만석의 다이묘우[大名] 카토우 키요마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에도 시민들 사이에 화제를 되었다.
 키요마사는 신장이 6척[각주:1]을 가볍게 넘고[각주:2]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입이나 턱 주위에는 수염이 무성하게 덮인 대장부였다. 허리에는 1m7cm의 큰 칼[大刀]을 차고, 어깨높이가 180cm 넘는 괴물같이 거대한 말에 올라타 있었다 한다. 무엇보다 당시의 말은 어깨높이 120cm가 보통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키요마사에게서 고(故)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직속 장수, 무공이 뛰어나 ‘칠본창[각주:3]’이라는 이명을 얻은 무장, 임진왜란 시 일본의 맹장에 걸맞은 보습이라 보고 나중에는 유행가까지 만들었다.

에도 깡패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만은 피하시오
江戸の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에도 깡패 모가리[江戸のもがり]’는 당시 에도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공갈 깡패를 말하며, ‘밤색 제석[帝釈栗毛]’는 키요마사의 애마를 말한다. 안하무인인 깡패라도 키요마사가 타는 말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리라.

 키요마사는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도 일화가 많은 사람인데, 특히 조선에서 호랑이 퇴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십문자 창을 휘둘러 호랑이의 숨을 끊었는데 그때 호랑이는 창의 한쪽 날을 물어서 뜯었다는 이야기인데[각주:4], 이는 에도 시대 말기의 창작으로 처음 실린 책에서 키요마사는 철포를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키요마사의 통칭은 토라노스케[虎之助]로  범 호(虎)자가 들어간다.

 키요마사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 태생이라고 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키요마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모친(오오만도코로[大政所])과 사촌지간이라고 한다[각주:5]. 그런 연으로 키요마사는 어릴 적에 당시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였던 히데요시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가신으로서의 키요마사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데요시 자신도 노부나가[信長]가 아니었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정도로 미천하였기에, 친척이나 히데요시 가문을 대대로 섬긴 가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키요마사와 같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닿는 사람을 교육시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런 만큼 키요마사의 출세도 빨랐다.

 1576년 15살 성인식이 있던 해에 170석을 받았으며[각주:6], 1581년 6월 20살에 톳토리 성[鳥取城] 공성전에서 데뷔전[初陣]을 치르게 되는데 키요마사는 정찰 나갔다가 공을 세웠고,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각지를 전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칠본창(七本槍)라 일컬어지는 전공을 세워 일약 3000석[각주:7]이 주어진다. 지위도 철포 150정, 히데요시가 파견하는 무사[与力] 20명을 휘하에 둔 중급 장교[物頭]로 승진하였다. 이 정도되면 당당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례적인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덕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키요마사 자신이 무장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도 키요마사는 히데요시를 따라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등에 참전하여 1588년에는 일거에 히고[肥後] 절반이 주어져 드디어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나머지 반을 하사 받은 것이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1592년 조선 침략[각주:8]에서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선봉에 임명되어 서로 경쟁해 가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곧바로 의병(義兵)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하자 전황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쟁정책에 관해 대륙정복론자인 키요마사와 화평론자인 코니시 유키나가 사이에는 자연스레 반목이 생겨, 결국에는 작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둘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위 무공파와 문치파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키요마사의 신상에 위기가 생긴다.

 조선에 가 4년째인 1595년.
 갑자기 히데요시에게서 귀국을 명령 받은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국명령은 일본군의 감찰[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작성한 키요마사의 행동보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시다의 보고는 전부 키요마사의 방자한 말과 행동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명령에 따라 키요마사는 후시미[伏見]로 돌아왔지만, 히데요시는 면담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키요마사는 다섯 행정관[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히데요시의 화를 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나가모리는 미츠나리와 화해하기만을 권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키요마사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냐며,
“하치만[八幡][각주:9]도 굽어 살피소서, 지부[治部][각주:10]놈과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그 놈은 조선에서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주제[각주:11]에 남의 뒤따마만 까며 끌어내리려고만 하는 더러운 놈이다. 아무리 소인이 타이코우[太閤[각주:12]]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고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지부 놈과는 화해는 하지 않겠소.”
하며 분노하였다고 한다.

 키요마사의 근신생활은 반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던 1596년 7월. 킨키[近畿] 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 속설에 따르면 키요마사는 근신 중인 자신의 처지도 잊고 수하 200여를 이끌고 후시미 성에 와서 히데요시를 보호하며 성을 수비하였다. 이것을 안 히데요시도 노여움을 풀고 키요마사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각주:13] [각주:14]. 후세 연극 등에서 ‘지진 카토우[地震 加藤]'라 불리게 되는 명장면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1597년. 조선으로 재침공. 즉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키요마사는 또다시 출정하여 이 해의 막바지에 가장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유명한 울산성(蔚山城) 농성전이다.
 엄동의 12월[각주:15]. 4만4천이라는 명나라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키요마사는 철저항전 하였다. 성 안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명의 전법은 장기 포위전[兵糧攻め]이었다. 성 안에 있던 오오코우치 히데모토[大河内 秀元][각주:16]는,
 “매일 행전(行纏)[각주:17]이 흘러 내렸다. 처음엔 고쳐 맸지만 나중에 뭔가 이상하여 행전을 떼어 보자 다리에 살이 하나도 없이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 기록하였고, 명나라 기록에도 - 일본군은 종이를 먹고 오줌으로 갈증을 해소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듯이 성 안 일본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인해 동상에 걸리는 사람,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러한 지옥 속에서 키요마사도 죽음을 각오했는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등 여러 장수들에게 보낸 편지에,
 “만약 낙성된다면 이런 모습들을 타이코우[太閤] 님에게 보고해 주길 바란다”
 고 썼다. 모우리[毛利], 나베시마[鍋島], 쿠로다[黒田] 등 여러 장수의 구원이 제시간에 도착하여 조선과 명의 군사들은 포위를 풀고 철퇴하였다.

 고군(孤軍)이면서 항전을 계속한 키요마사에게 적인 명나라 측도,
 “오랑캐[酋] 중에서는 가장 사납고 굳세다”
 “재능은 유키나가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며 절찬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어 길었던 조선에서의 싸움도 끝났다. 키요마사에게 남겨진 것은 두 번에 걸친 전쟁 중에 한층 더 깊어진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 등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이런 키요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키요마사는 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 측에 서서 싸워, 코니시 유키나가의 거성 우토 성[宇土城]과 속성 야츠시로 성[八代城]을 공략. 전쟁 후 히고[肥後] 전부를 하사 받았다[각주:18]. 천하의 명성 쿠마모토 성[熊本城]의 축성에 임한 것은 다음 해인 1601년이었다.

 토쿠가와의 시대에 들어서도 키요마사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었던 듯, 토요토미 가문 존속을 위해, 1611년 히데요리[秀頼]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대면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쿠마모토로 돌아가던 도중 병에 걸려 귀성한 뒤 얼마 지나 죽었다. 그 죽음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기에 독살설도 유포되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
1562년 오와리[尾張] 에치 군[愛智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戦] 후
오우미[近江], 야마시로[山城], 카와치[河内]에 조금씩 3000석을 하사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여 히고[肥後]의 반인 25만석을 영유하였다[각주:19].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동군에 속하여 히고 54만석을 하사 받았다. 축성, 치수, 간척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1611년 6월 24일 죽었다. 51세.

  1. 6척3촌. 약 191cm. [본문으로]
  2. 5척3촌(161)이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때문에 키요마사의 동상에 있는 창은 십문자창이 아니라 "ㅓ"자형 창이다. [본문으로]
  5.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는 그렇게 실렸다 한다. [본문으로]
  6. 문서로 남아 있기로는, 1580년 히데요시에게서 하리마[播磨] 내에 120석을 받은 것이 초견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미[近江] 내에 1800석, 카와치[河内] 내에 1097석, 야마시로[山城]에 50석...으로 약 3000석. [본문으로]
  8. 임진왜란. [본문으로]
  9.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10. 지부쇼우유우[治部少輔]. 이시다 미츠나리의 관직명. [본문으로]
  11. 행주산성에 참전하여 부상당했다. [본문으로]
  12. 타이코우[太閤]는 칸파쿠[関白]직에서 물러난 사람을 이르는 경칭. 즉 히데요시. [본문으로]
  13. 당시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있기에(직접 지켰다면 안부 편지 같은 것은 안 쓸테니), 실제로 달려가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4. 실제 키요마사 근신이 풀리는 데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주선 덕분이라 여겨지고 있다. [본문으로]
  15. 음력. [본문으로]
  16. 일본측에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말을 기록한 "조선 이야기[朝鮮物語]"의 저자. [본문으로]
  17. 정강이에 차는 각반....(저는 행전보단 각반이 익숙합니다만 '행전'으로 쓰라고 하네요) [본문으로]
  18. 단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19만~25만석까지 다양. 개인적인 추측으로 19만석은 키요마사에게 주어진 것이며, 3만석은 키요마사 편제 하의 히고 지역 호족[国人], 거기에 히고[肥後] 안에 있던 히데요시 직할령[蔵入地] 3만석을 키요마사가 대관(代官)이 되어 관리한 것을 포함하여 25만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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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2.18 15: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이전에 쿄토 갔을적 니죠성에 들른적이 있었는데 이사람이 단검품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추워서(1월-_-..)였을지도 모르겠다 싶긴 했는데-_-.. 아무래도 히데요시 코붕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던 덕일지 모르겠다 싶네요.

    뭐 아무튼 숙적에서의 이미지는 정말이지 聖(;) 아우구스티노 유키나가(-_-..)의 반대역이어서 그런지 영 안 땡기던데 말이죠. 역시 창칼드는 캐러들이 제 취향은 아닌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8 2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죠우 성[二条城]하면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 대정봉환한 장소 - 더군요.

      이외로(??) 키요마사는 재정과 무역에 밝은 인물이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이름뿐이긴 해도 관직명이, 지금의 재무부 관료인 '카즈에노카미[主計頭]'. 창칼 뿐만이 아닌 듯 하더군요.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2.18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쿠가와나 오다의 사천왕 같은건 나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데
    칠본창은 왠지 창이 아니라 방패막이 7명 느낌이 들더군요. 히데요시 출신 때문인가...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8 2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스케일이 달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

      가령 오다나 토쿠가와의 사천왕은 그 가문 전체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이고, 칠본창 같은 경우 단지 일개 전투에서 공적을 세운 애들 뿐이니까요.

      히데요시의 칠본창은, 오다 가문의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 七本槍]'이나, 토쿠가와 가문의 '카니에 칠본창[蟹江 七本槍]'과 비교해야 할 듯 싶군요. 히데요시도 저 7이란 숫자에 맞추어 칠본창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요.

  3. 朴先生 2009.12.19 15: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에이 게임에서는 왠만한 무장들이 통솔, 무력이 90이상이면 지력이나 정치는 거의 40이하로 버리는 편이지만 키요마사는 70정도는 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태합에서는 스킬은 차지하고, 대략 용장형, 검호형, 책사형, 내정형, 먼치킨형, 그냥 병X...정도로 구분하지만 키요마사는 먼치킨급은 아니나 내정에도 그런대로 쓸만하니...

    그냥 '변태'같습니다.

    불현듯 두산 베어스의 변태 스탯 '고영민'선수가 떠오르네요.ㅋ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9 1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컴퓨터 바꾸면서 태합 설치를 않해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키요마사는 꽤 쓸모가 있었던 듯한 기억이 나는군요.

      ps;요즘 야구를 안 봐서 고영민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거기다 좋아했던 팀이 LG인지라 두산하면...아이고 배 아퍼!!! 라는 느낌이 먼저 드는군요.

  4. 朴先生 2009.12.20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산의 2번 타자로 타율은 높지 않지만 출루율이랑 장타율은 높고 갖가지 허슬 플레이에 자기 위치도 아닌데 어느샌가 달려가 플라이 볼을 잡아내는 이상한 선수입니다.

    저도 LG팬입니다. 몇년째 하위권을 맴돌아 직접 보러갈 기분도 안나지만요. 가면 실망만 잔뜩하고;
    잠실 가본지도 오래됐네요..
    내년엔 가을에 야구장 갈 수 있게되면 좋겠습니다 제발 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엘지가 유지현 내칠 때 마음이 어느 정도 떠났습죠. 인위적인 세대교체가 얼마나 팀에 악영향을 끼치는지 좋은 견본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2.20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인 전국시대 3대 수수께끼라면 히데요리의 아버지(생물학적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 그리고 '기요마사의 키'가 아닐까 싶습니다. 투구로 만인을 속인 것인지 아니면 진짜 거인인 건지. (만약 191cm라면 야마가타와는 최대 70cm까지 차이나는군요!!)

    기요마사는 히데요시가 아껴서 키워낼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사노리, 미쓰나리, 요시쓰구, 요시아키라, 나가마사, 기요마사. 히데요시의 손을 거친 장수들은 본바탕도 좋았겠지만 히데요시의 능력이 십분 발휘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 능력이 어찌 후손을 보는 쪽으로는 없었는지.) 언급한 사람들 중 나가마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문이 박살나버렸지만. 그러고보니 다다히로의 정확한 가이에키 명분은 투서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인(당시 조선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위키디피아에서는 '쾌지나칭칭나네'가 기요마사 덕분에 탄생했다는 소개도 있구요.) 너무 작전수행을 열심히 한 덕분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인물이 되어버렸다는 점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_-

    수능도 지나갔는데 언젠가 시간이 되면 구마모토와 나고야를 가보고 싶습니다. 기요마사의 유품인 우아한 명성들은 저에게 무슨 얘기를 해줄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가미님의 미스터리에 대한 제 주관적인 시각은....

      - 히데요리의 애비는 히데요시가 맞다고 생각하며,

      - 미츠히데의 모반은 노부나가의 시코쿠[四国] 정책 변경에 따른 아케치의 부하장수 사이토우 토시미츠[斎藤 利三] 주도로 일어난 일(....심하게는 미츠히데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죠)

      - 키요마사는...음.... 어떨까요. 조선왕조실록을 다 살핀 것은 아니지만, 키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평범한 편은 아닐지...

      타다히로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무엇보다 키요마사가 가상의 적으로 막부군에 대비한 영내 경영을 펼친 것이 가장 크지 않을지...나중에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가 당시 최강이라 일컬어 지던 사츠마 군[薩摩軍]을 이끌고도 함락시키지 못한 쿠마모토 성은 물론, 정부군이 큐우슈우[九州]로 내려오자 그에 맞써 싸운 타하라자카 고개[田原坂]조차 키요마사가 히고 번주일 때, 토쿠가와 막부가 쳐들어 왔을 때를 대비해 인공적으로 만든 곳이라고 하니까요. 그런 모습들이 막부를 불안케 하지 않았을지...

      조선에서 미움 받는 것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술책인 듯 싶습니다.(황정욱 손자의 팔다리를 자른 막장짓도 있습니다만).
      거기에 일본군의 대명사로 유키나가, 키요마사로 지칭되며 코니시는 약간 선역, 키요마사는 악역으로 대표되지 않았나도 싶습니다.

      부럽군요. 여행 많이 다니면 좋습죠. 개인적으로 여행은 목적지로 가능 동안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아 싫어하는 편입니다만, 나이 먹고 보면 여행 많이 안 다닌 것이 좀 아쉽더군요.

  6. 정동희 2009.12.21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작년인가 구마모토성 보고 왔는데... 가이드 말이... 거의 대부분 조선 포로들이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전국 시대 3대 궁금증은 저도 참 궁금하네요...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자가 맞다면... 요도기미하고는 원숭이 아저씨가 유달리 궁합이 잘 맞었던 모양이군요
    미츠히데의 모반 건은... 정말 의문이에요... 계획적이라고 보기엔 그 뒤의 행동이 너무 허술하고
    충동적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큰 일을 저질렀고...
    여태까지 원한설, 조정음모설 등등은 들어 봤는데, 사이토 도시미츠에 의한 설은 처음 듣네요
    발해지랑님 가능하시면 좀 자세히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미츠히데 - 죠쇼카베, 히데요시 - 미요시, 소고 정도 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에 관해서는 무지에 가까운지라...
      근데 가이드하셨던 분은 일본분이셨나요?

      개인적으로 쿠마모토 성이 조선 포로로 만들었다는 말은, 모 방송에서 한국 여학생이 그런 식으로 말한 뒤에 한때 화제가 되긴 했습니다만, 아직 제가 책같은 매체로 접한 적은 없습니다.

      요도도노가 다산이 가문 특기인 오다 가문 출신인 점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컥~ 또 쓸데없는 말을 해서 독박쓰게 생겼네요 ^^;
      미츠히데-쵸우소카베, 히데요시-미요시까지 아시면 조금만 더 파고드시면 "아~ 이 자슥이 기껏해야 이런 걸로 저런 말을 하는구나"라는 것을 아시게 되지 않을지....댓글로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닌 것 같군요. 나중에 따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이건 용서를...

      ps;정동희님이시라... 혹시 전클 유키무라..님???

    • 정동희 2009.12.21 13: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전클 유키무라 맞습니다
      전클의 추억도 이젠 가물가물 하군요
      가이드는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본사에
      대한 지식이 많더라구요
      저도 근거는 없고 그냥 들은 얘기 입니다

      히데요리의 경우는 저도 히데요시 친자쪽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상하게 애비를 너무 안 닯은 것 같아서요

      미츠히데 모반건은 책이나 뭐 인터넷을 뒤져 봐야겠네요
      근데 전국사에 대한 흥미도 이젠 바쁜 생활에 파묻혀서...
      예전처럼 관심사 비슷한 사람들 만나서 얘기하면 재미 있겠지만

      그냥 이래 저래 먹고 사는 고민 만으로도 정신 없네요

      발해지랑님처럼 좋은 글 올려주시는 분들 덕분에 이 약간의 취미나마 이어가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2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전클의 나오이에[直家]였다는 것을 알면서 존댓말 쓰시는 겁니까? ....라고 해도 못 만난지 십 년 가까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긴 하겠군요.(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대학로 였던 듯 ^^ )

      가이드에 관해서 일본인이냐고 물었던 것은...
      요 몇 해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조선족 관광가이드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세종대왕이 한글을 화장실에서 일보다 창틀보면서 만들었네 어쩌네 하고, 뭐든 중국기원설을 펼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듯이 저 개인적으로는 관광가이드를 신뢰하기는 좀 그렇더군요.

      히데요리와 히데요시는....
      어렸을 적에 뭘 먹고 자랐느냐에 관한 차이 아닐까요? 어렸을 때 험하게 자란 히데요시와 그에 반해 온갖 산해진미를 먹고 자란 히데요리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마치 현대 미국의 비만인이 50%가 넘는 것 처럼요.

      미츠히데 모반건은 언젠가 시간이 되면요..^^;

      예전처럼 언젠가 함 봐요. ^^

    • 정동희 2009.12.22 1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클의 나오이에님...
      아아 솔직히 기억이 안나네요
      사실 요즘은 어제 일도 기억이 잘 안나기 때문에
      만나뵈면 저도 좋죠

      전 결혼해서 방배동에 살고 있습니다
      회사는 분당 정자동으로 다니고 있구요
      월급쟁이 하면서 마누라 눈치 보면서
      근근히 살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2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컥~ 설사 기억이 안나셔도 쫌 기억난다고 좀 해 주시지... 저렇게 친한 척했는데.

      하긴 10년 전에 두세번 보았을 뿐이니 기억 못하시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

      신년이 되면 함 보자구요!(솔직히 전 굉장히 반갑거든요 ^^ )
      만나는 곳은 저희 집과 동희님 집 사이인 영등포 근처로 해서요.

    • 정동희 2009.12.23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제 기억력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그간 장복한 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년 이맘때 결혼하고 하도 많은 일이 생겨서
      기억용량이 많이 오버된 모양입니다

      그래도 기억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신년에 한 번 뵙죠
      결혼하고 나니 제 스케줄이 맘대로 조정이 안되서요
      암튼 언제든 시간 날 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연락은 이 블로그에 댓글 다는 걸로 하겠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3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결혼하지 않았지만 저도 주체적인 스케줄 잡기가 어려우니 서로 협의해 나가자구요.

  7. 朴先生 2009.12.22 01: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꾀돌이 유지현.. 저 개인적으로 KBO 최고 유격수는 아니었지만 LG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재치있는 플레이에 훌륭한 작전수행능력, 신바람야구는 유지현 타석부터였지요. 저도 LG에서 가장 좋아했던 선수였드랬습니다. 뭐 요즘엔 주루코치로 가아끔 보이더라구요. 뜬금없지만 결론은 LG를 '순페이'가 말아먹었다는 겁니다... 뭐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선수의 은퇴나 트레이드가 이순철 감독 탓은 아니고 프런트에 의한 압박이란 말도 있지만요. 아무튼 인위적인 세대교체가 악영향을 끼쳤다는데는 저도 동감합니다. 2004년부터 막장으로 치달아 2006년엔 팀사상 처음으로 꼴찌.. 2008년에 또 꼴찌..

    어쩌다 화제가 키요마사에서 LG로... 아... 고영민... 변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2 1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병규가 와서 이제 아는 선수도 생겼으니 이번 년도는 함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한때 엘지는 유일하게 꼴찌 경험이 없던 팀이었는데, 진갑용 때 2차1순위 얻겠다고 두산이랑 꼴찌 다툼하며 팀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그러게요. ^^ 이제 야구 이야기는 여기서 끝!!!

.

 양자를 보내는 측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히데아키를 위해서 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였다. 우선 양아버지인 타카카게[隆景]에 대한 답례로써 빈고[備後] 미하라 성[三原城] 3만석을 주었다. 은거소(居所)로써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 끼기 전에 빨리.
 
라는 식으로, 히데요시는 일이 결정된지 3개월째가 되자 히데아키를 타카카게가 머물고 있던 빈고 미하라 성[三原城]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될 수 있는 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부속 가로[付家老]도 군사(軍事)에 뛰어난 다이묘우[大名] 급 부하를 둘 골라 히데아키의 무게감을 더하게 하였다. 히데아키 본인은 단지 남이 깔아 준 궤도에 타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미하라 성에서 당주가 되기 위한 여러 의식, 행사가 끝났다. 타카카게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집안의 어른다운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오래된 가신(家臣)들은 그런 타카카게의 표정에서 씁쓸한 그림자를 찾아내어 남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저 좆병진 때문에!’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하는 자도 있었으며, 성 밑에 있는 쿄우신 사[真寺][각주:1]장노(長老) 기타츠[義達] 등도 히데아키를 배알(拜謁)한 후 몰래 일기에 적었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 가문 멸망의 조짐인가? 슬프도다 슬퍼

 1597 6 12. 
 
타카카게는 66세로 죽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영토는 치쿠젠[筑前]과 그 밖의 것을 포함하여 52 2500석이라는 큰 영지(領地)였다. 그것이 히데아키의 것이 되었다.

 상속한 후 2차 조선 침공[각주:2]이 발령되어 히데아키는 새로운 운명에 태워졌다. 원수(元帥 = 총대장)에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외정군(外征軍)일 경우 순수하게 군사적으로만 따지면, 총사령관은 토요토미 가문필두(筆頭) 다이묘우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등이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위대한 인물을 외정군 총사령관으로 만들면 전쟁터에서 외정군을 장악하여, 인망을 얻고, 명성을 얻어, 그 때문에 개선(凱旋) 후 국내 정치 체재를 변동시킬 위험이 있었다.
 하기는 당초 이에야스라는 안()도 조금은 나왔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찍이,

 졸자가 있는 한 주군(히데요시)에게 갑옷을 입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원정군 사령관의 직책을 맡겠다는…… 이것은 말하자면 이에야스의 아부(阿附)였지만, 그런 척을 하였다. 이번 해외 원정에 관해서 이에야스는 다른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그랬던 것처럼 속으론 반대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적어도 한번 정도 사령관이 되겠다는 물밑 협상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이에야스의 가신 중 하나가 그런 식의 말을 하자, 이에야스는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삐쳐서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바다를 건너면 하코네[箱根[각주:3]]는 누가 지킨단 말이더냐?”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 조금 전, 아이즈[津] 91만 여석의 다이묘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이 조선 출병 계획을 듣고,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 미쳤구나

 라고 측근에게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이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맘속으로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외정은 히데요시가 자신의 명예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것으로, 제후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1차 조선 침공[각주:4]으로 제후들의 영내(領內)는 피폐했다. 지금도 그로 인해 국고(國庫)가 비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기는 이로 인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왕년의 자기자신과는 별개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정세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전쟁터에 가지 않은 제후들에겐 인부와 돈을 염출(捻出)시켜, 후시미[伏見]의 다른 장소에 대규모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축성은 군사상의 이유가 아니라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아직 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頼]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후시미 성[伏見城]에 산다는, 말하자면 팔불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즈음부터의 히데요시는 어떤 것을 생각하건, 모든 것이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는 것이 생각의 출발점이 되어 있었다[각주:5]. 원숭이놈은 미쳤다고 가모우 우지사토가 혀를 찬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여러 불운 중의 하나가, 이러한 정세 속에서 원정군의 사령관이 된 것을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이묘우[大名] 42, 총 인원 16 3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후방인 부산(釜山)에 사령부를 두었다. 보좌역으로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함께 하였다.
 선봉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였으며, 항상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1차때와는 달리 사기가 오르질 않았고, 각 장수들 간에도 연락과 규율이 흐트러져, 위로는 다이묘우[大名] 아래로는 인부에 이르기까지 염전(厭戰) 기운이 팽배하여,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를 하였다.
 이런 전쟁터의 상황은 파견된 감찰(監察官)들에게서 곧바로 후시미[伏見]로 보고되었다. 이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받아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1차 원정 때의 감찰관[메츠케(目付)]은 미츠나리였으며, 그는 그 검단(檢斷)적인 성격을 노골적으로 발휘하여 카토우 키요마사 이하 여러 장수들의 비리(非理)(바늘로 낸 구멍 정도의 규율 위반이었지만) 공격 대상으로 삼아 하나하나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미츠나리는 성격적으로 작은 과오,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터에 나간 여러 장수들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키요마사 등은 봉록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질 정도였다. 이번 제 2차 원정에서 미츠나리는 후시미[伏見]에 있었지만, 보고서는 모두 그의 눈을 거쳐 정리된 후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갔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원정군의 현황이 맘에 들지 않았고, 어느 장수에 대해서건 불만족스러웠다.

 원정 10개월째에 유명한 울산 농성전이 펼쳐졌다. 키요마사는 고군분투하며 성을 지켜 4만의 명나라 군과 싸웠지만 식량이 떨어졌다. 급보를 부산의 총사령부로 날려 구원을 청했다.

 킨고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라며 쿠로다 죠스이는 히데아키의 이름으로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보내었고, 다방면에서 한꺼번에 진격하여 적을 역포위한 뒤 크게 싸워 적의 목을 취하길 13238급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히데아키는 처음 경험한 실전의 재미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명군 4만은 갈팡질팡하기에 바빴고 일본군은 사슴을 쫓는 사냥꾼과 같이 손쉽게 학살하고 다녔다. 히데아키는,
 
내도~’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젊은이의 성격은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제지하려던 막료(幕僚)를 채찍으로 후려갈겨 물리치고 말을 몰아서 적에게 뛰어들었다. 친위대(御馬廻りの)도 히데아키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창에 뛰어나질 못해도 좋았다. 히데아키는 미친 듯이 찔러대 13명의 적을 죽였고 자신도 피를 뒤집어 써 새빨갛게 되어서야 피로를 느끼고 이 놀이를 멈추었다.

 이 소식이 후시미에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울산성을 끝까지 지켜낸 키요마사를 포함한 3명의 장수[각주:6]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구원군인 히데아키 이하 여러 장수의 활약에도 굉장히 만족하여,

 킨고도 나름 하는구나~”

 하고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히데요시는 기뻐하였다. 기분이 좋을 때의 히데요시에게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듯한 그런 인격적 매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몇 일 뒤에 뒤바뀌었다. 이 변화는 20세기인 오늘날에는 오히려 의학(醫學)의 영역일 것이다.

 킨고는 용서할 수 없다.”

 고 갑자기 말했다. 히데아키에 대해서 새로운 떡밥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전과 똑 같은 보고서였지만 그 평가가 조금 바뀌어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바뀌게 된 것은 미츠나리의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는 생각하였다. 이 울산성 구원으로 히데아키의 인기가 오르기라도 하면 장래 히데요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히데아키의 형 뻘인 관백(白) 히데츠구[秀次]가 죽어 히데요리의 해()가 하나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히데아키. 거기에 부하로서는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진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일 것이다.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 미츠나리가 가진 유일무이한 정치적 입장이었으며, 히데요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츠나리를 총애(寵愛)하여 중용(重用)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 이외에도 요도도노[淀殿]와 그 자식에 대해, 풍토(風土)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오우미[近江] 북부 출신이었다. 요도도노는 예전에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한 북부 오우미의 다이묘우 아자이 씨[氏]의 따님으로, 즉 북부 오우미 사람에게는 신성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 중 오우미[近江] 계열은 요도도노를 중심으로 살롱(salon)을 만들었고, 그것이 규벌(閨閥)이 되어,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음과 동시에 이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면에서 주세력이 되었다.

 이에 대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오와리[尾張] 출신들은 같은 오와리 출신의 키타노만도코로[政所]와 어렸을 적부터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를 중심으로 규벌을 만들고 있었으며, 이들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적대하여 무슨 일이건 대립하였다.

 지금 조선에 건너간 장수들 대부분이 키타노만도코로 당()이었다. 이 당이 장래 히데아키를 추대(推戴)하여 히데요리에게 대항할지도 몰랐다.

 킨고님을 너무 띄어주는 것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좋지 않습니다

 미츠나리는 진언(進言)하였다. 항간에서는 칸파쿠 히데츠구의 죽음도 이 미츠나리의 참언(讒言)이었다고 믿겨지고 있었다. 미츠나리가 참언을 했건 하지 않았건 히데츠구의 몰락은 미츠나리의 정치적 견해와 히데요시의 이해(利害)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그의 몰락이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 것도 틀림없었다.

 역시…… 그런가?”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행동에 대해 미츠나리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겼다. 전군 사령관이라는 자가 손수 창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 외에도 성격이 거칠었고 막무가내인 점도 많았다.
 
히데아키에게 벌을 내려야 하나?’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무장으로써의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지 도덕상의 문제이거나 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그로 인해 싸움에 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기가 더 높아져 이겼다. 벌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벌을 내려야만 했다.
 히데아키의 행동을 살펴 보니, 양아버지인 타카카게가 정한 군제(軍制)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여, 그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장병들은 몹시 불쾌해 하고 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이 시대의 명장이었다. 가신들은 타카카게를 존경했으며, 이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병사들은 강했고 군법이 엄정했다. 그러나 히데아키가 거기에 들어간 뒤 의미도 없이 그 군제를 무시하고 있다. 죽은 양아버지를 존경하는 듯한 모습이 전혀 없었으며, 경건(敬虔)함이 전혀 없었다. 히데아키가 그러한 성격이라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고 한다. 놀랄 만큼 멍청하다고 하여도 히데아카의 곁에 나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도 있으면 어떤 막되먹은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히데아키의 존재는 히데요리의 장래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질 않을 것이다.

 역시…… 히데아키에게 치쿠젠[筑前] 52만석은 너무 크지

 히데요시는 말했다. 큰 영지(領地)와 많은 병사를 가진 만큼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려 하겠지만 조그만 땅밖에 없다면 추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아키의 땅을 거두어들이고 에치젠[越前] 15만석 정도로 하자. 거기를 어디로 할 것인지 조사해 두어라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에게 그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1. 지금은 소우코우 사[宗光寺] [본문으로]
  2.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3. 하코네[箱根 – 맵의 한 가운데 箱根山이라 쓰여져 있는 곳. 확대나 축소해 보면 대충 위치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함]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충지로 오오사카[大坂] 쪽에서 칸토우[関東]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있는 곳으로, 험한 곳이 많은 천연의 요해(要害)이다. 따라서 의미적으로 ‘칸사이[関西]의 세력에게서 칸토우를 지킨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이름. [본문으로]
  5. 역사상으론 히데요시가 성을 새로 지은 것은 지진으로 인해 그때까지 살던 성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아이를 성주로 삼는 것은, 일찍부터 아이에게 직신(直臣)을 만들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흔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2살 때 나고야 성[那古野城]의 성주가 된 것과 같이. [본문으로]
  6. 나머지 둘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오오타 카즈요시[太田 一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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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31 19: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허허.. 치쿠젠 52만이 에치젠 15만석이 됐더라면야.. 세키가하라에서의 그 참혹한 꼴도 없었겠군요;

    킨고 녀석에게도 미츠나리에게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품을 만도 했겠는데요..(그런데도 뭘 믿고 미츠나리는 킨고 녀석이 서군에 남을거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는지-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1 1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곳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칸파쿠 + 카미카타(上方)에 1개국 추가... 로 꼬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이 글에선 히데아키의 소령이 52만석이라고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후 얻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옛 영토 55만(혹은 50만석...) 카미카타에 가까워 졌다곤 하지만, 전투를 결정지은 것에 비하면 적을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말하듯이 이 때는 33만 여석 근처가 아니었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어도 일본 위키를 보면 52만석...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군요.(ㅁㅎㅎ)

    徳川家康 (関東に256万石)
    前田利家 (加賀など83万石)
    宇喜多秀家(吉備東半57万石)
    毛利輝元 (吉備西半・安芸など120万石)
    小早川隆景(筑前33万石)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なお小早川隆景死後、上杉景勝(会津120万石)が大老となり、前田利家死後、嫡子の利長がその地位を継い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바야카와 석고가 의외로 적었군요. 뭐, 많은편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모리 종가에 비하면..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8.01.03 02: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히데아키의 그릇이야 그렇다지만 다른 소설속에서의 미츠나리는 음모에 능하고 째째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 같기도..
    반면 요즈음 評도 그렇고 葵徳川3代였던가? 드라마에서는 忠義者로 나오던데...긍정적으로 보는 면도 많은 것 같아요^.^
    만약関ヶ原에서 미츠나리가 이겼다면..이라던지...
    어쨌든 미츠나리는 고지식한 점으로 자신을 파멸시켰지만 센스만점에 교양도 겸비한.. 같은 취미의 사람들이 놓고 봤을 때 흥미만점 인물인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그 봉토라는 것이 저한텐 복잡 미묘하더군요.
    종가인 모우리 가에 비하면 (같은 오대로급이지만) 적다고 할 수 있지만, 모우리 가문이 츄우고쿠 국인 연합체 중 맹주 격인 역사를 가졌다 보니, 히데요시가 이 만큼 다 니 땅~ 이라고 인정을 하여도, 동급의 다른 도자마(국인)들에겐 어쩔 수 없이 자치권을 허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직할령은 어느 정도가 되었을지...
    그에 비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아예 본거지를 벗어나 치쿠젠에 새로 영지를 하사받은 만큼, 데리고 있던 국인들을 직신화 & 영지의 직할령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52만석의 근거는 후에 기어 들어 온 쿠로다 가문이 신고한 영지가 약 50만석 근처다 보니 그리 되지 않았을지...)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깃쨩님//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방문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이시다 미츠나리는 굉장히 유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시한 히데요시의 소위 문치파 관료 조직이 조금만 덜 유능했다면,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꺼라 생각합니다.(후방 행정 보급 지원 없이 십만 단위가 넘는 인원을 움직일 순 없을테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시다 미츠나리는 패장이기에 모든 것을 뒤집어 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가모우 우지사토의 유능한 전투 집단이 그대로 미츠나리의 품에 안긴 것이나, 참언했다고 알려진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부하들도 세키가하라 때는 미츠나라 측에서 목숨을 던진 것을 보면, 현재 알려진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나 세키가하라 때와 임진왜란 전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한 것이 그다지 문제가 없는데(제가 과문한 탓일지도...), 갑자기 임진왜란 때와 세키가하라 사이에 두고 이시다에 대한 안 좋은 것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혼자 음모론 놀이 하기에도 재미있더군요.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업데이트는 일요일 즈음이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부분은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든 부분이군요.

    일단 히데아키의 봉토는 치쿠젠일국, 치쿠고와 히젠의 일부분 도합 35만7천석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긴 합니다.

    그런데, 치쿠젠은 영제국상으로는 상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일개국 만으로도 30만석强에 해당하지요. 그러면 치쿠고와 히젠을 더하지 않고도 표고 35만석에 달해버리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히데아키 이후에 입봉한 쿠로다 나가마사의 경우에는 히데아키와는 달리 치쿠고, 히젠을 제외한 치쿠젠국 1개국 만으로도 50만석 이상(52만석인가 53만석인가)의 석고거든요.

    이것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안드로메다 고무줄 석고가 되겠습니다만,

    이건 역시 태합검지라는 실시의 과도기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할 부분 같습니다.

    이 전제하에서 생각해 보면, 히데아키가 치쿠젠에 재봉하던 당시, 表高는 35만석이라 해도, 實高는 50만석 이상(60만석 까지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이후 쿠로다씨가 치쿠젠 일국에 입봉되었을 때는 검지결과가 반영되어 표고가 실고에 맞게 상향조정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니까 위 내용에서 히데요시의 독백인 "치쿠젠 52만석은 너무 많다."라는 말은 치쿠젠 검지가 끝났으나, 아직 실제 표고 상향조정은 되지 않았던 시기에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가 중에는 그래도 고증을 잘 해주는 시바 선생이 실수한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
    그런데, 제가 큐슈쪽 검지 완료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좀 뻘쭘하네요.
    단순히 쿠로다 나가마사의 후쿠시마번 52만석과 착각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시바선생의 면목을 봐서라도 검지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6 2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흐르는 돌입니다 ^^(流石)
    저는 그 쪽으론 생각도 못하고, 혹시 쿠라이리치(蔵入地)를 코바야카와 가문이 담당하기에 그런건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를 본 것 같은데 찾질 못해서(어느 책인가에 있었는데...) 생각나는데로 적었는데... 이야~ 역시 함부로 말해선 안 되겠군요. ^^ 앞으로도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6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제 리플은 거의 추리(...) 수준이어서 신빙성은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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