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데와[出羽] 전역에서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군세와 싸운 하세도우 전투[長谷堂合戦]를 그린 '하세도우 전투 병풍[長谷堂合戦図屛風]에 그려져 있는 요시아키[義光]

 야마가타[山形] 성주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이웃나라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모친 요시히메[義姫]의 오빠이다. 혈통 자체가 우월한 몸매에 뛰어난 용모를 가졌던 듯 하다.[각주:1] 후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의 용색에 반하여 오우슈우[奥州] 원정 때 쿄우토[京都]로 데려가 측실로 삼았다.

 각설하고, 요시아키의 활약은 16살 때 강도퇴치의 일화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부친 요시모리[
義守]와 타카유[高湯] 온천[각주:2]에 휴식을 취하려 갔는데, 그날 밤 강도가 습격해 온 것이다. 이때 요시미츠는 '형형한 눈빛을 하고 마치 화살이 쏘아지듯이 뛰쳐나가 날카로운 칼질로' 단번에 강도 2명을 베어 부상을 입혔고, 이어서 그 중 가장 거대한 사나이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려 제압한 후 두 번 찔러 상대가 힘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목을 베어 칼끝에 꿰어서 높이 쳐들고는 우렁차게 함성을 질렀다 한다.

 부친 요시모리는 옆 나라 다테[伊達]의 비호(庇護) 하에 있었기에 젊은 날의 요시아키가 너무나 뛰어나고 용맹한 것에 불안을 느껴 요시아키의 폐적(廢嫡)하기로 결심하고 유폐시킨다. 물론 이는 다테 가문[伊達家]의 의사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모가미 가문의 자립을 목표로 하는 요시아키를 위험하다 여겨 부친인 요시모리에게 아들 요시아키 살해를 명령한 것이다. 유폐 중의 요시아키는 이런 다테 가문에서 독립을 기원하며 주변에 있던 절 릿샤쿠 사[立石寺]에서 소원성취를 빌었다. 요시아키 23~25살 즈음의 시기였다. 요시아키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부친 요시모리를 강제로 은거시킨 후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공격하여 자살하도록 만들었다[각주:3]. 이어서 1577년에는 다테 측에 붙어있던 텐도우 성[天童城]의 텐도우 요리사다[天童 頼貞]를 공격하였다[각주:4]. 다음 해에는 남쪽으로 공세의 방향을 돌려 카미노야마[] 성을 낙성시켰으며, 또다시 북쪽의 신죠우[新庄]로 향해 마무로[] 성을 점령하여 마침내 모가미 군[最上郡] 전체를 판도에 넣었다. 1582년에는 숙원이던 쇼우나이[]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다다음 해인 1584년, 요시아키는 야치 성[谷地城]의 성주 시라토리 나가히사[白鳥 長久]를 모략을 이용해 야마가타 성으로 불러서는 살해하였다. 모략이야말로 요시아키의 진면목으로, 그는 힘으로 몰아 붙이는 타입의 무장이 아니었다.

 1587년,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하는데 이로 인해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와 험악한 관계에 빠진다. 마사무네가 쇼우나이 지방의 무토우 씨[武藤氏]의 부탁을 받아 중재(仲裁)에 나서자, 겉으로는 마사무네의 중재를 받는 척하며 방심시킨 후 불시에 대군을 이끌고 쇼우나이 지방으로 침공한 것이다.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에게 있어서는 모친 요시히메의 오빠이기에 외삼촌이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이 배신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체면이 깎였다. 이 원한을 붓으로 다 적기도 힘들다'고 말하며 마사무네는 격노하였다. 모가미와 다테 사이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사태로 번졌다. 그때 요시히메가 양국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곳에 가마를 타고 들어가 80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결국 양자의 충돌을 회피시켰다고 한다. 이때의 반감은 나중에까지 이어져, 후에 요시아키와 요시히메는 손을 잡고 마사무네 독살 미수사건으로 이어진다(다테 마사무네 항 참조)

한편 쇼우나이 지방은 강적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세력이 손을 뻗쳐왔다. 1587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전국에 영()을 내려 다이묘우[大名]들간의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였기에[각주:5], 다음 해 5월에는 모가미-우에스기 간의 항쟁을 멈추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에 우에스기 측의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가 이를 무시하고 쇼우나이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하 역자 가필================================================

 1587년. 다테 가문의 종속하에 있던 오오사키 가문[大崎家]에서 내분이 일어나, 친 다테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던 오오사키 가문의 가신 우지이에 요시츠구[氏家 吉継]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구원을 요청. 마침 다테 가문에게서 독립을 바라고 있던 오오사키 요시타카[大崎 義隆]는 분가 격[각주:6]인 모가미 가문의 요시아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비슷한 시기 요시아키는 쇼우나이를 지배하고 있던 무토우 씨[武藤氏][각주:7]의 당주인 무토우 요시우지[武藤 義氏]를 모략으로 요시우지의 부하를 이용해서 살해. 요시우지의 뒤를 이은 요시오키[武藤 義興]는 우에스기 가문의 맹장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의 아들인 요시카츠[武藤 義勝]를 양자로 받아 들임과 동시에 혼죠우와 그의 주군인 우에스기 가문의 힘을 빌어 영내를 안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쇼우나이 지방의 친 모가미 파의 호족들의 불안을 부채질하여 호족들은 일제히 봉기한다. 이를 호기로 본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 요시오키를 살해하고 요시카츠를 에치고[越後]로 쫓아 보내어 일단 쇼우나이 지방을 손에 넣는다. 이때 오오사키 가문의 구원 요청이 도착한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오사키 령으로 진격하나, 마사무네는 나카니이다 성[中新田城]를 공격 중 대패하여 중신 이즈미다 시게미츠[泉田 重光]를 인질로 바치고 겨우 궁지를 벗어나지만, 오오사키 령에 원군으로 온 모가미 요시아키의 군세와 나카야마[中山]란 곳에서 대치하게 된다. 또한 이 패배는 오우슈우 전역에 소문이 퍼져 반 마사무네 파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일제히 마사무네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위기에 빠진다.

 한편 오오사키 령에 도착하여 마사무네의 군세와 대치하고 있던 요시아키에게도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에치고로 도망쳤던 무토우 요시카츠가 지 애비인 혼죠우 시게나가와 함께, 요시아키가 마사무네와 싸우는 틈을 타 쇼우나이로 진격. 쇼우나이의 모가미 측 호족들을 물리치고 쇼우나이를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모가미 령으로 침공한다.

 서로 적들에게 침공 당하였지만 대치하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던 마사무네와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모친이며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이 대치하는 곳에 가마를 타고 와 화해를 종용. 서로 다방면에 적들을 두고 있던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된다.

======================================이상 역자 가필====================================================

 요시아키는 분노하여 히데요시에게 호소하였으나[각주:8],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는 이미 히데요시와 면식을 튼 사이였으며 더구나 히데요시 측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도 친한 사이였다. 소송은 우에스기 측이 월등히 유리했다. 요시아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통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소송에 졌다[각주:9]. 이후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서 이에야스를 통해 매[] 등을 헌상했지만, 히데요시의 태도는 냉담하여 요시아키가 쿄우토로 인사를 올리러 간다고 하여도 '그럴 필요는 없소'하며 거부하였다.

 요시아키는 더욱더 이에야스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요시아키는, 히데요시가 "조금 더 늦었다면 여기가 위험했을 것이야"라고 하며 목을 툭툭 친 다테 마사무네보다도 더 늦게 오다와라에 당도하였지만[각주:10], 이때도 이에야스가 중간에서 잘 주선해 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어 이에야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크게 갖게 되었다.

 이후 요시아키는 자기 가문의 안전을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였다.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측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에게 편지를 보내, "히데요시님을 섬기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습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였고, 오다와라 정벌을 끝낸 후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온 히데요시의 처소에 처자식을 몽땅 데리고 출사하여 히데요시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1591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 15만의 대군이 난부[南部]의 쿠노헤 마사자네[ ]를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奥州]로 왔을 때도 요시아키는 중앙의 실력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이에야스에게는 둘째 이에치카[家親][각주:11]를 가신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일종의 인질제공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다이묘우[大名]의 자식을 가신으로 한 최초의 사례였기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히데츠구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에게 눈독을 들인 것도 이때이다. 쿠노헤 정벌을 마치고 쿄우토로 돌아가던 도중 야마가타 성에 들린 히데츠구를 요시아키는 성대히 영접하며, 그 시중으로 아직 12살인 딸 코마히메를 내보냈다. 히데츠구는 그녀의 미모에 빠져 요시아키에게 청하여 쿄우토로 데려가 시첩으로 만든 것이다. 마사무네의 숙부 다테 시게자네[伊達 ]는 이를 '만천하의 비웃음거리'라고 자신의 일기에서 비난하였다.

 히데츠구의 측실이 된 코마히메는 이름도 '오이마노츠보네[お]'로 불리게 되지만, 히데츠구의 실각사건 때 산죠우 강변[河原]에서 참수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더구나 요시아키에게도 히데츠구 모반사건의 불똥이 튀어 한때는 쥬라쿠테이[楽第]에 감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히데요시 사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당연히 이에야스 측에 서 야마가타로 진군하는 우에스기의 지장(智將)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의 군세와 싸웠다. 정강을 자랑하는 나오에 군단이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지만,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전보가 전해져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너무나도 자기 가문 안전을 위해 머리를 굴린 결과가 반대의 결과로 나온다.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어있던 둘째 이에치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장남 요시야스[義康]를 살해하게 되는데, 요시아키가 죽은 뒤 이로인해 가문이 흔들려 이에치카의 아들 요시토시[義俊]의 대[각주:12]에 모가미 가문의 야마가타 번은 소멸하게 된다[각주:13].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546년생. 데와[
出羽] 야마가타[山形] 성주. 아시카가 씨[足利氏]의 일족 시바 카네요리[斯波 兼頼][각주:14]의 후손으로 요시아키는 11대째. 임진왜란 때는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이에야스[家康]와 함께 주둔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야마가타 57만석이 된다. 1614년 1월 18일 죽었다. 69세.

  1. 요시히메도 한 미모로 유명했다 한다. [본문으로]
  2. 현재는 자오우 온천[蔵王温泉]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동시대의 군기물 혹은 다테 가문의 기록에도 요시아키의 동생 요시토키의 기록이 없기에(요시토키의 이름이 처음으로 거론되는 것은 18세기 들어서라고 한다) 요시아키가 동생을 공격하여 자살하게 만든 것은 의문시 되고 있다. [본문으로]
  4. 점령은 못하고 요리사다의 딸을 요시아키의 측실로 삼는 것으로 화해. 그러나 1582년 요시아키의 삼남 이에치카[清水 義親 - 모가미 씨의 일족 시미즈[清水] 가문을 상속]를 낳고 죽어 텐도우 가문과의 동맹이 끊기게 된다. [본문으로]
  5. 이 전인 1585년에 큐우슈우[九州]지방을, 1587년에는 칸토우[関東]와 오우슈우[奥州]에 각각 선포하였다. 이것을 선포함으로써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본문으로]
  6. 오오사키와 모가미 가문의 선조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오우슈우 칸레이[奥州管領] 시바 이에카네[斯波 家兼]이다. 이에카네의 큰아들인 타다모치[大崎 直持]가 오오사키[大崎] 지방을 영유하며 '오우슈우 탄다이[奥州探題]'가 되었으며, 둘째아들인 카네요리[最上 兼頼]를 데와[出羽] 모가미 군[最上郡]에 파견하여 '우슈우 탄다이[羽州探題]'로 만들었다. [본문으로]
  7. 코에이[光栄]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다이호우지 씨[大宝寺氏]로 표현된다. [본문으로]
  8. 히데요시의 사투금지령은 1587년 12월. 혼죠우 시게나가가 침공한 것은 1588년에 들어서이기에. [본문으로]
  9.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이때 얻은 쇼우나이 지방과 나중에 이봉된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가문의 영지로 인해 분단된 상황이었기에, 세키가하라 전쟁 때 모가미 영토를 침공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그에 따른 실패로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줄어들게 된다. [본문으로]
  10. 부친 요시모리[最上 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당시 이에치카의 나이 10살로, 성인식 후 이에야스[家康]의 이름글자 중 뒷글자 '야스[康]'가 아닌 앞글자 '이에[家]'를 받은 것을 보면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았던 듯. 후에 2대 야마가타[山形] 번주가 되지만 3년만에 죽어 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본문으로]
  12. 요시아키의 넷째 아들 야마노베 요시타다[山野辺 義忠]와의 다툼 끝에. 요시토시의 그릇이나 능력에 의문을 품은 가로들이 야마노베 요시타다 옹립을 꾀하였다. [본문으로]
  13. 그후 모가미 가문은 오우미[近江]에 1만석으로 멸봉 당하나 9년 뒤 요시토시가 병으로 죽자 남겨진 아이(요시토모[義智])가 너무 어려(당시 2살) 영지는 반인 5000석으로 줄어,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다이묘우 급 직신[交代寄合]이 된다. 사족으로 에도 시대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일족을 제외하곤 최대급(57만석)의 삭탈관직[改易]. [본문으로]
  14. 모가미 카네요리[最上 兼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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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05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마히메가 히데츠구 첩인건 알았지만 이에치카를 가신으로 바쳤던건 처음알았던 사실. 자신이 행했던 업보는 결국은 자신에게나 친한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교훈을 주는 인물...... 정말 이런꼴 보고 있으면 조선이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어요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치카와 비슷한 케이스로,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바쳐졌던 구마모토 호소카와[熊本細川藩]의 2대 번주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 忠利]도 비슷한 케이스입죠. 세째이면서도 이에야스와 안면을 튼 덕분에 둘째 오키아키[興秋]를 제쳐두고 번주가 될 수 있었습죠(장남인 타다타카[忠隆]는 세키가하라 때 부인이 시어머니(가라샤)를 버리고 튄 것 땜시 폐세자)

      조선도 뭐 왕자의 난이나 영조-사도세자를 보면 비슷하지 않나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건 흑역사는 있습니다.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05 1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도를 때려잡는걸 보면 깡 있어 보이는데 반대로 가문 보전 때문에 열심히 뛰어다녔군요;;;

    뻘플로....혁신에서 요시아키 나오기전 모가미로 플레이하면 카키자키 이상으로 빡세던 기억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6척짜리 철로된 봉을 들고 다녔다고 하네요.
      위에 있는 그림 전체 화면(신역사군상17. '나오에 카네츠구' 실려있습죠)을 보면 저런 표정으로 도망치는 어떤 놈을 그 6척짜리 철봉으로 떼리고 있는 장면입죠.

      혁신에서 카키자키도 다이묘우로 등장하던가요?..라고 한자 변환하고 있으니 홋카이도우[北海道]의 그 분이셨군요. ^^

  3. 나라 2009.10.05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 친구는 정말 인생무상이더군요..(멍)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런데 시게자네가 마사무네의 숙부였나요? 사촌으로 알고 있었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리 오랫동안 비워서 죄송했습니다. ^^

      깊이 들어가면 워낙 사람 좋던 요시아키가 이놈저놈에게 땅도 많이 떼어준 것이 화근이 된 듯하더군요. 그렇게 기득권이 된 세력이 강성한 탓에 어린 주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듯 합니다.

      다테 시게자네는 마사무네 할아버지 타네무네[稙宗]의 자식 사네모토[実元]의 아들이기에 우리나라로 하면 5촌 당숙이 됩죠.

  4. 이거참 2009.10.05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이런거 보면 일본인들이 참 독종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조상들이 이런 시대를 살아와 이렇게 잔인하고 독한 인종들만 살아남는 시대가 있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의 일본인들이니 말입니다. 지금도 무의식 한켠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안 가린다는 의식이 그들의 역사적 체험과 기억으로 남아있을거라 생각하니 소름끼치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렇지도 않기는요. 부하들의 주도권 다툼에 아들 잃었다고 슬퍼했다고 하더군요.
      이 글은 요약입니다. 한 인물에 관한 것을 쓰는데 천 몇 백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덧붙여..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가히 좋지 않은 시각이십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자기 오줌으로 갈증을 풀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데도 결국 죽였던 영조가 있는 우리는 역시 그렇게 잔인한 족속인가요?

      국가존망의 위기 때 자신의 영달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충무공을 모함하고 충무공의 참모부 건물을 하렘으로 만든 원균과 같은 민족인 우리는 역시 수단방법 안 가리는 막장인가요?

      편견과 우월감은 백해무익한 감정입니다. 부디 그런 감정에서 헤어나오셨으면 하는 마음에 건방진 소리를 하였습니다. 기분 나쁘셨겠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그네 2012.11.10 0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래전 포스트의 댓글이지만 몇가지 주제넘은 첨언을 해봅니다.
      영조의 경우도 비교적 최근인 몇년전에 비밀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죠.
      몰래 음식물의 반입도 지시하였으나 모두 차단되고 심지어는 건강상태의 보고도 거짓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죽고난뒤 무척 애통해하며 힘없는 자신을 원망했다는데..
      편지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실제 역사적 사건은 인과관계가 명확치않은 복잡한 사연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벌어지는것이므로 영조 자신의 의지만이었다고 보긴 어렵겠죠.
      일본의 경우 전쟁 + 인접한 여러 쿠니와의 혈연,정치적관계가 워낙 복잡한데 가신들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도 무시못하니.. 다테의 경우도 그렇고 그런 비극이 많을 수 밖에 없겠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은 어느나라나 비슷할것같습니다. ^ ^

      발해님 포스트 즐겁게 읽고 갑니다. 'ㅇ'¥

  5. 나라 2009.10.06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전국시대의 일본들인은 조선인들보다 잔인하기야 하겠습니다만. 에도 막부 시절이 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돈이 없어 칼을 팔고 타케미츠를 들고 다니는 30석 사무라이 모습을 그린 야마다 쇼지 감독 영화가 생각나네요.
    권력투쟁에 있어 잔인하게 끝나지 않은 예가 얼마나 될까요? 일본인들이 특별나게 잔인한 게 아니라, 그런 예가 드물 것 같은 걸요. 조선시대 당파 싸움도 끔찍한 결과를 낳았었습니다. 몽고나 중세 유럽, 혹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의 잔인함은요? 남아공의 샤카, 아메리카 제국끼리의 전쟁, 심지어 뉴기니나 에스키모인들은 규범에 맞지 않으면 그냥 죽여버리는 걸요. 굳이 오래 내려가지 않더라도 한국전쟁 시기의 한국인들은 아귀인가요? 일본을 구석기 시대로 돌릴 뻔한 미국은요? 영국과 독일의 2차 대전은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가시는 것 자체가 그렇게 싫어하시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악독한 일본인의 모습을 닮아가시는 것 같네요.

  6. 맹꽁이서당 2009.10.06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몰랐던 다이묘 한 명 또 알고 갑니다. ^^ 57만석이라는 거대한 번이 소멸한 것이 안타깝네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우에스기와 싸웠던 가문이었군요. 저는 아직도 세키가하라 전투의 방아쇠를 당겼으면서도 도쿠가와 가문과 한판 제대로 붙지 않은 우에스기 가케카쓰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에서는 모가미나 다테 가의 배후 습격이 두려웠다... 고 했는데, 그럴거면 아예 시작하지를 말던지.. --a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늦었지만 추석 잘 쇠셨길 바랍니다 ^^ 그러고보니 2016 올림픽은 리오데자네이루가 되었더군요. 남미 첫번째라는 상징성이 있으니 명분에서는 네 도시 중 가장 컸지만, 실제로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a

    아, 새 블로그는 무기한 연기하고 있습니다. 번역이란게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세키가하라 때의 우에스기 군의 행태는...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결전이 하루만에 끝난 것이 아니고 더 길어질 것이라 예상한 것이라고.

      모가미 가문으로 인해 분단된 영토를 하루 속히 연결하여 다시 침공해 올 이에야스에 대한 대비하던지,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졌다면 그 길로 칸토우로 침공했을 때를 위한 후방 안전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몰라도 불온한 시기에 쇼우나이[庄内]와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영토로 분단되어 있는 우에스기는 필연적으로 모가미 령을 침공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 다테 마사무네도 장기간 펼쳐질 것을 대비하여 오우슈우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같은 동군 계열인 난부 가문에 반란(와카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이용. 후에 이에야스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 한 마사무네가 암살)을 일으키기도 했습죠.

      조금 씩이라도 미리 해 놓는 편이 오히려 빨라지더군요.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

  7. ulanfu 2012.11.10 0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모술수와 암살,이간으로 점철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간악하고 비정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실제 가독을 물려받았을땐 무력을 사용할수도 없는 처지였고(친다테파들이 워낙 많은 상태여서)
    본인이 전쟁에 의한 피해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저런 간악한 인물에게 내통하거나 자기 주군을 배신하는 행동을 하진 못할겁니다 여하튼 배신이건,이간책이건 자기위하의 가신들에겐 굉장히 후한 군주여서 일개 항장에게도
    몇만석씩 녹봉을 줄정도로 관대한 군주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결과 지나치게 새력이 큰 가신들의
    모반으로 개역당하게 됩니다만... 실제 야마가타현은 현재에도 일본제일의 곡창지대고
    전국시대때도 사카이와 비견할정도로 사카다 지방의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가미직속 50만석포함 가신들의 녹봉을 다 합치면 50만석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요시아키가 죽기전엔 모가미계 무사들의 녹봉은 총 100만석을 넘겼다고 합니다

 1974년 10월.
 338년 만에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의 유체가 햇볕을 쬐었다. 센다이 시[仙台市] 즈이호우 전[瑞鳳殿] 터에 있던 묘의 석실이 발굴된 것이다. 백골화되어 있긴 하여도 거의 완전한 상태로 이장되어 있었다. 골격으로 추정하면 마사무네는 보통 몸집에 보통 키[각주:1]로 코가 높았으며 이외로 상냥한 얼굴을 한 현대적인 생김새였다고 한다. 그것은 저 권모술수의 화신과도 같은 센고쿠의 맹장이 가진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외눈이었는지 어땠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가면 유골로 복원한 다테 마사무네의 얼굴을 볼 수 있다(가장 하단))

 마사무네라 하면 '독안룡[独眼竜]'이라는 이명[異名]으로 더 유명[각주:2]하다. 5살 즈음 앓은 천연두로 인하여 오른쪽 눈이 멀었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는 자신의 추한 용모 때문에 극단적인 콤플렉스에 빠져 우물쭈물하고 자기비하가 심한 꼬꼬마였다. 마사무네 다음으로 태어난 '지쿠마루[竺丸]'가 수려한 외모에 똑똑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었기에 더 비교당하여 친어미에게조차 미움을 받았다.

 마사무네의 어렸을 적 이름[幼名]은 '본텐마루[梵天丸][각주:3]'였다. 모친은 같은 지역인 오우슈우[奥州]의 호족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여동생으로 '요시히메[義姫]'라 하였다. 이 모친은 추하고 어두운 본텐마루를 싫어하고 동생인 지쿠마루를 편애하였다. 남편 테루무네[輝宗]에게 몇 번이나 본텐마루를 폐하고 지쿠마루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친정 오빠인 모가미 요시아키와 짜고 마사무네를 독살까지 하려고 하였다. 친어미에게까지 미움 받았기에 본텐마루는 한층 더 열등감의 포로가 되어 성격도 삐뚤어졌음에 틀림이 없다[각주:4].

 그런 마사무네를 구한 것이 젊고 혈기왕성한 교육담당 '카타쿠라 코쥬우로우[片倉 小十郎]'였다. 후에 다테 가문[伊達家]를 짊어지고 있다는 평판을 받으며 중신[重臣]이 된 인물이다. 카타쿠라는 마사무네가 천하의 영웅이 될 인물이라며 계속 격려하였다.

 또 한 사람. 본텐마루의 강력한 지지자가 있었다. 부친 테루무네였다. 11살의 본텐마루에게 성인식을 치르게 하였을 때 '마사무네'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 이름은 다테 가문 9대 당주 다이젠노다이부[大膳大夫] 마사무네의 이름이었다. 문무에 뛰어나 다테 가문을 융성으로 이끈 영광스런 이름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부친 테루무네가 얼마나 본텐마루에게 기대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각주:5].
 테루무네는 1584년 41살의 나이에 가독[
家督]을 마사무네에게 물려주었다[각주:6]. 과감한 은퇴였다. 무엇보다 부인 요시히메를 중심으로 지쿠마루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테루무네는 은거를 선언함과 동시에 요시히메와 지쿠마루를 데리고 모가미 가문과의 국경 가까이에 있는 코마츠 성[小松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다테 가문의 본거지는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에 있었다.

 1584년 당시 중앙 정세는 센고쿠[戦国] 군웅할거의 시대가 끝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뒤를 이어받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의해 천하통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우호쿠[東北] 지방은 여전히 모가미, 다테, 오오사키[大崎], 소우마[相馬], 아시나[芦名], 니카이도우[二階堂], 타무라[田村] 등 여러 호족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런 정세 속에 오오우치 비젠[
大内 備前[각주:7]]이라는 소호족이 다테 가문을 방문하였다. 예전엔 다테 가문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아이즈[会津]의 아시나 가문이나 히타치[常陸]의 사타케 가문[佐竹家]과 친분을 나누고 있는 인물로, 마사무네의 가독상속을 축하하러 인사를 올리러 온 것이다. 요네자와에 저택까지 세워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아시나의 첩자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분노한 마사무네는 흑막 아시나 토벌을 결심하였다. 또한 가문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시키고 싶었다. 1585년 8월, 다테의 군세는 오오우치 비젠이 지키는 오데모리 성[小手森城]을 습격하였다. 아시나나 니혼마츠[二本松]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畠山 義継][각주:8]가 오오우치 편을 들고 있어 고전하였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오오우치의 군세가 기세를 타고 성 밖으로 나온 그 순간을 민감히 캐치했다. 단번에 수 많은 총격을 쏟아 부었고, 다시 성안으로 도망가려는 오오우치의 군세에게 모든 총포를 집중시켰다. 성 측은 무너졌다. 대장 오오우치 비젠도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마사무네가 오데모리 성을 공략한 뒤 행한 처치가 참혹했다. 항복한 노약남녀 800여명을 남김없이 학살한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의 공포를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후 오오우치와 손잡았던 니혼마츠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가 다테 가문에 엄청난 재앙, 마사무네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항복하여 용서받은 요시츠구가 그 감사에 대한 인사를 드린다는 핑계[각주:9]로 미야모리 성[
宮森城]의 테루무네를 만나러 왔을 때의 일이다. 이날 1585년 10월 8일, 마사무네는 매사냥을 하러 나가있었다. 마사무네가 없는 틈에 생긴 사건이었다.
 테루무네와 회견이 끝나자 요시츠구는 돌아가기 위해서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까지 가는 길은 대나무 울타리가 양쪽에 늘어선 좁은 길이었다. 그 좁은 길을 요시츠구의 가로[
家老] 3명이 앞장서고 그 뒤를 요시츠구, 테루무네, 테루무네의 부하들이 뒤를 이었다.
 대나무 울타리 밖으로 나왔을 때 요시츠구와 가로 3명이 테루무네를 향해서 땅에 손을 대고 절을 하였다. 그 순간이었다. 요시츠구가 벌떡 일어나 갑자기 테루무네를 붙잡고 칼을 빼 들어 테루무네의 목에 갖다 대었다. 다테 가문의 가신들은 놀라 노성을 지르긴 하였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테루무네를 인질로 잡은 요시츠구 일행은 유유히 걸어가 말을 타고 자신의 영지 니혼마츠를 향해서 도망쳤다.

 사태를 듣고 달려온 마사무네의 눈에 요시츠구에게 잡힌 부친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여기서 부친을 적에게 빼앗기면 다테 가문의 패배였다.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각주:10] [각주:11].
 마사무네의 명령에 철포가 불을 뿜었다. 요시츠구는 이때 테루무네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배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각주:12]. 마사무네는 하타케야마 일행 50여명을 남김없이 죽이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요시츠구의 시체를 난자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길가에 세워 모욕 주었다.

 이렇게 19살의 마사무네는 이후 가문에서 완전한 독재권력을 쌓아 23살인 1589년에는 아이즈 4개 군[], 센도우[仙道] 7개 군[]을 정복하여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해인 1590년, 다테 가문에 있어서 두 번째인 더구나 중대한 위기가 닥친다.
 당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小田原]의 호우죠우 가문[条家]를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마사무네에게도 참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우죠우와 히데요시를 저울로 재고 있던 마사무네는 즉답을 피했다. 거기에 운 나쁘게도 히데요시에게 속한 아시나 가문을 공격하여 히데요시의 힐문을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분노할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오다와라에 가면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이제 취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 사[
] 속에서 생[]을 찾는다.
 이것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마사무네의 오다와라 참전은 결정되었지만, 출발 바로 전날 친모인 요시히메가 마사무네를 독살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해독제를 복용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건은 동생 코지로우(
小次=지쿠마루)를 편애하여 옹립을 꾀한 모친의 음모였다. 마사무네는 후환을 끊기 위해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칼로 찔러 죽였다. 그날 밤, 모친은 친정인 모가미 가문으로 도망쳤다[각주:13].

 어쨌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알현함에 앞서 장례식 때 쓰는 끈으로 머리를 묶고 갑주 위에 흰 마[]로 된 겉옷[陣羽織]이라는 사자[死者]의 복장으로 참진하였다. 마사무네의 목숨을 건 연출이었다. 거기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나 히데요시의 비서실장 격인 야쿠인 젠소우[薬院 全宗]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게 부탁하였다. 효과가 있었는지 용서받아 새로 점령한 아시나의 영지는 몰수당했지만 70여만석은 안도[安堵]되었다.

 그 후 마사무네는 또다시 히데요시의 힐문을 받게 된다. 근린에서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을 뒤에서 선동했다는 죄상이다[각주:14]. 이때도 마사무네는 사자[死者]의 복장을 몸에 걸치고 거기에 더해 금박 입힌 십자가를 행렬의 맨 앞에 세우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반란을 선동했다는 증거서류의 사인[花押]이 거짓이라고 주장[각주:15]하여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동군에 속하였고 이해(1600년) 12월부터 센다이[仙台]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다음 해 4월에 그곳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마사무네는 기독교에 흥미를 느껴 1613년에는 가신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 常長]를 저 먼 이국 로마에 파견하여 교황에게 오우슈우 왕[奥州王] 마사무네의 국서를 헌상하고, 선교사 파견과 에스파냐와의 통상[通商] 알선을 의뢰하였다[각주:16].

 정치적인 모략으로 가득 찬 효웅이었지만 시인적인 재능도 발군이어서 한시[漢詩] 30수, 와카[和歌] 275수를 남겼다. 소년시대의 암울했던 일상이 그의 문학적 교양을 키웠을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567년생. 1584년 데와[
出羽] 요네자와[沢] 성주. 1591년 이와테사와 성[岩手城] 51만석.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우에스기 군[上杉軍]과 싸웠다. 1636년 5월 24일 죽었다. 70세.

  1. 당시 기준. 159.4cm. [본문으로]
  2. 에도 시대[江戸時代] 유학자 '라이 산요우[頼 山陽]'가 붙인 이름이다. 여담으로 라이 산요우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말로 유명한 '적은 혼노우 사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는 말을 만든 사람으로도 유명. [본문으로]
  3. 모친 요시히메[義姫]가 '문무에 뛰어나고 충효의 마음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길 바란다'며 유명한 슈겐도우[修験道]의 수행자에게 기도를 부탁. 그 수행자는 유도노 산[湯殿山]에 올라가 기도를 올린 후 증거로 유도노 산의 온천물을 먹인 고헤이[御幣]를 가지고 와서 모친의 침실에 놓았다. 그 효험인지 요시히메는 태몽으로, 어느 신선이 자신이 머물 곳으로 요시히메의 뱃속을 빌리며 그 댓가로 고헤이[御幣]를 요시히메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마사무네는 어렸을 적에 저 '본텐마루'말고도 '고헤이사마[御幣様]'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여담으로 슈겐도우에서는 '고헤이'를 '본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일화로는 저 삐뚫어진 마사무네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마사무네가 찌질이 짓을 벌임 -> 당한 사람들이 에도 막부에 제소 -> 막부 관료들은 '마사무네니까 어쩔 수 없음'하고 용서 -> 그런 전말을 보던 이 또한 찌질함이 둘째라면 서럽다는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어처구니 없다며 혀를 참.... 식의 이야기가 몇몇 있는데 대부분 정형화된 패턴인지라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궁금. [본문으로]
  5. 다테 가문은 11대 당주부터 성인식을 치를 때 당시의 쇼우군에게 청하여 이름 한자를 물려받았다[一字拝領]. 16대 당주 '테루'무네['輝'宗]의 경우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이며, 마사무네의 할아버지이며 15대 당주 하루무네[晴宗]는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글자를 물려받은 것. 마사무네가 성인식을 치를 즈음엔 쇼우군 요시아키[義昭]가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하고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요시아키 건재했다면 마사무네가 아닌 '아키무네[昭宗]'였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6. 이로써 마사무네는 다테 가문 17대 당주가 되었다. [본문으로]
  7. 오오우치 사다츠나[大内 定綱]. [본문으로]
  8. 영지가 니혼마츠[二本松]에 있어 니혼마츠 요시츠구[二本松 義継]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9. 용서는 받았지만 요시츠구의 영지 대부분을 마사무네에게 몰수당하여 그로인해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0. 다테 가문의 기록이 아닌 다른 가문의 기록, 즉 아이즈 번[会津藩]의 기록으로 1672년 간행 된 会津旧事雑考에는 따르면, 마사무네가 지 아비가 있는데도 공격하려는 낌세를 캐치한 요시츠구가 먼저 테루무네를 찔렀고, 그것을 본 마사무네가 공격하여 요시츠구와 그의 무리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또한 아키타 번[秋田藩]의 기록으로 1698년 간행 된 奥羽永慶軍記에는 마사무네 측의 총격으로 테루무네까지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2. 잡힌 테루무네가 시게자네[伊達成実]에게 '주저말고 쏘아라. 나를 걱정하여 가문의 창피를 남기지 마라'고 하여 그 낌세를 눈치 챈 하타케야마 측이 테루무네를 먼저 찔러 죽였고, 그 모습을 눈 앞에서 본 다테 측의 공격에 하타케야마 측이 몰살되었다는 것은 다테 가문의 정사 [治家記録]와 [成実記]에 나오는 말. 이 기록에 따르면 마사무네는 사냥터에서 납치 사태를 듣고 이쪽으로 막 오고 있던 중으로 마사무네는 이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다테 가문의 정사 治家記録에 실린 것이라고 하나, 실제로 요시히메는 그로부터 4년 뒤인 1594년에 요시아키에게로 갔다. 모가미 가문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이트( http://mogamiyoshiaki.jp/ )에 따르면, 마사무네는 자신을 반대하는 파벌이 코지로우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막기 위해 연극을 하였고 그 결과 동생까지 죽인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비밀리에 행해진 것이기에 그 동안 모친은 몰랐고 모친은 4년 뒤에나 이 사실을 알고 친정으로 떠난 것이 아닌가 - 고 하고 있다. 실제로 그 4년사이에 마사무네가 자기 엄마에게 선물이나 편지를 보낸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한다. [본문으로]
  14. 소네 시로우스케[曾根 四郎助]라는 자가 마사무네의 반란선동 편지를 바쳤다고 한다. 소네의 부친은 테루무네의 죽음에 순사[殉死]하였지만 그 댓가로 아무 것도 받지 못하였기에 마사무네를 원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자신의 사인에는 바늘로 구멍을 뚫지만 증거서류에는 구멍이 없기에 자신의 것이 아닌 위조된 것이라 주장. [본문으로]
  16. 결과는 실패. 이미 유럽에선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가 기독교 탄압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던 상태라 백안시 당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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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kyblue 2009.08.12 2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오슈라는 곳에서 60만석이라는게 가능했었는지 묻고싶습니다.

    당시 오슈라면 미개발지역이 많았을텐데요.

    그러고보면 관동8주의 도쿠가와가 250만석, 에치고-아이즈합해서 우에스기가가 120만석이라는 것도 좀 이해가 잘 이해가 안되네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2 2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능합죠. 므츠[陸奥] 지역만 하더라도 태합검지 때 170만석 가까이 되었으니까요.

      미개발인 것도 있지만 신고 안하고(그럼 세금 안내도 되니까요) 그냥 경작하는 지역도 많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해가 안 가신다는 것은 어떤 것이 이해가 안 가시는 것인지... 보통 땅은 평야가 많은 곳이 석고도 높더군요. 시나노[信濃]는 오와리[尾張]보다 몇 배는 더 크지만 태합검지로는 오와리 57만석에 시나노 40만석. 아무래도 산지가 많으면 적습니다.

      우에스기[上杉]가 아이즈[会津]로 옮기면서 에치고[越後]의 영지는 몰수됩니다(몰수라고 하니 부정적 어감이 강하군요.) 에치고는 호리[堀] 가문 외에 여러 가문이 들어와서 차지하게 되지요.

  2. shiroyume 2009.08.12 2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고쿠가 꼭 쌀생산량은 아니지 싶은데...예를 들어 막말의 조슈는 생산량을 100만석 이상 상회했다는 말도 있고...

    잘 봤습니다. 사실 거의 다 아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보니 다시 한 번 생각나네요.

    무엇을 위한 수고였던가..흔히 말하는 천시, 인화, 지리 중 하나라도 빠지면 대업을 이루기는 힘들다는 말이 생각나는 인물....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2 2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본은 쌀 생산량입죠. 다른 작물도 그 작물로 어느 정도 쌀을 살 수 있느냐로 변환되고요.

      쵸우슈우[長州]가 100만석이나요? 무라타(村田) 덕분에 70만석 중반까지 갔다는 이야기는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것 같습니다. 대충 보기에 지리와 인화는 어떻게 갖추어 졌던 것 같던데 천시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3. ckyup 2009.08.13 0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테....는 뭔가 일을 저질를것 같으면서도 2%부족한 인상을 주는 인물인것 같습니다, 대망에서요. 전 이 친구하고 모리 데루모토(?) 하고 항상 헷갈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3 0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뭔가 꾸몄다간 항상 걸리기나 하고 말입죠. 역시 오우슈우[奥州]가 그의 한계였나 봅니다.

      미음(ㅁ)이 두 개씩 들어가서 일까요? ^^ 저도 예전엔 일본 이름 익숙치 않아서 헷갈리는 것이 많아서 한자음 그대로 읽기도 했었습죠. 오다 노부나가는 직전신장..이라던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풍신수길..이라던가..

      여담이지만 "꽃의 케이지"의 해적판인 "비룡문"에서 번역자가 재미있게 이름을 붙여 놓았더군요.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시다 삼성!!
      나오에 카네츠구는 나오에 겸속!!

    • ckyup 2009.08.13 2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름도 비스무리하고, 또 너구리 바로 다음으로 힘은 있어보이지만 화끈하게 일한번 저질러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런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죠. 화끈하게 못하는 면은...

      그래도 모우리 테루모토는 오오사카 농성전에서 비밀리에 오오사카 측을 지원한 '사노 도우카 사건[佐野道可事件]'까지 일으켜서 맘 속으론 이에야스에 대한 개김성은 끝까지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점이 마사무네와 쪼금 다르다면 다르달까요..

  4. 나라 2009.08.13 1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테 마사무네.. 그래도 그 동네에선 제법 크게 자란 사람 아닙니까. 나름.
    오사키-카사이 반란도 걸리고, 가모에게 시비한 것도 걸리고, 나중엔 이것저것 다 걸리지만.

    그래도 교활하게 넘어간 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저래뵈도 천하의 부장군 아닙니까.

    개인적으론 NHK에서 했던 다테 마사무네 사극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그 어감은 멋있는 것 같습니다.
      "천하의 부장군"

      오~ 보셨나요?
      NHK 대하 드라마 사상 최고의 작품이라는데... 아직 접해보진 못했습니다. 여담으로...어느 작품에서건 다테 마사무네 역을 맡는 사람은 언제나 와타나베 켄[渡辺 謙]과 비교당한다고 하더군요.

  5. ray201 2009.08.13 14: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어쩜 그리 세세히 잘 아셔서 쓰는지? 늘 감탄, 또감탄.
    "이시다 삼성! 나오에 겸속!"은 걸작 중 걸작 같군요.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참 인상적이었죠.
      우에스기 경승[上杉 景勝]이라던가, 오쿠무라 위문[奥村 助右衛門]이라던가...

  6.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8.13 18: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무쌍인지 무쌍오로치인지 기억은 안나지만...모가미가 위험에 처하자 삼촌이랍시고 구하러 뛰어가던걸 생각하면 (게임이지만서도...) 실은 독살 계획까지 같이 짜고 있었다니 ㅎㄷㄷ

    그리고 여담이지만 저는 소우마하고 아리마하고 헷갈리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란의 시대야 육친이고 뭐고 없을테니까요.

      저도 일본 고대 인물들 이름 들어가면 헷갈리더군요. 역시 뭐든 많이 접해서 익숙해지는 것이 상책인 듯 싶습니다.

  7. 맹꽁이서당 2009.08.14 1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테 막부가 성립되었으면 지금 일본의 수도는 센다이가 되어 있을까요? ^^ 다테가문이 원래부터 오슈에 자리잡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전국시대 말기를 거치면서 원래 영지를 지킨 가문도 거의 없어진 모양이네요.

    상관없는 얘깁니다만, 미소녀 피규어 사진 찍어올리는 것도 흥미가 떨어지고 해서 가을 쯤 이글루스에 새 블로그를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고전 목록이랑 미흡하나마 역사 관련 서적을 하나 옮겨볼까 해요.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시카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를 세운 아시카가도 그다지 연고성 없는 쿄우토[京都]에 바쿠후를 세운 것을 보면 꼭 센다이에 세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담으로 다테씨는 막말유신 사이에 '오우우 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에서 결국 쇼우군[将軍]이 됩지요. 이름도 '칸토우 곤 세이이타이쇼우군[関東 権征夷大将軍]'에 센다이 번주 다테 요시쿠니[伊達慶邦]가 임명됩지요....뭐 어디까지나 구상이었지만요. ^^

      陸奥나 出羽나 일본 옛 사람들은 싸그리 奥羽라고 한 것을 보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습니다.

      오!!!! 기대 만빵하고 있겠습니다. 좌표 꼭 찍어주시고요!!

      지도편달은요...오히려 절 많이 가르쳐 주시느라 피곤해 하실 듯.

  8. Favicon of http://wwangel.tistory.com BlogIcon 폭주천사 2009.08.14 1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무장에 대한 이런 자세한 글을 처음 읽는군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만화 "사무라이 디퍼 쿄우"와 애니메이션 "전국 바사라"에 주인공으로 나온 인물이라서 더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테 마사무네는 정말 여러 창작물에서 활약하더군요. 뒤 늦은 천하인이라던가 잘생기고 패셔너블 했다는 점이 지금도 인기의 원천인 것 같습니다.

  9. 나라 2009.08.14 14: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 사극에서도 천하인이라기보단 살아남기 급급한 다이묘... 눈치 하나는 정말 죽여주더군요. 그리고 온갖 모략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수법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난부령을 침범하는 일만 안 저질렀어도 100만석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아. 역시 이에야스가 무슨 핑계를 대서든 안 줬을려나요. 나중에 영 딴판없는 이요 10만석이나 하나 덜렁 주니..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9: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재미있을 것 같군요. 그 큰 덩치로 빠져나갈 궁리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

      얻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땠을지... 대신 그의 사위이자 이에야스 6번째 아들은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 忠輝]에게 75여만석을 주니(뭐 한꺼번도 아니고 차츰차츰이지만요) 마사무네로서는 만족했을 지도 모르죠.

      이야~ 10만석이라도 준 것은 그나마 다행입죠. 더구나 저 우와지마 번[宇和島藩]은 사현후 중 하나인 다테 무네나리[伊達 宗城]가 나오니 그건 그것대로 다행이 아닐지.

  10. 朴先生 2009.08.17 0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래 전국무장 100화 중 보기드물게 많은 댓글이 달린 편이로군요.
    과연 다테 마사무네~!!!

    애꾸눈은 상당히 컴플렉스였나 봅니다. 외눈이 되고 무려 65년 동안이나..
    자기비하가 심한 꼬꼬마 시절에다가, 죽을 때는 초상화에 외눈으로 그리지 말라고 했던 걸 보면 말이죠.(모든 걸 초월한 나이련만) 그렇지만 현대에 와서 많은 창작물에서 활약하는 건 마사무네의 성격이나 실력도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외눈박이 눈' 때문이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왠지 희소성 있는 유니크한 간지이지 않습니까? ^^
    그렇게 생각하니 좀 웃기네요. 본인한텐 커다란 컴플렉스였는데, 후대 사람들한테 그게 주요하고 멋진 이미지라니요. 뭐 애꾸눈이 뭐가 멋지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어느덧 전국무장 100화도 56번 째 편이군요.
    '천 지 인'이 끝나기 전까진 나오에 카네츠구 편을 볼 수는 있겠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7 09: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사무네 정말 인기 좋더군요. 요즘 게임을 하지 않는 저조차도 파란 陣羽織하고 노란색 달이 걸친 투구, 거기에 육도류(원피스의 조로의 두 배)가 자주 눈에 밟힐 정도로 이곳저곳에 출연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말씀하신대로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오에 카네츠구는 92번째로 실렸습죠....저도 이 책을 처음 번역할 때 천지인 하는 동안 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만...지금 페이스로 보아서는 무리 ^^

  1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08.20 1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심적인 능력이 발달되는 것 같아요.
    마사무네는 대표적으로 그런 류의 인물인것 같습니다.

    가타쿠라라는 가신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슈의 패자는 다른 가문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20 1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뛰어난 No.2의 존재는 확실히 조직이 돌아가는데 원활히 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보다 뛰어난 No.1이 있을 때에 한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백락일고(伯樂一顧). 부하는 주인이 뛰어나야지만 비로소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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