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일본판 北条早雲

  소우운은 센고쿠 다이묘우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들 한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낭인에서 칸토우[東]를 제패하는 거대 다이묘우까지 성장한 것이었다.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 아사쿠라 토시카게[朝倉 敏景]의 아들]는 소우운을 평하며,

 창고에 바늘을 모으는 듯이 인색하게 모으면서막상 싸울 일이 있으면 귀중한 보석이라도 깨부숴 사용하는 듯 하였다
 고 말하였다.

 

 소우운은 '소우운님 이십개조[早雲寺殿二十箇]'라는 가훈(家訓)을 남기며, 여기에서 '밤에는 저녁 8시에 취침하고 아침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몸가짐을 가다듬도록……'이라고 일상의 세세한 점까지 배려하고 있다. 소우운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노력가로 늙어서도 여전히 눈과 귀가 건강하였고, 이빨도 빠지지 않아 장년기(壯年期)와 변함없는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45살까지의 전반생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가
시나노[信濃]의 오가사와라 사다모토[小笠原 定基]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오가사와라의 가신 세키 우마노죠우[ 右馬允]가 자신과 같은 이세[伊勢] 출신으로 동족(同族)이라 말하였다. 처음에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는 이름을 썼던 소우운의 출신에 대해서 이것이 가장 유력한 근거라 평해지고 있다.

 

 또 하나 유력한 것이 쿄우토[京都] 출신이라는 것이 있다.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요직(要職)을 역임하는 쿄우토[京都] 이세 씨[伊勢氏]의 사다후지[貞藤]의 아들이라고 하며, 사다후지는 쇼우군[軍] 요시마사[義政]의 분노를 사서 낭인이 되었으며 '오우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세[伊勢]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빗츄우[備中]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빗츄우에서 쿄우토[京都]로 갔고 이어서 스루가[駿河]로 내려갔다고 한다.

 사서에 따르면 빗츄우[備中] 시츠키 군[後月郡] 에바라[江原]타카고에야마[高越山] 성주(城主) 이세 스루가노카미 사다미치[伊勢 駿河守 貞通]의 양자(養子)가 소우운으로, 키비츠 다이묘우진[吉備津 大明神]의 계시를 받아 주변 명가(名家)의 자제들과 함께 큰 꿈을 품고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현지에는 이에 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시카가 바쿠후의 기록 중에는 빗츄우 출신의 이세 카몬노스케 모리요리[伊勢 掃部助 盛頼]의 이름도 보인다.

 

 어찌되었든 출신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우운은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 義忠][각주:1]의 측실이 된 여동생의 신세를 지기 위해서 스루가로 왔다고 한다. 이 때 행동을 함께 한 6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소우운을 포함한 7명의 사무라이는 함께 칸토우[東]로 무사(武者) 수행을 하러 갔는데, 그 출발에 앞서 신수(神水)를 나누어 마신 후, “ 7명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싸우지 않겠으며, 이 중 한 명이 다이묘우[大名]라도 된다면 나머지 6명은 그의 부하가 되어 돕자는 약속을 맺었다고 한다.

  6명은 후에 '소우운님 초창기의 가로중[(早雲)寺殿草創御家老衆]'으로, 호우죠우 일족에 준하는 '어유서가(御由)'라 불리며 존중 받았다.

 

 소우운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이마가와 가문의 내분(內紛)이었다.

 1476 2.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쇼우군[軍] 요시히사[尚]의 명령으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시바 씨[斯波氏]의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서 출진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시바 씨의 잔당에게 습격 받아 죽음을 당했다. 남아 있는 아들 타츠오우[龍王=후에 우지치카[氏親][각주:2]]가 아직 어려 가신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타츠오우는 난을 피하여 모친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타츠오우는 소우운의 여동생 키타가와도노[北川殿]의 아들로 소우운의 조카였다.

 

 내란 진압을 위해서 호리고에 쿠보우[堀越公方]인 마사토모[政知]에게서 우에스기 마사노리[上杉 政憲], 오오기가야츠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에게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이 파견되었고, 소우운은 이 둘에게 중재안을 제안했다.

 이마가와의 가신들이 둘로 나뉘어 싸워서는 가문 멸망뿐 아니라 주변으로 전쟁이 확대될 뿐이다. 우선 오시카 노리미츠[小鹿 範満][각주:3]가 당주가 되고, 후에 타츠오우가 성인식을 치렀을 때 가독을 물려받게 해 달라

 도우칸도 마사노리도 이치에 맞는 이 제안에 찬성하여 중재는 성공되었다.[각주:4]

 소우운은 이 공로로 인하여 후지[富士郡] 시모카타[下方] 장원의 13고을을 하사 받아 코우코쿠지 성[城]의 성주가 되었던 것이다.

 

 소우운은 민심을 잡는데 뛰어났다.

 코우코쿠지 성주가 되자 곧바로 영내(領內)의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에게 이 영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받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존경 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소우운은 제2의 찬스를 맞이하게 된다.

 1491년에 일어난 호리고에 쿠보우의 내란이었다.

 당주 마사토모가 죽어 챠챠마루[丸]가 뒤를 이었지만, 배다른 동생인 쥰도우지[潤童子][각주:5]와 그 모친을 한꺼번에 죽인 것이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즈[伊豆] 혼란에 빠졌다.

 

 호시탐탐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우운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스루가[駿河]의 무사들을 이끌고 질풍과 같이 이즈를 침공하여 챠챠마루를 죽이고 순식간에 이즈를 점령해 버렸다.

 침공에 앞서 소우운다운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병(病)을 가장하여 이즈[伊豆] 쥬센 사[修善寺] 온천에 머물면서 나무꾼들을 불러 소문을 청취하고, 이즈[伊豆]의 지리나 무사들의 재정 상태 등 모든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것이 이즈 공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점령 후의 행정에도 소우운의 탁월한 수완이 발휘되었다.

 난을 피해 산 속으로 도망친 무사나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던 것을 그대로 허용한다고 하는 한편 만약 이렇게 해주는데도 나오지 않으면 논과 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집도 불태운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또한 소우운은 과감한 선정을 펼쳤다. 연공(年貢)을 사공육민(四公六民)으로 해서, 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받고 나머지 60%는 백성이 가지게 한 것이다. 당시의 세율로는 오공오민(五公五民)이라도 대단히 기뻐들 하였기에 얼마나 이즈[伊豆]의 백성들이 기뻐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우리 지역도 신쿠로우 님의 지역이 되었으면……”하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즈를 수중에 넣은 소우운의 다음 표적은 칸토우[東]였다.

 소우운의 칸토우 제패의 야망을 알려주는 일화로써 미시마 묘우진[三島 明神]에게 참배를 가 꾼 영몽(靈夢)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 2일의 새해 첫 꿈이었다.

 넓은 들판에 두 그루의 큰 삼(杉)나무가 치솟아 있었다. 어디선가 쥐새끼 한 마리가 조르르 달려 나와 큰 삼나무의 뿌리를 갉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쥐새끼가 점점 커져 커다란 호랑이로 변했다. 그때 꿈에서 깼다

 소우운은 이 꿈을,
 “
두 그루의 큰 삼()나무는 칸토우[
東]를 지배하는 두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6]을 뜻할 것이다. 나는 쥐띠니까 두 그루의 삼나무를 갉은 쥐는 나 자신이다. 이것은 소우운의 자손이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멸하고 칸토우[東]의 지배자가 된다는 굉장히 경사스러운 꿈이다
 
하고 점쳤던 것이다. 이것은 소우운이 꿈을 빌어 가신들에게 말한 장대한 포부였던 것이다.

 

 칸토우 진출의 시작은 오다와라[小田原] 공략이었다.

 이 작전에 앞서 소우운은 교묘한 계략을 생각해 내었다. 오다와라 성의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 藤頼]에게,
 “
우리 영지(領地)에 있는 산에서 사슴 사냥을 하였더니, 사슴들이 모두
하코네[箱根] 을 넘어 도망간 듯 합니다. 그래서 몰이꾼을 오오모리 님의 영내(領內)로 들여보내어 이즈[伊豆] 쪽으로 사슴을 몰고 싶습니다만……”

 하고 몰이꾼을 오다와라 영내(領內)로 들여보내는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사실 이 몰이꾼들은 젊고 건장한 젊은 무사들이었다. 소우운은 수백 명을 몰이꾼으로 변장시키고, 거기에 또 수백 명을 개 몰이꾼으로 보이게 하여 은밀히 죽창 등의 무기를 가져가게 하였다.

 

 1495 2.

 심야가 되어 어둠이 짙어지자 오다와라 성 밑이 내려다 보이는 이시가키야마 산[石垣山][각주:7] 하코네야마 산이 한 순간에 밝아졌다. 불이었다. 그 불이 순식간에 오다와라 성 밑까지 다가왔다. 마치 불의 파도가 덮치는 듯 했다. 이는 소우운 측이 횃불을 달아 풀어놓은 소()들이었다. 그 뒤 몰이꾼으로 변장한 무사들이 계속해서 공격하였다. 이 기습 전법으로 오다와라는 눈깜짝할 사이에 함락되었다.

 

 소우운은 오다와라를 손에 넣자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사가미[相模]를 시작으로 칸토우[東] 각지를 차츰 제압해 갔던 것이다.[각주:8]

 

[호우죠우 소우운( 早雲)]

1432년에 태어났다. 처음엔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 칭하였고, 후에 불문에 들어가 소우운안소우즈이[早雲庵宗瑞]라는 호를 칭하게 된다. 1519년 이즈[伊豆] 니라야마[韮山]에서 죽었다. 88.

  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죽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할아버지 [본문으로]
  2. 요시모토의 아비. [본문으로]
  3. 요시타다와는 사촌지간. [본문으로]
  4. 결국 타츠오우가 15살이 되어 우지치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성인식을 치렀음에도, 가독을 물려받지 못했기에 소우운은 병사를 모아 노리미츠를 죽이고 우지치카를 이마가와 당주로 세웠다 [본문으로]
  5. 이 쥰도우지가 2대 호리고에 쿠보우로 결정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야마노우치[山内]와 오오기가야츠[扇谷]의 우에스기 가문. [본문으로]
  7. 당시는 카사카케야마(笠懸山)라 하였다.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 이 산에 하루밤만에 이 산에 성을 쌓을 때 이시가키[石垣]를 가진 성을 쌓았다고 해서 이시가키야마[石垣山]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문으로]
  8. 거성은 니라야마 성[韮山城]이었다. 오다와라로 본거지가 옮겨진 것은 아들 우지츠나(氏綱) 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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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12 1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마가와 요시타다가 1473년생인데(제 기억이 맞다면), 소운의 여동생이 낳았으니, 1456년 소운 탄생설은 좀 빡빡하군요.. 흠냐..

    그나저나 혁신에소 소운 전용기술로 화우계가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요(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3 13: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즈음은 여동생이 아니라 누나라고 하는 것 같더군요(예전 여동생이라고 할 때도 배다른 여동생이라 나이가 그 만큼 벌어졌다고...) 오히려 1456년 쪽이 힘을 얻는 것 같지만, 여전히 대기만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아마래도 이 쪽이 더 드라마틱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화우소는.... 일본엔 그 전에도 예가 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라고... 쿠라카라 계곡의 전투(倶利伽羅峠の戦い)에서 역시 화우계를 이용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선 산 전체를 가득할 정도의 소를 짧은 시간에 구하기도 힘들 것이며, 소가 귀해 말로 밭을 갈던 나라이니 만큼(그 만큼 쿠교우(公卿)들은 신분의 상징으로 우마차를 끌고 다닌 것을 보면), 중국에 있던 고사를 가져다 쓴 것이 아닐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3.14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쨌든 장군님>이신 키소 요시나카 이야기군요. ㅎㅎ
    헤에케 모노가타리 읽을 때 나오긴 했습니다만, 토모에고젠에만 관심이 가서 요시나카는 듣보잡 취급이었죠. ㅎ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15 08: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사히 쇼우군]과 [어쨌든 장군님]은 묘하게 어울리네요 ^^
    확실히... 요시나카보다는 토모에고젠이 더 인지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코에이의 원평합전(源平合戦)이라는 게임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요상하게 무력이 높아서 인상적이었습죠)


 오오타 도우칸은 에도성을 축성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원래 에도성은 주가(主家)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의 거성인 카와고에 성[川越城]의 지성(支城)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후년의 에도성(지금의 황거(皇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소규모 성이었지만 자성(子城), 가운데 성(中城), 외성(外城)이라는 삼중으로 되어있고 주위에는 깊은 해자(垓子)가 둘러쳐 있었다고 한다.

 도우칸은 이곳을 30년간 거성으로 했지만 한 번도 공격 당한 적은 없었다. 성내의 저택을 죠우쇼우켄[勝軒]이라 이름 지어 여기서 자주 와카(和歌)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도우칸은 문무겸비의 명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젊었을 적에는 무()에만 열중했었다고 한다.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그 유명한 [황매화 마을(山吹)]의 고사이다.

 

 사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도우칸이 한 민가(民家)에 가서 도롱이[각주:1]를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소녀가 황매화 한 송이를 내민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우칸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 꽃을 받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노신 중에 한 명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황매화는 열매[각주:2]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에 있는 카네아키라 친왕[兼明 親王],

일곱 겹 여덟 겹 꽃이 피지만 황매화는, 열매가 하나도 없으니 슬프구나

七重八重花けども山吹みのつだになきぞしき

라는 옛 시를 이용하여 소녀는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한 것이었다. 도우칸은 이 때 소녀의 풍부한 문학적 소양에 놀라고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각주:3]. [각주:4] [각주:5]

 이로부터 도우칸은 문학의 길에도 힘을 써 ()도 발전했던 것이다. 역사서, 와카선집(和歌選集), 기록, 의서(醫書), 병서(兵書) 등 수천 권을 에도성 죠우쇼우켄에 모았다.

 

 전투에서도 와카로 인해 크게 덕을 보았다.

 1483 10.

 바야흐로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의 군세가 한밤 중에 해안에 이르러 절벽아랫길을 지날 때였다. 그러나 밀물인지 썰물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적의 복병을 두려워하여 누구도 알아보려 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도우칸이 가보지 않고 맞춘 것이다.

 옛 시에,

멀리서건 가까이서건 우는 바다의 물떼새의 노래 소리에 물이 차고 빠진 것을 안다

遠くなり近くなるみの浜千鳥、潮の干をにてぞ知る

 가 참고가 되었던 것이다. 물떼새(浜千鳥)의 울음이 멀리서 들렸기에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거슬러, 당시 칸토우[]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칸토우 쿠보우[東公方 칸토우()를 지배하는 아시카가 씨[足利氏]를 지칭][각주:6]코가[古河][각주:7]호리고에[堀越][각주:8] [각주:9]로 나뉘어져 대립하였고, 코가 쿠보우[古河公方]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와 칸레이[管領 쿠보우의 보좌][각주:10] 가문인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11]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内上杉][각주:12]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각주:13]의 두 가문]이 계속 싸우고 있었다. 칸레이 가문의 실권은 가재(家宰[각주:14])의 손에 있어 야마노우치는 나가오 카게노부[長尾 景信], 카게하루[景春] 부자(父子), 오오기가야츠는 오오타 스케키요[太田 資清], 스케나가[資長]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 스케나가가 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칸[道灌]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 것이다.

 

 1476.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 나가오 카게하루가 주가(主家)에 반기를 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더구나 이를 공격한 우에스기가 패배를 당한 것이다. 여기서 도우칸은 두 우에스기 가문[각주:15]을 도와 나가오 가문[長尾家]와 싸우게 되었다. 도우칸은 많은 전투를 경험하지만 한 번도 지는 일이 없었다. 도우칸의 가신들은,

 우리 주군은 제갈 공명의 환생이다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무패의 전력을 자랑하는 도우칸에게도 검은 음모의 그림자가 다가오게 된다.

 잠재되어 있던 야마노우치-오오기가야츠 양 우에스기 가문의 대립이 깊어지던 중, 도우칸의 주군인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가 도우칸의 명성을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 上杉]의 당주 아키사다[]에게서 모략의 손길이 뻗쳐왔다. 아키사다는 사다마사에게 밀사(密使)를 보내어 도우칸을 없애면 손을 잡아도 좋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도우칸이 주군 사다마사에게 암살당한 곳은 사가미[相模]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에서였다. 초대되어 목욕을 하던 중에 자객에게 습격 당한 것이다. 칼질을 당했을 때 도우칸은,

 당가(當家 - 오오기가야츠 가()) 멸망!”

 이라 외치고 쓰러졌다고 한다.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

 1432년 태생. 첫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후에 모치스케[持資]로 바꾸었다. 24살에 정오위하(正五位下) 빗츄우노카미[備中守]에 서임.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로 에도성의 축성자. 암살당한 것은 1486 7 26. 55.

  1. 일본 발음으로 ‘미노[みの(蓑)]’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일본어 발음으로 ‘미[み(実)]’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열매[実]와 미노[みの]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했다는 말. [본문으로]
  4. 이 이야기는 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우칸은 어렸을 때부터 ‘카마쿠라 오산[鎌倉五山 – 유명한 절 다섯 개]’에서 수행을 한 천재로, 특히 도우칸의 아버지 또한 굉장히 시에 관심을 갖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를 맺었기에 그런 환경에서 자란 도우칸에게 문학적 소양이 없을 리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노사어록(老士語録)]이라는 책에 와카가 뛰어난 늙은 여자와 도우칸 과의 이야기가 있어, 이것을 후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자신의 저서 [상산기담(常山紀談)]에서 재미있게 각색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将軍)은 종가(宗家), 카마쿠라 쿠보우는 분가(分家)가 되겠다.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의 셋째 모토우지[基氏]의 자손이 대대로 카마쿠라 쿠보우를 이어받았다. 독립지향이 강하여 자주 종가인 쇼우군 가문에게 개겼고, 이것이 후에 칸토우 분란의 원인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리지날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즉 칸토우쿠보우[関東公方]. 대대로 카마쿠라에 거점을 두었다. 카마쿠라 쿠보우의 보좌역인 칸토우 칸레이(関東 管領)가 쇼우군 가문 편을 들었기에 카마쿠라 쿠보우와는 자주 다투었다. 이러다가 5대 쿠보우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당시의 칸토우 칸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 憲忠, 야마노우치 가문 출신]를 죽인 것을 발단으로 쿄우토쿠의 난[享徳の乱]이 일어나고,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측은 시게우지의 부당함을 막부에 일러, 이에 바쿠후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칸토우 평정을 명하자 노리타다는 카마쿠라로 침공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다른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카마쿠라를 비워 두었던 시게우지는 카마쿠라를 탈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시모우사[下総]의 코가[古河]를 본거지로 삼아 이때부터 [코가 쿠보우]를 칭하게 된다. [본문으로]
  8. 카마쿠라에서 카마쿠라 쿠보우(즉 칸토우 쿠보우)를 쫓아낸 바쿠후 쇼우군(당시 아시가 요시마사[足利 義政]는, 그 자리에 개김성이 강해진 먼 친척보다 자신의 동생을 임명하고자, 승려였던 마사토모[政知]를 환속시켜 정식으로 칸토우 쿠보우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강성한 시게우지 세력과 그 시게우지와 싸웠던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가문 내에서조차 마사토모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異論) 등으로 인해서 카마쿠라까지 가지 못하고, 이즈[伊豆]의 호리고에[堀越]에 머물렀다. [본문으로]
  9. 이로 인해 이 당시는 칸토우 쿠보우가 둘이 생기는 결과가 되었다. 빽으로 바쿠후가 있는 호리고에 쿠보우, 여전히 칸토우에서 끗발이 날리는 코가 쿠보우. 둘 다 칸토우 쿠보우를 자칭했기에 구별을 위해서 ‘코가 쿠보우’, ‘호리고에 쿠보우’라 지칭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10. 카마쿠라 쿠보우를 보좌하기 위해서 바쿠후에 칸레이[管領]가 있듯이, 칸토우[関東]에도 칸레이[管領]가 두어져, 이를 칸토우 칸레이[関東管領]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우에스기 씨는 무로마치 바쿠후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 尊氏]의 외가. 초대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인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 憲顕]는 타카우지와 외사촌지간. [본문으로]
  12. 거처가 카마쿠라의 야마노우치[山内]라는 곳에 있었기에 야마노우치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초기를 제외하곤 대대로 칸토우 칸레이 직을 세습하였다. [본문으로]
  13.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먼 친척. 그래서 부하. 거처가 카마쿠라의 오오기가야츠[扇谷]라는 곳에 있었기에 오오기가야츠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우에스기 젠슈우의 난[上杉禅秀の乱]’ 때를 제외하곤 야마노우치 가문의 부하였으나, 오오타 도우칸의 활약으로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된다. [본문으로]
  14. 그 가문의 필두 중신. [본문으로]
  15.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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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3.07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지막 한마디는 좀 광오하기까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만도 한 인물이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7 2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하가 주군보다 뛰어난데 중용하는 능력이 있는 주군은 흔치 않죠. 뭐 결국 범용한 레벨의 주군이었던 듯. 호죠 소운의 반에 반만 닮았어도..쩝-_-;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kjw791 2008.03.08 0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많은 능력을 지고 있으면 견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네요. 특히 전국시대(초기지만) 부하의 모반, 배반을 보고 있으면 주군이라면.... 약간의 의심이 생기는게...쩝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8 0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이번에 이 글을 쓰려고 좀 찾다보니 원래 좀 난체 하는 부분이 있는 사람이더군요 ^^

    다메엣찌님//명문가에서 태어나 떠받들리면서 살아온 사람에게 수하의 명성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kjw791님//말씀하시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역심을 품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먼저번에 번역한 말년글에 따르면, 죽을 때 "당가 멸망"이라는 말을 외친 것은 평소부터 주군을 의심한 것 아니냐는 말이 있던데 그런 면에서 오오타 도우칸도 너무 무방비 했던 것 같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3.08 1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결점을(호색이나 술에 빠진다던가) 보여주는 꾀를 내었더라면... 오히려 자신에 대한 강한 자심감이 주군에게 위험을 느끼게 한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8 17: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 말씀대로 만약 그리했다면 먼저 자기 부하들에게 버림받았을 지도 모르죠. ^^
    (또한 당시는 그것이 무능 혹은 야망이 없음을 나타내는 대명사도 아니었을 것 같구요)

    그래서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타 도칸[太田 道灌]

1486 7 26 모살(謀殺) 55


1432 ~ 1486.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씨를 섬겼으며, 에도[江戶]에 성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오우기가야츠,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 씨간의 대립에서 주가(主家)를 위해서 무공을 세웠지만, 주군인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살해당한다. 학문, 문예를 좋아했으며, 와카[和歌] 또한 뛰어났다











잠깐 동안의 평화


 오오타 도우칸은 1485 9월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에도 성[江戶城]으로 초대하였다.

 반리[万里]는 린자이 종[臨濟宗] 소우코쿠 사[相国寺]()의 승려로 한시인(漢詩人)으로 높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을 피해 미노[美濃]에 살고 있었다.

 도우칸은 이때 54세였다. 반리[万里] 4살 연상인 58세로 두 사람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약 10개월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면서 서로 시가(詩歌)를 함께 만들었다. 도우칸에게 있어서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을 것이다.


 도우칸은 24살에 아버지 도우신[道真]에게 가독(家督)을 물려 받은 이래 30년간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의 가재(家宰[각주:1])로써 정무와 군사로 쉴 틈 없는 세월을 보내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454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각주:2]]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憲忠]가 카마쿠라 쿠보우[鎌倉 公方[각주:3]]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에게 모살(謀殺)되었고 이후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각주:4]]가 된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칸토우[関東]의 무사들을 둘로 나누어 25년간 싸웠다.

 1476년에는 우에스기 아키사다의 중신(重臣) 나가오 카게하루[長尾 景春]가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도우칸은 30차례가 넘는 야전, 공성전을 사가미[相模], 무사시[武蔵], 코우즈케[上野], 시모우사[下総]에서 전개하여 쿄우토쿠의 난[享德の乱]을 종결시켰다.


 이즈[伊豆]에서는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이 태두하여 호시탐탐 사가미, 칸토우[関東]평야를 노리고 있었다. 칸토우의 무가(武家)들 사이에서는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나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上杉 定正]에게 실망을 느끼는 반면 그에 비례해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의 명망은 높아만 갔다.


 그리고 칸토우에 겨우 평화가 방문했다. 도우칸은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와의 싸움에서 최전선기지이며 당시 비할대 없이 견고한 성이었던 에도 성[江戶城]성에서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것이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와의 시가(詩歌)


 도우칸은 어렸을 적에 카마쿠라[鎌倉] 고잔[五山[각주:5]]에서 학문을 배워 학자로서도 전도가 유망했다. 그 후 무사(武事)에 골몰하는 날들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책을 가까이 두며 시가(詩歌)를 만드는 즐거움을 잊으려 하지 않았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다음해 봄.

 55세를 맞이한 도우칸은 카마쿠라에서 켄쵸우 사[建長寺], 엔카쿠 사[円覚寺]의 시승(詩僧)들을 초대하여 반리[万里]와 함께 수미다 강[隅田川]에 몇 척의 배를 뛰어놓고 시가(詩歌)의 연회를 개최하였다. 도우칸은 또 6월에 반리와 함께 무사시[武蔵] 오고세[越生]의 산촌에 칩거하고 있는 부친 도우신[道真]을 방문해 몇 일을 함께 보냈다.

 도우신[道真]은 예전 카와고에 성[河越城]에 소우기[宗衹], 신케이[心敬]를 초대해서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河越千句]를 남길 정도인 무장 가인(武将 歌人)이었다. 은거소(隱居所) '지토쿠켄[自得軒]'에서 도우칸 부자와 반리는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시로 서로의 마음을 통하였다.


 다음달인 7월.

 반리 슈우쿠와 여전히 문()의 세계를 즐기고 있던 도우칸은 주군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초대를 받게 되었다. 도우칸은 아무 의심도 없이 에도성을 출발하여 26일에는 사가미[相模] 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암살당했다.


주군(主君)에 의한 모살(謀殺)


 도우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살해 장소도, 이유도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반리 슈우쿠 14일 후의 기일(忌日)에 기록한 제문(祭文)에는

도우칸 공()은 사가미 카스야에 있는 주군의 저택에서 칼로 인해 쓰러졌고, 혼은 날라갔다.
 고 기록되어 있어 방문한 당일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 의해 살해 된 것을 알 수 있다.


 후년(後年).

 도우칸[道灌]의 손자의 손자인 오오타 스케타케[太田 資武]가 오오타 가및 널리 전해지고 알려진 것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정설(正說)은 목욕탕 건물의 입구로 나왔을 때 소가 효우고[曾我 兵庫]라는 자가 휘두른 큰 칼[太刀] 맞았고, 쓰러지면서 '당가멸망[当方滅亡]'이라고 마지막에 외쳤다.

 도우칸이 주군의 계략에 빠져 [당가멸망]이라고 최후에 외쳤다는 것을 보면 도우칸이 평소부터 주군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 후.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가 소가 붕고노카미[曾我 豊後守]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우칸은 에도, 카와고에성을 굳건히 하며 종가(宗家)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아키사다[山內 上杉 顕定]를 쓰러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꾸짖었으나 결국 역심을 일으켰기에 주살하였다.
고 자기 변호하고 있다.


 도우칸이 죽은 후 오우기가야츠[扇谷],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上杉] 세력은 리더쉽의 결여로 인하여 칸토우[関東]의 여러 무장들의 지지를 잃었고, 이즈[伊豆]에서 침공해 온 호우죠우 씨[北条氏]에 위해 도우칸의 말대로 쇠망하게 된다.

  1. 가신(家臣) 중 No.1 [본문으로]
  2.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를 보좌하는 신하 필두.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가 칸토우(関東)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자리. 대대로 아시카가(足利) 일족이 맡았다. [본문으로]
  4. 카마쿠라 쿠보우는 바쿠후에 개김성이 짙었기에 바쿠후는 이때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시게우지 정벌을 명하였고 당시 시게우지가 다른 전투로 본진 카마쿠라를 비워두었던 틈을 타 점령. 이후 돌아 갈 곳이 잃은 시게우지는 코가[古河]로 자리를 옮겼다. [본문으로]
  5. 카마쿠라에 있는 절 중 가장 격이 높은 다섯 곳을 말함. 서열은 차례대로 - 켄쵸우 사[建長寺], 엔가쿠 사[円覚寺], 쥬후쿠 사[寿福寺], 죠우치 사[浄智寺], 죠우묘우 사[浄妙寺]. 당시 칸토우 학문의 본산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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